2024-06-02 주일 설교말씀 / 유근재 목사(주안대학원대학교 총장)
말씀 : 역대하 7:14, 출애굽기 33:18-23
제목 : 잃어버린 우리의 얼굴을 찾을 때까지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렘 29:12-13)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셔서 저희 가운데 생명 주시고, 또 빛 되어 주시고
저희 나그네길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따라서 살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오늘 저희가 원근각처에서 저마다의 삶을 살다가 이제 주님의 전에 나왔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모든 세상의 것들은 다 십자가 앞에 묻어두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에 오직 예수의 피에 젖은 복음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저희 죄를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을 만나 뵙기를 원합니다.
주님, 부족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섰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마음과 모든 죄악은 십자가 뒤로 감춰주시고
오직 이 전에서 성도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꼭 필요한 말씀들이 흘러넘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우리 주안교회를 사랑하시는 주님, 이 지역이 복음이 처음 들어온 지역으로서 주님께서 앞으로도 이 교회를 통해서
인천 지역을 통해서 우리나라를 살리고 성령께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 더 많은 것들, 더 위대한 것들,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것들이 이 교회와 이 전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특별히 선교적 교회로 수많은 교회들을 살리고, 수많은 목회자를 살리고,
수많은 선교사들을 살려내며, 수많은 선교사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교회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마치는 시간까지 주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실 줄을 믿사옵고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성령님께서 이 자리에 계십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역대하 7장 14절 말씀과 출애굽기 33장 18-23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얼굴에 관한 성구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몇 가지를 제가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시편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편 31:1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구절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굴이 갖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했어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면 죽는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 제가 다섯 구절을 읽어드렸는데, 그 구절 가운데서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세요.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을 하셨을까?
오늘 저는 설교 제목은, 제가 설교 제목을 찾은 건 아니고요. 'C.S.루이스'라는 탁월한 기독교 변증학자의 책에서 따 왔습니다.
C.S.루이스는 탁월한 언어 전달자이며 기독교의 변증가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C.S.루이스의 책을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박사 과정을 영국의 버밍엄 대학이라는 곳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버밍엄에서 공부를 할 때, 1년 정도 옥스퍼드 대학에서 방문 학생으로 연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C.S. 루이스라는 사람을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에게 영향을 준 두 거장이 있었는데, 한 분은 C.S. 루이스라는 작가이고,
저분은 옥스퍼드대학교의 영문과 교수였으며,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였습니다.
'순전한 기독교'라든지, 여러분이 영화로 들어보셨던 '나니아 연대기'라든지
그런 책들을 썼는데, 이분이 했었던 일들은 기독교의 색채가 드러나지 않는 스토리를 기독교의 사상을 집어넣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성령을 만나기를 요구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그냥 원색적으로 단도 진입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지만,
C.S. 루이스처럼 복음을 포장을 해서 그 안에 내용의 중심 사상을 숨겨놓고 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가장 사랑했던 책은 '나니아 연대기'나 '순전한 기독교'나 '천국과 지옥의 이혼' 이런 책이 아니었고,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찾으라"고 이야기한 것의 모티브를 따서 본인이 이 책을 썼습니다.
성경에서 '얼굴'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체의 일부를 우리는 나타낸다고 생각을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 회개와 용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얼굴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성경은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얼굴을 만난다는 것, 낯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것을 말하지요.
C.S.루이스의 "얼굴을 찾을 때까지" 그 책을 보면, 사실은 로마 신화가 나옵니다.
기독교의 스토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큐피트와 프시케라는 그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잠깐 소개해 드리면, 왕에게 세 딸이 있었는데, 푸시케라는 막내딸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너무 아름다우니까, 비너스라는 미의 여신이 있었는데, 비너스라는 미의 여신이 질투를 했습니다.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그래서 비너스라는 미의 여신이 질투를 했습니다. 그래서 비너스는 푸시케를 벌 주기를 원했습니다.
원래 푸시케는 용에게 산 제물로 바쳐질 운명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비너스는 그걸로 성에 차지 않아서 자신의 아들인 큐피트를 불러서(큐피트는 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지요)
큐피트에게 "가장 천한 남자를 찾아서 가장 천하고 가장 미천한 남자를 찾아서
그 남자가 푸시케하고 사랑에 빠지게 네가 화살을 쏘고 오거라" 그렇게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큐피트가 푸시케를 만나러 갔는데, 큐피트가 봐도 너무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푸시케를 천한 남자하고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야 될 운명을 거스르고, 큐피트는 그 푸시케를 자기가 사랑해 버립니다.
그리고 비밀 궁전을 만들어 놓고, 그 비밀 궁전 안에 푸시케를 넣어놓고 밤마다 가서 푸시케를 사랑하는 거예요.
하지만, 자기는 신이기 때문에 자기 얼굴은 못 보게 하고 푸시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푸시케에게 두 언니가 있습니다. 공주들이지요.
푸시케는 자기의 궁전으로 언니들을 초대할 수 있도록 조릅니다. 그래서 언니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언니들이 질투가 나요. 궁전에 와 보니까 너무 좋고,
여동생의 남편은 신이고, 비밀 궁전에서 호화롭게 산다고 하니까 언니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남편은 분명히 뱀일 것이야. 괴물일 것이야. 그러니까 네가 칼을 가지고 밤에 네 남편이 잠들었을 때
네 남편의 얼굴을 열어보고 뱀이 맞으면 그 남편을 죽여라'
푸시케는 큐피트의 얼굴을 열어보고 그가 신인 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랬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확인할 때, 촛농을 떨어뜨려서 큐피트가 일어나고
큐피트는 푸시케를 떠나고, 나중에 푸시케는 여신이 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신화입니다.
그런데 그 신화를, C.S.루이스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찾기를 원해요. 이 사람은 굉장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푸시케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고 언니인 오루알이라는 공주를 주인공으로 삼아요.
그런데 이 책에서 이 공주는 얼굴을 가리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푸시케하고 반대예요. 오루알은 너무 못생겼거든요.
너무 추녀였기 때문에 신하들에게도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베일을 가리고 다니는 그 스토리로 완전히 바꿔 버렸습니다.
신하들 앞에서도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들에게 항변하면서도 신들에게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이 오루알이라는 푸시케의 언니는 자신의 얼굴을 절대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루이스는 기독교의 사상을 집어넣어 놨는데 우리가 베일을 쓰고 다닙니다.
여러분도 베일을 쓰고 다녀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계신데,
제가 예배 현장을 지켜보면 어느 교회를 가든지 어느 상황에 있든지 예배 나와 있는데,
예배 끝날 때까지 핸드폰만 쳐다보시는 분이 있어요. 예배에 나왔는데 예배 끝날 때까지 남편 생각밖에 안 해요.
'어떻게 남편을 혼내주지', '어떻게 아내를 혼내주지', '어떻게 아이가 대학을 가지'
'내일 등기 계약 있는데, 어떡하지', '내일 부동산 계약 있는데, 어떡하지' '내일 회사에 가서 뭘 먹지..'
예배의 순간에 앉아 있는데도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섞어 놨어요.
심지어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결혼하고 선을 보고 자녀를 시집 장가 보내는데 사주단자를 받아요. 점을 보러 갑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과 똑같이 섞여서 살아갑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이 원하는 것으로, 우리의 성공 기준도, 남편의 성공 기준도,
나의 성공 기준도, 자녀의 성공 기준도, 내 삶의 가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 것을 찾는 사람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섞어서, 우리는 혼합주의도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자기의 얼굴을 얼마나 많이 가리고 다닙니까? 오늘 푸시케의 언니인 오루알처럼
우리는 자신의 수치와 죄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나의 깊숙한 죄, 아무에게도 고백할 수 없는 나의 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의 아픔,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나의 슬픔이 나의 우울함이 내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반만 년 역사 속에, 우리 역사상은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됐습니다.
70년 넘는 세월 동안에 전쟁을 겪지 않고, 세계에서 전쟁 하면 5번째로 센 나라가 됐고,
미국이나 영국보다도 의료시설이나 모든 인프라가 최고인 나라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우리는 종교가, 기독교가 1위 국가인 나라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자살률이 1위입니다.
세계 21개 OECD 국가에게 인생의 목표가 인생의 가치가 무어냐고 물어봤을 때,
19개 나라가 가족이라 부르고, 한 나라가 공적인 가치라고 이야기했는데,
대한민국은 20대부터 70대까지가 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질이라고 이야기해요.
* 왜 의사가 되고 싶니? - 돈을 많이 버니까요..
* 의사가 될래? 유튜버가 될래? - 유튜버가 될래요..
* 왜 유튜버가 되고 싶지? - 더 인기가 많고 또 돈을 많이 버니까요..
10대 아이들도, 20대 아이들도, 이제 유치원을 막 졸업한 아이들도
트로트를 부르고, 세상 가요를 부르고, 춤을 추고 우리는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치가 세상 가운데 돈을 벌고
사람들 가운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유튜버나 가수나 아이돌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돌이 무슨 뜻입니까? - 우상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과 세상을 섞어버린 이 세상 속에서
그냥 예배당이 들어왔을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예배당에 들어왔을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같지만,
이 문 앞을 벗어나는 순간 나의 고통은 해결되지 않아요. 나의 아픔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의 필요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필요를 가지고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일을 벗는다는 것은, 우리의 수치와 아픔과 고통과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의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고는 결코 자신을 볼 수 없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않으면, 하나님을 쳐다보지만 않으면, 하나님과 세상을 구분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죄를 볼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무지와 타락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지 않고, 우리의 수치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지 않고,
우리의 고민을 오늘 이 시간에 십자가 앞에 내려놓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의 루이스의 스토리 안에서는 칼빈이나 신학자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항상 부딪치는 게 있어요. 이성과 감성이 부딪치는 겁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 감성을 하나님의 임재와 신성인데
'이것은 혹시 기복주의가 아니야?, 오직 신비주의가 아니야?'라고 우리는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신비주의입니다.
세 분이 한 분이고, 한 분이 세 분이고, 완벽한 인간이시고, 완벽한 하나님이신 그분을 믿습니다.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를 믿습니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감성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모든 수치를 우리의 모든 죄를 내려놓고
그분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의 임재를 지금 이 시간에 간절히 구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의 말씀은 오늘 주제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친다"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어드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기도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저도 요즘에 제가 뉘우치는 게 하나 있는데, 교수가 되고 총장이 되고 학자로서의 삶을 살다 보니까
원래 저의 정체성은 목회자인데, 원래 저의 정체성은 목회자 이전에 신앙인인데,
원래 저의 정체성은 신앙인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매일매일 만나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딸이 있는데, 제일 섭섭한 게 있는데, 그것은 저에게 말을 하지 않을 때입니다.
너무 다행인 것은 멀리 대학을 가지 않고 인천으로 대학을 가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인천으로 대학을 가든, 서울로 대학을 가든, 미국으로 대학을 가든 부모가 제일 섭섭한 것은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거예요.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누구를 만났는지, 오늘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오늘은 어떤 아픔이 있는지
어떤 것이 내가 힘든 것이고, 어떤 것이 행복한 것이고, 내가 어떤 것이 아빠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그걸 제일 듣고 싶은데..
'다녀왔습니다.' '오셨어요?' 그거 외에는 대화가 없어진 게 오래 됐어요.
하물며 부모인 우리도 자녀에게 모든 것을 끊임없이 주는데도 불구하고, 섭섭한 게 하나도 없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그의 마음을 알고 싶고, 그가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 어떤 게 필요한 건지를 알고 있는데,
우리는 식사기도 외에는 안 할 때가 너무 많고, 때로는 식사기도도 배고프면 잃어버릴 때가 있고,
때로는 교회 앞에 나와 있지만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기도는 하지만 회개가 선결돼야 됩니다.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회개가 있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6-10절을 보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습니다. 다 아시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왜 에덴과 지금 사는 세상이 다를까? 왜 천국과 지옥이 다를까? 천국이 무엇일까?
천국이 젖과 꿀이 흐르고, 천국이 이슬람이 말하는 것처럼 술을 따라주고 미인들이 함께해 주고 그런 것이 천국일까?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의 의미는, 에덴의 의미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었어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간이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될 에덴 땅이 우리의 천국이고,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낯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과 먹고 마시고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천국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마귀 사탄 귀신의 궤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창세기 3장 8절에 보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라고 했어요.
하나님 낯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요. 죄를 저지르니까 인간의 반응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합니다.
죄를 저지르는 그 순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돼요. 창세기 3장 9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 아담의 대답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하나님한테 나아가지 못하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아무리 하나님께 다가가고 싶어도,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것처럼 내 수치와 아픔과 나의 죄가 베일이 되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께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이에요.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께 다가가지 못하고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세상의 가요에게 도움을 받고,
세상에 의사에게 도움을 받고 세상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고, 세상의 술과 담배에게 도움을 받고,
세상의 쾌락과 세상의 위로의 도움을 받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 얼굴 자체가 베일로 가려져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제 말씀은 출애굽기 33장 18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은 출애굽기 32장의 말씀을 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의 말씀은 정말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 벌어지는 역사가 하나 나옵니다.
아까 아담과 하와의 사건도 우리 원죄로서 최악의 사건이었으면,
출애굽기 32장은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말씀하시고,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되는 것들을 말씀하시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도자가 없던 그 백성들은 과거 애굽에서 숭배하던 과거의 애굽의 신들을 그리워합니다.
모세가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매일 먹이시고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해 주셨는데도
잠깐 모세가 자리를 비우고 잠깐 하나님의 임재가 비추지 않으니까
그들은 과거를 그리워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소망을 하고 자기들의 모든 금붙이를 거둬서 우상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너무 가관인 것은 제사장이라고 일컬음을 받은 모세의 형 아론이 타락해서
백성들과 야합해서 우상을 만들고 거들고 우상단지에다가 화목제와 번제를 드리는 혼합주의가 탄생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지낸 40일은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와 결혼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신부 삼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부 삼아 주셨는데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결혼한지 사십 일 만에 신부가 자기의 침상에 다른 남자를 끌어들인 것과 똑같은 사건을 벌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며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계시를 받는 기간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신부가 된 백성들과 함께할 그 신방, 신혼집 성막을 마련하는 그 기간 동안에
그 신부가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었습니다. 신부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했다는 것입니다.
계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무서웠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을 했는데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침상에서 자신의 신방을 더럽혔을 때 그 남편의 분노가 어땠을까?
하나님의 분노는 끓어 오르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 모세는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보내십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서운 범죄였는지를 깨달은 다음에,
"누구든지 주님의 편에 설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더니, 레위인들이 나옵니다.
레인들에게 "너희가 칼을 찼으면 칼로 너희 가족들과 일가 친척들을 모조리 죽이라"
레인들이 가족과 친지와 친척, 모든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는데 그날 죽은 사람이 3천명이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던지, 하나님의 수종을 드는 그 레인들에게
칼을 들어서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죽이는 걸로 끝나지 않고, 모세가 위대한 것은
무서우신 하나님 앞에서도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하나님,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는 거예요.
(출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자기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자기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달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었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지
나는 너를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 뒤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겠다. 천사를 보낼 테니까, 천사가 인도하게 하고 네가 데리고 가라
왜냐하면, 내가 가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여버릴 수도 있겠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화가 나셨던 거예요. 그 다음부터 모세가 위대한 사람인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을 포기한다든가 책망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진 밖에다가 천막을 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이 백성을 다시 살려주시옵소서"라고 모세는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시지 않으면, 나도 떠나지 않고 백성을 인도하지 않겠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 하나님께서 모세 때문에 마음을 돌리십니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모든 것을 들어주마"
우리의 인생에서도 항상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런 찬양도 있지요. ♬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싫다라고 아버지께 애원하는데도
마지막 피 한 방울을 흘리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때에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 했는데, 우리가 혹시 다른 데로 가버릴까 봐, 우리가 혹시 흔들릴까 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셔서 지금 교회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예수 십자가의 복음의 비밀과 십자가의 보혈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그 자리에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을 실망시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떠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합니다.
오늘 출 33장에서는 이 구절에서는 모세가 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모세에게 나타내시겠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대단하세요. 32장에 그렇게 사람들을 3천명이나 죽이게 하시고
생명책에서 다 지워버리고 내가 인도하지 않겠다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 의지를 돌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틀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철저히 진노와 심판으로 율법으로 함께하신 하나님이었는데,
왜 신약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 용서하셨냐? 그런데 구약에서 신약은 똑같은 말씀으로 관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돌렸냐면, 인간은 하나님과 서약을 하고 계약을 해서 깰 수 있는 그런 부정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하나님이 서약하신 것, 하나님이 계약하신 것은 우리하고 깰 수 없지 않습니까"
라고 호소합니다.
호세아서에 보십시오.
끊임없이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이 몸을 팔러 떠나고 다른 남자와 떠나고 수없이 떠나갔지만,
하나님은 다시 호세아를 통해서 찾아오시고 수치를 당해도 찾아오시고 부정을 저질렀지만 찾아오시고
끊임없이 찾아오신 그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오늘 33장에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하나님의 대면은 출애굽기에 세 번 나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양을 치다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장면이 오늘 보여드리는 장면입니다.
떨기나무는 불에 타지 않았으며, 모세는 이를 보고 가까이 다가갔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6)
그 하나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기를 원하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를 지금 강력하게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에 보니까,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를 만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감히 우리가 쳐다볼 수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 존재인데도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십일을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친구처럼 대화하셨다는 거예요. 친구처럼 이야기하셨다는 겁니다.
출 34장 29-35절 보니까,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대면 결과로 인해서 우리가 영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출 33장 18-23절의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이 영광을 보이겠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선하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가 있기 때문에 천국에 간 백성들은 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냐,
죄가 없는 상태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원래 아담의 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봐도 사망과 아무런 해악이 없지만,
지금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아직도 죄밖에 없는 육체를 입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을 보는 순간에 죽을 수밖에 없고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의 영광이 가려지고 사람이 죽지 않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보호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백성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 이후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를 간청했습니다.
제한된 방식으로 하나님이 보여 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의 등을 보여주시고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하니까 얼굴을 보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 자신의 등이라도 볼 수 있게끔
자신의 영광을 볼 수 있게끔 자신의 임재를 볼 수 있게끔 표현하셨습니다.
왜 이런 것들을 성경에 써 놨을까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얼굴을 보이기를 원하시고
여러분의 수치와 죄를 벗어버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를 원하신다는 거예요.
어떤 청년이 예수 믿지 않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신학교에 가서 엄청나게 고생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매일매일 채플실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시고 저를 기억하여 주시고 저를 써 주세요."
선교지에 갔는데, 선교지에서 두 달 만에 죽을 뻔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오늘 살려주시면 제가 선교사들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얼굴을 보여주시고 저를 살려 주세요." 기도했습니다.
유학길에 올랐을 때도, 1년 동안 자동차가 없어서 걸어 다니는 유학 생활하면서
"하나님, 얼굴을 보여주시고, 왜 저를 이 자리에 보내셔서 이 고생을 시키세요?
하나님, 저를 만나주세요. 저를 기억하여 주세요. 저를 써주세요." 했던 사람이 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수치를 떨어내야 돼요.
지금 풍족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얼마나 아픈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얼마나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분노가 해결되지 않고, 우리의 수치가 해결되지 않고, 우리의 아픔과 가난이 해결되지 않고,
우리의 질병이 해결되지 않고, 우리 깨어져 버린 관계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해도, 우리 죄가 우리를 가로막고, 우리의 이성이 우리를 가로막고,
우리의 관계가 우리를 가로막고, 우리의 감정이 우리를 가로막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세상과 죄와 더불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을 하나님과 섞어 버립니다.
우리는 죄로 우리의 얼굴을 가리고 우리의 수치로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내려놓고, 우리의 얼굴을 가린 그 죄의 베일을 없애버리고, 우리 수치를 없애버리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가로막고 임재를 가로막는 그 관계들을 제해 버리고
그분의 얼굴을 뵙기 원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우리의 잃어버린 얼굴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픔과 외로움 안에, 우리의 고통과 결핍 안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보혈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고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이 전으로 불러내시고 우리를 바꾸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그분의 얼굴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다시는 우리의 얼굴을 죄의 수치로 가려버리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가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원해야 됩니다.
지금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해서 하나님의 등을 따라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그 임재를 따라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그 행동을 따라가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수치를 벗어버리고, 우리의 죄와 우리의 모든 환경을 벗어버리고 우리는 나아가야 됩니다.
그분의 신부로서 죄와 불순종으로 세상에 나갔던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향해서 나아가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잃어버린 얼굴을 찾고,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서
주님께서 내 삶 가운데 함께 하셨을 때, 내 외로움 가운데 함께 하셨을 때,
나의 결핍 가운데 함께 하셨을 때, 나의 분노 가운데 함께 하셨을 때,
나의 깨어져버린 관계 가운데 함께 하셨을 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함께 하셨을 때,
모든 것을...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우리가 우리의 잃어버린 얼굴을 찾을 때까지,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때까지, 하나님께 끊임없이 회개하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