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공원 국화꽃 전시회
♧
"비 내리는
영동교",
가수
주현미 이야기
1961년
11월
5일
광주광역시에서 산동성 출신,
중국인
주금부와 한국인 정옥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3세다,
중국
이름은 저우쉬안 메이.
4남매
중 장녀다.
아버지
주금부는 한의사였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한약재
사업을 해서,
주현미는
자연스럽게 의학에 눈을 떴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지인인,
작곡가
정종택 씨에게서 레슨을
받아 ‘고향의
품‘이라는
노래를 처음으로 취입했다.
1981년,
중앙대학교에
다닐 무렵,
MBC 강변가요제에
중대
약대 음악그룹 보컬멤버로 출전하여 입상하였다.
약대를
졸업하고 남산 주위에서 한울약국‘이란
상호로 약국을
운영했는데 처방이 민간요법이라 수입이 별로 많지 않았다고 한다.
약사로
활동하던 당시 작곡가 정종택의 권유로 김준규 씨를 만나 메들리 곡
‘쌍쌍파티’를
취입했는데.
공전의
히트를 쳐서 유명해졌다.
이를
계기로 1985년에
데뷔곡 ‘비내리는
영동교‘를
발표하여 정식으로 가수로
데뷔하였다.
그래서
국내 최초 약사가수란 수식어가 붙었다.
가수란
직업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여
데뷔 후에도 약 9개월간은
약국을 운영했다.
첫
앨범 타이틀 곡 비내리는 영동교가 대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신인상까지 받았다.
눈물의
부르스,
신사동
그 사람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10대
가수상과 최우수 가수상을 받았다.
주현미는
이미자,
김연자,
문희옥
등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는 몇이 안 되는 가수다.
김수희
심수봉과 함께 무대에서 공연도 하였고 1993년에는
스폰서와
본격적으로 계약을 맺어 일본에도 진출하였다.
1988년
2월
14일에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보컬이었던 임동신과
결혼했다.
비로소
중화민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국적이 바뀐 것이다.
락
발라드 장르가 대중가요를 강타하면서 정통 트로트를 부르던
가수들에게는 시련이 왔다.
주현미도
이 시기에 ‘추억으로
가는 당신’,
‘또
만났네요.’
가
대중들 사이에 조금 알려졌으나 활동
비중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양수경
3집,
‘당신은
어디있나요.’
는
원래 주현미가 부르기로
했으나 트로트 스타일인 양수경으로 바꿨다.
‘짝사랑,
잠깐만’은
이호섭이 작사를 해서 히트를 쳤고,
남편
임동신이 임기석이란 가명으로 작곡한 것이다.
잠시
활동이 주춤하던 때였다.
뜬금없이
에이즈에 걸려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청계산 부근에서 살았는데,
그런
소문이 난 것 같다.
그런저런
일로 7년
동안 음반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음반을
내지 않았을 뿐 가요무대나 방송,
일반
공연에는 꾸준히 참가했다.
2000년
8월
러브레터를 발표하고 가요계에 복귀하여 다시 트로트
가수로 각광받았다.
2003년에는
‘정말
좋았네’
가
히트를 했다.
또한
이듬해 평양의 모란봉 노래자랑 대회에
남측대표로 송대관과 함께 출연했다.
2010년부터
자신의 단독 라디오 ‘주현미의
러브레터’에서
MC로
활동하고 있다.
개인
유튜브인데.
채널
이름은 주현미 TV
.
주현미는
러브레터에서 선배님들이 남겨 놓은 주옥같은 노래를
부른다며.
자신의
히트곡도 새로 불러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마이웨이'에서
주현미는 최초로 사랑하는 남편을 공개했다.
'가요의
여왕'인
주현미의 러브스토리와 인생 이야기이다.
남편
임동신 씨는 조용필 밴드 '위대한
탄생'의
전(前)
기타리스트
뮤지션이었다.
기타리스트와
가수였던 두 사람은 같은 업계에
몸담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고 한다.
남편이랑
해외공연도 하고 밤업소에서도 공연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심야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남편이 저보다
더 쑥스러워한다며 웃었다.
주현미
별명은 수도꼭지였다.
방송에
나왔다 안 나왔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88년
임동신씨와 백년가약을 맺은 뒤부터,
결혼
30년
동안
한 번도 남편과 함께 있는 모습을 공개하지 않았다.
남편이
방송에 출연하지 않는 것은 남편의
방송울렁증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