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동기회의 출발을 축하하며오랜만에 올리는 글입니다.
월간 "독자 Reader" 4월 호에 "소령을 재벌로 아나?" 라는 제목으로 실린 졸작 수필입니다.
쏘가리 회의 추억
"아버지, 회 드실 줄 아세요?"
1990년 늦은 봄인가? 화천 파로호 상류, 오음리에 근무할 때 아버지께서 한 번 들르셨다. 북한강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파로호는 한국전쟁때 중공군 팔로군을 수장시켰다고 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오음리는60년대 월남전 파병 훈련소가 있던 곳으로 부대 뒤에는 온몸을 던져 부하를 살린 고(故)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殺身成仁) 현장이었던 수류탄 훈련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그래서 하늘과 호수의 물이 유난히도 푸르던 오지중의 오지이다. 낮이 유난히도 짧았던12월 말에 하루종일 트럭 앞자리에 타고 이사하던 날, 캄캄한 산길을 굽이굽이 돌며 들어오면서 아내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 여보. 이제 당신 혼자 전방을 전전하던 초급장교였던 때가 아니예요. 가족을 거느린 가장이에요. 애들 생각도 좀 해야지…” 순간 가슴이 무거워졌다. 애국이며, 충성이며, 임무가 우선이고 명령이면 무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 데. 그리고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던 연애시절의 마누라가 아니었다.. 나에게도 나만 바라보는,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구나. 서울에 근무하기로 해서 집까지 얻어 놓았다가, 전방 근무가 부족하다는 말에 한마디 상의 없이 강원도 최전방 근무를 자원한 나를 말없이 따라 나섰지만, 막상 말로만 듣던 오음리 골짜기에 들어서니 마음이 착잡했던 모양이었다. 사방은 캄캄해지고 가도 가도 산과 골짜기 사이의 포장도로를 달려오면서 나 스스로도 후회하는 중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 강원도 먼 곳에 부모님께서 오시겠다고 연락을 하셨다. 아마 한 번에 오시지 못하고 서울에서 하룻밤을 주무셨을 게다. 손주 녀석 생일이라는 핑계를 대시긴 하셨지만 전후방으로 늘 이사다녀도 제대로 한번 와 보시지 못하셨으니 며느리 보기 미안하셨음이리라. 한참 모내기철에 먼 곳 나들이 하시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아는 나로서는 반가우면서도 한편 죄송스런 마음이 앞서고 있었다.
“느이 아버지 제일 좋아하시는 것이 회란다.” 어머니 말씀에 이어, “당신은 그것도 몰랐단 말이예요.?” 며느리가 더 민망해 한다. 아니 한 번도 좋아하시는 걸 사드린 적이 없으니 당연히 모를 수 밖에. 아버지 어머니 오신 김에 파로호에 가서 그리 비싸지 않은 향어회나 사드리고 우리도 한 번 먹어 버려고 생색내려다가 그만 머쓱해져서, "민물회 드실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잖아!" 애꿎은 마누라에게 한 마디 한다. "아니다. 모임에서 놀러 가면 많이들 먹는단다." 아하! 농사만 지으시는 울 아버지도 모임도 하시고 친구들과 놀러도 다니시는 구나. 놀러 가시라고 용돈 한 번 드린 적이 없는 데.
"향어회 좀 주세요." 가끔 회식을 해서 낯이 익은 '파로호 배터횟집' 아저씨가 반색을 한다. 하긴 이 근처에서 소령만 해도 누구누구라고 꽤 알려질 만하니 자주 오지 않아도 알아보는 건 당연하다. "여보, 다른 거 시키지." 마누라가 슬쩍 옆구리를 찌른다. 모처럼 아버지도 모셨는 데 젤 싼 거 시키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주인을 불렀다. "아니, 향어말고 다른 걸로, 쏘가리나 뭐 좋은 거로 ..." "우리 선희 뭘 좋아하지? 할애비가 생일 선물로 맛있는 것 사주마." 선희도 회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그냥 웃기만 한다. “아니에요. 아버님. 저희가 사드려야죠. 아저씨! 쏘가리로 주세요.” 당황한 마누라가 얼른 시켜버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주인아저씨가 말했다. “과장님. 걱정하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세요. 제가 알아서 드릴께요.” 그리고는 객실이 아닌 안방으로 안내한다. 산골 호숫가의 5월은 아직도 따뜻한 아랫목이 좋았다. 어리둥절하게 앉아있자니 곧 이어 상이 들어 온다. 붉은 교자상에 가득 회와 야채가 올려져 있었다. 쏘가리, 잉어는 물론이고 귀하다는 빠가사리와 산천어까지 .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화려한 식탁에 나도 마누라도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속으로는 ‘이것이 모두 얼마나 할까?’, ‘이 아저씨가 육군 소령을 무슨 재벌 아들로 아나? 하는 걱정과 함께. 차마 젓가락을 들지 못하고 상만 바라보고 있는 데 주인 아저씨가 들어왔다. ‘집에서 담은10년된 더덕술’이라면서 커다란 유리병을 통째로 들고 . ‘아버님께서 모처럼 이곳 전방까지 오셨는데’ 대접하시겠단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단체로 회먹으러 온다고 주문만 해놓고 반밖에 오지 않았지 뭡니까?” 돈은 다 받았으니 마음껏 드시란다.
. “네 덕에 맛있는 거 먹는구나. 소령이면 높은 사람이지. 암!” 정말 맛있게 드셨다. 모처럼 없는 돈에 효도하려는 가난한 군인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 준 주인아저씨의 넉넉한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렇게 맛있게 드시는 걸 공짜로 얻어드리는 것 같아서 오히려 죄송스러웠다. ‘다음에 한 번 다시 모시고 와서 내 돈으로 사드려야지. 꼬옥’ 목위로 치어올라오는 것을 다지고 다졌다.
사실 나는 아버님 덕분에 군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30여년전 사관학교 면접시험때의 일이다. 10여개의 면접 방을 거쳐 마지막 방에 이르렀을 때 면접 시험관이었던 장군님께서 물었다. 양 어깨의 별이 유난히 반짝이는 거구의 호랑이 상(相)을 하신 장군님이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예,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그래! 자네 아버님이라?” 거구의 장군님께서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앞으로 내미셨다. “뭐하시는 분인가? 유명하신 분인가 보지?” “저의 아버님은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장군님은 앞으로 내밀었던 몸을 의자위로 털썩 내려 앉았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농사를 지으신다? 그런데 존경하는 이유는 무엇인고?” 3차에 걸쳐 치르는 사관학교 시험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면접시험이라서 예상 질문을 뽑아 놓고 연습을 많이 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질문으로 뽑은 것 중 하나가 “사관학교에 지망한 이유는?” 과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이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준비하는 것이 대부분 “이순신 장군”, “을지문덕 장군” 이나 알렉산더 대제, 나폴레옹이니 롬멜, 웰링턴 같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군들이었다. 특히 “워털루”라는 전쟁 영화와 팝송이 유행했던 시절이라서 웰링턴 장군이 시기적으로 인기가 있어서 나도 그렇게 대답하리라고 단단히 자료를 준비하고 연습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막상 번쩍이는 별앞에서 바짝 얼다 보니 불쑥 나온 대답이 “아버님’이었다. “예. 저의 아버님께서는 말없이 열심히 사시는 분입니다. 동네일에 항상 앞장서시고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도와 주십니다. 동네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한번도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는 잠시 천장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십니다. 저희들 가르치시느라 밤낮없이 일하시고 자신을 위해서는 한번도 옷을 사시거나 좋은 음식을 드시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 갑자기 장군님이 비스듬히 기대 앉았던 몸을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아버님께서 사관학교에 들어가라고 하시던가?” 예상 질문 2번에 이어 드디어 첫번째 예상 질문이 나온 것이다. “아닙니다. 아버님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십니다. 아마 아시면 제가 몸이 약하다고 말리실 겁니다. 저라도 사관학교에 입학해서 아버님의 짐을 좀 덜어드리려고… 동생들이 많습니다.” 장군님은 또 한참을 내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이윽고 책상위에 있던 서류에 몇 군데 체크를 하고 뭐라고 적어 넣더니 힘차게 사인을 했다. 그리고 책상 한 켠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 중 적은 쪽에 얹어 놓았다. “들어 오면 열심히 하게. 훌륭하신 아버님 생각해서 말이야!’ 나중에 들으니 그 장군님은 어려서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님을 여의셨다고 했다.
묘하게도 나는 아버지께서 군대생활을 하신 곳에서 나도 근무했다. 아버지는 포병대대 작전행정병으로 근무하셨는 데, 이 곳 화천에서 군생활 하시다가 부대가 철원으로 이동하셨다고 했다. 중대장 때는 근무하셨던 포병대대 작전과에도 모시고 갔었다. ‘장교 아들’ 둔 덕에 옛 군대생활한 곳에 찦차타고 다녀오셨다고 온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셨다고 한다.
증조부님 조부님께서 항일 의병장을 지낸 집안에 아버지께서 태어나셨을 때에는 덩그렇게 큰 기와집과 서책, 선산말고는 남은 게 없었다고 한다. 그 어려운 집에서 종손으로 양반 체통지키시랴, 열이 넘는 숙부, 고모님들과 우리 다섯 남매를 키우고 대학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보내시느라 한 평생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사셨다. 자식들이 모두 성장하여 나름대로 안정된 길로 들어설 즈음 위암으로 돌아가시고야 말았다. 늘 안으로만 삼키시는 성격인지라 그 긴 세월의 노심초사가 암덩이리로 화해셨나보다! 겨우 힘든 일을 이제는 내려 놓으셨나 싶었는 데. 이제는 잘 키워놓은 자식들 집 순례하며 호강하시겠다더니…
지금도 난 민물횟집에 가지 않는다. ‘민물횟집’, ‘쏘가리 전문’ 이라는 간판만 보아도 맛잇게 드시던 아버님 모습이 떠오른다. 한번 더 모시지 못한 아쉬움에 눈시울도 뜨거워지고. ‘자식이 효도하려 해도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선인의 말씀이 저려오는데 어찌 한줌 회가 넘어가겠는 가?
이번 제사에는 쏘가리 회 한 접시를 올릴까 싶다. 혹 종가집 법도에 어긋난다고 야단 치셔도 꼭 내 돈으로 산 회 한 점을 드시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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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 사무실에 놀러와선 옆방에 계신 부친께 극진히 인사 드리더니 또 불쑥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님을 문병 와준 네마음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네,,,아침부터 반성하게 해줌을 귀하고 고맙게 받을께,친구!
孝子 수문아~~~그랬구나...덕분에 아부지 생각 오랜만에(?)한다.울 아부지도 회를 엄청 좋아 하셨지.급할땐 연안부두가서 젤 싼 밴뎅이 회라도 사다 드렸는데...지금보다 젊었을때 생각해서 제수씨께 잘 해드려라...화천 파로호는 낚시 많이 다녔던 곳이고 오음리 위에있는 구만리가 울 아버지가 화천 발전소에 계실때 내가 태어난 곳이지.얼마전에 댕겨 왔다
마누라에게 점수따는법 알앗다 장인어른 쏘가리회 한번 사드려야지
동기회가던 버스에서 우연히 만나 내게 읽어 봐 하고 전해 준 책, 집에까지 챙겨와서 잘 읽어 봤다. 나도 지금 아버님이 병환중이라 이 야기가 더욱 찡하게 울리는구나
아름답고 애잔한 추억..... 이젠 재벌되어도 좋으려니.....
글을읽으니 아버지 생각이 나네.막내로 자라 변변히 해드린 기억은 없고 막내라고 다 크도록 내리사랑 밖에 받은거 없으니.. 이제 한식일도 멀지 않았으니 추운겨울 밖에서 겨울 지내신 아버님 만나뵈러 가봐야겠네....
계실때 열심히 모셔야지 하고 다시한번 다짐한다. 내 다짐이 세월에 퇴색될때즈음 각성제 한방 날려줘...
다음주쯤 날려주면 되냐?
살아 생전에 잘 해드려야되는데.....마음만 그러하고 현실은 따라주지 못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