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의 대중스타 기생 이야기
Ⅱ부 순서
5. 평양 기생학교 방문기
6. 기생과의 만남, 그 공간
7. 정체성의 혼란
8. 저자소개 - 신현규
5. 평양 기생학교 방문기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방문하는 관광단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생이었다. 당시 '조선색 농후한 전통적 미를 가진 기생'을 볼 수 있는 곳은 평양 기생학교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평양 기생학교는 본래 명칭이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 기생양성소'인데 3년 학제로 운영되었다. 대동강 부근에 있었고 그 부근 일대에 산재해 있는 10여 군데의 대규모 요릿집을 대상으로 운영하였다.
1930년 수양버들이 축 늘어진 연광정에서 서쪽으로 돌아 한참 가노라면 채관리가 나오고 그곳에 평양 기성권번의 부설 기생학교가 구름 속 반달 모양으로 자리한다. 정문에 발을 들여 놓으면 시조와 수심가 가락이 장구에 맞추어 하늘 공중 둥둥 높이 울려 나오고 연지와 분과 동백기름 냄새가 마취약같이 사람의 코를 찌를 정도였다
평양 기생학교 관람 사진엽서
당시 3년 동안의 교과 내용은 학년마다 달랐다. 1년급 아이들에게는 우조(羽調), 계면조(界面調) 같은 가곡을 가르친다. 평시조, 고조(高調), 사설조(詞說調), 그 밖에 매·란·국·죽 같은 사군자와 한문 운자(韻字)에, 조선어, 산술 등을 가르친다. 2년급 때에는 관산융마(關山戎馬)나 백구사(白鷗詞), 황계사(黃鷄詞), 어부사(漁父詞)와 같이 조금 높은 시조에다가 생황, 피리, 양금과 거문고, 젓대 같은 즉 관현악을 가르쳤다.
3년급 때에는 양산도나 방아타령 같은 것은 수준이 낮다고 하여 가르치지 않았으며, 부르는 손님들의 요구로 춤과 함께 승무와 검무를 배웠다. 처음에는 발 떼는 법, 중둥 쓰는 법 몸 놀리는 법에만 약 20일이 걸렸다. 또 신식 댄스는 저 배우고 싶으면 배우게 하였다.
평양 기생학교 수업 장면
졸업 후에는 서울이나 신의주, 대구로 진출하고 180여 명의 졸업생 중 70% 정도는 외지로 갔다. 기생학교로 입학하러 오는 학생들은 평양아이도 많았지만 서울이나 황해도, 평안도에서도 많이 왔다. 노래는 박명화(朴明花), 김해사(金海史)라는 두 명기가 가르치고 그림은 수암(守巖) 선생이 가르쳤다.1)
4년 뒤 1934년, 학생 수가 250명으로 늘어나 교수 과목도 변화가 생겼다. 당시 평양 기생학교의 교수 과목은 아래와 같은데, 의외로 무척 많이 배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는 모두 보통학교 6학년을 마친 13살 이상 15살까지의 아이들을 받는다. 여기도 여학교 모양으로 학기도, 월사금도 있었다. 월사금은 1학년 한 달 2원, 2학년 2원 50전, 3학년 3원이었다. 입학금은 3원씩 있다.
학년 | 과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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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가곡, 서화, 수신, 창가, 조선어, 산술,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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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우조, 시조, 가사, 조선어, 산술, 음악, 국어, 서화, 수신, 창가, 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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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가사, 무용, 잡가, 창가, 일본패, 조선어, 국어, 동서음악, 서화, 수신, 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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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는 제1학기 4월 1일부터 8월 31일, 제2학기 9월 1일부터 12월 31일, 제3학기 1월 1일부터 3월 31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학교의 교장은 기성권번 사장이 겸임하였다.
그리고 기생학교가 평양의 한 명물로 자리 잡아, 상해·남경 등지로부터 오는 서양 사람이나 동경·오사카 등지에서 오는 일본 사람이나 서울 기타 각처로부터 구경 오는 귀한 손님들이 그칠 새가 없이 구경하러 찾아왔다고 한다.2)
일제강점기에 학교는 보안경찰의 감독하에 있었다. 일제 황국신민의 맹세를 하고 여자들은 국방부인회원이 되었다. 그런 시대상황에서 술자리의 꽃이 되어 웃음을 파는 기생을 양성하는 학교에서는 바야흐로 기생은 대대로 내려오는 직업부인이므로 이에 필요한 직업교육을 행한다고 설립취지를 설명하였다.
이에 기생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기예(妓藝)' '기술(妓術)' 그리고 더 나아가서 '기학(妓學)'이라고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평양 기생학교 서양댄스 공연 연습 장면
교시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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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국어(國語) | 국어 | 작문(作文) | 회화(會話) | 사해(詞解) | 사해 |
2 | 서화(書畵) | 서화 | 서화 | 서화 | 서화 | 서화 |
3 | 가곡(歌曲) | 가곡 | 가곡 | 가곡 | 가곡 | 가곡 |
4 | 내지패(內地唄) | 내지패 | 내지패 | 내지패 | 내지패 | 회화 |
5 | 잡가(雜歌) | 작법(作法) | 잡가 | 성악(聲樂) | 잡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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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가복습(歌復習) | 음악(音樂) | 가복습 | 작법 | 가복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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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는 1939년 당시 평양 기생학교 210명의 제3학년 수업시간표로 내지패는 '일본창'을 말한다. 여기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학과로는 1학년의 창가와 무용, 2학년의 시조와 악전이 있다. '기학(妓學)'이라는 하나의 학문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다양하였다.
학생들은 창으로 유명한 선배 기생이나 여선생들로부터 각각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따라 나뉘어 가야금을 비롯한 여러 장기를 단계에 맞춰가며 전수 받았다. 처음에 소리 내는 방법부터 시작하였으나 소리 내는 일이 무척 어려워, 그 다양한 음색을 내기 위해 3-4개월씩 밥도 먹지 않고 수련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맞춤소리의 맞춤법이나 무릎을 치는 방법 등을 하나하나 손놀림, 다리놀림의 규범을 보여 주며 가르쳤다. 50-60명의 여학생들이 이를 따르며, 적당하게 어깨를 흔들며 태평스럽게 노래를 제창하였다. 당시 기생학교의 무용은 검무와 승무로 상당히 유명하였다.
1930년 후반부터는 손님들 사이에 고전적인 취향이 엷어져 가는 경향을 반영해 명목상으로만 가르쳤다. 기생들이 가장 관심있었던 서비스 방법이나 손님 남자들 다루는 방법은 '예의범절'과 '회화' 시간에서 배웠다. 걷는 법, 앉는 법에서부터 인사법, 술 따르는 법, 표정 짓는 법에서 배웅하는 법 등 연회좌석에서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부엌에서 손님 접대 방법을 구분해서 상세하게 강의하였다.
물론 이 정도의 기법만으로 기생의 임무를 잘 수행해 낼 리는 없지만 타고난 소질이 있다면 별 반 문제는 없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기생들은 남자의 마음을 끄는 기술에 관한 한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아는 타고난 무엇인가가 있었다.
게다가 기생들 주위에는 뛰어난 기생 선배들이 항상 모범을 보이고 있고, 학교는 권번사무소와 한 지붕 아래에 있었으며 대기실에서는 언니들이 관능적인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집이 기생거리에 있었던 만큼 집에 돌아오면 그들 자신의 언니들이 기생이 아니어도 주변 여기저기서 듣고 뒷이야기들을 전해 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기생들은 겉과 속이 있고, 진실과 거짓도 있는 기생다운 기생으로 성장해 나갔다고 한다.3)
1930년 후반 평양 대동강변에 있는 기생학교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평양기생 사진엽서
각주 : 1 『삼천리』, 1930.6
2. 삼천리』, 1934.5.
3. 『모던일본』, 1939.6.
6. 기생과의 만남, 그 공간
1] 기생 사진엽서의 공간
기생 사진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대량으로 생산된 우편엽서들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관광용 우편엽서는 19세기에 등장한 근대적 관광산업의 부산물임과 동시에 사진과 인쇄기술이 결합된 최초의 복제품이다. 사진과 사진엽서는 사실적인 이미지를 통해 대중들에게 다른 민족들의 풍속과 문화를 한 눈에 보고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근대적 시각 이미지이다.1)
특히 식민지의 문화와 풍속을 담은 관광용 우편엽서는 그것을 만든 일본 제국주의의 일방적인 시각과 관광산업의 전략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인류학에 대한 축소된 경험'이라 지적된다.2)
권번 기생 박설중월 사진
사진엽서 속에 나타난 기생 이미지를 통해 한복을 입은 여인으로 대표되는 '조선전통'의 이미지가 일본의 조선 타자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동시에 일제의 맥락뿐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性)의 맥락 속에서 근대적 볼거리의 대상물이 되어 온 이중의 질곡을 지닌다. 사진엽서는 체계적인 연구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체계적인 자료 접근이 어렵고 특히 우편엽서의 성격상 그 제작연대나 제작 장소, 엽서에 쓰인 사진의 촬영연대나 사진가 등을 밝혀내는 일이 쉽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엽서들은 전반적으로 1910~1935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차츰 조선 현지에서도 이러한 엽서를 제작하면서 조선에 온 일본인 관광객들은 이 8장짜리 기생 사진 세트를 조선 토산품 가게에서 손쉽게 사가지고 갔다.
이를테면 요즈음 일본인들이 '욘사마' 배용준의 사진을 사는 것과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인천의 한 엽초판매회사에서는 자사의 담뱃갑 표지 5장을 모아오면, 당시 영화를 보여주면서 조선기생들의 사진엽서를 8장씩 나누어 주기도 했다.
권번의 기생 사진은 원판 흑백사진을 제작하고, 이를 토대로 다양한 그림엽서가 제작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아래의 사진을 분석하면 추측이 가능하다.
A형은 원판 흑백사진인데 이를 B형의 다른 각도 흑백사진과 비교하면 같은 장소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C형은 B형의 다른 각도 흑백사진을 편집하여 그림엽서로 만들어 판매하거나 홍보하는 데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진엽서 A형
사진엽서 B형
사진엽서 B형
사진이 도입되는 초창기에 카메라 앞에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 있던 기생들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다양한 포즈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1930년대로 오면서 '조선풍속'이나 '기생'이란 제목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기생의 이름이 씌어진 사진엽서가 나오기 시작한다. 엽서 한 장에는 한 사람의 기생을 클로즈업해서 찍었다. 흑백 혹은 단색 사진인데 채색된 것은 흑백사진을 찍은 후에 인화과정에서 색을 입힌 것으로 요즈음의 컬러사진과는 다르다.
기생들의 사진엽서는 '기생 사진' '기생언자(妓生嫣姿, 기생의 웃는 모습)' '청초 우아 조선미인집' '기생염자팔태(妓生艶姿八態)' '조선풍속기생' 등이라는 표제가 쓰인 봉투에 8장씩 세트로 된 회엽서로 만들어졌다
기생 회엽서 세트 겉봉투
엽서 한 장에 기생 한 사람을 찍어, 그것을 세트 사진으로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배우나 가수 등 이른바 브로마이드 사진이 아사쿠사의 마루베르당(堂)에 의해 상품화되어, '브로마이드'라는 상품명이 정착한 1920년 이후에 급속도로 확산·발전했다. 따라서 이 엽서 세트는 오늘날 대중스타의 모습을 담은 크고 작은 브로마이드의 한국판 선조쯤 될 것이다.
1890년대 전후 일본 최고의 관광상품으로 전 세계로 수출되었던 풍속사진 엽서는 주로 요코하마(橫濱)를 중심으로 다이쇼(大正) 사진공예소와 히노데상행(日之出商行)에서 많이 생산되었다. 특히 히노데상행은 현재 발견되고 있는 사진엽서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상당히 번성했다.
기록에 의하면 "하루 판매량이 1만 매를 웃돌고 원판의 가지 수가 명소 700종, 풍속 600종에 달하며 인쇄공장은 직영과 전속을 합해 4개소를 보유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제품이 부족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3)
요코하마 사진에서 서양인들의 이국적인 취향을 가장 많이 자극했던 인기품목 중 하나가 예기 사진이었듯이 '조선풍속'이라는 제목 아래에 조선의 무용수로, 악기 연주자로, 미녀로 연출된 기생 이미지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인기품목이었다. 외국인들 중에는 조선 기생 사진엽서를 수집하는 이도 생겨났다.
사진엽서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시각문화에 대한 연구 성과는 아직 미미하다. 서구에서는 사진엽서에 대한 수집과 연구가 활발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시작단계이다. 앞으로 사진엽서뿐만 아니라 여러 인쇄매체 속에 나타나는 시각자료를 통해 근대의 사회와 문화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인문학적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사진엽서의 생산배경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에 대한 고민이 필수적이다. 사진엽서가 생산되기 시작하는 시기가 서구의 제국주의가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번져가고 있는 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제국주의라는 세계적 현상과 함께 번성한 학문이 바로 인류학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로 진출하기 위한 사전조사는 인류학자들이 도맡아 했다.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 각종의 정보를 인류학자들이 수집하고 연구하여 보고서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곧 식민지 정책의 토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의 인쇄산업을 이용하지 않고 자국의 인쇄산업을 통해 당시 식민지인 조선과 만주, 대만에서 영역을 확장시켰다. 바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력 판도와 사진엽서의 생산·유통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처럼 사진엽서를 보는 작업은 근대를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요구한다. 사진엽서는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될 때 더욱더 그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진엽서를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 사진 속에 재현된 정치적 시선과 같은 여과장치 없이 독해한다면 사진엽서는 단순히 100년 전 과거의 이미지에 불과할 것이다.4)
각주 :
1. 권행가,「일제시대 우편엽서에 나타난 기생 이미지」,『한국미술연구소』 12호, 미술사논단, 2001,
83-84쪽
2. 佐藤健, 황달기 옮김, 「그림엽서의 인류학」, 『관광인류학의 이해』, 일신사, 1996, 70-81쪽.
3. 「조선매일신문」 1929.2.23.
4. 권혁희, 「사진엽서의 기원과 생산 배경」, 『사진엽서로 떠나는 근대기행』, 부산근대역사관, 2003
2] 박람회 공간에서의 기생
일제강점기 서울의 관광안내책자에는 숙박업소, 요릿집, 택시 연락처, 관광 명소 등을 수록하고 여기에 기생조합인 권번의 연락처를 빠짐없이 적어 놓고 있다. 또한 각 요릿집에서 발간한 안내책자에는 기생의 이름과 사진도 더불어 실어 놓아 지금도 그 자료를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1938년에 경성관광협회에서 발행한 '경성관광안내도'는 경성역 구내에 설치된 안내소를 통해 배포되었다. 그 안에는 경성관광협회 지정 업소들이 소개되어 있다.
여관, 택시회사, 토산물점, 조선인삼, 감률(단밤)가게, 사진촬영, 사진재료, 일본요리옥, 조선요릿집(명월관·천향원), 카페, 끽다점(찻집), 백화점, 유곽, 권번, 온천 등이 수록되었다. 특히 권번은 일본의 예기로 본(本)권번과 신정(新町)권번을 들고 조선의 기생은 한성권번과 조선권번을 소개하고 있다.
평양의 관광안내서는 조선 제일의 미인산지이자 유명 기생의 배출처로 '평양 기생학교'를 들고, 이에 대한 사진과 설명을 빠짐없이 소개하고 있다. 물론 사진엽서의 제작은 기생학교의 양성과정에 주목하여 수업하는 장면들을 중심으로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일제는 조선에서 여러 차례의 박람회를 개최하였다. 본래 박람회는 짧은 기간 동안에 다수의 사람에게 전시효과를 내는 목적이 있기에 이 박람회에서는 기생을 조선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1907년 경성박람회에서 10명의 기생이 잡가를 부르기도 하고 검무를 추기도 하였다.
그리고 1915년 일본의 조선 시정 5년을 기념하여 실시한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된다. 이에 대한 일본 내지용 광고 포스터는 경복궁과 조선총독부를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기생(신부복을 입고 춤을 추는 자세)이 그려져 일본 전국 각지로 배포되었다. 또한 1929년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가 열렸고 평양의 기생들이 총동원되어 서울에 원정을 온다는 광고를 하였다.
기생을 모델로 만든 조선물산공진회 포스터 사진
1923년 10월에 열린 조선물산공진회에서 벌어진 권번 기생들의 여흥에는 공진회의 입장권을 사는 이에게는 잡화품 할인 구매권을 첨부하여 주었다. '사람찾기'라는 놀이도 있었다.
경성의 각 권번에서 5명의 기생을 뽑아 변장을 시켜 장내에서 돌아다니게 하고, 이것을 발견하는 이에게 20원짜리 상품권을 준다는 내용이다. 놀이는 하오 1시부터 3시까지 벌어졌으며, 발견한 사람은 그 기생의 이름을 부른 후 기생에게 '발견증'을 받고 기생과 함께 경회루 수상장소로 가서 상을 타는 것이었다.
당시 변장한 기생은 한성권번 조옥향, 한남권번 오유색, 조선권번 이난향, 대동권번 김산월 등이었다. 만일 찾는 사람이 없이 3시가 넘으면 상금은 기생의 차례로 간다하여 각 권번에 뽑힌 기생들은 변장을 더욱 열심히 했다.
또 다른 놀이는 '변장행렬'로 장내에서 개업을 하고 있는 각 상점 관계자와 공진회 관계자들이 각각 자신들의 꾀를 다하여 변장을 한 후 장내를 순회하였고, 그 외에도 누구든지 변장을 하고 참가할 수 있었다. 변장한 사람은 전부 경회루 앞에서 심사를 하여 10등까지 상품을 주었다.
그 당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기생 활쏘기'였다. 영추문 안 궁장(弓場) 옆 광장에서 각 권번 기생의 궁술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연예대회'가 열리는데 경기장에 배설된 무대에서 조선기생과 일본기생의 가무가 하루 종일 공연되었다.
그 밖에 '기생 그네뛰기'가 열렸는데 당시 1등은 대동권번 변단심, 2등은 조선권번 이연화와 대동권번 김연화이었다. 또한 관람객들은 '보물찾기'를 매우 재미있어 했는데, 1등 상품이 금시계였다.1)
공진회는 조선총독부 지배 이전과 이후의 조선에 대한 백과전서적 지식을 관람객의 눈앞에 분류·배열·진열해 놓고 상호 비교·대조하여 일본(문명)과 조선(야만, 전근대)의 이항대립적 관계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기생의 이미지는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사진엽서를 통해서 기생을 남성의 성적 대상과 타자화된 조선의 이미지로 창출했던 것처럼, 이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공진회를 계기로 일본 내부의 정치적 문제를 외부(조선)로 돌리게 하였다.
또 조선에의 투자를 촉진하는 한편 에로티시즘과 엑조티시즘이 결합한 형태인 기생 이미지를 통해 일본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조선 이주와 관광을 위한 유인책으로 활용한 것이다.
또한 조선인들에게는 공진회에 가면 공개적인 장소에서 누구나가 기생을 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여, 궁극적으로 특권층만이 누렸던 기생문화를 대중화하는 효과를 얻었다. 이로써 기생은 특권 계급의 향유 대상을 넘어서 자본의 대상이 되어 갔다.
돈만 있으면 누구든지 소비하고 향유할 수 있는 문화라는 인식을 낳음으로써 기생 이미지가 갖고 있는 식민담론의 수사는 은폐되고 기생 이미지는 조선 내 자본주의와 성적 불평등의 문제로 환원되었다.
조선총독부 주최의 '조선박람회' 포스터(1929년)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일제가 만든 타자의 이미지를 투명하고 자연스러운 이미지로 오인하게 되었다. 이처럼 포스터는 국내외의 사람들에게 기생을 조선의 대표적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공진회를 찾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박람회의 꽃이 기생이라는 암시를 주게 되었다.2)
각주
1. 「동아일보」 1923.10.24.
2 .이경민,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사진아카이브연구소, 2004, 145-148쪽
3] 일제강점기의 요릿집 공간
기생요릿집 평양 육각당
일제강점기에 요릿집은 기생이 상주하지 않고 권번에 연락을 하면 기생이 인력거를 타고 요릿집에 나와 손님을 접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 당시 기생이 되려면 미모도 뛰어나야 했지만, 영리하고 똑똑해야 했다.
특히 점잖은 양반들의 말뜻을 재빨리 재치 있게 알아차려야 했고, 거기에 합당한 대답을 우아하게 내놓아야 명기라 할 수 있었다. 연석에 참석했을 때 앞에 앉은 친구나 옆에 앉은 손님에게 이 사람은 누구고, 저 사람은 누구냐고 묻는 기생이 있다면 먼저 한점 깎이고 들어가게 된다.
연석에 들어가자마자 눈치를 곤두세우고 좌석에 계신 분들이 누구누구이며 이날의 주빈과 주최자가 누군지를 눈치껏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연석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한무릎을 세우고 그 무릎 위에 두 손을 얌전히 포개 놓는다.
요릿집이나 개인집에서 연석이 벌어지는 사랑 놀음에 다녀올 때는 시간에 따라 돈을 받게 되었다. 어떤 요릿집에서는 2시간 반이면 3시간으로 넉넉히 시간을 잡아주는 후한 곳도 있었지만, 2시간으로 우수리를 떼는 곳도 있었다.1)
그러나 아무리 시간을 잘라낸다 하더라도 당시 기생들은 일언반구 항의하거나 싫은 내색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기생이 시간에 짜증을 내게 되면 그 기생은 행세할 수 없었다. 시간에 따라 계산해 주는 돈도 기생이 자기 손으로 직접 받는다는 것은 그때 풍습으로는 있을 수 없었다.
기생이 돈을 직접 만진다는 것은 천하고 상스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기생은 단지 시간을 적은 전표를 점잖게 들고와 권번에 맡기고, 권번에서 돈을 찾아오는 번거로운 방식이었지만, 이것이 기생의 체통을 살리는 길이라고 여겼다. 기생이 부름을 받는 것을 그때는 다른 말로 표현했다.
요릿집 같은 데서 부를 때 선약이 있으면 '지휘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는 수동적으로 응하는 시대였고, 그런 입장에 있었으니 지휘 받았다는 표현을 하였다. 기생들은 손님들에게 '-합쇼' 하는 투의 경어를 썼고, 손님들은 '잘 있느냐'는 식으로 하대하였다.
그러나 요릿집 사람들이나 국악원 악사들은 기생들에게 깍듯이 '아씨'라고 불러주었다. 기생이 요릿집에서나 개인집에서 연석에 참석할 때에는 미리 다른 방에 모여 음식을 먹고 나서 들어갔다. 아무리 체통을 살리려 해도 배고픈 다음에야 별수 없는 법, 우선 기생들이 배불리 먹고서야 모든 예의범절과 노래와 춤이 제대로 될 수 있었으니 그럴 법한 일이다.
기생들이 입는 옷 색깔은 여염집 아낙들과 달라야 했다. 1·2·3향수는 옥색치마를 입었고, 보통기생들이 예복으로 입는 옷은 남색치마였다. 노란색이나 다홍색은 여염집 부인이나 아씨들이 입는 것으로 정해져 기생들은 이 색깔을 입지 못했다. 또한 기생들이 연석에 들어가서 손님들과 마주앉아 같이 담배를 피워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는데, 이때 주로 피우는 담배는 '청지연' '홍지연' '칼표' 등이었다.
이때 기생들은 돈이 떨어지면 당시 돈놀이하던 '대성사'라는 집에서 매월 10원 정도 꿔 쓸 수 있었다. 훗날 돈을 벌어 갚아도 되었으나, 좋은 영감을 만났을 때 영감이 원금과 그동안의 이자까지 모두 치르는 것이 그때의 풍속이었다.
이 무렵 기생들은 어디를 가나 외상을 잘 얻을 수 있었다. 종로네거리 포목점에 나가 돈 한 푼 없이 옷감을 끊어도 권번만 대면 아무 염려 않고 뚝뚝 끊어주는 시절이었다. 기생이 직접 나가지 않더라도 갖가지 일용품은 얼마든지 외상으로 살 수 있었다.
요릿집이나 개인집 연석에 참석했을 때 손님이 실수로 술이나 음식을 기생의 치마폭에 쏟아도 기생들은 조금도 기분 나빠하는 일이 없었다. 다음날 쯤이면 실수한 손님이 청지기를 시켜 옷감 1벌을 꼭 사과하는 의미에서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돈 있고 체면 찾는 손님이 보내주시는 것이니 입고 있던 옷감보다 못할 리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2)
1936년 서울에는 약 50개의 요정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명기, 명창을 불러 놓고 흥을 돋웠다고 한다. 요릿집은 대개 한 상에 5원부터 10원까지 받았는데 5, 6명은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대개 요릿집에서는 손님들이 기생 아무개를 불러오라고 지명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인기 있는 기생은 보통 1주일 이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차례가 오지 않았다.
각주
1. 이난향, 「중앙일보」 1970~1971년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明月館', 1971
2. 이난향, 「중앙일보」 1970~1971년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明月館', 1971.
4] 명월관, 기생 요릿집의 대명사
'명월관'은 '청풍명월(淸風明月)'에서 따온 이름으로 명사와 한량들에게 편안한 장소와 푸짐한 음식을 대접한 요릿집의 대표적인 브랜드를 쌓았다. 궁내부 주임관(奏任館)과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었던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온 뒤인 1909년에 생겨난 요릿집이었다.
전신은 '조선요리옥'이었다. 명월관 본점은 종로구 돈의동 145번지, 지점은 종로구 서린동 147번지에 있었다. 본점의 토지 평수가 1,200여 평이었고, 양식과 조선식으로 지은 건물 총평수가 600여 평에 달하는 당시 상당한 규모였다.
안순환은 명월관을 개업하여 궁중요리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게 되었고, 술은 궁중 나인 출신이 담그는 술을 대 쓰는 바람에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주, 소주 등을 팔았지만 나중에는 맥주와 정종 등 일본술을 팔았다.
이 무렵 융희 3년(1909)에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지방과 궁중의 각종 기생들이 방 붙일 곳을 찾아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월관에는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불렀던 궁중기생과 인물이나 성품 및 재주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연히 장사도 잘 되고 장안의 명사와 갑부들이 모여들어 일류 사교장이 되었다.
명월관 정문 전경
1910년대 명월관은 이색적인 광고를 한다. 종로 거리에 우산을 받쳐 든 꽃 같은 기생들의 행렬을 등장시킨 것이었다. 나이 든 기생이 앞에 서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동기(童妓)가 뒤를 따르는 행렬은 구경꾼들의 눈을 번쩍하게 했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앞서 가던 기생이 선창을 하면 뒤에 따르던 기생들이 화답하면서 가는 행렬은 요릿집 명월관 선전이었다. 우산 끝에는 명월관에 꽃다운 기생 산홍이가 새로 왔으니 많이 왕림해 달라는 식의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요릿집에서나 구경할 기생을 백주 대낮에 구경하게 된 횡재에 군중들은 이들 행렬을 따라 나섰고, 행렬이 종로에서 동대문 쪽으로 방향을 틀면 구경꾼도 이들을 뒤따랐다.
그러나 1918년에 명월관이 불타버렸는데, 화재 원인에 대해 당시 여러 이야기가 나돌았다. 친일정객들이 나라 팔아 받은 돈으로 거들먹거리던 곳이었기 때문에, 기생에게 욕본 고관의 분풀이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 아들을 둔 시골 양반 때문에 불이 났다는 등의 이야기가 무성하였다.
이듬해 이종구는 '명월관' 상호 명칭에만 3만원을 주고 인수한다. 이종구는 1937년 종로권번도 인수한 재력가였다. 명월관에서는 고유한 조선요리와 서양요리를 만들었고, 주요 손님들은 고위 관료와 재력가, 외국인 등이었다.
1932년 조사에 의하면 하루 매상이 500원 이상이었고, 종업원의 숫자도 120여 명이나 되었다. 종업원은 손님을 안내하는 '보이', 음식을 만드는 '쿡', 인력거 '차부(車夫)'까지 포함한다.
안순환은 그 뒤 화재를 당한 후 새로이 '태화관' 그리고 '식도원'을 세웠다. 명월관은 서울에 있어서 조선요리업의 '원조(元祖)'라는 이름이 높다보니, 지방에서도 '명월관'이라는 간판을 내놓고 요릿집을 운영하는 이가 많았다.
현재 명월관 본점 자리에는 동아일보사 사옥이 있고, 지점 자리에는 피카다리 극장이 있다. 1971년 「중앙일보」에 연재를 한 조선권번 출신 이난향의 회고에서 보더라도 '명월관'은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명월관에 뒤늦게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언론인과 문인들은 신학문을 닦고 시대의 첨단을 걷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명월관은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기생들은 이들의 재치 있는 이야기에 솔깃해졌다고 한다.
옥양목 두루마기에 '도리우찌' 모자를 썼고, 신발은 자동차 타이어 속으로 만든 경제화를 신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좌석의 손님들과는 어울릴 옷차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손님은 방을 잘못 들어온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좌중에 계신 손님들이 모두 일어나 정중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분이 바로 육당 최남선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육당 선생께서는 별로 말씀이 없었으나 백운선의 영변가를 좋아하셨고, 음성은 쇳소리였다. 내가 육당 선생의 처음 인상을 '복덕방목침' 같다고 손님들에게 말했더니 그 후 이 말은 육당 선생님의 별명처럼 돼버렸다. 춘원 이광수 선생은 얼굴색이 유난히 빨간 것이 인상에 남아있으며, 수주 변영로 선생은 그때부터 술을 많이 들었는데 김금련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1930년께는 춘해 방인근 씨가 주동이 된 동부인회가 가끔 명월관에서 베풀어졌다. 이 모임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였다. 춘원, 박인덕, 의사 백인제, '세브란스'의 전 학장 오긍선, 음악가 백명곤, 숭실전문 교수이며 테너가수였던 차재일 등 제제다사였다. 김억, 김동인, 윤백남, 안석영 등 문인들의 모습도 보였다.1)
언론계 인사치고 명월관에 드나들지 않은 이가 거의 없었는데 이것은 명월관에 '장춘각'이라는 그윽한 특실과 2층에 피로연을 할 수 있는 큰 홀이 있기 때문이며, 그 보다는 외상이 후하고 외상값 독촉을 심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명월관 특설 1호 무대
명월관의 제1기라 할 수 있는 고객 계층은 1910년대 초반 이름만 남아있던 조선 왕조의 왕족들, 옛 대한제국의 고관관직을 했던 이들, 그리고 친일파들이었다. 1910년대 후반의 제2기 고객 계층은 망국대부의 자제들과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여기서 나라 잃은 망국의 슬픔이 아이러니하게 '공간으로서 명월관'에서 드러난다.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지 못한 무능한 위정자의 자제들은 해야할 일도, 울분을 토로할 공간도 마땅히 없었기에 명월관에서 기생과의 유흥이 유일한 삶의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자연히 늙은 고객들은 발을 끊게 되고 그들의 자제 덕분에 손님들이 갑자기 젊어지게 되었다.
제3기는 1920년 초반으로 일본 유학생들의 사각모자, 즉 대학생들이 주된 손님이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았지만 상해의 애국지사도 빼놓을 수 없다. 더구나 1919년 3·1운동으로 사회의 변화는 기생의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어 놓았다.
바로 여성운동과 독립운동으로 투신하게 되는 기생, 즉 사상기생이 생겨나게 된다. 1919년 3월 19일 진주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기생조합 소속 기녀집단을 '기생독립단'라고 하는데, 3월 29일에는 수원 권번 기생 30여 명이 검진을 받으러 자혜의원으로 가던 중, 수원경찰서 앞에 이르자 김향화(金香花)를 선두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병원에 가서도 검진을 거부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돌아오는 길에 경찰서 앞에서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고 헤어졌는데, 김향화는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4월 5일에 해주 기생들은 해주 종로에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남문에서 동문을 경유하여 서문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김월희·문월선은 징역 6월, 이벽도·문향희·해중월 등은 징역 4월이 언도되었다.2)
이 사건은 삼일운동이 한국민족 전체의 운동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큰 화제를 일으켰다. 당시 기생 중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하여 일본인들을 골탕 먹인 예가 많았다.
이어서 제4기는 1920년 후반으로 신문 언론인과 문인들이 두드러진 고객이었다. 1929년 조선총독부 20주년 시정기념 박람회로 명월관에 지방의 부자들이 서울의 기생을 보러 올라오면서 고객의 계층이 급격하게 변하였다. 그러면서 기생들은 일본 유학을 가거나 근대식 학업으로 신여성처럼 살겠다고 기생폐업하는 이들도 많이 생겨났다.
1930년대 들어 제5기에는 사업가들이 주된 고객이었다. 이제 양장 차림에 양산을 오똑하게 받쳐 들고 인력거 위에 올라앉은 기생의 모습 속에 이미 서화와 기예를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워 조신하게 처신하던 옛 명기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고객층은 앞서와 별반 차이 없었지만 1940년대 제6기에 명월관으로 출퇴근하던 기생들이 비단옷 대신 몸빼 옷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되자 명월관은 휴업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기생의 친일 행적 역시 목격할 수 있다.
웃음과 노래를 파는 연약하고 자유롭지 못한 몸이기는 하나 '애국의 열성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푼푼이 모으고 모은 돈으로 8개의 고사기관총을 헌납하는 헌납식은 본정관내의 조선권번, 한성권번, 동권번, 본권번, 경성요리업조합, 신정유곽 등의 기생, 창기, 예기 1000여 명의 손에 의하여 오후 세시 가을빛 짙은 장충단공원에서 감격과 찬양을 받으며 성대히 거행되었다. 헌납식이 끝난 후 창기, 예기, 기생들이 섬섬옥수를 들어 가을 하늘을 향하여 헌납한 기관총의 실연을 하였다.3)
제7기 1940년대 후반은 미군들로 마지막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주된 고객도 미 제5공군 장병들이었고 요릿상의 다리가 높아지고 서양 댄스 중심의 파티였다. 이로써 기생과 함께 한 공간으로서의 명월관은 어느새 사라져 갔다.
각주
5] 서울의 기생촌, 그 공간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의 외적 팽창은 그에 따라 지역적 분화, 인구 집중, 주택난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선 문화촌(동소문 안), 빈민촌(수구문 밖 신당리), 서양인촌(정동), 공업촌(용산), 노동촌(경성역 봉래교), 그리고 기생촌(다옥정, 청진동, 관철동, 인사동 일대)과 같은 특수촌이 형성되면서 각각 거기에 걸맞은 생활풍속도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서울의 요릿집과 권번 근처에 있었던 다방골, 즉 다옥정(茶屋町) 일대에는 기생들이 모여 사는 기생촌이 있었다. 기생들은 주로 월셋집에 살았는데, 그들이 사는 동네는 낮에도 장구, 가야금 소리가 노래와 함께 흘러나와 분위기를 돋우고, 저녁이 되면 인력거꾼들의 소리로 시끄러운 풍경을 연출하였다.
당시 '다방골'은 본래 부자가 많기로 장안에서 유명하였는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곳 다방골의 지형은 거북이 모양으로 옛날부터 전쟁 중에도 재해를 입거나 화재 등이 일어난 적이 없으며 변란도 피해가는 지형이라 한다.
옛날 이 지역에 차를 마시는 공식예절인 다도(茶道)와 다례(茶禮)를 주관하던 사옹원(司甕院, 궁중에 음식 식품을 조달하던 관청)에 속한 다방(茶房)이 있었기 때문에 '다방골'이라 불렀던 데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14년 4월 일제에 의해 남부 중다동과 모교 상다동, 하다동 각 일부를 합쳐 다옥정(茶屋町)으로 하였고, 광복 후에 이 '다방골'을 한자로 고친 것이 '다동'이다.
1924년에만 해도 서울 안에 기생이 대략 300명이 있었는데 '다방골'에만 60명이나 되었다. 이 때문에 '다방골' 하면 먼저 기생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아침 늦게까지 자는 잠을 '다방골잠'이라 하기도 한다.
밤늦게까지 웃음을 팔고 노래를 팔고 돌아온 기생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날 수 없으니 그런 말이 생길 만도 하다. 또 '다방골'에는 대개 여유 있는 사람이 많이 살았던 까닭에 놀고먹는 그네들이 아침에 굳이 일찍이 일어날 필요가 없어서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이 대개 그 근방으로 모여 살아 기생촌이 생겨난 것은 요리점을 중심으로 하여 월셋집을 얻기 쉬워서였다. 기생들은 살림이나 식구가 단출했지만 대부분 밤잠도 못 자 가며 놀림감 노릇을 해서 번 그날 화대로 입을 옷, 집세와 잡비를 써야 했기에 넉넉하지 못했다.
어슴푸레한 석양을 바라보며 분첩을 들고 고운 얼굴을 다스리기 시작하는 고운 직업이라지만, 악착같아야만 살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하였다.1)
각주 : 1. 「三千里 杏花村」, 『삼천리』 제8권 제8호, 1936.8.1.; 윤백남(尹白南), 「藝術上으로 본 옛妓生·지금妓生」, 『삼천리』 제7권 제9호, 1935.10.1
7. 정체성의 혼란
1940년대 이전까지 절대 다수의 여성 음악인들은 기생이라는 사회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여성 음악가를 기생으로 한정했던 일제는 다른 방향에서 이들을 예술가로 인식하려 하였다. 일제는 1940년에 들어서면서 예술가들을 억압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기예증(技藝證)을 발급하였다.
기예증이란 음악인, 연극인, 대중가수 등에게 발급했던 일종의 허가증과 같은 것이다. 일제는 이 증서의 소지자에게만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허가하였다.1)
비록 기예증은 일제의 예술가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지만,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과거 기생으로 불렸던 여성 음악가들이 가무를 전문으로 하는 예술가로 인식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생이 다른 분야의 예술가와 함께 공식적으로 예술가로 인정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2)
권번의 기생들은 일종의 노동자로 이렇게 벌어 부모와 형제를 먹여 살리고 공부시키는 갸륵한 여자도 있는 반면에,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주인공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미혼청년이 기생한테 애정을 느껴 결혼을 약속하였지만 완고한 부모의 반대로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자 목숨을 끊는 일도 생겼다.
그 당시 봉건적인 구식 결혼과 자유연애 결혼과의 과도기에서, 부모의 명령으로 어려서 결혼한 남자들이 구식 여자에 대한 불만으로 기생을 불러 쉽게 사랑에 빠진 경우가 많았다.3)
일제시대 기생은 여자들에게 당시 법률이 당당하게 공인하는 하나의 직업이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기생의 생활은 사치스러웠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기생 중에는 문맹자가 많아 대개 지식이 부족했지만, 여러 손님을 겪었던 만큼 의사표시에 있어서 민첩하고 간곡한 점은 있었다.
일반인과 대화를 하면 노래 가사에서 기억한 구슬픈 어구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한(恨) 맺힌 호소가 그칠 줄 모르게 길어졌다고 한다.
그녀들을 가장 서럽게 하는 것은 '기생은 가장 편한 직업이다. 이 직업은 자기들의 인격을 완전히 앗아 버린다'고 하는 관념이었다. '나는 기생이다' 하는 생각이 자기들의 모든 직업적 행동을 용감하게 하는 동시에, 가끔씩 깊은 구렁 속에 자신을 빠트려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그래서 때로 자존심과 양심의 마음속으로부터 처절한 눈물을 흘리게 되는 때가 있었다고 고백하곤 하였다.
혹 손님들 중에는 한 기생을 기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사랑해주어, 백년가약을 마음으로부터 맺고 지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겪어보면 머지않아 변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결국 당시 화류계에서 남성들이 기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 일시 희롱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기생의 중심 표어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부지런히 돈 모으자' 하는 것뿐이었다. '여러 남성이 너에게 사랑을 속살거려도 귀기울이지 마라. 그것은 대개 다 헛것이오, 혹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일시적으로 인기가 좋고 명기 소리가 높아도 그것의 영원성을 믿지 마라. 봄이 가고 꽃이 늙어지면 문전이 냉락하리라'하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그녀들은 생생한 경험을 통해 '연애에 빠지면 대개는 반드시 망한다'는 공통 결론을 얻었다.
이처럼 돈을 벌기 위해 자기 가슴속에서 솟아 올라오는 순정의 싹을 꺾어야 한다는 모순된 결론을 체험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우리도 왜 사랑의 따뜻한 맛을 모르겠습니까?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곳에 쓰라린 눈물이 있고 아픈 한숨이 있습니다"라고 토로한다.
그렇다고 연애나 결혼생활을 아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남성을 대할 때마다 혹시 그 중에서 변하지 않고, 일생을 같이할 남자가 있을까 기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기생의 노래나 용모에 취한 화류 손님으로서가 아닌 오직 인간과 인간의 사랑으로서 만날 남성을 선택해서, 화류계를 떠나 따뜻한 가정을 일궈 아들딸 낳고 재미있게 사는 기생도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기생이 다 이와 같이 되리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 '늙어서 논두렁 비' 맞지 말자는 표어가 나왔다. 값싼 연애에 휘둘리어 그야말로 기생 노릇도 똑똑치 못하고 얼치기로 학생을 흉내내다가는, 그야말로 최종에는 '논두렁 비' 되게 된다고 여겼다. 그저 기생은 '기생질' 할 때에는 기생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권번 기생의 회한을 표현한 듯한 사진(기생 오산월)
그녀들의 유일한 목적인 돈벌이가 '놀음채'였다. 첫 시간에 대한 놀음채는 1원 95전이고, 그 다음부터는 1원 40전이었다. 그 중에서 자기 소속 조합에서 1할을 떼고, 요릿집에서 1할 5부를 떼었다. 그리고 사랑 놀음(혹은 외출)이라고 가면 한 시간 놀아도 또는 하루 종일 놀아도 10원이었다. 이런 기준으로 건강하고 이름 있는 기생이면 매달 100-200원 이상 가능했다.
그 외에도 각 방면으로 수입이 있어서 자기만 단단히 마음을 먹으면 착실히 돈을 모을 수가 있었지만, 월수입 50원에 불과한 기생도 많았다. 그런데 이와 같이 돈을 벌자면 밤잠을 도무지 자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고통이었다. 오래 그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습관이 되어 밤을 꼬박 새고 몸을 인력거에 싣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그 직업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기생들은 놀음판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돈 주고 불러 왔으니,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몸을 함부로 취급하는 무정한 손님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기생의 처지에 대하여 동정해주고 이해하는 손님은 제일 좋아하고, 더욱이 노인 손님은 대개 귀여워해주고 까다롭게 굴지 않으므로 수월하여 가장 선호하였다고 한다. 그와 같이 돈을 모아서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기생 수만큼 다양하였다.
"무엇을 하던지 모아 놓고 보겠습니다."
"이 황금만능 세상에 돈 많이 있으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돈 모아서 잘 살아보겠습니다."
"돈을 모아서 화류계를 떠나는 날 순진한 남성을 돈으로 사서 일생을 살려고 합니다."
"23세까지만 기생 노릇을 하고 그 다음에는 공부하여 상당한 남자와 결혼하여 나도 사회의 일을 해보겠습니다."4)
사실 한평생을 기생으로 마친다는 것은 을씨년스러운 일이라고 그녀들은 말한다. 대부분의 기생들이 기다리는 것은 좋은 상대를 만나 행복하고 유복한 가운데 인생의 나래를 펴는 것이었다. 여자로 태어나서 어느 누군들 이와 같은 소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만 살얼음을 딛는 듯한 나날을 보내는 기생들이고 보면 한층 더 간절했고, 또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당대의 명사들이었기 때문에 잡힐 듯 말 듯 안타까운 마음은 더 컸다고 한다.
오늘은 비록 기적에 몸을 담고 있지만 일단 대감님이 잘만 보아주시면 내일은 당장 호칭이 달라지고 신세가 활짝 펴게 되는 것이었으니 평소에 행실을 조심하고 지혜와 덕 쌓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었다. 또한 남녀 간의 사랑은 은근한 것이라지만 그럴수록 남의 눈에 빨리 띄게 마련이다. 요릿집이나 사랑 놀음에서 불러도 임자 있는 기생은 '귀먹었다'고 한마디만하면 다들 알아들었다.
귀먹은 기생이라면 손님들이 별로 찾지 않았고, 동료 기생들은 자기들 일처럼 숨을 죽이고 사태의 발전을 눈여겨봤다. 귀먹은 상대가 잘 풀리고 제대로 발전돼 가면 드디어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는 것이었다.
또한 기생과 손님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대령기생이라는 것도 있었다. 어느 대감이 어느 한 기생만을 계속해서 부른다면 그 기생은 그 대감의 대령기생이었다. 어쨌든 사랑의 열매가 결실되어 양반이 기생을 맞아들이는 것을 그때말로 '떼들인다'고 했다.5)
이처럼 일제시대의 기생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드러내고 있다. 꽃다운 나이에 뭇 남성에게 웃음을 파는 시간만큼 적지 않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지만, 흔들리는 인력거 안에서 새벽녘 집으로 돌아가면서 흘리는 눈물도 그녀들만 갖는 회한이었다.
'기생'이라는 위치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신분상으로 미천한 자리매김을 당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기생 개개인이 재능이나 출중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지의 여부, 당대를 놀라게 할 만한 스캔들을 만들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이른바 잘 나가는 기생과 그렇지 못한 기생으로 갈리는 운명이 지워짐 또한 피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당시 조선 전체에는 이미 수천여 명의 기생이 분포하고 있었다. 그들이 생활고에 쫓겨 그 길을 택하기도 하였고 넘치는 개개인의 '끼'를 분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선택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생들은 그들만의 문화적인 고유 영역을 확보하고 싶어 했고, 거기에 뜻을 함께 한 기생들이 적극적인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 『장한(長恨)』이라는 월간잡지의 발행이다. 기생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 혼란을 사회운동으로 극복해보자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1927년 발간된 기생동인지 『장한』 창간호 표지. "동무여 생각하라, 조롱 속에 이 몸을"처럼 자신들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발간 초기의 의욕을 채우지 못한 채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기생들의 넋두리 모음집으로 그치고 말았다는 인상도 지울 수 없다. 여하튼 당시 언론에서 창간호의 발간시기와 발간인까지 밝히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시대가 변하면 기생도 변하고 따라서 언론도 변해가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장한』 창간호의 표지 복판에 "동무여 생각하라, 조롱 속에 이 몸을"이라 적혀 있고 『장한』의 발기인은 김보배 외 17인으로 밝히고 있다.
『장한』은 1927년 1월 10일자로 창간된 기생들의 동인지이다. 2호가 나오고 그후 속간이 되었는지는 미상이다.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김보패(金寶貝, 김보배), 인쇄인 노기정(魯基禎), 인쇄소 한성도서(주), 발행소 장한사, A5판 118면, 정가 40전이다. 이 잡지는 소설가 최서해(崔曙海)가 편집한 것으로 전한다.
이 책 8쪽에는 '지분사 광고모집'이란 사고(社告)가 있다. 지사와 분사를 공개모집한 점으로 미뤄 장한 편집진은 이 잡지를 지속적으로 발간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에 실린 내용은 사회비판, 기생 권익옹호 등 현실참여적 글에서부터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1931년에 발간된 잡지 『동광』 제28호에는 한청산의 「기생철폐론」이란 글이 실린다. 조선이 외래문화와 접촉하여 얻은 것 중에 가장 악한 물건의 하나가 이 기생 부르는 연회제도라고 비판한 글을 보자.
상거래를 하려고 해도 기생, 학교 입학운동을 하려고 해도 기생, 이권운동·취직운동에도 기생, 학생의 송별회에도 기생, 신년에 기생, 꽃 피었다고 기생, 뱃놀이에 기생, 약수터에 기생, 달구경하자고 기생, 망년하자고 기생, 사시사철 기생이니 이러고도 이 사회가 시들어 빠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늙은이도 기생, 젊은이도 기생, 교원도 기생, 생도도 기생, 실업가(失業家)도 기생, 실업가(實業家)도 기생.6)
이렇듯 193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 기생의 연회 유행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위축되고 사회변화에 뒤처지는 대상이며 청산해야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바로 기생은 근대화, 여성사, 식민주의, 젠더, 계급 등의 문제들이 한덩어리로 어우러져 있다. 근대화 과정의 모순들이 한꺼번에 농축된 문제로서의 기생은 문화콘텐츠의 원형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7)
조선사회에서 유일하게 여성 문학과 전통 예술을 계승하였던 '기생'은 매력적인 문화콘텐츠의 대상이다. 더구나 문화콘텐츠의 스토리텔링 분야에서 탁월한 제재와 소재가 될뿐더러 대외 경쟁력도 뛰어나다. 머지않아 우리나라 문화의 콘텐츠에서 비교우위로 내세울 수 있는 '국가대표' 브랜드 중에 하나가 바로 기생이다.
기생제도는 조선시대에 발전하여 자리를 굳히게 되어, 기생이라 하면 일반적으로는 조선의 기생을 지칭하였다. 기생은 사회계급으로는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서에 능해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등 특이한 존재였다.
권번은 정식 국악교육기관은 아니었으나 민속음악의 교육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기생의 이미지를 '창기' '작부'와 동일시하게 된 계기는 일본의 성풍속이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는 인식 없이 일본의 성문화 관점에서 예악문화의 계승자였던 권번 기생을 대하면서 우리 기생이 갖고 있던 아우라(Aura)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타락한 소수의 사이비 기생과 유녀들이 '기생'으로 참칭하면서 기생 이미지는 왜곡되었다.
뭇사람들이 '기생 파티'란 말을 거부감이 없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질 면에서나 역사적 시각에서나 기생의 이미지는 보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지켜낼 의무는 기생 연구자의 몫으로도 남겨져 있다.
각주
1. 이창배, 『한국가창대계』, 홍인문화사, 1976, 171쪽.
2 . 권도희, 「기생조직의 해체 이후 여성음악가들의 활동」, 『동양문학』 25집, 서울대 동양음악연구
소, 2003, 150쪽.
3 .조용만,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30년대의 문화계", 1984.8.27.
4 .「동아일보」 1928.3.12. ; 1928.3.14.
5 .이난향, 「중앙일보」 1970~1971년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明月館', 1971.
6 .韓靑山, 「妓生撤廢論」, 『동광』 제28호, 1931.12.1.
7 .전경수, 「추천사-"기생의 사회사", 스티그마를 겨냥한 칼을 갈다」, 『꽃을 잡고』, 경덕, 2005.
저자소개 - 신현규
중앙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남서울대, 선문대, 동남보건대, 극동정보대 출강.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뜨는 콘텐츠, 조선의 기생」, 민속박물관대학(사)에서 「우리나라의 기생」을 특강한 바 있다. 저서로는 『일제강점기 기생 인물생활사 : 꽃을 잡고』 『평양기생 왕수복, 10대가수 여왕되다』 등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일제강점기의 '기생'에 대한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성향에서 출발하고 있다. 기생들은 적어도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상은 전통예악 문화의 계승자이면서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이기도 하였다. 근대 이후 타락한 소수의 사이비 기생과 유녀들이 '기생'으로 참칭하면서 기생이미지는 왜곡되었다. 그러나 본질에서나 역사적 시각에서 기생의 이미지는 보존되어야 하며 이를 지켜낼 의무가 기생 연구자의 몫으로도 남겨져 있다.
〈관심사와 연구계획은〉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서 좀더 나아가 앞뒤를 보태고 좌우를 덜어내서 『한국기생사』를 쓰고 싶다. 그 시작점으로 기생의 용어부터 재정립하려고 한다. 기생의 인물생활사를 반환점으로 삼고, 종착점은 우리나라 기생의 역사가 될 듯 하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