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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그 예수께서 다시 비유들 안에 말씀하셨습니다(마 22:1).
마태복음 22장 2-3절에 “천국은 결혼식을 만든 왕에게 비교되나니. 그가 그의 종들을 결혼식들로 부름을 받은 자들을 불렀기에 파송하였고, 그들이 오기에 원하지 아니하고 있었노라(were unwilling)”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식”(가모스)은 “결혼식”, “결혼”(marriage)을 뜻합니다. 영어 성경들에 “결혼식 축연”(wedding feast), “결혼식”(marriage), “결혼식 연회”(wedding banquet) 등으로 번역됩니다. 결혼식은 잔치를 베풀기에 적당하니 “결혼 잔치”를 뜻할 수 있겠습니다. “잔치”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미쉬테)를 번역합니다(창 29:22).
결혼식 축연은 사랑과 웃음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베풀어집니다. 복음 잔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베풀어진 것입니다.1)
1. 부름 받은 자들에게 결혼식으로 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절에 “보라 나의 정찬을 내가 준비하였으며 나의 황소들과 살찐 것들이 제사함을 받았고 모든 것이 준비가 되었으니 당신들은 그 결혼식 잔치 안으로 이리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왕은 그의 황소들과 살찐 짐승들을 잡아서 정찬을 준비하였습니다. 결혼식 정찬 준비에 들어간 값비싼 비용은 모두 자신이 지불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초청에 값을 지불하지 아니하고 응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 왕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있는 잔치에 초청하였습니다(마 22:4). 복음의 잔치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갈 5:22).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잔치를 준비하시고서 결혼식으로 초청하셨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준비가 된 까닭에 그 결혼식 축연에 오기만 하면 됩니다.
왕의 황소와 살찐 것들이 제사함을 받았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복음 잔치에 희생 제물로 주셨습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하나뿐인 외아들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외아들인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정찬에 오기 위해 사람이 지불할 것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여서 값없이 참석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왕의 잔치에 초대 받은 사실 자체만으로도 존귀하고 명예로운 것이며, 왕의 초대는 참으로 황송한 일입니다.
가장 귀한 외아들을 희생 제물로 제공한 왕의 잔치에 오기를 거절하고 왕에게 대항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마태복음 22장 5-7절에 “부주의한 그들이 들로, 그 사업에 떠나가나. 그의 그 종들을 붙잡은 그 남은 자들은 학대하였고 죽였으나. 군대들을 보낸 왕이 저 살인자들을 멸망시켰고 성읍을 불태운지라”고 하였습니다.
5절의 “돌아보다”는 동사(아멜레오)는 “부주의하다”를 뜻하며 “아무 주의도 기울이지 아니하다”(pay no attention)로 번역되었습니다. “무시하다”(make light of)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주의(注意)”라는 한자어는 “마음에 새겨 두고 조심하는 것”을 뜻하며, “어떤 한 곳이나 일에 관심(關心)을 집중하여 기울이는 것”을 뜻합니다.
“관심”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뜻하는 말로, 그들은 왕의 정찬에 관심이 없었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하여야 하는 문제에 아무 주의도 기울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 동사(아멜레오)는 “반역하다(rebel)”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하였는데 그들이 주의하지 아니한 것은 왕에 반대하여 반역한 것입니다(렘 4:17). 그들이 왕의 정찬에 주의하지 아니한 것은 반역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초청된 자들은 결혼식에 그들의 뜻을 쏟지 아니하였습니다(마 22:5). 그들은 마음에 새겨 두지 아니하였고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 잔치에 부주의하였고 무관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영혼의 문제를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무관심하며, 많은 사람은 온통 세상의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정성을 기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초청에 응하지 아니하는 주된 이유들의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땅의 것과 보이는 것과 먹고사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결혼식에 비유된 하나님의 왕국과 영혼의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가장 주의하여야 할 문제에 부주의하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위해 만드신 잔치를 무시하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과 천국에 관심을 가지고 영원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에 대한 관심보다 영원한 삶에 대한 관심이 더 커야 합니다.
복음의 초청을 경시하는 것은 최고로 중요한 것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지 점검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영원히 가지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이 땅의 것들은 무가치하고 순간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과 구원이 가장 소중함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의 잔치에 부르신 초청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죄인들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결혼 잔치를 무시합니다.2) “무시(無視)”는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하는 것”을 뜻하며,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잔치를 얕보고 깔보고 업신여겨 봅니다.3)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가당한 것인가요?
이 사람들은 풍성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아니하는데, 하나님의 왕국의 잔치가 풍성한 것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복음을 업신여기고 얕보는 것은 정말 어리석고 무서운 일입니다. 이 사람들은 왕의 아들을 업신여김으로써 왕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조소 어린 자세로 대우하는 것은 극악한 죄입니다. 왕의 아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은 왕을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4)
왕의 초청을 무시한 것은 복을 무시한 죄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영원한 지옥의 현실을 무시하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때에 부주의함으로 복음을 소홀히 여깁니다.5)
또한 복음에 집중하면서도 복음을 소홀히 여길 수 있습니다. 말씀에 주의하면서도 다른 것을 그 마음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반(半)은 종교적이고 반은 세상적인 사람들입니다. 예배당 출석이 사업에 도움이 되기에 출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6)
그들 중 일부는 결혼 잔치의 훌륭함을 몰라서 경홀히 여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모르고 복음의 가치를 모르기에 비웃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시험해 본 적도 없으면서 싫다고 말합니다.7)
어떤 사람들은 왕보다 잔치를 더 잘 준비할 수 있다고 교만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얕보는 것은 복음을 믿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8)
사람들은 너무나 세상적인 자들이라서 복음을 못 믿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에 전능한 재물을 믿습니다.9)
한 사람은 자신의 들판으로 다른 사람은 그의 비즈니스에 떠나갑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일로 너무 바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오지 아니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돈을 벌려는 욕심에 하나님의 왕국을 놓친 것입니다. 그들은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소홀히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의 잔치를 거절하고 그의 왕국에 들어오지 아니할 때에, 그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전능한 재물을 믿다가 지옥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왕국의 잔치에 들어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선택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원한 고통을 선택한 것입니다.
2. 출입구들에 가서 결혼식에 부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8-9절에 “부름을 받은 자들이 합당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길들의 출입구들 곁에 가고 발견한 만큼들을 결혼식들로 부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출입구”(디엑소도스)는 “출구”, “입구”를 의미합니다. “~을 통하여”(디아)와 “떠남”(엑소도스)에서 유래하였으며, “~을 통하여 떠남”이라는 뜻이겠습니다. “'빠져 나가는 길”을 뜻합니다.
“부름을 받은 자들”은 유대인들인데 그들이 합당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왕은 그의 종들에게 다른 손님들인 이방인들을 초청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방인들은 처음에는 전도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사람들입니다(마 10:5).
구약성경에서 “출입구들”은 “경계”와 “샘[泉]”이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샘”은 물이 지면 위로 나오는 출구이기 때문입니다(왕하 2:21, 시 1:3). 또한 이스라엘의 국경의 한계지점을 설명할 때에 쓰였습니다(민 34:4). 그러므로 “출입구”는 “국경”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갈릴리와 데카폴리스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르단의 저쪽에서부터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따랐습니다(마 4:25).
여기서 “많은 군중들”은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군중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과 함께 산상수훈의 청중이었습니다(마 7:28-29).10)
마태복음에 기록된 갈릴리와 데카폴리스와 유대와 요르단의 건너편은 12지파에게 분배된 이스라엘의 땅과 비슷하게 맞아 떨어집니다.11)
“출입구”는 “이스라엘의 땅의 경계”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만 제한되었던 전도는 이제 모든 민족에게 확장됩니다.12)
결혼식 비유는 앞의 비유들과 달리 해석을 제시하지 아니합니다. 이 비유는 초청의 기회가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된다는 내용입니다. 왕의 종들이 ‘국경’에 가서 거기에서 뻗어 나온 길들에서 만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합니다.13)
당시 국경은 명확하게 잘라낼 수 없는 국경지대였습니다. 이러한 국경지대 근처의 길들은 이방인들도 다니는 길이었습니다. 왕은 그의 종들을 국경지대로 보낸 것입니다.14)
왕의 명령을 통해,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되었던 복음 전파가 국경지대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거부하여 이방인들이 이 잔치에 참여할 기회가 얻게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안 됐지만, 이방인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감사할 일입니다.
3. 그 길들 안으로 나간 저 종들이 모든 자들을 모았습니다.
마태복음 22장 10절에 “저 종들이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을 모았으며, 결혼식이 기대는 자들의 가득하게 함을 받은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았던 결혼식이었습니다. 처음 초청을 받은 자들이 오리라고 기대하였으나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이치에 합당하게 말해도 그들은 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15)
왕이 다른 종들을 파송하여 전하어도 그들은 오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말씀 잔치에 오고 싶지 않은 것을 딱 잘라 말합니다. 그들은 종교적 어투조차 참아내지 못하고 신경을 쓰고 싶지 아니하며, 십자가를 욕하고 헐뜯고 복음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힘껏 비난합니다.16)
그들은 부름을 받았으나 결혼식 잔치에 합당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적대감을 가졌기 때문에 오지 아니합니다.17)
왕의 아들 결혼식에 손님이 없다는 상황은 비통한 전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질 것입니다.18)
영혼 구원 없는 교회는 생명 출생의 가장 큰 기쁨을 놓치게 됩니다.19) 교회의 커다란 기쁨은 믿고 구원영생을 받는 사람들이 생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준비하셨는데 거주할 자가 없으면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복음 잔치에 초청을 받을지라도 오기를 싫어합니다.20)
더 온전한 초청을 통하여 잔치 자리가 비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21) 이 잔치의 초청 대상자가 유대인들에게 한정되지 아니하게 된 것입니다.
더 공개적 초청을 통하여 잔치 자리가 비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더 분발된 초청을 통하여 잔치 자리가 비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22) 종들이 잔치를 준비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왕의 마음을 헤아린 것입니다.
우리의 초청의 말로써만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예수님께 나오려면 성령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이셔야 합니다.23)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할 때에 먼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셔야만 초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잔치에는 선한 자들만이 아니라 악한 자들도 모아야만 합니다.
그 결과로써 잔치가 기대는 자들로 가득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24) 잔치의 반대자가 없을 경우보다 더욱 성공적인 잔치가 되었습니다.25)
그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몇 달 동안 고기를 맛본 적이 없었는데 아무 자격 없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면 예수님의 피는 더 귀합니다.26)
그날의 기쁨은 다른 자들이 왔을 경우보다 더 놀랍게 표현되었습니다. 처음 초청을 받은 자들이 왔었다면 대단히 거만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먹지 못하던 자들은 기쁨으로 잔치에 참석하였습니다.27)
빈손 들고 와서 십자가를 붙들며 의가 없어도 도와주심 바라는 자들이 “만세 반석 열리니” 천국 잔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찬송가 494장).
천국 잔치에 차려진 음식은 풍성하기에 영혼을 배부르게 만듭니다.28) 복음은 자기를 내세우는 자들보다 복음을 필요로 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자기의 의(義)로 구원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람은 복음을 거절하나,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천국 잔치에 와 배부를 것입니다(마 5:6).
이들은 자격 없는 자들에 주신 구원영생의 기쁨을 가지고 감사합니다. 이들은 복음 속에 트집 잡는 자들과 달리 죄 용서의 기쁨을 누리게 되며, 천국 잔치는 거기에 기대는 자들이 가득함으로써 실패하지 않습니다.29)
모든 사람이 복음을 거절하여서 천국이 텅 비면 하나님의 패배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용서받은 죄인들로 가득할 것이므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4. 잔치에 결혼식의 옷을 입지 아니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11절에 “왕이 기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에 들어왔으며 그가 결혼식의 옷을 입지 아니한 사람을 알아본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기 위하여 그 왕이 들어왔습니다(마 22:11). 그가 거기서 결혼식의 옷을 입지 아니한 사람을 알아보았습니다.
본문 22장 11절에 “예복”으로 번역된 말은 “결혼식의 옷”을 뜻합니다. “결혼식의 옷”은 천국의 백성이 갖추어야 할 조건입니다.
구약성경에 “옷”은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공의”를 뜻합니다. 신약성경에 “옷”은 8번 나오며 본문에 “결혼식의 옷”으로 쓰입니다. 학자들은 “결혼식의 옷”을 “삶”이나 “칭의”로 해석합니다.30)
“결혼식의 옷”은 그의 존재와 신분에 합당한 그의 삶을 가리킵니다.31) “결혼식의 옷”을 “칭의”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결혼식의 옷”은 “천국 백성의 구별된 표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32)
저는 “결혼식의 옷”을 “칭의를 증명하는 성화의 삶”이라고 정의하는데 참된 믿음은 “믿음의 순종”으로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롬 1:5).
그가 “결혼식의 옷을 가지지 아니하고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하였으나 그가 말을 못하게 함을 받았습니다(마 22:12).
우리는 그 왕이 들어오는 심판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결혼식의 잔치 자리에 우리를 찾아 들어오십니다.33)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것은 성도들에게 대단히 큰 복락입니다. 그것은 잔치 중 가장 영화로운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식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 합니다.34)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찾아 들어오셔서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반자들을 가려내시는 때를 알지 못합니다.35)
하나님께서는 이 결혼식 잔치에서의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배역한 자들을 철장으로 치러 오십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거짓된 믿음입니다.36)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질문하십니다. 그는 왕의 아들을 존중하지 아니하면서 거기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나, 생명 있는 경건을 모르는 자입니다.37)
여러분이 결혼식의 옷을 입지 아니하였다면 지금 입어야만 합니다. 그 사람은 의도적으로 주의 명령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묘사합니다.38)
“말을 못하다(be speechless)”를 의미하는 그리스어(피모오)는 개역성경에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라는 한자어로 번역되었는데 “입이 있어도 말이 없다”라는 좋은 번역입니다. 재판의 때에는 변명하거나 회개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항복하고 결혼식의 옷으로 바꾸어 입어야만 합니다. 거짓된 신앙고백자들은 회개하기에 늦었음을 알 때가 올 것입니다.39)
그러므로 결혼식의 옷을 입지 아니하였다면 지금 바꾸어 입어야 하며, 지금이 아니라면 바꾸어 입을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아니할지도 모릅니다.
그 왕이 그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를 바깥의 암흑 안으로 쫓아내라 거기에 울음과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13).
이미 그 도끼가 나무들의 뿌리를 향하여 놓여 있으니(is laid), 좋은 열매를 만들지 않는 나무는 불속으로 던져집니다(마 3:10, 7:19).
우리의 오른쪽의 눈이 우리를 실족하게 만든다면 빼내고 던져야 하니, 우리의 온 몸이 지옥 안으로 던져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마 5:29).
우리의 오른쪽의 손이 우리를 실족하게 만든다면 자르고 던져야 하니, 우리의 온 몸이 지옥 안으로 가 버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마 5:30).
천사들이 그 인자의 왕국에서 장애물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모으고, 불의 풀무 안으로 던질 것입니다(마 13:41-42).
어부들이 끌어 올려진 쓸모없는 고기들을 밖에 던졌습니다(마 13:48). 천사들이 악한 자들을 불의 풀무 안으로 던질 것입니다(마 13:50).
결혼식의 옷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은 암흑 안으로 내던져질 것입니다. 그가 암흑에 추방 판결을 받을 때 거기 울음과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식의 옷”을 가지느냐 안 가지느냐는 매우 중한 문제입니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결혼식에 합당한 “결혼식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마 22:11-13). 둘째로 신자들은 빛의 무기들로써 옷을 입어야만 하겠습니다(롬 13:12). 셋째로 우리는 예수 크리스트를 옷을 입어야 합니다(롬 13:14, 갈 3:27). 넷째로 새로운 사람을 옷을 입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엡 4:24, 골 3:10). 다섯째로 우리는 올바른 행동들을 옷을 입어야 합니다(계 19:8, 19:14).
예수님께서 모든 병과 약함을 치료하신다는 소문이 퍼졌고(마 4:23),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들과 간질병자들과 중풍병자들을 그에게 데려왔고 그가 그들을 치료하셨습니다(마 4:24).
성경에 악마는 추방하여야 되는 존재로 언급됩니다(마 7:22). 악마가 추방되듯이, 왕국 자손들은 암흑으로 추방될 것입니다(마 8:12).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밖의 암흑으로 추방될 것입니다.
“귀신”은 단순히 “그 영”(the spirit)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마 8:16). 예수님께서 그 영(the spirit)들을 말씀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악마들을 쫓아내시는 것을 악마들도 잘 압니다(마 8:31). 악마들은 예수님께서 “떠나가라”고 명령하시면 떠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귀신들린 벙어리 된 사람을 데려왔으며(마 9:32), 그 악마가 쫓아냄을 받고 그 벙어리가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마 9:33).
예수님께서 12제자에 영들(spirits)을 쫓아내게 하셨습니다(마 10:1).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악마들을 쫓아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10:8).
입으로 들어간 음식물은 배설물이 되어 변소로 쫓아냅니다(마 15:17). 더러운 영(spirit)들은 더러운 대변처럼 천국에서 쫓아냄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합당하지 아니한 자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는데 성전에 합당하지 아니한 자들은 성전에서 쫓아냄을 받습니다(마 21:12). 결혼식의 옷을 가지지 아니하면 암흑으로 쫓아냄을 받습니다(마 22:13).
5. 많은 자들이 부름 받으나 적은 자들이 선택됩니다.
마태복음 22장 14절에 “이는 많은 자들이 부름을 받으나(are called), 적은 자들이 선택됨이라(are chosen)”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인들과 악인들을 똑같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부르시나 부르심을 받은 모두가 부르심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22장 14절은 10-13절만의 결론이 아닌 비유 전체의 요점입니다. 끝에까지 견디는 사람들만이 선택된 사람들이며 구원을 얻습니다.40)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전체적인 무반응에 초점을 맞추는 비유입니다.41)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은 22장 14절을 앞에 20장 16절 뒤에 덧붙입니다. 부름 받은 자들은 많으나 선택된 자들만이 결혼식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으나 선택된 자들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인 반응으로 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선택되지 못한 자인데, 그 이유는 그 열매를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의 옷을 입지 아니한 사람도 결혼식에 왔던 사실로 유추할 때에 결혼식의 옷을 입지 아니한 사람도 결혼식 정찬에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결혼식의 옷을 입지 아니함으로써 선택되지 못한 것을 드러냅니다.
교리가 먼저라고 하는 자는 야고보서를 비하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교리는 말씀에서 나오며 교리를 주장하다가 말씀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믿음에 옳다고 함을 받는다는 교리 때문에 사람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이와 같은 말씀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결혼식의 옷을 입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게 되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며, 결혼식의 옷을 입어야만 하나님의 왕국의 정찬에 참석 가능한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왕명에 복종하는 것을 통하여 결혼식의 옷을 입는데, 왕이신 하나님의 왕명에 복종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선택된 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의 초청에 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 초청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소홀히 하여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한 결과, 하나님께서 그 대신 이방인들인 우리를 그 결혼식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잘못을 범하면 안 되며 하나님의 왕국을 부주의하면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에는 들어가고 싶다고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왕국의 결혼식에 알맞은 결혼식의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옷을 입지 아니한 자는 바깥의 암흑 안으로 쫓아냄을 받게 됩니다. 이 옷을 입지 아니한 자는 진정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마 8:10-12).
결혼식의 옷을 입지 아니한 자는 가라지에 불과합니다(마 13:37-42). 그는 불법을 행한 까닭에 하나님의 왕국의 바깥으로 쫓아냄을 받습니다.
그는 먹지 못하는 쓸모없는 물고기와 같은 사람입니다(마 13:47-51). 그는 악하였으니 불의 아궁이 안으로 던져져서 영원히 고통을 받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의 부름에 응답을 하여, 믿음으로써 칭의를 받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은 “성화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며, “성화의 삶”은 사람이 진실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임의 증거입니다.
“결혼식의 옷”으로 비유된 “성화의 삶” 없이 잔치에 참석할 수 없으며, “성화의 삶”이 없는 이유는 신앙고백이 진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성령님의 이끄심에 따라 “성화의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항상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이 잔치에 참석할 수 있을지 점검하여야만 하며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알곡과 가라지를 알아보시고 분리하시는 순간에 결혼식의 옷을 입지 않은 것으로 판별되어 쫓아내어지면 너무 늦습니다.
그때에는 쫓아냄을 받은 것으로 인하여 울음과 이를 갊이 있을 뿐이며 암흑에서 나와서 결혼식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2번째 기회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를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라 믿음의 순종의 삶을 삶으로 증명하여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여러 가지 천국 비유들을 통하여 바로 이것을 경고합니다. 지금 알곡과 가라지가 섞였고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섞였습니다.
자신이 결혼식 잔치에 참석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앉아 있었는데, 결국은 자격이 없어서 바깥의 암흑 안으로 쫓아내어질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스스로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들의 착각인 것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들은 그때까지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될 때에는 너무 늦은 것이며, 그때에는 심판의 결과를 돌이키지 못하기에 울면서 이를 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부름을 받지만 적은 사람들만 선택됩니다. 적은 사람들만이 생명으로 데리고 가는 좁은 문을 발견하여 들어갑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결혼식의 옷을 입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왕명에 순종하여 결혼식의 옷을 입는 자들이 복됩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가 다 됩시다!
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381-382.
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03.
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04.
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05-408.
5)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09-411.
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12-415.
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16-418.
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19-421.
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22-423.
10) 김태섭, “마태복음 22장 9절에서 ‘aiJ diexovdou" tw'n oJdw'n’의 해석”, 『신약논단』 제21권 제4호 (2014): 911.
11) 김태섭, “마태복음 22장 9절에서 ‘aiJ diexovdou" tw'n oJdw'n’의 해석”: 912.
12) 김태섭, “마태복음 22장 9절에서 ‘aiJ diexovdou" tw'n oJdw'n’의 해석”: 913-914.
13) 김태섭, “마태복음 22장 9절에서 ‘aiJ diexovdou" tw'n oJdw'n’의 해석”: 916-918.
14) 김태섭, “마태복음 22장 9절에서 ‘aiJ diexovdou" tw'n oJdw'n’의 해석”: 918.
15)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36-438.
1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40-442.
1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43-444.
1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45-446.
1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47.
20)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48-449.
2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50.
2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51-452.
2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54.
2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55.
25)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56.
2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57.
2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58.
2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59.
2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460.
30) 임삼규, 『마태복음 22:1-14에 나타난 혼인잔치 비유의 연구 : 예복(e[ndumagavmou)의 의미와 그 역할을 중심으로』 (석사학위 논문,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2012), 61-63.
31) 최갑종, 『예수님의 비유연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346.
32) 임삼규, 『마태복음 22:1-14에 나타난 혼인잔치 비유의 연구』, 65-66.
3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509-510.
3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511-513.
35)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514-515.
3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516-518.
3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519-521.
3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522-523.
3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7』, 525-526.
40) David L. Turner, 『BECNT 마태복음』, BECNT 성경주석, 배용덕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677-679.
41) Donald A. Hagner, 『마태복음 14-28』, WBC 성경주석 33, 채천석 역 (서울: 솔로몬, 2000), 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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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늘 수고하시는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감사 댓글 달아 주신 분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귀한 말씀 감사 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