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대〕 금강유역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출토되었고, 1965년에 양촌면 신기리에서 발견된 고인돌, 채운면 하리, 성동면 원북리, 은진면 토량리와 등화리, 노성면 송당리, 연산면 청동리 등의 고인돌에서 출토된 마제석검과 동검 등으로 선사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다.
백제의 웅진문화권 시절이던 동성왕에서 성왕 때에는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으면서도 성을 쌓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화전 양면정책을 썼던 것 같다. 연산의 황산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의 산성들이 모두 이 때에 축성된 것이다.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기울어져가는 백제를 구하려고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황산벌에서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계백의 묘가 부적면 충곡리에 있다.
이 지방은 백제시대에는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과 덕근군(德近郡)에 속했고, 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황산(黃山)ㆍ이산(尼山)ㆍ덕은(德殷)ㆍ석산(石山)의 4군으로 개칭되었다.
〔고 려〕 고려 초에 황산이 연산(連山)으로, 덕은(德殷)이 덕은(德恩)으로, 석산이 석성(石城)으로 개칭되었다. 왕건은 후백제의 신검으로부터 황산에서 항복을 받아 삼한을 통일하게 된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하여 황산을 천호산으로 고치고 그 밑에 개태사를 지었다.
968년(광종 19)에 제작한 반야산 밑의 미륵보살석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륵상일 뿐 아니라 고려시대의 불교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러한 예술과 신앙이 고려왕조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조 선〕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도읍지를 논산의 계룡산 신도안에 정하기로 하고 2월부터 역사를 시작했으나 반대의견으로 인해 중지하고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중엽에 와서는 논산일원이 예향(禮鄕)을 이루는 고장이 되었다.
김장생(金長生)이 그 선구자로 많은 학자들이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그 아들 집(集)은 김현(金暢)과 아울러 당대의 예학의 연원을 잇는 주자학의 선구자이었다. 한편 노성의 윤증(尹拯)은 송시열(宋時烈)ㆍ유계(兪棨)와 그 장인 권시(權魅)에게서 배워 예학에 밝았고 당시 소론의 영수로 조야의 관심을 끌었다.
그 뒤 후학들이 학통을 계승하여 이 지방에 서원을 세우고 인재를 길러내었다. 강경의 죽림서원(竹林書院)을 비롯하여 돈암서원(遯巖書院)ㆍ충곡서원(忠谷書院)ㆍ휴정서원ㆍ효암서원(孝巖書院)ㆍ행림서원(杏林書院)ㆍ노강서원(魯岡書院) 등이 있었다.
덕은군은 시진현(市津縣)과 합쳐져 세종 때 은진현(恩津縣)으로 되었다. 1646년(인조 24)에 이산현 사람인 유탁(柳濯)이 모반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은진ㆍ이산ㆍ연산이 폐합되어 평천역(平川驛) 서쪽에 은산현(恩山縣)이 설치되었다가 1656년(효종 7)에 세 현이 다시 설치되었다. 이산현(尼山縣)은 영조 때 이성현(尼城縣)으로, 정조 때 노성현(魯城縣)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논산에 남아 있게 된 서원은 연산의 돈암서원과 광석의 노강서원뿐이었으나 그 뒤 거의 복원되었다.
〔근 대〕 1919년 3월 논산읍을 선두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강경읍과 연산면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행진이 계속되었다. 논산출생의 김태오(金泰午)는 논산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옥사하였다. 그 밖에 권기수(權基洙)ㆍ배영식(裵榮植)ㆍ이충규(李忠圭) 등이 옥사하거나 총살당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은진군과 연산군의 전부와 노성군의 소사면을 제외한 전부와 석성군ㆍ공주군ㆍ진잠군(鎭岑郡) 등의 일부지역이 병합되어 논산군이 설치되었다. 1931년 강경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개 읍 14개 면이 되었으며, 1938년에는 논산면이 읍으로 되었다.
〔현 대〕 1962년 두마면에 신도안(新都內)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3년 1월 1일 구자곡면의 7개 이(里)와 전라북도의 익산군 황화면이 합해져 연무읍으로 승격되었고, 구자곡면의 나머지 삼전리ㆍ왕암리ㆍ야촌리는 가야곡면에, 시묘리는 은진면에 편입되었다.
1966년 7월 10일 마전(麻田)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73년 가야곡면의 석서리가 양촌면으로 편입되었다. 1983년 2월 15일 가야곡면의 중산리와 양촌리 일부가 양촌면에, 양촌면의 신량리가 연산면에, 은진면의 토량리 일부가 연무읍에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는 은진면 강산리ㆍ내동리ㆍ관촉리가 논산읍에, 1989년 1월 1일에는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가 두마면에 편입되었다.
1993년 군간 경계 조정으로 상월면 원오리 일부가 공주군 계룡면 월곡리로 편입되었으며, 1996년 3월 1일 도농복합으로 논산군 전체가 시로 승격되고, 논산읍을 취암동과 부창동으로 분리되었다.
2) 논산시 유적 유물
양촌면의 논산신기리지석묘(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8호)와 성동면 원봉리의 남방식 지석묘가 있다. 특히 신기리출토 마제석검과 석촉은 학술적 가치가 크다. 채운면 심암리, 성동면 원북리와 등화리ㆍ관촉동ㆍ강산동 등지에서 마제석검과 석촉, 연산면 청동리에서 청동검, 노성면 송당리에서 동검과 동과가 발견되었다.
또한 연산면의 논산표정리고분군(충청남도 기념물 제94호), 가야곡면의 논산육곡리고분군(충청남도 기념물 제95호)이 있고, 양촌면의 신흥리고분군, 연산면 백석리ㆍ표정리의 백제고분군이 있다.
산성으로는 연산면 표정리의 황산성(黃山城, 충청남도 기념물 제56호), 등화리의 논산황화산성(論山皇華山城, 충청남도 기념물 제92호)을 비롯하여 부적면 외성리의 외성산성(外城山城,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7호)ㆍ대둔산성ㆍ달이산성(達伊山城)ㆍ청동리산성(靑銅里山城)ㆍ산직리산성(山直里山城)ㆍ득안산성(得安山城), 노성면 성당리의 논산노성산성(論山魯城山城, 사적 제393호), 강경읍의 옥녀봉산성, 양촌면 모촌리의 모촌산성(茅村山城) 등이 있다.
봉수로는 강경산봉수ㆍ황화산봉수ㆍ노성봉수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관촉동의 관촉사(灌燭寺) 경내에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ㆍ관촉사석등(보물 제232호)ㆍ관촉사배례석(灌燭寺拜禮石,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ㆍ관촉사석문(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ㆍ은진관촉리비로자나석불입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8호)과 석탑이 있다.
또한 연산면 천호리의 개태사지(開泰寺址, 충청남도 기념물 제44호)와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제219호)ㆍ개태사철확(開泰寺鐵泳,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ㆍ개태사오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ㆍ개태사지석조(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 양촌면 중산리의 쌍계사 경내에 쌍계사대웅전(雙溪寺大雄殿, 보물 제408호)ㆍ쌍계사부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0호)가 있다.
그리고 부적면 신풍리의 영사암(永思庵,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9호)ㆍ논산신풍리마애불(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 그리고 연산면의 연산천호리비로자나석불(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ㆍ논산덕평리석조여래입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5호)ㆍ논산탑정리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0호)가 있다.
그 외에 벌곡면의 논산수락리마애불(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6호), 연산면 연산리의 송불암미륵불(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3호), 연산송정리마애삼존불(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8호), 두마면 두계리의 봉안사옥석불(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5호)ㆍ용화사석불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은진면 교촌리의 은진향교와 은진향교대성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3호), 노성면 교촌리의 노성향교와 노성향교대성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4호)ㆍ노성궐리사(魯城闕里祠, 충청남도 기념물 제20호), 연산면 관동리의 연산향교와 연산향교대성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7호), 임리의 둔암서원(遁巖書院, 사적 383호)이 있다. 그 밖에 광석면 오강리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0호), 부적면 충곡리의 충곡서원지(충청남도 기념물 제12호), 그리고 강경읍 황산리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 가야곡면 육곡리의 행림서원(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산로리의 효암서원(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 연무읍 금곡리의 금곡서원(金谷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8호)과 봉곡서원(鳳谷書院)과 연산면 임리에 김집선생사당(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4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두마면 두계리의 두계은농재(豆溪隱農齋,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금암리의 염선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6호), 노성면 내사리에 파평윤씨재실(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9호), 병사리에 충헌공윤전재실(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0호), 강경읍 황산리의 팔괘정(八卦亭,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과 임리정(臨履亭,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이 있다.
또한 연산면의 고정리양천허씨정려(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9호)와 연산리의 연산아문(連山衙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호), 채운면 삼거리의 강경미내다리(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와 야화리의 논산원목다리(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조선 건국초 국도로 내정되었던 두마면 정장리ㆍ부남리ㆍ석계리의 계룡산신도안주초석석재(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6호) 등이 있다.
그리고 노성면 장구리의 윤황선생고택(충청남도 민속자료 제8호)과 병사리의 파평윤씨종학당(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93호), 연산면 오산리의 임수택가옥(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2호), 교촌리의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 중요민속자료 제190호)ㆍ윤증가의 유품(중요민속자료 제22호), 상월면 주곡리의 이삼장군고택(李森將軍故宅,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7호)과 이삼장군유물(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3호) 등이 있다.
능묘와 비석으로 연무읍 금곡리의 전견훤묘(傳甄萱墓,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 은진면 용산리의 익성군신도비 및 무석(益城君神道碑-武石,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이 있다. 연산면 고정리의 김장생문묘배향교지(金長生文廟配享敎旨,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ㆍ김장생선생묘소일원(충청남도 기념물 제47호)ㆍ김계휘신도비(金繼輝神道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0호)가 있다.
또한 임리에 김집교지(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5호), 부적면 신풍리의 계백장군유적전승지(階伯將軍遺蹟戰勝地, 충청남도 기념물 제74호)ㆍ전계백장군묘(傳階伯將軍墓), 가야곡면 양촌리의 성삼문의 묘(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 벌곡면 양산리에 김집선생묘(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6호), 노성면 호암리에 김임신도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3호) 등이 있다.
전적류로는 연산면 관동리의 성주도씨종중문서(星州都氏宗中文書, 보물 제724호), 화학리에 익산대군영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9호), 성동면 우곤리의 남양전씨종중문서(南陽田氏宗中文書, 보물 제727호), 화지동의 신사임당화(申師任堂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4호), 부적면 부황리에 신임일기(辛壬日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351호) 등이 있다.
그 밖에 노성면의 연산화악리의 오골계(천연기념물 제265호), 광석면의 갈산리곰솔(충청남도 기념물 제27호), 가야곡면의 육곡리은행나무 등이 있다. 한편, 연산면 청동리에는 연산백중놀이(連山百中―,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4호)가 전승되고 있다.
〔연 혁〕 대한불교법상종에 속한다.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한 기념으로 창건하였다. 태조는 후백제의 신검(神劍)을 쫓아 황산(黃山) 숫고개를 넘어가서 마성에 진을 친 뒤 신검에게 항복받고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이것을 하늘의 도움이라 하여 황산을 천호산이라 바꾸고 절을 창건하여 개태사라 하였다.
창건할 때 이 절의 사치스러움은 극에 달하였고, 태조는 12월에 낙성법회(落成法會)를 베풀고 친히 소문(疏文)을 지었다.
그 뒤 태조의 영전(影殿)이 설치되어 기일마다 제사를 지냈으며, 태조의 옷 한 벌과 옥대 1요(腰)를 보관하였다. 국가에 중대한 일이 있으면 태조의 영전에 나아가 길흉을 점쳤는데, 1362년(공민왕 11) 공민왕이 이인복(李仁復)에게 강화도 천도 여부를 점치게 하였더니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왔으므로 천도를 중지하였고, 이듬해에 이인복을 다시 보내어 천도 여부를 점치게 하였더니 길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부터 퇴락하기 시작하였으며, 1428년(세종 10) 이 절이 연산현(連山縣) 내에 있는 것이 옳지 못하므로 풍년을 기다린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진언이 있어 세종이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하였다.
1432년 이 절의 승려가 큰 수정석(水晶石) 2과(顆)를 세종에게 헌상하였고, 세종의 불교진흥책으로 중흥의 기틀을 보였으나 그 뒤 폐허가 되었다.
절터에 삼존석불입상과 석탑·부도·공양보살상이 흩어져 있었으며, 1930년에 김광영(金光營)이 중건하여 도광사(道光寺)라 하였다가, 그 뒤 다시 개태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있으며,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19호인 석불입상과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인 철확(鐵泳),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인 오층석탑과 제275호인 석조(石槽)가 있다.
이 가운데 철확은 절에서 쓰던 큰 솥으로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이며, 절의 전성시에 장(醬)을 끓이는 그릇으로 사용하였다.
이 철확에는 많은 영이담이 전해지고 있다. 가뭄 때 사람들이 이를 끌어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을 옮겨 다녔으며, 1944년에 고철로 쓰려고 부수려 하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쳐서 파괴를 모면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서 개판된 불경으로는 1218년(고종 5) 간행된 ≪범서총지집 梵書摠持集≫이 있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있는 절터. 지정면적 5,412㎡. 충청남도 기념물 제44호. 개태사 경역은 크게 두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현재 삼존불의 보호각과 요사체가 있는 지역으로 사찰이 운영되는 현재의 개태사 지역이고, 다른 한 지역은 이 지역에서 동북으로 약 300m정도 떨어진 마을에 있는 유구인데, 이곳이 고려 태조의 진영(眞影)을 모셨던 건물지이다.
현재의 개태사 주변과 윗마을 일대에는 광범위하게 건물의 초석과 기단들이 널려 있어 사역이 원래는 현재의 규모보다 훨씬 넓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제219호)이 자리하고 있는 기단에 대한 발굴조사와 진전(眞殿) 건물지에 대한 조사이다.
1986년 문화재 보존사업의 하나로 보호각을 보수하던 중 건물 해체작업 과정에서 창건 당시의 초석과 기단 석재들이 나타나자 석불보호각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지형이 낮은 서쪽 부분에서는 초석들이 없어지거나 이동이 심했으나 동쪽에는 온전히 남아 있어 건물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대석의 모서리를 오목하게 처리하고 그 위에 면석을 세운 위에 지대석과 같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마련하였는데 남쪽 중앙에 계단 자리를 凸형으로 만들었다. 초석은 대형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동서 21.5m, 세로 10.3m이다. 동서 기둥 사이의 거리는 중앙칸이 5.1m이고 나머지 기둥 너비는 각각 4.1m이다. 남북간의 기둥 거리는 중앙 칸이 5.1m이고 남북 각 한 칸의 기둥 너비는 2.6m이다.
마을 쪽의 유구는 축대가 세 곳이고 건물지가 두 곳이며, 한 민가의 마당에 초석들이 있다. 발굴지역의 서쪽에 있는 축대는 높이 1.8m 길이 10m정도이다. 진전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89년에 있었다.
진전 자리는 두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남쪽에서부터 경사면에 축대를 쌓아 기단을 마련한 회랑 같은 유구와 그 위의 평지에 마련한 진전 자리이다.
남쪽 건물자리는 높이 3.2m, 길이 50.3m의 축대를 쌓아 마련하였는데, 교란이 심하여 건물의 규모를 파악할 수 없으나 평면형태가 凸형으로, 적어도 2차에 걸쳐 건물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추정되는 건물자리의 크기는 동서 길이 48.9m, 남북 너비 7m정도이다. 마을 남쪽에서 계단을 통하여 진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 건물 자리 북쪽에는 남쪽 석축과는 다른 커다란 자연 석재를 이용하여 추정 높이 2.3m정도로 쌓아 진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진전 유구는 중심축이 동으로 24。 기울어져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동서 방향의 기둥 간격은 3.5m로 일정하나 남북 방향의 기둥 거리는 중앙 2칸이 3.5m이고 남·북단(端)의 2칸은 2.4m이다. 여러 번 고쳐지은 흔적이 있으나 구체적인 연대 추정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 건물지의 특징은 불단에 해당하는 부분의 기단 유구인데, 중앙 북쪽에 치우쳐 뒷벽을 막은 불단을 마련하고 그 앞에 세 개의 대형 석재를 배치한 것이다. 자금은 변형되었으나 원래는 네모난 석재를 나란히 배치하여 양쪽 석재에는 중앙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꽂도록 되어 있다.
구멍의 기능으로 보아 불상을 안치하기에는 모순이 있어 기록에 나오는 태조의 진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양쪽 구멍에 기둥을 꽂아 그림을 걸고 중앙 기단에는 태조의 상을 모셨을 가능성이 있다.
진전 건물과 남쪽의 건물이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는지, 또는 다른 시기에 이루어진 별개의 건물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남쪽 건물자리 북쪽의 축대와 남쪽의 축대 축조수법에서 크게 차이가 나고 있어 시대적인 차이가 있는 듯하다.
또 진전 건물에 대한 기록은 고려 초기에는 나오지 않고 말기에 나오고 있어 이 건물은 아래쪽 개태사 건물보다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진전 자리의 서쪽에서는 호암미술관 소장의 금동대탑(국보 제213호)이 출토되었고, 진전 남쪽에서는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형 반자(飯子)가 발견되었다. 그 남쪽 길가에는 담장에 걸쳐 개태사지석조(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75호) 2기가 지하에 묻혀 있다.
그리고 현재의 개태사에 서 있는 개태사지오층석탑(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74호)은 진전자리 서쪽의 축대 부근에서 옮겨간 것이라고 마을주민들이 증언하고 있다. 이로 보아 초기의 개태사 경역은 지금보다 북쪽까지 확대되어 있었던 듯하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개태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무쇠 솥.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 직경은 290㎝이고 높이는 97㎝이다.
이 솥은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개국사찰로서 개태사를 창건하였을 때 주방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전해지는 대형 철제 솥이다. 개태사가 폐허가 되자 벌판에 방치된 채로 놓여 있었는데 1887년에 있었던 정해년의 대홍수로 2㎞정도 하류로 떠내려 왔던 것을 일제 때 경성박람회에 출품하였다고 한다.
그 후 다시 돌아와 개태사의 정원에 놓이게 되었다. 형태는 마치 테두리가 없는 벙거지를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으로 약 23㎝ 높이의 곧바로 선 테두리가 솟아 있고 그 아래로는 20㎝ 정도의 경미한 경사면을 이루다가 다시 둥글게 급경사를 이루면서 바닥에 연결되고 있다.
두께는 3㎝ 내외이다. 외부의 밑바닥은 직경이 약 90㎝의 원형평면을 이루고 있어 불을 효과적으로 잘 받도록 되어 있다. 개태사가 한창 융성할 당시 장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는데 이에는 많은 영이담이 전해지고 있다.
가뭄 때 사람들이 이를 끌어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을 옮겨 다녔으며, 1944년에 고철로 쓰려고 부수려 하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쳐서 파괴를 모면하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가 후백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태조 19년(936) 격전지에다 세운 사찰이다. 이 삼존석불은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본존불은 민머리에 얼굴이 둥글지만 평면적이고 귀는 길게 늘어졌다. 어깨와 가슴은 투박하게 만들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 것처럼 만들었는데 지나치게 둔중하다.
왼쪽의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한 편으로, 어깨와 가슴이 좀더 부드럽고, 팔찌와 천의(天衣)자락에 장식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왼쪽의 보살상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얼굴이 역사다리꼴이고, 목에는 두터운 삼도(三道)가 있다.
단정하면서도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천의와 선으로 새긴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고려 초기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만든 작품이며, 고려 초기 지방 석불상으로는 우수한 작품에 속하고 있어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예리에 있는 백제 말의 장군 계백(?∼660)의 묘로 추정되는 유적. 충청남도 기념물 제74호. 지정면적 1,256㎡. 묘는 정남향을 하고 있으며, 묘소 앞에는 최근에 세운 ‘백제계백장군지묘(百濟階伯將軍之墓)’라고 쓴 비석이 서 있다.
전란이 끝난 뒤 백제유민(百濟遺民)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이곳에 가매장하였다고 구전되어오며, ≪선조실록 宣祖實錄≫과 ≪광해군일기 光海君日記≫에 계백장군을 비롯한 역대의 명장·충신의 묘를 보수하고 부근에서 짐승 먹이는 것을 금지한 내용이 실려 있다.
40∼50년 전 묘가 노출되었을 때 철제무기가 나온 적도 있다 하며, 주위의 지명이 충장산(忠莊山)·충훈산(忠勳山) 또는 수락산(首落山) 등으로 나타나고, 묘소일대를 ‘가장(假葬)골’이라고 부르는 등 지명도 특이하다. 묘소 부근에 있는 충곡서원(忠谷書院)에서는 무장(武將)인 장군을 주벽에 모시고 있다.
계백장군은 의자왕 때의 무신으로 달솔(達率)에 올랐는데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사비성(泗歷城) 공격에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김유신(金庾信)이 거느리는 신라의 5만 군을 4번이나 물리쳤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般若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968년(광종 19) 혜명(慧明)이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조성한 ‘은진미륵’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았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바위로 불상을 조성할 것을 결정하고 혜명에게 그 일을 맡겼다.
혜명은 100여 명의 공장과 함께 97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006년(목종 9) 불상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걱정하던 어느날, 사제총에서 동자 두 명이 삼등분된 진흙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아랫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혜명은 돌아와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불상을 세웠다.
그런데 그 동자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화현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瑞氣)가 21일 동안 서렸으며, 미간의 옥호(玉毫)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좇아와 예배하였는데, 그 광명의 빛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절이름을 관촉사라 하였다.
이 밖에도 이 불상에 얽힌 많은 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중국에 난이 있어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노립승(蘆笠僧:삿갓을 쓴 승려)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이 얕은 줄 알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중국의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치자 쓰고 있던 개관(蓋冠)이 약간 부서졌다고 하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불상에 기도하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고 한다. 1386년(우왕 12) 법당을 신축하였고, 1581년(선조 14) 거사(居士) 백지(白只)가 중수하였으며, 1674년(현종 15) 지능(智能)이, 1735년(영조 11) 성능(性能)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과 삼성각(三聖閣)·사명각(四溟閣)·해탈문(解脫門)·현충각 등이 있으며,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18호로 지정된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과 보물 제232호인 석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인 배례석(拜禮石),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인 석문(石門), 오층석탑·사적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배례석은 너비 40㎝, 길이 150㎝의 장방형 화강암 위에 팔엽(八葉)연화 3개가 연지(蓮枝)에 달려 있는 듯이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다.
또 해탈문인 석문은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널찍한 판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창건 때 쇄도하는 참배객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고 사방에 문을 내었던 것 중 동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이 절에는 1499년(연산군 5) 가야산 봉서사(鳳栖寺)에서 개판한 ≪목우자수심결 牧牛子修心訣≫·≪몽산법어 蒙山法語≫·≪심우십도 尋牛十圖≫ 등의 판본이 소장되어 있었다. 이는 범어사의 영명(永明)이 옮겨 보관한 것이었으나, 그 뒤에 해인사로 옮겨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며 높이가 18m에 이르는데,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寶蓋)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주름선이 간략화되어 단조롭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만든 관음보살상이라 전해지는데, 연대 고찰을 위해 참고할 만하다. 이 보살상은 경기·충청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http://www.ocp.go.kr/(문화재청)
2. 관촉사석등(灌燭寺石燈) 보물 232호
관촉사 앞뜰의 큰 석불 앞에 놓여있는 4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식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가운데받침은 각이없는 굵고 둥그런 기둥으로 세웠는데, 위아래 양끝에는 두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줄기의 띠를 둘렀다.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8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곱게 장식하였다.
2층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1층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기둥이 빈약한 반면 창은 매우 넓다. 각 층의 지붕들은 처마가 가볍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한 꽃 조각이 서 있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룬다.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두었는데, 조각이 두터워서인지 무거워 보인다.
전체적으로 뒤에 서 있는 석불 못지않게 힘차 보이나, 화사석의 네 기둥이 가늘어 균형이 깨지고, 받침의 가운데기둥이 너무 굵고 각이 없어 그 효과가 줄어든 감이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함께 고려 광종 19년(968)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서는 화엄사각황전 앞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준다
〔고 대〕 1975년에 발굴, 조사된 초촌면 송국리 선사취락지는 농경생활을 하던 청동기문화인의 유적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이 곳에서는 주거지를 비롯해 민무늬토기·간석기·돌널무덤 등이 발굴되었으며, 탄화미도 발견되어 벼농사의 기원을 무문토기문화와 확실하게 연결지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이 곳과 연관성이 있는 초촌면 산직리와 규암면·은산면·충화면·석성면 등지에 고인돌을 비롯해 청동기시대의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초산국(楚山國)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부여군은 백제시대의 소부리(所夫里)·대산홀(大山忽 : 지금의 鴻山)·가림홀(加林忽 : 지금의 林川)·진악산(珍惡山 : 지금의 石城)에 해당된다. 특히, 부여읍 일대는 소부리 혹은 사비(泗歷)라고 했으며, ‘부리’라는 말은 ‘밝다’, ‘붉다’ 등에서 나왔다고 한다.
538년(성왕 16)에 백제는 웅진(熊津)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 그 뒤 6대에 걸쳐 120여 년동안 백제의 수도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번성기에는 가구수가 13만여 호에 달했으며, 이 시기에 문화의 꽃을 피웠다.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의 문무왕이 총관을 두었고 686년(신문왕 6)에는 사비주를 군으로 삼았으며, 경덕왕 때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면서 부여를 그 속군으로 하였다. 이 때 석산현(石山縣 : 지금의 석성)·열성현(悅城縣 : 지금의 청양군 정산면) 등이 부여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 려〕 신라 말에는 후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려 태조가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곧 고려의 영역이 되었다. 그 뒤 성종 때 하남도(河南道)에 예속되었고, 예종 이후에는 청주목의 속군인 공주에 속하여 부여군이라 하였다.
현종 때는 일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며, 1028년(현종 19)에는 정림사(定林寺)가 중건되었다고 한다. 고려 말엽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는데, 1376년(우왕 2)에 최영(崔瑩)이 홍산면 일대에서 왜구를 크게 토벌하였다.
〔조 선〕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채택해 오다가 태종 때 팔도제(八道制)를 정비하면서 공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부여군은 부여현·홍산현· 임천군· 석성현으로 나뉘어 있었고, 4개 군현에 각각 향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6개의 사액서원을 비롯해 많은 서원·사우가 세워졌다.
〔근 대〕 1895년(고종 32) 팔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구획하면서 공주부 관하의 부여군으로 승격하였다. 1896년 13도제로 변경했을 때 충청남도의 군이 되었다. 1914년 부·군통합령의 실시로 홍산·임천 전지역과 공주의 일부 지역을 편입해 16개 면을 관할하였다.
〔현 대〕 1960년 1월 1일 부여면이 읍으로 승격했으며, 1973년 7월 1일 석성면 현북리가 부여읍에, 장암면 사산리가 세도면에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을 뿐 큰 변화는 없다.
2. 부여군 유적 유물
백제의 옛 도읍지로서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 초촌면의 부여산직리지석묘(충청남도 기념물 제40호)를 비롯해 부여읍·구룡면·규암면·은산면·초촌면 등지에 기반식 및 탁자식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또, 군내에서 간돌화살촉·간돌검·돌도끼·세형동검·칼자루끝장식 등 많은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초촌면의 부여송국리선사취락지(사적 제249호)에서는 1974년 요령식동검·간돌검·간돌화살촉이 돌널무덤에서 출토되어 청동기문화의 상한선을 밝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주거지는 원형과 직사각형의 형태로 무리지어 취락을 형성했음이 확인되었다.
백제시대의 일반유적으로는 부여읍의 전백제왕궁지(傳百濟王宮址,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부여구아리백제유적(충청남도 기념물 제88호)·부여용정리백제건물지(충청남도 기념물 제86호)·궁남지(宮南池, 사적 제135호) 등이 있다.
또한, 부여읍의 부여쌍북리요지(사적 제99호)·부여쌍북리도요지(충청남도 기념물 제41호), 장암면의 부여정암리와요지(瓦窯址, 사적 제373호) 등의 요지가 남아 있으며, 백제시대 재상을 선출하던 장소로 알려진 천정대(天政臺, 일명 政事巖, 충청남도 기념물 제49호)가 규암면 호암리에 있다.
고분으로는 백제 부여시대의 왕과 왕족의 묘로 추정되는 부여읍의 부여능산리고분군(扶餘陵山里古墳群, 사적 제14호)을 비롯해 외산면의 부여지선리고분군(충청남도 기념물 제87호), 구룡면의 부여태양리백제석실고분(충청남도 기념물 제45호) 등이 발굴되었다.
산성으로는 남쪽에서 부여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군이 용전한 임천면 군사리의 부여성흥산성(扶餘聖興山城, 사적 제4호), 백제 도성의 일부였던 부여읍 쌍북리의 부여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사적 제5호)·부여청산성(扶餘靑山城, 사적 제59호), 백제산성으로는 최대 규모인 부여읍 능산리의 부여청마산성(扶餘靑馬山城, 사적 제34호) 등이 있다.
또, 궁성의 외성인 부여읍 염창리의 부여나성(扶餘羅城, 사적 제58호), 석성면 현내리의 부여석성산성(扶餘石城山城, 사적 제89호), 규암면 신성리의 증산성(甑山城, 사적 제156호)을 비롯해 부산성·외리산성·반산성 등이 있다.
한편, 부여부소산성에는 사비루(泗歷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수북정(水北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0호)·영일루(迎日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백화정(百花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8호)·군창지(軍倉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9호)·낙화암(落花巖,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고란사(皐蘭寺,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 등과 팔각정(八角井,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3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부여읍 동남리의 부여정림사지(扶餘定林寺址, 사적 제301호)에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부여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있고, 임천면 구교리의 대조사(大鳥寺)에는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대조사석탑(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0호)이 있다.
임천면 구교리의 대조사(大鳥寺)에는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대조사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0호)이 있다. 고려 초 창건된 외산면 만수리의 무량사(無量寺)에는 무량사극락전(보물 제356호)·무량사오층석탑(보물 제185호)·무량사석등(보물 제233호)·무량사김시습부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김시습영정(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4호)·무량사당간지주(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무량사오층석탑출토유물(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부여읍 관북리 부여박물관 내에 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師碑, 보물 제107호)·부여석조(扶餘石槽, 보물 제194호)·박물관석조여래입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6호)·박물관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5호)이 보관되어 있으며, 부여읍에 동남리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4호)·부여석목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4호)·금성산석불좌상(錦城山石佛坐像,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3호) 등이 있다.
또, 장암면의 부여장하리삼층석탑(보물 제184호), 초촌면의 부여세탑리오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호), 석성면의 현내리부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 홍산면의 부여홍량리오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9호)·부여홍산상천리마애불입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0호), 규암면의 금암리오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8호), 외산면의 화성리오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 세도면의 동사리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등이 있다.
절터로는 부여읍에 용정리사지(충청남도기념물 제48호)·동남리사지(충청남도기념물 제50호)·동남리전천왕사지(東南里傳天王寺址, 충청남도기념물 제53호)· 중정리전천왕사지(충청남도기념물 제54호)·임강사지(臨江寺址, 충청남도기념물 제34호)·부여군수리사지(사적 제44호) 등이 있으며, 군수리사지에 있던 군수리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군수리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제330호)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밖에도 은산면 금곡리의 금강사지(金剛寺址, 충청남도기념물 제31호), 규암면 호암리의 호암사지(虎巖寺址, 충청남도기념물 제32호)와 신리의 왕흥사지(王興寺址, 충청남도기념물 제33호), 임천면 가신리의 부여보광사지(扶餘普光寺址, 충청남도기념물 제98호) 등이 남아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부여읍 동남리의 부여향교대성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5호), 석성면 석성리의 석성향교대성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6호), 홍산면 교원리의 홍산향교대성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7호), 임천면 군사리의 임천향교대성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4호) 등이 있다.
서원으로는 임천면 칠산리의 칠산서원(七山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 만사리의 퇴수서원(退修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1호), 세도면 동사리의 동곡서원(東谷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2호), 부여읍 저석리의 창강서원(滄江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7호), 규암면 진변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등이 있다.
사우·사당으로는 구룡면 금사리의 창렬사(彰烈祠, 충청남도 기념물 제22호)를 비롯해 백제 충신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을 모신 부여읍 쌍북리의 삼충사(三忠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허목(許穆)·홍가신(洪可臣)·채제공(蔡濟恭)의 위패를 모신 부여읍 관북리의 도강영당(道江影堂,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6호), 장암면 장하리의 흥학당(興學堂,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5호)이 있다.
이 밖에 백제의 충신인 성충·흥수·계백과 고려 공민왕 때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유배되어 죽은 이존오(李存吾) 등 4인을 제향하기 위해 1576년(선조 9) 세운 부여읍 동남리의 의열사(義烈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4호), 외산면 무량사에서 입적한 김시습(金時習)을 배향하기 위해 1621년(광해군 13)에 건립해 1704년(숙종 30)에 사액을 받은 홍산면 교원리의 청일사(淸逸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3호)가 있다.
관아 건물로는 부여읍 관북리의 부여동헌(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홍산면 남촌리의 홍산동헌(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1호), 석성면 석성리의 석성동헌(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등이 있고, 1836년(헌종 2)에 건립된 홍산면 북촌리의 홍산객사(鴻山客舍,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7호)가 있다.
능묘는 고려 말의 명신 김거익의 묘(金居翼―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2호), 인조 때의 황일호의 묘(黃一皓─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세종 때의 공신 전득우의 묘(田得雨墓, 충청남도기념물 제25호), 병자호란 때 순절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윤집(尹集)의 묘, 조신의 묘(趙愼―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9호) 등이 있다.
비로는 부여박물관 내에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보물 제21호)·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홍산면 북촌리에는 1681년(숙종 7) 흥사면 북촌리에 세운 홍산만덕교비(鴻山萬德橋碑, 충청남도기념물 제3호), 옥산면 상기리에 가교비(架橋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8호), 충화면 오덕리에 선조대왕태실비(宣祖大王胎室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 부여읍 동남리에 의열사비(義烈祠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등이 있다.
이 밖에 규암면 진변리에 인조 때의 문신 이경여(李敬輿)를 기리는 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이 남아 있고, 진변리의 부산(浮山) 기슭 백마강변에는 대재각(大哉閣)이 있다.
고가옥으로는 부여읍 중정리의 부여민칠식가옥(扶餘閔七植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92호), 군수리의 부여정계채가옥(扶餘鄭啓采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93호), 홍산면 북촌리의 이정우가옥(李正雨家屋,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9호)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은산면 은산리의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 부여읍 관북리의 산유화가(山有花歌,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4호), 정동리의 부여내포제시조(扶餘內浦制時調,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7호)가 전승되고 있다.
이 밖에 홍산면 교원리의 보부상유품(褓負商遺品, 중요민속자료 제30호)이 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부여읍 용정리의 추포황신선생종가유물(秋浦黃愼先生宗家遺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2호), 관북리의 유경종묘내의 유물(柳慶宗墓內―遺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0호) 등이 남아 있다.
또한, 부여읍 구교리에 부여구두래일원(사적 및 명승 제6호), 부여내산면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20호), 규암면 진변리에 백강(白江)의 부여동매(扶餘冬梅,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2호), 고란초(皐蘭草) 등이 보호되고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성흥산(聖興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부여읍지 扶餘邑誌≫에 의하면 이 절은 인도에 가서 범본(梵本) 율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와서 백제 불교의 방향을 달리한 겸익(謙益)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사적기를 참작하여 기록한 현판에 의하면 이 절은 527년 담혜(曇慧)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건주에 대한 설은 다소 다르지만 이들이 모두 6세기 초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이 절은 고려 원종 때 진전장로(陳田長老)가 중창하였고, 그 뒤 1989년에는 명부전, 1993년에는 종각, 1994년에는 미륵전을 각각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과 용화보전·명부전·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대웅전 뒤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보물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한 노승이 이 바위 밑에서 수도하다가 어느날 한 마리의 큰 새가 바위 위에 앉는 것을 보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느새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하여 있었으므로 이 절을 대조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0호인 삼층석탑 1기가 있다. 이전에는 옥개석(屋蓋石)만 있었으나, 1975년 옥신(屋身)이 발견되어 복원하였다.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대조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높이 10m. 보물 제217호. 거대한 규모에서뿐 아니라 양식면에서도 논산 관촉사석조보살입상(보물 제218호), 연산 개태사석조삼존불상(보물 제219호) 등 충청도지방의 불상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을 쓰고 그 위에 다시 사각형의 보개(寶蓋)를 두 개 올려놓았는데, 보개 네 귀퉁이에는 동령(銅鈴)이 달려 있다. 네모난 얼굴은 평면적이며, 귀와 눈은 크나 코와 입은 비교적 작아서 괴이한 인상을 준다. 목은 밭은데 한 줄의 음각선이 있을 뿐이다.
각이 지고 넓은 어깨에는 여래상의 통견의(通肩衣)와 같은 천의(天衣)를 걸쳤는데 두터워서 옷 밑의 불신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으며, 옷주름이 직선적이며 도식화되어 투박해 보인다. 가슴에는 목걸이가 조각되었으나, 거대하고 평판적인 신체에 별다른 장식적 효과를 주지 못하는 것 같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대어 금속제의 연꽃가지를 잡고 있는데, 얇게 부조되어 입체감이 거의 없다. 대좌는 자연석이며 앞에는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손질한 상석(床石)을 놓았다.
불신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돌기둥을 세워놓은 듯한 체구, 거의 4등신에 가까운 신체의 비율, 원통형의 보관과 사각형 보개 등은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였던 불상양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당시 지방양식을 반영하는 작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조성연대는 12세기 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