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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朝鮮(단군조선)
檀君(단군)은 우리민족의 始祖(시조)로 古朝鮮(고조선)의 첫 번째 임금이다. 檀君(단군)에 관한 기록은 『위서(魏書)』, 『三國遺事(삼국유사)』, 『帝王韻紀(제왕운기)』 등에 전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檀君(단군)이 우리 民族(민족)의 始祖(시조)라는 데에서는 一致(일치)한다. 紀元前(기원전) 2333년 阿斯達(아사달)에 都邑(도읍)을 정하고 檀君朝鮮(단군조선)을 개국했다.
作者(작자) 未詳(미상)
檀君(단군)은 우리 民族(민족)의 始祖(시조)로 古朝鮮(고조선)의 첫 번째 임금이다. 紀元前(기원전) 2333년 阿斯達(아사달)에 都邑(도읍)을 정하고 檀君朝鮮(단군조선)을 세웠다. 檀君(단군)에 관한 記錄(기록)은 『위서(魏書)』, 『三國遺事(삼국유사)』, 『帝王韻紀(제왕운기)』 등에 전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檀君(단군)이 우리 民族(민족)의 始祖(시조)라는 데에서는 一致(일치)한다. 檀君(단군)이라는 이름만 보더라도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단(壇)’ 字(자)로 記錄(기록)되어 있고, 李承休(이승휴)의 『帝王韻紀(제왕운기)』에는 ‘단(檀)’자가 되어 있다.
1883년에 그린 現存(현존) 最高(최고) 推定(추정) 檀君(단군) 肖像畵(초상화) 公開(공개)
檀君(단군) 肖像畵(초상화)는 20세기 이후에 제작한 그림만 존재한다고 알려져 이 그림이 현존 최고(最古) 작품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인 임채우 단군학자료원장은 23일 단군문화포럼 주최 '독립운동의 상징, 단군 영정 전시회'에서 1883년 10월 봉안한 단군 영정을 선보인다고 밝혔다. 전시회는 오는 26일부터 다음 달 15일까지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다.임 교수가 발굴한 단군 영정은 크기가 대략 가로 51㎝, 세로 80㎝이다. 초상화는 천에 그렸으며, 뒤쪽에 초상화 초본과 선관(仙官) 스케치 등 그림 3장을 배접했다.
오른쪽 하단에 그림에 관한 정보인 화기(畵記)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임 교수는 화기를 '광서구년 계미 10월 봉안단군화상/ 시주질/ 시주 을해생 김전 을축생 이두성/ 편수 을묘생 김관오'(光緖九年 癸未 十月 奉安檀君畵象/ 施主帙/ 施主 乙亥生 金奠 乙丑生 李斗聖/ 片手 乙卯生 金觀伍)로 해독했다. 광서는 청나라 광서제 연호로 보이며, 그렇다면 광서 9년은 1883년이라고 그는 전했다.임 교수는 "편수는 불교에서 보조화사로, 김관오가 태어났다는 을묘년은 1855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며 "다만 김관오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찾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화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희미한 글씨가 있어 중복해 화기를 조성했을 수도 있다"며 "광서본 안료가 일제강점기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으나, 후대에 덧칠했을 확률이 높고 양식상 위작이라고 볼 근거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엇보다 단군 초상화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단군 화상(충남 문화재자료 제369호)과 비교하면 광서본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부여에 있는 초상화는 가로 53.3㎝, 세로 33.6㎝다.
임 교수는 광서본 초상화에서 확인되는 화풍도 다른 단군 영정과는 구분된다고 밝혔다.
그는 광서본 초상화 특징으로 색동치마, 씩씩하고 우람해 보이는 인상, 밑그림과 후광(後光)을 꼽고 "상의에는 꽃무늬가 있고, 하의는 색색으로 칠했다"며 "색동치마는 고구려 수산리 벽화에 나오는 의상과 형태가 비슷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광서본 초상화를 직접 살핀 이태호 명지대 초빙교수는 "단군을 위한 독립 공간보다는 여러 무속 신들이 함께한 민간 사당에 봉안한 것으로 짐작된다"며 "조선시대 불화와 제작방식이 유사하다"고 밝혔다.이 교수는 얼굴에 대해서도 "좌우 끝부분을 살짝 올려 날카롭게 그린 눈썹은 불화에서 흔히 발견되며, 담홍색 선묘로 부드럽게 표현한 눈과 코는 조선 후기 초상화 기법"이라며 "신라 솔거가 그렸다는 단군 초상화에 근접한 작품이 발굴되고, 김관오라는 화가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출현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전시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단군 초상화와 조각상, '광무 9년'(1905)이라는 명문이 있는 천부경(天符經) 각석, 대종교 독립운동가 나철 편지 등이 나온다. 오는 28일과 다음 달 4일에는 학술대회도 연다.
檀君(단군)의 誕生(탄생)에서도 차이가 있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桓因(환인)의 아들 桓雄(환웅)과 人間(인간)이 된 곰인 熊女(웅녀)를 父母(부모)로 하여 檀君(단군)이 태어났다고 하지만, 『帝王韻紀(제왕운기)』에는 단웅천왕(檀雄天王)이 孫女(손녀)에게 약을 먹여서 사람이 되게 한 다음에 단수신과 結婚(결혼)시켜 낳은 아들이 檀君(단군)이라고 하였다.
檀君(단군) 神話(신화)에 따르면 檀君(단군)이 1500년 동안 王(왕)으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그 후에 山神(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1500년이라는 時間(시간)을 한 사람이 살았다고 보기는 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 따라서 檀君王儉(단군왕검)이 1500년이라는 시간을 帝王(제왕)에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古朝鮮(고조선)에서 王(왕)을 말하는 일반명사로 이해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k_Qwrj-ngc
우리 역사에서 檀君(단군)은 古朝鮮(고조선)을 開國(개국)한 建國(건국) 始祖(시조)로 神聖視(신성시)되어 왔다. 高麗(고려) 時代(시대)에 들어와서는 中國(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歷史(역사)를 强調(강조)하게 되는데, 그 시작이 바로 檀君(단군)이었다는 것이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檀君神話(단군신화)가 記錄(기록)되어 있는 理由(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檀君(단군)의 强調(강조)는 우리 民族(민족)의 民族的(민족적) 自主(자주)의식 鼓吹(고취)와 連結(연결)된다.
檀君(단군)과 우리 民族(민족)의 自主(자주) 意識(의식) 鼓吹(고취)와의 연관성은 舊韓末(구한말) ‘檀君(단군)民族主義(민족주의)’로 다시 强調(강조)되어 나타났다. 日帝(일제)에 의한 植民(식민) 統治(통치) 속에서 우리 民族(민족)의 自主性(자주성), 救國(구국) 意志(의지)를 높이기 위해 檀君(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多樣(다양)한 歷史(역사) 運動(운동)이 펼쳐졌다. 이때를 契機(계기)로 檀君朝鮮(단군조선)으로 날짜를 기록하는 檀紀(단기)가 使用(사용)되고, 開天節(개천절) 등을 記念(기념)하게 되었다.
現在(현재) 檀君(단군)을 마을신으로 모시고 있는 곳은 서울의 마을당인 東氷庫洞(동빙고동) 符君堂(부군당)이 代表的(대표적)이다. 이곳에서 처음부터 마을신으로 檀君(단군)을 모셨던 것 같지는 않고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때부터 檀君(단군)이 이곳의 主神(주신)으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東氷庫洞(동빙고동) 符君堂(부군당)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傳(전)한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당시 김양원(金陽元)이라는 將軍(장군)은 戰場(전장)에 나가거나 이곳을 지날 때는 꼭 參拜(참배)를 했다고 한다. 檀君(단군)을 모시고 있는 즉 우리 民族(민족)의 主權(주권)이 살아있는 符君堂(부군당)에서 參拜(참배)하고 日帝(일제)와의 싸움에 나갔다는 것을 풀이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fsIQIEPEIc
현대 | 군정기 한국 (1945~1948년)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8년~현재) | 대한민국 (1948년~현재) |
단군조선 (檀君朝鮮)은 漢民族(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전해지는데, 檀君朝鮮(단군조선)의 개국 기원에 대해서는 現存(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三國遺事(삼국유사)》에서 인용된 《위서》(魏書)에는 檀君王儉(단군왕검)이 阿斯達(아사달)에 開國(개국)한 國家(국가)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古朝鮮(고조선)의 역사를 王朝(왕조) 또는 支配者(지배자)에 따라 구분하여 檀君(단군)이 다스렸던 첫 번째 시기를 지칭한다. 檀君(단군)이 나라를 세워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朝鮮(조선) 시대에는 ‘전조선 (前朝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目次(목차)
歷史(역사)
근대 歷史學(역사학)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당시 古朝鮮(고조선) 지배자의 이름에 따라 古朝鮮(고조선)의 역사를 檀君朝鮮(단군조선), 箕子朝鮮(기자조선), 衛滿朝鮮(위만조선)로, 3개 시기로 구분하였다. 단군조선은 단군이 무진년(기원전 2333년)에 아사달 (阿斯達) 또는 평양 (平壤)에서 建國(건국)하였다고 한다. 檀君(단군)은 약 1000여 년 동안 檀君朝鮮(단군조선)을 다스리다가 己卯年(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箕子(기자)에게 王位(왕위)를 물려주고 阿斯達(아사달)의 山神(산신)이 되었다. 또는 箕子(기자)가 오기 164년 전인 紀元前(기원전) 1286년에 王位(왕위)를 떠났다고 하기도 한다. 현대 韓國(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箕子朝鮮(기자조선)을 認定(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紀元前(기원전) 11세기 무렵에 檀君朝鮮(단군조선)이 掃滅(소멸)되었다는 내용 역시 인정되지 않으며 衛滿朝鮮(위만조선)이 成立(성립)되는 紀元前(기원전) 194년까지의 역사를 모두 檀君朝鮮(단군조선) 및 古朝鮮(고조선)의 歷史(역사)로 보고 있다.
初期(초기) 檀君朝鮮(단군조선)의 疆域(강역)은 平壤(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韓半島(한반도) 北部(북부)에 있었다는 主張(주장)과 遼東(요동) 일대를 중심으로 遼東(요동)半島(반도)와 韓半島(한반도) 北部(북부)(平安道(평안도) 및 黃海道(황해도)) 지역에 있었다는 主張(주장)이 兩立(양립)하고 있다. 또한 일부 在野(재야)史學者(사학자)들의 경우에는 "난하 요서설" 등을 根據(근거)로 遼西(요서) 일대를 檀君朝鮮(단군조선)의 疆域(강역)으로 主張(주장)하기도 한다. 檀君朝鮮(단군조선)(古朝鮮(고조선))의 遺物(유물)로 推定(추정)되는 미송리형 土器(토기)와 비파형동검을 통해 추측되는 疆域(강역)은 랴오닝성과 韓半島(한반도) 北部(북부) 지역이다. 檀君朝鮮(단군조선)의 遺物(유물)이 두 유물인 것은 확실시되고 있으나 두 유물의 출토지가 모두 檀君朝鮮(단군조선)의 疆域(강역)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게 대부분의 歷史學者(역사학자)들의 意見(의견)이다.
현전하는 中國(중국)의 朝鮮(조선)에 대한 기록으로는 紀元前(기원전) 7세기 무렵의 文獻(문헌)인 《관자》에 등장하는 것이 가장 오랜 것이다. 紀元前(기원전) 323년 中國(중국) 戰國時代(전국시대)의 연과 外交的(외교적) 마찰이 있었으며, 西紀前(서기전) 3世紀(세기) 초에 연의 공격으로 2천여 리의 疆土(강토)를 喪失(상실)하고 만번한을 境界(경계)로 삼았다. 이 무렵에 古朝鮮(고조선)의 중심지가 遼東(요동)에서 平壤(평양)으로 옮겨 갔다는 주장이 있다. 《위략》의 記錄(기록)에 따르면 西紀前(서기전) 2세기 末(말) 秦始皇(진시황)이 中國(중국)을 統一(통일)하자 朝鮮王(조선왕) 부(否)가 형식적으로 진나라에 服屬(복속)하였다고 한다. 이후 진 末期(말기)의 혼란기에 中國(중국) 遺民(유민)들을 많이 받아들였으며 특히 紀元前(기원전) 195년, 衛滿(위만)의 亡命(망명)을 받아들여 서쪽 변경의 수비를 맡겼다. 紀元前(기원전) 194년, 衛滿(위만)은 준왕(準王, 紀元前(기원전) 262년~紀元前(기원전) 184년, 在位(재위):紀元前(기원전) 208년 ~ 紀元前(기원전) 194년)는 古朝鮮(고조선)과 한(韓)의 王(왕)이다. 휘(諱)는 준(準)이다. 紀元前(기원전) 194년에 위만(衛滿)에게 王位(왕위)를 빼앗기고 남쪽의 한(韓)으로 亡命(망명)하여,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명확히 기록된 바가 없다.)을 쫓아내고 王位(왕위)를 簒奪(찬탈)하여 衛滿朝鮮(위만조선)을 세웠다.
歷史的(역사적) 評價(평가)
高麗(고려)時代(시대)와 朝鮮時代(조선시대)에 檀君朝鮮(단군조선)은 國家(국가)의 始祖(시조)로서 중요시되었다. 檀君朝鮮(단군조선)과 箕子朝鮮(기자조선)의 支配者(지배자)인 檀君(단군)과 箕子(기자)는 국조(國祖)로서 祭祀(제사)를 지냈으며 檀君朝鮮(단군조선)은 朝鮮(조선)의 歷史(역사)가 中國(중국)에 못지 않게 오래되었다는 자부심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문자 기록이 미비했던 시기의 古代(고대) 國家(국가)였던 탓에 檀君朝鮮(단군조선)과 관련된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정확한 연대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나마 中華(중화)思想(사상)을 바탕으로 한 事大主義(사대주의)로 인해 中國(중국) 殷(은)·周(주)에서 도래한 箕子(기자)가 始祖(시조)로 選好(선호)되면서 士大夫(사대부)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편찬된 많은 歷史書(역사서)들은 대부분 檀君朝鮮(단군조선)부터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箕子朝鮮(기자조선) 또는 三國(삼국)을 기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檀君朝鮮(단군조선)은 箕子朝鮮(기자조선)의 기록에 부기(附記)되거나 별도의 기록으로 다루어졌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 檀君朝鮮(단군조선)은 古朝鮮(고조선)과 함께 植民(식민)史學者(사학자)들에 의해 歷史的(역사적) 實體(실체)를 不正當(부정당)하였다. 日帝(일제)는 檀君朝鮮(단군조선)과 檀君神話(단군신화)가 神話(신화)에 불과하고 歷史性(역사성)이 없어 認定(인정)할 수 없다고 主張(주장)하였다. 또한 植民史觀(식민사관)의 일환인 ‘타율성론’에 입각하여
檀君朝鮮(단군조선)을 부정하고
箕子朝鮮(기자조선),
衛滿朝鮮(위만조선),
漢四郡(한사군)으로 이어지는 中國(중국)의 植民支配(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고 主張(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檀君神話(단군신화) 및 檀君朝鮮(단군조선)에 대한 文獻的(문헌적) 硏究(연구)가 병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日帝(일제)의 植民史觀(식민사관)에 맞서 박은식, 신채호(申采浩) 등은 民族(민족)史學(사학)을 主唱(주창)하며 檀君朝鮮(단군조선)을 民族(민족)의 始初(시초)가 되는 國家(국가)로 강조하였다. 또한 한민족뿐만 아니라 滿洲(만주), 몽골 등을 모두 檀君朝鮮(단군조선)의 後繼(후계) 國家(국가) 또는 民族(민족)으로 把握(파악)하기도 하였다.
光復(광복) 이후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歷史(역사)學界(학계)는 檀君神話(단군신화) 및 檀君朝鮮(단군조선)으로부터 古朝鮮(고조선)의 歷史(역사)와 社會相(사회상)을 분석하고 있다. 箕子朝鮮(기자조선)과 함께 檀君朝鮮(단군조선)이라는 王朝(왕조)는 認定(인정)하지 않고 古朝鮮(고조선)과 衛滿朝鮮(위만조선)의 2개 時期(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古朝鮮(고조선)의 建國(건국) 年代(연대)에 있어서도 다양한 見解(견해)가 나타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檀君朝鮮(단군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紀元前(기원전) 23세기에서 紀元前(기원전) 11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古朝鮮(고조선)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지 못하였던 때로 본다. 한편 檀君(단군)에 대해서는 랴오닝 성 및 韓半島(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분포하던 여러 村落(촌락) 또는 部族(부족) 國家(국가)의 政治(정치)·宗敎的(종교적) 支配者(지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歷史(역사)學界(학계)는 1990년대 이전까지 社會主義(사회주의) 歷史學(역사학)에 입각하여 檀君朝鮮(단군조선) 및 箕子朝鮮(기자조선)의 실체를 모두 認定(인정)하지 않고 古朝鮮(고조선)이라는 國家(국가)로 이해하였다. 또한 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을 랴오닝 성(중국어 간체자: 辽宁省, 정체자: 遼寧省, 병음: Liáoníng Shěng)은 中國(중국) 東北(동북) 지방의 성이다.) 中心(중심)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입장을 바꿔 檀君陵(단군릉)을 發掘(발굴)하는 등 檀君神話(단군신화)를 역사적 실체로 이해하고 平壤(평양) 일대를 古朝鮮(고조선)의 중심지로 강조하였다. 大韓民國(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北韓(북한)의 이러한 입장 변화를 主體思想(주체사상)이 北韓(북한)의 역사관으로 강조되게 된 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2000년대 이후의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도 최근 2~3년 사이 정선, 春川(춘천) 등에서 靑銅器(청동기) 初期(초기) 遺物(유물)로 보이는 덧띠새김무늬 土器(토기)가 紀元前(기원전) 2000년쯤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빗살무늬 土器(토기)와 함께 發掘(발굴)되어 靑銅器(청동기) 文化(문화)를 가졌다는 古朝鮮(고조선) 建國(건국)時期(시기)와 靑銅器(청동기) 導入(도입) 時期(시기)가 거의 一致(일치)하여 靑銅器(청동기) 시대도 연대를 올려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에 따라, 2007년 2월 23일에 大韓民國(대한민국) 敎育人的資源部(교육인적자원부)는 ‘檀君王儉(단군왕검)이 古朝鮮(고조선)을 建國(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부분을 ‘檀君王儉(단군왕검)이 古朝鮮(고조선)을 建國(건국)하였다’로 좀더 明示的(명시적)인 표현으로 修整(수정)할 것을 담은 敍述(서술) 指針(지침)을 發表(발표)하였다.
文獻(문헌)記錄(기록)
朝鮮(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오니, 평양부(平壤府)로 하여금 때에 따라 祭祀(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太祖(태조) 1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8월 11일(경신) 2번째기사
우리 東邦(동방)은 단군(檀君)이 始祖(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天子(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檀君(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 中國(중국) 帝堯(제요 도당씨(帝堯陶唐氏)는 中國(중국) 神話(신화) 속 君主(군주)이다. 中國(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神話(신화) 가운데 오제의 하나이다. 다음 대의 君主(군주)인 순(舜)과 함께 이른바 '요순'(堯舜)이라 하여 성군(聖君)의 代名詞(대명사)로 일컬어진다. 현재까지 堯(요)의 歷史的(역사적) 실존성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禹王(우왕)과의 관계에서 夏(하)나라 이전에도 국가 비슷한 實體(실체)가 形成(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自了(자료)로 使用(사용)된다.)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중략) 혹은 말하기를, ‘檀君(단군)은 海外(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하고 글이 적고 中國(중국)과 通(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禮(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 箕子(기자))를 臣下(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朝鮮(조선)에 封(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太宗(태종) 31권, 16년(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1일(신유) 2번째기사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유사눌(柳思訥)이 상서하기를, “臣(신)이 삼가 세년가(世年歌)를 보건대, 檀君(단군)은 朝鮮(조선)의 始祖(시조)입니다. (中略(중략)) 臣(신)이 世年歌(세년가)로 上古(상고)해 보건대, 檀君(단군)이 처음에는 平壤(평양)에 都邑(도읍)했다가 후에는 백악(白岳)에 都邑(도읍)했으며, 殷(은)나라 무정(武丁) 8년 乙未(을미)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神(신)이 되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祠堂(사당)이 阿斯達(아사달)에 있네.’ 했으니, 어찌 그 根據(근거)가 없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高麗(고려)에서는 구월산(九月山) 밑에 祠堂(사당)을 세워 그 당우(堂宇)와 위판(位版)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世年歌(세년가)와 합치하니, 臣(신)의 어리석은 所見(소견)으로서는 이 곳(九月山(구월산)을 버리고 다시 祠堂(사당)을 다른 곳(平壤(평양)에다 세운다면 아마 그 場所(장소)가 잘못된 듯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聖上(성상)께서 재결(裁決)하시옵소서.”하니, 命(명)하여 禮曹(예조)에 내리게 하였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世宗(세종) 75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12월 26일(정해) 4번째기사
예조(禮曹)에서 황해도(黃海道) 삼성사(三聖祠)에 있는 단군(檀君)의 축문(祝文)을 평양(平壤) 단군사(檀君祠)의 예(例)에 의거하여 ‘전조선(前朝鮮) 檀君(단군)’이라 쓸 것과 (中略(중략) — 《조선왕조실록》숙종 28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6월 6일(병신) 1번째기사
전조(前朝: 고려)의 옛 능(陵)과 단군(檀君)·기자(箕子)·新羅(신라)·高句麗(고구려)·百濟(백제)의 시조(始祖)의 능을 수축(修築)하라고 명하였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英祖(영조) 101권, 39년(1763 癸未(계미) /
淸(청) 건륭(乾隆) 28년) 4월 22일(己酉(기유) 4번째기사
禮曹(예조) 判書(판서) 심수(沈鏽)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黃海道(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묘(三聖廟)의 위판(位版)의 흙으로 만든 것이 많이 훼손되었으니, 마땅히 개조(改造)해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副提學(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을 불러 삼성(三聖)의 고적(故蹟)을 물으매, 徐命膺(서명응)이 말하기를, “三聖(삼성)은 곧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이며, 歷史(역사)에서 말하는 바 아사달산(阿斯達山)은 곧 지금의 九月山(구월산)입니다.”하고, 그 고사(故事)를 심히 상세하게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桓雄(환웅)은 곧 檀君(단군)의 아버지이고, 桓因(환인)은 곧 檀君(단군)의 할아버지이다.”하였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英祖(영조) 106권, 41년(1765 을유 / 淸(청) 건륭(乾隆) 30년) 12월 8일(己酉(기유) 1번째기사
《동국통감 외기(東國通鑑外紀)》에는 "동방(東方)에는 最初(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西紀(서기) 前(전) 2333)이었다.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都邑(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는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西紀(서기) 前(전) 1317)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記錄(기록)되어 있다. (원문, 檀君朝鮮《東國通鑑·外紀(동국통감·외기)》〈徐居正·崔溥 等 共撰(서거정·최부 등 공찬)〉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其他(기타) 檀君朝鮮(단군조선)에 대한 記錄(기록)은 《三國遺事(삼국유사)》, 《帝王韻紀(제왕운기)》 등에 傳(전)해지는데, 一般的(일반적)으로 《三國遺事(삼국유사)》의 內容(내용)이 알려져 있다. 위서(魏書)에 記錄(기록)하길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檀君(단군) 王儉(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또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에 都邑(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요(堯)와 같은 시기였다."
檀君神話(단군신화)라고도 부르는 이 建國(건국)神話(신화)는 古朝鮮(고조선)의 建國(건국)과 社會相(사회상)을 알려주는 記錄(기록)으로 重要(중요)한 價値(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檀君朝鮮(단군조선)의 歷史(역사)를 상세하게 敍述(서술)하고 있는 記錄(기록)은 없다.
20世紀(세기) 初(초)에 일반에 알려진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著述(저술)하였다는 歷史書(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上古時代(상고시대)와 檀君朝鮮(단군조선)의 임금에 대해 상세하게 記述(기술)되어 있다.》, 《단기고사(檀奇古史)는 渤海(발해)를 建國(건국)한 大祚榮(대조영)의 아우 반안군왕(般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이 8世紀(세기)경에 編纂(편찬)했다고 主張(주장)되는 歷史書(역사서)이다. 1959년에 出刊(출간)된 國漢(국한)文本(문본)과 1990년에 復元(복원)된 漢文(한문)초략본(백산본)이 確認(확인)되고 있다. 그 內容(내용)이 각 시대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점 등으로 인해 歷史學者(역사학자)들은 20世紀(세기)에 만들어진 僞書(위서)로 評價(평가)한다.
‘단기고사(檀奇古史)’는 ‘단군(檀君)과 기자(奇子)의 옛 歷史(역사)’라는 의미로, ‘전단군조선(前檀君朝鮮)’과 ‘후단군조선(後檀君朝鮮)’으로 나뉜 47대 檀君(단군)의 在位(재위) 期間(기간)과 각 時代(시대)의 主要(주요) 記錄(기록), 약 2천여 년에 걸친 歷史(역사)와, 前檀君朝鮮(전단군조선)보다 늦게 始作(시작)된 기자조선(奇子朝鮮)의 42대 1천여 년의 일을 시대순으로 記述(기술)하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이유립이 1979년에 出刊(출간)한 책이다. 古代(고대)부터 전해지던 歷史書(역사서) 4권을 계연수가 묶은 것이라 主張(주장)하였으나 大韓民國(대한민국)과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歷史(역사)學界(학계)에서는 위서(僞書)로 判斷(판단)하여 古中世史((고중세사)의 史料(사료)로 取扱(취급)하지 않는다.》, 《부도지(符都誌)는 新羅(신라) 訥祗王(눌지왕) 때 朴堤上(박제상)이 著述(저술)했다는 史書(사서)인 《징심록》의 일부이다. 1953년에 그 後孫(후손)인 박금(朴錦)이 그 內容(내용)을 發表(발표)함으로써 一般(일반)에 公開(공개)되었고, 1986년 번역본이 出刊(출간)되어 널리 알려졌다. 朝鮮(조선) 時代(시대)에 金時習(김시습)에 의해 飜譯(번역)되었고, 그 필사본이 보관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現存(현존)하는 《부도지》의 內容(내용)은 원본의 내용을 연구했던 기억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등이 歷史書(역사서)의 형식으로 古朝鮮(고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한 서적들이 있으나 대부분의 歷史學者(역사학자)들은 이들을 僞書(위서)로 判斷(판단)하여 認定(인정)하지 않는다.
같이 보기
아사달(阿斯達)
장당경(藏唐京)
脚注(각주)
↑ 일연, 《삼국유사》 (1281) 〈기이〉 고조선條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실제로는 그 수백 년 후 작성되었다고 평가된다. 고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헌, 《배달족 역사》, 1922 등
↑송호정, 〈KBS방영 “비밀의 왕국 고조선”을 비판한다〉, 《역사비평》2000년 겨울호, 2000년
↑리지린, 《고조선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63년
↑장우진, 〈대동강유역은 인류의 발상지이며 조선사람의 발원지〉, 《조선고고연구》 1호, 1999년
↑이기동, 〈북한에서의 단군연구와 그 숭앙운동〉, 《한국사 시민강좌》27집,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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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 ~ 일 2020-12-27 오후 11:53 ~ 좋은 자료 잘 받았습니다. 귀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