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그 거리, 거기에서 기다리마
김 광 욱
1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여자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빗소리에 섞여 찻소리, 발자국 소리. “어머나 저걸 어째?”하는 동정의 탄식도 들려온다. 빗줄기가 세차게 내 몸 위에 부어지고, 나는 그 비를 철철 맞으며 길 위에 쓰러져 있다. 쓰러져 있다는 걸 느낀다.
얼굴 위로, 눈 위로, 더운 액체가 흘러내린다. 그것은 피다. 나는 피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다. 아니 온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몸의 곳곳이 부서지고 찢겨져서 나의 형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살아 있는가?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본다. 숨을 쉬니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살고 싶다.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병원으로 싣고 가자.”
여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귓전을 적신다. 그 목소리는 처음에 들었던 그 탄식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가냘프지만 위엄이 있었다.
“다 죽어가는 새끼를 뭣하러 살리려고 그러십니까? 모른 체 지나가시죠.”
사내가 투덜거렸다.
“인명은 소중한 거야. 어서 내 말대로 해!”
여자의 명령에 두 사내는 고분고분 복종했다.
“병원에 데리고 가도 살리긴 힘들 것 같소.”
“아까운 시트와 내 비싼 양복만 다 버리는군.”
나는 차에 실려 어디론가 운반되었다. 나는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 보니 큰 병원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왔다갔다 하고 환자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들렸다. 중환자실이란 걸 알았다. 나는 중환자실의 침대에 환자 모습을 하고 누워 있었다. 전신이 붕대에 감긴 채 숨만 헐떡거리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가 와서 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나는 의사의 껌벅이는 눈을 보고 의사는 내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파요?”
의사가 내 손을 잡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더 힘껏 내 신경을 꼬집었다. “아앗!”하고 낯을 찡그리자 의사는 웃었다. 의사는 다리도 꼬집고 얼굴도 꼬집었다. 붕대에 감기지 않은 부분은 모두 한 번씩 꼬집어 보고 나서 간호사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간 뒤에 나는 몸을 일으키려 해 봤으나 꼼짝할 수 없었다. 천근만근 무거운 힘이 위에서 짓누르고 고통이 몰려왔다.
“아악!”하는 비명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옆 침대의 남자가 피를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붕대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환자는 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비명소리는 침대에 결박된 손과 발을 풀려고 기를 쓰는 발악이었다. 단단한 가죽끈으로 묶여 있어서 침대만 요동할 뿐 결박은 그대로 있었다. 나는 결박되지 않아서 행복했다.
병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그건 내 착각인지 모른다. 몇 날 혹은 몇 달이 흐른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그 자리에 정지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에겐 시간의 느낌이 없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한 여자와 두 사내가 내 침대로 걸어왔다. 그들은 내 침대 옆에 멈춰서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들이 나를 이 병원에 호송해 준 은인들일 거라고 짐작했다. 남자들의 인상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미인이었다.
“우리가 누군지 알겠어요?”
여자가 미소띤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개를 끄덕거렸다고 생각했을 뿐 그들에겐 내 동작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동작은 의사와 간호사만이 알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변화였기에.
“알아서 다행이에요. 빨리 회복하세요. 일어나서 열심히 살아야 하잖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목뼈를 다쳐서 성대가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세운상가 한길에 쓰러져 있더군. 그 밤에 거긴 뭣하러 갔었소? 양복을 빼입은 걸 보니 장사꾼 같지는 않던데, 연인과 데이트할 일 있었소? 참, 나 좀 봐. 말도 못하는 환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니, 미안하오.”
“당신 때문에 우리 회장님 승용차 시트 다 버리고 우리도 세탁비께나 들었소. 어서 회복해서 세탁비 갚으슈.”
두 사내가 거들먹거리며 지껄였다. 여자는 점잖은데 사내들은 말투가 좋지 않았다.
“치료비 걱정은 하지 말고 치료 잘 받으세요. 일반병실로 옮기면 또 오겠어요. 그럼 바빠서 이만……”
여자는 두 부하를 데리고 중환자실에서 나갔다. 내게는 간병인이 없고 나어린 간호보조사가 와서 대소변 볼 때 도와 주었다. 간호보조사는 친절하고 자상했다. 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미음도 먹여 주고 말동무도 되어 주었다. 나는 입원해 있는 동안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빨리 퇴원하고 싶어서 고통을 참고 억지로 운동을 했다. 얼굴만 제외하곤 성한 곳이 없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놀랍게 빨리 회복했다.
내 옆 침대에 있던 중화상 환자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영안실로 실려 갔다. 가족들의 통곡 소리가 슬픔을 자아냈다. 나는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일반병실에서는 간호보조사가 필요없었다. 나 혼자 밥을 먹고 대소변을 가릴 수 있었으니까.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며 하루 이틀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계선이를 생각했다. 계선이는 내 애인이다. 그녀는 내가 죽은 줄 알 것이다.
2
나를 살려 준 그 여자는 내가 일반병실로 옮긴 후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 여자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던 두 부하 중 한 사내가 밤중에 두 번 찾아왔을 뿐이다. 그는 회장의 운전기사라고 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자네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시네. 치료비 걱정할 건 없어. 그분은 돈이 억수로 많으니까. 난 회장님이 보내서 온 거야.”
영추와 나는 병원 뜰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었다. 무성한 수목들 사이로 서울의 밤하늘이 보였다. 내가 입원해 있는 사이에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 매미소리가 들리지 않는 초여름이었다. 영추와 내가 나눈 대화는 극히 피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는 내 고향이 어디냐고 묻더니 전라도라고 하자 “나와 같군.”하고 웃었다.
“왜 거기에 쓰러져 있었지?”
말을 꺼내면 길어질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영추는 다 안다는 듯이 더 묻지 않았다.
“시골에서 자식이 성공하길 기다리는 어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살려니 하는 수 없었소.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나쁜 물이 들게 됐죠. 어쩝니까? 기왕에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놨으니 그 세계에서 출세해야지 않겠어요?”
“출세해야지. 출세하고픈 욕망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포부니까.”
“저는 부귀영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 그저 밝은 창문 있는 집에서 마누라와 자식새끼 낳고 장사나 하면서 소시민처럼 사는 게 꿈입니다. 그게 출세입니다.”
“그 출세를 막는 놈이 있더란 말이지? 그것도 그 옛날의 나와 비슷하구나.”
“형님은 좋은 보스 만나서 좋겠수다. 저도 사람다운 보스 밑에서 일해 보고 싶습니다. 배신도 없고 구속도 없는 오아시스 같은……”
“그런 파라다이스는 지상에 없는 거야. 누구는 더럽게 살기 좋아서 더럽게 사는 줄 아나? 타고난 사주팔자를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흘러가는 거라고. 나도 그렇게 썩 좋은 놈은 못 되지만 고향 친구라 도와 주고 싶네. 우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면 회장님께 한번 말씀드려 보지. 회장님이 자네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
“왜 그럴까요?”
“낸들 아나? 그분 마음이지.”
그리고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회장님이 과부란 사실을 알려 주었다. 영추는 전승희 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비록 여자지만 일 대 일로 겨루면 어떤 남자에게도 지지 않아. 자네도 그 세계의 물을 먹었으니까 전승희란 여자가 누구인지 알 거야. 모른다고? 모를 수도 있지. 우리 회장님은 암흑가에서 숨은 여걸이니까. 우리 회장님처럼만 양심적으로 살라고 말하고 싶어.”
영추는 전승희 회장이 하고 있는 사업들을 열거하며 보스 자랑을 했다. 건설업이면 건설업, 무역업이면 무역업. 전승희 회장이 하는 기업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떳떳한 기업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금시초문인 것 같기도 했다. 서울 시내엔 유명, 무명의 조폭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에 그 이름을 다 기억할 수도 없다. 전승희도 그중의 하나인 것이다.
“왕초 남편이 비명에 죽고 사분오열된 부하들을 모아서 조직을 키우고 기업을 살렸지. 배움도 많은 여자야. 원래 갑부의 딸이었지. 이제는 기업의 이미지도 있고 하니까 조폭의 탈을 벗고 순수 기업인으로 살고 싶어하지. 그런데 적들이 우릴 놔주지 않는단 말이야. 우리는 깨끗이 살고 싶어도……”
여름이라 해도 밤 기온이 싸늘했다. 나는 추워서 덜덜 떨었다. 다시 고통이 몰려왔다. 영추는 담배꽁초를 구둣발로 부벼 끄고 나서 일어섰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 회장 은혜를 잊지 말게. 살려 준 은혜를 모른다면 사람이 아니지. 빨리 완쾌하라고.”
그의 구둣발 소리가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나는 홀로 벤치에 남아서 오랫동안 콜록거렸다. 담배가 폐에 해로운 줄 알면서 담배를 끊지 못한다. 계선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둠 속의 태양처럼, 언제 어디서나 나를 비춰 준다. 계선은 유태호의 품에 안겨 있을 것이다. 유태호는 나의 보스였다. 왕초는 계선을 차지하기 위해서 부하들을 시켜 세운상가로 나를 유인했다.
“계선이가 세운상가에서 널 기다린다더라. 이따가 열 시쯤에 가 봐.”
술자리에서 왕초가 계집의 유방을 주무르면서 내게 말했다. 계선은 왕초가 단골도 다녔던 술집의 호스티스였다. 계선이 내 애인이란 걸 알면서도 왕초는 계선에게 눈독을 들였다. 계선은 왕초가 몽칫돈을 찔러 주고 하룻밤 자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왕초는 계선을 자기에게 양보하라고 노골적으로 들볶았다. 심복부하인 내게 할 말이 아니었다. 나는 코웃음치고 적당히 넘어갔다. 왕초는 나를 미워하고 나는 왕초를 속으로 경멸했다.
3
왕초는 그 술집에 찾아갈 때는 나를 제외하고 다른 부하들을 대동했다. 계선을 꺾으려고 갖은 술책을 다 썼다. 왕초는 부하들을 시켜 계선과 나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계선이 큰 선물을 받고 왕초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동료들의 말을 믿고 계선과 나는 결별했다. 계선의 전화가 오면 받지도 않고 나도 그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음모예요, 오해라고요. 난 깨끗해요. 계선은 문자 메시지로 결백을 전해 왔다.
설사 계선이 왕초의 세컨드가 됐더라도 계선의 노력이 고마웠다. 뒷골목의 계집에게 백합 같은 순정을 바랄 나도 아니고 왕초에게 몸을 바쳤다고 해서 계선에 대한 내 사랑이 변할 리는 없었다. 그건 내 진심이다. 내가 바라는 건 계선의 마음이지 강물에 배 지나가는 육체의 순결이 아니었다.
왕초가 갑자기 내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왕초와 나는 다른 술집에 가서 곤죽이 되도록 마셨다. 계선이 세운상가에서 기다린다는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선을 만나기 위해서 더 마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운상가는 그녀와 내가 사랑을 맺은 곳이었다. 컴컴하고 긴 상가가 그녀와 나의 데이트 장소였다.
계선이 내게 전화로 얘기하지 않고 왕초를 통해 데이트를 제의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계선은 나와 부부 관계란 걸 입증하기 위해서 왕초 앞에선 더 표를 냈다. 내가 그러지 마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뜨겁게 사랑한다는 걸 표내기 위해서 왕초에게 일부러 그런 부탁을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왕초의 거짓말을 믿고 비척거리며 어두운 세운상가로 걸어갔다. 봄비가 자락자락 내리고 있었다. 내게는 우산도 없었다. 승용차 한 대가 뒤에서 라이트를 켜고 달려왔다. 나는 차도를 건너 우리의 밀회 장소였던 건물 밑으로 바삐 걸었다. 나보다 승용차가 더 빨리 질주해 왔다. 승용차를 피할 순간 내 몸은 공중으로 치솟았다. 일어나려고 비틀거리는 나를 향해 승용차가 후진으로 돌진했다. 승용차는 달아나려고 하는 나를 몇 번 갈아 뭉개고는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왕초가 나를 죽이려고 계획적으로 시킨 일이었다. 왕초 말고 나를 죽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원한 살 사람도 없고 원한 살 짓을 한 적도 없다. 나는 비록 조직폭력배의 하수인이지만 약자를 괴롭히거나 울린 적이 없다. 내 적은 강자이고 악당들이다. 왕초는 그런 나를 좋아하면서도 은근히 두려워했다.
주먹솜씨는 조직 내에서 내가 가장 셌다. 왕초와 나의 관계가 멀어진 것은 그의 추한 여자 관계 때문이었다. 유태호는 내가 어려울 때 도와 주고 나를 키위 준 스승이었다. 그의 배신적 행동은 암흑가에 환멸을 느끼게 만들었다. 암흑가에서 돈 벌어 출세하려던 꿈도 집어치웠다. 나는 계선과 암흑가를 떠날 궁리만 했다. 그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계선은 여기저기 많은 빚을 지고 빚 속에서 살고 있었다. 빚을 피해 달아나면 다른 빚쟁이가 그녀를 또 옭아맸다. 계선과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암흑가와 유흥가에서 탈출하는 길인데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내겐 돈이 없었다. 나는 돈이 생기면 시골 어머니께 보내 드리고 어렵게 사는 여동생의 생활비로 쏟아부었다. 여동생은 어머니보다 더 어렵게 살고 있었다.
4
계선은 내 인생의 의미를 바꿔 놓은 여자였다. 계선이 아니었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그 암흑가를 떠나지 않고 그 세계에서 썩었을 것이다. 계선은 내게, 나는 계선에게 오아시스였다. 그녀와 나는 태양처럼 약속했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자고 혈서로 약속했다. 사실 그 세계에서 계선이만큼 순수하고 양심적인 여자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계선이 변함없이 날 사랑하리란 걸 믿고 있다.
기회는 그녀와 나에게 너무 잔인했다. 약속은 허무한 꿈이었다. 왕초는 나를 제거했으니까 마음놓고 계선에게 접근하겠지. 그 생각을 하면 미칠 것 같다. 계선에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도 왕초가 두려워서 전화를 걸지 못한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면 왕초는 또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나는 왕초를 죽일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내 스승이었다. 계선이 변치 않고 날 사랑한다면 그걸로 만족할 테다. 나는 우리의 운명을 미워한다. 계선이 나를 잊고 왕초의 첩이 되면 그걸로 우리 관계는 끝나는 거다. 나의 태양은 사라지고 꿈은 허무한 그림자.
내가 빨리 회복하려고 기를 쓰는 이유는 계선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녀를 만나 한마디만 묻고 싶다. 계선의 대답을 듣고 싶다. 그러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게 나의 꿈이다.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도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옛날에 순진했던 내 본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 암흑가의 들개(내 별명) 설순표는 죽고, 계집아이처럼 인형을 좋아했던 천진난만한 시골 소년으로 돌아가야 해. 계선과 헤어져도 울지 말아야 해.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양복 호주머니를 뒤지니 영추가 주고 간 명함과, 까만 개인형이 나왔다. 개인형은 자기 보고 싶을 때 대신 보라고 계선이 사 준 선물이었다. 개인형의 배를 누르면 “아이 러브 유! 아이 러브 유!”하고 귀엽게 노래 불렀다. 내 입가에 미소가 떠돌고 새힘이 솟아났다.
계선의 단칸방에 가면 인형들이 많았다. 계선도 인형 모으기를 좋아해서 길가에 토이크레인이 보이면 동전을 집어넣고 몇 개고 낚아야 직성이 풀렸다. 개인형은 동전으로 낚은 게 아니고 그녀가 돈 들여 사 준 선물이다. 그 세운상가에서. 그러니까 내겐 특별한 마스코트이다. 나는 그 마스코트의 힘으로 살아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명함에 있는 주소대로 영추가 근무하는 회사를 찾아갔다. 회사는 고층 오피스텔의 이십 오층 꼭대기에 있었다. 그 회사가 전승희 회장의 그룹 본부이고 영추는 회장의 보디가드 겸 운전사였다.
“여, 귀한 손님이 오셨군! 몸이 부은 거야, 살찐 거야? 양복을 빼 입으니 몰라보겠는데.”
“형님이 사 주신 새옷 입고 염치없이 찾아왔습니다.”
“염치없긴? 그렇잖아도 회장님이 기다리셨어. 자넨 행운아야.”
영추와 그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영추를 따라간 곳은 회장실이었다. 영광스럽게도 나는 회장실로 안내되었다. 회장은 바쁜 결재를 밀쳐 두고 나와 단둘이 마주앉아 장시간 이야기해 주었다.
“건강은 어때요? 목발을 짚고 있는데 무리하진 마세요.”
“아무렇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면 일한 만큼 보수를 줄 거예요. 우리 규칙에 잘 따라만 주면……”
“저를 써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뭘 잘하세요? 사무 경험은?”
회장은 내 주먹을 훑어보면서 사무적으로 물었다. 나는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물어 본 내가 바보지. 어떻게 대답하는가 듣고 싶어서 물어 봤어요.”
회장의 농 섞인 말에 내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같은 쓰레기에게 사무 경험이 있겠는가.
“비서한테 얘기는 들었어요. 당분간 비서실로 출근하세요. 비서실에도 할 일이 많아요. 그냥 노는 게 아니고……”
“왜 저에게 이렇게 과분한 대접을 해 주시는지……”
“그냥 도와 주고 싶어서예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러니까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아요. 그 대신 회사의 비밀을 지켜 줘야 해요.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해가 갈지도 몰라요.”
회장은 당연한 말을 하고 나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뿌연 하늘과 빌딩들의 끝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의 얼굴에 알게 모르게 짙은 수심이 어려 있는 걸 보았다. 보통 가정주부처럼 수수하고 왜소해 보이는 이 여자가 대기업의 회장이라니.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조직폭력배의 보스라는 점이었다. 그 여자의 얼굴 어디에도 흉악한 범죄자의 레텔은 붙어 있지 않았다. 시골의 어머니가 뇌리에 떠올라서 설움이 울컥 치밀었다. 어머니는 오늘도 성황당에 촛불 켜놓고 아들의 성공을 기도할 것이다. 전승희 회장의 포근한 모습에서 어머니의 체취를 느꼈다.
5
“내 나이 마흔이에요. 나는 내 나이보다 두 배 이상의 삶을 살았다고 자부해요. 돈 많은 남편과 중매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조직폭력배 두목이었어요. 중매쟁이한테 속았던 거죠. 그때부터 내 인생은 찢어졌어요. 내가 암흑가의 보스가 된 것은 좋지 않은 남편 만나서 피투성이 삶을 배우고, 그 세계에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내 인생이에요. 무술과 싸움도 남편한테서 배우고 암흑가에서 살아나는 방법도 그이한테서 배웠어요. 나는 항상 올바른 방법으로 돈을 벌자고 했죠. 남편은 내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렇게 험하게 살다 처참하게 떠났어요. 아들과 딸 하나씩 남기고 억울하게 먼저 갔어요. 나는 두 자식 때문에 깨끗이 살고 싶지만 적들이 여자라고 얕보고 나를 괴롭혀요. 이기려니까 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먹히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남편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회장은 물컵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엑스자로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두 다리를 단정히 모으고 치마로 앞을 가렸다. 그것은 여성의 모습이었다.
“몇 살이에요?”
“스물 여덟 살입니다.”
“내 막내동생과 같은 나이군. 좋은 때야.”
나는 책상 위에 쌓인 결재서류에 신경이 쓰여 책상 쪽을 흘끔거렸다. 여비서가 들어와서 다른 서류들을 또 놓고 갔다. 중요한 서류인 것 같았다. 회장은 고개를 돌려 뿌연 서울 하늘만 응시하고 있었다. 곧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다.
“왜 그날 밤길에 쓰러져 있었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
“저의 어른입니다.”
“어느 조직이야? 부하를 그토록 처참하게 살해할 정도이면 그 이름 알 것도 없지만, 살아났으니까 물어 보는 거야. 어떤 작자인가 이름이나 알자고.”
“유태호 회장입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순표 씨.”
“유, 태, 호.”
나는 내 원수인 왕초의 이름을 씹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전승희 회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노려보더니 벌떡 일어서서 실내를 뱅뱅 돌았다.
“순표 씨가 그놈의 부하였단 말이지?”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가슴이 요동치고 있었다. 회장은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내 앞에 와서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다음 말은 나를 너무 놀라게 했다.
“그놈은 내 남편을 죽인 원수야. 기이한 인연이군.”
“저는 유태호 회장을 모시고 있으면서 사람을 죽였단 말은 못 들었는데요.”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유태호도 끝장이지. 그놈은 내 남편을 실족사로 위장하여 감쪽같이 살해했어. 내 남편과 친구였거든. 어느 날 그가 내 남편에게 등산을 가자고 유인했어. 등산할 때 남편은 경호비서를 대동하지 않았지. 남편은 사흘 후에 계곡에서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어. 유태호는 남편과 도중에 헤어져 다른 길로 내려왔다고 했지. 그 일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그대로 묻어졌어. 그러나 나는 남편의 메모장에서 유태호가 우리 지주회사를 먹으려고 끈질기게 괴롭혔단 걸 알았지. 우리 지주회사는 해외 판로가 막혀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남편 죽자 유태호에게 헐값으로 매각됐지. 해외 판로를 독점하려고 장사를 방해한 것도 유태호야. 그 힘으로 유태호는 성공했어. 그렇게 끝난 거야.”
“왜 고소하지 않았습니까?”
“고소하면 뭘 하겠어? 메모쪽지가 무슨 증거가 되겠어? 그러나 목격자가 있었어. 유태호의 회사 청소원이었는데 유태호가 내 남편을 뒤에서 돌로 내려치는 걸 봤다는 거야. 나는 그 전화를 받고 그 청소원을 만났지. 그랬더니 그 청소원이 마음이 변했는지 다른 말을 하더라고. 그리고 날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어. 나는 청소원을 설득하여 증언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헛수고였어.”
6
전승희 회장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조직폭력배의 보스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내가 본 전승희 회장은 인정 많은 여자 사업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회장은 비서를 불러 내 숙소를 마련해 주라고 했다. 이렇게 따뜻한 인간 대접을 받아 보긴 처음이었다. 회장의 은혜가 뼈에 사무쳤다.
“우리 회장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일해라. 일이랄 게 따로 있겠냐? 회장님 잘 모시는 게 우리 임무지. 경영은 전문가들이 하고 우리는 그저 회장님만 지키면 된다. 내 말 알겠냐?”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영추가 충고했다. 그는 나를 한 가족처럼 예우해 주었다. 나는 지금 영추의 아파트로 가고 있다. 내 거처를 구할 동안 그의 집에서 신세지기로 했다. 회장 비서가 거처할 방이니 고급 아파트는 아니더라도 홀아비가 살기에 불편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회장의 비서가 되었다.
“모두가 형님 덕분입니다. 형님 은혜죠.”
“나는 회장의 로보트니까 내게 감사할 건 없어. 네가 우리 회장의 원수나 좀 갚아 다오. 유태호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하긴 네 원수를 갚기에도 벅차겠다만.”
“어떻게 하면 회장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습니까?”
“그걸 나한테 물어 보면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니? 유태호는 네가 살아난 줄 알면 또 죽이려고 할 것이다. 내가 한 말은 농담이니까 네 몸이나 조심해라. 앞으로 변장을 하고 다녀야겠다. 너는 새로 태어난 설순표야.”
나는 영추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회장의 원수를 갚아 달란 말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나는 다시 태어난 몸, 이대로 죽은 듯이 살고 싶지는 않다. 복수하고 싶다. 내 가슴에서 복수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계선에게 전화해야겠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려야 해. 유태호가 알아도 좋다. 그는 이제 나의 적이다. 내 애인을 빼앗은 놈!
“신경 쓰지 마. 몸도 좋지 않으면서……”
영추가 담배를 꺼내 주면서 말했다. 네거리에서 신호등에 걸려 있는 동안 영추와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물처럼 흐르는 차들을 보았다. 수술한 자국이 욱신거렸다. 나는 더 입원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예정 퇴원일자보다 두 주일 앞당겨 퇴원했다. 전승희 회장에게 치료비를 무한정 부담시키는 것도 미안하고 병원 공기가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막상 퇴원하니 목발에 의지해야 했다. 얼마동안 목발 신세를 질지 알 수 없다.
환자의 몸으로 복수를 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지만 생각할수록 분해서 유태호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유태호는 의심이 많아서 항상 졸개들을 서너 명씩 대동하고 다닌다. 그의 저택엔 도사견들이 으르렁거리고 부하들이 철통같이 지킨다. 유태호를 죽일 방법이 없다. 나는 사람을 죽여 본 적도 없고 살인 행위엔 가담하지도 않았다. 조직폭력배들끼리 벌이는 영역싸움에서 본의 아니게 죽거나 불구가 될 땐 가슴 아팠다. 그런 일은 조직폭력배 사회에서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싸움에서 누군가가 죽고 가해자들이 경찰의 수배를 받을 때 죄악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떠나고 싶었다. 떠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게 폭력배들의 사회였다. 배신자에겐 보복이 주어졌다. 그 보복이 두려워 그 세계를 떠나지 못한다.
내게 힘과 용기를 준 사람은 계선이었다. 계선은 내게 태양처럼 사는 법을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두려움 없는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마음 있으면 어디 가서 목숨 하나 견지 못할 거냐고 하면서 조직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사랑은 법보다도 강하다고 하면서 우리가 믿을 건 사랑밖에 없다고. 나는 그녀가 내게 속삭이던 그 말을 기억한다. 그 따스한 입김을 기억한다. 사랑은 법보다 강해요, 뭐가 두려우세요? 이 계선이가 당신 곁에 있는데.
나는 지금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선이 없는 삶은 죽음이며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그녀를 만나야 한다. 그녀의 마음만 확인하면 우리가 굳이 함께 있지 않더라도 그녀를 단념할 수 있다. 이 상태로는 그녀를 단념할 수 없다.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그때 그녀가 내게 한 말이 진실이었다는 걸 그녀 입으로 듣기 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