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반도 민심의 근원을 차단하는 억압기구
다른 경찰서에 비해 빈번하게 청사의 위치를 옮긴 까닭은?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당시의 시점에서 서울 전역에는 창덕궁경찰서(昌德宮警察署), 본정경찰서(本町警察署),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동대문경찰서(東大門警察署), 서대문경찰서(西大門警察署),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영등포경찰서(永登浦警察署), 성동경찰서(城東警察署), 성북경찰서(城北警察署), 마포경찰서(麻浦警察署) 등 도합 10개의 경찰관서가 촘촘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 경찰서의 연혁을 정리하다 보니 한 가지 퍼뜩 눈에 띄는 것이 본정(‘남부’로 개칭), 서대문, 성동, 성북, 마포 등과 같이 해방 이후 한 번도 청사를 옮기지 않고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경찰서가 많다는 사실이다.
나머지의 경우도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 위치 이전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지만, 이와는 다르게 좀 예외적인 것이 종로경찰서의 사례이다. 간략하게만 살펴보더라도 종로경찰서는 처음에 탑골공원에 인접한 옛 북부경찰서 청사(1915년 6월)에서 시작하여 일한와사전기회사 사옥(옛 한성전기회사 사옥, 1915년 9월), 공평동의 경성복심법원 청사(1929년 9월)를 거쳐 인사동의 태화여자관(1943년 10월) 자리로 거듭 옮겨 다녔고, 해방 이후 시기에는 공평동 청사(1949년 1월)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경운동 신축 청사(1957년 3월)로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처럼 빈번한 청사 이동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가 처음 세상에 등장한 것은 헌병경찰제도(憲兵警察制度)로 상징되는 이른바 ‘무단통치(武斷統治)’가 한창 정점을 치닫고 있던 1915년 6월 1일의 일이었다. 이때 북부경찰서는 물론이고 여기에 속한 동대문분서(東大門分署)와 서대문분서(西大門分署)가 한꺼번에 통폐합되면서 종로경찰서가 생겨났고, 이와 함께 기존의 남부경찰서는 본정경찰서로 개칭되는 한편 용산경찰서가 폐지되면서 이곳은 용산헌병분대(龍山憲兵分隊)의 관할로 넘겨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종로경찰서 (옛 중부경찰서 및 북부경찰서)의 편제 및 공간 변동 연혁
일자 | 변동 내역 |
1904.8.3 | 경무중서(警務中署, 옛 좌포청 자리)에 육군법원 및 육군감옥서가 이접하고 경무중서는 전 평시서 자리(종로 2가 39번지)로 이접 |
1908.1.1 | 중부경찰서(종전의 경무중서)가 신설되고 북부경찰서(수문동 소재)는 별도로 존재 |
1909.10.17 | 중부경찰서 청사개축공사로 옛 돈화문 친위대 건물에 임시 이전 |
1910.8.5 | 중부경찰서(교동 소재)가 북부경찰서로 개칭되고, 기존의 북부경찰서는 북부경찰서 수문동분서(수문동 소재)로 변경 |
1910.9.30 | 북부경찰서를 탑동공원 옆 신축 청사(종로 2가 39번지)로 이전 |
1914.3.1 | 북부경찰서 수문동분서는 북부경찰서로 통합 |
1915.6.1 | 북부경찰서가 ‘경성종로경찰서’로 개칭되고, 북부경찰서 동대문분서 및 서대문분서는 일괄 종로경찰서에 통폐합 |
1915.9.1 | 종로경찰서를 옛 일한와사전기회사 자리(종로 2가 8번지)로 이전 |
1920.1.29 | 종로경찰서에서 분리되어 동대문경찰서와 서대문경찰서가 신설 |
1929.9.4 | 종로경찰서를 옛 경성복심법원 자리(공평동 193번지)로 이전 |
1943.10.24 | 종로경찰서를 옛 태화여자관 자리(인사동 195번지)로 이전 |
1946.4.15 | 종로경찰서가 번호제(番號制)에 따라 제1관구 경찰청 제10경찰서로 개칭 |
1946.9.18 | 제1관구 경찰청 제10경찰서가 수도관구 경찰청 서울 제2구경찰서로 개칭 |
1949.1.15 | 서울 제2구경찰서가 공평동 옛 종로경찰서 자리로 복귀 |
1949.2.23 | 서울 제2구경찰서가 서울종로경찰서로 개칭 |
1957.3.13 | 종로경찰서를 경운동 신축 청사(경운동 90-18번지)로 이전 |
2022.8.4 | 종로경찰서가 청사신축공사로 인하여 공평동 1번지(하나투어빌딩, 옛 SM면세점 서울점)로 임시 이전 |
그 이후 1920년 1월 29일에 이르러 종로경찰서에서 다시 분리되어 동대문경찰서와 서대문경찰서가 각각 신설되었으며, 이 당시에 재편된 종로경찰서의 관할구역은 일제 패망 때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종로경찰서라고 하면 아무래도 조선인 집결지역의 중심적인 활동공간을 담당한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일제의 식민통치자들로서는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지역이라고 하면 단연 이곳을 손꼽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4일자에는 「종로서타령(鍾路署打鈴) (1) 혈색(血色)의 적벽양옥(赤壁洋屋), 특색(特色)은 탑상괘종(塔上掛鐘), 옛날 옛적엔 집으로도 내노라고 내 앞에 아니 떠는 놈은 없었나니, 염라청사(閻羅廳舍)의 기춘추(幾春秋)」 제하의 연재기사가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그 당시 조선 민중의 눈에 비친 종로경찰서에 대한 인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엿볼 수 있다.
…… 이리하여 조선은 경찰정치라고도 하고 서장정치라고 부르기에까지 조선경찰은 최대한 위력을 가지고 민중에게 호랑이와 같이 임하였다.
경찰서가 많다. 그 중에도 조선 사람에게는 종로경찰서에 대한 인상이 어느 방면으로 보더라도 가장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조선의 중앙수도인 서울에서도 한복판인 종로 큰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으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가장 높은 시계탑이 솟은 까닭으로도 그러하려니와 그보다도 종로서는 지금까지 발휘한 기능이 조선의 무수한 모든 경찰서보다도 몇 곱, 몇 십 곱, 몇 백 곱 더한 까닭으로도 그러하니 조선경찰의 특색이 실로 이 종로경찰서에 뭉쳐있으매 종로경찰서는 조선경찰서의 대표적 전형이다.
그런데 이 종로경찰서가 인연 깊은 이 집을 버리고 멀지 않은 재판소 자리로 이사한다. 금 4일부터 이삿짐을 나른다 하니 아마 며칠 안 돼 아주 집을 비어놓고 말 터이다. 그러면 이 집은 어떻게 되려는고? 북부의 십만 주민을 쥐락펴락하며 수없이 많이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눈물을 자아내고 진저리를 치게 하며 혹은 원한의 초점되던 이 집, 폭탄의 세례까지 받던 이 집의 엉키고 엉킨 지나간 날의 이야기는 과연 어떠한고?
그리고 조금 더 세월이 흘러 『매일신보』 1943년 10월 1일자에 수록된 「총후치안확보(銃後治安確保) 철석(鐵石), 부내(府內) 신진서장(新進署長)들의 역량(力量)에 기대(期待)」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이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한 종로경찰서장의 자리에 오른 도경시(道警視) 윤종화[尹鍾華, 창씨명은 ‘이사카 카즈오(伊坂和夫)’]의 부임 소감에도 이러한 대목이 포함되어 있다.
긴장된 결전시국 하의 대경성의 치안을 담당할 경찰진도 이번 이동에 주요부에도 대변동을 보게 되어 경무국 경제과장으로 중후침착한 인물이 기대되던 오카(岡久雄) 씨가 경찰부장으로 임명되면서 반도경찰서 중 경시청 같은 존재인 종로경찰서장에 최초의 조선인인 경시서장으로 경기도 보안과장으로 있던 이사카(伊坂) 씨가 신임되고 또 같이 경성의 관문을 맡은 본정(本町)경찰서에는 본부 경무과 사무관으로 있던 호시테(星出壽雄) 씨, 용산(龍山)경찰서장에 보안과 사무관으로 있던 와키다(脇田惠) 씨, 그리고 경기도 보안과장에는 평북에서 타나카(田中鳳德, 전봉덕) 씨가 각각 빛나는 영전을 보게 되었는데 경성의 세 서장은 모두 30을 갓 넘은 신진기예의 유자격자로 야심적인 그들의 포부와 역량에는 일반시민의 기대가 크다. 그러면 우리의 신임 경찰부장 이하 새 서장들의 포부는 어떤 것인가 듣기로 하자.
[근로태세(勤勞態勢) 정비(整備)할 터, 이사카 종로서장(伊坂 鍾路署長)의 결의(決意)]
그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작년 말에 와서 약 9개월간 일하였다. 참으로 유쾌하게 지났다. 지도와 협력을 하여준 상사 선배와 사회 여러분께 감사한다. 이번 제일선에 나가게 된 것은 처음인데 책임이 무거움을 더욱 느낀다. 특히 반도인에게는 처음 되는 ‘포스트’인 만큼 그 책임을 실로 큰 줄 안다.
종로는 반도의 중추지대이고 반도인 중 상층계급이 많은 곳으로 반도민심의 동향을 결정하는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철통같은 필승체제가 서 있지 않으면 병참기지반도의 사명을 다하기 어려울 줄 안다. 경찰관은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계몽과 지도를 하여야 할 것을 확신한다.
나는 우선 결전하 긴급문제인 방공태세와 근로체제정리 또는 생산력 확충 등 필승의 온갖 시책의 추진력이 되어 책임을 다하여 나가려 한다. 그러기 위하여 경찰관은 먼저 자기수양과 연성으로서 위대한 감화력의 권위가 되어 민중지도를 하여야 할 것을 믿는다. 천학과 덕한내이나 상사와 선배의 지도를 바란다. (사진은 이사카 서장)
여기에 언급되어 있듯이 “종로는 반도의 중추지대이며 반도민심의 동향을 결정하는 근원지”라는 말은 그 자체로 종로경찰서의 위상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표현이 아닌가 한다. 또한 종로는 때로 “조선사상계(朝鮮思想界)의 중심타(中心舵)”라고 일컬어지며, 각 사상단체(思想團體)를 감시해야 하는 탓에 종로경찰서는 그 어느 곳보다도 이른바 ‘고등계 형사(高等係 刑事)’의 구성비율이 높았던 곳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동아일보』 1926년 5월 14일자에 수록된 「종로서(鍾路署) 비밀서류(秘密書類), 매일 발수(每日 發受) 3백 통(通), 비밀문서가 갑자기 늘어서 하루에 평균 3백 통이 내왕, 시절(時節) 만난 경찰(警察)의 활동(活動)」 제하의 기사는 경성의 중심경찰서인 ‘종로경찰서’가 취급하는 고등계 관련 비밀정보의 수효가 일본인의 중심거리에 자리한 ‘본정경찰서’의 그것에 비해 3배 가량이나 많다는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요사이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를 위시하여 시내 각 경찰서 고등계는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국장과 및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개회 등으로 지방 사람들의 상경이 많아졌으며 또는 그에 따라 각처로부터 모여드는 고비정보(高秘情報)가 부쩍 늘고 또는 무슨 비밀한 계획이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주야를 불명불휴의 상태로 분망하게 지내는 중이라는데 경성의 중심경찰서인 종로서 고등계에서는 계원을 증원한 것은 물론이요 동 고등에서 취급하는 정보의 수효는 본래부터 시내에서는 가장 비밀서류가 많다는 본정서보다도 약 3배 가량이나 되는 터이었섰지만은 국상 이래로는 아직 통계를 꾸며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약 3할 이상 증가되었을 듯하여 매일 타처로부터 오는 고비서류의 수효가 150벌 가량이나 되며 동서로부터 발송하는 서류수효도 약 150벌 가량 되어 매일 동서에서 취급하는 서류만 해도 약 3백 벌 가량씩은 된다더라.
종로경찰서의 청사 이전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특이하게도 일제패망기에 이르러 종전의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 옛 인사동 명월관지점 자리)을 사용하던 시절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1941년 12월 29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286호 「적산관리법시행령(敵産管理法施行令) 제1조의 규정에 의한 적국(敵國)」을 통해 “미국(米國, 필리핀연방 및 영지 전체를 포함)과 영국(英國, 인도 및 해외영토를 포함)”이 그 대상국으로 지정되면서 이곳의 시설 일체가 이른바 ‘적산(敵産)’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성일보』 1942년 8월 1일자에 「갱생(更生)하는 적성(敵性), 태화관(泰和館)이 종로서(鍾路署)의 신청사(新廳舍)로, 금추(今秋) 11월경 이전(移轉)」 제하의 기사는 태화여자관 건물이 느닷없이 종로경찰서로 변신하게 되는 배경적 요인에 대해 이러한 설명을 달아놓고 있다.
멀리 한국시대(韓國時代)부터 동양침략(東洋侵略)의 근거로서 독아(毒牙)를 휘두르고 있던 전선 각지(全鮮 各地)에 산재(散在)한 미영계(米英系)의 교회(敎會), 회사(會社), 점포(店鋪)는 전쟁의 봉화(烽火)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손에 관리되어지도록 되어 생산공장(生産工場) 혹은 황민수련도장(皇民修鍊道場)으로 충당되어 지고 있는데, 여기에 또 한 가지 오랜 기간 미국이 그리스도교회 사교기관(社交機關)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숨어 음모(陰謀)와 책략(策略)의 근거지(根據地)로 있던 인사정(仁寺町) 태화관(泰和館)이 얄궂게도 대동아전(大東亞戰) 아래 반도 심장가(半島 心臟街)의 치안확보에 매진하는 종로경찰서의 청사에 대신할 곳으로 결정, 금추(今秋) 11월경에 이전을 보는 것으로 되었다.
종로서는 시국(時局)의 전전(進展)과 더불어 사무(事務)도 팽창(膨脹)하여 현 청사로서는 좁은 것도 있고 또한 오래 되어 개축(改築)하기로 결정하여 3년 전 마츠오카 서장(松岡署長, 현 나진부윤) 시대로부터 준비를 진행하고 있는데, 자재관계(資材關係)에서 실현곤란시(實現困難視)되고 있는 가운데 때마침 대동아전에 봉착, 얄궂게도 관내(管內)의 적성재산(敵性財産)이던 태화관을 이용하는 것으로 되었던 것이다.
종로서의 신청사는 화신(和信)의 안쪽, 견지정(堅志町)의 전차통(電車通)에서 자동차도 통하는 교통지편(交通至便)한 장소이며, 2천여 평(坪)의 부지(敷地)에 화강암건(花崗岩建) 3계(階, 층), 지하실도 있고, 화려한 대강당(大講堂), 스팀의 설비도 되어 있다고 하는 아메리카 독득(獨得)의 화미(華美)를 다한 근대적 건물, 지금까지 이런저런 박안(薄顔)의 느낌이 있던 종로서였었지만, 이 췌택(贅澤, 사치)한 건물을 입수하여 저들이 남겨놓은 설비를 활용하여 총후치안(銃後治安)의 사무를 보는 것처럼 된 고마움, 바로 성전(聖戰)이 준 증물(贈物)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이 건물의 원래 주인이던 미국감리교회가 즉각 되돌아왔으므로 필연적으로 청사반환의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실제로 해방이 되자마자 미군정 시기에 서울종로경찰서 청사에 대해서는 거듭 명도령(明渡令)이 내려진 바 있었으나 예전 종로경찰서 자리에는 하필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까닭에 결국 종로경찰서는 한동안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태화여자관 건물이 반환되고 종로경찰서가 공평동에 자리한 옛 청사로 되돌아온 것은 1949년 1월 15일의 일이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조선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곡절(曲折) 많은 태화관(泰和館), 종로서 이전(鍾路署 移轉)으로 다시 부활(復活)」 제하의 기사에 그간의 경위가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서울시 종로경찰서는 지난 15일 그전 종로경찰서 자리인 종로 1가 화신백화점 창고로 다시 이전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사동 건물은 미국감리교회에서 도로 인계 받아 부녀육성사업기관인 태화관으로 부활케 되었다. 본시 동 건물에는 복잡한 내력이 있다. 본시 한국시대 이완용(李完用)이 지은 요리집 태화관(太華館)으로 3.1독립선언 당시 33인이 밀회를 거듭한 건물로 조선 기와집이었는데 그후 미국감리교에서 이를 매수하고 개축한 후 부녀교육사업을 경영하던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이다. 왜국이 망해가기 시작하여 최후 발악을 하던 1941년말 경 미국선교사들은 귀국을 피치 못하게 되어 조선감리교에 동 건물의 보관을 위탁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던 것인데 당시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방금 반민행위자로 날인을 받고 피검되어 있는 화신(和信) 박흥식(朴興植)에게 일금 50만 원에 양도케 흉계를 꾸미어 종시에는 박(朴)의 손으로 동 건물이 넘어 갔으며 박은 그 대신 종로 1가에 있던 종로서를 동 건물과 교환하여 해방을 맞은 것이고 그 후 미군선교사들이 재차 입국하여 보니 경찰이 사용하고 있어 재작 1947년 11월 말일경 동 건물을 내어달라고 야단을 하여 일시 말썽이 되었었는데 종로서로서는 도로 자기 집을 찾자니 미군이 사용하고 있어 아무 대책이 없었던 바 이번 미군에서 종로 1가 건물을 명도함으로써 이전케 된 것이다.
이로부터 8년 가량의 세월이 흐른 다음, 종로경찰서는 다시 경운동 신축청사(통칭 ‘안국동 청사’)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이 이어지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경찰서 청사가 들어서 있는 그 장소이다. 이와 동시에 직전까지 종로경찰서로 사용되던 옛 경성복심법원 청사는 박흥식 소유의 화신산업(和信産業)으로 넘어가면서 곧바로 철거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이상에서 보듯이 종로경찰서가 빈번하게 청사의 위치를 옮겨 다닌 것은 무엇보다도 조선인의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제일선에서 사상동향을 탐지하고 이를 차단하는 대표적인 억압기구인 까닭에 특히 ‘고등계’를 중심으로 한 지속적인 인력충원과 기능확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닌가도 싶다. 더구나 전시체제기에 맞물려 전반적인 사회통제의 확대에 따라 경찰 조직 자체가 비대화하면서 그 결과로 만성적인 공간부족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8번 출구로 올라가면 장안빌딩(종로 2가 8번지) 앞에서 ‘김상옥 의거터(金相玉 義擧址)’ 표석을 마주할 수 있는데, 드물게 남아 있는 이러한 흔적을 통해 한때 이곳이 종로경찰서가 있던 자리였음을 겨우 짐작케 한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내력을 지닌 종로경찰서가 특정한 시기에 어느 장소에 터를 잡고 있었던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폭압적인 식민통치기구들이 자리했던 공간들도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되는 곳이니만큼 이를 드러내어 그 존재와 내력을 알리는 장치는 지금에라도 서둘러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 이 글은 『민족사랑』 2023년 8월호에 게재하였던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각주 1) 이 가운데 ‘창덕궁경찰서(창덕궁과 덕수궁을 관할)’는 1949년 2월 23일 대통령령 제59호 「경찰서의 명칭 위치 및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건」에 의해 ‘경무대경찰서(景武臺警察署, 중앙청과 경무대 구내를 관할)’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본정경찰서’는 1947년 2월 1일에 ‘중부경찰서(中部警察署)’로, ‘동대문경찰서’는 2006년 3월 1일에 ‘혜화경찰서’로 각각 개칭되었다.
각주 2) 현재 종로경찰서 홈페이지에 정리된 경찰서 연혁자료에는 “낙원동 58번지(1945.10.21, 현 세무서) → 공평동 163번지(1948.11.25, 현 제일은행 본점) → 경운동 94번지(1957.3.13, 현 SK재동주유소) → 경운동 90-18번지(1982.11.22, 현 청사 위치)”의 순서대로 청사를 옮겨 다닌 것으로 정리되어 있으나, 당시의 신문자료와 지도자료로 확인되는 내용과는 상당한 오차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58년 5월 25일에 발행된 『지번입 서울특별시가지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자료)를 보면 이 당시에 이미 지금의 자리에 ‘종로경찰서’ 표시가 나와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각주 3) 용산경찰서는 헌병경찰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1919년 8월 20일 조선총독부령 제136호에 의해 재설치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1920년 1월 29일에 이르러 종로경찰서에서 분할되어 동대문경찰서와 서대문경찰서가 신설된 바 있다.
각주 4) 여기에 나오는 ‘종로서타령(鍾路署打鈴)’은 종로경찰서의 청사 이전(공평동 소재 경성복심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자리)을 계기로 그 동안 관할구역 내에서 벌어진 파란만장한 대동단(大同團) 사건, 보합단(普合團) 군자금 모금사건, 의열단(義烈團) 사건, 김상옥(金相玉) 사건 등에 관한 회고담을 정리하여 1929년 9월 4일부터 9월 22일에 이르기까지 총 10회에 걸쳐 『동아일보』 지면에 수록된 연재물이다.
각주 5)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26년 4월 25일자에 수록된 「사상취체 거익준엄(思想取締 去益峻嚴), 전선(全鮮) 고등경찰(高等警察) 증원(增員), 종로서(鍾路署)는 형사(刑事) 10명 기위증원(旣爲增員)」 제하의 기사에는 “고등계 형사가 10명 증가”된 사실이 언급되어 있으며, 특히 『매일신보』 1928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종로서 고등계(鍾路署 高等係)에, 사복(私服) 3, 4명 증가, 고등경찰계가 커진다」 제하의 기사에는 다시 고등계 형사가 증원된 내용을 알리는 한편 “목하(目下) 종로서에는 서원 총수가 서장(署長) 이하 280명이요, 고등계원은 23명으로 기중(其中) 사복근무자(私服勤務者)는 17명”이라는 사실도 함께 적어놓고 있다.
각주 6) 옛 명월관지점 자리(인사동 195번지 구역)는 원래 실소유주가 이완용(李完用)이었으나 1920년 12월 11일에 매매계약을 통해 미국 남감리회 선교본부가 이곳을 넘겨받았고, 그 이후 여자교육기관인 ‘태화관’으로 사용하다가 1939년 11월 4일에 이르러 이곳에 다시 ‘태화여자관’을 신축 준공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의 확산과 관련한 1941년 12월 22일의 법률 제99호 「적산관리법(敵産管理法)」, 칙령 제1178호 「적산관리법을 조선, 대만 및 화태에 시행하는 건(件)」, 칙령 제1179호 「적산관리법시행령」 등이 제정되면서 미국 선교단체와 관련한 일체의 시설이 ‘적산’으로 분류되었으므로 그 바람에 이곳이 ‘종로경찰서’로 전환 사용되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1972년 4월 22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775호 「적산관리법 시행령 제3조 제1항 제4호의 규정에 의한 본방(本邦)법인 지정」 및 조선총독부 고시 제776호 「적산관리법 시행령 제4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적산관리인(敵産管理人) 선임」에 ‘적산’으로 분류된 미국선교단체의 목록이 나열되어 있다.
각주 7) 미국감리교회에 의한 건물 명도령 신청에 관해서는 『조선일보』 1947년 11월 28일자에 수록된 「청천(晴天)의 벽력(霹靂), 종로서(鍾路署)에 명도령(明渡令),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의 부활(復活)?」 제하의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
각주 8) 이 당시 종로경찰서의 청사이전에 관해서는 『조선일보』 1957년 3월 8일자, 「종로서 청사, 신축(新築)을 완료」; 『경향신문』 1957년 3월 14일자, 「종로경찰서 이전식(移轉式)」; 『동아일보』 1957년 3월 15일자, 「종로경찰서 이전」 등 제하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각주 9) 옛 종로경찰서 공평동 청사의 철거에 관해서는 『조선일보』 1957년 5월 9일자에 수록된 「[종로서(鐘路署) 옛 건물(建物)과 백년간(百年間)의 내력(來歷)] 의금부(義禁府)에서 경찰서(警察署)로, 뺏긴 목숨 그 얼마였나, 기구한 일세기사(一世紀史)도 철훼(撤毁)로 종막(終幕)」 제하의 기사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1908년 5월에 평리원(平理院, 그해 8월 1일에 ‘대심원’으로 전환) 청사의 용도로 지어진 것이며, 1909년 11월 1일 이후 고등법원, 경성공소원(1912년 4월 1일에 경성복심법원으로 개칭), 경성지방재판소(1912년 4월 1일에 경성지방법원으로 개칭), 경성구재판소(1912년 4월 1일에 폐지) 등이 나란히 들어섰다가 1911년 11월 30일에 이르러 이 가운데 고등법원이 탁지부 청사(서소문동 38번지)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경성복심법원과 경성지방법원의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그 이후 1928년 10월 10일에 이른바 ‘경성3법원’ 청사(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의 신축 이전이 이뤄짐에 따라 빈터로 남은 공평동 옛 법원청사는 종로경찰서의 몫(1929년 9월 4일 이전)으로 귀착되었다.
031801 『조선총독부관보』 1920년 1월 29일자에 수록된 ‘경성 소재 각 경찰서별 배치현황’이다. 여기에 나타난 종로경찰서의 관할구역은 일제 패망 시기까지 변동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031802 『매일신보』 1920년 1월 31일자에는 신설되는 ‘경성서대문경찰서’와 ‘경성동대문경찰서’의 간판 모습이 소개되어 있다. 그 이전까지는 두 곳 모두 ‘경성종로경찰서’의 관할에 속하였다.
031803 『애뉴얼 리포트(1911~1912)』에 수록된 북부경찰서(北部警察署, 탑골공원 동쪽 인접지)의 전경사진이다. 이 건물은 1910년 9월에 신축되었으며, 1915년 6월 1일에 북부경찰서가 종로경찰서로 전환될 당시의 시점에 청사로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031804 『매일신보』 1929년 9월 5일자에는 옛 재판소 자리(공평동 소재)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종로경찰서의 간판이 내걸리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이곳은 해방 이후 시기에 재차 종로경찰서로 사용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031805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종로경찰서장의 자리에 오른 윤종화(尹鍾華, 창씨명은 ‘이사카 카즈오’)의 부임 소감이 수록된 『매일신보』 1943년 10월 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여기에는 “종로는 반도의 중추지대이며 반도민심의 동향을 결정하는 근원지”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031806 『매일신보』 1939년 6월 14일자에 소개된 태화여자관의 신축 준공 당시 모습이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미국 남감리회 선교본부의 소유이던 이 건물이 이른바 ‘적성재산(敵性財産, 적산)’으로 분류됨에 따라 난데없이 종로경찰서로 변신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031807 태화여자관 자리에 종로경찰서가 이사하는 당시의 장면을 포착한 『경성일보』 1943년 10월 24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일제 치하에서는 이른바 ‘적산(敵産)’이었으나 해방이 되자 원래의 주인이던 미국감리교회가 즉각 돌아왔으므로 청사반환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031808 『조선일보』 1957년 5월 9일자에는 두 차례(1929~1943, 1949~1957)에 걸쳐 종로경찰서 청사로 사용된 옛 공평동 경성복심법원 자리에 대한 내력이 정리되어 있다. 이 기사를 통해 1908년에 옛 평리원(대심원) 청사의 용도로 지어진 옛 건물은 박흥식의 화신산업으로 넘겨지면서 곧장 철거되어 사라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