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 21.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 (부부의 날, 가정주일)
https://cafe.daum.net/znzdkzkepal/1qvN/921 김진성
https://cafe.daum.net/rnjstlgur/9oZ8/157 권시혁
예배로 부름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b-39a)
예배 기원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5월의 눈부신 햇살 아래, 이렇게 복되고 아름다운 주일을 허락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 주간 동안 분주한 세상 속에 살던 저희들이 오늘은 모든 걱정과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성전을 찾았습니다. 예배하는 저희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다시 한 번 십자가의 구원에 감격하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뵈오며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경배와 찬송을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올려드리며, 죄와 사망에서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달고 오묘한 그 말씀(200장)/ 참 사람 되신 말씀(201장)/십자가를 내가 지고(341장)/ 내가 예수 믿고서(421장)/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436장) / 예수 따라가며(449장)
고백의 기도
공의의 하나님! “너희 몸을 죄에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저희들은 지난 한 주간 그 명령과 반대의 삶을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세 치 혀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이웃을 비방하였습니다. 귀는 듣지 말아야 할 비루한 사연들에 기울여졌고, 눈은 보지 말아야 할 욕정의 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힘들고 위급한 일을 만날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사람을 의지하며 우상을 찾아다니면서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냈습니다. 평안하고 즐거울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고 방탕했습니다. 오, 자비하신 주여! 우리가 지은 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한 번 신실한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18)
0521. 성숙한 남편과 기도의 부인. 삼상1: 1-8, 19-28.
☞ 마음 문을 열고
오늘 성경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사시대는 참으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사람들마다 입에서는 한숨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나라는 훼파되고, 가정은 무너지고, 백성의 한숨 소리는 커갔습니다. 이러한 사사시대를 특징짓는 말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은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의 형편은 적의 침공에 노출됐습니다. 백성의 삶은 고뇌로 얼룩졌습니다.
사무엘서는 이런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지파 동맹 시대로부터 시작해 다윗 왕국이 건설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 내는 대서사시입니다. 여기에 네 사람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나, 사무엘, 사울 그리고 다윗입니다.
사무엘서는 사사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을 보여 줍니다. 어두운 길목에 집집마다 새어 나오는 한숨 소리가 있습니다. 문패에는 ‘엘가나와 한나’라 걸려 있습니다. 성경은 이 집을 향하여 희망의 서치라이트를 비추고 있습니다.
1. 성숙한 남자, 엘가나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삼상 1:1).
먼저 엘가나입니다.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삼상 1:3).
이 한 문장에 엘가나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엘가나는 ‘엘’(하나님) ‘카나’(세우다, 일으키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카나’는 ‘갈대’나 ‘창포’를 말합니다. 갈대는 꼿꼿이 일어서 있습니다.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일곱 개의 이삭을 낸 줄기가 바로 카나(옥수숫대)입니다. 갈대나 창포나 옥수숫대는 전부 위로 쭉 솟아 올라갑니다. 엘가나란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그 가정을 위로 쭉 솟아 올라가게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라나 가정이나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종종 사무엘상의 주인공은 마치 한나로 비추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한나를 한나되게 한 이가 바로 엘가나입니다. 그 곁에서 한나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한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매우 정중합니다. 그리고 늘 동행합니다. 그 양이 적다고 해서 그 역할이 작다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창세기 24장은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리브가에게 할당되는 것에 비해 이삭에 대해서는 매우 짧습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창 24:63).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이야기도 같습니다(마 1:19). 엘가나의 경건과 한나에 대한 사랑은 이 한마디에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 까기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삼상 1:19, 23).
이 둘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부부의 이름이 이렇게 나란히 이야기되는 가장 금실 좋은 모델은 엘가나와 한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그(사무엘)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엘가나)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삼상 2:19-20).
둘은 자식 농사에도 교육을 넘어선 공육(共育)의 형태로 협업합니다. 참 좋은 부모 모델입니다.“그 어머니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삼상 2:19).
그리고 그 끝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삼상 2:21).
너무 눈부시지 않습니까? 자식을 낳지 못해 저주받은 여성으로 기록될 뻔했던 여인, 어쩔 수 없이 질투의 희생자가 될 뻔했던 여인, 여전히 여자일 수밖에 없었던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한 여인이었지만 한나야말로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 내고 믿음의 어머니로 묘사됩니다.
그의 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사무엘은 신앙 가운데 아름답게 자라 갔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를 멸시하고 있을 때 사무엘은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또 엘리의 아들들이 음행하며 사람들을 죄짓게 하며 아버지의 말을 무시할 때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씀이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2:26)입니다.
마치 누가복음 2:52을 연상시키는 듯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2. 브닌나와 한나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삼상 1:2).
하나님께서 집을 일으켜 세우시는데, 어떤 방법을 사용하십니까? 두 사람의 이름에 그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나의 방법과 브닌나의 방법입니다.
첫째: 브닌나가 집을 세우는 방법입니다. 브닌나는 ‘산호, 진주’라는 뜻입니다. 브닌나는 진주라는 이름의 뜻처럼 미모의 여인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브닌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브닌나는 자식들도 있었습니다.
인물이 좋고,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자식도 많습니다. 이쯤 되면, 가정이 일어설 것 같습니다. 그래서 브닌나는 성전에 올라간 일이 없습니다. 엘가나가 몫을 주어도 성전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산호, 진주를 뜻하는 ‘브닌나’가 ‘보내다, 추방하다’의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라집니다.
둘째: 한나가 집을 세우는 방법입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그 의미가 다양합니다. ‘밑으로 절하다, 자신을 밑으로 내리다, 밑으로 처신하다, 밑으로 기울어지다’라는 뜻입니다.
한나는 엎드렸습니다. 밑으로 내려가고, 밑으로 기울어지고, 밑으로 처신하고 애통하고, 통곡합니다. 그런 한나에게 긍휼이 주어졌습니다. 한나의 엎드림은 하나님이 올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삼상 2:21).
셋째, 사무엘입니다. 최초로 선지 학교를 시작했던 사무엘은 영적 수면 상태를 일깨우는 참으로 훌륭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였습니다. 한 여인의 눈물의 기도가 왕정 시대를 여는 건국의 기초석이 됩니다.
계수의 대상에도 들지 않는 가녀린 여인의 기도였지만 그 기도는 오고 가는 세대 왕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한나의 기도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속에 속상해서 우는 한나의 속울음이 있습니다. 불임(不姙) 여성의 울음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한나에게 불임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삼상1:6).
그다음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삼상 1:6). 자, 이쯤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가십니까? 치정(癡情)에 가까운 갈등입니다. 이어 등장하는 게 막장 드라마입니다.
3. 막장 드라마가 감동 드라마로
가정 사역을 하시는 분이 수도 없이 듣게 되는 이야기가 남녀의 ‘변심’과 ‘외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 남성과 여성의 반응이 좀 색다릅니다. 남성들은 변심했거나 부정을 저지른 자기 여자에게 복수를 합니다.
여성들은 자기 남자를 빼앗은 여자에게 해코지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도 현장에 들이닥친 아내는 상대 여성의 머리채부터 휘어잡습니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웁니다. 막장 드라마의 완판이 간통죄 현장 급습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나를 보십시오. 전혀 다른 장면에 놀라게 됩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10). 한나는 ‘누가 뭐라 하든 난 기도한다.’ 거기다 이 두 여인 사이에서 몹시 갈등했을 남편 엘가나의 태도가 흥미롭습니다.
“한나여, 왜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가요? 어찌하여 그토록 마음이 상한 거요? 내가 당신에게 열 아들보다도 낫지 않소?”
이 공감하는 한마디가 치유의 오케스트라가 됩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자기 상실감과 비탄에 젖어 우는 여인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말은 ‘내가 여기 있다’는 그 한마디입니다.
이야기라 쉽게 들었을지 모르지만, 한나의 입장으로 돌아가면 고통 그 자체입니다. 이 일이 가볍지 않습니다. 성경은 땅을 뒤흔들고 땅이 꺼질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잠30:21-23).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복 있는 사람)은 한나가 겪게 된 고통스러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한나의 경쟁 상대인 브닌나는 한나를 모질게 조롱하고 아픈 곳을 건드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신 것을 계속 의식하게 했다. 그런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하나님의 성소에 갈 때마다 한나는 으레 모욕당할 줄을 알았다. 한나는 끝내 눈물을 흘리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자존심에 깊은 생채기가 드러납니다. 상처로 인한 섭식 장애까지 있습니다. 그때 한나가 찾았던 길이 하나 있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 1:10).
‘기도하다 (팔랄)’에는 ‘밀대 같은 것으로 반죽을 밀어서 편편하게 하다, 인생길에 울퉁불퉁한 것, 방해가 되는 것을 편편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게 기도입니다. 그는 꽉 막힌 심장의 고통을 기도로 뚫어 버립니다.
기도는 우리의 문제와 하나님 사이에 길을 놓는 것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격정과 분노를 기도의 밀대로 밀어 버렸습니다. 길이 열렸습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밑으로 절하다, 자신을 밑으로 내리다, 밑으로 처신하다, 밑으로 기울어지다’는 의미입니다. 한나는 엎드렸습니다. 밑으로 내려가고, 밑으로 기울어지고, 밑으로 처신하고 애통하고 통곡합니다.
한나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상대에게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고통을 그대로 들고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사람과 씨름하지 않고 모든 문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직행한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아이를 허락하지 않으신 분, 아니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만드신 분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아이를 주십시오!” 선하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세상에 왜 악과 고통이 가득한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소위 ‘신정론’이라 부르며 갑론을박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쓰러뜨릴 만큼 고통스러운 인생의 짐을 해결하는 것은 토론과 설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개입입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역사해 주실 때만 우리 인생은 살아갈 만한 것이 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에게 불평하고 사람과 싸우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자 해법이신 하나님께로 직행하는 법을 압니다. 한나는 바로 이러한 직행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브닌나의 호의나 남편의 위로, 심지어 제사장의 중보도 찾아 헤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실로의 성소로 바로 나아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진솔하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가 다르다고, 내 경우는 다르다고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의 겉모습이 복잡해도 본질은 단순합니다. 우리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직행하고 직고할 때 해결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직행!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의 첫째 비결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런 한나에게 긍휼이 주어집니다. 여기에는 한나의 엎드림이 있었습니다. 내려갈 때야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 결국은 하나님이 올리십니다. 이런 것을 감동 드라마라 합니다.
4. 이스라엘 왕권을 좌우한 기도
에브라임 산지의 한 미천한 여인이 드린 기도가 이스라엘 왕권의 기초를 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기도는 그렇게 힘이 있습니다. 구약에는 계수의 대상에도 들지 않던 가녀린 여인의 기도였지만 그 기도는 오고 간 이스라엘의 왕권을 좌우했던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한나의 기도(삼상 2:1-8)를 이렇게 풀어씁니다. “나, 하나님 소식에 가슴이 터질 듯합니다! 하늘을 나는 듯합니다. 나의 원수들, 이제 내게 웃음거리일 뿐. 나는 나의 구원을 노래하며 춤추렵니다.
무엇이, 그 누가 하나님처럼 거룩할까. 우리 하나님처럼 높고 굳센 산이 있을까. 감히 뻐기지 마라. 잘났다고 떠들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사정을 다 아시며 그분께서 사태를 다 간파하고 계시니. …하나님께서 죽음을 내리시며 또 생명을 내리신다. 무덤까지 끌어내리시며, 또다시 일으키신다.
하나님께서 가난을 주시며 또 부를 주신다. 그분께서 낮추시며 또 높이신다. 그 분께서 궁핍한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지친 인생들에게 새 희망을 주시고인생의 품위와 존엄을 회복시켜 주시며 그들을 빛나는 자리에 앉히신다!”
한나의 이런 기도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메시지 성경》입니다(눅 1:46, 54-55).
“하나님이 들려주신 복된 소식으로 내 마음 터질 듯하니 내 구주 되신 하나님의 노래로 기뻐 춤추리라.…기억하셔서, 풍성한 자비 드높이 쌓으시며 택하신 자녀 이스라엘을 품으셨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약속하신 대로, 그의 자비가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이 아름다운 노래가 오늘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의 신앙 고백이자 승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9페이지에 인명 지명 해설을 추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아멘~^^ 네~^^ 목사님!!! 감사감사감사합니다. 늘 강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항상 행복하셔요. 샬롬 샬롬 ~^^
감사합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복된 주일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