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박마로님]그 심장에 이어져....

[keiko]

yaoihouse의 쥔장인 박마로씨의 글입니다.
박마로씨도 허락 메일에서 썼다시피..심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이 글은 반정도는 이 여인네의 실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원래 하우스에는 단편이 먼저 올라왔었고..장편화 된 것은 좀 더 있은 후였죠.단편으로써는 그들의 상황이 전부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
장편으로 썼다는데...어쨌든,그 여인네 사정을 알고 있는 이상,편하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글을 보시고 좋다고 생각하셔서 퍼가실 분은 저에게 쪽지 내지,메일
보내지 마시고 [직접 작가님]에게 보내시구요...(저에게 쪽지나 메일로 퍼간다고 보내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아주 친절히~저주해드리겠습니다--+)
감상을 쓰시려해도 역시 [작가 본인]에게로 보내주셨음 합니다.
그럼...즐감~

작가 메일-->ed19771979@hanmail.net

이하 허락멜

제목 누가 네 자기야?-ㅂ-^
보낸날짜 2003년 04월 18일 금요일, 오전 09시 36분 16초 +0900 (KST)
보낸이 "에디에" <ed19771979@hanmail.net> 주소록에 추가 수신거부에 추가
받는이 "keiko" <79keikonoriko@hanmail.net>
소속기관 에드워드 펄롱
악몽을 내가 꾸고 싶어 꾸남?--
아...그래,바다동에[그 심장에 이어져]를 퍼감해도 좋습니다.
쓰는 자신도 심장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유쾌한 글은 아니었습니다만...
오타는 그냥 무시해주시면서...넓은 아량으로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__)
바다동에서 회지를 내신다는 소식을 간간히 듣고 있어요.잘 되서~좋은 결과 보셨으면 합니다.
그럼 전 이만....(__)

---------[ 받은 메일 내용 ]----------
> Title : 자기야~~~
> Date : Fri, 18 Apr 2003 09:09:21 +0900 (KST)
> From : "keiko" <79keikonoriko@hanmail.net>
> To :
>
> 나...[그 심장에 이어져]퍼가도 되?
> cafe sea에...퍼가려는데....
> 악몽 꿨다구...심장에 않좋게 왜 자꾸 악몽을 꾸고그래~~
> 건강하고...허락해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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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서만 있던 진우는 무료를 달래기 위해 응급실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는 커다란 특실에서만 있으면 그 누구라도 지겨워지기 마련이다.
응급으로 실려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진우는 착잡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그곳은 진우의 무료를 달래주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 날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응급으로 실려와 고통을 호소하고,그들의
보호자는 울상이 되어 의사와 간호사들을 닥달하고 있었다.

무기력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희연아!!!"하고 외치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통사고라도 당했는지 심하게 다쳐 피를 흘리는 여자와...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의 곁에 있는 젊은 남자....

[애인 사이인가봐?]

여자는 그대로 수술장으로 향했다.
많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에 둘러쌓여서...
남자는 수술장 앞에서 제지를 당하고는 절망스러운 표정이 되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한두번 본 광경도 아닌데...왠지 이번에는 진우의 마음이 다 아프다.

그러고보니 젊은 여자와 남자가 단 둘이 온 것도 이번이 처음인 듯 하다.
남자는 수술장 앞에서 앉았다 섰다,그 자리에서 계속 맴돌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그 괴로운 표정만은 진우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아마도 약 시간이 되었는지 진우를 찾는 방송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병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날 하루는 그 젊은 연인이 신경이 쓰여 견딜 수 없었다.

-여자...수술은 무사히 끝났을까?살게되면 좋을텐데...-

-그렇게 사랑받다니...좋겠어...-

진우는 그다지 애정을 받고 자라지는 못했다.
어릴 때부터 심장을 앓고 있어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를 했으며 늘 사람들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
사치스런 배경에서 자라면서도 그는 바깥 세상을 그다지 접해보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부모는 진우를 특실에 넣어두고는 심장 이식자가 나타날 때까지 방치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장 이식이라는 것은 가능한 피해야하는 수술로 그만큼 위험부담을 안고 있지만
현제 진우의 심장은 그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심장을 이식받아야하는 상태였다.
아직 성년이 아닌 진우는 대학만은 꼭 직접 학교로 가서 배우고 싶었다.
그것이 그의 꿈의 전부였다.
유치원조차 다녀본 적 없는 진우는 유치원 유니폼이나 가방을 맨 어린 아이들,그리고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보면 부러움과 함께
질투도 안고 있었다.그리고 은근히 슬펐다.
특히나 몇명 이상이 몰려다니는 것을 보면 자신에게도 저런 날이 올까...하는 슬픈 생각을 하고는 했다.
대학만은 가정교사에게서 벗어나 꼭 학교로 가서 졸업장이라는 것을 받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쉽고 당연한 일들이...그에게는 평생의 꿈이었다.

심장을 이식받을 수 있다면 진우의 부모들은 심장 이식자 가족들에게
더 할 수 없는 보답을 할 것이다.물론 금액으로 말이다.
그들이 집을 사달라고 해도 들어줄 태세였다.

감정이 매마른 것은 아니지만,진우는 부디 누구라도 자신에게 심장을 이식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랬다.그 사람이 빨리 나타나기를 바랬다.

"죄송합니다.이미 손 쓸 수 있는 상황을 놓쳤습니다..."

"무슨...."

"뇌를 심하게 다쳐서...기능을 할 수가 없습니다."

"...."

의사의 말을 들으며 태진은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뇌사...라는 말입니까?"

이해를 하는 것도 아닌데 입으로는 말이 나온다.

"..네.그렇습니다.이미 병원에 오기 전부터..."

"...그럴 리가 없어.거짓말!!!절대 그럴 리가 없어!!!희연이...희연이...뇌사자라니....!!!"

태진은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면서 울고 있었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뇌사라는 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의사의 멱살을 잡으며 닥달을 하지만 의사는 거짓말이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수술까지 했는데....뇌가 죽었단다....
살고는 있는데 사는 것이 아니란다....

태진에게 희연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천애고아였던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느껴 고아원을 나온 후 함께 살았다.
행복했지만 한가지...희연을 괴롭힌 일이 있다.
태진의 심장....

선천적으로 약한 그의 심장은 때로는 발작도 하고 힘든 일을 하지 못해서
희연이 태진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했다.
하지만 희연은 언제나 행복하다고 했으며 태진을 따듯하게 감싸주었다.

언제나 행복하고 괜찮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도 힘이 든데...
가끔 발작을 일으켜 숨을 쉬지 못할 때도 있어 그녀 역시 두려웠을 텐데...
때로는 혼자 남겨지면 어쩌나 하는 공포를 느꼈을 그녀였을 텐데...

이제는 그 공포를 태진이 느끼고 있다.

"...네가 없으면 안돼...난 안돼...그러니까...그러니까...."

태진은 아무런 반응 없이 누워만 있는 희연을 보며 절망하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 다른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죽음에 공포를 느끼는 진우....
한 사람은 연인의 죽음에 공포를 느끼는 태진....


그로부터 며칠이 흐르는 동안 진우는 그 남자의 일도,여자의 일도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간호사들이 저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우연찮게 듣게 되었다.

"...뇌사자에게 말을 걸고 해도 깨어나지 않는데 말야."

"좀 섬칫해.그 남자."

-뇌사자라...심장이 건강하다면 기증이나 해주었음 좋겠다-

진우는 그 순간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진우의 바램대로 의사들은 행동했다.

"...기증이라뇨?무엇을 말입니까?"

"나쁜 일은 아닙니다.희연씨의 기증으로 다른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건강해질 수 있죠."

"무슨 말을...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의
장기를 기증하라니...!!!"

"뇌사는 회복 불가능합니다.아시지 않습니까?"

"절대 허락 못해요!희연이는 살아있어!희연이는....!!"

심장이 아파온다.
왜 하필 그녀가....

"희연이는 눈 뜰 거에요.뇌사가 아니라...그냥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뿐이라고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의사들은 그렇게 말한 다음 병실을 나갔다.

"...살아있는 사람의 장기를 기증하라니...그런 경우는 어디에도 없어...
희연아...눈 뜰 거지?빨리 병원을 나가자...저 의사들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자고...
어서 눈 떠...."

모든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알 정도로 태진은 헌신적으로 희연의 곁에 있었다.
아침에 젖은 수건으로 세수를 씻겨주고 머리도 빗겨주었으며 곁에서 책을 읽어주며 말을 걸었다.
안마를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고 워크맨을 가져와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서 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것은 기행에 가까웠다.
간호사들은 그런 태진이 무서워 차마 말도 걸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간호사들이 희연의 피를 뽑아가기도 하고 수혈을 하기도 했다.

"...피를 왜 뽑아요?혹시...희연이 눈을 뜰 수 있는 겁니까?"

"조직검사에요.걱정말아요."

-조직검사?-

태진은 왜 조직검사가 필요한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단순히 희연이
살아나고 있다는 희망을 걸고서 묻지 않았다.

"어딜 돌아다니는 거니,너는 안정이 필요한 사람이야."

"....답답해서요...휠체어 타고 돌아다니니까...걱정말아요."

"넌 휠체어를 끌고 다니는 것도 힘들잖니?병실에 가만히 있으렴.아...
그리고 지금 뇌사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이제부터 검사를 한다더구나.
이번엔...제발 이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우의 모친은 한숨섞인 투로 말했다.
진우는 그간 심장 이식을 잘한다는 병원이란 병원은 국내든,외국이든
다 돌아다녀 보았지만 진우에게 적합한 심장이 없어서 늘 괴로워했다.
그건 돈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진우의 부모는 더욱 진우가 가여웠다.

진우는 심장병으로 인해 폐마저 손상이 되어 반드시 심장과 폐가 건강한 뇌사자가 필요했다.

날 때부터 기형인 진우의 심장은 커가면서 더욱 엉망이 되었다.
몇번이나 죽음의 고비와 싸웠는지 모른다.잠을 자다가도 심장이 멎어버린 일도 다반사여서 그의 부모는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했다.
경제적인 능력이 안되었다면 내다버렸을 거라는 농담을 진우의 모친은 진우가 어릴 때 종종 하고는 했다.
하지만 환자에게는 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말이 있는 법이다.

"지금 검사를 하고 있는 뇌사자가 고아인 모양이더라."

"고아?"

"결혼한 사람이 있다는 모양이야."

"...그래?"

진우의 모친과 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루에도 몇번이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희연에게 와서 이것 저것 검사를 했다.
포터블(직접 기계등을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가져오는 것)로 방사선 촬영을 하기도 했고 심전도와 초음파,심도자는 물론,치아를 검사하기도 했다.
태진은 그것을 바라보며 묘한 불안을 느꼈지만 설마 자신의 동의 없이 병원에서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는지 모른다.
태진도 자신이 부정하고 있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자신마저 부정하지 않으면...
불쌍한 희연에게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진우에게 심장이식 전에 필요한 검사는 이미 충분히 받을 대로 받아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사이클로스포린(면역억제제)에 대한 거부반응은 없는지도 충분히 체크했으며
매일매일 체중을 체크하는 것은 필수였다.

진우에게 검사는 지루한 것이었는데,태진에게는 그것이 아니었다.
검사를 하면 할 수록 희연과 헤어져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그리고 태진이 생필품을 가지러 집에 갔었을 때였다.

진우의 모친이 희연의 병실을 찾아왔다.

"보호자는요?"

"아...잠시 집에 가신다고 하셨어요."

"이 아가씨인가요?심하게 다쳤나봐요.심장에는 무리가 없었나요?"

"지금까지 검사한 결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그리고...다행스럽게도
진우군의 심장 사이즈와도 일치하구요."

"어머...그렇다는 건..."

"몇가지 검사를 마치고 노멀이 나오면 이식이 가능합니다."

"...정말 감사할 일이군요.보호자를 꼭 만나고 싶었는데."

"그런데 아직 보호자가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해서..."

"돈은 얼마든 준다고 해요.아니,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고 하겠어요."

진우의 모친은 영원히 눈을 뜰 수 없을 젊은 여자를 내려보고서는 병실을 나갔다.

그 때에 태진은 서랍을 뒤적이다가 편지같은 것을 발견했다.
태진은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희연이 사고 전날에 남긴 것으로,내용은 태진을 절망스럽게 할 것이었다.


-사랑하는 태진씨...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렇게 힘들게 살고 싶지가 않아.
당신이 그렇게나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살고 싶지가 않아.
당신과 나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어.
진작 인정했어야했어.
그런데 용기가 없어서...
내 욕심이 커서...
힘들어하는 당신을...내 곁에서 죽어가는 당신을 붙잡고 있었어.
나에게 있는 것은 건강한 몸 뿐이야.
당신이 그런 내 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미안해...
난 상처를 받는 당신 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
이제는 정말 다 끝내고 싶어졌어.

내 심장을 당신에게 주고 싶어...
그래서 당신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 좋겠어.
사는 동안 나를 잊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해도 괜찮아.

당신이 건강하다는 것을...내 심장으로 느끼고 싶어.

나 더 이상...힘들어하는 당신 곁에서 살고 싶지가 않아.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면서...이렇게 살고 싶지가 않아.

태진씨...
사랑해...
이런 여자가 사랑한다고 말해도 무엇하나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서...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주고 싶어졌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당신 몰래 조직검사를 받았어.당신이 병원에 갈 때마다...
임신이라는 것도 거짓말이고...유산이라는 것도 다 거짓말이야...
오직 당신에게 내 심장을 주고 싶어서....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은 이식을 할 수가 없대...

그런데 나 살고 싶지 않으니...다행이지 뭐야....

이것은 내가 당신을 위해서 남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싶은데...그럴 바에 당신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남기는 거야...

당신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여자라서 다행이야.
나마저 아팠다면...우리 둘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파멸했을 거야.
내가 건강해서...앞으로 당신이 살 길을 만들 수 있어서 다행이야.
당신의 여자여서 행복했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서...
당신이 나의 심장으로 살았으면 좋겠어...-


"...그...런...."

태진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설마...
교통사고는 사고가 아니라...그녀의 고의였단 말인가?
그것도 전부...자신의 병들은 심장 때문에....?

태진은 그만 절규를 하고말았다.

병원에 도착하니 병실 앞에 왠 정장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

"아,당신이 이 아가씨...김 희연씨 남편 분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희연씨의 심장을 나의 아이에게 기증해주시겠어요?원한다면 무엇이든 다 들어드리겠어요."

"...."

"조직검사에서 당신의 부인 되는 사람의 장기가 나의 아들과 적합하대요.
심장은 물론 폐까지도요...부탁이에요...그 애를 살리기 위해서 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는데...
적합한 심장이 없어서..."

살리기 위한 노력....
다시 태진의 심장이 지끈거렸다.

그간의 검사는 역시나 이식에 필요한 조직검사...
보호자의 동의 없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소리칠 기력도 이미 태진에겐 없었다.

"...마음대로...해요...이제는...정말...나도 살고 싶지 않아...."

태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당신의 부인의 일인데...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고마워요."

밖에서 그 고상한 부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원하는 것을 모든 해준대...원하는 것...다만 너 하나 뿐이었어...
살 수가 없어...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의 심장으로 대신 살 수가 없잖아....-

태진은 주르륵 바닦에 주저앉아 흐르지 않는 눈물을 안으로 삼키며 통곡했다.

"바보같은 여자...당신을 죽인 내가...내가 이유로 죽은 당신의
심장으로...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나는...그저...같이 사는 것이
좋았어..."

눈을 뜨지 않는다.
원망을 하고 욕을 하고 울어보아도...아무리 사랑을 해도 그녀는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것이다.
자신과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절망을 하는 사람의 반면에는 기뻐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정말이야?정말 이식이 가능하대?그럼...나 학교에도 다닐 수 있고...
놀러다닐 수도 있는 거야?"

"그렇단다.그 사람이 서명을 하면 이제 바로 수술을 할 수 있을 거다."

꿈에서 그리던 생활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하지만 진우에게는 어려웠던 일.
다리를 못쓰는 것도 아닌데 늘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했고 그것마저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신의 다리로 걷고 싶었고 스스로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친구를 사귀고 이성도 사귀면서 다른 평범한 또래의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심장을 이식하는 사람들의 심정같은 것은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가 땅에 묻혀져야한다는 그 당연한 일을 망각하고 있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태진은 장기공여자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이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 희연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차에 뛰어들은 그녀를 더 이상은 아프게 바라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영원히 어둠에 쌓여 지낼 것이다.
공여자와 수혜자 모두 마취에 대한 부작용도 없으며 성공 가능성은
70%이상으로 높았다.

실려나가는 희연을 보며 그제야 태진은 눈물이 흘렀다.

-이제...당신은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당신을 아프게 한 죄 값을 받아야해..
미안해...
당신의 심장으로 살 수 없어...-


"응?당신은 병이 낳으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고 싶어?"

"음...우리 아이를 갖는 거.너를 닮은 예쁜 아이를 말야..."

그렇게 말하며 웃던 시절이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면서 당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단지,남자로써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태진이었다.

한편 진우와 그의 부모들은 수술을 앞 두고 의사들에게 이런 저런 설명을 들었다.

"...교감신경과 부교감 신경에 의해 영향을 받던 심장은 이식 후에는
영향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교감 신경은 심장 박동 수를 빠르게 하며 부교감 신경은 심장의 박동
수를 느리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식 후 새로운 심장은 신경이 절제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중추 신경계의 조절을 받지 못하게 되는 거죠.
따라서 심박동수가 1분에 90회에서 110회 정도로 약간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심박동 수는 교감-부교감 신경 외에도 아드레날린 호르몬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호르몬은 혈액의 순환을 통하여 서서히 심박동 수를 변화시킵니다.
즉,아무리 이식을 받았다고 해도 무리한 운동은 피하셔야합니다.
또 이식 후에는 심장 생검이라고 하는 거부반응에 대한 진단을 규칙적으로 해야하는데
생검은 심혈관 조영실에서 실시하게 되며 목의 경정맥을 통하여 생검 기구를 삽입하여 우 심실의 조직 일부를 떼어내는 것으로
이 과정은 30분 정도 소요되며 4-5개의 떼어낸 조직은 외과병리실에서 거부반응 정도를 판정합니다.
이식 후 첫 1개월은 매 주 생검을 실시하며 두 번째 달은 2주에 한 번씩 4회, 그 이후에는 6개월까지 4주 마다 시행하며 그 이후 3개월에 한 번 정도 시행하게 됩니다. 조직 검사 결과에 따라 생검 기간은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조직 검사 결과 거부 반응이 계속되면 약물의 용량을 늘리면서 혈관으로 약물을 쓰기도 합니다.
또 타인의 심장을 이식했기 때문에 체내에서 항제가 형성되어 거부반응이 나타날 것입니다.
때로는 이 거부반응이 환자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어 면역억제제를 투여하게 됩니다.
이 면역억제제는 환자 분이 평생 복용하셔야합니다.
이 면역억제제를 투여하면 아무래도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져 폐렴등에 쉽게
노출될 수 있습니다.이를 억제하기 위해 백신을 투여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심장 이식이 성공하면KONOS(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서 자연히
명단에서 빠집니다.
더 궁금한 것은 없으십니까?"

"저기...이식을 하면 보통사람들처럼 생활할 수 있나요?"

"당장은 무리일 겁니다.
이것 저것 까다롭게 지켜야하는 규칙이 많아요.예를 들면 자외선이 강한
여름의 10시부터 3시까지는 외출을 피해야한다든지,뛰어다니는 것은
가능한 피해야합니다.또한 약물도 꾸준히 복용해야하죠.
면역억제제만이 아닌,제산제,이뇨제,혈압하강제...지금 드시고 있는 약의
절반 정도는 계속 복용을 해야합니다.하지만 심장에 대한 거부반응을 이겨내고 규칙대로 생활하시면 머지 않아 보통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있고
잘 지낼 수 있을 겁니다.특히나...진우씨 경우는 심장으로 인해 폐까지 나빠져 있던 상태니 더욱 주위가 필요합니다.하지만,수술이 성공하면
가끔 심장이 멎어 실신을 한다든지 하는 일도 없고 걸어다닐 수도 있으니 걱정말아요."

진우는 수술을 앞두고 긴장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진우로써는 4번째 수술이다.
남들보다 수술 시간도 길어져서 의사들도 항상 진땀을 빼고는 했다.

수술장으로 가면서 진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살아서....나는 살아서....그간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 싶어...
학교에...가고 싶어...-

죽은 사람도 꼭 궂이 죽고싶어한 것은 아니지만....
태진은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심장으로는 살 수가 없었다.

학교에 가서 꼭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정상생활]이라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한 쪽에선 희연이...

그리고 다른 한 쪽에선 진우가....

같은 곳에서 만나기 위해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차마 수술실 앞에까지 갈 용기가 없던 태진은 먼 발치에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살아있는 동안...그녀는 얼마나 아팠을까....
병들은 자신의 심장 때문에...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당신을 닮은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한 자신을 보며 그녀는 속으로 얼마나 울부짖었을까...

-안녕...내 사랑...
안녕...나를 사랑한 사람....
당신을 잊지 못하고...난 당신을 내 가슴에 품을 거야...
내 심장을 저주하며...당신의 심장이 건강하기를...
안녕...다정한 사람....
나는...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어서...
그래서 이렇게 살아갈 생각이야...
당신을...
당신을 잊을 수가 없어서....난 이렇게 살아갈 생각이야....-


닫혀진 무거운 문을 보며 태진은 한방울의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희연씨 보호자는요?"

"그게..."

태진은 아무 말도 없이 병원을 나갔다.

태진은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그간 몸에 좋지 않아서 자신 스스로도 마시지 않았던 술이다.

"남자답지도 못하고..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했어...그런데도...날 사랑했지...
날 사랑해서라고....사랑했다면...그럴 수 있었을까..."

서러움인지 억울함인지..그것도 아니면...

화가 난 것인지,슬픈 것인지...그것도 아니면...

"희연...."

독한 술잔 너머로 희미하게 자신의 연인이 보이는 듯 했다.





장장 10시간의 수술이 끝나고 진우는 무사히 수술장을 나와 중환자실로 향했다.
담당 의사는 진우의 부모에게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쳐졌다며 환자 본인의
적응력에 따라 확실한 상태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진우가 눈을 뜬 것은 그 뒤로 이틀이 경과된 날이었다.

진우는 눈을 뜨자[살았다]라고 생각했다.
이[살았다]라는 것은 진우에게 있어서 대단한 일이었다.

수술 도중 죽는 환자도 있다.그것은 의술때문이기도 하고,환자 자신이
약해서이기도 하다.

진우는 어느 환자보다도 약한 환자에 속했다.
보통 40분이면 충분한 심도자 검사도 진우는 항상 4시간을 넘기 일쑤였다.
그간 받아 온 수술도 항상 진우는 성공에 40%~30%의 희박함을 걸고있었다.
하지만,진우는 그간 그 희박한 성공률에도 살아왔고 지금도 살았다.

진우는 눈물이 흘렀다.
부모들도 옆에서 함께 눈물을 흘린다.

"이제 괜찮아,다 낳았어."라고 모친이 말한다.

장장 12시간의 수술...성공률 30%를 걸고 치뤄진 수술을 받고 진우는
새 삶을 부여받은 것이다.

며칠간 진우는 흉부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들의 끊임없는 보호를 받다가
드디어 병실로 올라 갈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하고 싶어.이 심장 준 사람 부모들이나...아,남편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이미 행방을 알 수가 없더구나.돈도 안받고...먼 지방에라도 갔는지..."

"...돈을 안받았어?"

"그래.하긴,자신의 마누라가 그 지경으로 갔으니...돈을 받고 싶었겠니?"

진우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의기소침해졌다.

"진우야,하지만 행여 나쁜 생각은 말아라.그것이 바로 너희들 운명인 것이니까.
그 여자는 뇌사로 죽어 너에게 심장을 줄 운명,넌 그 심장을 받아 살아날 운명,그 뿐이야."

"...응...."

무심한 모친의 말을 들으며 진우는 스스로 마음을 달래보려고 애를 썼지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자기 전에 진우는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뇌사란 어떤 것일까?
몸은 살아있는데,뇌만 죽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만지면 느끼고 때리면 아파하는 것일까?
심장을 어떻게 꺼냈을까?
마취를 하고 절개를 했을까?
아니면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그냥 절개를 했을까?

자신이...죽어가고 있다는 것을....자신의 심장이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기
위해 살이 절개되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진우는 또 두려워졌다.
죽는다는 것이 두려웠다.

몸이 약한 진우는 그 때문에 삶에 대한 집착이 다른 사람들보다 강했다.
살기만 하면 되.언젠가 다 낳을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그 생각만으로 연약한 삶을 버텨온 진우였다.

"고마워요...누군지는 모르지만 당신 심장,잘 쓸게요."

진우는 가슴에 손을 대고 나직이 중얼였다.


수술을 한 환자는 몸에 튜브가 꽃혀있어도,아무리 걷는 것이 부자연스러워도
걷는 운동을 해서 몸을 빨리 회복시켜야한다.
진우는 성실한 환자였다.
실은 빨리 회복이 되어 병원을 나가,바깥을 구경하고 싶었다.
퇴원 후 어느 정도 지나면 시내를 마음껏 돌아다녀도 될 것이다.
진우는 그 생각만으로 부풀어 운동도 열심히 하고 약도 꼬박꼬박 잘 먹었다.
다행히 염증도 나지 않고,심한 거부반응도 없어 진우는 병실로 올라온 삼주가 지난 후 퇴원할 수 있었다.

한달을 가능한 바깥에 나가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에 진우는 어서 빨리
바깥에서 걸어다녀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퇴원 후 일주일 뒤에 외래를 받았고 그 다음에는 보름 후에 외래를 받았다.
그리고 또 다시 보름 후 외래에서 이제는 슬슬 바깥에서 산책을 해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절대 무리를 하면 안됍니다."

"네."

진우는 상상만으로도 들떠 있었다.

진우의 나이는 아직 어리다.
태어날 때부터 이 때까지 걸어서 어딜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때로는 왜 이런 아이로 낳았냐면서 부모에게 히스테리를 부린 적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집 근처를 산책하는 정도라 해도 진우는 기쁜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발로 바깥을 나갔을 때의 그 환희와 감동이란...
그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뛰고 싶었지만,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저 입만 실실 웃으며
자신의 다리가 정말로 걷고 있는 것인지를 내려보았다.
걷고 있다는 사실은 사실인데,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고마워요...정말....고마워요...."

누구에게 하는 감사의 인사인지는 모르지만,진우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눈물을 흘리며 몇번이고 감사를 했다.



그리고 진우는 집에서 꾸준히 공부한 덕에 고시를 쳐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심장을 이식을 받는 것은 이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식을 받을 후로도 뛰어다닌다든지,무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진우는 건강하게 회복되었고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학에 와서 진우는 소원하던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항상 그 친구들과 영화를 보기도 하고 햄버거를 먹기도 했다.
처음엔 너무도 아이같은 먹거리만 찾는 진우가 의아스러워 저들끼리 속닥거리던
녀석들도 진우의 사정을 알고는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은 스산한 바람이 부는 봄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진우는 친구들과 함께 근처의 소문난 분식집으로 향하는데 마침
내부수리를 하고 있었다.

"야,조금 걸어가면 최근 생긴 데가 있다는데,그리로 갈래?거기도 맛이다고
소문 났는데..."

"그래,그러자."

진우는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가게에 도착했다.
가게는 작았지만,깔끔하고 정갈했으며 메뉴도 전의 가게보다는 다양했다.
주문을 시키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진우의 심장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

수술 후에는 거부 반응도 심하지 않고 잘 적응해 왔기 때문에 진우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저 자리로 가지."

"그래."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오자 진우의 심장은 더욱 따끔거렸다.
진우는 일순,왜인지는 모르지만 고개를 돌려 방금 들어온 남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분명 본 적은 없는 남자인데...두 남자 중에서 한 남자가 이상하게도
낯이 설지 않았다.

"진우야,왜 그래?아는 사람이야?"

가장 먼저 사귄 형태라는 친구가 물었다.

"어?아,아니..."

아는 사람은 아닌데...

"어디서 본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데자부 아냐?"

"데자부?"

"그래,가보지도 않은 길인데 어딘지 낯이 익다든지..그런 걸 데자부라고
하잖아."

친구들은 갑자기 흥미가 있다는 듯 떠들어댔다.

"그렇다면 이왕에 예쁜 누나를 봤을 때 데자부라면 좋을 텐데.그럼 말도
걸 수 있었을 지 몰라."

형태가 짖궂은 말을 조심스럽게 속닥거렸다.

"하하...그러네..."

진우는 떫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남자를 보지 않을 때는 심장이 더욱 따끔거렸고 남자를 보면 아련함이
심장을 울리고 있었다.
인상 사나워보이는 남자..
근처 공사장에서라도 일을 하는 모양이다...

왜....이렇게 슬프고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 거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쉬엄 쉬엄 하라고.딸린 처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 남자와 함께 온 다른 남자가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글썽여졌다.

"진우야,나왔다.먹어...어,너 우냐?"

"어?아,아냐..."

"얘 이상하다~?너 설마...저 남자랑 예전에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건
아니겠지?"

"...설마...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니까..."

친구들이 키득거렸고 진우는 어색해져 애매하게 웃었다.

전혀 본 적도 없고 모르는 사람인데 계속 신경이 쓰인다.
모든 신경이 그에게 쏠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그 아가씨와는 왜 헤어졌어?널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던데."

"...사랑 할 수 없어.단지 날 좋아하는 것 만으로...단지 호감이 있는 것 만으로...살기에는 그 여자 너무 착해."

"그게 아니라,네 마음이 문제겠지.아직도 죽은 희연이를 잊지 못하는 거냐?"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그렇게 갔는데...나라는 못난 남자 만나지만
않았어도...내가 아닌 다른 누구와 만났다고 해도 행복하게 살고 있을 여자인데..."

그 순간 갑자기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진우의 심장에 가해졌다.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진우야?"

"야...너 왜 그래?"

순간,진우가 바닦으로 쓰러졌다.

"진우야!!!"

"야!!!"

친구들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고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 시선이 몰렸다.

"왜 그래?"

점점 멀어져가는 진우의 의식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만이 명확하게 들렸다.
그리고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정신 차려.얘 심장병이야?"

또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입술마저 새파래진 젊은 아이를 보면서 남자 역시
심장에 아련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서둘러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젊은 아이에게 인공호흡을 하면서 남자는 힘에 겨워했지만,어찌 되었든
남자 아이는 서서히 의식을 차리는 것 같았다.

진우의 친구들은 진우가 걱정이 되었고 남자와 함께 왔던 남자는 그 남자가 걱정이 되어 모두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정신 차리면 물이나 좀 먹여."

간신히 의식을 차린 진우를 위자에 앉힌 뒤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가게를 나갔다.
그 뒤로 남자가 따라 나가면서 괜찮냐고 물었다.

"야,너 저 아저씨 아니었음 죽을 뻔 봤다."

"그러게 말야.우린 너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물을 마신 후 겨우 기력을 차린 진우의 곁에서 친구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껏 이런 일은 없었다.진우는 뛰는 것은 무리여서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느리게 걷기는 했지만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제껏 그렇게 지내왔으니 그들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름이라도 알려주고 가지는...-

진우는 뒤 늦게 이미 사라진 남자의 신원이 궁금해졌다.

진우는 그 후로도 왠지 그 남자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집착을 하게 되었고 혹시나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
그 남자를 만났던 식당에도 몇번이고 찾아갔다.

-이상하긴 하지만...하지만...왠지 신경이 쓰여서...-

그리고 진우의 노력은 아주 헛된 것이 아니어서 한달 후에 그 식당에서
그 남자와 다시 마주칠 수 있었다.

-아...또야...-

그 남자를 보자 갑자기 심장이 지끈거렸다.
반응을...하는 것 같았다,저 남자에게,이제 자신의 것이 된 심장이...

"저기..."

수줍고 얌전한 말투에 남자가 뒤를 돌아본다.

"전에...감사했어요..."

"?아,아~너구나.그래,그 후로 괜찮았어?"

"네,덕분에."

기억을 해주고 있다.
식사를 하는 도중 기절한 아이를 구했으니 무리도 아닐텐데 진우는 왠지
무척이나 그것이 기쁘고 고마웠다.

"저...사례라도 하고 싶은데..."

"사례 바라고 한 일 아니야."

"그,그래도 제가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생명의 은인이신데..."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어보라고 심장이 또 울렁대고 있었다.
그래,이제 알았다.
심장이 반응을 하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이 심장이 저 남자에게 반응을 한다.
남자를 지나치면 분명 심장은 또 앓게 될 것이다.
그건 두렵다.애써 이식을 받은 것이 의미가 없게 된다.

남자는 잠시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그럼 주말에 만나자는
제의를 했다.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하루 벌어 하루를 연명하는 사람이었다.
근처 막노동판에서 일을 하는 듯 행색에 형편없었다.
혐오감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그래도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다.
그런데도 진우는 그 남자를 다시 만날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다.분명 진우에게는 남자를 좋아하는 취미는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는 모든 것이 예외가 되었다.
주말이 되려면 아직 삼일이나 더 있어야하는데 너무도 지루했다.

주말이 되어 일찍 들어오라는 모친의 말을 귓전으로 듣고 진우는 설래는
마음으로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조금 늦어지는 그 남자를 기다리며 도저히 진정이 되지가 않아서 진우는
안절부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자가 늦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결코 남자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안절부절하는 마음은
대체 만나서 고맙다는 말 그 다음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진우는 자신이 남자와 마치 데이트라도
하는 양 다음 일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정확시 20분을 늦게 왔다.

"미안,미안...일찍 나오려했는데..."

남자는 그다지 미안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말로는 열심히 사과를 하고 있었다.

"아뇨,괜찮아요.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제부터다.종업원이 주문한 커피와 쉐이크를 가지고 온 후로
계속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래,몸은 괜찮아?"

남자가 고맙게도 먼저 침묵을 깬다.

"아,네...그런 일...없었는데...그 날은 좀 이상해져서..."

"그래?몸 조심해라."

남자가 담배를 피우려고 손을 든 순간이었다.

"...심장병..."

"어?"

"...심장병...있는 거죠."

"아...어떻게 알았어?"

"손이요...다른 사람하고 달라서..."

"아...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모르던데..."

남자가 씁쓸하게 말했다.

"저도...그랬거든요."

진우가 그때까지 혼자 꼼지락거리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진우는 타인에게 자신의 손이나 발을 보이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이식을 받은 후라도 이미 그렇게 커져버린 자신의 손을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장을 심하게 앓는 사람은 어릴때부터 성장해가며 손톱이 다른 사람보다
커져버린다.그러면서 피가 원활하게 돌지 않기 때문에 손 끝마디가
파랗다.
진우는 이제 손마디도 보통사람들과 다름 없는 연한 핑크빛이었지만
손이 커져버린 것마저 정상으로 돌아가지지는 않는다.

"...청색증도 있으신데...담배 피지 말아요."

진우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그래,미안."

"?"

남자는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끄며 진우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나 때문이 아니라...-

"저...그런데...아직 많이 아프신가봐요."

"...평생을 짊어지고 갈 거야.지쳐 죽을 때까지 이 심장으로말야..."

"...완치...될 수 없어요?전혀 방법이 없대요?"

"...있지만,그럴 형편도 아니고 무엇보다 내가 싫어.그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야.누가 슬퍼해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요?가족...없어요?"

"...그래.1년 전에 하나 있던 마누라가 죽은 후로는 전혀 없어."

"...미,미안해요..."

"아니야.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지..."

남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미처 하기도 전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평생...혼자일 것이라는 그 남자의 말이...너무도 가슴에 아프게 닿았다.

"...울어?사내 자식이...눈물이 흔하구나."

남자가 손수건을 건내주며 말한다.

"그...그거...낳으면 좋을텐데...왜냐면...돌아가신 부인께서도 그렇게
바라고 있을 거에요....틀림없이 그럴테니까...낳으면 좋을텐데...
혼자 아프면...힘들잖아요...나도 알아요...나도 겪어봐서 잘 알아요...
아프다는 거...무서운 일이에요....이렇게 앓다가 죽기라도 하는 거
아닐까 생각하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전...가족이 곁에서 있었는데..
혼자서 아프면...얼마나..."

진우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내가 받아야할 벌이야.네가 울며 상관할 일이 아니다."

"...벌...이라뇨?"

"..그만 물을래?너와 네가 무슨 사이인 것도 아닌데...말하기 싫구나."

남자의 표정이 싸늘해졌음을 느꼈다.

진우는 이렇게 혼자 아파온 이 남자의 힘든 심장을 자신의 심장으로 느끼고 있었다.
1년 전 부인이 죽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는 것은 1년간 남자는 혼자 앓아왔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이 사람이 어느만큼 아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이 남자는 일도 해야했고
혼자서 식사를 차리기도 해야한다.모든 것을 혼자해야한다는 것은 그만큼
심장에 부담을 준다는 얘기다.
아마...자신이 아팠던 것보다 훨씬 더 아플 것이라고...진우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자신에게는 과거의 일이지만,불과 1년 전의 일이다.
근 20년간을 앓아온 시간을 수술 한번으로 단기간에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남자의 아픔...괴로움...슬픔이...
진우의 심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째서....-

이유를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 누구도 대답을 해주지 않고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어째서...이 남자에게 난...-

그 다음의 말이 차마 두려웠다.
그런 일...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여자와 사귄 적이 없고 이제 막 캠퍼스 생활을 시작했다고 해도
남자에게 반할 정도로 남자를 좋아한 적은 없었다.

-착각이야...착각이야...-

"...울지 마라.내가 널 울린 것 같잖니."

남자의 건조한,그리고 무감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뚝 뚝 흘리고 있던 진우가 그제서야 얼굴을 들었다.

남자는 초조한 것 같았다.계속 피울 수 없는 담배각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덩달아 초조해져서...진우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 모르게 되었다.

그 후 진우는 싫다는 기색을 역력하게 내보이는 남자를 끌고 식사도 대접했고 비싼 차(茶)도 대접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렇게 헤어지게 될 것이다.

"저기요..."

찻집에서 나와 먼저 걷기 시작한 남자의 등 뒤로 진우가 머뭇거리며 불러본다.

"...저기...또...만나주실 수...있으세요?"

고개를 숙이고...이 상황에서,자신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한 이 상황에서
저 남자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어서...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그런 취미 없는데.널 구한 건 내가 아니라 그 다른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난 이 후로 널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구나.너도 알겠지만 나도 심장병이고...
난 혼자 살아야하지.약 값을 대기에도 빠듯한 생활이다.널 만나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

"...저...그럼...제가 부모님께 말해서 약 값을 대신 대드리라고 할게요.
절 살려주셨으니까...부모님께서도 그 정도는...."

"...형편없는 자식."

사나운 말에 진우의 입이 다물어졌다.

"약 값을 담보로 널 만나야한다고?너희 집이 얼마나 잘 사는지 모르겠지만
난 잘 사는 녀석들이 싫다.돈이면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가족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지.그리고 지금은 날 동정하는 거니?"

"저...그런 게...!"

"기분 나쁘다.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남자는 우두커니 서있는 진우를 혼자 두고서 먼저 홀연히 사라졌다.
남자의 뒷 모습을 보면서...아마도 그의 반응은 당연한 것일텐데...
그 당연한 반응이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갑자기 심장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하악...."

심장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울어버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가와 걱정을 하기도 했고 그저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태진은 진우를 두고 온 후로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진우와 함께 있었을 때도 그렇고 진우를 두고 온 후에도...심장이 저렸다.
진통제를 먹어도 저림이 가시지를 않는다.
탁상 한 켠에 얌전히 놓여있는 조그마한 액자 하나를 본다.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자신 때문에 죽음을 결심하고 그리고 무심하게
자신을 혼자 남겨두고 죽어버린 여자가 거기서 밝게 웃고 있었다.
눈물이 글썽인다.
눈물로 시야가 흐려져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심장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그대로 바닦에 누워 통곡을 해본다.
그녀가 죽은 후로는 그가 아무리 아파서 바닦을 뒹굴어도 따듯한 손으로
진정시켜주는 사람이 없다.
그녀는...없다...


진우는 오는 길 내내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그 덕에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이대로 들어가면 분명 모친이 뭐라 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어쩌지?-

진우는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두고 무심히 돌아선 남자가 신경이 쓰인다.

-그렇게 심한 소리를 듣고도...-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대체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지만,호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그 남자는 무조건 진우를 몰아세웠다.

-호의라니...쳇...농담에도 정도가 있어-

진우는 애써 남자를 생각하지 않으려 머리를 흔들었다.
하도 울어서 머리가 아팠기 때문에 갑자기 머리를 흔들자 속까지 울렁였다.

집에 들어가자 다행히도 부모는 외출 중인 듯 했다.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그대로 침대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병인가봐...."

눈 앞에서 남자의 모습이 어른거리자 진우는 불쾌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진우에게도 진우의 심장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로는 진우도 그 남자에 대해서 잊을 수가 있었다.

한달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아침에 일어나자 갑자기 둔탁한 무언가가 심장을 때리는 듯 아팠다.

"...."

그리고 그 날은 종일을 안정할 수가 없었다.
머리 속에서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쿵 쿵 하고 울렸다.

-빌어먹을...이식하나 마나 전이랑 똑같잖아....-

진우가 인상을 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우야,너 다음 주 꼭 같이 가는 거다?"

"어,응..."

진우는 친구들과 함께 다음 주에 1박2일로 바다에 놀러가기로 했다.

"그런데 너 어디 아퍼?"

"어?"

"아니,얼굴이 창백해..."

"아...아냐...그런 거..."

"그래?그럼 다행이구."

"야,이번에 수정이 레포트 한 거 뭐했는지 아냐?"
갑자기 등 뒤에서 인철이 말을 걸어왔다.

"어?아니...뭔데?"
진우 옆자리에 앉은 형태가 대답했다.

"게이."

"엉?"

"그 왜 있잖아..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거..."

"으에...야,수정이 걘 얌전하게 생겨서 그런 걸 써오냐?"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던 진우는 문득 그 남자가 떠올랐다.
또 만나자는 말에 진우를 게이로 오인한 예의가 없는 남자...

그 순간 갑자기 심장이 또 덜컥 내려앉는다.
옆에서 인철과 형태가 게이가 혐오스럽네,자기 주변에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네하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진우는 머리가 멍-해졌다.
그들의 말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한 차례 수업이 끝난 후 진우는 친구들과 함께 교정으로 나왔다.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지나가던 여자 아이들의 말을 들은 것이
원인이었는지 모른다.

"...다친 사람 많겠지?"
그 말에 심장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암튼,부실공사는 그래서 안됀다니까..."


"...저기..."

진우가 그 여자들을 불러세웠다.

"...어디...사고...났어요?"

"아...요 근처에 공사하던 곳 있잖아요.거기 지금 철근도 무너지고
난리났어요.사람도 많이 다친 거 같은데..."

"아는 사람 있어요?"

"...아,아뇨.죄송합니다."

여자아이들은 또 저들끼리 쑥덕거리며 지나갔다.

신경이...갑자기 그리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 남자...
분명 공사장 인부였는데...
지난 번에 식사를 하면서 자신이 다니는 학교 근처에서 공사일을 한다고 했다.

"...."

진우는 생각하는 것조차 무서워서 바로 달려나갔다.

"어?진우야!!진우야,너 어디가?!!"

진우는 아직 심장에 무리를 주면 안돼기 때문에 항상 가장 늦게 도착을
하고 걸을 때도 무리해서 걷는 법이 없는 아이였다.
그런 진우가 뛰어나가는 것을 보며 친구들은 무슨 큰 일이 났나 싶어
그를 뒤따라 뛰어갔다.

-설마...설마....!-


정신 없이 뛰어간다.심장이 뛰는 소리가 머리 속에서 울리고 있다.
심장이....

-너무 아파...제발....무사해요!!!-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다.

"잠시만요...가게 해줘요...."

진우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사고 현장 가까이에 갔다.

"....!!"

그만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현장으로 달려온 구급요원들이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있는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 그 남자도 있었다.

의식을 잃은 것 같고...다리를 다친 것 같다...

"자,잠깐만요...저,저도 같이 가요!아는 사람이에요!!"

진우의 행동에 친구들이 눈을 크게 뜨고는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진우는
구급차를 타고 가버렸다.

"많이 다쳤어요?그런 거에요?"

구급차 안에서 진우는 울먹이며 간호사에게 물었다.

"그저 의식을 잃은 것 같아요.다리는 병원에 가서 정밀히 검사를 해야겠지만...
큰 일은 없을 거에요."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많이 다친 거 아니죠?그렇죠?-
그 때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장..."

"네?"

"이 사람 심장이 나빠요!"

"네?"

간호사가 놀라서 되물었다.그리고는 다시 진찰을 하기 시작했다.

"오투 준비해주세요."

간호사가 또 다른 간호사에게 말했다.
작은 산소호흡기가 씌여졌다.

그 모습을 보자 더욱 마음이 아팠다.

병원에 도착한 후 응급실로 들어간 태진은 2시간 후에 눈을 떴다.

"...정신 들어요?"

낯선,그러나 익숙한 목소리에 태진이 눈을 찌푸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누구?"

"...아...저...진우에요.성 진우..."

'...아,아아...."

태진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작게 신음했다.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저기..공사장에 사고가 나서...그래서..."

태진은 우물쭈물거리는 진우가 짜증스러워 몸을 일으켰다.

"저기...무리하시면 안됀다고..."

"난 아프지 않아.그리고 널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했을텐데?"

"...."

냉정한 그 말에 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저...물론...그러셨지만...그래도..."

"비켜라.난 너처럼 남자 따라다니는 취미는 없으니까..."

"...나,나도!!"

일어서려는 남자를 향해 진우가 소리쳤다.

"나도 남자 따라다니는 취미 없어요!그런데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떡해요!
아저씨가 이렇게 아파하는 것만으로 내 가슴이 아파죽겠는데 어쩌라구요!
나는 이러고 싶어 이러는 줄 알아요?!!"

진우가 큰 소리를 치자 태진이 움찔했다.

"저,보호자분.죄송하지만 다른 환자분들도 계시니 조금 진정해주세요."

간호사가 다가와서 진우에게 조용히 말했다.

진우는 잠시 입을 다물다가 숨을 크게 몰아쉬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태진은 진우를 달래려고 손을 뻗다가 멈칫하고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일어나지 말아요."

"여기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없잖아.집에 가야지."

"하,하지만 다쳤는데..."

"여기서 이렇게 있을 돈 같은 거 없어."

"병원비는 제가..."

"동정은 됐다고 했지."

어떻게 저렇게까지 냉정하고 싸늘할 수 있을까..
태진은 절뚝거리면서 병원을 나갔다.
진우는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렇게까지 자신을 밀어내는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이제 싫어....이렇게까지 무시 당하는 거..싫어...싫...-

그래...이제 상관하지 말자...

진우는 남자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어가면서...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면서...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심장이 다시 아프게 울리고 있지만,그건 저 남자때문이 아닐 것이다.
처음 받아보는 냉대에 놀라서...심장이 뛰는 거라고...그래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저 남자가 이유라서 심장이 아픈 것이 아니야...-

아무도 없는 싸늘하게 식은 집에 들어온 태진은 방에 벌렁 드러누워
탁자 위에 놓여진 액자를 자신의 가슴에 올려두었다.

"...들리지...이렇게 아픈 거 알지...?힘들다...네가 없어서...난 더 아프다...
네가 없으니까...아파도...치유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진의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데...환영으로 보이는 그녀는
태진만큼이나 안타깝고 슬픈 표정이었다.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남자에 대한 미련도 환상도 버린 진우는 평범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며
미팅에 나가서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진우는 혹시나 자신이 게이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급하게 미팅을 쫓아다녔고
다행스럽게도 다른 남자에게 태진에게 느꼈던 감정을 다른 남자에게
느낀 일 없이 평범하게 여자와 사귈 수 있었다.

민하...그녀는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상냥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진우와 성격이 맞았다.

어느 데이트 날이었다.
진우는 먼저 데이트 장소인 카페로 갔으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익숙한,그러나 불쾌한 기분이 진우의 심장을 두드렸다.

"아,자기야~늦어서 미안해~"

"아...민하야...잠시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어..."

민하는 진우의 안색이 너무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심장병은 재발하는 병은 아니지만 힙병증을 조심해야하고 진우의 경우는
특히 그랬다.
진우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민하는 불안해졌다.

화장실에 들어간 진우는 누군가가 토약질 하는 소리를 들었다.

"괜찮아요?"

살아오면서 타인의 도움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받은 진우였기 때문에 자신도
타인을 도와주고 배려해야한다고 생각해서인지,진우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신경쓰지 말아요."

남자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진우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 목소리...그리고 힘겨워 보이는 뒷 모습...
그리고 확인한 그 사람의 얼굴...

1년 전의 그 남자,태진이었던 것이다.

"...아저씨..."

태진이 고개를 들어 진우를 보았다.

"...누구?"

"아...저...."

진우는 갑자기 난감해졌다.
상대가 모른다...자신을 잊어버렸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이 모른 척했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저...진우에요.저기...기억 안나세요?"

말은 마음과 반대로 멋대로 나오고 있었다.

"...?아,아~기억이 날 것 같은데..."

진우는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자신은 그를 보자마자 기억을 해냈는데...
그는 자신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여기 어쩐 일이세요?몸도 많이 아프신 거 같은데..."

"아...여기...확장공사를 한다고 해서...회사 사람들하고 견적 좀 보러 왔어."

"...아...몸 않좋으신데..아직도 이런 험한 일을..."

"너는 귀여운 아가씨와 함께 왔더군.여자친구?"

"...아...네...보셨어요?"

"...응."

정적이 답답하다.
이 어색한 공기는 아무리 해도 익숙히지지가 않는다.

"...이제 괜찮으니까 여자친구에게 가 봐."

"...병원 가세요.정말 안좋아보여요."

"아...그래..."

진우는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어쨌든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다시 심장이 아파온다.

"...."

진우는 돌아가다 말고 다시 태진에게로 돌아와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뭐하는 짓이야?"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저랑 같이 병원 가요."

"뭐?이봐...장난에도 정도가..."

"빨리 일어나세요!"

진우가 소리치자 태진은 움찔해져서 몸을 일으켰다.

진우가 다른 남자를 부축해 나오는 모습을 보고 민하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진우씨..."

"민하야,미안해.이 사람...아는 사람인데...많이 아파서...병원에 가야할 거 같아."

"어...그래..."

"미안해.나중에 연락할게."

"어...조심해...."

민하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아픈 남자를 부축하는 애인을 보내주었다.

진우는 태진을 택시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여자 친구에게 미안한 짓을 하는 군."

"...이해할 거에요.착한 친구에요."

"...착하다는 건...좋은 게 아냐."

태진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진우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1년 전 보다도 훨씬 얼굴이 나쁘다.지친 표정에 가슴이 저려온다.

-나처럼...당신도 낳으면 좋을텐데..-

진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병원에서 외래진료를 요청하니 사람이 많아서 예약진료를 해야한다고 했다.
진우는 태진이 걱정스러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했다.
진료일은 3일 후로 예약이 되었고 진우는 지친 남자를 다시 부축해서
남자의 집으로 향했다.

태진의 집은 달동네라 불리는 곳으로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심장병 환자로써는 무척이나 힘든 경사였다.

-이런 곳에서 살다니...-

열악한 환경에 진우는 인상을 썼다.

집에 도착하자 아니나다를까,태진은 힘이 들어 숨을 헐떡헐떡 몰아쉬고 있었다.

"잠시 쉬고 있어요."

진우는 태진을 방에 누이고서 물을 떠왔다.

"이거 마셔요."

남자는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왜 이런 곳에서 살아요.심장병 환자는 이런 곳에서 살기 힘들잖아요.
좀 더 안정된 곳에서 살지 않으면..."

"...신경 쓰지 말아라.이번엔 본의하니게 네 도움을 받았지만,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왜 그렇게 저를 미워하세요?"

"말했잖니.남자 취향이 아니라고."

"저도 게이 아니에요!하지만..."

정말로 속상하다.어째서 이 남자는 자신의 의도를 몰라도 이렇게나 몰라주는 것일까..

"...포기 하지 마세요."

진우가 조용하지만 강하게 말했다.

"저...저도 심장병으로 다들 가망 없다고 했어요.이식을 받으려고 해도
저에게 적합한 심장이 없어서 몇번이나 퇴자를 맞았죠.하지만,결국
작년에 이식을 받아서 이렇게 살았어요.물론,의술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포기 하지 않아서..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남자는 대꾸도 없고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3일 후에 또 올게요.그 날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계세요.
병원에 가야하니까요."

진우가 밖으로 나간 후 태진은 가늘게 눈을 뜨고서 피식 웃었다.

"남 걱정은...."

그 때였다.

-작년에 이식을 받았다고?-

무언가 불현듯,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작은 책상의 서랍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

무언가를 꺼내 든 태진의 손은 떨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이가...-

살짝,태진의 손에서 떨어진 종이에서 1년 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공여자:김 희연
수혜자:성 진우]


-그 아이가....!-



진우는 민하에게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했다.
너무도 좋아하는 여자친구와의 약속을...그 남자 태진을 병원에
데리고 가는 일 때문에 취소했다.

진우는 자신 조차 왜 그 남자와 연류되면 멈출 수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아마도 같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진우의 생각은 그랬다.
그가 심장병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저 지나치는 사람 중의 하나였을 것이고 모르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응...미안해...그래,나중에 전화 할게."

전화를 끊으면서 그다지 편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만일,그대로 남자를
지나쳐간다면 더욱 마음이 불편할 것이 뻔했다.

동정심이 많아서라든지,혹은 가진 자의 여유라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가 예전 자신이 앓던 병을 앓고있기 때문이다.

사흘 후,진우는 아침 일찍 태진 집으로 찾아갔다.
태진의 집 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몇번을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화가 났다.이런 시간에임에도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어쩜 그 남자는 이렇게 사람을 수고스럽게만 만드는 것일까!

진우는 여기까지 온 수고가 너무 억울해서 그만 바닦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뭐야...젠장...눈물은 왜 나는 거야..여자 심장을 이식받았다고 여자가 되가는 건가?-

진우는 벌떡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 소리를 질렀다.

"잘났다!!누가 당신같은 심술궂은 남자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절대로,절대로 내가 불쌍해서라고!혼자서만 심장병 걸렸냐?!!"

"왜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혼자서 지껄이고 있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창백한 얼굴의 그가 서 있었다.

"...어,어디 갔다 온거에요?!!병원 가야하니까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방금 전까지 속으로 절대로 참견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는 남자를 보자 다시 마음이 약해져버린다.

"...너야말로 너무 일찍 온 거 아냐?난 라면을 사러 갔다 온 거라구."

"...라면?이 아저씨가!!환자가 그런 걸 먹으면 어떻게해요?!!그것도 이런 아침부터!!"

"...라면을 먹을 수 있는 날은 그래도 괜찮은 거라고."

"..뭐..."

진우는 풍족하게 살아와서 이런 삶은 모른다.텔레비젼에서 보았던 것을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로도 풍족했다.
그제서야 저 남자가 왜 저렇게 고생스러워보이는 지를 알 수 있었다.

"...가요.제가 식사 사드릴게요."

"이봐,말했지.나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저도 말했잖아요!저도 병을 앓은 적이 있어서...!"

"그럼 내가 병원에 가고 네 말을 들으면 넌 무엇이든 할 거라 이 말이냐?"

"네?"

"가령 이를테면 네 여자친구와 헤어지라고 해도 그렇게 할 거냐 이 말이야."

"...무슨...제가 아저씨를 돕는 것과 민하가 무슨 상관이.."

"나는 보다시피 돌봐줄 가족도 연인도 아내도 없어.날 돌보려면 데이트할 시간도 없을텐데 그럴 바에 처음부터 여자와 정리를 하는 것이 낳아.
그럴 각오도 없으면서 괜히 설치지 말란 말이다.난 너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몰려.
피곤하단 말이다.넌 대체 나에게서 뭘 원하는 거지?나에게서 대체 뭘 더 빼았아갈 것이 있다고 이렇게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거야?!
꺼져!다시는 오지 말란 말이다!이대로 죽든지 말든지 그건 내 맘이야!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으니 그냥 제발 이대로 날 내버려두란 말이다!!"

남자의 말이 너무도 강경해서 진우는 그만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무언가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비수가 심장에 와 밖히는 듯 했다.

남자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한참 후에야 진우는 바닦에 주저앉았다.

"그런..거...아닌..데..."

아무리 말을 해도 전해지지가 않는다.
그런데도 포기를 할 수가 없다.
연류되면 연류될 수록 상처를 받는데....
어째서 이런 마음이 되어버렸을까...
어떻게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훌쩍거리며 일어나 무릎의 흙을 턴다.
그리고 남자의 집 앞 문에 다가갔다.

"아저씨...병원..가요...혼자서라도...가세요...꼭 가야해요...
심장병...낳을 수 없는 병도 아니고...라면같은 거..드시지 말아요.
환자 스스로가 자신의 몸을 돌봐야죠...저도..제가 이상한 거 아는데...
어쩔 수가 없어요...자꾸..아저씨를 만나면...심장이 아파요...
병이 재발한 것도 아닌데...합병증에 걸린 것도 아닌데...아파요...
무언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심장이...울고 있는 거 같아요."

문에 기대어 진우의 조용한 말을 듣고 있던 태진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아...그래...그 심장은 희연의 심장...자신과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던
연인의 심장...
자신은 그 심장에 상처를 주고 무리를 준다.
잔인할 정도의 연인...
죽어서까지 자신을 잊지 못하는 것이라면...어째서 살아서 자신의 곁에 있어주지 않았을까...
어째서...죽는 것을 선택해버렸을까...

살짝 문을 열어 바라보니 연인이 이제는 환영이 되어 자신의 앞에 서 있다.

"........"

조용히 감싸안는 손은 떨리고 있고 말로 못할 심정은 눈물이 되어 흘러버리지만
그녀에게 닿을 거라 생각한다.

-제발...이제는 나때문에 아파하지마...부탁이야...너를 건강하게 지내게 할 사람이야..
그러니까...더 이상 미련이나 후회는 갖지 말고...죄책감도 갖지 말고..
이 아이의 몸에서...오랫동안 건강하게....살아서...살아서...-

"살아...서..."

태진은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그대로 바닦에 쓰러졌다.

"..아저씨?아저...아저씨?!!이봐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사람이라 미안해...미안해..태진씨...당신이 아파도,아파서 기절을 해도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해 미안해....-


눈을 뜨니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정신 들어요?"

고개를 돌리니 진우가 거기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입을 오물거리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미안해요...상황이 좋지 않아서...멋대로...입원을 시켰어요.이왕 온 김에 확실하게 검사도 받아요."

몇번이나 이런 일은 있었다.희연과 함께 살고 있었을 때도 갑자기 심장이 발작을
일으켜 고꾸라진 일이 있었다.형편에 매번 병원으로 달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럴 때마다 희연이 심장을 맛사지해주었다.
눈을 뜨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놀랐지 않느냐고 자신을 나무랬다.
그러면서 등을 돌려서는 눈물을 흘렸을테지..
사랑하는 남자의 가슴을 맛사지하면서...두려웠을테지..
그런 일에 지쳐버린 것일테지...

그리고는 이제는 자신의 앞에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남자의 몸안에서..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여야하지?
이제 겨우 1년 전의 사고와 연인의 죽음에 대해 받아들였는데 어떻게
이 남자아이를 받아들여야하지?
자신의 연인의 심장을 지니고 있는 이 아이를...어떻게 이해해야한다는 거지?
어디로 가도 네 심장이 있는 이상 이 아이와 몇번이고 마주칠 것이 뻔한데...
난 네 심장을 앞에 두고...네가 그토록 나에게 주고 싶었던 심장을 앞에 두고 난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너는..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거지...?

며칠동안 태진은 병원에서 검사란 검사를 차례대로 받기 시작했다.
진우는 수업이 있는 날이나 없는 날이나 항상 병원에 와주었다.

"너 그러다 친구에게 차이는 거 아니냐?너무 여기에만 오지 말아."

"...그러지 않아도...이번에 엠티를 가는데...그 날 민하를 감동시켜 줄려구요.아,아저씨.제가 없다고 검사 안받으면 안돼요.알았어요?"

태진은 씁쓸하게 미소를 짓다가 표정을 굳혔다.
태진이 손을 진우의 가슴에 대었다.

"..."

"...이식...받은 거라고 했지?"

"네?아,네..."

어색한,그러나 반대로 익숙한 느낌의 손...남자의 그 체온...
진우는 갑자기 당황스러워졌다.

"...누구의 심장?"

"그,그건 모르겠어요...전 한 번도 본 일이 없으니까요..."

"...착한 여자였을 거다...너무 착해서...나쁜 여자였을 거야..."

"...그건...어,어떻게 알아요?"

"응?"

"여자 심장이라는 거요...나 말한 적 없는데..."

"...아,아...그냥...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너 하는 짓이 꼭
계집애같아서 말이다."

"뭐라구요?"

진우가 골난 표정을 한다.하지만 진우도 종종 자신이 이상할 때가 있다.
심장을 이식 받기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기도 하고 가끔은
여자같은 말투가 나오기도 한다.
또 다른 자신이...어색하게 함께 공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여자의 심장을 이식받아서일까?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 남자를 대하는 태도이지만....

"...들어봐도 돼나?"

"네?"

"...그 심장 소리..."

"아..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태진이 얼굴을 진우의 가슴으로 기대왔다.

두근,두근...

아...그래...종종 그녀의 가슴에 기대어 들었던 그 소리....
그 건강한 소리....

-잘 들어봐,두근 두근이 아니라고.사랑해,사랑해...그런 소리 들리지 않아?-

-심장에서 어떻게 사랑해라는 소리가 들려?-

-핏~그건 태진씨 사랑이 약해서 그래.뭐야,뭐야.정말.정말 안들린단 말야?-

-아,들린다~-

-어?들리지?-

-응,나 배고파~하는 소리가-

-뭐어~?-

아...그런 추억이 있었구나...떠올려졌다.

그래...들려....
사랑한다는 소리...
죽어 한줌 가루가 되어 흩날린 후에도 날 향해 고백하는 네 힘찬 고동이...
날 찾아 이렇게 다시 내 앞에 오기까지 조심스럽게 억눌렀던 그 고백이...


-잘 들어 봐.두근 두근이 아니라,사랑해야-


그 후에 태진은 진우를 보는 것이 더욱 괴로워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자신의 연인의 심장을 이식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자신에게 순수한 의도로 다가오는 진우가 부담스럽고 너무도 싫었다.

그리고 진우는 태진을 병원에 입원시킨 채로 엠티를 갔다.
설마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병원을 탈출하는 일은 없을 거라 굳게 믿었다.

엠티를 온 진우는 우선 토라진 민하가 우선이었다.그간 태진을 돌보느라
소홀했던 자신의 여자친구를 달래느라 진우는 열심이었다.

천성이 사람을 미워하는 성격이 아닌 민하는 진우가 하도 열심이라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또 날 내버려두고 혼자만 다녀봐.그 땐 정말 미워할테니까..."

"그래,그래.이해해줘서 고마워...."

진우는 밝게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민하가 자신을 용서하자 그 순간 너무도 괴로워졌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아직도 자신은 태진을 걱정하고 있다.
지금 쯤은 뭐하고 있을까,식사는 잘 하고 있을까...
약 먹기 싫어서 간호사들을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정말 자신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용서를 받아도 되는 것일까...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없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날 밤이었다.
진우와 민하는 한적한 곳으로 가 잠시 어색한 공기 속에서 당황하다가
첫 입맞춤을 했다.

이질감....
그리고 행복감....

이 상반된 감정을 느끼면서 진우는 쓰면서도 달콤한 첫 키스를 경험했다.

"잘자~"

민하가 여자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돌아가며 조용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 다시 왔다.

"사랑해~"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인 민하의 고백이 왠지 가슴에 벅차다.
아픈 것도 같은 벅참....
기쁜 것도 같은 벅참....

진우는 남자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친구들 사이에 누웠다.
잠이 쉽게 올 것 같지가 않다.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며 진우는 그만 괴로워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잠을 청했고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 식사시간에서의 일이다.

"진우야.너 심장을 이식받았다고 했지?"

"응."

"그럼 너 혹시 이식 받고나서 뭐 변한 건 없냐?"

"변한 거?"

"그래.성격이라든지,아니면 전에는 없던 취미활동이 생겼다든지..."

"그런 거 없어.심장을 이식받는 정도로...무슨..."

"어?얘가 모르는 소리를 하네?야,해외토픽같은 데 나오잖아.어떤 수녀가
심장을 이식받았는데 그 심장이 댄서의 심장이었대.그래서 음악만 나오면
수녀가 마구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이야,그거 신기하다.진우야,정말이야?"

"아냐.그런 거 없어."

진우는 대답은 그렇게 했으나 표정은 애매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계속 태진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래서 재미있어야 할 엠티가 전혀 재미있지가 않았다.
민하와 함께 있어도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가 알 지 못해 민하로부터 핀잔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 온 진우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책상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무리 뒤적여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나오지 않자 거실의 모친에게 물었다.

"엄마,혹시 심장 기증자 동의서 가지고 있지 않아?"

"동의서?어디 있을 텐데...엄마 화장대 찾아보렴.그런데 왜?"

"아냐."

진우는 급히 부모의 방으로 들어가 모친의 화장대 서랍을 뒤적였다.

그러나 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동의서는 나오지 않았다.

진우는 무작정 병원으로 향했다.

-아닐 거야...그런 일....있어서는...-

자신이 태진을 걱정하는 것은 그저 같은 심장병 환자라서야한다.
그 이상의 어떤 이유가 개입되어서는.....


"진우군,어쩐 일로?어디 좋지 않아요?"

간호사에게 애원을 해서 겨우 수술 당시의 담당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저에게 심장을 기증한 사람이요...여자...라고 했죠?"

"네,그래요."

"그 여자 분...가족이나...동의서에 쓰여진...성함같은 거...알 수 있나요?"

"왜 그러죠?"

"아..저...엄마 말씀 들어보니 그 분...돈도 받지 않았다고 하고...
어떻게든 찾아서...사례를 하고 싶어서."

"잠시 기다려봐요."

의사는 별 의심이 없었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수술 당사자인 진우였기에 그 당시 기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여기 있네.공여자 김희연.동의서에 싸인한 사람은 남편이라는데
김태진.동성동본이네."

"...김...태진...정...말이에요?"

"응?그럼...왜요?아는 사람이야?"

"...아...네..."

"다행이네.그래요,꼭 사례를 하도록 해요."

"..그...태진이라는 사람...그 사람도..심장..병인가요?"

-안돼...들으면...정말로...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그러네.5년 전에 여기서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는데.안됐군..."

"...."

"진우군?괜찮아요?"

"아...네...감사합니다."

진우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진찰실을 나왔다.

그간 태진에게 연류되었던 것...
태진에게만은 그토록 집착했던 것...
그것은 모두 그도 심장병 환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태진이 진우를 싫어하는 까닭은 그저 동성인 자신이 그에게
지나치게 관섭을 해서 그것을 싫어하는 거라 생각했다.

"...여기에...당신의 부인이...있는...."

가슴에 살짝 손을 얹고서 중얼거리던 진우는 그만 바닦에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사죄를 해야하지?당신의 부인의 심장을 받아내고서 당신에게
접근해 더 큰 상처를 준..그 죄를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지?응?
어떻게 해야하지?-

가슴을 부여잡고 진우는 큰 소리로 울어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태진의 생각이 너무도 간절해져서 진우는 달리기 시작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면...벌이라도 받겠어...그러니까...그러니까...-

태진은 이미 병원에 없을 것이다.
이제야 하나 하나 모든 것이 맞아들어가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처음 본 사람인데도 낯이 설지 않았는지,그리고 어째서 처음 약속한 날 그가
늦을 것을 알았는지,또 어째서 그렇게 무시를 당하고도 그에게 집착을 헀던 것인지...

모두 알 수가 있었다.

그 높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 그의 집에 도착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진씨!!"

"태진씨!!"

안에서 문을 채 열기도 전에 진우가 벌컥 문을 열었다.

창백한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무작정 찾아오기는 했는데...

내가 당신 부인 심장을 가지고 있어서,그래서 미워하는 것이라면
용서해달라고...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저..."

"아...저기,약은 타왔어.그냥 나온 것도 아니고...그...병원에 있는다고
병이 낳는 것도 아닌데...괜히 돈만 버리게 되니까..."

태진이 먼저 변명을 한다.

"그나저나 너도 참 끈질기구나.대부분 이럴 정도로 호의를 무시하면
알아서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니니?"

태진이 퉁명스럽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알아버렸는데...아직도 모른 채 지낼 수 있는 걸까?그래도 되는 걸까?-

"들어와라.물이라도 마시고 가던지."

-그 일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알면...어떤 표정을 할까...얼굴이 굳어버릴 지 몰라.
날 더더욱 경멸하겠지...이대로 모른 채 지낸다 해도 경멸을 받고 있는데...-

그 때 갑자기 컵 하나가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마셔라.얼굴이 창백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저 남자의 이런 호의는...
게다가 자신이 그 일을 말해버리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런데....

-나는 아닐 수 있는데...-

이 심장이...

-나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닐텐데...-

이 심장이...

태진의 등 뒤에서 진우는 무릎을 꿇고 힘겹게 한마디를 했다.

"사랑해요."

전해주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 심장이 아직도...당신을 잊지 못해 간절히 부르고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괴로워서,괴로워서 그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뭐?"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차갑다.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 못한 채로 진우는 울음 섞인 소리로 다시 한번 그에게 들려준다.
이 심장의 고백을....

"사랑해요...당신을...사랑하고 있어요."

"이봐.농담도 지나쳐.난 그런 흥미 없다고 했지.게다가 너도 게이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나?못들은 것으로 하마.물 마시고 돌아가던지 해라."

그러면서 그는 무심하게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

어떻게 전해야하지?

심장이 아프다.

어떻게 해야 믿을 것이지?

당신과 사랑했던 여인의 심장이 아프다.

내 말을 듣지 말고 이 심장의 말을 들어봐...

당신을 잊지 못하는 여인의 심장이 아프다...


"사랑해요...태진씨...꼭...전해야한다고..생각해서...그거...이상해서
말을 못하겠는데..그런데...사랑한다고...전해야해서..."

횡설수설하는 진우의 고백을,진우의 것으로 생각한 고백을 들으며
태진은 씁쓸한 표정을 하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사랑이라니..장난에도 정도가...-

그 순간 갑자기 심장이 저리기 시작했다.

"사랑해요...믿어야해요..그래서..편하게 해주세요...나...나는..."

진우의 고백을 들으면 들을 수록 태진의 심장은 더욱 조여왔다.

"...나..알아요.이제 다 알게 되었어요.이거...그러니까...
내 심장...당신 부인의 심장이라는 것..."

순간,문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뭐...라고..."

"...그래서 날 싫어하는 거죠?그런데..믿어야해요.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알 수가 없어진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보다 더 알 수 없게 된 것은...

사랑 고백...
진우의 것인지 희연의 것인지...모르겠는 그 절절한 외침...

그것은 말을 하는 진우도 마찬가지였다.애초 그 여자의 심장이 울부짖는
소리를 전해주려 했는데..점점 이 고백이 정말로 그 여자의 것인가..
그 여자를 빌어 자신이 고백하는 것은 아닌가..생각이 되었다.

"...그래.알았으니 다행이구나.난 널 경멸한다.너희 집안 자체를 경멸한다.
병원 측에서는 나의 동의 없이 내 아내의 심장 조직검사를 했고 너로 인해
난 그녀와 영영 헤어지게 되었어.뇌사라도 좋았어,내게는...
그녀가 곁에 있어준다는 것...그것만이 중요했다.그런데 너희 돈 많은
집의 능력이란 것 대단하더군.그녀는...내게 심장을 주고 싶어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진우가 고개를 든다.

-지금 뭐라고..-

분명 그녀가 태진에게 심장을 주고 싶었다고...

그렇다면...지금 자신의 안에 있는 이 심장은...주인을 잘못 찾은 것이다..

"가라.이제 알았으면 더 이상 내게 접근하지마.사랑?더러운 자식.기분 나쁘다.널 가까이 두는 것만으로도 역겹다."

"...사랑해요..."

있는 힘을 다 해 다시 말했다.

"꺼져!!!"

"봐요!"

진우가 갑자기 웃옷을 벗어던졌다.

"이 안에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심장이 있어요!!이걸 원하는 거죠?!
당신은 이걸 원해서 날 미워하는 거죠?!하지만 이제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어!
이 여자의 심장때문이든지,그것이 내 의지든지 간에 난 당신을 사랑한다고요!!!"

태진은 고개를 돌려 그의 가슴을 본다.
흉터의 안에 자리잡고 있을 그녀의 심장...그 뜨거운 고동...

그녀의 가슴이 아니라...어느 남자의 가슴 안에서 다시 살아가는 그녀의 심장...

그녀가 고백을 하는 소리...
또는 이 남자가 고백을 하는 소리...

천천히 손을 그 가슴에 가져간다.

두근,두근...

"...."

-잘 들어봐,사랑해라는 소리라고...-

"...흑..."

설움이 복받쳤다.

진우는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는 태진의 손을 살짝 감싸쥐었다.

"...가라.이 이상 날 자극하지 마.난 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해있는 지경이야.더 이상 날 건드려서 험한 꼴 당하기 전에 가라.
그리고 다신 마주치지 말자."

-...전해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고백을 하는데...

태진이 손을 빼어 바닦에 떨어져있는 진우의 웃옷을 주워 그에게 건내었다.

"....가라."

태진이 현관 문을 열었다.

"...수 없어...갈 수 없어..."

당신에게 용서를 받지 못했는 걸...
그리고 당신은 이 사람의 고백을 듣지 못했잖아?

"무슨 짓을 당하든지!나 당신에게 용서를 받고 싶고 꼭 이 말을 전하고 싶...!!"

태진이 갑자기 진우의 팔을 우왁스럽게 잡아 방 안으로 끌고갔다.

"왜 이렇게 말을 못알아 듣는 거야?!정말 험한 꼴을 당하고 싶어서 그래?!"

"...말을 들어줘요.무슨 짓을 당해도...나...다 각오했고...무엇보다...
이 심장...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당신도..그렇겠죠?살아있는 이 심장을...."

아...이제 정말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이 말을 하는 것은 누구일까....
진우 자신?아니면 태진을 사랑하는 희연?
희연 자신?아니면 태진을 사랑해버린 진우?

"....!"

태진은 진우를 거칠게 누이고 그의 바지 버클을 내렸다.

"...저..잠깐만...무슨...."

"입다물고 가만히 있어.이걸 원한 거잖아?나와 희연이 어떻게 사랑했는지
그걸 알고 싶었던 거잖아?안그래?"

"...!"

-틀려!-

잔뜩 성이 난 태진의 표정을 보며 진우는 잔뜩 겁을 먹었다.

"이,이거 놔요...!"

반항을 해보지만 힘이 들어가지가 않는다.

"왜,이제와서 겁이 나?내가 경고했잖아!무슨 짓을 당하든 각오를 하고 왔다고 하지 않않나?!"

-아니야!-

"..그...런...이건...아!"

진우의 중심이 그의 손에 잡혔다.

무섭다...!
정말로 두려웠다...
이대로라면...이것은...

태진의 숨결소리도,손길도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창백한 태진의 얼굴에 땀이 맺혀있었다.

"...그만...!"

진우는 무방비하게 당하면서 눈물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험하게 자라온 태진과 그와 반대되는 삶을 산 진우는 체격적으로도
힘을로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진우가 태진을 밀칠 수가 없었다.

진우는 민하와는 커녕 스스로도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중심에서
무언가가 나왔을 때는 너무도 수치스럽고 괴로워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보..보지마요...보지마..."

태진은 진우의 반응이나 그의 몸 상태를 보고 진우가 전혀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괴로운 듯 눈물을 흘리면서 얼굴이 벌개진 진우를 보니 조금 안타까운 기분도 들었다.

고개를 조금 내려 가슴을 바라보았다.

"...."

-희연아...-

진우가 눈을 뜨니 태진이 진우의 가슴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살짝...부스스하게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았다.
약간은 멍한 시선으로...
자신의 가슴에...아니,사랑한 부인의 심장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대고 잠이 들었던 가련한 남자...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그는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만을 애무했고 절대로
입술에 입을 맞춰주지도 않으면서 가슴에는 계속 입을 맞춰주었다.
애정어린,그러나 결코 애정은 담겨있지 않은 애무...

얼마나 그 여자를 사랑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생전에 사랑을 다 해주지 못했던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몸을 능욕당한 것은 진우다.
결코 그 여자가 아닌 것이다.

서러워서 눈물이 났고 남자에게 당했다는 수치심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무엇으로도 보답을 하기 위해 무슨 짓을 당하든지 다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하지만,설마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아니,남자에게 당한 수치심보다 더 괴로운 것은 아마 진우 내면에 태진에게 있어서는
그 여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질투를 했는지 모른다.

그래,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진우는 여자도 아니기 때문에...태진 안의 희연의 공백을 매꿀 수는 없을 것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아직 자고 있는 태진을 내려본다.
불규칙한,거친 숨소리가 쌔액 쌔액 들려왔다.

진우는 그가 눈을 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옷을 입었다.
정말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을 정도로 심정이 비참했지만 입술을
꼭 다물고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태진이 눈을 떴을 때,자신이 곁에 있으면 그가 더욱 난처해할 것을 진우는 알고 있었다.
난처하고 난처해서 진우에게 질려버릴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고 해도...
또 만나서는 안됀다고 해도...
어떻게든 사과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진심이 어긋나버리자 진우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태진이 눈을 뜬 것은 진우가 집을 나가고 나서 30분이 지난 후였다.
자신보다 어린 남자의 가슴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상당히 부끄러워졌다.그러나 눈을 뜨자 그 어린 남자는 없었다.
아직 자신의 귓가에서 온기가 따듯한데..
그러다가 갑자기 태진은 잠결에 잊고 있던,자신이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떠올랐다.

"아..."

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그의 의도는 분명 자신을 도발하려던 것이 아니었을 텐데...
너무도 열심이라 그만 열이 받고 말았다.
이미 죽은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계속 자신의 주변에 맴돌면서 죽은 사람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이 화가 났었다.사과를 한다고 해도 희연이 살아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닌데,너무도 열심이라서...
어린 남자의 우는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멈추게 하려던 어린 남자...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을 태진은 무참하게 안아버린 것이다.
그제야 그는 너무도 그에게 미안해졌다.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이 잠결에 들었던 소리는 과연 희연의 고동이었을까...
아니면 그 어린 남자의 눈물을 흘리는 소리였을까...

태진은 옷을 서둘러 입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가 간 길의 흔적도 알 수 없어졌지만 왠지 이대로라면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지?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항상 어린 남자가 먼저 찾아와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어디에 사는지,
어디에 자주 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너무도 괴로웠다.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집착에 인해 자신은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한편 집으로 돌아온 진우도 참담하긴 마찬가지였다.
민하의 전화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남자에게 당했다는 수치심보다 진우 자신이
태진을 사랑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어쩌지...?-

진우는 모아진 무릎 사이로 얼굴을 뭍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후로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동안,태진은 진우를 찾으려고 이곳 저곳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일주일이 희연이 죽고 난 다음 보낸 1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자신 스스로가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어느 카페 앞에서 진우를 다시 보게되었다.
태진은 진우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려고 했지만 잠시 후,진우가 여자친구를 만나는 것을
목격하고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카페 안에서 보이는 진우는 상당히 많이 말랐다.얼굴이 많이 안되었다.

-아..그래...여자가 있었지...너에게는...-

태진은 이제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이성을 잃어서 어린 남자를 겁탈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를 망치려고 찾아다니고 있던 자신의
무자비함에 혐오감이 들었다.
태진은 그대로 돌아서 집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미안해...이 말조차 해주지 못해...미안해...-


진우는 카페 안에서 민하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중이다.

"...뭐?왜..갑자기..그간 만나주지도 않더니 왜 갑자기 그러는 거야?"

민하는 얼굴이 굳어져 울먹이며 진우에게 물었다.

"..미안해..."

"...다른 사람 생겼어?"

"...."

"...누구야?어떤 여잔데...어떤 여잔데...."

애절한 그녀의 목소리가 가슴을 치고 있다.

"미안해...너에게 이것밖에는 되지 못해서 미안해..."

진우는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됀다.자신이 아무리 괴롭다고 해도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여인보다 마음이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안다.
이제 마악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된 남자를 위해,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질 수도 있다는
그 결심이...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울지마...민하야...나같은 녀석때문에...울지마..."

그 말을 듣고,민하는 지금,진우의 마음을 차지한 사람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아마도..자신은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진우 마음 속에 있는 사람과 현제 민하와의 그 애정의 차이를...

"...울지 않아...나...울지 않아..."

민하가 떨리는 손을 꼭 쥐고 말했다.떨리는 음성이 진우의 마음을 애처롭게 했다.

"...나..진우씨가 전부라는 말...하지 않아...진우씨 아니면 안됀다는 말...하지 않아..."

진우의 마음이 어두워졌다.어째서 이렇게 좋은 여자에게 상처를 주어야하는 걸까...
어째서 이 여자를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 남자가 좋아져버린 걸까...

"...갈게..."

민하가 먼저 일어선다.착한 여자...마지막까지 진우를 배려하는 것이다.
진우는 그런 민하가 사라지는 것조차...바라볼 수 없었다.

진우가 집 근처 공원에 온 시간은 이미 한 밤중이었다.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려던 진우는 벤치에 앉아있는 그 사람을 보았다.
너무도 안타깝도록 좋아져버린 남자....
그의 부인의 심장이 이끌어 준 남자....
그래서 그 역시 자신을 거역할 수 없었던 가련한 남자...

"...뭐해요..."

지나칠 작정이었는데...어째서 발은 또 이 남자의 앞에서 멈춰버린 것일까...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여기..."

"...그냥..."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그의 발치 곁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한참을 여기에서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러고 있어요.왜요,할 말 있어요?이제 우리 끝난 거잖아요..."

그 말에 태진의 가슴이 아려온다.
끝났다...
역시 진우는 자신에게 화가 나고,질려버린 것이다.

"..보고싶지 않아...당신이 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아요?"

"...알아."

가슴을 찢어놓는 메마른 그의 목소리...

"알아?알면서 여기 올 수 있어요?뭘 안다는 거에요?뭘?!"

진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그러다가 잠시 후 다시 일어나 남자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진정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이것이 아냐..저 사람을 보고 싶어했잖아...저 사람을 사랑해서...
너는 그렇게나 좋은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졌잖아...
그 사람이 찾아왔는데...이래서는 안돼는 거잖아...

"...잘 가요.이제...우연으로라도...우리 보지 말아요."

진우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할 때였다.태진이 진우의 손목을 잡았다.

"...가지마..."

애처로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진우를 멈칫거리게 했다.

"...들려줘...다시 한번...심장 소리를..."

순간,진우는 화가 나서 그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이제 이 심장은 당신 부인의 심장이 아냐!이 심장은 내 심장이라구요!
앞으로 평생을,내가 죽기 전까지 나와 함께 할 심장이야!당신이 들었던
부인의 심장 소리따위 없다고요!!!"

그만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어째서...이렇게까지 이 남자는...

"...알아..."

"...네?"

진우는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알아.네 심장인 거 알아...그러니까...다시 들려달라고..."

"...무슨..."

"...미안하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의 본심을 전한다.
진우는 그만 눈을 크게 뜨고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얼마나...망설였을까...그 말을 하는 것은...자신 스스로 부인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그리고 진우의 심장이 더 이상 부인의 심장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 남자는 그 말을 하기 위해...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오랜 기간 통곡해왔던가...

진우는 그만 주저앉아 남자의 무릎에 고개를 뭍고는 큰 소리로 울어버리고 말았다.

진우는 태진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태진은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뭍고 울어버린 가련한 진우를 따듯한 손으로 어루만져주었다.
그 손길에서 수줍은 긴장이 느껴졌다.
한참을 진우의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태진은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의 집에 가자고 했고 진우는
또 작은 목소리로 그러자고 했다.

일주일 전에 이 집에서 나왔을 때는 다시는 못올 줄 알았다.

"..바닦이 너무 차갑잖아요."

"...그래?"

어색한 긴장으로 인해 말도 차마 못할 지경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불 좀 넣고 올게."

"아,아니..제가 할게요."

"거기 있어."

태진이 나가자 진우는 다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부인과 살았을 적에도 저랬겠지...
저렇게나 다정한 사람이었겠지...
얼마나 다정하고 행복하게 살았을까...

새삼,진우는 다시 여자에 대한 질투가 솓아났다.
그리고는 그런 자신이 너무도 추해서 그만 얼굴을 숙이고 말았다.

"뭐라도 먹을까?"

"에?아...예."

진우가 당황해서 허겁지겁 대답했다.

"라...아,아니다.너 그런 거 싫어하지..."

"...라면 말예요?"

"응...요 근래 일을 못해서...먹을 걸 사다놓지 못했네..."

"...그럼 사와요,우리."

"...어?"

"쌀은 얼마에요?가요,가서...이것 저것 반찬도 사놓고...하루 먹다 그만 살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먹어야하잖아요."

진우는 태진의 팔을 이끌어 밖으로 나갔다.
진우의 팔을 통해 잔잔하게 고동이 전해져온다.그것이 태진은 쑥스러울 정도로 좋았다.

진우는 시장이란 곳을 처음 와본다.집에서는 가정부가 모든 살림을 다 했기 때문에 진우는 신경 쓸 일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태진은 가격과 질을 따져가며 물건을 고를 줄도 알았다.
혼자 살았던 기간이 오래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다가 둘은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보내는 시선을 의식했다.
꼈던 팔짱을 풀고 잡았던 손을 놓았다.그리고 또 다시 어색해져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고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방에 들어가 있어라...상 가지고 들어갈게..."

"...아,네..."

태진이 나간 후 진우는 바닦에 앉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이제껏 감정에 치우쳐 생각도 하지 못한 현실이라는 것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뭐라고 말해야...이해를 받을 수 있을까...

말 할 용기가...나오기는 할까...

누구의 감정이든지 간에 진우는 태진을 사랑하게 되어버렸고 그리고 태진 역시
이제는 진우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태진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죽은 부인의 심장이 아닌,진우의 심장소리...
그 살아있다는 증거의 힘찬 고동....
진우는 자신의 심장 위로 손을 얹어보았다.
잔잔한 약동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

그 때,태진이 들어왔다.

"와아...맛있겠다.이거 정말 아저씨가 다 한 거에요?"

"이제 와서 아저씨라니...새삼스럽게."

그 말에 진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에헤..헤헤헤..."

"뭐 그렇게 이상하게 웃는 거야?"

"기뻐서..."

"...어쨌든,먹자."

"네."

"아,그런데 집에는..."

"오늘 외박한다고 하면 돼요.어차피...부모님 집에 잘 안들어오시니까.."

"뭐?"

"내가 아팠을 때도..늘 그랬어요.가정부 아줌마만 계셨고...부모님은
밖에서 일을 하느라 바빴죠.어렵게 사는 것도 아닌데...그래서 서운한 적도 있었어요.물론,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

태진은 누군가와 식사를 하는 것이 정말로 오랜만의 일이었다.게다가 자신의 집에서는 특히나 그랬다.
희연이 죽은 후로는 그 누구도 집에 온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기분 좋은 저녁식사였다.

식사를 마친 후 진우는 태진이 설거지를 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있었다.
곱게 자라기만 한 진우는 태진의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 견딜 수 없었다.

-앞으로는 더 할텐데...오히려...태진씨를 도와주기는 커녕...오히려 그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텐데...곤란하게 만들 수 있을 텐데....어쩌지...-

"자,들어가자."

"에?네?"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뭐 그렇게 놀래."

"아...아니..."

태진은 진우의 어두운 표정이 신경이 쓰였다.진우가 태진이 신경쓸 것이
걱정 되어 애써 미소지어 보이며 그의 팔을 끌어 방으로 들어갔다.

작고 오래 된 텔레비젼을 키고는 어색한 분위기를 애써 없애려고 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지,두 사람 모두 알 길이 없었다.

태진은 애꿎은 채널만 돌리고 있었다.

"...부인..."

진우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진씨 부인...얘기해 줘요.어떤 사람이었어요?"

"왜..."

"...듣고 싶으니까...보지 않아도...당신을 아주아주 많이 사랑했을 거야.
이 심장이...당신에게 반응해 여기까지 온 것만 봐도..."

"..."

"...어떻게 만났어요?어떤...여자였어요?"

"...고아였어...같은 고아원에서 자랐고...그리고 성인이 되서는 함께 고아원을 나와서 동거를 했지.착한 여자였어...서로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괴로워했지.
내가 몸이 이러니까...항상 그 여자가 더 힘든 일을 많이 해야했어.
그런데도 내 원망 한번 하지 않았지.지쳐버린 것도 이상한 일이 아냐.
너무 힘들어서...지쳐버린 거야.그러니까...날 혼자 두고 갔다고...
그녀를 원망하거나...싫어할 수가 없지...그것마저 애처로워서..."

태진이 눈물을 흘렸다.

"...."

"아무 것도 생 전에 해주지 못해서...그것이 계속 마음에 짐으로 남아있어.
돈을 많이 벌어 여유가 생기면 그 때는 웨딩드레스도 입고 함께 신혼여행도 가자고...
약속했는데...그것조차 난 지켜주지 못했고..오히려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어..."

"....만일..."

"...?"

"만일 당신이 그녀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해서 그걸 미안하게 생각한다면
그건...그녀도 마찬가지 심정일 거라고...생각해요.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당신에게 알리고 싶어서...아직 곁에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당신을 혼자 두고 먼저 가버린 것이 미안해서...저를 통해...이 심장을 통해 당신의 곁에 있다고...그렇게 말하는지 몰라요...그러니까...그렇게
아파하지 말아요...당신이 그렇게 혼자 아파하면..오히려 그게 그녀에게 죄에요."

"...응...응..."

태진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내가 곁에서...그녀가 생전에 해주지 못한 사랑을...해 줄게요."

진우가 몸을 일으켜 태진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 가슴에서...그녀의 심장...그리고 진우의 심장이 느껴졌다.
이토록이나 태진을 사랑하는 그들의 심장....
그들의 염원...

그렇게 안타깝고 힘겨운 사랑은 서로의 고동과 체온을 느끼면서 시작되었다.

불규칙한 숨소리가 가슴에 닿았다.
진우의 몸을 더듬는 태진의 손길은 따듯하지만 항상 불안하기만 하다.
죽어버린 여자의 심장에 반응하면서...그러면서도 자신의 앞에 있는 청년을
사랑하면서....태진은 흥분과 긴장으로 인한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쉬었다.
그 숨소리를 가슴에서 느끼면서...진우는 처음으로,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진의 어리숙한 손길이 간지러워 웃음을 터뜨렸지만 웃고 있지 않았다.
이토록 손길 하나하나,눈길 한번한번이 괴롭고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이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태진의 입맞춤이 꿈처럼 행복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가슴을 더듬는 그의 손길에서는,진우가 절망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침묵이 너무도 무서워서...이렇게 서로를 안고 있다가 저 사람이 죽어버릴 것 같은
공포가 느껴져서 무언가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을 맴돌다 진우의 중심에서 움찔하던 그 손길에서는,진우가 비통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태진은 안아주었다.진우를...끝까지 거부하지 않고...
예전과 같은 폭력도 없다.오직 다정하고 상냥하게...태진은 진우를 안아주었다.
그러면서 흥분을 해갔고 흥분으로 인해 얼굴이 벌개졌다.진우는 더 이상 위험하다고
느껴졌다.진우는 아팠을 때 흥분을 하면 곧바로 고꾸라지고는 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태진은 흥분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진우가 좋아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태진은 흥분을 하는 것이다.

"태진씨!"

진우가 태진을 끌어안았다.

어떻게 하면 좋지?이 상황에서....
진우는 그저 태진을 꼭 끌어안고 불안한 얼굴로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줄 뿐이었다.

"왜 그래?"

태진의 목소리가...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에 끊기듯,들려왔다.

진우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남자와 경험이 없는 것은 태진도
진우도 마찬가지이고,지난 번에 서로 관계한 것도 태진에게는 홧김,진우에게는
강간이었기 때문에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저기...천천히...하자구요..."

말을 하면서 왠지 부끄러워 얼굴이 벌개졌다.

"...응,그래...그러자."

태진은 진우가 자신의 몸 상태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다.희연이 살아있을 때도
그다지 관계를 한 적이 없었다.하물며 남자와는 더더욱 없다.그런 쪽으로
흥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태진은 또 한번 자신의 몸에,심장에 절망하고 원망한다.
아픈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원망하면서 몸이 아픈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병들어버린다.

살짝 다시 입을 맞추었고 입술에서 목으로,목에서 어깨로,어깨에서 가슴으로
태진의 입술이 내려왔다.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았다.
서로의 손이 서로의 민감한 곳에 닿았고 그렇게 서로를 애무해나갔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리고 있었다.



여전히 태진의 숨소리는 거칠고 고르지 못하다.
그런 상태로 잠든 태진을 내려다보며 진우는 그만 비참해지고 말았다.

심장이 낳거든 건강한 여자를 만나 건강하고 밝게 사랑하려고 했었다.
그런데...진우는 이 남자를 사랑해버렸다.
과거의 자신처럼 심장을 앓고 있는,심장의 여인이 사랑했던 이 남자를...

이 남자도...평생을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눈을 뜨면서 잠들기 전까지 계속 아팠을 것이다.어느 날이라도 변함이 없이
아픈 몸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나 아파서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일도 있었을 것이다.
아침이 되어도 아픈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차라리 눈을 감고 잠든 채로
죽어버리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정말로 죽게되면 어쩌나 불안해서 다음 날 아침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는 안도를 느낀 일이 분명히,있었을 것이다.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부럽다고 동경하면서 또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스스로 나무랐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약하게 보여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 일부러 더 강한 척 하려고
허풍을 떨었을 일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아픔...
그것은 아직도 진우의 마음을 무겁게 짖누르고 있었다.

완치가 되면 이왕에,아팠던 기억은 전부 잊어버릴 생각이었다.
건강한,보통의 삶을 동경했던 진우는 아팠던 기억을 전부 지워버리고
그렇게 살 생각이었다.

"....당신이 낳으려면...그 수밖에는 없겠지?"

깊히 잠들어있는 남자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진우는 나즈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남자의 여자...희연이 겪었을 고통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부모도 똑같았을 그 감정....

환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보호자인 그들도 걱정을 했을 것이다.
매일 매일...

외출을 한다고 하면 어디에서 혹시 쓰러지지는 않을까,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걱정을 하고 잠든 순간에도 자는 도중 숨이 멎어버리는 것 아닐까 노심초사하여
새벽에도 깨어나 자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러 왔을 것이다.
건강해지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태진과 살았던 희연도,아팠던 진우의 부모도....

"...그 수 밖에는...없겠지?"

진우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리고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잠들어있는 태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진우가KONOS에 찾아간 것은 태진이 진우의 끈질긴 설득에 의해 병원에
입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진우가 오랫동안 입원을 하고 있었던 병원에서는 태진을 보자마자 이식이 아니면
절대로 완치 불가능이라 했다.그 이식마저도 성공할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신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진우는 태진의 완치를 확신했다.
그에게 이식될 심장은 바로 그의 죽은 부인의 심장이니까...

KONOS를 찾아가면서도 진우는 몇번을 망설였다.그렇게 되자 부모의 얼굴이 눈 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애써 낳아주었고 길러주고 또 아픈 심장까지 낳게 해주었는데...
자신은 그 모든 것을 깨버리려하고 있었다.

동대문 운동장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와 조금 걸으니 국립의료원이 나왔다.
진우는 순간 망설였다.

-들어가게 되면...정말 모든 게 다 끝이겠지?키워준 은혜도 무시하게 되는 거고...
이렇게 낳게 해주었는데...이 심장은 이제 내 건데...나는 왜...-

진우는 그날 결국 그렇게 돌아오고 말았다.

"어디 다녀와?"

"아..조금...심심했죠?"

"이런 병원에 넣어두고 당연하지!"

"하하...식사는 잘 했어요?"

"음..."

"...낳으면...좋겠다."

진우는 자신 스스로의 가식에 그만 진절머리가 나고 말았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순간,진우는 고개를 들어 태진을 보았다.태진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우는 그런 태진의 표정을 보자 그만 또 어쩔 수 없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태진은 이미 자신의 몸 상태를 충분히 알고 있다.
또 그럴 정도로 혹사를 시켜왔다.희연의 곁에 가기 위해서...
혹은 희연에게 속죄를 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었다.


진우는 태진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태진은 그런 진우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다.

그 다정함이 진우의 마음을 굳히게 한 것인지 모른다.
그 어떤 욕을 나중에 듣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이제는 바꿀 수 없을 거라고...
그 누구라도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마음을 굳혔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요즘 어딜 그렇게 다니니?민하와 헤어졌다는 게 사실이야?"
모친이 모처럼 늦잠을 자는 진우를 깨우러 왔다.

"어?어..."

"민하도 꽤 괜찮은 애던데..."

"...헤어진 지 오래 됬어."

"그래?"

"엄마."

"응?"

"...아들 한명 더 키울 생각 없어?"

"뭐?너...설마..."

"...무,무슨 생각 하는 거야?"

모친의 시선이 날카로운 것을 보고 진우는 당황했다.

"혹시 민하와 헤어진 것이 그 이유니?"

"어?"

진우는 그만 속이 들켜버린 것 같아 얼굴이 벌개졌다.

"그,그런 거 아냐."

"그런데 갑자기 왠 형제타령이야?네가 애도 아닌데...동생을 낳아주긴
이 엄마는 너무 늙었다."

"...좋은 형이 있는데...혼자 살거든..."

"얘는...그런 사람이 한 둘이니?혼자 사는 형이라고 형제로 들이면 한도
끝도 없겠구나."

"그런 거...아니니까...정말 좋은 사람이야.엄마도 보면 마음에 들어할 거라구."

"...누군데 그러니?"

"좋은 사람."

아마도 모친은 진우가 그를 대신해 심장을 기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진우는 물론 태진을 용서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진의 인식을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됀다.
게다가 태진이 진우의 형이 된다면 아마도 모친은 진우의 심장기증 신청서를 내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진우에게는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생각할 수 있는 여유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원래 이 심장....
진우의 몸 속에 있는 이 심장의 본래의 주인은 그 남자의 것....
진우가 사랑하는 태진의 것이다.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한다.
진우가 태어나서 태진을 사랑할 수 있도록....아마도 이 심장이 인도하기 위해
시간을 벌어준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봐요,엄마."

"생각해 보라니,얘 생각하기만 해도 징그럽다.이 나이에..."

"엄마 나이가 어때서?"

진우는 넉살 좋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진우의 모친은 그 웃음 뒤에 알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20여년을 앓던 심장을 완치해 별 탈 없이 생활하던 아들이,그 심장을
또다른 누군가에게 줘버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넉넉한 집에서 태어났어도 뇌사자가 없어서 수술을 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심장으로 태어나게 한 것을 무척이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진우 역시 안다고 생각하니까...

"오늘도 나갈 거니?"

"응...오늘도 늦을 거에요."

진우의 모친은 진우를 살리는 것에 급해 다른 누군가가 죽는다는 일은
그다지 신경에 쓰지 않았다.그것이 잘못이었다면 잘못이었을 것이다.
진우는 모친 이상으로 그 일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
그런 진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진우의 죄책감이,그 불효가 전부 무마되지는 않겠지만...

진우는 다시 한번 KONOS로 가서 이번엔 확실히 장기등이식대상자선정승인신청서를 받아왔다.
장기를 이식하는 사람측에서 이식 받을 사람을 특별히 지목해서 기증을 하는 신청서이다.
그러니 자칫,이 심장이 다른 누군가에게 갈 일이 없도록....
진우는 마음을 굳혔다.



태진을 만나러가는 길이 너무도 길었다.

빨리 태진을 만나고 싶었다.눈물이 앞을 가렸다.
사랑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죽기 전에 사랑이란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그래...이 심장이 저 사람에게 인도해 준 것이다.
사랑을 해보라고....

세상에는 평생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생을 다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물론 민하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하가[여자친구]였기 때문이다.
그저 동급생으로써 봤다면 민하를 좋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태진을 만나고서...그 남자에게 이상하게 반응하는 자신이 무서워서 서둘러
미팅을 따라다녔고 그러다가 만난 친구...
미팅 중에서 제일 좋은 느낌을 주었던 친구....
그래서였을 지 모른다.

하지만 태진은 다르다.
심장이 이유라고는 해도 진우는 태진을 보면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다.
다른 누구에게도 가져보지 못했던 감정을 태진의 앞에서는 가져보았다.
그 누구와의 만남에서도 설레이지 않았던 기분을 태진의 곁에서는 느껴보았다.

-그러니까...그것으로 된 거야...그것으로 고마운 사람이야...-

계속 눈물이 시야를 흐리는 건 부모때문이었다.
부모를 생각하면 이런 무모한 짓,그만 두어야한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 망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눈물이 났다.
부모를 등지고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자신의 부모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너무도 미안했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자 이제는 멈출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곧바로 병실까지 뛰어갔다.

그 남자가 있을 것이다.
조금은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혼자 있어서 심심했다는 투로 말하겠지.
그리고 가끔은 또 가슴 아픈 표정도 보여주겠지.그러면서도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지을 거야.
그 남자가....
사랑하는 그 남자가....



"태진씨!"

태진은 진우의 커다란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신문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래?뛰어왔어?"

"...응...응...나 뛰어올 수 밖에 없었어!당신이 보고 싶어서...너무 보고 싶어서...!"

태진은 얼굴이 벌개져서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 진우를 보고 피식-웃었다.

"어제 밤 늦게까지 있고서는..."

"그래도...또 보고 싶었어...보고보고 또 봐도....계속 보고 싶어..."

태진은 못말린다는 표정을 하더니 팔을 벌렸다.

-아...-

이 남자는 받아주는 것이다.자신을...그리고 이 심장을...
받아줄 것이다.

"태진씨!"

진우는 태진에게 달려와 그에게 안겼다.
커다란,그리고 삶에 지친 거친 손이 진우의 머리를 조용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 쓰다듬는 손이 너무도 부드럽고 안타까워서 진우는 또 울고말았다.

진우는 아마도 병실이 개인병실이었다면 태진에게 더 매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병동...즉,다른 환자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서둘러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러나 민감한 환자들만이 있는 곳에서 둘의 사이에 대한 여러 추측과 함께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결국 진우는 태진을 다시 퇴원시키고 집에 머물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부주위함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진우는 다시 한번 이 남자에게 상처와 피해를 준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진우는 집에서 예전에 자신이 쓰던 산소호흡기며 혈압측정기 등 의료기구들을 가지고 태진의 집으로 왔다.
그렇게 자신에게 마음을 쓰는 진우가 태진은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어째서 자신의 몸은 이토록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만 하고
힘들게만 하는지..한 없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진우는 학교 등록금으로 태진의 약값을 냈고 또한 부모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태진의 생활비에 썼다.
태진은 병원을 다녀온 후로 몸을 조금만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해서 진우의 마음을 졸이게했다.

진우는 어느 날 학교에 찾아가 의과에 다니는 사람에 말을 걸었다.

"저...죄송합니다만..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응?뭐지?"

안경을 끼고 꽤나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쭈뼛대는 진우에게 건성으로 시선을 보내고 대답했다.

"...뇌사에...걸리려면...어떻게 해야하나요?"

그 말에 시종일관 진우에게 관심을 두지 않던 남자가 진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뇌사?"

"...네."

"...그걸 왜?"

"이유까지..아셔야 대답해 주실 건가요?"

"...뭐,남의 일에는 관심 없지만...뇌사에 걸리는 법이라니,그런 건 없어.
뇌사가 될 확률은 극히 적으니까 말야..사고로 뇌를 먼저 다치거나,뇌에
병을 앓고 있다거나...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뇌사에 걸릴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지."

"...그,그래요..."

"...자살할 생각이라면 그만 두는 게 좋아,젊은 친구."

남자는 쓸쓸한 표정으로 뒤돌아서던 진우의 등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이 방법밖에는 없는 걸요...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진우의 목소리는 작아,남자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는 다시 한번 말했다.

"자고로 자신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없는 법이지."

"...."

진우는 그 말에 남자를 뒤돌아보았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자신의 목숨을 대신해 다른 이를 살리려한다는 것을...

"...하,하찮게 여기지 않아요!그러니까 이러는 거라구요!"

진우는 그만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정말,태진의 여자는 눈물이 많았나보다.그러면서도 태진의 앞에서는 한번도
약한 모습 보인 적 없었겠지.
태진의 여자...희연은 자살에 성공했다.자살에 성공하고 뇌사자가 되었다.
그녀가 원하는대로...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진우는 이제껏 목숨을 하찮게 여긴 적이 없었다.더우기 자신의 목숨은...
자신때문에 누군가가 죽는 일은 깊히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목숨을 하찮게 여겨서는 아니다.
자신이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누구보다도 애착이 있었다.
하지만...그것은 어긋난 애착이었고 빗나간 바램이었다.
한 가정의 소중한 딸이자 아들일 수도 있고,또는 하나밖에 없는 가장일 수도 있으며...
희연처럼...한 남자에게 있어 오직 하나 뿐인 존재일 수 있다.
진우가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목숨이 필요했다.
그러나 살기 위한 욕구가 강했던 진우는 그런 것을 그만 망각하고 말았고 망각해야만 했다.

"아무 것도..아무 것도 모르면서...!"

진우는 남자에게 매섭게 몰아부치고는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살릴 거야!결코,내 목숨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야...누구보다 살고 싶으니까...
그 사람과 살고 싶으니까...!-

"너 요즘 외박이 너무 잦은 거 아니니?"

외박을 하겠다고 집에 전화를 하니 모친이 한마디 했다.

"미안,엄마.하지만...일이 있어서 그래."

"..알았다.밥은 꼬박 잘 챙겨먹고,약도 거르지 말아라.널 살리기 위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걸었으니까말이다."

"...알아요."

모친의 말이 오늘따라 아프게 들린다.

-널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진우가 심장이 낳기 전에 종종 부모가 했던 말이다.
그 때에는 빨리 낳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했지만,이제 그 말은 진우에게 더 없는 족쇄가 되고 있었다.

"..희연씨..부탁이야...어떻게 해야..내가 저 사람을 살릴 수 있는지...
알려줘요...내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당신은 해냈잖아...그러니까...
나도 할 수 있도록...부디..."

진우는 도서관에서 온갖 의학책이란 책을 다 살펴보았다.혹시나 뇌사로 죽을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흘렀을 무렵이었다.

"태진씨,오늘 외식할까?"

"외식?"

"응.몸 괜찮으면...그러니까...나올 수 있으면..."

"알았어.갈게.어디로 가야되?"

"응,나 알바하는 카페로 와 줘요.거기 근처에 맛있는 집이 생겼거든."

"그래...몇시까지 갈까?"

"6시."

"...아르바이트,너무 무리해서 하지 마...."

"...응."

태진은 가끔 진우의 볼을 매만질 때가 있었다.희연에게도 해 주었을 것이다.
저 다정하고 상냥한 손으로...그녀의 볼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져 주었겠지...
죽은 사람을 질투해봐야 소용 없는 것을 알지만 진우는 계속 못된 생각을 한다.

진우가 태진의 입술에 가볍에 입을 맞췄다.

태진은 희연과는 다르지만 어딘지 희연을 연상케하는 진우의 입술에서 다시 괴뤄워졌다.
확실히...자신은 아직까지도 진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우가 솔직하고 순수하게 나오면 곤란해진다.

"...무리하지 말고,천천히 나와요.알았지?무리일 거 같으면..전화하고요."

"..무리 아냐."

진우는 가끔 태진을 너무도 아프게 바라볼 때가 있었다.
희연이 죽기 전에도 저런 시선을 한 적이 있었다.
희연은 죽기 전에까지 자신에게 한결같이 다정하고 착하게 대했다.
하지만 가끔,어딘지 모르게..낯설게 느껴져서 태진은 희연이 떠나려한다고 생각했다.
그 떠나감이...그런 식인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근래 들어 태진은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진우가 희연과 같은 식의 공허함 가득한 눈빛을 하고는 했기 때문이다.

"진우야."

태진은 집을 나서는 진우를 불러 그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나는,네가 살아있는 것이 좋아.이제 더 이상...죽은 사람 생각하며...괴로워하긴 싫다."

태진의 말에 진우는 너무도 미안했다.
느끼고 있는 것일까...그러면 안돼는데...
자신이 죽기 전까지,이 남자는 모르고 있어야한다.
이 남자만은...

"하하,태진씨도 무슨 소리야~나 알바가는 거지 죽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진우는 애써 환하게 웃어보였다.태진은 그래서 더욱 불안했지만 진우의 웃음에 자신도 따라서 담담한 듯한 표정을 했다.

"그럼 다녀올게요.알았죠?무리될 거 같으면 전화해요.그냥 먹을 거 사가지고 올게."

"...그래."

진우가 등을 보이며 나가는 모습이 너무도 위태롭게 보였다.
태진은 빨리 끝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저 아이를 더 이상 괴롭게해서는 안됀다고...
이제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해서는 안됀다고...
그러기 위해 자신의 부질한 목숨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희연아...도와줘...더 이상...내가 사람을 상처입히지 않도록..."

태진도 진우도 모두...죽은 희연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희연에게 의지하고 듣지 못하는 그녀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진우씨."

"네,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즘 멍하게 있는 때가 많아."

"아...아뇨,죄송합니다."

"테이블 3번 배달."

"아...네."

윗 사람으로부터 커피와 파르페가 담긴 잔을 받아들고 진우는 테이블로 갔다.

"...민하야..."

"...진우씨..여기 일 해?"

"어?어,어..."

"...그렇구나.그런데 요즘 통 학교에서 못보겠는데...휴학했어?"

"응?어..어..."

"왜?몸이 아파?"

"아냐...그런 건..."

"...그래...다행이다,난 아픈 줄 알고...걱정했지뭐야..."

민하는 자신과 헤어진 후에도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었다.이렇게 착한 여자인데...
이 여자를 사랑해주지 못했다.
아마 자신이 죽으면 이 여자도 울겠지...상처입고...

"여긴..어쩐 일로..."

"아,최근...사귀는 사람이 있거든...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해서..."

"..아..다행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사람?"

"...응.좋은 사람."

"..그래,민하는 착한 여자니까...그럴 거라 생각했어."

"...."

민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좋은 사람을 만나 다행이야.나는 너에게 좋은 사람이 되 주지 못해...
진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민하의 어두운 표정을 애써 외면했다.

"민하야."

"아,오빠..여기.."

익숙한 남자의 음성에 진우는 뒤 돌아보았다.남자는 일전,자신이 찾아갔던 의과의 남자였다.

"어...아는 사이였어?"

"응?응...내 예전 남자친구..."

"...그래?반가워요.다시 정식으로 인사합시다."

"만난 적 있어요?"

"응,일전에 나에게 이상한 걸 물어보더라구."

"이상한 거?"

"저기....전 성 진우라고 합니다."

"응?아,난 오 건태요."

"민하야,이거...내가 쏠게."

"어?그래도 돼?하지만...진우씨.."

"괜찮아.설마 이 정도 대접도 못하는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진우는 남자가 괜한 말을 할까 싶어 급히 화재를 돌렸다.

"고마워,잘 마실게."

"나도 고맙습니다."

건태라는 남자가 눈웃음치며 말했다.

그 때였다.

"진우..."

"태진...씨..."

태진은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다가 태진을 보고는 어색한 표정을 보이는 진우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저 분..."

"아,태진씨...저 쪽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어줄래요?생각보다 일찍 왔네.
나 일 끝나려면 좀 더 있어야하는데..."

"...응..."

민하는 갑자기 여자말투가 나오는 진우를 보며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저 남자...기억하고 있다.진우가 예전 아는 사람이라며 자신과의 데이트를 무산시키고
병원에 데리고 갔던 남자였다.
어째서...?

"여자 말투로군."

건태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뭐라구요?"
진우가 매서운 눈으로 물었다.

"아니,저 남자에게 대하는 태도말이야.왠지 민하가 날 태하는 태도와 같다고...느껴져서 말야..."

진우는 그만 얼굴이 달아오르고 말았다.

"뭐...남의 연애사에 관심 없지만...저 사람 많이 아파보이고...만일 저 사람때문에 뇌사..."

"이봐요!당신과 상관 없는 일이잖아요!"

진우가 서둘러 그의 말을 막았다.
진우의 큰 소리에 숍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진우에게 쏠렸다.

"...남의 연애사에는 상관 없지만...예비 의사로써..양심적이지 못해서 말야..."

남자는 궁시렁대더니 민하에게 일어나 나가자고 재촉했다.

그들의 대화를 전부 들은 것은 아니지만 태진은 그런 진우를 보며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다.

분명히...진우도 태진도 보통의 남자들처럼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진우가 변한 것은
태진의 일에 말려들면서 부터일 것이다.
착하다는 여자친구와 헤어져 자신에게 왔다.
그것이 전부 자신의 탓으로 생각되었고 그렇게 생각하자 너무도 괴로웠다.
이 심장은...태진의 숨을 멎게 해주지 않는다.
죽을 만큼 괴롭고 아프게는 하면서도...도저히 자신의 숨을 멎게 해주지 않는다.

"..개 같은..."

스스로에게 욕을 하고나자 눈물 한방울이 꼭 쥔 손 위로 떨어졌다.

"건태 오빠,진우씨에게 왜 그렇게 말했어?진우 오빠 그런 사람 아냐!"

"그런 사람 아니라니?"

건태 손에 이끌려 숍을 나온 민하가 건태를 몰아부치자 남자는 눈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

"...진우씨...호모같은 거..아니라고..."

"뭐...호모라서 나쁠 건 없잖아.어차피 너와는 헤어졌고..."

"그러니까,그런 사람 아니래두!"

"하지만 너도 아까 봤잖아.네가 지금 나에게 화내는 거...그래서 아냐?
너도 불안하니까...들춰낸 내가 미운 거야.불안해하고 있는데 내가 들춰내니까..."

"...밉다니..그런 말..."

"...아직도 저 아이 사랑하는 거라면..그만 두는 게 좋을 거다.저 애는..
자기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으니까..."

"...오빠가 진우씨의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건데?!"

"아~너는 그렇게나 잘 아나보지?현실을 직시하면 저 녀석은 호모야.네가 부정하려고 해도
사실은 사실이다.사람에 대해 알려거든 그 사람이 처한 현실을 우선 받아들여야지!"

예전의 남자친구...민하는 자신 스스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진우를 좋아하고 있었다.
진우에게서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나서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의 기억에 멋진 여자로 남고 싶어서...민하는 헤어져주었다.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이라 생각했다.
구차하게 매달리는 것은 흉하다고 생각되서...여자가 생긴 것이라면 자신이 깨끗하게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민하는 며칠 밤을 울며 그 사람 생각을 했다.
이미 남자의 마음에 자신은 지워졌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슬펐다.
하지만 정말로 좋아했기 때문에 헤어져줄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진우의 현실은 민하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이별의 원인은 남자였고,그렇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로 빼앗기지 않았을텐데...
이미 늦은 것일까...

"...날 계속 사귈 마음이 있다면...다 정리하고 와라.그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어.
하지만,그런 흐지부지한 마음의 여자친구를...곁에서 봐줄 만큼 나 좋은 남자 아니다."

"...."

건태는 민하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여자친구...였지?"

식당에 왔지만 둘 다 말이 없었고 너무 어색해서 태진은 괜한 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네."

"...괜히 일찍 갔다..."

"그런 거 아니에요.그 애랑..끝난지 오래됬고...아까 봤잖아요.그 애에겐 다른 남자가 있다구요.
뭐에요,질투하는 거야?"

"질투는~"

진우가 장난스럽게 짖궂은 질문을 하자 태진은 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하하...괜찮아요,질투가 어때서~나 한번도 질투받아 본 적 없는데...
이야...이런 기분이구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진우의 쾌활한 웃음소리에 태진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다.

"저기...오늘은..."

"응?"

"집..."

"아,집에 갈려구요.외박이 잦다고 집에서도 한 소리 들어서.."

"..그래..."

왠지 싫은 기분이 들었다.진우에게는 돌아갈 가정이 있다.돌아가면 따듯하게 반겨줄 부모가 있는 집이 있다.
그런 아이를 자신의 삶에 옭아매고 있는 것 같아 싫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럴 줄 알고 준비해왔지~"

"응?"

"지갑 줘 봐요."

"...?지갑?왜?"

"얼른요~"

태진이 마지못해 지갑을 내놓자 진우가 지갑을 열고 작은 주머니에 자신의 사진을 꽂아넣었다.

"이제 내가 태진씨 집에 없어도 이거 보면서...외로워하지 말라구요."

"뭐냐,이게~어린 애들도 아니고."

"아하하하.왜~좋잖아~?"

"좋긴...창피하게..."

"너무해...난 가장 이쁘게 나온 사진 고르려고 앨범을 다 뒤졌단 말에요.."

"쓸데 없는 짓은..."

말은 그렇게 하지만 태진은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가질 수 있게 되어 기뻤다.
희연의 사진은 지금,그에게 괴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진우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사람의 사진이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식사를 한 후에는 태진의 집으로 먼저 갔다.태진이 조금만 걸어도 힘들어했기 때문에
무척이나 느리게 걸어야했다.집이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서 더욱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태진을 부축하듯 그의 팔짱을 끼고...아니,어쩌면 반대로 그의 팔짱을 끼듯 부축을 하고 언덕을 올랐다.

"잠깐만,태진씨.여기서 기다려."

집에 도착하자 진우는 현관에서 태진을 세워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뭐하는 거야?"

"내가 당신을 맞아줄려고."

"뭐?"

"거기 계속 서 있을 거에요?"

태진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문을 두드렸다.

"네에~다녀오셨어요?"

진우가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문을 열었다.

"뭐야~"

태진은 엉뚱한 진우에게 웃어보였다.

"언제나 당신이 문을 열어주잖아.집에서 누군가가 기다려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데~기분 좋지?"

"그래,좋아 죽겠다."

"어,좋은 건 좋지만 죽는 건 안돼."

"...하하..."

태진은 진우의 볼을 어루만지고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갈게요."

"...그래.잘 가."

"응,잘 자고...내일 아침 일찍 올 게요."

"...그래."

진우가 아쉬운 듯 문을 나섰고 진우가 멀치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고독이 밀려왔다.

집 앞에 도착한 진우는 민하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민하야...여긴 왠 일로..."

"...할 말 있어서..."

"...그럼 공원에 갈까?"

"...응."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어른들에겐 공원이 되는 작은 터로 가서 둘은 벤치에 앉았다.

"...저기..진우씨...나...확인하고 싶은게 있는데...아니,확인이라기보다...알고 싶어서..."

진우는 민하가 무엇을 물어올지 알고 있었다.

"뭔데..."

하지만 자신의 입으로 먼저 말하기엔 아직 용기가 부족했다.

"...그 남자...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냐니?"

"...시치미 떼지마.내가 뭘 묻고 있는지 알잖아.어떤 관계야?"

"...."

"아니지?그...사귀...는 거..아니지?"

진우는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맞아,사귀는 사이야."

"...진우...씨..."

"...미안해.이런 남자라서...미안해...상처주고...떠나게 하고..또 상처줘서 미안해..
미안한데...나도 어쩔 수가 없어...나도...어쩔 수가 없었어..."

"...어째서..?어째서 남자야?나...여자라고 생각했는데...진우씨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여자라고 생각했는데...어떻게...남자야?"

"....미안해..."

"지금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니야!"

민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자고 여기 오고 진우씨에게 물어본 거 아니라고!내가...
내가 그렇게도 부족했어?그랬어?남자를 사귈 정도로...내가 진우씨에게 부족했어?"

"그런 거 아냐...아니야..."

진우의 마음이 갈갈이 찢어진다.
여자가 알기 전에...그 전에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민하와 헤어지고 나서 끝났다고 생각했다,진우의 마음에서는 민하가
차지하는 자리는 더 이상 클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여자...민하에겐 그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민하의 마음엔 진우가 차지하는 자리가 컸고 헤어졌다고 해도 그가 신경이 쓰였다.

"그거...나쁜 짓이야...진우씨 부모님은 알아?진우씨가..남자를 사귀는 거 아냐고...
빨리 그만 둬야되...진우씨 외아들이잖아.부모님 생각은 했어?그거...
나쁜 짓이야...그 사람이 진우씨에게 무슨 짓 한 거지?그런 거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이번엔 진우가 소리를 질렀다.

"아닌데 왜 그래?!진우씨...나랑 사귀었잖아...난 여자였고...진우씨..정상이었잖아...그런데...그 남자에게 무슨 짓을 당한 거지?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그래,네 말대로라면 나 정상 아니야!나 정상인 적 한번도 없어!
몸도 태어나면서부터 심장이 기형이어서 정상일 수 없었어!
유치원에 잠시 다녔던 적이 있었어!그 때 그런 말 들었지,난 병신이라고!
그래,그래!나 병신이야!!몸도 마음도 전부 병들었다고!
하지만 어쩌라고!!!이렇게 태어난 걸!!!나라고 좋아서 병 든 심장으로 태어난 거 아니고...그 사람도 마찬가지야!
나라고 부모님 생각 하지 않아서 그 사람 사랑하는 거 아니라고!!"

진우의 절규에 민하는 그만 절망하고 말았다.
민하는...아팠던 진우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사귀던 시절 항상 노력했었다.
민하의 어린 시절,같은 반 급우 중 병든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를 친구들은 병신이라고 놀려댔고 민하는 방임하고 있었다.
결국 그 아이는 얼마 가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했다.학교에 다니기 싫다고 울었던 것을 보았다.
나서서 그 아이를 돕거나 놀려댄 것은 아니었지만 돕지 않았던 이상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느꼈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조심을 했다.

"...사랑이..동정심만으로 되는 거 아니라는 거..알아...하지만...할 수 없어...
난...그 사람이 살기를 원하고...그래서...그래서 사랑하는 거야...
그 사람이 살기 원하기 때문에..사랑하는 거야..."

민하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미 떠나버린 남자의 마음을 돌려잡기엔 늦었다는 것을 알지만 정말로,조금도 없는 것이다.이 남자의 마음에 자신은...

"...어째서..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을까...차라리..조금 덜 사랑했다면...좋았을텐데..."

민하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아팠다.

"...진우씨에겐...헤어진 후로 나는..잊혀져도 좋을 여자였겠지만...
나에겐 아니었거든...나도..당신과 같은 크기..같은 깊이로..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민하의 떨리는 목소리가 마음에 아팠다.

"...그랬다면...나 혼자 아파하지 않고...좋았을텐데...."

민하는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울고 말았다.

진우에게 있어서는 그저 좋은 여자친구...
그러나 민하에게 있어,진우는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렇게나 커다란 차이는...이미 멀어져 벌어진 사이만큼이나 깊고 아픈 것이었다.


"...그래서 어쩔 거야...?"

진정을 한 후에 민하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쩔 거냐니..."

"...비밀로 할 수 없을 거 아냐.부모님에게도 언젠가...들키게 될텐데..."

"...글쎄..."

"...충격받으실 텐데..."

"...그렇겠지..."

진우의 대답은 담담했다.이미 죽음을 각오한 진우로써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뇌사에 걸리는 방법만 안다면 당장이라도 죽음의 길을 선택할 진우였다.

"...낮의 선배는..."

"...친구가 소개시켜 주었어...진우씨에 대한 내 마음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 준다고..."

"이야...멋있는 남자네...나하고는 비교가 안됄 만큼..."

"...하지만..나에겐...진우씨가...가장 멋져..."

"...그런 말 하면...그 사람에게 실례잖아..."

"....나...정말....희망 없는 거지...?"

"...미안해..."

민하의 우는 얼굴을 보자 다시 미안한 마음과 함께 태진이 보고싶어졌다.

"...멋진 여자로 남고 싶었는데...헤어질 때도...멋진 여자로 남고 싶어서...
구차하게 매달리지 않으려고...했는데..."

"..넌 나에게 이써 첫 여자였고,가장 멋진 여자였어."

민하는 그 말에 애매한 미소를 보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안녕을 말하고는 돌아섰다.

민하가 사라진 길을 보면서,그녀가 사라진 것을 보면서 진우는 태진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둘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택하면 좋겠지만...아마도 없을 것이다.
부모에게 불효를 할 것이고 좋아하던 여자에게 상처를 주었으니,그렇게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다.

살아있을 때...많이 봐야지않겠나...
그 사람을...사랑하는 그 사람을...

태진의 집에 도착하자 꽤 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태진씨!문 열어요!!나야!!!"

잠시 후에 불이 켜지고 문이 열렸다.

"안갔어?"

"...당신과 살고 싶어..할 수 있다면...당신과 살고 싶은데..."

"진우?"

진우는 감정이 격해져 태진을 끌어안았다.

태진은 그런 진우를 또 다시 다정한 손으로 안아주었다.

진우의 다정한 손길이...그 수줍음에 가득찬 손길이 태진의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태진에게 안기어 있으면서 진우는 태진을 진정시켜주려고 그의 등을 손으로 쓸어내 주었다.

어째서...이런 사랑을 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원인을 따진다면 희연의 심장때문이겠지만 그것이 사랑의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째서...자신이었을까,이 사람의 심장을 받은 사람이...

생각하면 대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부족함 없이 사랑해야한다.
그렇다고 해도...이 사람을 또 다시 혼자 남겨두는 것에 대한 죄 값이
덜어지지는 않겠지만...

서로 한 이불 안에서 체온을 나눌 수 있을 때...마음껏 전달해야한다.
당신때문에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그 방법을 택하려한다고...

서로의 마음을 전하기에도 모자람이 있는 시간이지만...
전해주어서...자신이 후에 죽고 난 후에 못난 생각은 하지 않도록..
충분히 전달해주어야한다.

"사랑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힘겨운 고백이 터져나왔다.

태진의 등을 끌어안으며 진우는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사랑해....-


오직 그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진우의...태진의 뇌리를 채우고 있는 말은 오직 그 뿐이었다.


"일주일 있으면..."

"응?"

사랑을 나눈 후 태진이 이불 속에서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일주일 후에...희연이 기일이야..."

"아.."

그 말을 하자 진우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아마도...이 여자는 태진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절절한 것일 것이다.
그것을 고스란히 심장으로 느끼면서 진우는 또 한번 괴로워졌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지만...함께 할 수 없었다.
남자를 살리기 위해서...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서...

이 남자때문이 아니라,이 남자를 위해서...

그 마음을 이제는 절실히 알고 있는 진우는 다시 한번 여자와 태진과의
사랑을 심장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도 같이 있어줄게요.그래도 되지?"

"응?으,응..."

어색한 대답때문에 진우가 다시 한번 상처를 받았다.
자신에게 이식이 된 후로도 이 심장은 한번도 자신의 것인 적이 없었다.
오직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심장은 그렇게나 강한 신호를 보냈고 이 남자를 만나고 난 후에는
이 남자에게 돌려주어야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또 괴로웠다.
깨닫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깨닫고 난 후에는 이미 자신에게 있어서도 사랑이 되어버렸으니까...

"...나...희연씨에게 감사할 것이 있으니까..."

-당신을 사랑하게 해 준 것....정말...감사하니까...-

태진은 진우의 볼을 만지며 말이 없었다.

"...그런 표정하면...내가 미안하잖아..."

진우의 쓸쓸한 말에 태진이 정신을 차렸다.

"아..."

진우는 태진의 목을 끌어안고 짧게 키스했다.

깊은 키스도 할 수 없는 연인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래도 좋았다.그저 좋아서...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진우와 태진은 거기까지였다.
그 날,진우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태진의 집에 가자 진우의 모친이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너,이게 무슨 짓이니?응?네가 대체...."

진우의 모친이 달려들어 그의 가슴을 쳤다.

"어,어떻게 여길..."

"다 아는 수가 있어!"

"...민하야?민하가 말했어?"

"뭐?"

화가난 모친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진우는 아차싶었다.
민하가 그럴 리 없지 않는가....

"...너 민하와 헤어진 이유가...다 이런 거냐?!언제부터냐...학교는 가지도 않고...
등록금은 전부 이 남자에게 쳐붓고 있었던 거냐?!"

태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것을 본 진우의 표정도 역시 일그러졌다.

"엄마,우선 다른 곳에 가서..."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너 심장 고쳐줄려고 우리가 얼마나 노력한 지 알아?!
한번도 너 따듯하게 안아준 적은 없었지만 아픈 네가 부족함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알아?!
그래,이런 남자와 살려고 학교도 그만 두고 아르바이트를 해?!네가 어쩌면...
이렇게도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니?!!!"

"엄마..."

뺨으로 둔탁한 느낌이 전해졌다.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라!네가 날 엄마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짓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모친은 태진을 돌아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나이 꽤나 먹은 사람 같은데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남의 아들 호모로 만들어놓고...
그 애가 학교 등록금까지 빼돌리면서 일하고 있을 때 당신은 집에서
편히 놀고 먹어?!당신이지!!
당신이 우리 애한테 이런 짓 시킨 거지!!!"

"엄마!!!그만해!!!"

진우가 태진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모친을 말렸다.

"그만 하라고?!그런 말이 나와!!!너 이 자식한테 당한 거지?!그런 거지?!!"

"...죄송합니다..."

말을 한 것은 태진이었다.

"...아들을...이용했습니다.제가..변변찮은 남자라..그만...젊은 남자를 보고 혹해서...
돈도 많아 보이고...그래서..."

"태진씨!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호오~젊고 돈 많아 보여서 내 아들을 꼬드겼다는 건가?!내 아들이 어떤 애인 줄 알기나 해?!
5대 독자 외아들이야!!귀한 아들이라고!!!심장병때문에 어릴 때부터 요양하면서 지냈는데...
어디서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엄마 그런 거 아냐!!!"

"하늘이 두렵지 않는가?!더러운 병이라도 옮기면 어쩌려고..!남의 금쪽같은 자식에게...!!"

"엄마!!!"

진우가 날카롭게 외쳤고 모친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잘못 아냐...이 사람...싫다고 그랬는데...내가 달라붙은 거야..."

"진우야..."

모친은 그 말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는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진우는 태진을 보았다.태진은 진우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그런 태진이
마음 아팠다.

"어떻게 이런 일이...어떻게...!"

모친의 통곡소리가 진우와 태진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언젠가 알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그것은 진우가 죽고 난 다음의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게 될 줄은...진우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태진의 인식을 좋게 해두려고 노력했는데...헛수고가 되어버렸다.

"집에 가자,빨리."

"엄마..나..."

"이유가 무엇이든 누가 시작했든 안됀다!넌 우리 집 외아들이야!!알아?!
더럽게 노는 것 이제는 더 이상 허락못한다!!"

더럽다...

모친에게서 들으니 진우는 정말 심장이 어떻게 되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도와줘,희연씨...나,이 사람하고 헤어질 수 없어...희연씨도 그렇잖아...
응?그렇잖아...당신도 헤어질 수 없잖아....-

모친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끌려가는 진우는 마지막으로 희연에게 간청해본다.

태진은 아마 자신의 집 문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것이다.
자꾸 눈에 밟힌다.

-그 사람이 아파하는 거..더는 보지 못하겠지?그렇지?도와줘...희연씨...
나도 그 사람 아파하는 거...싫으니까...내 목숨을 달라면....나 죽어도 좋아.
아니,원래 당신의 심장...태진씨의 심장이잖아...그러니까...모든 것을...
그렇게 원래대로...-

집으로 끌려들어온 진우는 모친의 히스테릭한 잔소리를 몇시간이고 들어야했고 외출금지령을 받았다.

그러나 진우는 모친의 잔소리라든지...그녀의 통곡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로지 태진의 걱정으로 가득 차서..그가 울다가 지쳐 쓰러지기라도 했을까봐...
너무도 걱정이 되었다.

진우는 자신의 방에서 계속 태진이 떠올랐다.

-...유서라도 쓰는 것이 어때?-

어디선가 여자의 음성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잘 못 들었나 싶었지만 그만 펜을 들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버지,어머니...
이 불효자를 용서하세요....이 방법 외에는 없었어요....
전...사는 것이 좋았어요...
정말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살고 싶었어요...그 욕구가 너무 강해서...
누군가의 딸...아들...아버지...혹은 부인이 죽는 일...그런 것 생각해 본 일이 없었어요...살게 되고 나서....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죠...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죽어야해요...그리고...그 사람의
부인이 죽었죠...
그 사람의 부인은 말이죠...자신의 심장으로...이 심장으로 남편을 살리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돈이 더 많았고...코노스에서도 그런 우리를 이식 명단
제일 앞 자리에 두었겠죠...
물론,제가 심장이 많이 아파서 그랬던 이유도 있겠지만...
결국 돈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죽여가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에요..
하지만..부모님에게 저는 감사드려요...
부모님은 절 이해못하시고 용서하지 않으실 지 모르겠지만...
부모님을 사랑하는 만큼...난...내 생명을 사랑하고 있고...그 사람이
사는 것을 원해요...
부디..용서해요...이 못난 아들을 용서해요...
살면서..죽고싶다는 생각을 무척이나 많이 했어요...
죄송해요...
이 사람을 위해...내게 온 심장을 다시 돌려주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용서하세요...-

절절하게 용서를 비는 내용은 꽤나 길었다.
진우는 편지에 그간의 모든 일을 다 적어두었다.
자신의 심장이 누구 것인지...
그래서 자신이 아니면 그 남자를 살릴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렇다고는 해도 죄책감이 있어 구구절절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사랑하는 태진씨...
당신때문이 아니라...당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줘요...
희연씨도 애초 원하던 것...그리고 나 자신이 원하는 것....
진작에 이렇게 되었어야했는데...이제야...이제야 돌려줘서 미안해...
당신과 있고 싶었어....
되도록이면..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서..내 욕심을 부렸어...
나...당신을 사랑해서 정말 좋았어...
희연씨의 심장이 인도해 준 사람....정말로 다정하게 대해주어서...
미안할 정도로 좋았어...
내 심장이라고 생각했지만...결국 아니었어.
당신을 사랑해서...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
당신은 살아 주겠지?
희연씨와 나와 함께...당신은 살아 주겠지...


있잖아...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혼자서 맞이한다든지,누구와 함께 한다든지,그런 거
상관없고서라도....그저 그 아침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생각해 본 적 있어?
매일 아프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생각해 본 적 있어?
없을 거야....당신은 그녀를 잃은 후 삶을 포기했으니까.....
그러니까...그런 일...생각했다고 해도...오래 전 일이라...
당신은 그 감각에 대해 모를 거야...

있잖아....
...나는 굉장히 아팠어.....이러다 죽어버리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니,차라리 죽음을 원할 정도로 아팠을 때도 있었어.....
그런데...

아프지 않고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어....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달리고 싶었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나로써는 달린다는 것에 대한 동경이 컸고...
정말...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어....

그러니까....이식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지.....


이제는 앞으로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실려가거나.....
때마다 입원을 해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까....굉장히
속이 후련했었어.

나는...지금도 죽는 것 보다...사는 것이 좋아.
그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
사는 것 보다 강한 것은 없으니까.....

내가 강해질 수 있는 것은...살아가는 것...그 뿐 이었으니까....

나약한 자신이 싫었어.....
뒤에서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 나에게는 힘들고,그래서 도움을 받고...
그런 자신이 싫었어.....

하지만...그래서 더 살고 싶었어.....
강한 척.....했는 지 모르지....

하지만.....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뿐이었고....
병이 완치되든지,아니면 평생을 심장을 앓으며 살든지,상관 없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데 말야,
그런 생각이 지금 들어....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도우라는 뜻 아닐까....
정말로 내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을 도우라는 뜻 아닐까......

그간 그만큼 나는 도움을 받고 살아왔으니까...이제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닐까.....

이 심장을 바치는 일이 있어도 말야.....

있잖아.....

당신에게 정말 미안해.....

나는.....

내가 살고 싶어서.....
그래...당신의 여자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만들어 미안해.....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어....
내가 살 수 있다는 것.....그것은 아무리 뇌사자라 해도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인데....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서....그 생각은 하지 못했었어...

더구나..그녀는 당신에게 심장을 주고 싶어했겠지.....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에게 이 심장을 주고 싶어했을 텐데...
그래서 당신이 살기를 바랬을 텐데....
나에게 왔어....

이토록이나 그녀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면......

나..그녀의 심장을 받지 않았을 텐데.....

심장을 이식받고서.....당신을 만난 후로....
난 심장이 재발한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어.....
여기가....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내가 당신을 쫓는 거라 생각했는데.....이 심장이 당신을 쫓고 있었어...
당신과 어떻게든 만나고 싶었던 거야....그녀는....

당신이 지나갈 때마다....강하게....강하게 신호했으니까....

이 심장은 말야....당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당신을 알았어....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또....죽은 그녀로 인해 우는 모습을 볼 때는...정말이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어...

주위 사람들이.....잘 견뎌냈다고...살아줘서 고맙다고 해서....
정말 그 말에만 도취되어 그녀가 원하는...그래서 이 심장이
반응하는 당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어...

알고 싶지...않았어...

이렇게 흔들려버렸어....

그런데.....

이 심장 때문인지...아니면 그 내가 그런 것인지....
당신을....사랑하게 되버려서....
나 말야....당신이 살게 되기를 바랬어...

처음으로,나 아닌 다른 사람이....살기를 바랬어....
나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당신이 살기를 바랬어....


응.....

충분히....당신과 그녀의 이야기는 들었어....
뇌사자가 되어버린 후에도 당신은 그녀를 매일매일 안아주고....
다정스럽게 말을 걸어주고....또한...그렇게나 사랑했다고...

정말 그렇게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을 했다고....

그래서...이 심장이 울었을 때....나는 혼란스러웠지.....

이 감각은 누구에 의한 것일까.....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눈물인지....
아니면....나의 질투의 눈물인지.....


당신의 여자를 죽인 나라서...보기 괴로웠을텐데.....

당신에게 아무리 심한 짓을 당해도....당신과 있고 싶었어....



나를 안고서 미친 듯이 울어버린 당신을.....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어......

모르겠어.....

나를 안으면서...부르는 이름은 그녀인데......
또한 그 미안하다는 말이....나에게 향해있다는 것을 알고서....

정말이지....더 이상 어떻게 해야할까....

아무리 착하게 굴고 다정스럽게 당신을 감싸도...당신은 날 보지않아,
어떻게 해야하지....

그래서 그녀의 심장을 죽여버리자....생각도 했었어....

그렇게 당신을 협박도 했었어....
그만큼...나는....

나라는 존재로써....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었어....


그러니까....지금은 나로써....기원해.....

당신이 살기를 바래....

그녀의 기원이기도 했지.....

하지만,그녀의 심정과는 달라.....

당신이 살기를 바래....


이로써 나를 더욱더 미워해도 좋아....

아니,나를 미워해서....나를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을 원해...

미안하다고 할까.....
사랑한다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살아서....그녀를 사랑하며 기억하고....
살아서....나를 미워하며 기억해....

당신....살아 줘.....
이런다고...내가 죽는 것은 아니니까....
그녀 또한..영원히 당신에게 있을 수 있으니까...

있잖아......


이 심장을 이식하면....당신은 결국 누구의 심장을 갖게 되는 거지...?-


구구절절 긴 문장을 써내려가면서 진우는 울었다.
그리고 다 쓰고 나서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울었다.

-이 심장을 이식하면....당신은 결국 누구의 심장을 갖게 되는 거지...?-

그리고 진우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진우야!얘!!!"

모친이 뛰어 나가는 진우의 뒤를 따라갔다.

-희연씨...도와줘!!내가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줘!!!-


그 염원이 강했는지 모른다.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보다...연인에게서 받은 사랑이 더 강했는지 모른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보다...연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강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강한 염원은 무작정 뛰어든 차도에서 이루어졌다.

차도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
자신이 차에 치임과 동시에 여자도 차에 치였다.
의식이 끊어져가는데...여자의 의식도 함께 끊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심장을...-"


-희연씨...이제..그 사람을 살릴 수 있겠지...?당신과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이제는 살릴 수 있겠지...?-


태진은 다음 날 새벽에 진우의 모친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사고 소식을 들은 태진은 정신을 잃었고 간신히 병원으로 찾아왔다.

이런 순간에도 자신의 심장은 조금이라도 빨리 걸으면 힘들고 아파서 도저히 뛸 수가 없었다.

"진우...진우는...."

진우의 모친과 부친이 얼굴까지 새파랗게 질린 채로 다가오는 태진을 보며 통곡했다.

"어떻게 살린 자식인데...."

그 말이 가시처럼 태진의 가슴에 밖혀왔다.
안다...알고 있다.
돈이 많다고 심장을 이식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0여년을 심장을 앓던 아들을 겨우 살렸다.
자신의 부인의 심장으로...
그것으로 끝냈어야한다.
부인을 따라 진작에 자신도 죽었어야했다.
세상에 무슨 미련이 남아 자신은 이렇게 살아서..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의 사고를 봐야하는 것일까...

어째서...자신은 이토록이나 잔인할 수 있을까....

태진은 심장이 아프고 머리까지 아팠기 때문에 그만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의식의 끝자락에...희연과 진우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미안해...이런 남자라...미안해...-


진우는 뇌사였다.
두 연인의 사랑은 잔인할 정도이다.
또 살아서 사랑을 해주지 않는다.
죽는 것이 그렇게나 쉬운 것이라면...어째서..살아서 자신의 곁에 있어주지 않는지...
태진은 그런 그들을 그렇게 몰아간 자신이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웠다.

진우의 뇌사 판정이 내려진 지 3일이 지나서 코노스에서 연락이 왔다.

그것은 또 한번 진우 부모의 마음을 무겁게 무너뜨리기에 충분함이 있는 소식이었다.

"성 진우씨가 장기등 이식 대상자 선정 승인 신청서를 내셨습니다.
현제 진우씨가 뇌사로 판정되어서요..."

"그게 누굽니까..."

"김 태진씨로 되어있는데요...심장 이식이 시급한 분이더군요."

"...."

부모는 아직도 진우의 뇌사 판정에 수긍을 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식 대상자 선정 승인 신청서라니...
진우는 그것을 혼자 몰래 전부 준비하면서 정말로 자신들을 떠나려고 했던 것이다.
부족함 없이 키우려고 부족함이 있는 형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맞벌이를 했고
한번도 따듯하게 안아준 적은 없지만 매일 밤 아들이 잘못 되기라도 할까봐 늘 노심초사했었다.
그것을 아들은 몰랐던 것일까....
알았다고 해도...그렇게나 남자가 좋았던 것일까...
진우가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진우는 뇌사 판정을 받았고 이번엔 진우가 자신의 심장을 그 남자에게 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째서 이제서야 알게 되었을까...
진작에 알았다면...미리 그 아이를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민하와 헤어지고 그 후로 외박이 잦으며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했다.
하지만 여자친구와는 얼마든지 헤어지고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아픈 시절에 밖에 제대로 나다니지를 못해서 친구들을 사귀어 외박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며 아르바이트도 마찬가지의 이유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용돈을 스스로 해결할 정도로 컸다고 생각하니 그렇게나 대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전부 눈속임이었다.
아니,자신들이 몰랐다.
좀 더 아들에 대해 알았어야했는데...아들을 외롭게 혼자 두었고 그래서
그 벌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집으로 와서 진우의 부모는 아들의 죽음을 준비해야했다.
뇌사라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해야했다.
그러다가 책상에 놓여있는 편지들을 보았다.
하나는 진우가 부모를 위해 남겨둔 것....
또 하나는 그 남자를 위해 남겨둔 것....

눈물 자국이 가득한 구구절절한 편지를 읽고 나니 또 다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다고 해도 아들이다.자신들이 낳은 아들이다.
서랍 속에 놓여있던 장기등 이식 대상 선정 승인 신청서를 보고 그만 절규하고 말았다.

그렇게 스스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아들을...모른채 있었다.


병원에 돌아 와서 기절한 후로 의식 불명이 된 태진과 사고로 엉망이 되어
뇌사 판정을 받은 아들...두 사람의 병실을 오간 부모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아들 한명 더 키울 생각 없어?-

그 아들은...아마도 이 남자를 말하는 거겠지...
그 말을 흘려들었던 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
아들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이 수술실에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날...
바로 희연의 기일이 되는 날이었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아들....
저 수술장을 들어갔다 나오면 아들은 완전히 죽는 목숨이 되는 것이다.
차가운 땅에 뭍히게 되든,한 줌 가루가 되어 뿌려지든...더 이상 자신들이 품어줄 수 있는 아들이 아니게 될 것이다.
눈물에 시야가 가려 마지막 아들이 가는 모습은...그렇게 보지 못하고 말았다.

진우의 가슴이 칼로 인해 열려졌고 태진의 가슴도 열렸다.
심장이 뛰고 있을 때 모든 일을 마쳐야한다.
의사들은 분주히 움직였고 진우는 그대로 영안실을 향하게 된다.

희연의 심장...그리고 잠시나마 진우의 심장이었던 그 건강하게 뛰는 심장이
이식 된 후 가슴이 봉해졌을 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버린 진우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른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진이 의식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5일이나 지난 후였다.

"정신 들어요?김 태진씨...여기 어딘지 아시겠어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태진은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말을 할 수 없다.
아무리 수술을 한 후 마취가 풀려 정신이 돌아왔다고 해도 바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말을 할 수 없을 거에요.괜찮아요.곧 천천히 말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이제 태진씨 심장은 건강해요.알아요?"

태진의 시야에는 초점이 없었다.그리고 고개를 약간 돌리니 진우의 부모가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프면 여기 이거..누르세요.와서 진통제 놔 드릴게요."

간호사는 태진에게 호출기를 손에 쥐어주고 자리를 비켰다.

진우의 부모는 자신의 자식이 아닌 사람의 수술 후의 모습을 보자 또 무언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들도 힘겨워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것을 알고서 아들은 희미하게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이 남자는 아니다.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한 가득 죄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괜찮네...자네는...살았어.우리 진우가...진우와 자네 부인이 함께 살린
목숨이니까...소중히 해야해...이제...함부로 하면 안돼..."

진우의 모친이 다가와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태진은 그제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다.

-진우와 부인이 함께 살린 목숨...-

그런 것 원하지 않았는데...자신을 사랑한 그 어리석은 두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라며
그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바라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제서야 눈물이 흘렀다.

"울지 말게...울면...먼저 간 진우가..가슴 아파할 것 아닌가..."

눈물을 닦아주는 진우 모친의 손은 조금 거칠었지만 따듯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진우는 이토록 좋은 부모를 등지고 세상을 떠났다.
죽어도 아무도 봐 줄 이 없는 자신을 위해서...

"또 면회 오겠네...뭐 필요한 거 있거나...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간호사에게 말하게나.
올 때 사가지고 올테니..."

뒤돌아서는 진우 부모의 모습이 절절하도록 아프게 느꼈다.

희연이 죽었을 때를 떠올려본다.
자신만 혼자가 된 것 같았다.어디를 가도 다정한 연인이나 정다운 부부들이 눈에 보였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죽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막노동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면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가 나타났다.
그는 또 태진에게 사랑을 주었다.
희연과 같은 사랑을 주었고 그래서 또 괴로워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더욱 매몰차게 그를 거절했을 것이다.
진우가 자신을 위해 죽을 결심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면...차마 그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그와 다정하게 애정을 나누지 못했을 것이다.
진우가 죽었다.
희연의 존재때문에 괴로워했다.
자신이 때때로 희연을 떠올렸기 때문에 그것을 느낀 진우는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혼자가 아니었다.

용서할 수 없다고는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진우의 부모는...태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용서해야한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이...죽은 아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흑...."

갑자기 눈물이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했다.
진우의 이름을 부르면서..또 희연의 이름을 부르면서 태진은 정신없이 울기 시작했다.
간호사들이 다가와 어디가 아픈 거냐고,진통제를 놔주겠다는 등의 말을 해대고 있었다.


병실로 올라와서 태진은 진우가 남긴 마지막 편지를 보고는 또다시 오열했다.
진우의 부모는 그런 태진의 모습을 보며 함께 오열했다.

-이 심장을 이식하면..당신은 결국 누구의 심장을 갖게 되는 거지...?-

진우의 마지막 물음이 너무도 가슴에 아팠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희연과 진우의 기일은 함께였다.새벽에 두 사람의 무덤을 찾은 사람이 있었다.
듬성듬성 나있는 잡초를 매일 매일 뽑으러 오는 사람이었다.
매일을 오는데도 매일을 마음이 아팠다.
두 사람이 남긴 심장처럼이나 붉은 장미를 각각의 무덤에 한다발씩 두고 산을 내려왔다.

"왔는가,어서 오게.그러지 않아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이거..."

"뭐,이런 걸 사오고 그래.힘들게."

"이제 다 낳았는 걸요..."

"그래도 모르니 조심해야지.들어와,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아들의 기일이라 오늘은 일도 그만 두고 부부가 함께 태진을 맞이해주었다.
아직도 이 두 사람을 대하면 죄책감이 앞선다.
반년 전에 태진은 이 집을 나왔다.회복되는 기간 동안 태진은 진우의 집에 있었다.
진우가 쓰던 방에서 생활을 했다.
가끔 새벽에 진우의 부모가 진우의 방을 찾아올 때가 있었다.
아직도 태진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받아들이고 있었고 진우가 사랑한 사람이
혹여 밤 중에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이토록이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부모를 등지고 진우는 죽음을 택하기 전까지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또 진우에게 미안하고 진우의 부모에게 미안해졌다.

반년 전에 집을 나가겠다고 할 때,진우의 부모 얼굴에 스친 것은 무척이나
섭섭해하고 서운해하는 표정이었다.
아들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생전 사랑을 충분히 확인시켜 주지 못한 아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사랑을 충분히 확인시켜 주었으면..아들은 그래도 똑같은 결과를 선택했을까?
그런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이 남자에게 모질게 대할 수 없었다.
남자는 집을 나간 후 취직을 했고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했다.
그런 모습을 보자 대견한 반면 또한 마음이 아팠다.
아직 아들이 죽은 지 1년밖에는 되지 않았다.
죽었다는 것을 실감하기에도 이른 시기이다.
남자는 명절때나 생일 때는 잊지 않고 찾아와주었다.
그리고 진우의 기일인 오늘도 찾아와주었다.
어쩌면 껄끄러운 것은 태진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태진은 용기를 냈고
자신을 살려준 진우의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딱히 제사를 치루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우의 부모를 위해 오늘같은 날은 와야하는 것이다.
진우의 방에 가니 아직 접지 못한 아들의 사진이 있었다.
태진의 지갑에도 아직 진우의 사진이 있다.
사진은 또 다시 괴로운 증거로 남았다.
사랑했던 시절을 돌이켜주고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각인시켜주는
사진은 좋은 의미로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침을 맞이하는 것을 축복으로 여길 수 있게 생각해 준 사람....
그녀는 그저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이었어...너무도 착하고 예쁜 여자....

평생을 상처주고 싶지 않았는데.....

이 몸이 이유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어....
이 심장이....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어....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갑자기 몸이 나빠지는 나를
위로하고 감싸주며...그녀는 혼자서 많이 울었겠지....
그것을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매일매일 힘들어서 지쳐가는 그녀를 보며 이것이...내 사랑인가 생각했어.

사람은 왜 사랑하면서 그저 사랑으로 있지 못하고....그렇게....
상처를 주는 것일까....

그녀가 이제는 너무도 불쌍해서....그만 만나자고 하고...
정말로 모질게 그녀를 거부했던 적도 있었어..

그런데.....울면서....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미워하고 괴롭혀도 좋으니 부디 버리지는 말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어떻게 견딜 수 있겠다는 거지?

그런 그녀를 버리고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겠다는 거지?

정작 그녀가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은 나인데....

자신으로 인해 살아달라고....항상 그녀는 그 말을 했어....

그녀에게 상처만 주는 이렇게 나약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그녀를 감싸주고...사랑하는 것....

오로지 그 하나 뿐....

뇌사자라고 한들......나에게 그녀는 변함없이 그녀야.....

아무리 사고가 심해서....많은 흉터가 생겼어도...
설령,사지가 잘려나갔다고 해도......

...그녀는 내게 있어 그녀야.....

그러니까....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잖아....

자신을 위해서 살아달라는 말이.....

나는 그런 뜻인 줄 몰랐어.....

부정하고 거부하고 있었는데.....

네가 그녀의 심장을 너의 몸으로 빼갔지....

그저 그녀를 볼 수만 있었어도 좋았는데.....

그것조차....할 수 없게 만들었어....

더 이상 아침이 감사하지도 않았고..온통 암흑에만 있는 것 같았어...

밤과 낮을 구별할 수가 없었어...대체 그녀가 없는 삶에서
빛을 어디서,어떻게 찾아야한다는 거지?
어떤 것이 빛이고 어떤 것이 어둠인지....
어떻게 알아야한다는 거지?

너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의 심장을 가져가 버린 너를....용서할 수 없었는데....

그녀의 심장에 내가 반응하는 것을 느꼈어.

그녀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너에게 반응하는 것을 느꼈어....

수치스럽고 더럽고 비열한 자식이야,나는....

어둠을 지독히도 무서워하는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은 나인데..
그러면서 너에게 모든 죄를 씌우려 했지....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너를 잔인하게 안아버리고 온갖 말과 행동으로
너를 상처입혔지...

그런데....그런 나보다....

그녀를 사랑해서 너를 상처입히는 나보다....
너를 사랑해가면서도 너를 상처입히는 나를 더 용서할 수 없었어...
너에게 사랑을 느끼는 내가 무서웠어....
그러면서 너에게 상처를 주는 나를 견딜 수 없었어...

너를 사랑하는 내가 상처였어.....

나는.....나를 이제 더 이상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어....


그런데...너는 여전히 내가 너를 싫어한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지....

정말로 그 심장으로 나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던 것인지...

내가 준 상처가 그 정도로 컸었던 것인지.....

네가 너 자신으로 인해 살라는 그 말을 했을 때....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를 몰랐어....

또 다시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 같은 공포로....
나는,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어....

또 소중한 사람에게서....삶을 강요당한 나는.....

정말,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어째서....나의 심장은...
내가 이토록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장을 부르는 거지?

이러한 심장 따위....없어도 좋았어....

살게되면.....어떻게 해야하는 건데?

행복 할 수가 없는데.....
그저 살라고만 하면 어떻게 하라는 건데?

그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내가 살기만을 바라는 그대들을
내가....어떻게 해야하는 건데.....

나와 더불어 살기를 바라는 그대들을.....내가 대체 어떻게.....

살고 싶었지만,그런 식은 아니야.....

그녀도....너도 이렇게 되라고 사랑했던 것이 아니야....

함께 살기를 바랬지만,이런 것이 아니야....

나에게는 형태가 필요해....

함께 하겠다는 사람의 몸....얼굴.....그 손이나....
모든 것들이...서로 감싸 안을 수 있는 형태가 있기를 바래....

그런데....어째서 이렇게 되는 거지?
어째서.....

또 다시....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이 심장을 이식하면...결국 당신은 누구의 심장을 갖게 되는 거지...?-


"알아...알고 있어...날 사랑한 사람의 심장이라는 걸...알아..."

중얼거리는 태진의 뒤로 진우의 부모들이 쓸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장에 이어져 태진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또한 그것은 진우의 부모도 마찬가지로 태진의 부인의 심장,아들의 심장...
그리고 태진의 몸 속에 들어있는 심장에 이어져...또 다른 애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사랑에는 끝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