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만 명이 끌려가다
1636년 12월에 조선을 침략해 1637년 2월에 돌아가기까지, 청군은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저항하지 않는 민간인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병자년 겨울은 유독 추위가 심해 약탈당한 사람들은 얼어 죽었다. 이와 같은 만행은 황제의 지시였다. 본격적인 명나라 공략에 앞서 조선을 완벽하게 굴복시키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조선에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승리한 뒤 안전장치를 추가했다. 강화도를 함락하고 남한산성을 완전히 고립시킨 당시, 전 군대에 포로를 50만 이상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규모 인질을 잡아두면 조선이 복수를 할 수 없어 명나라와의 전쟁을 안심하고 치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용문
“우리 청나라가 이제 조선인 포로들을 끌고 갈지언대 만약 포로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가는 데 성공하면 잡지 않을 것이나, 압록강을 건너 한 발자국이라도 만주 땅을 디디면 도망치더라도 조선은 이들을 즉시 만주 땅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조선 팔도에는 다시 한 번 난리가 났다. 개별적으로 포로를 잡던 청의 각 부대는 목표를 채우기 위해 조직적인 포로사냥에 나섰다. 노인과 어린이를 제쳐두고 젊은 사람만 골랐다. 청군이 특히 선호한 것은 사대부가의 젊은 여인들이었다. 재색을 겸비한 그녀들은 첩으로 인기가 높았으며, 노예로 팔거나 나중에 조선에 돌려줄 때 상대적으로 비싼 몸값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여인이 오랑캐에게 끌려가기보다는 은장도로 자신의 목을 찌르거나 우물에 투신했다. 방해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척살했으므로 여인들은 자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순순히 끌려가기도 했다. 생이별의 곡소리가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청 태종은 항복문서를 받은 후 인조에게 “우리 청나라가 이제 조선인 포로들을 끌고 갈지언대 만약 포로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가는 데 성공하면 잡지 않을 것이나, 압록강을 건너 한 발자국이라도 만주 땅을 디디면 도망치더라도 조선은 이들을 즉시 만주 땅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엄명에 따라 만주에서 탈출한 조선인 포로들이 조선 관청에 붙잡혀 다시 만주로 보내지는 비극적인 장면도 많이 연출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청나라에 잡혀갔을까? 최명길의 《지천집》에 의하면 50만 명이 넘었고, 남한산성에서의 저항 기록을 담은 《산성일기》는 60만 명이라고 했다. 후에 정약용은 《비어고》에 60만 명이 넘는다고 기록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1000만 명이었으니, 가족이나 친척 중 끌려가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실록에서는 “온 나라 백성 중 태반이 연루되었다.”라고 적었다. 포로 중 여자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렇게 많은 여인이 포로로 끌려간 적은 일찍이 없었다. 봉림대군 부부와 소현세자, 그밖에 많은 대신, 각료도 인질로 끌려갔다. 척화파 강경론자로, 이른바 ‘삼학사’라 불리는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청 태종의 회유를 거절하고 참형을 받았다.
인조는 매우 괴로웠다.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예를 올린 후 입궁할 때 청나라 진영에 있는 백성들은 인조를 향해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라며 절규했다. 그는 달포가 넘도록 살려달라는 백성들의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왕은 사관에게 “죄 없는 백성을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되게 했다.”라는 사과문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공식적인 문서에 포로의 수가 얼마인지는 기록하지 못했다. 청나라가 전쟁 피해의 실태를 일절 조사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조선인 포로들의 종착지는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심양(현재 중국 랴오닝 성의 성도인 선양 시)으로, 한양에서 1660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들은 한겨울에 끌려다니면서 말채찍으로 얻어맞기 일쑤였다. 언 살에 채찍을 맞으니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났다. 추위와 기아로 주검이 수두룩하게 쌓였다. 청 병사가 활쏘기를 연습할 때 과녁으로도 이용당했다. 청군은 모자란 만큼 다시 잡아들였다. 포로의 숫자가 워낙 많아 하루 30리 정도밖에 행군할 수 없었다. 심양까지 가는 데 60일이 걸렸고, 청나라 사료에 의하면 그들의 몸에는 이가 들끓었다. 청나라는 조선인 포로를 ‘피로인(被虜人)’이라고 불렀다. 포로와는 다른 개념으로, 민간인 인질을 뜻한다.
끌려가면서 여인네들이 온갖 수모를 당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병영에서 시중을 들며 군인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했다. 이에 항거하면 죽임을 당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오랑캐’에게 붙잡혔으니 수치심은 더욱 컸다. 후세에 정약용은 “사대부의 아내나 첩, 처녀 들은 차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을 보면 더러 옷으로 머리를 덮었다.”라고 《비어고》에 적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포로가 된 것 자체가 창피하고 치욕스러웠던 것이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청병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자 음식을 주지 않았는데, 사하보에 이르러 굶어 죽었고 이에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포로들의 기구한 삶
심양은 1625년 누르하치가 후금의 수도로 삼은 곳이며, 1634년에 홍타이지가 성경(만주어로 ‘묵던’)으로 개칭했다. 청나라로 이름을 고친 후금은 1644년에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고 심양은 제2의 수도로 삼았다.
천신만고 끝에 심양에 도착한 피로인 중 무기를 다룰 줄 아는 남자들은 명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징병되었다. 철을 다룰 줄 아는 기술자들은 상대적으로 대접을 받았다. 재색이 뛰어난 여인들은 궁중에 들어갔다. 그밖에 남자들은 농장 머슴으로, 여자는 첩 또는 창부로 노예시장에서 대부분 팔려 나갔다. 특히 첩의 문제는 청 조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만주족 본처들이 조선인 첩을 질투하여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부으며 폭행하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그런 짓을 하는 부인은 남편이 죽을 때 순장시키겠다고 청 태종이 엄포를 놓을 정도였다. 예조좌랑 허박은 “피로인이 겪는 고통은 죽음보다 더 심하다.”라고 말했다.
심양에서 탈출하여 압록강을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청나라는 이들을 ‘주회인’이라고 불렀다. 조약에 따라 조선은 이들을 책임지고 다시 청나라로 돌려보내야 했다. 잡혀온 주회인들은 발뒤꿈치가 잘리는 끔찍한 형벌을 당했다. 주회인을 잡아오라는 청나라의 요구가 드셀 때는 조선 조정에서 부랑아들을 압송시키기도 했다.
심양이 큰 도시이기는 하지만 한꺼번에 몇 십만 명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청 태종은 항복의 ‘선물’로 강화도에서 잡힌 1600명을 즉시 조선에 송환하고, 바로 속환 절차를 밟으라고 통보했다. 조선 조정도 그들을 고국으로 데려오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기도 전에 사대부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찾아 나섰다.
속환 방침이 발표되자 심양 거리 곳곳에 피로인 매매시장이 열렸다. “피로인의 매매를 허락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남녀 포로들을 성문 밖에 모아놓았다. 그 수가 수만이나 되는데 혹은 모자가 상봉하고 혹은 형제가 서로 만나 부여잡고 울부짖으니 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라고 《심양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수는 매우 적었다. 요구하는 몸값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그리 높지 않아서 남자는 한 사람당 닷 냥, 여자는 석 냥 정도이고 양반 몸값 역시 아무리 높다 해도 열 냥을 넘지 않았다. 이 가격은 정묘호란을 기준으로 매긴 가격이었다. 그런데 돈 많은 조선 사대부들이 자신의 가족을 하루라도 빨리 빼오려고 높은 값을 치렀고, 이에 따라 매매가가 높아졌다. 좌승지를 지낸 영중추부사 이성구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1500냥, 영의정 김류는 딸을 구하는 데 1000냥을, 병조의 사령 신성회는 첩을 위해 600냥을 냈다.
높은 속환가에 낙담한 피로인 가족들은 세자가 머무는 심양관에 몰려가 이 문제를 조정이 직접 해결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청나라도 조속히 속환 문제를 마무리 짓고자 공인되지 않은 속환은 허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조선은 ‘속환사’를 두어 속환 절차 및 방법을 강구했다. 속환은 가족이 속환사를 따라가 개인의 재산으로 속환해 오는 사속, 사속을 원하지만 속가가 부족해 그 일부를 나라에서 보조받거나 대여받아 속환하는 반사반공속, 국고에서 속가를 전액 부담하는 공속이 있었다. 공속의 대상은 종실 및 그들의 호위 군사와 처자로, 소수에 불과했다.
다음은 속환가를 정해야 했다. 최명길은 속환 가격이 100냥을 넘지 못하게 규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여 재가를 받았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닷 냥이고, 농촌의 하루 품삯이 한 냥이었다. 제법 많은 액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이 속환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 1500냥을 지불한 이성구가 첫 번째 속환사로 임명되었으니 협상이 지지부진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양측의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공식적인 속환가를 정하지 못하고 시장 논리에 따라 가격을 매겼다. 성인 남녀는 150냥에서 200냥이 제일 많았고, 어린아이는 100냥 미만, 양반의 속환가는 500~600냥 정도에 형성되었다.
공속이든 사속이든 속환 순서는 남자가 먼저였다.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무리 높은 몸값이라도 지불해야 했다. 장남들이 제일 먼저 고향으로 돌아왔다. 충효 사상에 충실한 조선인들은 다음으로 부모님의 신주를 돈 주고 샀다. 청나라에서 효심을 이용해 죽은 사람까지도 한 사람 몫으로 쳐서 팔았기 때문이다. 딸이나 부인은 나중에 돈이 마련되는 대로 데려와야 했다. 공속에 해당하는 여인은 아주 적었고 대부분 반사반공속에 의존했는데, 국고가 바닥난 조정에서 완벽하게 지원해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몸값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여인들이 낙담하여 자결하는 사건도 더러 발생했다.
여자들이 고향에 돌아올 수 없던 또 하나의 이유는 본인의 선택이었다. 인질로 끌려오는 동안 성적 노리개가 되거나, 심양에서 첩이나 창부로 팔린 여인들은 정절을 잃었다는 죄책감에 빠졌다. 더렵혀진 몸을 지아비가 반겨줄 리도 없지만 본인 스스로도 용납이 안 되었다. 그렇다고 죽기도 두려워서 결국 청나라에 주저앉기로 결심한 것이다. 일부는 청나라 사람의 아이까지 낳아서 더욱 돌아갈 수가 없었다. 북한산의 바위가 된 청년의 연인도 어쩌면 이에 해당하지 않았을까?
1645년 3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힌 지 9년 만에 귀국하면서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시작했다. 비록 공식적인 창구를 통해 충분히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속환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남성 피로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기록마다 다르지만 10년 동안 조선에 환속한 여인은 2만 5000명에서 5만 명으로 추정된다. 20만 명에 이르는 여성 중 3분의 2 이상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오는 여인들은 드디어 고향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중 1만 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그토록 그립던 고향에서 일어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물론 압록강을 건널 때 약간의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다. 사대부가 여인일수록 그 불안은 더욱 컸다. 그래도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이기에 남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개천에서 몸을 씻은 이유
홍제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지금의 홍제동, 남가좌동, 성산동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환속한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곳에서 몸을 씻어야 했다. 조정에서는 한양뿐만 아니라 각 고을의 강과 하천에서 여인들의 몸을 씻게 했다. 유독 여자들에게만 씻으라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쟁이 끝난 후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속환은 1638년 2월 말에 있었다. 최명길은 세자의 귀환, 징병, 그리고 피로인 속환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1637년 9월 심양으로 떠났다. 그의 수중에는 국고 2500냥이라는 거금이 있었다. 심양에서 청 태종은 성문 밖까지 나와 최명길 일행을 맞이했다. 최명길은 황제에게 위의 세 가지 문제를 간청했다. 청 태종은 세자의 귀국은 불허했지만, 아량을 과시하려고 나머지 두 가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심양에서 새해를 맞은 최명길은 세자와 대군에게 절하고 고국으로 향했다. 이때 거의 3만 명에 육박하는 피로인이 최명길과 동행했다. 이 어마어마한 행렬은 조선 강토를 들뜨게 했다.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가족 친지들이 대거 돌아오면서 해후의 기쁨을 누렸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도 헤어진 가족을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피로인 중 여성들을 향한 환호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며느리, 아내, 누이를 맞이하는 조선 남자들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듯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법인데, 그녀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지 않았다. 조선의 예법을 어겼으나 자신들의 잘못으로 희생당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 불편한 감정을 처음으로 드러낸 이는 장유였다. 최명길의 대규모 속환 행렬 속에는 강화도에서 피랍된 그의 며느리가 있었다. 며느리는 시댁에 들어가지 못하고 친정에 머물고 있었다. 장유는 1638년 3월 11일 인조에게 진정서를 올렸다. “외아들 장선징이 있는데 강도의 변(강화도 참변)에 그의 처가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지금 친정집에 있습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아들이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이혼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장유는 조선 17대 임금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의 아버지이자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사대부를 대표하는 명문가 집안의 수장이었다. 이 진정서에 차마 ‘며느리의 몸이 더러워졌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다른 사대부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사실 장유는 최명길과 함께 대표적인 주화파였고, 평소 주자학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하는 데에도 앞장선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여인의 정절에 관해서는 한 치 물러섬이 없었다. 그런데 장유의 진정서와는 반대 내용의 진정서가 비슷한 시기에 접수되었다. 승지 한이겸이었다. “제 딸이 청군에 사로잡혔다가 속환됐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합니다. 원통해 못 살겠습니다.”
조정에서는 환속한 여인, 환향녀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사실 환향녀 문제가 이때 처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후에도 비슷한 상소가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선조는 “이것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과 견줄 수 없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선례가 있었음에도 인조는 결정을 주저했다. 신하들의 도움으로 옥좌에 앉은 그의 권위는 여느 역대 왕보다 취약했고, 더욱이 장유는 자신을 임금으로 내세운 공신이었다. 그리고 장유의 주장이 조선 사대부의 속마음을 대변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명길은 선왕의 교지를 내세워 ‘이혼 불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전하, 비록 환향녀들이 절개를 잃고 몸을 망쳤다고는 하오나, 이는 스스로 음행을 자행한 것이 아니옵고 극심했던 전락과 적지에 인질이 되었던 만부득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신이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오나 나라가 힘이 있었던들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으리까. ······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보고 물정으로 참작해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인용문
전하, 비록 환향녀들이 절개를 잃고 몸을 망쳤다고는 하오나, 이는 극심했던 전락과 적지에 인질이 되었던 만부득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사료됩니다. 나라가 힘이 있었던들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으리까. ······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곧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환속한 아내를 이혼시켜달라는 상소에 대해 최명길이 인조에게 한 말
그러나 최명길의 입장은 소수였다. 《인조실록》에서 사관은 최명길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고, 이 논평은 당시 사대부 대부분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의 전교가 사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미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설령 이런 전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본받을 만한 규례는 아니니, 선조 때 행한 것이라고 핑계하여 오늘에 다시 행할 수 있겠는가. 선정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하였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 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 이 문제가 공전을 거듭하는 동안 환향녀들의 불안은 깊어졌다. 이윽고 버림받은 여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궁궐에 전해졌다. 인조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최명길의 논리는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결국 인조는 장유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부는 자신들의 생각을 꺾지 않았다.
두 달 후에 다시 이혼 주장이 제기됐다. 특진관 조문수는 “부부는 인간의 대륜입니다. 포로로 잡힌 여자들은 남편의 집안과 대의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어찌 다시 억지로 합해 사대부의 기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은 예의의 나라인데······.”라고 상소를 올렸다. 인조는 “포로로 잡혀갔던 여자들은 이미 본심에서가 아니었고 죽을 수도 없었다.”라며 “더는 재론하지 말라.” 하고 매듭지었다.
임금의 두 번에 걸친 확인에도 불구하고 사대부들은 환속한 부인들을 홀대하고 호된 시집살이를 시키며, 첩을 두기도 했다. 이 와중에 조정에서는 전쟁 중에 자결한 여인의 집안에 열녀문을 내렸다. 이는 다른 사대부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임금의 엄명 때문에 이혼하지는 못했지만 환향한 부인과 며느리를 대하는 태도는 더욱 쌀쌀맞아졌다.
이를 지켜보던 최명길은 인조에게 궁여지책을 진언했다. 날을 정해, 환향녀들이 각 고을마다 지정된 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으면 심신을 모두 정화한 것으로 보고 각 집안에서 따뜻하게 맞이하도록 전교를 내리자는 것이었다. 나라가 정절을 회복시켜주자는 ‘면죄부’였다. 인조는 이 의견을 즉각 수용해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충청도는 금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환향녀가 많아지자 조정에서는 청천강, 낙동강, 섬진강을 추가로 지정했다.
국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전에 없이 추상같은 어명이었다. 한양과 경기도가 고향인 환향녀들은 한강의 지류인 홍제천 깊숙한 곳에서 몸을 씻었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아 ‘모래내’라고 불렸으며 물이 맑기로 유명했다. 병자호란 당시 희생이 가장 컸던 곳이 한양과 경기도였던 만큼 홍제천은 발 디딜 틈 없이 몸을 씻는 여인들로 북적였다. 절개를 지키기 못한 ‘자신의 과오’를 속죄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구석구석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녀들은 자신을 구제해준 임금님의 넓은 은혜를 기리기 위해 이곳을 ‘홍은’이라 했으니, 오늘날 홍은동의 유래다. 장유의 며느리도 홍제천에서 몸을 씻고 부푼 마음으로 비로소 시댁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죽어서도 버려진 여인들
국법까지 언급한 왕의 엄명에 사대부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환향녀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미 떠나 있었다. 돌아온 여인들을 별당에 처박아놓고 모든 식솔의 출입을 금지했다. 그리고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문을 집요하게 올려 임금과 최명길을 압박했다.
“저 부인들이 의지할 곳을 잃는 것은 참으로 불쌍하지만 남편의 후사가 끊기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더구나 부인은 이미 버림을 받았는데 남편도 또 재취하지 못한다면 피차가 모두 홀로된 것을 원망하는 신세가 될 것이니 양쪽 다 막는 것보다는 한쪽이라도 허락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또 역적의 딸도 이혼하게 하는 예가 있는데 지금 이 오욕을 입은 부인은 역적 집안의 자손보다 더 심하지 않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정리가 몹시 절박한 자는 사유를 갖추어 상언하여 교지를 내려 이혼하게 하면 중도를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영중추부사 이성구의 이 같은 상소에도 인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반전은 회절강 어명이 있은 지 2년 뒤에 일어났다. 1640년 9월에 장유의 아내, 즉 시어머니가 다시 호소문을 올렸다.
“남편 장유가 살아 있을 적에 아들 선징의 아내가 청나라에 잡혀간 것을 속환금을 내고 찾아왔잖습니까. 그런데 청에 잡혀가 오욕을 당한 며느리와 아들이 그대로 다시 부부가 되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는 없는 것이지요. 2년 전 남편이 죽기 전에 이런 이유로 이혼시켜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제가 지금 재차 단자를 올리는 까닭은 며느리가 타고난 성질이 못돼서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청나라에 끌려갔다 온 뒤로는 더욱 편치 않게 행동해서입니다. 이는 칠거지악에 해당되니 이혼시켜주시기를 거듭 청합니다.”
즉, 이번에는 환속한 며느리가 칠거지악에 해당하는 짓을 저질렀으니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시어머니의 본심을 들추어내지 않고 칠거지악만을 강조했다. 이에 인조는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이혼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장선징이 훈신의 독자임을 고려하여 특별히 그에게만 허락한다.”라는 교지를 내리고, 비슷한 상소가 계속 올라오는 것을 경계하여 “관례로는 삼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 파장은 컸다. 대부분의 사대부 집안은 칠거지악을 이유로 환속한 며느리를 내치고 새로운 며느리를 맞아들였다. 인조에 이어 즉위한 효종은 결국 이혼을 금지한 선대의 지시를 폐기해야 했다. 봉림대군 시절에 인질로 끌려갔던 터라 누구보다 환향녀의 심정을 잘 아는 그였지만, 빗발치는 신하들의 상소문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환향녀에 대한 사대부들의 태도는 평민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임금의 지시 없이도 이혼할 수 있었으므로 환속한 아내와 며느리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환향녀’라는 사회적 낙인을 찍었다. 이는 본디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의미였으나, 오랑캐와 잠자리를 한 더러운 여자라는 악의적인 뜻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정절을 잃지 않은 여자들도 환향녀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었다. 손가락질은 집안에서 시작돼 동네 전체로 번졌다. 환향녀의 이빨에 빨간 칠, 까만 칠을 해서 사람들과 마주할 수 없도록 한 마을도 있다고 한다.
버림받은 환향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출가외인’이라 친정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에서 정절을 잃은 여자들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
첫 번째 선택은 삶을 끊는 것이었다. 우물에 몸을 던지고, 시댁과 친정이 보이는 동구 밖 언덕 큰 나무에 목을 맨 환향녀들이 즐비했다. 이혼당하지 않고 별당에서 홀로 쓸쓸히 지내던 여인들은 방 천장에 명주실을 내리거나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찔렀다. 아예 집 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는 여인들은 회절강 깊은 곳에 몸을 던졌다. 오랑캐에게 끌려갈 때 자결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고, 조선의 남정네들을 원망하면서 눈을 뜬 채 이승을 떠났다. 그녀들의 ‘한’은 전설을 낳았다. 원귀가 되어 시댁 식구들을 몰살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환속한 지 1년 만에, 죽은 여성은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공식적인 집계는 아니지만 자결한 환향녀의 기구한 사연이 없는 고을이 없었다.
차마 죽을 용기가 없는 환향녀들은 어디론가 떠났다. 다른 남자와 깊은 밤에 도주하거나, 유객에 머물며 환향녀라는 신분을 숨기고 술과 몸을 팔았다. 홍제천이 가까운 탓인지도 모르지만 서대문 밖에는 집에서 떠나거나 쫓겨난 환향녀들이 집단적으로 살았다고 한다. 심지어 다시 청나라 심양으로 돌아가는 여인들도 많았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곳이지만 동병상련을 겪는 사람들이 있고 생지옥 조선보다는 살기 편했다. 스스로 돌아간 것이므로 발뒤꿈치가 잘리는 형벌도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들은 이승과 사람, 혹은 조선을 떠났다.
그러나 떠난 뒤에도 환향녀의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다. 동구 밖에서 죽은 여인들의 주검은 재빠르게 아무도 모르는 임야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었다. 별당에서 자결한 여인을 오히려 ‘열녀’로 둔갑시키는 파렴치한 사대부들도 있었다. 매우 드물게 온전하게 지내는 환향녀들도 있었으나 그 또한 죽은 뒤에 집안에서 내쳐지기도 했다. 숙종 3년(1677년), 사헌부 소속 최선이 자기 어머니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는 상소문을 올렸다. 최선의 어머니 권 씨는 최계창의 후처로, 병자호란 때 환속한 여인이었다. 최 씨 집안은 그녀를 전혀 홀대하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도리어 권 씨를 가문의 종부로 들여 제사를 받들게 했다. 전처의 아들인 최관에게도 “네 어미로 섬기라.”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최계창이 죽고 이어 권 씨가 사망하자 작은 아버지가 “권 씨의 신주를 우리 집안의 사당에 둘 수 없다.”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죽어서도 버림받은 환향녀들은 조선 시대 여성들의 비극적 운명의 종착역이었다.
조선 시대 남성의 이율배반적인 민낯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또 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희생된 여성들을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내쳤다. 사대부들이 떠받드는 유교는 인간의 도리를 추구한다. 삼강오륜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를 강조했다. 그중에 하나인 ‘부부유별’은 남편과 아내에게 각자의 본분이 따로 있으니 이를 잘 헤아리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유교를 이유로 여성들을 거부했으니 이보다 더 극적인 자가당착도 없으리라.
환향녀를 더욱 비극적으로 연출한 것은 시어머니들이다. 여성차별의 이념과 제도가 고착하면서 시어머니의 존재 가치는 ‘아들의 어머니’로 한정되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거세된 그녀들은 곧 조선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폐습의 잔병들은 조선이 멸망한 이후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여자니까······”라는 족쇄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