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시 물음을 던져 보자. 자연사란 무엇인가? ꡔ현의 노래ꡕ에서 김훈은 비화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뱀에 물려 죽는 일은 흔해서, 늙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낳다가 죽거나 나오다가 죽은 일과 같았다. 싸움터에서 도끼에 맞아 죽는 죽음도 그와 비슷했다. 민촌에서 모든 죽음은 저절로 죽은 자연사였다. (ꡔ현의 노래ꡕ, 230쪽, 강조는 인용자)
뱀에 물려 죽는 것과 싸움터에서 죽는 것 모두 ‘저절로 죽는’ 자연사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럼 자연사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우린 이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 왜냐면 김훈 소설에서 자연사가 아닌 죽음은 단 한번도 그려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린 아내의 죽음(「화장」)이나 비화의 죽음(ꡔ현의 노래ꡕ)의 죽음과 장철민의 죽음(ꡔ빗살무늬토기의 추억ꡕ)이나 이순신의 죽음을 같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린 김훈이 말하는 ‘자연사’를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이다. 이순신의 희망은 오로지 하나, 자연사이다.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다. (...)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ꡔ칼의 노래ꡕ, 65쪽, 강조는 인용자)
위인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적의 칼에 죽은 것은 자연사이지만, 임금의 칼에 죽는 것은 자연사가 아니라는 논리이다. 왜냐면 임금에 의한 죽음은 무의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럼 왜 임금에 의한 죽음은 무의미한 것인가? ꡔ칼의 노래ꡕ에서 임금은 무(武)와 정반대 있는 정치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무(武)는 임금이 손댈 수 없는 곳에 건설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건설은 소멸되기 위한 건설이어야 마땅할 것이었다.”(ꡔ칼의 노래ꡕ, 53쪽) 따라서 우린 자연사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 우선 이와 대립되는 비자연사, 즉 정치사(政治死)의 의미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해, 정치(가)의 작동원리가 무(사)의 작동원리와 어떻게 다른가를 규정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는 모반을 꾀하려한다는 길삼봉을 둘러싼 소란이다. 이순신은 이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크고 확실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으므로, 헛것인지 실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헛것들은 실체의 옷을 입고, 모든 실체들은 헛것의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ꡔ칼의 노래ꡕ, 42쪽, 강조는 인용자)
단지 소문으로서만 떠도는 길삼봉이라는 허깨비가 질문의 구조가 바뀌자(“길삼봉은 누구냐”에서 “누가 길삼봉이냐”로) 엄청난 피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이 죽었으나 길삼봉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실체에서 헛것으로의 변화든, 헛것에서 실체로의 변화든 그것은 질문 구조(언어, 경계)만 바꾸면 가능한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 언어를 바꾸는 것일까? 이순신은 ‘임금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임으로써 권력의 작동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다’(ꡔ칼의 노래ꡕ, 44쪽)고 쓰고 있다. 이것은 임금이 언어를 바꿈으로 권력을 작동시키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에 놀아남으로서 자신이 권력을 확인하고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이순신은 임금이야말로 길삼봉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임금의 언어 역시 길삼봉이 숨을 수 있는 ‘깊은 숲’이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거부하고자 하는 ‘정치’는 바로 이런 언어가 숨을 수 있는 ‘숲’이다. 그가 ‘정치’를 부정하고 무(武)를 ‘정치’와는 다른 곳에 위치시키려는 것은 이와 같은 언어의 숲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자연이 도덕과 무관하지 않는 것처럼, 무(武)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자연은 세계(cosmos)와의 상관관계를 통해서만 표출될 수 있는 것임으로,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이지 않은(경계를 갖지 않은) 무(武)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자연도 무(武)도 어떤 것의 부정으로서 존재하는 한 모두 언어에 전염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에 의한 죽음이 무의미라면 적의 칼에 의한 죽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차이가 존재한다. 즉 길삼봉이 숨을 수 있는 언어의 숲이 임금이라면, 적이 숨을 수 있는 언어의 숲은 이순신 자신이다. 따라서 적에 의한 죽음은 일종의 자기파괴라는 형태를 갖게 된다. ‘자연사’는 바로 이와 같은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제는 정치 대 비정치적인 무(武)라는 구별이 아니다. 그것은 외압적 파괴와 자기파괴의 문제이다.
6.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ꡔ칼의 노래ꡕ의 문장은 ꡔ난중일기ꡕ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그야말로 김훈식 문장의 전형이다. ꡔ난중일기ꡕ의 냉정하고 기록적인 문체는 ꡔ칼의 노래ꡕ에 오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ꡔ칼의 노래ꡕ는 ‘일기’와 같은 시간적 서술형태가 아닌 공간적 서술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발사가 제거된 질서정연한 내적 질서 안에서 시간은 정지하며, 시간이 정지되어야 ‘적’이 등장한다. 이런 공간우위의 서사형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는 문예사적으로 볼 때 바로크 시대다.
바로크에서는 비극(Trauerspiel)은 물론 삶의 영역도 본래 시간적인 다양한 데이터를 비본래적이고 병렬적인 공간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전환이 비극이라는 연극형식의 구조에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세가 현세 사건의 허무함이나 피조물의 부질없음을 수난을 경유하여 구제에 이르는 도상에서 편력하는 단계들로서 제시되는 반면, 독일 비극은 현세의 절망적 상태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다. 독일 비극이 구제를 알고 있다면, 그것은 신의 구제계획의 성취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이 같은 숙명 그것의 깊숙한 곳에 잠재되어 있다. 종교극의 종말론에 등을 돌린 것이 유럽 새로운 연극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은총 없는 자연으로 마구 도망쳐 들어가는 것이 독일의 특징이다. (벤야민 ꡔ독일 비극의 기원ꡕ, 강조는 인용자)
ꡔ난중일기ꡕ엔 ‘사실’은 있지만 ‘스펙터클’은 없다. 그러나 ꡔ칼의 노래ꡕ엔 ‘사실’은 없고 ‘스펙터클’만 있다. 물론 ꡔ칼의 노래ꡕ의 이순신은 자신의 손에 남은 초라한 병력과 전선(戰船)을 하나의 ‘사실’로서 인정하지만(57-58쪽), 여기서의 사실은 ꡔ난중일기ꡕ의 ‘사실’과 다르다. ꡔ난중일기ꡕ에서 ‘사실’이란 어떤 시간적 배열 하에 있는 기록적인 사실(즉 사건)이다. 다시 말해 시간적 배열 하에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한 ‘사실’은 일종의 ‘(빗살무늬토기의) 문양’에 불과하다. 벤야민은 바로크 비극의 특징 중 하나로 ‘붕괴하는 사물’, 즉 ‘폐허’에 대한 감각을 드는데, 이것은 초기 르네상스에서 파악된 미화된 ‘자연’과 대극을 이룬다. 스펙터클이란 결국 바로 이런 수많은 문양들의 집적인 거대한 폐허를 의미한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전쟁은 항상 종말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전쟁 자체를 하나의 과정, 즉 ‘수난’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펙터클로서의 전쟁은 그런 종말론에 등을 돌린다. 그리고 은총 없는 자연, 즉 폐허를 발견해 낸다. 김훈이 그리는 강건하고 전혀 물러섬이 없는 거대한 자연화(自然畵)는 폐허화(廢墟畵)에 다름 아닌데, 독자는 그 잔혹한 조화(하모니) 앞에서 모든 도덕적(언어적) 관심에 대한 마비를 경험하고 감탄하게 된다. ꡔ빗살무늬토기의 추억ꡕ의 진화(鎭火)장면이나 ꡔ칼의 노래ꡕ와 ꡔ현의 노래ꡕ에서의 전투장면은 물론, 「화장」에서의 추은주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소위 김훈식 문체가 가진 묘사방법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대명사를 완전히 배제하고 사물 자체만을 지시하는 일반명사에 대한 집착이 있다. 따라서 그의 소설엔 개개의 사물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치는 단어들이 ‘청거북의 배에 각인된 만다라와 같은 문양’(ꡔ빗살무늬토기의 추억, 185쪽)처럼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림이 아니라 문양인 것은 개개의 명사를 연결해 줄(논리적/시간적으로 배열해 줄) 계사도 없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작은 문양 하나하나는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거대한 반복(겹침)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일본 군사의 개별성을 구분하지 못하고, ꡔ현의 노래ꡕ의 야로는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화장」의 주인공은 추은주와 그녀의 딸을 구분하지 못한다.
김훈 소설은 모두 ‘닿을 수 없는 시원성(始原性)’(ꡔ빗살무늬토기의 추억ꡕ, 36쪽)에 대한 애착을 들어내고 있다. 등장인물 모두가 인류의 시작으로 상정된 지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김윤식은 이를 단순하게 ‘문명사에 대한 비판’으로 평가하는데, 이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평가로, 우린 이것을 오히려 무기물화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에로스와 한 쌍으로 이야기되는 ‘타나토스’로 치환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우리를 좌지우지하며 조종하는 어떤 ‘신화적인 끈’으로 봐야 한다. 비극에서 그것은 ‘운명’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그럼 그 ‘시원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김훈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여자의) 자궁에 대한 끈적끈적한 묘사는 이와 같은 ‘시원성’의 비유라는 것을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김훈의 의도야 어찌되었든 간에 이와 같은 시원성은 결코 인류학적인, 그 자체로 무(無)도덕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거기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이순신과 장철민의 ‘자연사’는 비화나 아내의 죽음과 같은 ‘자연사’와 구별된다. 그들은 항상 과격한 스펙터클한 장면(폐허) 연출을 통해 ‘자연사’에 이른다. ‘자연사’는 결코 시간적으로 연출될 수 없다. 하지만 공간적으로는 연출이 가능하다. 다만 그것은 ‘내재화된 자연’, ‘은총 없는 자연’을 의미한다. 김훈은 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연은 무의미하다. 산이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리 없다. 자연은 영원히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 객관물일 뿐이다. 그러한 자연이 인간을 위로하는 사태는 삶의 신비다. 산의 아름다움은 내가 그 아름다움과 사소한 관련도 없다는 소외감으로 다가오곤 했다. (「가건물假建物의 시대 속에서」)
바로 앞에서 우리가 언급한 ‘시원성’은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영원한 인과 법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신 그 다음 구절에 이어지는 ‘자연이 인간을 위로하는 신비로운 사태’와 연관이 있으며, 그것은 항상 ‘소외감(거리감)’을 통해 드러난다. 자연 자체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 때문에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자연이란 의사(擬似)자연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