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에릭호퍼 할아버지의 일기를 읽고있다. 그는 1902년 뉴욕에서 태어난 독일이민자 가정의 자녀였다.
그는 지식인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부두 노동자이다. 책 두 권을 쓴 뒤 작가반열에 올라 이런저런 사색하기를 즐기며 애써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에릭호퍼는 지식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이 그저 많이 배운 사람들이고 엘리트 그룹에 속한 이들이라고 깎아내리는 듯 하다.
나는 지식인이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공부를 많이 해도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은 지식인이 될 수 없다.
지식인이란 말을 들으려면 이웃과 사회, 공동체와 나라의 일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만을 쳐다보고 사는 이들이 진실된 마음으로 그 이웃을 생각한다면 그도 지식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의 지식인인 아니다. 지식인이란 사회의 지도층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지식인이 되려면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할 뿐만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오류를 조금 범할 수 있고 지식에 난 커다란 구멍으로 인해 침몰하지 않게 된다.
에릭호퍼의 생각은 내가 쉽게 이해할 만큼 명쾌하지는 않지만 이해못할만큼 난해하지도 않다. 나는 그저 '아,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하고 글을 읽는다. 그는 애시당초에 무슨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아닌 듯 하다. 노동과 일상과 사소한 대화나 일기쓰기나 손자보기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에 가깝다. 신앙심이 깊은 것 같지도 않고 박애정신이 투철하다는 기미도 글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저런 생각을 그저 그때그때의 자신의 주관대로 생각하는 사람인 듯하다. 나같이 내 주관이 있는 사람이 보기에 술에 물탄 듯한 느낌이지만 문체가 흥미롭고 내용이 쉬운데다가 부두노동자라고 하길래 마음이 끌린다. 이 할아버지는 일을 하지 않은 날에는 일기도 쓰기 싫다고 한다. 이분은 지식인체질이기 이전에 노동자 체질인 것 같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글을 어렵사리 쓰지만 꾸준히 쓰는 듯 하다. 이분의 이런 근면성실한 삶의 태도는 참 본받을 만 하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지식의 완성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사탄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사탄은 이 세상에서는 신이라 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왠만한 지식은 다 섭렵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잊었다. 그야말로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그의 지식은 결국 사람을 멸망의 길로 이끌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쓰인다. 왜 지식의 근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 하였을까. 하나님을 경외할때 이 불의한 세상 조직과 시스템 뒤에 일하고 있는 흑암의 권세를 알게되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 지식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하는 말이다. 사탄권세가 역사하는 것을 알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그러면 지식에 미혹당해 지적으로도 변질된다. 지식에까지 온전해지는 것은 영적으로 사탄권세와 싸워서 이겨나갈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올바른 지식은 영적전쟁에 따라오는 노획물인 것이다.
그런 지식 외에 하늘에 속한 지식이 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 예수님의 겸손하심 등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본질적인 지식이다. 이런 지식은 그야말로 우리 영혼의 깊은 곳으로 인지하는 지식으로 천상에 속한 것이다. 이 지식이야말로 우리 영혼에 복락이 되고 우리의 살과 뼈에 양약이 된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만족을 준다.
에릭 호퍼가 이 지식을 알았다면 이에 대해 일언반구 말이 있었을 것인데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니 하나님을 깊이 만난 적은 없는 모양이다. 모든 사상의 정점에는 휴머니즘과 사랑이 있을찐대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통과해서 가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처럼 모든 스텝을 성실하게 밟으시는 꼼꼼한 분은 없다. 그분은 모든 사상가들과 변론하여 이기실 수 있는 분이며 어떤 소설가와 겨루어도 그보다 더 인간에 대해 잘 아시며 이해하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마틴 로이드 존스와 조나단 에드워즈가 부두노동자였다면 더 온전한 목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부족함이 많은 평범한 목사들이던가. 지나친 천재, 완벽주의, 귀족적 생활이 예수믿고 구원받는 데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머리가 그처럼 좋은 사람들은 교리연구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박애정신을 실현할 수 있누 정치적인 일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예를 들자면 개발도상국과 자본주의의 한계,같은 주제 말이다. 아니면 국제적인 아동성매매 문제나 아동 노동착취에 관한 문제도 좋겠다. 그런 곳에 머리를 쓰다보면 균형잡힌 사고를 하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진보진영의 어떤 사람들이 미국이나 서방, 재벌을 지나치게 적대시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다보면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생각은 결국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 세상 문제에는 꼭 한가지의 정확한 답이 없다. 그런 답이나 사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결론을 내려놓고 매사에 무관심한 것은 그야말로 무관심이지 정답을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스텝을 밟아서 검증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결국 온전한 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 온전함은 사랑이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그림자를 알고 율법을 통과해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만나듯이 모든 불완전한 과정들을 거치면 결국 사랑이 답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 사랑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스텝을 밟아서 얻는 것이다. 지식도 율법과 사랑의 관계를 닮았다. 보수를 거쳐 진보를 지나 인류애를 통과해 보수와 화해하고 정치계를 떠나 참생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생명이 살아나야 삼라만상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영혼이 거듭나서 새생명을 얻는 것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