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집안에 책자와 서류를 정리하다가 문종이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내용물을 펼쳐 보았더니 월하 방장스님께서 쓰신 '춘수만택'이라는 붓글씨가 담긴
소중한 문종이였다.
지난날을 회고 해 보면서 유어면장으로 재직시 2008년 11월경인가 어느 토요일
하동 쌍계사 국사암의 신도 20여분께서 우포늪을 방문한다기에
송강요 유현종 선생으로 부터 안내를 부탁받아 하루 동안 늪지를 안내하면서 소개한 바 있다.
그날 아침 이른 시간에 유어면사무소에서 일정표를 만들어 프린터기에 출력하여 가다 보니
시간이 다소 촉박하였다.
그래서 차의 속도를 조금 내다가 장마면 강리의 영남수리제방인 모래등에 이르러
아침에 살짝 내린 가랑비로 도로가 미끄러운 지점에서 차가 미끌어져
핸들을 바로 잡았으나 도로 옆 국기 게양대를 들이 받고 겨우 멈추었다.
내려서 보니 차량 뒷부분이 형편 없이 망가졌다.
그렇지만 차량을 움직여 보니 운행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속은 지켜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고 송강요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차가 미끌어지는 순간 비록 안전벨트는 메었지만
오른쪽 제방 하단부의 하천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것 같아서 각오를 단단히 했었는데
그래도 게양대를 들이 받고 멈추어 선 것은 오늘 불자들을 안내하려는
돌쇠의 좋은 모습을 부처님의 가피로 큰 사고를 사해 주셨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날 우포늪 안내를 마치고 돌아 와서 그때서야 그 분들께 오늘 아침 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노라 얘기 했더니 하루 종일 어떻게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안내를 하셨나? 라면서 고마워 했다.
국사암 신도회장께서 그날 돌쇠에게 문종이를 말아 놓은 것을 주시면서
귀한것이니 집에 가서 보시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날 사고로 돌쇠의 애마로서 십여년간을 자가용 역할을 잘 해 온
소나타3 차량은 다음 날 폐차를 시켰다.
집에 돌아 와서 문종이를 펼쳐 보니 월하 방장스님께서 붓으로 쓰신
‘春水滿澤(춘수만택)’이라는 성어 였다.
이 글귀는 도연명이 부패한 정치에서 물러 나와 전원으로 돌아가
일생을 전원시인 생활을 하면서 쓴 싯귀의 한 구절에 나오는 ‘춘수만사택’에서
따 온 글귀다.
시를 소개 해 본다.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봄물은 네못을 가득 채우고,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를 많이 만드네,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던지고,
겨울 산마루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났네.
시를 지은이는 이름이 도잠이고 자는 연명이라 흔히 도연명(陶淵明)으로 부른다.
연도는 AD 365~427, 그러니까 동진(東晉)때 심양(尋陽) 시상(柴桑) 사람이다.
현령으로 벼슬하다가 군독우 시찰시 곤복을 입고 나와 만나라고 하자
“나는 오두미 (五斗米 즉 다섯 말 쌀에 해당함)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며
사표를 내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면서 전원으로 돌아 왔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전원에 파 묻혀 농사를 짓고 술을 벗 삼아 한 평생 살았다.
그의 시는 자연 속에서 체험하는 정감과 시골 생활을 잘 표현하고 있다.
본격적인 자연시는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 가서 월하 방장스님은 이 글을 쓰신 후 2003년 12월 4일
입적 하셨다.
법명은 명근으로 법호는 월하로 속명은 윤희중이신 방장스님은
1915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여 경암스님을 은사로 1933년 18세의 나이로
강원도 유점사에서 득도 하신 후 세수 89세, 법납 71세로 입적하신 것이다.
돌쇠는 이 좋은 뜻의 월하 방장스님께서 붓글로 쓰신 문종이를 소중하게
오래 오래 보관하면서 음미하고자 올해 초인 지난 5일 창녕표구사에 표구를 맡겼다.
표구가 완성되면 새롭게 시작하는 돌쇠의 업장에 걸어 두고
항상 마음속의 표상으로 삼고자 한다.
월하 방장스님께서 붓글씨로 쓰신 춘수만택을 사진으로 구경 해 보세요.
![](https://t1.daumcdn.net/cfile/cafe/14361B3C50EBA20C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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