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photo-media.hanmail.net/200601/06/newsmaker/20060106101019.316.6.jpg)
김대중 대통령님 2차망명 사진.
|
![](http://photo-media.hanmail.net/200512/30/newsmaker/20051230101821.842.0.jpg)
|
"비판적 시각 경계 필요함”산수·암기를 잘했던 어린시절… 고학년 때 일본인과 갈등 성적 하락.
|
![](http://photo-media.hanmail.net/200512/30/newsmaker/20051230101821.842.2.jpg)
|
부급장과 부조장 임명장(1936년 하의공립보통학교 4학년) _
하의도에서 4년제 하의공립보통학교(현 하의초등학교)가 생기자 1934년 김대중 어린이는 2학년으로 편입했다. 일제치하인 당시 학령기에 맞춰 학교에 들어간 것은 흔하지 않은 일. 당시 ‘통신부’에 따르면 김대중의 학교성적은 우수했다. 또 학급에서 여러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동급생 정홍준씨는 "산수과목은 따를 자가 없어 구와지만(桑島) 교장에게서 여러 번 칭찬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화제]김대중 대통령님 비공개자료①
"기록없는 정치는 반드시 부패한다.”
|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역사 에세이 ‘역사를 아는 힘’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기록이 정치의 투명성, 공개성, 책임성을 보장하는 수단임을 강조한 말이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사료는 역사를 복원해주고 미래를 일깨운다”는 김대중도서관 사료해지 취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김대중도서관측이 한국학 국제학술회의를 앞두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한국현대사와 관련된 미공개 자료를 공개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 김대중도서관측이 공개한 자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소년 시절 학교 관련 사료와 1970~80년대의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로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 다른 것이거나, 또는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원문이 존재하지 않아 확인되지 않고 있던 것들이다.
류상영 김대중도서관관장은 "우리 현대사의 몇몇 새로운 사실들을 밝히고, 또 앞으로의 진실추구나 역사서술에 도움이 될 수 있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김대중도서관 전시실 공사가 완료되는 오는 3월 일반인에게 공개할 예정인 이 자료를 미리 입수한 ‘뉴스메이커’는 이 자료를 세 차례로 나눠 독점 공개한다. 〈편집자〉
이번에 공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소년 학교 사료는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총 16점. 학교성적이 기입된 통신표와 임명장과 각종 상장 등이 포함된 귀중한 사료이다. 류 관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어린시절 연구와 당시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감을 표시했다.
〈참고자료: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그는 누구인가, 김대중서관 사료 해체 시리즈〉
|
![](http://photo-media.hanmail.net/200512/30/newsmaker/20051230101821.842.1.jpg)
|
초암선생 문집 _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하의도 시절엔 대리(代里)에 있는 서당에 다녔다. 서당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하의도의 특이한 문화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당시 훈장이었던 초암선생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총명함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
![](http://photo-media.hanmail.net/200512/30/newsmaker/20051230101821.842.3.jpg)
|
김대중-김종충 서간집 _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에서 함께 활동했던 인사들에게 준 서신과 이희호 여사의 서신 등 5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염려, 반독재투쟁에 대한 결의, 국내외 민주화운동 노선 등에 관한 진솔한 육성이 담겨 있다. 당시 망명정치인이라 이 서신들은 극도로 비밀리에 오갔다.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키무라(木村), 이춘아(李春我) 등의 가명을 썼다.
김대중이 1975년 대통령선거법 위반혐의로 1년 금고형(12월 13일)을 받고 난 열흘 뒤(12월 21일) 사토 이케다(佐藤沼田)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 "제가 일본 있을 때 누누이 말한 대로 ‘한민족’은 대한민국의 입장을 뚜렷이 하고 공산주의와의 일선(一線)을 명백히 그어가는 자세를 언제나 견지해 나가야 합니다.
…만일 본의 아니게도 일본에서의 노력이 반(反)대한민국으로 국민에게 낙인찍히면 모처럼 애쓴 것이 역으로 되어버릴 것입니다. 특히 ‘민족시보’의 편집에 엄격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위급성이 지대하기 때문에 거듭 강조합니다.”
|
![](http://photo-media.hanmail.net/200512/30/newsmaker/20051230101821.842.4.jpg)
|
목포일보 사장상 _ 김대중은 진학을 위하여 목포로 이사해서 목포제일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이 학교는 학생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동급생이었던 김종충은 "그는 4년 내내 급장을 했지만 안색이 창백하고 허약해서 학자나 엔지니어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면서 "정치인이 됐다는 것은 뜻밖”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은 1939년 이 학교를 수석 졸업, 목포일보 사장상을 수상했다.
|
![](http://photo-media.hanmail.net/200512/30/newsmaker/20051230101821.842.5.jpg)
|
1937년, 38년 김대중 학생의 통신표 _
1938년 조선어 수업이 폐지되었다. 당시 통신표를 보면 1937년까지는 조선어 수업을 하다가 1938년에는 통신표에 조선어 과목이 빠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어 수업 폐지는 소년 김대중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다. 김대중은 그 사건과 관련된 일화를 자서전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아버지가 학교에 있는 내게 볼일이 있어서인지 찾아오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일본말을 할 줄 몰랐다. 아예 배우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나도 학교에서 우리말을 쓰면 안 되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끝내 아버지께 (학교에 온 용무를)여쭤볼 수 없었으며 그 때문에 더욱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39년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초기에는 성적이 좋았으나 고학년이 되면서 일본인들과 갈등 등의 이유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목포상고 동창생인 정진태씨는 "일본인 교사가 한국 학생을 괴롭히기 위해 불가능한 양의 암기숙제를 내줬다”면서 "김대중이 그 많은 양을 한참 동안 외워서 발표하자 일본인 선생은 자신이 궁지에 몰릴까봐 도중에 그만두게 한 일이 있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당시 목포상고 학적부에 따르면 청소년 시기 김대중의 성품과 특성과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학년:담백, 치밀, 활발, 이해력·사고력 우수, 주산 우수, 취미 수영.
5학년:독서를 좋아함, 사물을 비판적으로 보니 경계가 필요함.
2005년 12월 30일 (금) 10:18 뉴스메이커 <김경은 기자>
桐千年老恒藏曲 梅生寒不賣香.
![](https://t1.daumcdn.net/mail_image_src/05img/wallpaper/0512/0512_bg2.gif)
|
♬ 김민기/아름다운 사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hani.co.kr%2Fsection-image%2F05%2Fnews2%2Fnwlt_man4.gif)
♡ lovely christma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