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 전남완도 조사자료 마산문화유산답사회
* * * 완도의 역사와 근황
- 삼국시대
백제의 영지인 새금현에 속함
-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년) 청해진 설치
851년 청해진 파진
- 고려시대
원종12년(1271년)삼별초난때 송징장군 입도
공민왕 원년(1352년)주민 입주 허용
- 조선시대
중종 17년(1522년) 가리포진 설치
고종33년(1896년) 대한제국 칙령 제13호에 의거 영암, 해남, 강진, 장흥에 속한 유인도75개 무인도135개를 통합 19면으로 완도군 설군
- 정부수립 이후
1989년 4월 - 3읍 9면 2출장소
완도읍,금일읍,노화읍,군외면,신지면,고금면,약산면,청산면,소안면,금당면,보길면,생일면,모도출장소,넙도출장소
도75개 무인도135개를 통합 완도군 설군
* * 완도군 고금도 지석묘군
주소 ; 고금면 고금로936번길 47-1
① -지석묘(고인돌)는 청동기를 대표하는 무덤유적이다.
-고금도 지석묘군은 도서지방의 최대 밀집지로 가교리․청용리․덕암리에 걸쳐 분포 하고 있다.
-고금도 일대 지석묘에서 마제석검과 칼돌․대팻날 등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내륙 지역과의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금도 지석묘군은 청동기시대 도서지역의 매장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② -지석묘(支石墓, Dolmen)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이며 지상에 대형 석재를 올려 봉분으로 삼는 형식의 묘제이다.
-전남지역에만 약 20,000여 기가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최대의 분포현황이다.
-완도지역의 지석묘는 금당도를 제외한 완도, 고금도, 신지도 등 대부분의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지석묘는 총 19개군 210여기를 헤아리는데 그 중 고금도에만 6개군 92기가 밀집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고금면 청룡리 지석묘군에서 마제석검이 출토되었다는 전언과 함께 고금면 일대에서 갈돌(碾石)과 대팻날 등이 출토, 수습된 바 있다.
-지석묘의 분포양상이나 출토유물의 성격이 내륙지역과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해안을 통한 지속적인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완도 고금 지석묘군은 서남산과 덕암산 남서부 해발 10-30m정도의 사면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대표적인 가교리 교성지석묘군은 53기가 밀집 분포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가 크다.
-교성리 지석묘군은 가교리 교성마을에서 청룡리로 오는 도로를 따라 1㎞정도 진행하면, 도로 옆에 고인돌쉼터가 조성되어 있고 그 주변에 지석묘 53기가 밀집되어 있다.
-마제석검이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군집형태는 남-북방향으로 길게 분포되어 있는데 뚜렷한 열은 보이지 않으나 대략 4열을 이루고 있다.
-상석의 장축방향은 일정하지 않으나 남-북 또는 북동-남서 방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지석묘군은 완도군 내에서 가장 많은 수의 고인돌이 밀집된 유적이다.
-일부 지석묘가 도로에 절반 가까이 매몰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완도 고금도 지석묘군은 도서지방의 최다 밀집지라는 점도 특징이 있으며 일부분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도서지역의 특징을 고려하여 고금도 지석묘군으로 일괄 지정하여 보존 관리할 가치가 있다.
* * 완도군 묘당도이충무공유적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선조 31) 2월 17일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 8,000여 명을 거느리고 고하도(현 목포시 충무동)로부터 이곳에 옮겨 진을 쳤고, 그해 7월 16일에는 명의 원병으로 진린 장군이 5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해 관왕묘를 세우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으며 연합전선을 펴 왜적의 유적이다.
특히, 이곳은 해수로의 요새지로서 이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옮긴 뒤부터는 장흥, 고흥 등에 출몰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순천방면으로 도주해 버림으로 전투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은 이때 우선 본영을 건설하고 피난민들을 거두는 일 등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공이 고금도에 이르렀을 때는 군의 위세도 장했거니와 섬 안의 민간인도 수만 호에 달해 한산도 시절의 10배나 되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해9월 15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순천 수교(왜교)에 침몰한 왜적을 소탕하고, 다시 10월 9일에는 고금도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가 11월 9일에는 함대가 노량을 향하여 출진하여 충무공이 11월 19일(양력으로는 12월 16일) 아침, 54 세를 일기로 순국하여 이곳으로 유해를 88일간 봉안하였다가 그 이듬해 1599년(선조 32년) 2월 11일 정식으로 발인, 고향인 충남 아산의 묘역으로 옮겼다. 아직도 이 터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수장은 장군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이곳에 서혈하고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관왕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충무사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신지명사십리(薪智鳴沙十里) 해수욕장은 해수에 포함된 미네랄 등 기능성 성분이 전국에서 가장 풍부한 남해안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그 규모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매우 빼어난 곳이다. 모래 우는 소리가 십리밖까지 들린다 하여 『울모래』또는『명사십리』로 불리기도 하였다. 매년 100만명의 피서객이 찾고 있는 명사십리는 길이 3,800m, 폭 150m에 달하는 광활한 은빛 백사장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넓고 울창한 송림, 주차장, 샤워장, 탈의실, 탐방로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연인 및 가족단위 피서객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여름 볕으로 잘 달거진 뜨겁고 부드러운 모래로 하는 모래찜질은 어르신들의 퇴행성 관절염과 신경통에 미네랄이 풍부한 바닷물은 피부병과 피부 노화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공기 비타민이라는 산소 음이온이 대도시의 50배에 이를 정도로 풍부하다.또한 주변의 갯바위는 돔과 농어, 광어 등 어족자원이 풍부해 낚시터로 인기가 높다. 신지명사십리는 완도읍과 신지면을 잇는 신지대교가 2005년 12월 14일 개통되어 육지로 탈바꿈 되었으며, 밤에 보는 신지대교의 야경은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완도에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남해안 최고의 하계 휴양지인 완도 명사십리해수욕장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친환경적인 해변에만 부여되는 파일럿 블루플래그 인증을 획득했다. 파일럿 블루플래그란 글로벌 비영리단체 환경교육재단(FEE)이 해변과 마리나에 부여되는 국제 친환경 인증인 블루플래그 인증의 사전단계이며 해변의 수질과 안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세계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고운모래와 깨끗한 바다, 아름다운 주변경관 등이 잘 어우러진 남해안 최고의 하계 휴양지로 2013년엔 전국 3대 우수해수욕장으로 선정됐고 2014년 소방방재청이 주관한 물놀이 안전명소로 전국 최고점수로 선정됐다.
위 치 :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신리, 대곡리 일원
운영기간 : 2019. 7. 5. ~ 2019. 8. 25.(52일간)
면 적 : 570,000㎡(길이 3,800m, 폭 150m)
* * 완도타워
완도타워의 외부에는 경관조명을 설치하여 야간에 완도타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연출하였으며, 매일 환상적인 레이저 쇼를 볼 수 있다.
해발 : 132m
대지면적 : 52,810㎡
건축면적 : 1,346.66㎡
연면적 : 1,872.91㎡
전망층 면적 : 420.92㎡
전망층 높이 : 51.4m
최고높이 76m
1층에는 특산품 전시장, 관리실, 휴게공간, 크로마키 포토존, 휴게음식점 겸 매점, 영상시설 등으로 구성되었다. 크로마키 포토존은 영상합성을 이용하여 관람객들이 사진촬영을 할 수 있는 공간이며, 영상시설에는 "건강의 섬", "Slow City", "완도의 소리" 를 주제로 구성하여 완도를 상징하는 여러가지 영상 및 소리로 관람객들에게 완도를 소개하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2층에는 이미지 벤치, 포토존, 완도의 인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부로 연결된 전망데크에 완도의 해산물을 응용한 이미지 벤치를 설치하였고, 완도의 인물인 최경주 선수와 장보고 대사를 모형으로 제작하여 관람객들이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였다.
전망층에는 영상모니터와 전망쌍안경이 설치되어 있으며 다도해의 아름다운 전경과 영암의 월출산과 제주도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 * 완도객사(완도 군내리)
-객사란 일종의 숙박시설이다.
-완도읍 군내리 공공도서관 앞에 자리하고 있는 완도객사(청해관)는 이중처마를 가진 전형적인 한국의 단층 건물로 완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조선 경종 2년(1722) 가리포진 124대 첨사 이형이 창건하여 궐패를 모셔놓고 삭망마다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망궐례를 올리던 곳이다.
-고종 6년(1869) 가리포진 204대 첨사 이위소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삼문의 중앙에 호남제일번 이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이는 철종 5년(1854) 가리포진 196대 첨사 홍선이 썼다고 전한다
= 완도읍 주도(珠島)
면적은 0.06㎢이다. 추섬이라고도 하며 완도 부두에서 150m 해상에 있는 무인도이다. 섬의 모습이 구슬과 같다 하여 주도라는 지명을 얻었으며, 원래는 완도에서 300m 이상 떨어져 있었으나 간척공사로 육지가 넓혀짐에 따라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 섬은 식물생태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섬 전체가 후박나무·참식나무·모밀잣밤나무·붉가시나무·돈나무·감탕나무·송악 등의 상록수림과 굴참나무·상수리나무·벚나무·예덕나무·멀구슬나무·팽나무·느티나무 등의 낙엽활엽수림, 고란초 등의 희귀식물까지 총 137여 종의 다양한 식물로 뒤덮여 있다. 조선시대 섬 일대가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어 벌목이 금지되었고 섬 중앙에 서낭당이 있어 나무들이 잘 보존되어 왔다. 근래에 방문객들로 인하여 삼림의 일부가 훼손되자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 완도음식문화거리 == 완도해변공원
* * * 장보고
남북국시대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신라, 일본 간 해상무역을 주도한 상인.
장보고(張寶高)라고도 한다.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활보’, 즉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평민 출신으로 여겨진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대성(大姓)인 장씨(張氏)를 모방해 지은 것이다.
-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고 물에 익숙하였다. 청년기에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다가, 서주(徐州)무령군(武寧軍)에 복무해 장교가 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각지에 절도사(節度使)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장보고는 그러한 지방군벌의 속성과 그들의 군대양성 방법을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山東省)등주(登州)까지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연안 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었고, 양주(揚州)·소주(蘇州)·명주(明州) 등지에서 아라비아·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는 한편, 중국과 신라·일본을 내왕하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자들도 많았다.
해안지역 출신으로 바다에 익숙했던 장보고는 이러한 해상무역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더불어 이해하게 되었다. 한편 그 무렵 당나라나 신라 모두 중앙 집권력이 느슨해져 흉년과 기근이 들면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였고, 바다에서도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해 많은 주민들을 잡아가서 중국에 노예로 팔았으며 무역선도 해적의 위협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보고는 해적들이 신라인을 잡아가는 것에 대해 분노했고, 국제무역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졌으며,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해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볼 야망을 불태웠다. 그러던 그가 중국에서 크게 입신하지 못하자 마침내 828년(흥덕왕 3) 귀국하였다.
장보고는 왕에게 남해의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는 진골귀족간의 대립이 심한 데다, 귀족 연립정권적인 성격을 띤 중앙정부는 거기에까지 적극적인 힘을 뻗칠 여력이 없었다.
이에 그는 왕의 승인을 받고 지방민을 규합해 일종의 민군(民軍) 조직으로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해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였다. 청해진은 건설될 때부터 장보고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그에게 내려진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벼슬도 신라의 관직 체계에는 없는 별도의 직함이었던 점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
청해진을 건설한 뒤, 곧 해적을 소탕해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했는데, 이 해상권을 토대로 당·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하였다. 8세기 중엽 이후 신라 무역상들이 취급한 물품은 752년 일본이 신라 상인으로부터 매입한 물품목록에서 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구리 거울 등의 금속제품과 화전(花氈) 등의 모직물 같은 신라산 물품과 향료·염료·안료 등을 비롯한 당 및 당을 중계지로 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방면의 물품이 적혀 있다. 신라상인은 그 대가로 풀솜[綿]과 비단[絹] 등을 가져갔다.
당나라와의 교역에서도 삼국통일 전에는 주로 토산품이 수출되었으나, 통일 이후에는 고급 직물과 비단 및 금은 세공품이 수출되었다. 또한 당시 신라 귀족들이 애용했던 향료 등의 동남아시아 및 서남아시아산 물품들도 신라 상인의 중계무역으로 수입된 것이다. 장보고의 무역선도 대체로 이러한 물품들과 피혁제품·문방구류들을 취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장보고는 무역 활동과 함께 외교 교섭까지 시도하였다. 840년(문성왕 2)에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해 일본 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냈다. 이러한 시도는 일본측의 국제관례에 따라 거부되었지만 무역은 계속되었다. 또한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의 인솔하에 교관선(交關船)을 보내어 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회역사와 견당매물사의 칭호가 붙은 교역사절을 파견했다는 사실은 그가 일반 무역상인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일본의 지방관과 승려 엔닌(圓仁)이 장보고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귀국을 보살펴줄 것을 탄원했다는 것은 일본·신라·당을 잇는 당대의 해상교통로에서 그의 위세가 국제적으로 인정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산동성 문등현(文登縣)적산촌(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고 이를 지원하였다. 이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이 되며,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서 법회 때에는 한꺼번에 250여 명이 참석했던 적도 있었다. 이처럼 장보고의 세력이 중국 동해안의 신라인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또한 그 자신이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으므로,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여 그들의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812년(헌덕왕 7) 흉년이 들자 170여 명의 굶주린 자들이 바다 건너 중국의 저장(浙江)지역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으며, 이 무렵 일본에 300여 명이 건너갔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분화의 진전과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면서 흉년이라도 들면 많은 빈민들이 삶을 찾아 바다로 나가거나 떠돌아다녔다. 장보고는 이러한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무대를 찾아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한 것이다.
8세기 이래로 왕성했던 신라인의 해상 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해 이들을 묶어 조직화했는데, 이로써 그의 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후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해 하나의 큰 지방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자연히 관여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수도에서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金祐徵)주 01) 일파가 청해진으로 피난 와서 그에게 의탁하였다. 838년(희강왕 3) 수도에서 다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을 틈타 장보고는 군대를 경주에 보내 반격하며 김우징 일파를 강력히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김우징이 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신무왕은 그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는 동시에 식실봉 이천호(食實封二千戶)를 봉했고, 그의 세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중앙귀족들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 뒤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에는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었다. 그러자 중앙정부에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보내 그를 암살시켰다. 장보고가 죽은 뒤 그의 아들과 부장 이창진(李昌珍)에 의해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었다.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어 교역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염장을 비롯한 중앙군의 토벌을 받아 청해진은 완전 궤멸되었다. 851년(문성왕 13) 청해진의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에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렸다.
장보고는 불의에 피살되었으나, 그는 8세기 후반 이후 신라인의 해상활동의 한 정점이 되었다. 또한 신라 말기 각지에서 등장하는 호족세력의 선구적 존재이기도 하였다.
* * 장보고 동상
위 치 : 완도읍 죽청리
사업량(규모) : 지하1층, 지상 3층, 동상 규모 15.5m, 좌대 높이 15.2m
부지면적 : 부대시설 : 부조, 조경, 조망시설 등
재 질 : 6.611㎡(15,670평) | 동상=청동, 좌대=화강암+청동
* * 장보고기념관
청해진의 옛 터에 장보고 대사의 업적을 기리고 해양개척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기념관을 건립하여 역사 문화의식을 함양하는 전 국민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해양관광 명소를 개발하기 위함
= 위 치 :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186외 12필지
= 건립주체 : 완도군청
= 면 적 : 대지 14,472㎡ 건축면적1,739㎡ 전시면적 730㎡
= 개 관 : 2008년 2월 29일 금요일
= 규모구조 : 철근콘크리트조 지상 2층
= 1층안내 : 로비, 영상실, 기획전시실, 수장고, 휴게실
= 2층안내 : 상설전시실(1전시실,바닷길,2전시실
* * 청해진 장보고유적
장좌리 앞 바다에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넓적한 섬 장도(일명 장군섬)가 있다.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180m 쯤 되고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 있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명한 무장 장보고 장군과 그가 이룩한 청해진의 유적지이다. 장보고 장군은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삼해의 해상권을 장악, 신라, 일본, 당나라 3국의 해상교역에서 신라가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의 유적으로 장도에 외성과 내성이 있었다고 전하며 현재 유적 성역화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당시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와, 토기 등 여러 유적과 유물이 장도를 중심으로 완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물이 빠졌을 때는 장도 남쪽 갯벌에서, 원래 청해진을 방비하기 위해 굵은 통나무를 섬 둘레에 박아놓았던 목책의 흔적이 드러난다. 유적으로는 청해진성, 와당편 다수, 토기편, 사당, 법화사지터 등이 있다.
=목책 : 장도의 남쪽과 북서쪽 해안에 약 1,000여개의 직경 40∼80cm의 목책이 남아있다.
=맷돌 : 섬 중앙에 직경 1m, 두께 30cm의 맷돌이 하나 남아 있다. 그 모양이 중국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하다.
=법화사지 : 장좌리 뒤쪽 상황봉 기슭에 다섯 계단으로 여러 채의 큰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 청해진 설치 신라 흥덕왕 3년 장보고는 서남해안의 중심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였다.이후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으로 청해진 본영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기상을 떨치며 해양을 개척하였다.장보고는 한국과 중국,일본을 연결하는 장대한 해상항로를 개척하였으며, 청해진을 본거지로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을 실시하고, 이슬람세계와도 교역한 아시아 최초의 민간 기업인이자 세계적 무역왕이 되었다.
발굴전 청해진 인근지역 주민들의 밭으로 이용되던 장도 청해진 유적지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59년 9월 17일 시라호 태풍이었다. 사라호 태풍이 1200년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청해진 유적의 흔적인 목책을 일부나마 드러나게 했던 것이다. 이후 1982년에는 국립문화재 연구소 학술조사단이 장도유적과 법화사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내용이 한국방송공사 신춘원단 특별기획으로 방영되어 청해진에 대한 학계와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이키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그 결과 1984년 장도유적은 사적 제 308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1년 청해진 유적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주요발굴성과 (1차발굴:1991~1998) 판축토성으로 이루어진 890m에 달하는 성벽과 내부건물지, 굴립주 건물지, 매납유구 등을 확인한 바 있으며, 또한 331m에 달하는 해안 원목렬의 분포 범위 확인과 함께 총 3만여 점이 넘는 많은 유물을 발굴하여 장도가 청해진의 주요근거지였음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다.매납유구는 직경 1m, 깊이 150cm 정도의 원형 구덩이 안에 인위적으로 유물을 매납한 제사와 관련된 유구이다. 수혈 중앙의 가장 바닥에 회청색 경질 대응을 똑바로 안치하고, 대옹과 수혈벽과의 사이에토기편병 2점, 철제 솥 2점 한 개체를 반으로 절단하여 각각 나누어 묻은 철제 반 1점, 청동병 1점, 철제 자물쇠 등의 철기류를 배치 매납하였다.이들 유구와 유물은 청해진 조음도에서 증사를 거행했다는 삼국사기 권 32 잡지 1제사조 의 기록과 견주어 검토해 보아야 할 자료이다. 또한 국가 제사인 중사가 지내졌던 장도유적은 청해진 내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주요발굴 성과 (23차발굴:1999~2001) 7차 발굴조사에서는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관련된 해안 출입 겸 접안시설로 ‘ㄷ'자형 석축석렬 유구와 우물 등 중요 유구들을 발굴하여 청해진의 본영(本營)이 바로 이 장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8차 발굴조사에서는 섬 입구 해안지대에서 노출 된‘ㄷ'자형 석축석렬 유구와 우물의 구조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 지어 그 구조를 파악하였으며, 그 앞의 바다 해저 면에서 기존에 이미 알려져 있던 원목렬과 나란히 또 하나의 목책렬이 지나가고 있음을 새로이 확인하였다. 그 외에도 성벽에 나 있는 배수구를 처음으로 발굴조사 하였고, 청해진의 판축토성 성벽이 내외측 모두 2중 기단석렬을 깔고 조성한 것도 함께 밝혀냈다 ㄷ자형 석축석렬 유구는 21×22m 정도의 규모로서 내외측에 기단석렬을 깔거나 석심을 쌓고, 그 사이에 판축다짐을 하여 만든 해안 구조물로서 국내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물은 깊이 6m로서 바닥에는 통나무를 단 ‘井’자형으로 깔아 기초를 잡고 그 위에 석축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가 좁고 (직경 150cm 내외) 중간이 약간 넓어지다가(직경 180cm 내외) 바닥은 다시 좁아지는 모양이다. 우물의 바닥에는 자갈을 약 50cm 두께로 깔아 물을 정화할 수 있게 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우물 바닥에서 사면편병, 주름무늬병 등의 토기류와 재갈편 철제자귀, 금제고리 등의 금속제 유물 그리고 어망추, 방추차, 숫돌 등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편병류는 구연부만 파손된 채 4점이 나란히 깔려 있어 우물을 축조할 때에 의도적으로 매납한 것이 분명하다고 보여 지며, 이는 우물의 축조및 사용 시기가 청해진 성의 축성 및 운용시기와 동일하였음을 증명한다. 또한 깊이 6m의 이 우물은 청해진 뿐만 아니라 항해 하는 장보고 선단의 주요 식수원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도 서쪽 저지대에서는 성벽의 사이에 좌우 양쪽으로 석축을 하여 막음을 하고, 바닥에는 판석을 깔고 그 사이에는 잡석을 채워 물이 스며들게 하는 암거식 배수구가 조사되었는데 입구가 깔때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물이 잘 모여들게 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판축토성의 배수방법과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장도 청해진 유적에서 발굴조사된 수 많은 유구와 유물들은 장보고의 해상활동의 근거지로서의 청해진의 실체를 규명하는 기초 자료 가 될 것이며, 특히 절대연대가 9세기 전반인 많은 유물들은 앞으로 통일신라시대의‘표지유물’로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사업명칭 : 장도 유적 정비 복원 공사
위 치 :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 787(장도 일대)
공사기간 : 2001 ~ 2009년
공사현황 : 토성 보수공사, 조경 공사, 탐방로 조성, 유구 복원, 매단 석축 정비, 사당 복원, 외성문 복원, 내성문 복원, 고대 복원, 우물 정비, 굴입주 정비 안내판 설치 등등
= 장좌리 당제 및 당굿
-1995년 12월 26일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기능보유자는 김병도 (당굿 농악)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 일출 무렵에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여 장도(將島)의 송대장군당 (宋大將軍堂)에서 지내는 동제이다.
-송대장군은 장보고의 별호로 추정되나 삼별초 항쟁 때 완도에 머물면서 항쟁운동을 벌이며 마을 사람을 보살폈던 송징(宋徵)이라는 설도 있다.
-당제의 순서는 음력 보름 전날 저녁부터 시작된다.
-먼저 굿패의 놀이가 자정까지 이루어지고, 보름날 새벽 3시에 굿패가 바닷가에 모여 제사 준비가 끝날 즈음 굿패들이 풍물을 치며 섬으로 들어온다.
-섬과 당집 주위를 3번 돈 후 해돋이와 함께 제사를 시작한다. 제사가 끝나면 뒷전거리를 하고, -굿패가 당집과 그 주위를 다시 3번 돌고 육지로 돌아온다.
-육지에 닿으면 마을의 우물에서 굿을 하고 활터에 가서 소원을 비는 사정굿을 한다. -굿이 끝나면 집집마다 돌며 농악을 치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데 이를 맞는 집에서는 음식과 술을 대접하며 흥겨운 시간을 보낸다.
* 장보고의 청자
장보고가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가 청자 제작기술 보급이다. 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 해남군 화원면 신덕리일대에는 초기청자 가마터가 집단적으로 분포하고 있다.이 두 지역 초기청자 가마터의 자기들은 해무리굽과무문의 특징을 가진다. 해무리굽 청자는 중국 절강성 월주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중국에서 7세기 부터 등장하여 9세기 전반에 유행한 도자기이다.우리나라 초기 청자의 생산요지는 우리나라 중부와 서남부의 해안을 따라서 분포되어있다.이중 해남 화원면 도요지에 60여기가 집단군을 이루고 있는데 이렇게 대량의 도자기 생산단지를 조성할 수 있는 세력은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청해진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완도법화사지
소 재 지 : 전라남도 완도군완도읍 장좌리 461외
지정현황 : 전라남도 기념물 제131호(1990년 2월 24일 지정)
면 적 : 1,881㎡(569평)
발굴일정 : 총 2차(1990년)
발굴기관 :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목적 : 이 유적은 장보고(청해진)와 관련하여 유적의 성격에 대한 학술적 고증과 정비 복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
발굴내용 : 법화사는 법화사상을 중심으로 한 천태종 계열의 사찰이다. 법화사는 청해진 세력과 무역상인들, 당나라로 가는 구법 승려들의 예배당이자 휴식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총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옛 절터(건물지 7곳)와 기와편, 주름무늬병, 해무리굽 청자편,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주름무늬 토기병 편(8~9세기 유물)과 해무리굽 청자 편 등의 발굴 유물을 통해 살펴 볼 때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초기 경까지도 사찰의창건 및 조영시기를 상한 시킬 수 있다. 01. 1990년에 실시 된 발굴조사가 사찰 전 영역에 걸쳐 실시되지 않은 한계와 그 결과 매장 유물 전체를 볼 수 없었다는 것과 이런 제한적인 결과를 가지고 사찰의 창건에 대해 결론을 성급하게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 02. 발굴 유물 중 주름무늬 토기병은 그 사용시기의 상한이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중 후기(8~9세기)대 까지도 올려 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이다. 03. 장보고 대사의 활동 중 중국 법화원 설립을 고려한다면 청해진 본거지인 완도에도 사찰을 조성하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04. 장보고가 창건하였다는 법화사로 추정한다면 851년 청해진의 혁파로 사찰도 폐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 제주도 법화사지
소 재 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지정현황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 13호(1971년 지정)
발굴내용 : 제주 법화사(法華寺)는 9세기 초 청해진 시기 장보고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법화사지는 제주도의 남쪽 서귀포시 하원동에 위치한다. 제주도는 일찍이 백제세력권 하에서도‘탐라’라는 국호로 대외교류를 한 지역으로 662년(신라 문무왕 2년) 신라에 예속된 이후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고대 범선 항해는 조류의 흐름이 매우 중요한데, 중국 주산군도에서 한반도로 출발하면 서남해 지역이나 제주도는 반드시 지나게 되는 항로였다. 일본 승려 엔닌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기록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항해 할 때도 제주도 남쪽을 거쳐 갔다.
이처럼 제주도는 한반도↔제주도↔중국, 중국↔제주도↔일본, 중국↔한반도↔제주도↔일본 등 여러 국제교역루트에서 징검다리와 같은 곳이었다.장보고는 이러한 중요 기착지인 제주도 남쪽에 법화사를 창건했던 것이다. 이 사찰은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긴 여정의 바닷길 항해에서 안전과 무역상인들의 정신적 휴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1990년에 제주 법화사앞 대포항(옛 당포)에서 완도 법화사와 동일한 주초석이 발견되어 더욱 관심을 끌었다. 법화사지는 1982년 명지대학교박물관에서 1차 발굴조사를 시작한 후, 1990~1992년까지 총 4차에 걸쳐 7천여 평의 유적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절터와 기와편, 상감청자, 백자, 분청사기, 청동등잔, 석제 불상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발굴 결과 대웅전 터는 108평 규모였으며, 기단의 지대석은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사찰인 경주 불굴사와 같은 2단 구조를하고 있었다.
- 중국 적산법화원
소 재 지 :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
지정내용 :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은 장보고대사가 당나라에 살고 있는 신라인들을 위해 세운 사찰이다. 장보고 대사는 이곳을 중심으로 신라인들을 규합하고 무역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의 적산법화원은 1990년 중건하였다. 법화원내에는 장보고대사 영정이 있다
장보고기념관 : 장보고기념관(張保皐紀念館)은 적산법화원 내에 있으며, 2005년 개관하였다.기념관 내에는 장보고대사 관련 유물과 장보고대사 기념비 동상이 있다.
- 일본 연력사
소재지 : 일본 시가현 대진시
지정내용연력사(엔라쿠지)는 일본 천태종의 총 본산이다. 엔닌이 당에서 10년 동안 구법활동을 하고 장보고선단의 도움으로 귀국 한 후 일본 천태종의 3대 좌주로 등극하여 입적하였던 곳이다. 완도군은 이곳 동사(東寺) 문주루(文珠樓(옆에 장보고 대사 기념비를 세웠다.
- 일본 적산선원
소재지 : 일본 교토
지정내용적산선원(赤山嬋院)은 엔닌스님의 유언에 따라 제자들이 세운 선원으로 연력사가 있는 비적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있다. 이곳에는 장보고대사로 추정되는 신라대명신상이 모셔져 있다.
- 일본 대제부 정청 터
소재지 : 일본 후쿠오카 다자이후 시
지정내용대제부(大帝附)는 당과 신라의 무역사 및 관리들이 공 사 무역을 하였던 곳으로 7세기 ~ 12세기 큐슈지역을 관장하였던 행정관청 터이다. 장보고선단은 이곳 다자이후를 중심으로 일본과 무역을 하였다.
- 신안 흑산도 상라산성
소 재 지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읍동
지정현황 : 상라산성(上羅山城)은 흑산도의 상라산 8부 능선에 반달 모양으로 축성된 석성이다. 이 성과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이 9~10c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정도리구계등 (명승 제3호 1972.07.24 지정)
-파도에 씻겨서 아홉 계단 모양으로 쌓인 다양한 크기의 돌들로 유명하다.
-해변의 길이는 800m, 폭 200m이며, 뒤쪽에는 40여 종의 상록수와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넓은 숲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153년 전 신라 42대 흥덕왕 3년에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였을 때 주민들로부터 구계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궁중에서 이 지대를 녹원지로 봉한 바 있다.-크고 작은 갯돌이 해변에 억수로 깔려 있는 곳, 어느 돌 하나를 주워 봐도 모난 부분이 없이 매끈하다.
-달걀만한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수박만큼이나 크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파도에 씻겼으면 저리 둥글고 매끈할까! 구계등은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9개의 계단을 이룬 비탈」이란 뜻이다.
-태고이래 거센 파도에 닳고 닳아진 갯돌이 바다 밑으로부터 해안까지 아홉 계단을 이루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이곳은 참나무, 떡갈나무 등 40여 종의 상록수와 단풍림이 주위에 우거져있어 울창한 숲 속에서 잠시 몸을 맡겨 더위에 지친 몸을 쉬기에 안성맞춤.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삼림욕을 즐길 만도 하다.
= 완도수목원
전남 유일의 난대림 수목원으로 난대림 문화와 전통 창호 문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산림박물관과 나무지방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아열대 온실이 있다. 상왕봉(象王峯)의 후사면에 조성된 완도수목원은 상록활엽수로는 세계 최고·최대의 집단 자생지이다. 2,000ha의 광활한 면적에는 169과 3,449종의 동식물이 자생하거나 이식되어 자라고 있다.주요시설로는 산림전시관, 열대·아열대 온실, 관찰원, 관찰로, 수생식물원, 전망대, 야영장,농구장등이 갖추어져 있다.
완도수목원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2011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공존상’을 수상했다.
= 해양생태전시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해양치유라는 슬로건으로 많은 관심속에 2018.8.8.일 해양생태전시관이 개관 하게 되었다. 기존 장보고기념관, 장도 등 청해진 유적지의 기존 문화·관광 시설과 연계하여 방문하는 관광객과 주민들에게 볼거리, 체험거리 제공 및 해양생태에 대한 교육의 장을 마련하고 해양치유 산업의 중요성을 제공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각 실마다 저마다의 주제를 가지고 완도의 역사, 생태계 현황, 다양한 해양 체험활동 등을 학습하고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