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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모학교 교사로 계시는 백지열님이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이배사)>카페에 올린 닉네임(거북선) 숙제글이다.정기답사에 참여할려고 숙제를 아주 모범적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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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에 대하여
-백지열 -
거북선의 정식 명칭은 귀선(龜船)이다.
‘거북선, 하면 이순신, 이순신, 하면 거북선’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그 이유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고, 임진왜란 중 거북선을 실전에 투입하여 사천, 한산도, 부산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바다의 탱크였던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은 《난중일기》와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발발 전 기록)
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
1592년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해 보았다.
1592년 4월 11일 이제야 (거북선에 쓸) 베로 만든 돛이 만들어졌다.
1592년 4월 12일 아침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를 쏘아 보았다.
(임진왜란 발발 후 기록)
1593년 7월 13일. 순천 소속으로 거북선 격군인 경상도 사람, 사내종 태수가 도망치다 붙잡혔기에 처형했다.
1594년 2월 4일. 늦게 본영 전선과 거북선이 들어왔다.
1594년 2월 15일. 거북선 2척과 보성 1척 등을 멍에로 쓸 나무 자르는 곳으로 보냈다.
1593년 3월 22일 이후에 기록된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을 기록한 메모. 거북선을 돌진시켜 천자(天字)·지자(地字) 총통을 연달아 쏘게 했다.
1593년 3월 22일 이후에 기록된 1592년 6월 2일 당포해전을 기록한 메모. 먼저 거북선을 시켜 곧바로 뚫고 들어가 천자·지자 총통을 연달아 쏘아 그 층루대선(層樓大舡)을 쳐서 깨뜨리게 했다.
- 《난중일기》 (이순신)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사온데(別制龜船),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前設龍頭)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口放大砲),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도 없고,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되는데 이번 싸움에는 돌격장(突擊將)으로 하여금 이 거북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돌진해 들어가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각종 대포를 쏘게 하였습니다.”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그러나, 거북선을 독창적으로 발명한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다. 거북선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한 문헌이나 유물은 전승되지 않는 관계로 거북선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건조했던 임진왜란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거북선, 귀선(龜船)에 대한 최초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임금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면서 귀선(龜船)과 왜선(倭船)으로 꾸민 배가 해전연습을 하는 모양을 구경했다.”
- 《태종실록》, 1413년(태종 13년)
또한,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고 있다.
“귀선의 전법은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
- 《태종실록》, 1415년(태종 15년)
따라서, 거북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裝甲船)이자 전략적 무기라고 볼 수 있으며, 전쟁을 대비하여 이순신 장군에 의하여 새롭게 창제되어, 임진왜란 때 실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사실은 거북선 건조의 타이밍이다. 위의 자료, 《난중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거북선이 건조되어 전투에 필요한 모든 준비가 마쳐진 시기가 바로 1592년 4월 12일이다. 이 날은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하루 전 날로서 거북선의 탄생은 매우 극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사천포 해전에 처음 출전하여 그 위용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산 위와 언덕 아래, 그리고 배를 지키는 세 곳의 왜적들 역시 빗발치듯 철환을 쏘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혹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서 쏘므로 신은 더욱 분하여 배를 급히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배를 두들기자, 여러 장수들도 한꺼번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철환, 장편전, 피령전, 화전, 천자, 지자 대포들을 폭풍우 같이 쏘아대며 저마다 힘을 다했는지라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고, 고막이 상해서 엎어지는 자, 부축해서 끌고 달아나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겠으며, 그리고는 언덕으로 물러가서 감히 앞으로 나올 생각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1. 그렇다면, 거북선은 왜 만들어졌을까?
거북선을 이해하려면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板屋船)’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북선은 판옥선의 상장갑판 윗부분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둥그런 개판(蓋板)을 덮어 수군을 보호한 전함으로서 판옥선을 개조한 특수 전함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판옥선은 명칭대로 갑판이 한 층인 평선 위에 판옥 즉, 상갑판을 얹은 선박을 의미한다. 바닥이 평평한 선체 위에 그보다 폭이 넓은 갑판을 2층 구조로 만든 전선이다. 집으로 치면 아래 갑판은 마루이며, 상장 갑판은 천장인 셈이다. 4면이 나무판으로 둘러싸인 집인 ‘판옥’에서 노역에 종사하는 노군들은 1층 아래 갑판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었고, 2층 상장 갑판에서 수군(水軍)들은 높고 넓은 자리에서 노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효과적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이러한 판옥선의 구조와 형식은 고려 때부터 여진 해적이나 왜구와의 해전 전술과 관련이 있다. 칼싸움에 능한 해적이나 왜구들은 조선 수군에게 빠르게 접근한 후 배로 뛰어들어 싸우는 ‘등선육박전(登船肉薄戰)’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막기 위해 판옥선은 2층 구조로 배를 높고 크게 만들어 적이 우리 배로 뛰어들지 못하게 하였으며, 적선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조선 수군의 장기인 궁술과 포격전을 통해 적선을 격침시키는 전법을 썼다.
그리고, 판옥선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배 구조로 배 밑부분이 평평한 유(U)자인 ‘평저형’으로 방향을 빨리 바꿀 수 있어서 포 사격이 용이했다. 이와 같은 특징은 함포전과 속공전을 가능하게 하여 학익진1) 과 같은 전술에 아주 잘 맞았다.
학익진은 원래 육군의 전술 대형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이 전술을 이용한 것은 조선군의 주력 무기인 총통(대포)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학익진은 여러 화포를 동시에, 그리고 한꺼번에 발사하여 명중률을 높이고, 아울러 화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진법이다. 판옥선은 노를 반대로 젓는 것만으로도 제자리에서 회전이 가능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학익진과 같은 다양한 진법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제자리에서 회전만 하면, 배를 쉽게 돌려서 배 옆면에 설치된 화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왼쪽에서 포를 발사할 때 오른쪽은 장전을 하고, 이 역시 발사가 끝나면 다시 회전하는 식으로 왜선을 공격할 수 있다.
선형이 평저형, 유(U)자형으로 기동력과 방향전환이 용이했던 판옥선을 특성을 이용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한산도 대첩에서 사용된 학익진 전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순신 장군은 미륵도(경남 통영)의 목관의 부하 목자(牧子) 김천손이 난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있다가 왜군의 함대(와키자카 야스하루 함대)를 발견하고 달려와서, 70여 척의 왜선이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대형 함대였고, 피할 수 없는 대전임을 직감했다. 작전은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싸우기에 불리한 견내량에서 왜선 함대를 유인하여 넓은 바다인 한산도 앞 바다까지 유인하여 적을 섬멸하는 계획이었다. 선봉대 5,6척의 판옥선이 먼저 견내량에 정박해 있는 왜군 함대로 돌격해 들어갔으며, 곧이어 조선의 전 함대 또한 견내량으로 뒤따랐다. 출동 준비를 갖췄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즉시 돌격 명령을 내렸고, 왜군 함대로 돌진하던 선봉대는 선체를 급회하여 도망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의 전 함대 또한 일제히 후퇴하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쫓겨 갔던 이순신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갑자기 세 갈래로 분항(分航)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두 쪽으로 갈라진 함대의 좌우측 선수가 곧 왜군 함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즉, 학익진의 대형을 펼치며 왜군 함대를 포위한 것이다. 그리고, 곧 이어 조선 수군의 함포 공격이 이어졌고, 돌격선인 거북선이 좌우에서 달려들며 왜선함대에 좌충우돌 충돌하며, 함포 공격을 통해 왜군 함대를 섬멸하였다.
이러한 판옥선은 임진왜란 중 각 해전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조선 수군이 완승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만큼 활약상이 돋보였다. 즉,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해전, 부산해전 등 주요해전에 동원된 군선 중에서 3척의 거북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판옥선이었다.
하지만, 판옥선은 몇 가지 단점이 있었다. 배가 크다 보니 속도가 느려서 속도가 빨랐던 왜선의 주력 전투함이었던 아타케부네(안택선, 安宅船,) 세키부네(관선, 關船)를 포의 사정거리에서 물리치지 못한다면 등선육박전 전술에 능했던 일본의 조총과 칼에 우리 수군의 포수들이 희생되기 쉬웠다. 따라서 왜군과의 해전에서 승패 여부는 왜선이 빨리 접근하는 것을 막고, 적이 작전을 펼치기 전에 공격할 돌격선이 필요했다. 따라서 거북선은 전함이라기보다 특수하게 제작된 돌격선이라고 볼 수 있다.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에서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 ‘~거북선에 명령하여 적 함대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라는 구절에서 거북선의 주된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
2. 그렇다면, 해전에 투입된 거북선의 실제 크기와 모습은 어떠했을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배를 말한다. 거북선에 대해 최초 언급한 《태종실록》(1413년, 태종 13년)에서 말하는 거북선과는 다른, 이순신 장군이 새롭게 창제하고 개량화한 거북선을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의 설계 자료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관계로 이순신 장군이 창제한 거북선의 실제 크기(제원)와 모습 등 그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은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문헌 기록들을 통해 그 실체를 유추하고 짐작할 뿐이다.
거북선에 대해 묘사한 문헌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사온데(別制龜船),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前設龍頭)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口放大砲),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도 없고,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되는데 이번 싸움에는 돌격장(突擊將)으로 하여금 이 거북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돌진해 들어가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각종 대포를 쏘게 하였습니다.”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공(충무공)이 수영에 있을 때 왜구가 반드시 쳐들어올 것을 알고, 본영 및 소속 포구의 무기와 기계들을 수리, 정비하고 또 쇠사슬을 만들어 앞바다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또 전선을 창작하니(創作戰船) 크기는 판옥선만 한데(大如板屋), 위에는 판자로 덮고(上覆以板), 판자 위에 십자(十字)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칼송곳(刀錐)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혈(銃穴)이 되게 하고, 뒤는 거북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혈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이름을 ‘귀선’이라 하였다. 뒷날 싸울 때에는 거적(編茅)으로 송곳(錐刀)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아가는데, 적이 배에 올라와 덤비려 들다가는 칼송곳 끝에 찔려 죽고, 또 적선이 포위하려 하면 좌우 앞뒤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항상 승리한 것이었다.”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구키(九鬼嘉隆)와 가토(加藤嘉明)는 와키자카(脇坂安治)가 전공을 세운 것을 듣고, 같이 6일에 부산포로부터 나와 바로 해협 입구에 이르러, 8일에는 안골포의 오도(烏島)라는 항(港)에 들어갔다. 그리하였더니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 가량이 공격해 왔다. 대선 중의 3척은 맹선(장님배: 盲船, 거북선)이며,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 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석화시라고 하는 것은 길이가 5척 6촌(약 117.6cm)의 견목(堅木)이며,…… 또 봉화시의 끝은 철로 둥글게 든든히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은 큰 화살(大箭)로 다섯 칸(1칸은 약 1.25m), 또는 세 칸 이내까지 다가와 쏘아대는 것이다.……” (이상은 임진년 7월 10일에 있었던 안골포 해전의 실전상황을 기술한 것이다.)
-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2) (鍋鳥家에 소장된 筆寫原本에서)
“……거북선이 비록 싸움에 이로우나 사부(射夫)와 격군(格軍)의 수가 판옥선의 125인보다 적지 아니하고……”
- 임진왜란 후의 나대용의 상소[1606년(선조 39년)]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 불건 퇴조 때이건 마음대로 간다.”
- 《이충무공전서》의 안설(按說), 명나라 화옥3) , ‘해방의(海防議)’
위의 기록을 종합하여,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순 |
거북선 항목 |
설 명 |
1 |
제작자 |
거북선을 창제하신 분은 이순신 장군이다. 충무공의 장계와 이분의 ‘행장’ 기록에서 밝히고 있다. |
2 |
제작 목적 |
왜적의 침략을 대비한 전략적 전선이라고 볼 수 있다. |
3 |
크기 |
거북선은 판옥선을 토대로 창제되었다는 점에서 판옥선의 크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자료(?)에 의하면 판옥선 중에서 가장 큰 상선(上船)은 19.7~21.2m, 일반적인 판옥선은 15.2~16.6m였으며, 배수량은 200톤 내외로 추정된다. |
4 |
모양(비유) |
귀선(龜船)=거북이 형상=>거북선, 맹선(盲船)='밖에서는 배 안을 엿볼 수 없는' 장갑선=>장님배 |
5 |
용머리(龍頭) |
뱃머리에 용두를 설치하여 용의 아가리를 통하여 대포를 쏘았다. 따라서, 용머리의 용도는 ‘포탑(砲塔)’임을 알 수 있다. |
6 |
개판(蓋板) |
거북의 등처럼 만든 개판(蓋板)에는 쇠못, 칼송곳을 꽂아 적병의 등선(登船)을 막았다. |
7 |
철갑(鐵甲) |
거북선을 철갑선이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철로 덮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철갑을 통해 당파 전술(쳐서 깨뜨림)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적선 속으로 뚫고 들어가도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
8 |
돛대 |
돛대는 세우고 눕히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전투(눕히기)와 항해(세우기)에 유리하였다. |
9 |
승선 인원 |
판옥선에 기준하여 사부(射夫)와 격군(格軍)의 수는 125∼130인 정도라고 볼 수 있다. |
10 |
포의 종류 |
천자포·지자포·현자포·황자포 등의 각종 대포를 장착하였다. |
11 |
포의 수 |
포혈(砲穴)은 좌우 각 현(舷)에 6개, 용두에 1개, 선미(船尾)에 1개가 있어 모두 14문이 사용되고 있다. |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순신 장군이 창제한 거북선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 없지만,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4) [1795년, 정조 19년]에서 거북선의 규모와 특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근거가 된다. 《이충무공전서》은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거북선의 규모와 특징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기록한 문헌이다.
《이충무공전서》의 권수(卷首) ‘도설(圖說)’ 부분에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는 두 장의 거북선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문이 기재되어 있다. 두 장의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으로, 이 중 ‘통제영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서 유래하였으며, 다만 치수에 가감이 있다고 한 만큼 ‘통제영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창제한 거북선의 모습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림에서 두 거북선을 살펴보면 높이, 포 구멍의 위치와 개수, 선창의 위치, 용머리의 구조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두 그림이 정조대의 그림으로 임진왜란 이후 200년의 시간이 흐른 사이에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龍頭)는 거북머리(龜頭)로 되고, 치수가 일반적으로 장대해지는 등 모양과 크기에 있어서 변화가 있었으며, 《충무공전서》의 두 거북선 그림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형태의 이 두 거북선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 여러 종류의 거북선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충무공전서》의 귀선도. 왼쪽이 ‘통제영 귀선’, 오른쪽이 ‘전라좌수영 귀선’이다.>
《이충무공전서》에 소개된 ‘통제영 거북선’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5)
① 속명(俗名)을 본판(本版)이라고 하는 저판(底版)은 10매를 이어 붙였는데, 길이가 1,964cm, 머리쪽 너비 364cm, 허리쪽 너비 440cm, 꼬리쪽 너비 321cm이다.
② 속명이 삼판(杉版)이라는 좌우 현판(舷版)은 각각 7매씩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227cm, 맨 아래 제1판의 길이는 2,060cm이며, 차례대로 길이를 더하여서 맨 위쪽의 제7판에 이르러서는 길이가 3,424cm이고, 두께는 다같이 12cm이다.
③ 속명이 하판(荷版)인 노판(艫版)은 4매를 이어붙였는데, 높이가 4자이고, 제2판 좌우에 현자포(玄字砲) 구멍을 하나씩 뚫었다.
④ 속명이 역시 하판인 축판(舳版)은 7매를 이어 붙였는데 높이가 227cm이고, 위 너비는 440cm, 아래 너비는 321cm인데, 제6판 한가운데에 지름이 31cm 가량 되는 구멍을 뚫어 속명이 치(鴟)인 타(舵)를 꽂게 하였다.
⑤ 좌우 뱃전에는 속명을 신방(信防)이라 하는 난(欄)을 만들고, 난 머리에 속명을 가룡(駕龍)이라 하는 횡량(橫梁)을 건너질러 뱃머리 앞에 닿게 하여,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씌운 것과 같았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패(牌)를 둘러 꽂았으며, 패 위에 또 속명을 언방(偃防)이라 하는 난(欄)을 만들었는데, 뱃전 난간 위에서부터 패란(牌欄)까지 높이는 130cm이다.
⑥ 패란 좌우에 각각 속명을 개판(蓋版) 또는 귀배판(龜背版)이라 하는 11매의 판자를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그 등에 45.5cm 되는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⑦ 뱃머리에는 거북머리를 만들어 붙였는데, 길이는 130cm, 너비는 91cm이며, 그 속에서 황(黃)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하였다.
⑧ 좌우의 노(櫓)는 각각 10개씩이고, 좌우의 패에는 각각 22개씩의 포구멍을 뚫었으며, 12개의 문을 만들었다.
⑨ 거북머리 위에도 2개의 포구멍을 뚫었고, 그 아래에 2개의 문을 만들고 문 곁에도 포구멍을 1개씩 두었다.
⑩ 좌우 복판(覆版)에도 또한 각각 12개의 포구멍을 뚫었으며, ‘귀(龜)’자 기를 꽂았다.
⑪ 좌우 포판(鋪版) 아랫방이 각각 12칸인데, 2칸은 철물을 간직하고, 3칸은 화포 ·궁시(弓矢) ·창검(槍劍)을 간직하며, 19칸은 군사들의 휴식소로 하였다.
⑫ 왼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선장(船將)이 거처하고, 오른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장령(將領)들이 거처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통제영 거북선’의 모습은 판옥선의 갑판 주위에 둘러쳐진 부분(如墻)을 제거하고 갑판 위에 거북 지붕을 덮은 모양이다. 노는 현의 난간 부근에 좌우 각각 10개를 설치하였으며, 전방위 포격을 위해 배 양쪽 22개, 앞쪽 거북머리의 위, 아래 4개, 배 위의 거북등에 12개의 대포 구멍(砲穴)을 설치하였다.
또한, 《이충무공전서》에 소개된 ‘전라좌수영 거북선’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⑬ 군사들이 쉴 때는 포판 아래 있고, 전투 시에는 포판 위로 올라와서 포를 여러 구멍에 걸고 쉴 새 없이 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라좌수영 거북선에 대한 구조는 “치수 ·길이 ·너비는 통제영 거북선과 같으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에 또 귀신머리[鬼頭]를 새겼으며, 복판 위에 거북 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2개의 문이 있으며, 거북 머리 아래에 2개의 포 구멍이 있고, 현판 좌우에 포 구멍이 각각 1개씩 있고, 현란 좌우에 각각 10개씩의, 북판 좌우에 각각 6개씩의 포 구멍이 있고, 좌우의 노는 각각 8개씩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참고로, 1592년 거북선과 1795년 거북선을 비교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6)
<1592년 거북선과 1795년 거북선의 구조 및 전투 장비 비교표>
비교 대상 |
1592년 임진왜란 거북선 |
1795년 통제영 거북선 |
1795년 전라좌수영 거북선 |
배밑 길이 |
15.62m |
20.31m |
20.31m |
용머리 형태 |
수평형 |
수평형 |
수평형 |
용머리 쓰임 |
현자포 발사 |
유황, 염초를 태워 연기를 내뿜는다. |
유황, 염초를 태워 연기를 내뿜는다. |
좌우 대포 수 |
좌우 각 6개 |
소구경 총구멍 좌우 각22개 |
총구멍 10개 |
쇠 송곳 유무 |
쇠 송곳을 꽂았음 |
없음 |
거북 그림을 그림 |
거북등 총구멍 |
없음 |
소구경 총구멍 좌우에 각 12개 |
소구경 좌우에 각 6개 |
<거북선 3D 복원 모형>
<거북선 복원 모형, 서울 전쟁박물관>
현재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고증에 따라 만든 거북선모형이나 1980년 진해 해군기지에서 최초로 진수된 실물크기의 복원귀선은 ≪이충무공전서≫의 도설 중 주로 전라좌수영귀선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철갑과 철첨을 더함으로써 이순신의 거북선을 상징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안설(按設)에 의한 복원연구에 따르면, 선체길이(雙葉尾를 제외한 상장부분) 26∼28m, 선체너비 9∼10m, 선체높이 6∼6.5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밖에 거북선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그림 자료로 이순신 종가에 소장하고 있는 거북선 그림 2장이다. 이순신 후손 중에 수군 통제사를 역임한 사람이 여러 명이므로 후손 중에서 거북선 그림을 집안에 소장하게 됐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순신 종가 소장, 귀선도>
이순신 종가의 거북선은 《이충무공전서》에서 소개된 거북선과는 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판옥선처럼 장대(將臺)7) 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정조대(1776-1800) 이후에 개발된 새로운 종류의 거북선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세기 조선후기 ‘수군조련(水軍操練圖)도’8) , 재미교포 윤원영 사장이 소장한 거북선 그림9) 등을 보면 장대가 있는 거북선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거북선은 장대가 있는 거북선이 일반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순신 종가 거북선 그림 중 하나는 거북선 머리가 없다. 이 때문에 ‘머리 없는 거북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부 연구가들은 이 그림을 근거로 거북선의 머리가 안팎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억측에 가까운 생각이다. 소위 ‘머리 없는 거북선’은 거북선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머리와 장대를 제거한 그림일 뿐 종류가 다른 별도의 거북선은 아니다.
<재미교포 윤원영 사장이 소장한 그림>
<수군조련도, 국립중앙박물관>
<수군조련도 부분 확대>
3. 임진왜란이 끝난 후, 거북선은 어떻게 되었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거북선은 임진왜란 시, 사천, 한산도, 부산포 해전에서 승리하는데 큰 견인차 역할을 담당한 조선 수군의 특수 전투함이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의 오판과 지휘력 상실로 인하여 일본 왜군의 연합 함대에 거제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며 200여 척의 판옥선과 거북선 3척을 모두 잃었었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후, 거북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북선은 노량에서 이순신 장군의 순국과 함께 영원히 사라진 것일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태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이어지는 통시적으로 이어지는 거북선에 대한 실록 기록은 거북선이 한때 만들어지고 사용된 특수 전투함이 아니라 판옥선과 함께 조선의 주력함 중의 하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거북선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1817년까지 거북선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북선은 한 모델이 아닌 여러 종류의 타입(Type)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이후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변사(備邊司)’10) 는 국가적 변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수군을 강화해야 한다고 광해군에게 건의했다. 그러면서 임진년과 정유년에 이순신 장군이 남긴 기록을 광해군에게 상기시켰다. 비변사는 "이순신이 기이한 꾀를 내어 왜적을 막으면서 바다를 방위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록했다"며 "순신이 왜적을 방어하던 법식에 따라 거북선을 만들고 기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광해군은 "빨리 이순신의 거북선을 만들며 무기를 수리하고, 이순신이 한 것과 같이 병사들을 훈련시켜 착실히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며 이 같은 명을 전라좌수사와 우수사에게 각별히 전하라고 지시했다.(주: 광해군이 거북선의 복원에 나섰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1622년(광해 14년)
영남 균세사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신이 전선(戰船)과 거북선의 제도를 상세히 보았더니, 전선은 매양 개조(改造)할 때마다 그 몸뚱이가 점차 길어져 결코 운용(運用)하기가 어렵고 거북선에 있어서는 당초 체제(體制)는 몽충(艨衝)과 같이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시석(矢石)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신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기록한 바를 보았더니, 귀선의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銃) 쏘는 구멍을 내었는데 지금은 각각 여덟 개의 구멍을 내었으니, 거북선이 종전에 비해 지나치게 커진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으므로 개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주: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의 모습에 비해 더 대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 《조선왕조실록》, 1751년(영조 27년)
누선(樓船)11) 을 거북선으로 고칠 것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최동악이 치계(馳啓)12) 하기를, “누선은 거북선처럼 민첩하지 못한데, 본영에는 누선만 많고 거북선을 적습니다. 누선 6척을 거북선으로 고치소서.”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누선 10척 가운데 3척을 거북선으로 만들면 적절할 듯합니다.”하니 따랐다.
- 《조선왕조실록》, 1791년(정조 15년)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전라감사 ‘서상정’의 장계를 보니, 지난 번의 청산진(靑山鎭) 진도부(珍島府)의 대오(隊伍)를 변통한 것으로 인하여 가리포(加里浦)의 거북선 1척이 방결진(防結鎭) 2,190냥과 함께 신지도(新地島)에 옯겨 소속되었으므로, 각종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신도(薪島)의 전선(戰船)을 도로 청산진에 소속시킨다는 것도 변방을 공고하게 하는 대책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작년부터 전최(戰最)와 송정(松政)이 수영(水營)에 옮겨진 뒤에는 배를 만드는 각종 물건을 전적으로 본진에서 책임지게 되어 있어 비는 날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각 고을과 진영의 배를 만드는 재목과 청산진의 관청 건물 재목으로 수영에서 낙인 찍어 준 것이 도합 4,000여 주(株)나 됩니다. 그 결과 폐단이 거듭하여 생기고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송정과 전최를 전례대로 도로 순영에 소속시키고 전선과 거북선도 각 해당 진영에 도로 소속시키며 청산진은 새로 전선을 만들어서 함께 변경을 방비하는 일을 해나가도록 묘당(廟堂)13) 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주소서”라고 하였다.(주: 의정부에서 청산진의 전선을 새로 만드는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조선후기이자 근대에 접어든 시기까지도 거북선이 주력함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 《조선왕조실록》, 1867년(고종 4년)
또한, 임진왜란 이후 거북선 수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4)
시기 |
경상도 |
전라도 |
충청 |
경기 |
계 |
출처 | ||
좌도 |
우도 |
좌도 |
우도 | |||||
1592년(선조 25년) |
· |
· |
3 |
· |
· |
· |
3 |
《임진장초》 |
1716년(숙종 42년) |
1 |
1 |
1 |
1 |
1 |
· |
5 |
《나주목지》 |
1744년(영조 20년) |
6 |
3 |
2 |
1 |
1 |
1 |
14 |
《속대전》 |
1770년(영조 40년) |
14 |
3 |
10 |
7 |
5 |
1 |
40 |
《동국문헌비고》 |
1809년(순조 9년) |
13 |
3 |
7 |
1 |
5 |
1 |
30 |
《만기요람》 |
1817년(순조 17년) |
5 |
· |
7 |
· |
5 |
1 |
18 |
《선안》 |
4. 남아 있던 거북선들은 어디로 갔을까?
현재 거북선은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한 척도 없다. 다만, 복제품으로서, 통영, 사천, 여수 바다 위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서울 전쟁박물관, 천안 독립 기념관 등에서 역사 자료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지금 왜 한 척의 거북선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일까? 1592년 임진왜란 해전의 공로와 임진왜란 이후에도 국방의 중요성이 있어서 복원되고 그 수가 증가되어 남아 있던 그 거북선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에 답은 찾기가 어렵다. 가장 단순한 답은 시간이 흐르면서 거북선의 효용성이 떨어지면서 역사의 시간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순신 장군이 창제한 거북선은 다가올 임진왜란을 준비하면서 돌격용으로 만든 특수 전투함이다. 주로, 당파전술과 화공전술을 통해 적을 침몰시키는 작전을 사용하여 그 가치를 충분히 드러냈었다.
그러나, 거북선은 광해군 때 이순신이 창제한 거북선 복원에 나섰으며, 영조 때 40척의 거북선을 보유하였으며, 고종 때(구한말)까지 거북선이 유지되기는 하였지만, 그 이후로 거북선의 관리 미비와 전술적 가치 및 전술 사용 기회의 상실, 그리고 수군의 약화 등으로 인하여 거북선은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1) 학이 날개를 펴듯 적을 둘러싸서 공격하는 전형
2)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는 왜 함대에 종군한 69세의 도노오카(外岡甚左衛門)가 1592년 7월 28일 부산포에서 작성한 전황기록문서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된 자국 내의 사정과 부산포 침공 이후 왜의 수군이 겪은 연패의 참상을 기록한 것으로 “어리석은 노인의 붓끝이 후일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써놓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맺고 있다.
3) 화옥(華鈺), 명나라 때 사람, 미상 ~ 1608년
4) 조선 시대, 1795(정조 19)년에 윤행임(尹行恁)이 왕명에 의해 편집하고 간행한 충무공 이순신의 전집(全集). 교유(敎諭), 도설(圖說), 세보(世譜), 연표(年表), 시(詩), 잡저(雜著), 장계(狀啓), <난중일기(亂中日記>, 부록 따위가 실려 있고, 책머리에는 정조의 윤음(綸音)이 실려 있다. 14권 8책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출판문화의 표본 전적(典籍)과 이순신 전기(傳記) 자료 및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이 책의 권수도설에는 ‘통제영귀선(統制營龜船)’과 ‘전라좌수영귀선(全羅左水營龜船)’의 귀선도(龜船圖), 그리고 700자 정도의 ‘안설(按說)’이 실려 있다. 거북선의 제도에 관계되는 사료 중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기술된 자료이다. 이것은 물론 정조 때의 거북선을 나타낸 것이나, 숙종에서 영조 때의 거북선도 체제에 있어서는 대략 이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책은 이순신 개인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사 연구에도 중요한 문헌이다. 1918년 최남선이 이 책에 구두점을 찍어 신문관에서 2책으로 출간한 것과 1931년 서장석 등이 6책으로 중간한 것이 전해진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5) ⓵~⑬ 부분은 ‘두피디아(두산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인용했음.
6) 자료출처; 최두환, ‘임란사의 원형 거북선에 관한 연구’, 《해양연구논총》 제22집, 1999년 6월.
7) 사전적인 뜻은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도록, 성(城), 보(堡), 둔(屯), 수(戍) 따위의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지휘실’을 말하며, 거북선의 선장(장군)이 머물며 작전을 지시하는 공간이다.
8) 조선 후기 수군의 해상 기동 훈련 모습을 그린, 19세기 조선시대의 ‘수군조련도’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총회 호주연합교회총회에서 기증했다.
조선 후기 수군은 매년 봄에 수군통제영이 있는 경상도 통영 앞바다에서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이 총 집결하여 합동 훈련을 벌였다. 이를 통영합조(統營合操)라 불렀는데, 바로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통영합조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가 훈련을 총 지휘했다. 화면 중앙에 수군통제사가 타고 있는 대원수함을 중심으로 충청수군, 전라 좌ㆍ우수군, 경상 좌ㆍ우수군의 전함이 사방에 펼쳐져 첨자진(尖字陣)을 이루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거북선을 비롯하여 바다를 메운 수많은 전함이 깃발을 휘날리며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9) 2004년에 미국에 살고 있는 재미교포가 공개한 그림으로 조선 후기 거북선의 구조와 형태를 자세히 알 수 있는 그림이다.
소장자는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서진무역 윤원영 사장이다. 이 그림은 가로 176㎝, 세로 240㎝의 비단천에 세부적인 모양은 다르지만 용의 머리와 거북의 몸체 형태를 지닌 전선 4척의 모습을 담고 있다. 또 거북선 위의 장대에서 회의 중인 장수들과 판옥선 및 소형 선박에서 무기를 점검하는 병사들과 물건을 나르는 민간인들도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윤 사장은 평양 숭실학교 교장을 역임한 미국인 선교사 데이비드 마우리의 손주 며느리로부터 2003년 1월 이 그림을 구입했는데, 구입 당시에 “1867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인근의 성벽을 허물 때 발견된 그림”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조지아대에서 탄소동위원소 측정 기법을 동원해 연대를 측정한 결과 이 그림이 300~35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고 밝혔다. 윤 사장의 설명대로라면 이는 임진왜란(1592-1598) 이후인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 사이 거북선을 비롯한 당시 군선과 수군 장병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10) 조선시대 국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문관과 무관의 합의 기구이다. 1517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11) 누선은 다락을 설비한 조선 후기 전선(戰船)의 별명이며, 고려 때도 대형 누선이 존재했다. 통제사가 탑승하는 통영상선(統營上船), 각도의 수사, 방어사 등이 탑승하는 중급 전선, 각 읍진(邑鎭)의 일반 전선 등 3종류가 있었고, 그들은 모두 상갑판 위에 사령탑으로 쓰는 다락을 설비했는데, 다락이 없는 다른 군선들과 구별하기 위해 ‘누선’이라고 불렀다.
12) ‘보고서를 올린다’는 뜻
13) ①조선 시대, 1400(정종 2)년에 설치한 행정부의 최고 기관. ②종묘와 명당(明堂)이라는 뜻으로 나라와 정치를 다스리는 조정을 이르는 말.
14) 자료출처; 최두환, ‘임란사의 원형 거북선에 관한 연구’, 《해양연구논총》 제22집,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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