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은 상처로 남아
이형국
검진실로 들어갔(섰)다. 하얀 가운의 의사는 내 차트를 보고 있는 모양이다. 책상 옆자리의 팔걸이 없는 작은 둥근 의자를 향해 앉으라는 듯 눈짓했다.
“이 정도는 문제 되지 않아요. 병원에서 처방전 받아 꼬박꼬박 약 잘 먹고, 무엇보다 고기 많이 먹어요. 곧 괜찮아질 거요.”
검진 병원을 나오면서 (교사 임용 결격사유가 되지 않을까) 착잡한 심경이었다. 교사 임용 신체검사였다. 요즈음은 이런 절차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래)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쇠도 씹어 먹는다는 20대 청년이었고, 그간 어디 크게 아팠던 기억이 아예 없었으며, 남보다 나쁘다고 생각한 건 (문제라면)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폐결핵) 경증이라니. 아무리 남에게 전염되지 않으니(고) 교직 생활에 하등 문젯거리가 될 게 없다고 한들, 내 몸이 갉아 먹히고 있다는데. 생각만 하더라(해)도 소름이 끼친(쳤)다.
그 누군가의 저주에 가득 찬 선물인가. 졸업기의 난잡한 생활이 가져다준 냉엄한 선물(업보)인가. 아무리 무개념 삶을 산다 하더라도 내로남불은 하고는 싶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나의 (지나온) 일상생활을 되짚어 보았다.
대학 4년, 어느 정도는 난장판으로 살았다. 젊은 패기에 선술집 순례도 해 봤고 여자 친구도 여럿 사귀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한 건 아니다. 매년 차곡차곡 학점을 쌓아갔다. 가족을 비롯한 암담한 미래가 마음에 차지 않아 비관적 사고思考의 삶이긴 했지만. 그런 생활이 몸과 마음에 자해행위가 될 만큼은 아니었다.
몸속에 그 무시무시(섬찟)한 벌레가 자리 잡고 있다니. 비록 조그맣게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다지만, 싫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벌레를) 내 몸에 스며들게 했단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조리개를 밀었다 당겼다 하면서 나와 접촉했던 하나하나를 점검해 나갔다. 마침내 찾아내었다.(,) 그 벌레의 숙주를. ‘맞다, 그 애다, 나를 ‘형’이라 부르는!’
그 애의 이력을 알기 때문이다. 두뇌가 우수하고, 말이 없는 애였다. 반듯한 집안에서 성장해서인지 내 눈에 그 애에겐 아우라가 있었다. 신입생인 그 애를 처음 보았을 때, 무언가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갈색 눈동자와 흰자위의 경계가 모호한 눈매, 그 무엇을 기다리는가, 턱이 약간 들려진 듯 멍한 눈길이 나의 신경선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애는 입학한 후 얼마 가지 않아 캠퍼스 연인이 되어 교정을 돌아다녔다. 남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그 애의 남자친구는 우연한 기회에 나와 가까워졌다. 타지 출신의 친구라 내 집에 자주 놀러 왔으며, 잠자고 가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는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충청도 출신인 그는 대구라는 곳이 적응하기 참 힘들다며, 군에나 입대할까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몸 상태도 좋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입대에 지장이 될까 걱정을 했다.
2학기 등록을 하지 않고, 그는 휴학했다. 입대했는지 낙향했는지는 아무런 행적을 남기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교정에서 그 애를 보면 혼자 다니는 게, 아마도 그 남자친구하고는 헤어진 것 같았다. 후배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돌았다. 그 애의 눈이 더 깊어진 것 같았다. 그래선지 외롭다는 항변이 눈 속에서 작은 눈물조각처럼 반짝였다.
그 애는 영어 실력이 대단했다. 나는 상대적으로 영어 실력이 달렸다.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부탁했다, 도서관에서 날 좀 도와달라고. 그때는 여자 친구가 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4학년 대표라는 기득권을 이용한 셈이었다. 그 애는 과외 선생처럼 멘토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머리 맞대고 공부도 하고 점심이나 저녁 식사도 같이하면서, 조금씩 정이 들어갔던 게 맞을 거다.
내가 과외가 없는 날은 그 애가 좋아했던 강창 둑을 함께 찾아가 강너머 먼 산을 넘어가는 노을과 황혼을 지켜보았다. 그 애의 눈 속에 모처럼 생기를 찾아들었다. 과외가 있는 날은 가끔 나 대신 가르치기도 했다. 어머니가 (내게) 누군가고 궁금해하였지만, (물었지만,) 후배일 뿐이라며 얼버무렸다. 나와 가까웠던 후배의 여자 친구였던 애와 사랑놀이한다는 건 그 애나 나에게나 모두 불행이었기에, 원치 않았다.
그 애는 빈말이라도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랬다. 각각 마음의 상처가 있었기에 쉽사리 사랑이라는 숭고한 단어를 싸구려처럼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그런 이타적利他的인 사고에서 우린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갖게 됐다. 그런 이면에는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결심 또한 굳어 갔다.
그 애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동기들은 나에게 말했다. “형국아, 니는 듣기 싫겠지만, 넌 겉만 번지르르한 빈 풍선이야, 임마.” 애들 말이 맞는다. (동기들 말이 옳다.) 그때는 분명히 입만 번지르르한(,)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허풍선이었다. 어느 여인이든 나를 영원히 갖기는 거부하거나 주저했을 것이다. 빈 풍선이었으니까.
그 애를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 방에 들어가 걸상에 앉으라 하고 나는 곁에 서서 물었다.
“어제 신체검사에서 폐결핵 경증이 나왔더라. 임용엔 문제없다지만, 니 혹시 결핵이가?”
“응.”
“약 먹으면 괜찮다던데, 닌 안 먹나?”
“응.”
“병원 가 봤나? 뭐라 카드노?”
“응. 약 먹으면 된다 카지, 뭐. 귀찮게 머할라고 먹노.”
확실하고 또렷한 응답은 어디에도 거리낌조차 없었다. 이건 뭔가. ‘될 대로 돼라’ 식이 아닌가. 번뜻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니 가한테 옮은 기가? 가도 이거 맞제?”
그 애는 잠시 꼼짝(하지) 않더니 (이윽고) 걸상에서 일어났다.
“그래, 맞다. 형, 그만해. 머리 아파. 나, 갈란다.”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난 황급히 불러 세웠다. 화가 머리꼭지까지 치밀었다. 고함치듯 부르짖었다. 아마 이웃에 다 들렸을 거였다.
“그래, 니, 그 문 나가면 끝이다. 갈라면 가라.”
그 애는 그렇게 떠나갔다.
학교로 부임한 한 달 후쯤 (그 애가) 찾아왔다. 여전히 그 애의 눈은 허공을 헤매었다. 고속버스에 태워 보내며, 영원한 이별을 확인했다.
지금 내가 그 애를 만난다면, 아니, 나처럼 주름진 얼굴이겠지,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리라. 눈물로 용서를 구하리라. 평생에 가슴에 아리는 일 중 하나인 그 애에게.
그 애가 준 달갑지 않은 선물, 불청객 폐결핵의 잔해는 죽음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지금은 폐 한쪽에 하얗게 움막 치고 있다. 내 죄악을 표징 하는 주홍글씨처럼.
(2022.08) (16.7매 2306자)
○ 단편소설처럼 아련한 사연이군요.
각서를 쓰겠습니다
이광조
“실장 자격정지 2주!”
선언을 하자 (교실 가득)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분위기에 휩쓸려 어정쩡한 미소를 보이던 녀석의 표정은 이내(이) 굳어졌다.
(못된 행동을 하지 말라고) 몇 차례 타일렀으나 그때뿐이었다. 이 삼일 잠잠하다가 다시 설쳤다. 학급 아이들을 다독여야 할 실장이 도리어 분위기를 망치고 있었다. 어리숙한 아이 몇을 제 편으로 만든 다음 세력을(를) 과시하기도 했다.
체육대회 때는 녀석이 종목별 선수명단을 가지고 사라지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누구를 출전시켜야 할지 몰라 당황한 부실장이 본부석에 있던 (담임인) 나를 (황급히) 찾아와서 녀석의 이탈을 알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아이들 틈에 태연하게 끼어드는 녀석을 다그쳤더니 학교 뒤편 울타리를 넘어 PC방에 갔었다고(노라) 실토했다.
실장 자격정지는 여러 차례 경고했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어서 내린 조치였다. 누가 봐도 웃기는 처벌이지만 감투를 좋아하는 아이여서 실장직을 두고 위협하면 몸을 사릴 (자중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징계를 받는 (기간) 동안은 자숙하는 척했지만 그게 얼마 가지 못했다. 6월 하순에 한 차례 더 자격정지를 시켰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웬만하면 그대로 가던(용인하던) 관행을 깨고 2학기 첫날에 녀석의 실장직을 회수했다.(하고 말았다.)
실장 자리에서 밀려난 녀석은 드러내놓고 애를 먹였다. 수업을 빼 먹기도 하고 새로 뽑힌 실장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참다못해 녀석의 어머니를 호출했다. 마주 앉은 어머니는 눈물부터 흘렸다. 남편이 실직해서 살림이 쪼들리는 걸 간신히 참고 지내는데 아이(자식)마저 애를 먹이니 희망이 없다며 울먹였다. 나무라는 제 아버지에 반발하여 여러 날을 친구 집에 머물며 맞선다고 했다. 휘어잡지 못하고 아이 (자식) 눈치만 보는 남편이 답답하기 짝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초등학교 때는 하는 것마다 일등이었고 중학교 때 학생회장도 했던 애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 다리가 부러져도 좋으니 선생님이 혼 좀 내주세요. 체벌동의 각서를 쓰겠습니다.”
가정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학부모(를) 호출을 했는데 도리어 큰 짐을 떠안은 꼴이었다. 긁어 부스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두운 집안 사정을 털어놓으며 체벌동의 각서까지 각오하는 성의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저녁 시간에 아무도 없는 성적관리실로 녀석을 불렀다. 전날 밤에 야간자습을 하지 않고 도망간 일을 꺼내며 준비해둔 몽둥이를 거머쥐었다.
달아날 것을 대비하여 문을 걸어 잠근 다음, 반항하면 죽을 줄 알라고 하고는 몽둥이를 내려쳤다. 한 대 맞은 녀석이 발랑 꼬꾸라지며 죽는 시늉을 하자 구둣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움직일 때마다 다시 시작하겠다고 호통치면서 몽둥이질을 해대자 스무대를 맞을 때까지 까딱하지 않고 버텨냈다.
“바로 가서 경찰에 고발하든지, 네놈이 태도를 바꾸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 앞으로 대충 넘어가는 일은 없어.”
눈물을 흘리며 서 있던 녀석은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교실로 갔다.
그날부터 녀석은 말문을 닫았다. 다른 아이들과 전혀 상종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저녁 시간에도 책과 씨름을 했다. 녀석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반 아이들은 몹시 의아해했다.
다음 해 5월 스승의 날에는 속 썩인 것을 사과하는 편지 한 통이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2학년 담임은 녀석을 천하 모범생이라며 칭찬을 했고, 3학년 때는 모의고사 성적이 문과에서 8등까지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교 200등도 못하던 녀석으로서는 엄청난 도약이었다.
녀석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은 몇 년 뒤 어느 봄날이었다. 제복을 입고 나타난 녀석은 내게 거수경례를 했다. 부산의 모대학 4학년인데, ROTC 제대장이 되어 전체 학군단원을 통솔한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밝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것이 제 본래 성품인데 한 때 많이 뒤틀린 모습만 내비쳤다며 아쉬워(겸연쩍어)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지면서 불만이 쌓였고 성적도 마음대로 되지 않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불량학생이 되더란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다양한 시도를 해 봐도 계속 무너지기만 했는데, 나한테 호되게 맞고 나자 정신이 들었다. 올 것이 왔다고 느꼈고 두들겨 패는 내가 오히려 고마웠다고 했다.
뭉클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 하던가. 제가 안간힘을 쓰고 있던 바로 그때 내가 충격을 가해 준 것이 제대로 먹혀든(,) 운이 좋은 경우였다. 만일 반감을 샀더라면 평생 원한을 품을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도박이었으니 말이다.
(시종일관) 푸근한 자리였다. 어머니가 울며 각서 쓰겠다고 하신 얘기며, 아이들이 내게 고자질 한 일, 3학년 때 성적 오른다는 소릴 듣고 다 내 공이라고 거들먹거렸던 유치한 이야기까지 털어내며 회포를 풀었다.
육사에 가고 싶었는데 성적이 못 미쳐 법학을 전공하지만(한단다. 그렇지만) 법관이 될 생각은 없고 ROTC과정을 통해 장교가 되겠다고 했다. 제대장으로 뽑힌 것이 장군 진급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을 준다며 좋아했다. 어깨를 토닥이며 잘되길 바라는 나에게 녀석은 거수경례를 하며 (척 올려붙이며) 외쳤다.
“장군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요 며칠 사이에 (교권이 무너지는) 험한 소식 두 건을 접했다. 여선생이 수업하고 있는 교단 위에 남자 중학생이 드러누워 스마트폰으로 뒷모습을 찍고 있는 사진이 나돌고,(에 경악한다.) 수업 중 잠자는 것을 깨웠다고 교사를 폭행한 학생이 중형을 받았다는 기사도 보인다.
교권을 보호할 대책 없이 학생 인권만 강조되면서 교사들이 극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어떤 선의에도 그늘은 있기 마련이지만 좀 더 여러 각도에서 세밀하게 빛을 투사했더라면 그걸 (부작용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문득 체벌동의서를 쓰겠다며 내게 매달리던 그 어머니가 떠오른다. (를 떠올린다.) 녀석이 장군이 되어 돌아오는 날 장군의 어머니가 된 (, 환하게 웃는) 그녀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22년 9월 8일, 15.3매)
○ 전형적인 교사상이 존경스럽습니다.
수마睡魔
(선정禪定을 고대하다)
권자이
눈꺼풀은 바위를 달아놓은 것처럼 염치가 없다. (뭘 좀 하려면 내려 감기기 일쑤다.)
☜내 힘으로는 가장 무거워 버틸 수 없는 (벌벌 떠는) 것이 눈꺼풀이 아닐까. (나는) 평소에 낮잠을 자거나 눕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방석을 깔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기만 하면 한 시간 이상을 버티기가 힘이 든다.(겹다.) 명상을 하다 보면 수십 가지 마魔에 시달리지만 수마만큼 강한 것은 없다.
장계자세로 경을 밤 세워 (밤새워) 읽기도하고, 삼천 배 절을 하고 밤을 지세(새우)기도 여러 번 했었다. 좌선은(할 때) 장 죽비를 맞으면서도 불청객인 그(수마)가 소리 없이 찾아든다. 군(대)에 갔다가 온 사람이 군장을 메고 구보를 하면서(중에) 잤다고 하더니, 가부좌를 하고 좌선을 하며 잠을 잘 (들) 때가 있다. 이럴 때 나 자신 한없이 나약함을 느끼며, 오늘도 삼십년 전 만난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나약한 나와는 달리 꿋꿋이 정진하던) 한 사제를 떠올린다.
지금은 템플스테이라 하지만, 80년대 후반 처음 시작할 땐 여름수련대회, 일명 4박5일출가라 라고 했다. 91년부터 내리 6.7(몇)년(간) 여름휴가를 모두 삼보종찰을 비롯해 여러 사찰에서 하는 수련대회로 보냈다. 삼보종찰에서 하는 수련회는 보통7차로 나눠서 하는데 한차에 150명 정도다.
내 기억 속 가톨릭 사제는 92년도 승보총찰 송광사에서 만난 분이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하지만(,) 박 신부라고 성은 기억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친동생이 노동시인 박노해 라고 했기 때문이다. 4박5일 일정 중 3박4일은 묵언정진이라서 각자 어디서 왔으며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 모든 행위는(일정은) 앞에 대회장 스님이 시키는 대로 죽비소리에 맞춰 일정을 진행한다. 자리배치나 이동, (또는) 바루공양 같은 일정은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던가 서로 눈빛으로 소통한다.
자리 배정은 줄과 줄로 등과 등은(을) 맞대고 (줄을 이루는데) 앞은 마주보기도 하는데, 박 신부는 나와 정면으로 마주보는 자리였다. 그는 예불 문이나 경을 한 줄도 책을 보지 않고는 (예불 문이나 경 한 줄조차 읊지)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진지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특히 하루 네 번, 한 번에 두 시간씩 하는 명상은 평소에 오랜 시간 수행하던 사람도 힘들어(겨워) 하는데, 그는 자세가 한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로 앉아 있으면 무릎과 허리 통증은 물론이고, 다리가 저리고 졸음에 시달린다. 장長죽비를 맞으면서도 잔다는 말이 있다 고한다. 그런데 박 신부는 8시간을 움직임 없이 꼿꼿하게 버티고(버틴다.) 매일 새벽에 하는 1(,)080배 절도 일회도 안 거르고 다하는 (거르지 않는) 모습에 도대체 저분은 무엇 하는 누굴까? 몹시 궁금했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 밤에 묵언을 풀고 수련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자신은 가톨릭 사제라고 했다. (임을 밝혔다.) 타종교 특히 불교의 선禪에 관심이 많아 실제 체험 해보고 싶어 신청했단다. 자신들 신앙생활(가톨릭)에도 선과 비슷한 피정이라는 수행이 있지만 이렇게 힘들지는 않단다. 불교를 제대로 수행하는 수행자가 되기가 이렇게 힘든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하면서 자신은 스님이 안 되기를 잘했다고 해서 좌중을 폭소케 했다. 또 4박5일 체험한 이 원동력으로 앞으로 사목활동 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도 했다(.) 어떤 종교에도 없는 불교에서만 있는(만의) 선禪은 육체의 조복으로 정신의 세계를 정화시켜 맑고 청정한 마음자리를 찾아 오도의 경지에 이르는 매력에 빠졌다고도 했다. 앞으로 사목활동을 하면서도 참선은 계속 할 것이라면서 스님들의 도움도 청했다 (다짐하였다.)
지금도 명상을 하려고 앉기만 하면 수마라는 불청객이 소리 없이 슬며시 내안으로 들어온다. 이럴 때 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얼굴도 기억에 없지만 그 사제의 꼿꼿하던 모습이 내 뇌리에 선연해 자세를 고치고 척추를 곧추세운다.
붓을 손에 들(보)면 자연히 무엇인가 쓰고 싶어지고, 악기를 손에 들면 소리를 내보고 싶어진다. 어쩌다 잠깐이라도 경문의 한 구절을 펴놓고 보면 자연히 그 전후의 문장도 눈에 띄게 된다. 그런데서 문득 무엇인가를 생각(연상)해 내고 오랜 세월 동안의 (지나온) 과오를 휴회하고 (뉘우쳐) 고치게 되는 일도 가끔 있다. 이렇게 반복하다보면 습習이되고 자신의 길이 된다. 결국 마음자리가 사물과 접촉해서 얻는 바의 이익이듯이, 바위보다 무거운 불청객이 (수마가) 괴롭혀도 숨 쉬는 날까지 그와 싸울 것이다. (싸워야 할 까닭이다.) 그러다보면 내 근기가 (참고 견디는 힘이) 언젠가 그(수마)를 이기고 선정禪靜에 들 날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 삼보종찰 : 법보종찰(해인사), 불보종찰(통도사), 승보종찰(송광사)
○ 독자의 입장 헤아리기
- 어려운 불교 용어 쉽게 풀어 씀
- 문맥의 전후 맥락 통하게 잇기
진또배기 할머니(미) 마음
이연희
"아웅 아웅 아우 우."
“무슨 소리가 이래 요란하노. 이 녀석아! 시끄럽다. 집 떠나가겠다.”
둥이 우는 소리가 어찌나 크던(큰)지 집이 다 울린다. 삐쩍 마른 몸 어디서 저렇게 큰소리가 나오는지. 누가 이 우렁찬 소리를 저 삐쩍 마른 고양이가 내지르는 소리인 줄 알겠나.
추석(명절 고향 찾는)이라 집에 오는 아들네 세 식구 맞을 준비(가 고양이 건사다.) 시작한다.
☜1단계는 오자마자 양이들 한테 먼저 가는 손녀 다현이를 위해 양이 집 청소부터 시작했다. 양이들은 앞 베란다를 전용 공간으로 쓰고 있다. 2단계로는 5월(몇 달 전에 씻어) 에 씻고 안 씻은 꾀죄죄한 양이들 목욕(도) 시켜야 한다. 희한하게도 내가 목욕시키려고 마음먹으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구석에 숨는다. 욕실의 물소리와 분주하게 준비하는 모습에서 뭔가 느낌을 받나 보다. 그런다고 내가 질쏘냐.
허풍쟁이 둥이부터 잡았다. 목욕할 때마다 과할 정도로 울고 발악해서 허풍쟁이라 부른다. 캣타워에서 안 나오려고 뒷발톱을 바닥에 박고 버틴다. 너한테 할퀼까 (보냐,) 며칠 전에 발톱 깎이길 잘했지. 힘 겨루기에 져서 억지로 잡혀 나오는 게 억울한지 온 집이 울리도록 소리 지른다.
"아웅 아우 우"
(삐쩍) 마른 놈이(답잖게) 목욕할때는 언간 히도 (더욱) 우렁차게 소리 지른다. 살집이 없어도 꼴에 수놈이라고 힘도 제법이네.
'(“)야 이 녀석아! 이웃에서 동물 학대한다고 신고하겠다.'(”)
빈틈만 보이면 튀어 나가려(하)니 문부터 잠그고 목욕시키기 시작한다. 손에 샴푸 '꾹' 짤아 (짜서) 변기 뒤에 숨은 놈 잡아내서(어) 몸 구석구석 씻기기 시작한다. 배와 다리 그리고 엉덩이까지 씻기고 깨끗이 헹군다. 귀도 손질하고 수건으로 1차 물기 닦아서 내보낸다. 거실에 대기하던 남편이 다시 마른 수건으로 구석구석 닦는다.
'(“)휴~'(”)
한 숨 돌리고 이제 순이 씻겨야 한다. 이마에 흐른 땀이 눈으로 들어가서 따갑다. 나이가 드니 왜 얼굴과 머리에만 땀이 나는지. 머리카락도 짝 달라붙어 내 꼴이나 목욕한 둥이(나 오십보백보다.) 꼴과 같다. 아들이 씻기면 이 정도로 반항하지 않는데 이 녀석도 사람 차별을 하네. 뭔지 모를 아들의 위세에 눌려 즉시 항복하는데 나한테는 있는 힘 다 내어 소리 지른다.
눈치 빠른 순이는 어느새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구석의 박스 뒤에 콕 박혀있다.
"순아 목욕해야지. 내일 다현이 오잖아. 깨끗해야 좋지. 어이쿠, 우리 순이 착하다."
"아웅 아우웅."
암고양이답게 우는 소리가 확연히 둥이와 차이가 난다. 살이 쪄서 덩치는 둥이의 1.5배 되는데 소리는 연약하다. 몸은 오동통해도 힘은 별로 세지 않다. 털이 물에 젖어 달라붙어 통실(통)한 배가 더 드러난다.
'(“)아이구 남이 보면 만삭인 줄 알겠다. 뚱순아. 살 좀 빼야겠다 맞제.'(”)
깨끗이 씻겨 1차는 손으로 털을 쭉 훑어 내리며 짠다. 2차는 (그런 다음) 젖은 수건으로,(에 이어) 3차는 마른 수건으로 닦여서(아) 내보냈다. 둥이 보다 털이 길어 많이 닦아야 한다. 대기 중이던 남편이 한 번 더 닦아 제집으로 보낸다. 드라이하면 금방 뽀송뽀송할 텐데. 드라이기 소리에 민감해서 생난리를 치기 때문에 자연 바람으로 말려야 한다. 언젠가 억지로 말려 주려다 나의 온 팔과 다리에 스크래치가 깊이 생겨 (생채기를 낸 탓에) 며칠간 고생했다. 옜다(,) 얼른 가서 햇빛 잘 드는 너의(희) 집에서 말려라. 발버둥 치고 소리 지르느라 에너지 소모가 많았는데 (힘들었을 텐데) 맛있는 간식도 하나 주마. 오후 내내 그루밍을 할 테니 많이 먹어라.
두 녀석이 '부르르 ~' 떨며 털을 털어(대니) 거실 바닥이 온통 물이 튀어 엉망이다. 남편은 물 천지 거실 정리하고 나는 목욕탕 청소를 시작했다. 팥죽같이 끈적끈적한 땀이 흐른다. 두 녀석 씻기고 나니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간 듯하다. (전에 키우던) 별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전에는 세 놈을 씻겼었는데 나도 이제 별 수가 없이 할머니가 됐나 보다. 별이는 덩치가 큰 수놈이라도 목욕시킬 때는 얌전했었는데. 눈이 참으로 이뻤던 별이가 보고 싶다. 내가 저세상 가면 먼저 간 양기랑 별이가 마중 나올 것 같다.
우리 집의 가장 힘드는 추석 준비는 끝났다. 이제부터 나물 볶고 전 몇 가지 부치고 튀김도 해야 한다. 불고기는 어제 양념에 재워놓았다. 늘 아들 네가 다녀가고 나면 집안에 태풍이 지나간 듯하다. 이불 커버(홑청) 빨아야지 목욕탕 정리해야지 다현이 소꿉놀이 세트도 씻어 말려야지.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에 앞서 매일 달력 보며 손꼽아 기다리는, (추석이다.) 뭘 맛있는 거 해서 먹일까 궁리한다.(하기에 바쁘다.) 요런 게 바로 진또배기 할머니 (미) 마음이 아니겠나.
○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반면에 현장감 있습니다.
매미가 울던 날
(말매미 우는 사연)
엄영희
말매미가 울어대는 날이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린다. 고개를 드니 낯선 할아버지 한 분이 서 있다. 주민 대부분 얼굴을 알고 있는데 낯선 분이다. 어느 회사의 작업복 같은 푸른빛 셔츠를 입었다. 움푹 파인 쇄골을 다 드러낸 셔츠 안에 땟국에 전 러닝셔츠가 삐죽이 드러나(있다.) 그렇지 않아도 주름진 할아버지의 목이 더 늘어져 보인다.
“아휴, 이렇게 더운데 어떻게 오셨어요?”
직업적인 이유도 있지만 걸어서 움직이기엔 지독히 더운 날씨였다. 시멘트 포장길의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여름 한낮이 너무 뜨거운지 사람은 기척도 없고 매미 소리만 사방에 가득하다. 밀린 업무를 하느라 책상에 앉았지만, 의자에도 땀이 차고 깜빡깜빡 졸음이 몰려오는 시간이다. 반색하고 맞은 할아버지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쩜 그렇게 친절하게 인사를 잘해(해주나,) 자꾸만 오고 싶다고 했다.
그날 진료와 상담을 받고 간 후 (할아버지는) 매주 같은 요일 비슷한 시간에 진료소를 방문했다. 평범한 지역의 노인으로 그를 대했다. 전직 택시 운전기사였던 할아버지는 자동차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 진료소 앞마당에 주차해 있는 내 자동차의 차종과 번호를 외우고 있는 할아버지와 (어) 대화를 이어갔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던 시절이라 (않아) 마땅히 자동차에 관한 정보를 물어볼 데가 없었다.(마땅찮은 시절이었다.)
활처럼 굽은 허리를 가누며 진료소에 방문하는 날, 할아버지 손에는 구겨진 신문지가 들려있었다. 신문은 날짜가 한참 지난 구문舊聞이긴 했지만 구석구석 정독하는 듯했다. 지면은 노란 형광펜과 붉은 볼펜으로 줄을 긋고, 공부한 흔적으로 입시를 앞둔 수험생의 노트 같았다. 그가 표시해 온 구절들은 수축기 혈압, 확장기 혈압 같은 의학용어들(와), DHA, LDL, HDL 같은 영어로 표기된 단어 등이었다. 무심코 넘기던 용어가 있어 (생경하여) 먼지 앉은 전공 서적을 들춘 적도 있었다. 평범한 시골 노인들과 다르게 그는 지적知的 호기심이 많았다. 지식에 대한 갈망은 날짜 지난 신문을 통해 얻고 있었는데, 그 조력자가 나였다.
할아버지는 목요일마다 전화했다. 자동차 번호를 기억하고 있던 그는 나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다.
“어제 신작로에서 소장님 차 지나가는 거 봤어예.”
쌍꺼풀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말을 했을 (걸어올) 때 손녀처럼 예뻐해 주는 것이라고 호의로 받아들였다.
"언제 나와 같이 밥을 한 번 먹였으면 해요. (밥 한 끼 했으면 좋겠어요.)"
(노인의 살가운 말에,) 할 때는 ‘내가 돈을 내더라도 정말 밥 (한번 같이) 을 같이 한 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외롭게 사는 할머니들과 종종 밥을 같이 먹기도 한 터였다.
날이 갈수록 나에 대한 할아버지의 관심은 늘어갔다. 아니 그의 망상이 커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동차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고, 사는 (할아버지) 마을에 내 차가 보이면 본인을 만나러 왔다고 짐작했다.
퇴근 무렵 할아버지가 진료소를 방문했다. 볼일을 마치고도 그는 가지 않았다. 대화를 이어가며 그의 생각을 알아내고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는 내가 퇴근하는 차에 동승해서 우리 집으로 가서 남편과 결투할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는 남편을 경쟁자로 삼고 있었다. (그러지 마리시란) 설득이 먹혀들지 않았다. 경찰을 부를 만큼 사건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러기에는 노인이(할아버지가) 너무 초라하고 늙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주민들이 알게 되었고, 그 후 방문은 뜸해졌지만, 전화는 계속되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에게서) 힘이 빠진 목소리로 전화했다.(가 왔다.)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를 위로했으나 망상은 그치지 않았다. 이제 본인이 죽으면 남편이 좋아할 것이라며(,) 애 먹이지 않고 죽어서 좋겠다며 자학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다. 두려운 목요일이었다.
행복한 직장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위기가 찾아왔다. 직장을 옮겨야 하나?, 한편으론 힘이 빠진 노인이기에 망정이지 젊은 남자가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늙고 병든 스토커였던 할아버지는 몇 달 후에 저세상으로 가셨다. (세상을 떴다.)
외로운 것은 병이 된다. 할아버지는 혼자 살고 있었다. 성격이 외골수이고 괴팍스럽기도 해서 가족과 떨어져 지냈고, 이웃과 교류도 없었다.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오랫동안 고립된 노인이었다. 너무 고독하고 외롭다 보니 짧은 인사 한마디에 망상의 터널 속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혼자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우려하는 최악의 두려움이다. 그러기에 인간을 제(재)제하는 벌 중의 하나로 고립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라틴어로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글자는 ‘사람들 사이에 있음’을 의미하고, ‘죽다’는 표현은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왕따가 무서운 것이다, 일인가구는 늘어나고, 관계를 단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지면을 장식한다.
매미가 울던 날, 찾아왔던 할아버지는 직장생활을 위기에 빠뜨린 불청객이었다. 매미가 종족 보존을 위한 짝짓기를 위해서 울어댔다면, 할아버지가 내게 한 행동들은 외롭다는 또 다른 부르짖음이 아니었을까.
☜늦여름 말매미가 울어댄다. (14.0매)
○ 소쩍새 우는 사연(박재란 노래)
나를 소개합니다
이지연
내 이름은 ‘애기’입니다. 중년이 다 되어 이제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지만 그 애가 아직도 애기라 부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와 돌림자로 이름을 지어야 (붙여야) 된다며 그렇게 지어주더라고요. 또 하나 ‘초롱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이건 내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이 집 안주인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처음 내가 이 집 딸아이와 만났을 때는 내가 아직 아기였습니다. 생면부지의 나를 안고 귀엽다며 좋아하더라고요. 나도 첫눈에 그 애가 마음에 들어 엄마 생각이 그리 나지 않았습니다. 그 애와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면 꼭 엄마 체온이 전해지는 것 같아 편안했습니다. 하지만 나 혼자 있는 낮 시간에는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바깥에서 조그마한 소리만 나도 싸울 태세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내가 어리고 덩치가 작다고 깔보면 큰일이니까요.
내가 아기√티를 벗어났을 때 그 애는 나를 데리고 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이 집에서는 내가 실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저씨가 조그마한 집을 대문 옆에 놓더니 나보고 거기서 지내라고 하데요. 그 애 방으로 가고 싶었지만 안 된다고 하니 환경에 적응(체념)해야지 별수 있나요. 하지만 바깥 구경을 실컷 할 수 있으니 좋은 점도 있답니다.
그런데 근래에 그 애가 좀 변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나를 데리고 공원이나 친구들이 있는 카페에 자주 가더니 요즘은 뭐가 그리 바쁜지 나하고 놀아주지도 않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스쳐 지나며 인사만 합니다. “애기야, 안녕.” 나도 인사하려고 그 애 발치로 다가서지만 쌩하니 대문을 나섭니다. 나는 허탈하게 그 애 꽁무니를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또 참습니다. 그 애가 내게 물어본다면 사랑이 식었냐고 투정을 하고 싶습니다. 산책도 하고 싶고 안아 달라고 떼를 쓰고도 싶습니다. 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으니 벙어리 냉가슴만 앓습니다.
이런 내가 안쓰러운지 안주인이 가끔 나와 놀아주고 산책도 시켜줍니다. 그래서 그 애보다 안주인이 훨씬 마음에 드는 요즘입니다. 산책을 가면 숨이 좀 차서 내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낍니다. 편도 20분 거리 단산지(池) 입구까지 갔다√오는데도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다른 친구들한테서는 들리지 않는데 내 소리가 너무 커서 친구들 보기에 민망합니다. 하지만 산책을 하면 기분전환이 되어 아주 좋습니다. 숨만 좀 찰 뿐이지 특별히 아픈 데는 없어서 걱정은 안 합니다.
저녁 먹고 설거지가 끝난 줄 다 아는데 안주인이 나오지 않으면 내가 큰소리로 부릅니다. 그러면 산책을 가든지, 산책은 가지 않더라도 (아니면) 최소한 나한테로 와서 머리를 쓰다듬고 간식을 주며 놀아주니까요. 가끔은 목줄을 풀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는 집 위쪽에 있는 목공소 마당까지 잽싸게 달려갑니다. 안주인이 내 이름 ‘초롱이’를 부르면 나는 단거리 선수처럼 달려와(가) 안기지요. 그렇게 몇 번 왕복 달리기를 하고 나면 기분이 얼마나 좋아지는지 모릅니다.
나한테 호의적인 사람이 또 한사람 더 있습니다. 이 집 제일 어른이신 할머니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나에게 일용한 양식을 챙겨 줍니다. 물그릇에 물도 갈아주고 내 밥그릇을 넘보는 좁쌀보다도 작은 개미들도 잡아줍니다. 개미가 내 밥그릇에 있으면 입맛이 싹 없어지거든요. 할머니가 그걸 알아차리고 개미가 얼씬도 못하게 혼을 냅니다.
나는 소리에 민감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자동차 소리를 구분합니다. 차에서 내리는 발자국 소리가 안주인인지, 그 애인지 다 압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대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나는 배를 하늘로 향하게 누워 무한 신뢰의 자세로 맞이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취하지 않는 포즈지요.
그러나 이 집 식구와 관련 없는 소리에는 신경이 곤두섭니다. 골목에 자동차만 지나다녀도 신경이 날까(카)로워집니다. 이 집에 오는 택배 차도 예외는 아닙니다. 자주 오는 아저씨와는 안면을 텄지만, 물건을 내려두고 갈 때까지 빨리 나가라고 윽박지릅니다. 나는 남들이 이 집에 머무는 게 싫습니다. 신경이 무척 쓰입니다. 오래 전에 불청객이 (양상군자가) 이 집 아들 방에 들어가서 식구들을 불안하게 한 일이 있다는 걸 들었거든요. 대문 옆에 내 집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주인아저씨가 시끄럽다고 혼낼 때도 있지만 가끔은 나보고 밥값 한다는 말의 의미를 압니다.
나는 5kg도 안 되는 작은 체구지만 이 집에 들어서는 사람은 물론 지나다니는 차까지 검열하는 든든한 보초병입니다. 이상으로 요쿠셔테리어 ‘애기’이자 ‘초롱이’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인생살이 별나다고 들었지만, 성은 ‘요쿠셔테리어’로서 ‘애기’이자 ‘초롱이’ 같은 견생도 있다니까요.)
불청객
배정행
여자의 눈물에 약한 게 남자라던가. 하물며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아들이 이 세상에 있을까?
우리가 대구로 이사오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일은 시작되었다. 시어머니가 아들을 불러 (시동생 빚보증 서주길) 조용히 부탁한 일이었는데 며느리인 내가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빚 보증이라는 말도 안√되는 제도가 유행하던 때였다. 혈연,√지연,√학연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그 의리라는 알량한 끈에 묶여 `죽어도 같이 죽자'는 운동이 들불처럼 타오르던 시절이었다.
친정에도 그 유행 바람을 피 가지 못 하고 쓰러진 형제가 있었다. 가훈을 아예 `보증을 서지 말자' 로 정하자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집안 분위기가 흉흉했다. 보증이라는 말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은 가족의 일원이었던 내가 그런 일에 동의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보증 서달란)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자고 남편에게 단단히 일러 두었다. 그렇게 그 일은 (보증 건은) 며느리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잠잠해 지는가 싶었다. 마치 태풍 전야처럼 으시시한 고요가 감돌던 어느 날 저녁 전화벨이 울렸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애써 평화로운 척 지내고 있었으나 한 번 들은 말을 못 들은 걸로 하자는 건 억지였을 뿐, 마음 한 구석이 늘 찝찝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부모가 공기업에 다니는 호구 아들을 단념할 리가 없지. 시어머니는 이제 이판사판이었다. 부탁의 차원을 넘어선 읍소의 단계, 아니 그것은 차라리 눈물로 위장한 협박이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었다.) 그 날은 배수진을 치고 전화한 듯 했다.
시댁의 두 채였던 집은 이미 차압된 상태였으니 믿을 건 우리 뿐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증 서지 않으면 시부모와 시동생네 모두 길바닥으로 나앉게 생겼다고 울먹이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이쯤√되면 거절과 동시애(에) 우리는 천륜을 저버린 불효자식으로 낙인을 찍혀버리는 셈이니 더√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비장한 침묵이 흘렀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설마 우리가 그 빚을 떠안을 일은 없겠지 하며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 했다. 이번 일로 시동생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면 시댁도 차압에서 풀려날 것이고(다.) 그 공으로 (일이 잘 풀리면) 집 두 채 중 한 채는 일찍 우리 앞으로 증여해 주겠다는 시부모의 밑밥에 귀가 솔깃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빚 보증 잘못 서서 평생 월급 차압 당한 채 반쪽 짜리 월급 받고 있는 직장 동료가 주변에 있(다.) 는 데도(그럼에도) 위험한 결정을 내린 데는 시어머니의 눈물이 제일 큰 몫을 차지(주효)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내려야 하는 결정은 그야말로 내가 이 남자와 같이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의 (절체절명의)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 헤어질 결심을 하지 (에 이르지) 못했으니 동의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남편의 보증으로 또 다른 대출을 받은 시동생은 잠시 형편이 피는 듯 햇(했)으나 이내 도산해 버렸다. 그전에 받은 대출이 이미 많았고 전대미문의 금융 위기 때문에 이자 납입하(넣)기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두 번 이상 이자가 지연되면 이자납입 독촉장은 보증인에게도 동시에 날아간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남편이 동생에게 이자 상환을 독촉하고 그러면 또 어떻게 급전을 구해 은행 대출 담당자 입을 틀어 막고 하면서 시동생은 몇 번의 위기를 넘겼다.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마지막 둑이 터져버린 날 불청객이 쳐들어 왔다. 홍수로 물이 불어난 하천처럼, 온 집안을 삼켜 버릴 것 같은 시뻘건 황토물이 넘실대며 안방까지 밀려√들어온 것이었다. 대출√상환 고지서는 이제 아예 주소를 우리 집으로 바꿔버린 듯 뻔뻔스럽게 우리 집 우편함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우리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최후의 통첩이 날아왔다. 대출금을 일시불로 상환하지 않으면 남편의 월급을 차압√하겠다는 것이었다. 남편 말에 의하면 그렇게 된 사람은 승진 대상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것은 더 큰 일이었다. 목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이런저런 의논 끝에 우리는 퇴직금 중간 정산이라는 막다른 길을 택하기로 했다.
시아버지는 그 일이 터지고 얼마 되지 않아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났)다. 노숙자가 되다시피 하며 빚쟁이들 피해 다니느라고 갑자기 노인처럼 늙어버린 시동생이 시아버지 장례식장에 나타나자(났다.) 시댁 식구들의 곡소리는 부대가 (한탄 곡이) 되었다. 모두 부둥켜 안고 한 덩어리가 되어 뒹구는데 원수처럼 눈을 홀(흘)기고 있던 나의(내) 눈에도 나도 모르게 뜨거운 (비통한)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남편과 이혼을 하지 않는 이상 동고 동락을 같이 해야 하는 부부이기에 기쁨만 같이 하고 슬픔은 외면하려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어머니는 그 후로 우리 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 원칙주의자에 대쪽 같이 꼿꼿한 성격의 소유자인 분이시건 만 예전의 그 일로 (보증 건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일 때문인지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우리 식구들과 잘 지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고부갈등이라는 말은 남의 얘기가 돼버린 게 나와 시어머니 사이다. (렸다.) 그리 살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큰 문제도 없다. 그것이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고부 관계 아니던가.
모든 일을 내 편에서 이해하시려고 애쓰는 마음, 내 말을 무조건 따라주시는 자세는 다른 시어머니의 모습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리라. 이 나이 되니 이쯤 되면 우리 가족사도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겠구나 하고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려 본다. 퇴직금이 반토막 나서 늦은 나이에도 열심히 일해야 하는 건 남편 몫이 되었지만.
○ 그것이, 그래서 그런지 : 가능한 한 쓰지 않기(바로 지칭)
첫댓글 햐 김상영샘 총만 쐈다더니 정말 빠르시네요
벌써 합평을 올리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