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장 난세(亂世)의 도모
"어떻게 생각하나?"
무림맹의 군사 제갈현의 집무실. 제갈현의 앞에는 각종 보고서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것들을 다 읽은 후, 그는 굳은 얼굴로 앞에 앉아있는 인물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왠지 상대의 표정이 난감했다.
"글쎄, 저로서도 뭐라고……."
상대의 대답에 제갈현은 상당히 못마땅하다는 투였다.
"쯧쯔, 정보만 수집하는 게 밀전에서 하는 일이 아니야. 그것을 분석해서 뭔가 결론을 이끌어내야지."
밀전(密殿)!
정식 명칭은 '밀법집행전(密法執行殿)'이었지만 보통은 그냥 밀전이라고 줄여 부른다.
정사대전 직후 무림맹이 새롭게 출범하면서 역시 새롭게 만들어진 부서였는데, 거의 제갈현 단독으로 그 인원을 뽑고 조직을 구성했었다. 지난 5년간 실질적으로 제갈현에게 직속된 부서나 다름없었다. (추노가 무림맹을 탈출하기 전에 속해있었던 밀각이 바로 밀전 소속이다.)
이곳은 한 마디로, 필요한 각종 정보를 수집 분석하는 부서였다. 어느 단체건 특히, 그 단체가 거대하면 할수록 정보를 담당하는 기관의 권력이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 정보라는 것이 외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 즉, 그 단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정보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가지 쯤은 감추고 싶은 약점 같은 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법. 그런 것까지 다 '정보'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밀전은 단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정보수집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까지 취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게다가 무림맹 내에서 선참후계(先斬後啓 )가 공식적으로 허용되는 유일한 곳이었다.
공식적으로 혹은 합법적으로, 무림맹의 최고 수장인 맹주에게 사전에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곳이란 소리다.
초창기 때에도 그랬지만, 특히 최근 2~3년 사이에는 밀전 단독으로 즉, 제갈현 혼자서 일을 처리한 후 나중에 그 결과에 대해 맹주에게 보고를 했지, 먼저 허락을 얻거나 상의 따위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굳이 자신의 허락을 구할 필요 없이 알아서 일을 처결하라는 식으로 처음부터 매검이 그런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근래에는 그것이 아예 당연한 것처럼 굳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거의 당연한 결과로 보고 있었다.
'천하 5패'란 존재가 있는 상황에서 무림맹의 맹주가 절대 권한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이었는데, 그 와중에 5패를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조율하는 인물이 제갈현이었다. 게다가 매검이 그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보내고 있었으니 실질적인 무림맹의 맹주는 제갈현이라는 말까지 떠도는 실정이었다.
물론, 이런 이유보다 훨씬 더 큰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훨씬 더 큰 이유가.
지금 제갈현 앞에서 진땀을 흘리는 인물은 밀전의 전주였다.
"죄… 죄송합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따져 보는 게 좋겠군. 일단, 호북의 이름 모를 산속에서 발견된 1,000구의 강시들. 당연히 혈교의 강시들일 텐데… 그것들이 대규모의 적들과 충돌하지 않은 것은 정말로 확실한가?"
"보고대로라면 확실합니다. 대규모 적들과 싸웠다면 어떻게든 그 흔적이 남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제갈현은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만 연신 저었다.
몇 명 안되는 초고수들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 근처에서 발견된 사람 크기의 구덩이 50개가 그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강시들을 해치우기 위해 땅속에 숨어 매복 따위를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렇게 땅속에 은신한다는 것은…….'
땅속에 두더쥐처럼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하는 행동은 무공이 높아진다고 저절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 그런 훈련을 거치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무인이라면 그따위 수련을 할 리가 없었다. 살수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살수들이 강시들을 벤다는 것이 도무지… 강시들을 대상으로 청부를 하는 미친놈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한참을 고민하던 제갈현은 답이 잘 안 나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밀전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근처에서 잡혔었던 자가 추노는 확실한 건가?"
"인상착의도 그렇고 잡힐 때 일체의 변명도 없었답니다."
"거참, 분명히 감숙으로 도망갔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뭐 볼 일이 있다고 호북에 갑자기 나타난 거야?"
"그… 글쎄요."
다시 한번 밀전주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제대로 대답을 못했지만, 제갈현은 어차피 제대로 된 답변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는 태도였다. 그는 다시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그런데 혈교의 강시들이 왜 호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일까? 도무지 그 이유가…? 그 정도라면 거의 사활을 걸다시피 뭔가를 추진했다는 뜻인데… 가만, 혈교에서 사활을 걸다시피…?'
제갈현은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자네! 지금 즉시 복건으로 사람을 보내게."
"예?"
"천마화시가 될 뻔 했다는 그 아이가… 월영문이라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만."
"그 아이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고, 그 아비는 계속 월영문에 남아 있다고 했었지?"
"예, 맞습니다."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 그 아이가 혈교에 납치되기 전에 생겼던 일들에 대해 상세히 알아오고 특히, 그 아이의 소재를 확실하게 알아오게."
"…?"
제갈현의 지시에 밀전주는 상당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추노가 도주를 한 후, 복건에서 혈교가 벌인 사건에 관한 것 때문에 밀전에서 남궁추를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고, 그때 남궁추가 밀전의 인물에게 한 말이 있었다.
"그 아이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네. 최대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자네들에게도 밝힐 수 없으니 양해하게나."
밀전의 권력이랄까, 그런 것은 한 마디로 막강 그 자체였다. 천하 5패를 제외한 대부분 문파들이 이들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한 실정이었다. 그 동안 몇몇 중소문파가 거의 누명에 가까운 죄목으로 화(禍)를 당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이 모두 밀전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는 밀전이었지만, 상대가 남궁추라는 5패의 핵심인물이라면 그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밀전에서도 그 장소를 밝히라는 식으로 강요를 할 수는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제갈현의 말은 밀전주가 듣기에 왠지 남궁추의 말에 대한 어떤 불신의 의미로 느껴졌던 것이다.
"군사님. 설마, 남궁추가 우리에게 뭔가 속이는 것이라도…?"
상당히 의아한 눈빛의 밀전주를 향해 제갈현이 상당히 의미심장한 눈길로 답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그러나 제갈현의 눈빛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확신까지는 절대 아니었다.
"아무래도 복건에서의 일이 조금은 찜찜했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하자는 것이지. 남궁추를 상대로 상세하게 조사하기는 좀 껄끄럽지 않겠나?"
"아,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웬만하면 너무 요란 떨지 말게나. 혹여 남궁추의 귀에 들어가면 쓸데없이 기분 상해할 지도 모르니."
"알겠습니다. 그럼."
그런데 밖으로 나가려는 밀전주를 제갈현이 다시 불러 세웠다.
"아, 잠깐."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보고서를 쭉 보니 추노를 구해간 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던데, 단서조차 안 남긴 것인가?"
밀전주는 제갈현의 말에 약간 곤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그에 관련된 보고는 올라왔는데… 아무래도 확인을 한 번 더 해봐야 할 것 같아서 군사님께는 보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확인을…? 일단, 어떤 식으로 올라왔는지 말해보게."
"그게… 워낙 황당한 보고라서……."
"황당한? 괜찮으니 일단 얘기해 봐."
"그게… 보고대로라면……."
잠시 망설이던 밀전주가 거의 송구스럽다는 표정까지 지으며 간신히 그에 대한 설명을 했다.
"추노를 구해간 흉수는… 구전상에나 떠도는 취권의 고수가 틀림없다고 합니다."
"취권?"
제갈현은 밀전주의 예상대로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저 역시 너무 황당해서 지금 다시 확인 중입니다. 조금 있으면……."
"허 거참. 어쨌든, 달랑 그렇게만 보고를 올리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보고가 올라왔겠지."
"아, 예. 그렇게 판단된 근거로는……."
그런데 밀전주의 말을 다 들은 후, 제갈현의 표정은 밀전주의 예상과는 약간 틀렸다. 어이없다는 식의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취권에 대한 근거랍시고 올려온 보고를 전해 들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제갈현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이없다는 표정보다는 영문을 잘 모르겠다는 표정에 더 가까웠다.
"군사님. 왜 그러십니까?"
뭔가 상념에 빠져있던 제갈현은 밀전주의 질문에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응? 아, 아닐세. 자네는 이만 나가보게. 지시한 것 차질 없도록 하고."
"그럼… 이만."
"아, 그리고 내가 혼자서 생각할 게 좀 있으니, 식사 전까지는 나를 방해하지 말라고 수하들에게 이르게."
밀전주가 나간 후에도 제갈현의 상념은 계속 되었다.
'당연히 어떤 놈이 장난으로 보고를 올렸을 리는 없겠고… 술 냄새가 주위에 진동을 할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 아무리 소지부에 있는 하급무사라 해도 그렇지, 70명이라…….'
지부에는 고수급들이 꽤 있었지만, 소지부에는 정말이지 고수라 불릴 정도의 인물은 없었다. 아예 내공조차 제대로 익힌 인물조차 지부장을 포함, 한두 명을 제외하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림맹을 위협할 만한 세력이 있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고수급들이 소지부에까지 포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중원 전역에 걸쳐 수백 개가 넘는 모든 소지부들마다 고수급들을 배치할 만한 인력도 없었다.
'취권?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고…….'
제갈현에게는 목숨을 걸라 해도 걸 수 있을 정도의 확신이 있었다.
천하를 통틀어 무공에 대해 가장 박식한 인물은 누굴까? 대부분 현 무림맹주를 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었는데, 실제로는 바로 제갈현이었다.
물론, 그 깊이까지 논한다면 좀 틀려지겠지만, 단순히 무공의 종류나 이름 따위의 얕은 지식으로써 가장 폭넓게 무공에 대한 지식을 가진 인물은 제갈현이었다. 좀 달리 표현하자면, 제갈가의 인물들 모두가 그러했다. 그중에서 당연히 제갈현이 가장 많은 지식을 가졌다는 뜻이다.
제갈세가(諸葛世家)!
정사대전 이전, 소위 '9대 문파'라는 아홉 개의 문파가 중원을 지배하던 시절, 세간에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
중원 무림은 9대 문파에 의해 움직이고, 9대 문파는 제갈세가에 의해 움직인다.
지금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그 당시에도 제갈 가문이 중원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했다. 특히,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마도무림과 큰 분란이라도 나면 다른 모든 문파들을 진두지휘하다시피 할 정도였다. 대규모 싸움에서는 무공보다는 치밀한 작전 같은 것이 더욱 중요한 법이었다.
그러나 제갈세가는 결코 무림의 패자가 될 수는 없었다. 일반인에 비해 몇 배는 뛰어난 머리를 타고나서였을까? 제갈가의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타고 났다. 물론, 일반인에 비해서도 그렇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상승의 무공을 익히기에 부적합한 체질이란 소리다.
1인자가 될 수 없고 2인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던 제갈가의 인물들.
그들이 그렇게 무공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갖추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무조건 1인자보다 많이 알아야 했다. 1인자의 질문에 답을 못하는 2인자는 전혀 필요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지난 수백 년간 거의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제갈가의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인물이 있었다. 제갈세가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기록될 것이 거의 확실한 인물이. 거의…….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일부러 술을 먹고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는 없겠고……."
다시 확인을 한다고는 했지만, 제갈현은 취권(?)의 고수에 대해 자꾸 신경이 쓰였다. 좀 잔인한 말로, 차라리 소지부 하나가 흔적도 없이 몰살당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은 그래도 제갈현의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자신의 상식조차 벗어난 일이었기에 그가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추노가 소지부의 무사들에게 잡힌 것 자체가 급작스런 일이었으니…….'
뭔가 나름대로 가닥이 잡히고 있던 제갈현이었는데, 밖에서 수하의 음성이 들렸다.
"군사님!"
순간, 제갈현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자신의 생각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밀전주를 내보내면서 그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 있었다. 밀전주가 깜빡하고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면 모를까, 뭔가 또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의미였다.
"무슨 일인가?"
"맹주께서 찾으십니다."
맹주가 찾는다는데 그런 일을 늦춰서 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수하가 제갈현의 지시를 어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제갈현의 표정이 좀 묘했다.
"맹주가 나를 찾는다고?"
"예, 군사님."
맹내에서 맹주가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군사라는 직책은 맹주와 가장 많은 접촉을 해야 할 직책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제갈현의 얼굴은 영문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거참, 내가 찾아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양반인데… 나를 직접 불러?'
믿기 힘든 사실이겠지만, 최근 2~3년간, 맹주가 먼저 제갈현을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 *
"어서 오시오. 군사."
제갈현이 천룡실(天龍室 - 맹주의 거처였는데, 공식적으로 집무를 보는 곳은 아니었다. 맹주의 침실과 맞붙어 있는 곳으로 뭔가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눌 때 주로 애용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태사의에 앉아있던 중년인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다학매검(多學梅劍)!
무림맹의 맹주이자 화산파의 장문인으로서 보통은 그냥 '매검'이라고 불려졌다.
정사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화산의 대장로의 신분이었다가 정사대전이 끝나면서 화산의 장문인이 되는 것과 동시에 무림맹주의 직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의 사형인 당시 화산의 장문인은 마교의 태상교주에게 입은 부상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장문의 직에서 물러난 것이었는데, 그의 사부이자 당시 무림맹주였던 매화검선(梅花劍仙)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돌연 맹주의 직에서 물러났었다.
천하무림을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림맹의 맹주에다가 천하 5패의 하나인 화산파의 장문인. 단지 신분만으로 따진다면 명실상부한 현 무림의 최고 인물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따진다면 분명히…….
"맹주를 뵈옵니다."
"군사에게 한 가지 꼭 물어볼 것이 있어 불렀소."
그런데 맹주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어 상대에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갈현의 검미가 상당히 찌푸려지고 있었다. 맹주가 자신에게 한 말 때문이 아니라, 그의 행동 때문이었다.
매검은 제갈현에게 자리도 권하지 않았고 게다가 태사의에 계속 앉은 상태였다. 물론 맹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제갈현에게 만은 절대 당연한 행동이 아니었다.
무림맹 내에서 일부 원로급들을 제외한 공식 직함을 가진 인물들 중에서, 제갈현만이 유일하게 맹주를 만나면서 시립(侍立)하지 않고 앉을 수 있었다. 군사란 직책은 그리 해도 된다는 식으로 따로 규정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저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이었다.
제갈현이 맹주를 찾을 때마다 언제나 자리를 권했던 것은 물론이고, 게다가 맹주인 매검이 언제나 태사의에서 내려와 중앙에 있는 탁자에 마주보고 앉곤 했었다. 이런 모습은 무림맹에서 그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런데 지금, 매검은 태사의에서 일어서기는커녕, 아예 상대에게 자리조차 권하지 않고 있었다.
"말씀… 하십시오."
제갈현으로서는 실로 근 3년 만에 맹주의 앞에서 시립한 상태로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었다.
"언제까지 있어야 하오?"
"……."
완전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데 지금 제갈현의 표정. 영문을 모르겠다는 사람의 표정 치고는 지나치게 굳어있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물었소."
지금 매검의 발언. 맹주의 직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말이나 다름없이 들린다.
천재 중의 천재라는 제갈현이 그 뜻을 못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맹주님, 그게 무슨…? 설마, 사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그런데 확실히 이상했다. 맹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제갈현의 지금 표정. 어떤 당황의 빛이 아니었다. 그제야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매검의 발언. 단호했다.
"나 말고도 맹주를 할 사람은 많지 않겠소?"
"……."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제갈현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다.
'오늘, 완전히 작정을 했군.'
갑자기 제갈현이 바닥에 털썩 부복을 했다.
"맹주님! 그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지금 무림은 맹주님의 영도 아래 마교와의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거의 복구하면서 태평성대를 열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혹여 맹주께서 급작스럽게 사퇴라도 하신다면, 다시 한번 무림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부디 재고하여 주십시오."
제법 구구절절이 애절한 제갈현의 호소였다. 그러나 매검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이해를 못하겠군."
"예?"
"아부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아부를 하는지 모르겠단 소리요."
"……."
"그 혼란이란 것에 대해 말해 보겠소?"
"일단……."
제갈현은 말을 하면서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상관의 앞에서 짓기에는 상당히 불경스런 표정인 것만은 확실했다.
"화산파도 그렇고, 맹주의 의형(義兄) 되시는 분이 장문인으로 있는 무당파에 대한 악성 소문이 돌면서, 그 두개 문파의 위명에 누를 끼칠 일이 발생할 우려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소문이 돌겠소?"
순간, 제갈현의 표정이 흠칫하고 있었다.
'이 양반이… 막 나가자는 것인가?'
"맹주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예전의 마교주와 무당의 장문인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친했다. 그래서 정사대전이 날 것을 미리 알고 그 전에 일부러 문파를 봉문시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뭐,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는 인물들이 제법 있습니다. 게다가 화산파의 핵심인물의 여식 중 하나가 마교주와 정분이 났다는 식의 말도 안되는 생각까지 하는 인물들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맹주께서 계시니 감히 그런 소리를 입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겠지만, 맹주께서 물러나시면 그런 소리가 나돌지 않을 것이라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단지 두 개의 문파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전체 무림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 5패의 두 곳이 아닙니까?"
"그럴듯 하구려. 그런데 왠지, 그런 소문이 나돌 우려가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들 것이란 뜻으로 들리는구려."
"……."
"그런데 혹시 이런 소문은 안 돌겠소?"
"……?"
"벽력탄만 사용해도 무림의 공적이 되는 판에, 황실에 엄청난 뇌물을 뿌려 폭약을 구입하고……."
"맹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게요?"
매검의 말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들리는 제갈현의 고함소리!
당연히 너무나 불경스런 행동이었다. 게다가 제갈현은 매검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한 불쾌감 따위는 매검에게 없는 듯했다.
"왜 그리 흥분하시오. 군사?"
제갈현도 자신의 실책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내가 지금…….'
제갈현은 바로 안색을 고치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어쨌든,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지금 혈교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에는 매검이 제갈현의 말을 끊었다.
"마교조차 물리친 군사가 아니오? 혈교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설마 마교만 하겠소? 그깟 혈교가 군사의 상대나 되겠소이까? 하하."
절대 칭찬이 아니란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상당히 복잡한 표정으로 대꾸조차 못하고 있는 제갈현을 향해 매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혈교와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되는대로 다시 이야기 합시다. 물론, 나를 만족시켜줄 대답을 기다리겠소."
"그렇게… 하지요."
제갈현이 나간 후, 매검은 한숨을 한 번 길게 내쉬면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렇게 후련한 것을! 그동안 혼자 끙끙 앓으면서 허수아비 노릇이나 하고 있었다니… 왜 진즉에…….'
"하하하!"
갑자기 터져 나온 매검의 웃음소리! 천룡실을 나선 후 어디론가 향하던 제갈현의 귀에도 당연히 들렸다.
'계속해서 허수아비 노릇을 할 인물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는 좀 빠르군. 하긴,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 해도…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더는 못 하겠다는 소린데…….'
그런데 갑자기 제갈현은 실소를 짓는다.
'풋! 5년 전과는 달리 이제는 내가 오히려 잃을 것이 더 많아졌다는 얘긴가? 어쨌든… 새로운 맹주를 물색하긴 해야겠는데… 좀 다루기 쉬운 인물 중에 하나로… 그러나 객관적으로 말도 안되는 인물을 고를 수는 없겠는데… 가만?'
갑자기 제갈현의 눈이 번뜩였다.
'영웅이 난세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난세가 영웅을 만드는 법. 이번 혈교와의 일을 잘 이용하면…….'
자신의 처소로 돌아간 제갈현은 무림맹의 장로 중 한 명을 호출했다. 정사대전 이전까지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지금 그의 위상은 '태상교주'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을 정도였다.
"오랜만입니다. 군사."
"어서 오십시오. 용장로."
제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반갑게 맞이하는 인물.
용천악(龍天岳)!
60도 채 안된 나이에 무림맹의 장로에까지 오른 인물로써 현재 무림맹의 장로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물론, 일반인들에게야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겠지만, 무림의 고수들에게는 그리 많은 나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무림맹에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를 제외한 장로들의 평균 나이는 70이 훨씬 넘었다.
그렇다고 용천악이란 자가 개인의 능력이 그렇게까지 특출 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신상에 대해 알고 나면 '능력도 별로면서 어떻게 저 나이에 무림맹의 장로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천하 5패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대한 문파들 중 하나가 '용씨세가'였는데 거기의 가주가 용천악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차기 천하제일인으로까지 평가받는 천룡대협 용화린! 그가 용천악의 아들이다.
그런데 용천악의 얼굴이 난감하다 못해 거의 당혹스러울 정도로 변했다.
"아닙니다. 어찌 감히, 어서 자리에 앉으십시오."
제갈현이 상석이랄 수 있는 자신의 자리를 용천악에게 권했던 것이다. 거의 파격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현재 제갈현의 위세는 용천악보다 연배가 높은 장로를 맞이할 때조차 자리를 권하기는커녕, 아예 일어서지도 않을 정도였다.
"하하! 어려워 말고 앉으십시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계속되는 권유에 역시 계속해서 사양하는 용천악이었는데.
"그냥, 앉으십시오."
"……."
거의 명령조나 다름없는 제갈현의 말투였다.
"아, 예, 그럼……."
용천악은 거의 진땀까지 흘리며 어쩔 수 없이 상대가 권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용천악이 자리에 앉은 후, 제갈현도 마주보며 앉았다. 그는 약간 굳었던 표정을 풀며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기 무림맹주가 될지도 모르는 분에게 어찌 제가 상석을 권하지 않겠습니까?"
"예? 그게 무슨…?"
용천악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현 맹주께서 아마 조만간 자리에서 물러서실 것 같습니다."
그제야 용천악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상대의 말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예? 맹주께서요? 그런데 아까 그 말씀은…?"
"제가 생각하기에… 차기 맹주는 아마도 용장로께서 제일 유력할 것 같습니다만."
"예? 도무지… 아니, 저 같은 인물이 감히… 허, 말도 안되는 소리는 그만 하십시오."
지금 용천악의 표정은 거의 어이가 없다는 수준이었다. 농담이나 장난이라고 보기엔 제갈현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제갈현의 눈빛이 상당히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알긴 아는군. 그래서 당신이 맹주가 되어야 한다는 게야.'
"혈교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아십니까?"
너무나 난데없는 질문에 용천악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반사적으로 대답은 하고 있었다.
"예? 그거야… 복건에서 일이 잘 마무리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 그래요?"
"게다가 그 혈교의 힘이 예상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아니, 어느 정도기에?"
"예전의 마교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
순간, 용천악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경악에 겨워할 뿐이었다.
예전의 마교라니! 그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그는 순간적이나마, 거의 공포심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아, 이런, 꼭 그렇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예?"
"그렇게 잘못 알려질 확률도 있다는 것이지요."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용천악을 향해 제갈현이 계속 입을 열었다.
"혈교와 우리와 큰 싸움이 벌어질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물론, 우리가 당연히 이길 텐데, 그랬을 때… 실제 혈교의 힘보다 약간 부풀린다고 해서 우리에게 그리 나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아… 예."
용천악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다.
어떤 단체건 간에 적대 세력의 힘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는 일은 종종 있어온 일이었다. 다소 부풀려진 적들을 물리치면서 당연히 그 단체의 위상도 조금은 올라가겠고.
"이런 가정을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
"혈교와 우리가 싸운다. 그런데 혈교는 과거의 마교에 못지않을 정도로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그렇든, 알려지기를 그렇든 그것이야 별 상관없겠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그런데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진 혈교를 완전히 괴멸시키는 과정에서,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가장 큰 수훈을 세운 인물이 있다면, 만약 그런 인물이 탄생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순간, 용천악도 뭔가를 느꼈는지 안색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 인물이라면, 무림맹의 맹주로 추대하기에 손색이 없지 않겠습니까?"
"……."
"혈교의 싸움에서 용씨세가가 선봉에 서서 모든 것을 주도할 수도 있겠고……."
이제야 용천악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상대의 의도는 자신을 무림맹주로 만들어주겠다는 뜻이다. 상대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절대 불가능이 아니다. 아니, 상대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오! 이런 일이.'
어떤 경악에 가까운 놀람도 순간. 그의 가슴은 한없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일개 성의 성주만 시켜줘도 감지덕지할 인물에게 황제를 시켜주겠다고 하고 있었으니.
용천악이 흥분과 설렘으로 정신없이 요동치는 가슴을 달래고 있을 무렵, 제갈현이 묘한 표정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큰 아드님이 아직 미혼이지요?"
큰 아들이라면, 천룡대협 용화린을 뜻했다. 용천악은 전혀 영문을 모르면서 그저 반사적으로 대답을 한다.
"예? 아, 그렇…습니다만."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혼처라도 있으십니까?"
용씨세가의 인근에 있는 주씨세가의 여식과 혼담이 오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용천악은 사실대로 말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아, 그게… 아직은 딱히… 그런데 그것은 왜…?"
"하하! 마침 잘 되었군요. 아드님에 비해 많이 부족하겠지만, 저에게 과년한 여식이 하나 있는데, 한 번 시간을 내서 만나보시겠습니까?"
며칠 후, 주씨세가의 가주 주원천에게 한 장의 서찰이 배달되었다. 용씨세가의 가주로부터 온 서찰이었다. 아주 짤막한.
[죄송합니다. 사정이 생겨 혼담을 파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4권에서 계속…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