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가짜 명의(名醫)
(1)
장수옥(張水玉)은 송림(松林)이 끝나는 곳에 세워진 고풍스런 모습의 장원(莊園)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에게서 풍기는 살벌한 기도(氣道).
궁형(宮刑)으로 말아 올린 탐스런 머리카락만 아니라면 사내라고 착각했으리라.
큼직큼직한 이목구비(耳目口鼻)에 웬만한 사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우람한 팔뚝과 여인의 허리둘레와 비슷한 허벅지 굵기, 거기다 등에는 장정 서너 명은 달려들어야 간신히 들 수 있는 청룡도(靑龍刀)까지 비껴 멨으니 무리도 아니다.
"이곳이 천화의원(天華醫院)이란 말이지."
장수옥이 오른 손을 위로 치켜올리자 화려한 가마를 끌고 뒤를 따르던 사내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십여 명쯤 되어 보이는 사내들은 하나같이 기골(肌骨)이 장대하고, 이마에는 무공수위를 상징해주는 듯 태양혈(太陽穴)이 툭 불거져 나와 일견(一見)하기에도 평범한 가마꾼이나 시비라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다 왔나요?"
가마 앞을 가린 추렴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살랑이는 바람과 같이 너무나 부드러웠다.
"예, 아가씨.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안으로 들어가 의원님을 먼저 만나고 나오겠습니다."
장수옥은 가마를 향해 일별을 던지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장원을 향해 걸어갔다.
정문을 지난 그녀는 마치 오래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처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방향을 잡고 걸음을 내디뎠다.
굳이 찾느라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바람 속에는 환자의 환부(患部)에서 풍기는 비릿한 고름 냄새와 상처 썩는 냄새, 그리고 여러 가지 약재 냄새가 그녀가 갈 방향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월동문을 통과해, 고아한 주인의 풍취가 느껴지는 정원을 가로지르자 커다란 전각 하나가 나타났다.
전각 앞 뜨락에는 외팔이와 꼽추, 절뚝발이 사내, 금방이라도 명이 끊어질 것 같은 늙은이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던 장수옥(張水玉)의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들 가운데 그녀를 거들떠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화의원을 찾아온 그들은 저마다 불치의 병을 갖고 있었고, 제 한 몸 돌보기에도 바쁜 판에 어찌 그녀에게까지 신경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흥! 아무리 촌것들이고, 세상 물정 모르는 무지렁이들이라지만 나 파천나찰(破天羅刹)의 얼굴조차 몰라본단 말이냐?'
평상시 같았으면 없는 시비거리라도 만들어 혼찌검을 냈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장수옥은 의원실 앞으로 곧장 걸어가 포권(包拳)의 예를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삼가 고명하신 천화의원의 만약사(萬藥士)님께 인사 여쭈옵니다. 이 몸은 신수궁(神樹宮)의 집사인 장수옥으로 본가(本家)의 보옥이신 운가려(雲佳麗) 소저의 질환을 치유코자 이렇게 만 약사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고, 장수옥은 만약사라는 사람이 못 들었나 싶어 다시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다리고 있었소."
장수옥의 눈가에 한 줄기 예리한 빛이 번뜩였다.
'이상하다. 만약사는 예순이 넘은 늙은이라고 들었는데 지금의 이 목소리는 너무 젊지 않은가?'
드르륵……
문이 열렸다.
장수옥은 허리를 숙인 자세에서 살짝 눈만 치켜 떠 의원실 안을 들여다 봤다.
"헉!"
장수옥은 자기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의외였다.
금룡(金龍)이 수놓아진 곤룡장포에 어울리지 않게 문사건(文士巾)을 쓰고 있는 만 약사의 모습. 그의 얼굴은 아무리 많게 보아도 약관(弱冠)을 갓 넘었을까 말까한 애송이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거만하게 앉아 있는 가운데 그의 자세가 늠름했으며 이목구비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수려했다.
굳건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엿보이게 하는 사려 깊은 눈동자와 장부의 올곧은 기개를 나타내는 듯한 콧날, 그리고 지그시 다문 입술은 영웅의 풍모를 느끼게 하였다.
만 약사는 그녀를 힐끗 한 번 쳐다봤을 따름이다.
"안으로 들어오시오."
거만하게 손에 들고 있던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시큰둥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이 무례한……,
장수옥은 치욕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다. 지금 아쉬운 쪽은 우리일 테니…… 하지만 네가 만 약사가 아니라면…….'
장수옥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고,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만약사는 보던 책 속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일신에서 풍기는 살기를 눈치 챌 수 없었다.
장수옥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넙죽 허리를 숙여 다시 예를 표하였다.
"저희 아가씨께선 어려서부터 체질이 허약한데다 몇 달 전 갑자기 체력이 약화되어 만 가지 처방을 써 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인지라 천화의원의 명성이 밤하늘의 북두처럼 빛난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불원천리를 마다 않고……."
만 약사는 그녀의 말이 길게 이어지는 것이 귀찮았던지 중간에 말을 잘랐다.
"간단히 말해 치료를 받으러 왔다 그 말인가?"
"부디 신술을 베풀어주시길 간청하나이다!"
장수옥은 숙인 허리를 더욱 굽혔지만 그 순간 만 약사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배어 나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 자가 정말 만 약사가 맞단 말인가?'
사기꾼에게는 반드시 허점이 있는 법.
이 젊은 놈이 만 약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탁!
만 약사는 책을 소리 나게 접으며 팔걸이에 기대어 누워 있다시피 하던 몸을 스윽 일으켰다.
"좋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정성이지! 환자를 안으로 들이도록 하거라."
장수옥은 즉시 바닥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수그렸다.
"무한광영(無限光榮)!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2)
차르륵 차르륵……!
치맛자락이 땅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가볍게 부딪치는 패물소리가 들려왔다.
장수옥은 운가려의 몸을 부축하며 천천히 뜨락 안으로 들어왔다.
만 약사는 지그시 눈을 감은 모습이 낮잠이라도 청하는 듯 보였다.
장수옥의 발이 의원실의 문지방을 넘어올 때, 안으로부터 싸늘한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올 것 없다. 그만 돌아가거라!"
하마터면 장수옥은 발을 헛디뎌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녀가 뭐라고 따지기도 전에 만 약사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너무 늦었어! 난 고칠 수 없는 환자는 보지 않는다."
장수옥은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환자의 맥 한 번 짚어 보지도 않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만 약사는 여전히 이쪽을 쳐다보지도, 눈을 뜨지도 않고 말했다.
"흥! 발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지. 그 아가씨는 삼 개월을 넘기기 힘들어."
장수옥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흠칫 몸을 떨었다.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신수궁의 금지옥엽 운가려는 지금까지 용하다는 의원 수백 명이 진맥을 보고, 온갖 약을 써 보았지만 효험을 보지 못했다. 만 약사를 찾는 것은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마지막 방법이었던 것이다.
'발소리만으로 병의 경중(輕重)을 알 수 있다니, 만 약사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신기리라.'
그때까지 장수옥이 품고 있던 만 약사에 대한 의심은 씻은 듯 가셔졌다.
동시에 장수옥은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아가씨를 고치지 못하면 만 약사, 너의 목숨도 온전치 못할 것이다!'
장수옥은 입술을 꾹 깨물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의원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희 아가씨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면 제 목숨이라도 바치겠나이다."
만약사는 피식 웃었다.
"그것 참 간편한 방법이로군. 목숨과 목숨을 바꿀 수 있다니. 허나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라 염왕(閻王)의 소관인 것 같구려. 괜히 여기서 시간 허비하지 말고 당장 염왕이나 찾아가 보시게."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장수옥의 미간 사이가 깊은 골을 팼다.
자신으로서는 최대한 공손하게 예를 표했는데 이렇게 무례하게 나오다니.
더 이상 인내를 한다는 것은 파천나찰 장수옥의 이름이 곡(哭)을 할 노릇이다.
'이 작자가 정말 관을 봐야……!'
그녀의 손이 어깨 위로 올라갔다.
청룡도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을 때, 운가려의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장수옥의 손에서 맥이 쫙 풀렸다.
운가려의 손에는 한 푼의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장수옥 자신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손이었다.
"집사, 무례한 행동은 하지 말아요."
운가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위엄이 어려 있었다.
만 약사의 눈썹 끝이 가늘게 떨렸다.
'호오! 근래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목소리로고…….'
장수옥은 운가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가씨 이 일은……."
"됐어요.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했거늘, 사람의 뜻으로 안 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법이지요. 집사, 우리 그만 궁으로 돌아가요."
운가려는 먼저 몸을 돌렸다.
"내 결코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다!"
장수옥은 만 약사의 눈 감은 얼굴을 잠시 동안 말없이 쏘아보다가 몸을 돌렸다.
만 약사의 입에서 잠깐! 이라는 외침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돌아서시오."
'이 작자가 우리에게 또 무슨 욕을 보이려고?'
장수옥은 발끈 하면서 몸을 홱 돌렸다.
만 약사는 두 눈을 뜨고 있었는데 그 눈 속에는 진지한 빛이 어려 있었다.
그는 손을 훼훼 내저었다.
"아니 당신 말고……."
"저 말인가요?"
운가려가 몸을 돌리는 순간, 만약사의 두 눈은 번쩍 떠지고 입은 절로 쩍 벌어졌다.
'이, 이건 뭐야?'
운가려의 얼굴과 몸 주위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와 어두컴컴하던 방 안을 일시에 눈부신 빛으로 가득 채우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 일으켰다.
반달처럼 유연하게 휘어진 아름다운 눈썹과 꿈을 꾸는 듯한 눈동자, 오똑한 코, 굳게 다물어진 작고 도톰한 입술……
만 약사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이 목젖으로 꼴깍 꼴깍 넘어갔다.
그 아름다운 얼굴과 선명한 이목구비는 너무나 강렬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백짓장처럼 창백한 낯빛과 눈가에 드리운 짙은 그늘. 오랜 병고(病苦)에 시달린 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장수옥은 눈에 싸늘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지? 혹시 우리 아가씨를 놀릴 생각이라면 그만 두는 게 좋을 거요. 내 인내심은 지금까지 참은 것만으로 충분히 한계에 이르렀으니까."
만 약사는 당황함을 감추려는 듯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니오. 인명이 재천, 곧 생사(生死)를 괘념치 않는 아가씨가 어떤 분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젊은 여인이라 잠깐 놀랐을 뿐이오."
만 약사는 뭔가 결심한 듯 앉은뱅이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부터 진료를 시작하겠소. 환자만 남고 다른 분은 나가 계시오."
금방이라도 칼을 빼들고 난장판을 칠 것만 같았던 장수옥의 얼굴은 우는 듯도 싶고 웃는 듯도 싶은 복잡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조, 조금 전에는 고, 고칠 수 없다고……."
장수옥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만 약사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지금 막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소."
장수옥은 멍청히 서 있다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한 느낌이었다.
'만 약사…… 이 자의 괴팍함은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갑자기 바뀐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짧은 순간,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급변하는 장수옥과는 달리 운가려는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과는 무관한 일인 것처럼.
좀 꺼림칙하긴 했지만 장수옥은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하마터면 헛걸음을 할 뻔했는데 고쳐 줄 방법이 생각났더니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장수옥은 공손하게 말했다.
"저희 아가씨께서는 너무 몸이 허약하셔서 제가 옆에서 돌봐드려야 하는데……."
만 약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당신이 고치시든지!"
"아, 아닙니다. 그럼 이만……."
장수옥은 황급히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쿵!
문이 닫혔다.
만약사가 뒷짐을 진 채 운가려 앞을 오락가락 하다가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운가려라고?"
운가려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흐음……."
만 약사는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돌아다봤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워. 사내들 꽤나 홀렸겠군."
운가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예?"
뜻하지 않은 말이었으나 운가려는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신수궁의 금지옥엽으로 세상에 귀한 것, 예쁜 것만 보고 듣고 자란 그녀였으니 뒷골목에서 오가는 하류배들의 잡스런 말 따위를 알 리 만무였다.
만약사는 빙긋이 웃었다.
"그냥 예쁘단 말이야."
운가려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는 몇 살?"
"열여덟입니다."
"태어난 시는?"
"자시(子時)라고 들었습니다만……."
키는 몇이나 되느냐?
정혼자는 있느냐?
운가려의 병에 그런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냐만 만 약사는 잡다한 질문들을 쉼없이 퍼부었고, 운가려는 순진하게도 곧이곧대로 대답하고 있었다.
장수옥이 옆에 있었다면 사사건건 간섭을 하려 들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녀는 이 자리에 없었다.
잠시 후 질문이 끝났을 때 만 약사는 오른손을 운가려 앞으로 내밀었다.
"예?"
그가 손을 내민 이유가 뭔지 몰라 운가려는 그의 얼굴을 쳐다봐야 했다.
"손을 달란 말이야."
"아, 예."
운가려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순순히 손을 내밀었고, 만약사는 그녀의 손목을 지그시 끌어당겨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뼈가 없는 듯 손의 보드레레한 감촉이 뺨의 살갗을 뚫고 온몸으로 쫙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만 약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살짝 벌리고 단내를 토하는 것이 마치 꿈을 꾸는 듯, 구름 속을 거니는 듯 황홀경을 헤매는 표정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어서야 운가려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만 약사의 뺨 위에서 손을 냉큼 거둬들이지 못했다.
"마, 만 약사님. 왜, 왜 그러세요?"
얼굴을 홍시처럼 붉히며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다.
만 약사는 뭐 그런 것을 따지냐는 듯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이게 다 치료의 과정이야."
"이, 이제 그만……."
운가려는 이 괴상한 치료를 끝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만 약사의 목소리는 그녀의 말문을 닫았다.
"흐음, 이건 매우 보기 드문 증상으로…… 선천적인 음맥(陰脈)이야. 세 살 때부터 몸이 영 시원찮았겠군."
지그시 눈을 감고 잠꼬대를 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렸으나, 그 말은 운가려의 귓속을 파고들었고, 그녀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만 약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다섯 살 때 한기를 너무 쐰 게 건강을 해쳤어. 쓸데없는 보약을 먹은 게 더 나빴고……."
운가려의 두 눈은 크게 떠졌다.
"어, 어떻게 그걸?"
만약사가 두 눈을 번쩍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운가려는 그의 입가에 한 줄기 상쾌한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
운가려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 뱉었다.
여인이 보아도 매혹을 당할 만큼 그의 미소는 맑고 신비로웠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씻은 듯 사라졌고, 만 약사의 얼굴에는 예의 그 거만한 표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걸 모르면 만 약사가 아니지."
만 약사는 뺨에 대고 있던 운가려의 손을 놓아주고 휙 돌아섰다.
"어쨌든 이리 와서 옷 벗고 누워."
그는 마치 동네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처럼 선선히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운가려로서는 청천벽력(靑天霹靂)이 따로 없었다.
"예?"
운가려는 자신이 잘못 들었겠지, 싶어 되물었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벗도록!"
운가려는 아연실색(啞然失色),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 맙소사! 어떻게 그런 일을……?'
만약사는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껍질을 벗기지 않고 과일을 먹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자고로 병자는 예(禮)를 차리지 않는 법."
운가려의 두 다리는 땅 속에 뿌리라도 내린 듯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천하의 명의(名醫)로 이름난 만약사지만, 자기와 비슷한 또래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그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처녀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 하지만 저는……."
운가려는 끝내 아무런 결심도 하지 못하고,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며 이런 말만 되뇌일 뿐이었다.
"휴우!"
만약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바닥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운 일이로고. 자고로 숱한 여인네들이 죽을병에 걸렸으면서도 부끄러운 곳을 보이지 않으려다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했거늘……."
등을 돌리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그의 표정은 이미 체념한 듯 했다. 다시 앉은뱅이책상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무래도 먼길 오느라 헛수고만 한 것 같구나."
그는 책상 앞에 털썩 앉고 책을 펴 들었다.
"그만 나가 보아라."
축객령(逐客令)이었다.
사태가 이런 지경에 처하자 운가려는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딴은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환자에게 무슨 예를 따질 것이며, 지금 자신에게 있어 병을 고치는 것보다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운가려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저……전 벗겠어요. 벗을 수 있어요!"
만약사는 곁눈질로 그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다. 옷을 벗던지 말던지 자신은 관심 없다는 듯 책을 펴 가운데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속옷까지 다 벗을 자신이 있으면 모를까 도중에 그만두려면 아예 벗지 않는 게 나을 거야. 서로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
처녀의 수치심이나 모멸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야멸찬 말투였다.
수치심에 운가려의 두 눈에는 눈물까지 맺혔다.
"버, 벗을 거예요.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세상에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했던가?
만약사의 얼굴은 그야말로 똥이라도 씹은 듯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쓰고 있었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인의 몸을 감쌌던 부드러운 비단 옷들이 하나 둘 미끄러져 내리고 배추 속같이 희디흰 속살들이 눈을 가득 채우는 장면을 두 눈 뜨고 빤히 보자니……
으흐흐!
어찌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지고 동공이 확대되고, 콧구멍이 벌렁 벌렁거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만약 그가 드러내놓고 음흉한 웃음을 흘리게 되면 운가려가 그런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면 나올 말은 딱 하나 뿐이다.
"이 파렴치한 색마(色魔) 같으니!"
그딴 욕쯤이야 얼마든지 들어도 상관없다.
허나 허벅지 아래로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다시 거머쥐어 몸을 가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사흘 낮밤을 땅을 치고 울어도 원통함이 풀리지 않을 게 틀림없다.
만약사의 바램대로라면 운가려는 이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과연 이 분은 믿을 만한 분이로구나. 내가 옷을 벗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면서 다른 사내들처럼 침을 질질 흘리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병을 고칠까,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으시구나.'
그러나 운가려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두 눈은 뜨고 있으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귀는 열렸으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난생 처음 사내 앞에서, 그것도 처음 보는 사내 앞에서 십 팔 년 동안 고이 간직해 온 자신의 속살을 한 점 남김없이 보여주어야 하다니……
속절없이 눈물만 볼 위로 흘러내렸다.
사르륵 사르륵!
운가려가 자신의 옷을 하나하나 끌러 내리는 모습은 아름다운 무희(舞姬)의 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움직임 자체가 하나의 음악이 되었다.
꿀꺽, 꿀꺽!
그 소리는 만약사의 목젖 속으로는 끊임없이 침 떨어지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여인의 속에 받쳐 입은 옷은 왜 그리도 많은지…….'
그러나 드디어 그가 기대하던 순간이 왔다.
운가려의 떨리는 손이 속옷고름을 풀자 봉긋하게 솟아오른 젖가슴과 분홍빛 젖꼭지가 툭 튀어나왔다. 얇은 천이 더 아래로 흘러내리며 지극히 아름다운 아랫배의 선과 쪽 곧은 다리가 온전하게 드러났다.
"헉!"
만약사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풍만하고 완숙한 여체(女體)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여인의 가장 중요한 곳만큼은 여전히 한 장의 천 조각으로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 그걸 빨리…….'
만약사는 땀이 흠뻑 고인 손바닥을 쥐락펴락 했다.
천하 명의의 체통만 아니었다면 벌써 손을 내밀어 그 천 조각을 낚아챘을 것이다.
(3)
'시원한 비라도 퍼부었으면…….'
운가려는 생각했다.
왜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침상에 누워 젊은 사내의 시선 속에 노출되어야 하는 이 시간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 비라도 내렸으면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의 바램과는 반대로 주위는 너무나 고요했다. 오직 자신의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만 들려왔다.
만약사는 천천히 잘 빚은 도자기를 감상하듯 운가려의 알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름답군.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서는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만약사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운가려의 이마를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떨지 말아라.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내 손의 움직임에만 신경을 집중시켜라."
운가려의 이마 위에 있던 손가락은 멈출 듯 말 듯 스르르 움직이며 이마에서 콧잔등, 붉은 주사빛 입술로 점점 아래로 더듬어 내려갔다.
이어 목과 쇄골, 그리고 다시 그 아래로……
만약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에 환하게 드러난 젖가슴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고 젖가슴과 젖꼭지는 핑크 빛으로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운가려의 젖가슴을 아래에서부터 감싸듯 부드럽게 말아 쥐었다.
"아……!"
운가려는 자신의 젖가슴에 너무나 생생한 사내의 손바닥이 감촉되어 오자 흠칫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사는 집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운가려의 젖가슴을 만지고 또 만졌다. 그러자 운가려의 젖가슴이 팽팽하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밀 듯 도투라진 젖꼭지가 만져졌다.
'흐음! 이제 조금씩 느끼는가?'
만약사는 여체의 신비를 알고 있었다. 어떤 곳은 밤새도록 만져도 끄떡 않지만 어떤 곳은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발끈하며 달아오른다는 것을…….
이어 그의 손가락이 엷게 털이 나 있는 겨드랑이를 애무하자, 운가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숨 같은 신음소리를 토했다.
"하아!"
만약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후후! 이 처녀의 몸은 정말 민감하군. 기가 막힐 지경이야. 몸이 위중한 상태만 아니라면 끝내줬을 텐데…….'
만약사는 왼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애무하면서 오른손은 아래로 쭉 뻗어 티 한 점 없이 보드라운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순식간에 무릎을 지나는가 싶었는데 허벅지 사이로 슬쩍 스며들었다.
"이, 이러면 안돼요."
점점 깊은 곳을 더듬어 오르는 그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만약사의 목소리가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지금이 중요한 때이니……."
만약사의 목소리는 흥분에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손이 어디를 더듬었을까?
"하으윽……!"
운가려는 갑자기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운가려는 높은 낭떠러지 위에서 아래로 끝없이 급강하하는 기분을 느꼈다.
만약사의 손은 부끄러움이면서도 묘한 흥분을 느끼게 하는,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손이었다.
그의 손이 운가려의 허벅지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가랑이 사이의 부드러운 살에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였다.
"흐윽……!"
운가려는 허벅지를 오므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만약사는 처음엔 천천히, 그 다음엔 점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흠, 음!"
운가려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처음 맛보는 짜릿함에 절로 터져 나온 소리였다. 그녀의 경직된 몸이 서서히 풀어지고 있었다. 짜릿한 쾌감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러나 이 순간, 만약사의 얼굴은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또 잘못 짚었군. 회음혈(會陰血)에서 두 치 세 푼 위가 아니란 말인가? 그럼 더 안쪽에?'
한편, 천화의원의 뜨락에는 한시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여인이 있었다.
"이번엔 꼭 아가씨의 고질병을 치료해야 하는데……."
입 속으로 이런 말을 중얼중얼 하면서 동(東)에서 서(西)로, 서에서 또 동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마치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 모양과 같았다.
장수옥이 그렇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그녀와 함께 왔던 가마꾼과 시위들도 감히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예외가 있다면 시위무사 옥동(沃東) 뿐이었다.
그는 뭔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눈에 깊이 생각하는 빛이 서렸다가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다가 이윽고 눈빛이 또렷해지는 것이다.
이러기를 한참이나 거듭하던 옥동은 마침내 결심을 한 듯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집사님!"
장수옥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제 생각이 맞다면 아가씨께서 위험하실 지도 모릅니다. 특히 만약사라는 자는……."
보통 때 같았다면 벌써 주먹이 날아갔을 것이다.
'이 자식이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 아냐?'
장수옥은 이 옥동이란 놈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심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것은 장점이겠지만 장점이 커 화를 부르는 놈이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는 놈처럼, 행동으로 해도 될 것을 이리저리 따지고 또 따지는 것이 애시당초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장수옥은 아까부터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지라 옥동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다.
장수옥이 미간을 좁혔을 뿐 잠자코 있자 옥동은 용기를 내 서두를 꺼냈다.
"우선 의심스러운 것은, 제가 듣기로 만약사란 분은 나이가 꽤 들었다고 했는데 저분은 너무 젊은 것이……."
"난 또 무슨 말이라고……."
그것은 장수옥도 이미 의심을 했었던 부분이다. 그녀는 대수롭잖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만약사는 무림의 유명한 기인이시거늘 어찌 겉모습으로 그분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으랴. 나이를 먹어 수양이 깊어지면 흰머리가 다시 검게 변하는 반노환동(返老還童)의 경지도 모르느냐?"
옥동은 그것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또 뭐가 이상하단 말이냐?"
"본래 의원은 마을이나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있는 게 당연한데 이런 산중에 있다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이렇게 깊은 산중에 있는 의원치곤 손님들이 너무 많은 것도 이상하고……."
"그야 이곳의 명성이 워낙 자자한 탓이겠지."
그러나 장수옥의 이번 대답은 다소나마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기도 해. 우리 신수궁의 정보망은 그리 허술한 편이 아니다. 강호 곳곳에 정보원이 있는데도 만약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사흘 전에야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옥동은 손을 들어 한쪽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환자들을 가리켰다.
"가장 수상한 점은 저들입니다."
장수옥은 환자들을 힐끔 돌아다보고는 다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들이 왜?"
"저들은 우리가 여기 온 지 반 시진 가까이 지났지만 앉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사람도 없어요!"
"그, 그럴 리가?"
하면서도 장수옥은 자신의 전신에 싸늘한 전율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까 그들이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 것을 보고 괘씸하게 생각은 했지만…….'
그러나 그 뿐, 자신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아니 그런 것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과 함께 장수옥은 몸을 휙 날려 환자들 앞으로 날아갔다. 눈부시게 빠른 속도였다.
포권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물었다.
"이것들 보시오. 내가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만……."
하지만 환자들 중의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제 얘기가 틀림없다니까요."
뒤따라온 옥동이 가장 앞에 있는 외팔이 사내의 어깨를 툭 쳤다.
툭! 두두둑!
맥없이 외팔이 사내가 쓰러졌고, 그 뒤의 꼽추 노인도, 절뚝발이 사내도, 앞 사람이 쓰러지자 그 몸에 받혀 연달아 뒤로 픽픽 넘어가 버렸다.
장수옥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야?"
쓰러진 환자들은 모두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들이었던 것이다.
푸스스스스……!
환자들로 위장했던 볏짚들 위에서 희뿌연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장수옥은 당황하여 휘둥그레 눈을 치뗬다.
"뭐, 뭐야? 어디서 이런 안개가!"
"지, 집사님! 어떻게 이런 일이……."
옥동을 비롯한 가마꾼들과 집사들이 모두 그녀의 뒤로 몰려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챵!
장수옥은 청룡도를 벼락같이 뽑아들고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심상찮은 안개다! 모두 조심하면서 진을 펼치도록!"
"옛!"
그들은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신수궁의 최고진법인 천라지망을 펼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뿐, 더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다만 한 폭의 풍경화처럼 서 있던 고풍스런 장원은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초가로, 소담한 정원은 무성한 잡초로 뒤덮인 풀밭으로, 덩쿨나무로 아담하게 덮여 있던 담장은 허물어진 흙벽으로 변해 있었다.
장수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이게 도대체……!"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얼마나 더 놀라야 한단 말인가?
"지, 집사님!"
그녀를 부른 사람은 옥동이었다.
"뭐야!"
장수옥은 바락 신경질을 내며 그를 쏘아보았다.
옥동은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찔끔 목을 움츠르며 말했다.
"아, 아가씨께서는……."
그제야 장수옥은 자신의 이마를 쳤다.
'이런 아가씨가 위험하다!'
"병신 같은 자식!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야?"
옥동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으면 생각도 못하셨을……."
옥동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장수옥의 정권이 정면으로 그의 면상을 쳐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