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서기 6세기 동아시아는 삼겹살 판 갈기?
서기 500년과 501년은 각각 동아시아에서 여러 의미로 전환점인 한 해였습니다. 일단 주역인 백제의 경우 서기 501년에 동성왕이 역사 무대에서 퇴장하고 무령왕이 등장하게 되지요. 신라는 서기 500년 음력 10월에 지증왕(죽위 시에는 지증 마립간)이 즉위한 후 내정에 전념하게 됩니다. 한편 남조의 남제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되었지요.
그것은 같은 성씨임에도 왕조교체가 이루어진 사건의 토대가 이 두 해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즉 남제에서 양나라로 왕조가 바뀌는 사건이지요. 여기서 활동하는 사람이 바로 소연, 훗날에 양 무제라 불리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나마 고구려와 북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치세를 이어나갔지만요.
여기서는 백제와 관련이 의외로 깊은 중국 남조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살펴보는고 하니 남조가 잘 버텨줘야 고구려의 천하관이 잘 유지되고, 백제 입장에서도 남조의 문화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교류가 활발해지기 때문이었지요. 그만큼 남조는 ‘정치적’, ‘문화적’ 측면에서 중요성이 있는 왕조들이었습니다.
남조의 임금들은 이른바 ‘막장 인생’을 온몸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때도 예외가 아닌지라 남제의 임금인 동혼후(소보권) 영원 2년(500) 겨울, 소보권이 먼 친척인 소연의 큰 형이었던 상서령 소의(蕭懿)를 살해하였는데 소연은 형을 무고하게 죽인 일로 소보권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서기 500년 음력 11월) 을사(乙巳)일(9일)에,(양 무제가 될 소)연이 보좌하는 관료들을 모아놓고 말하였다(衍集僚佐謂曰): “어리석은 주군이 사납고 잔인하여(昏主暴虐),(죄)악이 주(왕)을 뛰어넘으니(惡踰於紂),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함께 이를 없애려고 한다(當與卿等共除之)!”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43(卷一百四十三) 「남북조 제기9 동혼후 영원 2년(서기 500년)」 |
선대 임금이었던 아버지 명제 소란도 그러했지만 동혼후 소보권 역시 의심병 말기환자(!)였습니다. 남제 임금 소보권은 군대를 보내 소연도 죽이게 했는데 소연은 이해득실을 따져 토벌군을 막아냈습니다. 여기서 이해득실을 따졌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굴복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였지요.
경우가 많이 다르지만 신라에서도 국상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소지 마립간의 사망 소식이었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22년(서기 500년)〕 겨울 11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 「신라본기 제3 소지(炤知) 마립간(麻立干) 22년 11월」 |
이것만 보면 그냥 대가 바뀌었구나 정도지만 세세히 파고들면 소지 마립간이 세상을 떠난 것이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관련 원전을 살펴보지요.
〔22년(서기 500년)〕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용이 금성정(金城井)에 나타났다. 수도[京都]에 누런 안개가 사방에 가득 끼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 「신라본기 제3 소지(炤知) 마립간(麻立干) 22년 4월」 |
이 기사는 공교롭게도 백제의 부여곤지와 문주왕이 서거하기 전에 나타난 검은 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용이 나온다고 다 좋지 않은 징조는 아니겠지요. 그러하되 적어도 「신라본기」에 묘사된 ‘금성정에 나타난 용’ 기사들을 살펴보면 뭔가 혐의쩍습니다. 총 4건 중에 3건이 왕들의 ‘말년’에 나타난 기사이고 나머지 1건은 언급된 이후 왜구의 침입이 있었지요.
이것으로 보아 소지 마립간 기록의 ‘금성정에 나타난 용’은 전쟁이든, 정변이든 무엇이든 썩 좋지 않은 상황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남제의 소의와 신라 소지 마립간이 같은 해, 같은 달에 세상을 떠난 것이 공교롭군요. 남제의 신하 소의와 신라 소지 마립간이 닮은 꼴이듯이 남제의 임금 동혼후 소보권과 백제의 동성왕도 묘하게 닮은 꼴입니다.
22년 봄에 임류각(臨流閣)을 궁궐 동쪽에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丈]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간언하는 신하들이 반대하며 상소하였으나 대답하지 않고, 다시 간언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궁궐 문을 닫아 버렸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26 「백제본기 제4 동성왕(東城王) 22년(서기 500년)」 5월에 가물었다. 왕이 측근[左右]들과 더불어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며 밤새도록 환락을 즐겼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26 「백제본기 제4 동성왕(東城王) 22년(서기 500년) 05월」 |
② 지금 창장[장강(長江)] 이남에서는
한반도 남부 문제야 어떻든 남제의 장수 소연은 임금인 동혼후 소보권에게 굴복할 것이냐 맞서 싸울 것이냐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 역시 명확했지요. 소연은 당연히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말이지요. 그런데 소연이 정당한 형태로 소보권과 맞서려면 나름의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임금의 옹립이었지요.
이듬해인 서기 501년 3월에, 소연은 강릉에서 소보권의 친동생인 남강왕 소보융을 임금으로 즉위시켰습니다. 소보융은 애초에 딱히 야심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으니 이는 소연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책이었지요. 이와 관련한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을사(乙巳)일(11일)에 남강왕(南康王: 소보융)이 강릉에서 황제로 즉위하였고(即皇帝位於江陵), 연호를 바꾸었으며(改元), 크게 사면하였는데(大赦)…(후략).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44(卷第一百四十四) 「제기10(齊紀十)·화황제(和皇帝)·중흥원년(中興元年 서기 501년)」 |
이 남제의 내전기간 동안 고구려는 지켜보는 쪽을 택합니다. 문자명왕 입장에서는 남쪽의 백제, 신라, 가야, 왜의 연합세력을 상대하는 것에 의외로 국력을 소모한 바도 있고요. 장수태왕도 함부로 개입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문자명왕이라면 더욱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애초에 끼어들기조차 하지 않았겠지요. 이것은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서기 501년에 북위에서도 남조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소란이 있었습니다. 원전을 살펴보지요.
걸복마거(乞伏馬居)가 (자기 주인인 종친 원)희에게 말하였다(說禧). “다시 낙성(낙양성)으로 돌아가서(還入洛城) 병사를 이끌며(勒兵) 문을 닫으면(閉門) 천자(天子)는 반드시 북쪽에 있는(必北走桑乾)으로 달아날 것이니, 전하(殿下)께서 황하의 다리를 끊을 수 있다면(可斷河橋) 하남(황하 이남)의 천자가 되십니다(為河南天子).”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44(卷第一百四十四) 「제기10(齊紀十)·화황제(和皇帝)·중흥원년(中興元年 서기 501년)」 |
하지만 이런 반역 시도는 실패하고 맙니다.
(북위의) 임금이 (반역한 종친 원희의) 얼굴을 마주하여(帝面) 사실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그 반역함을 나무라고(詰其反状), 임술(壬戌)일(29일)에 사택에서 자살하도록 하였다(賜死於私第).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44(卷第一百四十四) 「제기10(齊紀十)·화황제(和皇帝)·중흥원년(中興元年 서기 501년)」 |
동아시아 전반적으로 일종의 ‘반역의 계절’인 듯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비단 동성왕 시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삼근왕 때에도 남조에서 임금이 시해당하는 경우가 있었지요. 그러니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닙니다. 내전이 일어나는 남제에서 실력자 소연이 추대한 남강왕 정부는 북위의 힘을 빌릴 것을 고려하며 소연에게 석천문이라는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런 석천문, 좀 더 정확하게는 신정부의 제안에 소연은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여기서는 핵심만 골라 살펴보도록 하지요.
(전략) 게다가 (대)장부가 일을 일으키면 하늘 길을 깨끗이 닦으려고 해야 하는데(且丈夫舉事欲清天步),하물며 여러 주의 병사를 거느리고서 조그만 무리만 주살하는 것은(況擁數州之兵以誅羣小),황하의 물을 매달았다가 불에다 들이붓는 것과 같으니(懸河注火),어찌 없애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奚有不滅)!어찌 얼굴을 북쪽으로 향하여 융적(여기서는 북위)에게 구원을 청하여(豈容北面請救戎狄),천하에 약한 것을 보일 것입니까(以示弱於天下)!저들은 반드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彼未必能信),헛되이 추한 명성을 갖게 할 것이니(徒取醜聲),이는 바로 낮은 계책이지(此乃下計),어찌 상책이라고 하겠습니까(何謂上策)!(후략)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44(卷第一百四十四) 「제기10(齊紀十)·화황제(和皇帝)·중흥원년(中興元年 서기 501년)」 |
중화주의가 가득해서 불쾌한 감이 있는 대로 소연(훗날의 양 무제)의 이 단호한 결정이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연장시켰습니다. 한국사 입장에서는 유쾌한 결정이었지요. 어떻든 남조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북위가 남침하는 일이 바로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관련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음력 7월) 을사(乙巳)일(13일)에,유연(柔然)이 (북)위의 변경을 침범하였다(犯魏邊)。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44(卷第一百四十四) 「제기10(齊紀十)·화황제(和皇帝)·중흥원년(中興元年 서기 501년)」 |
남조 더 나아가서 이따금씩 고구려의 안전은 유연 유목제국이 지켜준 셈이 되었습니다. 북위도 유연이 자꾸 뒷덜미를 잡아채니 남조를 도모하기가 어려웠지요. 이후 소연은 10월에 수도인 건강(난징)을 포위했습니다. 남제 임금의 동혼후의 아버지 명제 소란은 그래도 유능했지만 동혼후 소보융은 이른바 ‘사이코패스’의 전형이었지요.
전세는 소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원전을 살펴보지요.
이때(겨울 음력 10월 시점)에 이르러(至是),(소)연이 사신을 보내어 알아듣도록 타이르자(衍遣使曉諭),모두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皆帥其衆來降)。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44(卷第一百四十四) 「제기10(齊紀十)·화황제(和皇帝)·중흥원년(中興元年 서기 501년)」 |
물론 북위라고 마냥 남조의 상황을 잠자코 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전을 살펴보지요.
(북)위(魏)의 진남장군(鎭南將軍) 원영(元英)이 편지를 올려서 말하였다(上書曰). “(남제의 임금) 소보권(蕭寶卷)이 거칠고 제멋대로 구는 것이 날로 심하여(荒縱日甚),죄가 없는 사람을 학대하고 해치고 있습니다(虐害無辜)。그(其)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연(蕭衍)이 동쪽으로 가서 말릉을 정벌하면서(東伐秣陵),그 영토를 쓸어 병사를 일으켜서(掃土興兵),흐르는 강물(장강)을 따라서 내려갔습니다(順流而下);(소연 측이) 오로지 외로운 성만을 갖고 있고(唯有孤城),다시는 무겁게 지키지 않으니(更無重衞),마침내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기회이며(乃皇天授我之日),세상에 보기 드물게 한 번 만나는 때입니다(曠世一逢之秋);이 기회를 타지 못하면(此而不乘),장차 무엇을 기다리려고 하십니까(將欲何待)!(후략)”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44(卷第一百四十四) 「제기10(齊紀十)·화황제(和皇帝)·중흥원년(中興元年 서기 501년)」 |
19세의 젊은 임금 선무제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남제를 치기로 결정합니다. 참고로 선무제는 고구려 사람 문소황후 고조용의 아들입니다. 고조용의 아버지는 고양(高颺)으로 장수태왕의 명령을 받아 북위로 입국한 듯하고요. 장수태왕이 어느 정도로 간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양 일가가 북위로 들어온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자명왕은 이전에 비해 한반도 남부 전선 특히 백제 전선에 집중도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동성왕도 만만찮은 상대였거니와 앞으로 맞딱뜨릴 백제 국왕은 더욱 버거운 상대가 될 예정이었지요. 문자명왕이 알 도리는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어떻든 북위는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남제에 대해 공세를 취하게 되지요.
이런 마당인데도 동혼후 소보권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실질적인 망국의 임금이 될 것을 감안해도 너무하다 싶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동혼후는 더욱 금전을 아끼며(東昏尤惜金錢),상금을 내려주지 않았다(不肯賞賜);(신하인 여)법진이 머리를 조아리며 청하자(法珍叩頭請之),동혼후가 말하였다(東昏曰): “(역)적들이 오면 오로지 나만을 잡으려 할 것인가(賊來獨取我耶)!어찌 내게 와서 재물을 요구하는가(何為就我求物)!” 후당에 수백 개의 나무조각을 쌓아놓고(後堂儲數百具榜),아뢰어 성을 막는데 쓰려고 하였다(啓為城防);(그러나) 동혼후는 남겨놓았다가 궁궐을 짓는데 쓰려고(東昏欲留作殿),끝내 내주지 않았다(竟不與)。(중략) 무리들이 모두 원망하여 게으름을 피우고(衆皆怨怠),힘을 다하지 않았다(不為致力)。밖에서 포위한 지가 이미 오래되자(外圍旣久),성 안에서는 모두 일찍이 도망할 것을 생각하였지만(城中皆思早亡),감히 먼저 출발하지 않았다(莫敢先發)。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44(卷第一百四十四) 「제기10(齊紀十)·화황제(和皇帝)·중흥원년(中興元年 서기 501년)」 |
결국 12월에, 건강을 수비하던 장수들인 장직과 왕진국이 소보권을 시해하고, 그의 머리를 기름칠한 누런 명주에 싸서 소연에게 바쳤습니다. 이렇게 1년 남짓한 내전을 거치고 남조는 안정을 되찾았지요. 관련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환관[宦者] 황태평(黃泰平)이 칼로 그 무릎에 부상을 입혀(刀傷其膝),(동혼후 소보권이) 땅에 엎어지자(仆地),장제가 그(소보권)의 목을 베었다(張齊斬之)。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44(卷第一百四十四) 「제기10(齊紀十)·화황제(和皇帝)·중흥원년(中興元年 서기 501년)」 |
이에 대해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때 동혼후의 나이는 19세였다(東昏時年十九)。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44(卷第一百四十四) 「제기10(齊紀十)·화황제(和皇帝)·중흥원년(中興元年 서기 501년)」 주석 |
그런데 남제 동혼후 소보권과 달리 마냥 폭군이라 할 수는 없지만 말년에 뭔가 그와 닮은 동방의 한 임금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납니다. 원전을 살펴보지요.
11월에 (국왕이) 웅천 북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또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 이전에 왕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하자 백가는 가지 않으려고 하여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왕을 원망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렀다. 12월에 이르러 (국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26 「백제 본기 제4 동성왕(東城王) 23년 11월」 |
이렇게 백제도 중국 남조도 지도자가 바뀌었습니다. 과연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