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남원시 역사
고 대〕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된 바 없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에 속했으며 마한 54개국 중 고랍국(古臘國)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리산을 경계로 진한과 변한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와 관련해 마한이 달궁(達宮)지방에 별궁을 두고 정장군(鄭將軍)과 황장군(黃將軍)을 파견해 진한·변한의 침략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에 속했는데, 기원후 15년(온조왕 33) 고룡군(古龍郡)이라 했다가 196년(초고왕 31)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개칭했으나, 평안도지방에 한사군(漢四郡)의 대방군이 설치되자 220년(구수왕 7)에 남대방군(南帶方郡)으로 또 바꾸었다.
660년(무열왕 7)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당하자, 이 지방에 대방도독부(帶方都督府)를 두고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使) 겸 도독으로 삼았다.
685년(신문왕 5) 전국에 5소경(五小京)을 설치할 때 그 중 하나인 남원경(南原京)이 설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대방을 남원이라 고쳤다. 828년(흥덕왕 3)에는 증각대사(證覺大師)가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했고, 875년(헌강왕 1)에는 도선(道詵)이 선원사(禪院寺)를 창건하였다.
〔고 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태조 23) 남원부(南原府)로 개칭되었고, 현종 때 지방제도 정비를 거쳐 임실(任實)·순창(淳昌) 등 2개의 속군(屬郡)과 장계(長溪)·적성(赤城)·거령(居寧)·구고(九皐)·운봉(雲峰)·장수(長水)·구례(求禮) 등 7개의 속현(屬縣)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명종 때에는 공주에서 망이(亡伊)가 난을 일으키자 남원·완주 등 호남 일대에서 이에 호응했는데, 그 때 윤위(尹威)는 남원지방의 반란군을 평정한 공으로 남원부백(南原府伯)이 되었으며, 그가 남원윤씨의 시조이다.
1310년(충선왕 2) 대방군으로 환원했다가 1360년(공민왕 9) 다시 남원부로 복구되었다. 1379년(우왕 5) 왜구가 경상도지방을 노략한 뒤 함양을 거쳐 운봉의 인월리에 주둔하였다. 그 때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이던 이성계(李成桂)는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운봉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사살하는 등 황산대첩(荒山大捷)을 거두었다.
〔조 선〕 1410년(태종 10) 대복사 부근에 남원향교가 창건되었다. 1413년(태종 13) 남원도호부로 되어 1군 18현을 관할하였다. 1418년 황희(黃喜)가 세자책봉에 이견이 있어 남원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때 광통루(廣通樓)를 세웠으며, 1444년(세종 26) 전라도관찰사였던 정인지에 의해서 광한루로 개칭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남원도호부의 호수는 1,300호, 인구는 4,912명이었다. 세조 때 진관체제가 성립됨에 따라 남원에도 진관이 설치되었으며, 남원부사가 첨절제사를 겸임해 담양·순창 등을 거느렸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쳐들어오자 의병장 양대박(梁大樸)은 운암에서, 조경남(趙慶南)은 운봉의 팔량치(八良峙)에서 각각 왜군을 대파하였다. 또한 임진왜란중에 변사정(邊士貞)은 교룡산성의 수성장이 되어 산성을 크게 수축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성이 함락되었으며, 그 때 용성관·향교·만복사·광한루 등이 모두 불탔다.
1654년(효종 5) 남원에 전라좌영을 설치했으며, 1739년(영조 15) 찬규(遡揆)의 반란으로 인해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750년 다시 남원부로 복구되었다.
〔근 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김개남(金開男)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을 거점으로 활약하다가 여원치(女院峙)에서 관군에게 패하였다. 1896년 지방관제 개편 때에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개편되었는데, 그 때 전라남도의 관찰부를 남원에 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전라북도에 편입됨에 따라 관찰부는 광주로 옮겨졌다.
1906년에는 의병장 양한규(梁漢奎)가 헌병대를 숩격하다가 전사하였다. 1914년 남원도호부가 폐지되었고 운봉군을 통합해 남원군이 되었다. 이 때 남원군은 19개 면을 관할했으며, 인구는 약 9만2000여 명에 이르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3일 이석기(李奭器)의 영도하에 많은 면민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그 뒤 5월까지 19차례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1931년 남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듬해 전주∼남원간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이 지방 3·1운동 선구자인 이석기를 비롯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백용성(白龍城)과 일제의 침략에 대해 자결로 항거한 이태현(李太鉉), 통감부를 습격했던 박석규(朴錫奎) 등이 있다.
〔현 대〕 1950년 6·25 때 7월 24일 공산군에게 점령당했다가 9월 28일 유엔군의 진주로 다시 수복되었다. 이 때 각급 관청과 학교·교회·주택 등이 불탔으며, 9·28 수복 후에는 패주하던 공산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인근 주민을 약탈하는 등 그 피해가 컸다. 그 때 애국청년·학생들이 경찰을 도와 공비 토벌에 참가하였다.
1956년 왕치면이 남원읍에 폐합되었으며, 1981년 남원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남원군과 분리되어 별도의 행정구역을 이루었다. 1985년 7월 대강면 수홍출장소를 폐지, 1990년 4월 송동면 양평리 일부가 금지면 상신리에 편입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에 따라 남원군과 남원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남원시가 되었으며, 같은 해 3월에 운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98년 5월 1일에는 동면이 인월면으로 개칭되었다.
나. 남원시 유적과유물
선사시대유적은 아영면 청계리의 고인돌을 비롯해 석곽묘·옹관묘 등이 산재한 남원유곡리 및 두락리고분군(전라북도 기념물 제10호)이 있다.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던 봉화산봉수대가 아영면에 있는데, 이는 사두봉·비봉산·대불리 봉수대를 거쳐 탄치로 연결되었다.
성곽으로는 당나라 유인궤가 처음 쌓았다고 전하지만, 실제 신라 삼국통일 후 신문왕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남원성(사적 제298호)과 조선 초기에 축성되어 정유재란 때 처영 등에 의해 개축된 교룡산성(蛟龍山城, 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과 용투산성지(龍鬪山城址), 대산면 신계리성터가 있고 주생면 내동리, 운봉읍 장교리·가산리 등에 성터가 남아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왕정동의 만복사지(萬福寺址, 사적 제349호)·만복사지오층석탑(萬福寺址五層石塔, 보물 제30호)·만복사지석좌(萬福寺址石座, 보물 제31호)·만복사지당간지주(萬福寺址幢竿支柱, 보물 제32호), 도통동의 선원사대웅전(禪院寺大雄殿,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45호)·선원사철조여래좌상(보물 제422호)·선원사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선원사약사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 산곡동의 선국사대웅전(善國寺大雄殿,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선국사대북(전라북도 민속자료 제5호), 왕정동의 대복사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4호), 대복사극락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48호), 노암동의 덕음암석불좌상(德蔭庵石佛坐像,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4호)·미륵암석불(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 산내면 입석리의 실상사일원(實相寺一圓, 사적 제309호)·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實相寺百丈庵三層石塔, 국보 제10호), 산내면 대정리의 실상사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 입석리의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 보물 제33호)·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 보물 제38호)·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실상사철제여래좌상(實相寺鐵製如來坐像, 보물 제41호)·실상사극락전(實相寺極樂殿,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百丈庵靑銅銀入絲香爐, 보물 제420호), 주천면 용담리의 용담사지석불입상(龍潭寺址石佛立像, 보물 제42호)·용담사칠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 대산면의 남원신계리마애여래좌상(보물 제423호), 주생면의 지당리석불입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낙동리석조여래입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 신촌동의 심경암석불좌상(心鏡庵石佛坐像,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실상사위토개량성책(實相寺位土改量成冊,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이 있다.
사찰로는 실상사·선원사·선국사·귀정사(歸政寺)·용담사·주지암(住持庵)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1410년(태종 10)에 창건되어 1935년에 현 위치에 재건된 향교동의 남원향교대성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 운봉읍 산덕리의 운봉향교(雲峰鄕校), 도통동의 창주서원(滄洲書院), 주생면 영천리의 유천서원(楡川書院,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2호)과 상동리의 용장서원(龍章書院), 대강면 풍산리의 풍계서원(楓溪書院), 덕과면 만도리의 호암서원(湖巖書院), 사매면 서도리의 노봉서원(露峯書院)을 비롯해 석봉서원(石峰書院)·두곡서원(杜谷書院)·용암서원(龍巖書院) 등이 있다.
또한 사우로는 충렬사(忠烈祠)·예산사(禮山祠)·용암사(龍巖祠)·정충사(旌忠祠)·구천사(龜川祠)·민충사(愍忠祠)·십로사(十老祠)·유애묘(遺愛廟)·춘향사(春香祠)·금남재(錦南齋), 그리고 관우(關羽)를 제사 지내는 남원관왕묘(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2호) 등이 있다.
누정으로는 1419년(세종 1) 황희(黃喜)가 세웠던 광통루를 정인지(鄭麟趾)가 새롭게 했다고 하는 광한루(廣寒樓, 보물 제281호)가 있고, 광한루와 방장산(方丈山)·봉래도(蓬萊島)·영주각(瀛洲各) 등이 있는 경내를 광한루원(사적 제303호)이라 해 보호하고 있다.
이 밖에도 1380년(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경상도지방에서 운봉으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맞이해 격파한 기념비가 있었던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사적 제104호)가 운봉읍 화수리에 있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 왜적들과 싸우다가 순국한 이들의 무덤인 만인의총(萬人義塚, 사적 제272호), 조선 태조의 전패를 모셔놓은 객사였던 용성관(龍城館) 등이 있다.
이 밖에 송동면의 은행나무를 비롯해 이백면 내동리의 은행나무, 덕과면 사율리의 사곡송림(沙谷松林), 노유재(露濡齋) 은행나무 등이 수령이 오래된 고목이며, 천연기념물로는 보절면 진기리에 남원보절면의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81호)가 있다.
가. 실상사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지리산 천황봉(天皇峯)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828년(흥덕왕 3)에 홍척(洪陟)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하면서 창건하였다.
홍척은 도의(道義)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禪法)을 깨우친 뒤 귀국하였다. 그 후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서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는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볼 때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 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 뒤 2대조 수철(秀澈)을 거쳐 3대조 편운(片雲)에 이르러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선풍을 더욱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468년(세조 14)에 화재로 전소된 뒤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 왔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벽암(碧巖)이 삼창(三創)하였고, 1685년 계오(戒悟)가 현재의 극락전인 부도전을 지었다. 1690년에 침허(枕虛)를 중심으로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또한 1821년에는 의암(義巖)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1882년(고종 19) 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東赫)의 사심(邪心)으로 사찰건물들이 소실되는 수난을 겪었으며, 1884년에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였다. 1903년(광무 7) 익준(益俊)이 승당을 지었으며, 1932년 칠성각을 세웠다.
특히,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 하여 일찍이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었다. 그 불상의 복장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문(願文)과 사경(寫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高麗板華嚴經疏) 등 보기 드문 서적도 몇 가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1986년 요사로 사용중인 선리수도원을 건립하였고, 1989년 천왕문을 세웠다. 1991년 범종각을 짓고 1996년 화엄학림 강당과 학사를 건립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약사전·명부전·칠성각·선리수도원(禪理修道院)·누각·천왕문,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극락전과 부속 건물이 있다.
당우 중에서 보광전 안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베트남에서 이운해 왔다는 종이로 만든 보살입상이 있고, 범종이 걸려 있다. 종은 1694년(숙종 20)에 만든 것으로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 비슷한 무늬가 있다. 이것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일제 말기에는 주지가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84년에 부도전으로 중건한, 정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1832년에 의암이 중건하면서 극락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특이한 양식의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천황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높이 2.42m. 보물 제38호. 지면에 넓은 방형 지대석이 놓이고 그 위에 층단을 이루는 8각 2단의 하대석이 놓였는데, 하단에는 전면에 운문(雲文)이 조각되었으나 상단에는 위에 넓은 굄이 있을 뿐이다.
하대석 위에는 높은 8각중석(中石) 받침이 따로 놓였는데, 밑에는 하방 같은 턱이 있고 위에는 각 모서리에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있다.
상단에는 우주와 우각을 연결한 돌란대〔廻欄帶〕를 8면을 연결하면서 걸쳤으며, 각 면 중앙에는 다시 동자주(童子柱: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를 세웠고, 우주 위에는 귀꽃이 장식되어 그 형태가 난간의 모양을 모각한 듯하다.
이 받침 상면과 중석 사이의 공간에는 중석 주위에 낮은 2단의 받침을 조각하고 남은 공간은 호선(弧線)을 그리며 얕게 처리하였다. 중석 상하에는 낮은 턱을 만들고 각 면에는 안상(眼象) 안에 공양비천상과 보살좌상을 1구씩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원형이고 낮은 2단받침 위에 복판삼중엽의 앙련(仰蓮)을 조각하였다. 이 위에는 매우 높은 탑신받침인 8각 별석이 놓였는데 밑에는 높은 2단굄이 있고 위에는 상면에 복련(覆蓮)이 조각된 갑석형(甲石形)이 모각되었다.
또, 그 사이는 석등(石燈)의 고동형(鼓胴形) 간주 (竿柱)와 같은 우주가 우각마다 모각되고 각 면에는 안상이 조각되었다.
탑신석은 8각이고 우각마다 우주가 있고 각 면에는 전후면에 문비형(門扉形)과 그 좌우에 사천왕상을 조각하였고 상단에는 주두(柱頭)·평방(平枋)·창방(昌枋)·접시받침 등 목조건축의 가구(架構)가 모각되었다.
옥개석(屋蓋石)은 밑에 비천상이 조각되고 처마 밑에는 서까래가 모각되었으며, 낙수면에는 우동(隅棟)과 기왓골이 표현되었는데 추녀위에는 귀꽃이 붙었던 흔적이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8엽연화(八葉蓮花)의 앙화(仰花)와 보륜(寶輪)과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각 부재가 대체로 높아서 전체 형태는 고준하며 표면의 장엄조각은 대체로 가냘픈 편이다. 증각대사(證覺大師)는 실상산문(實相山門) 개산조(開山祖)인 홍척(洪陟)이며 실상사 개창이 신라 흥덕왕 3년(828)이고,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의 일이므로 그의 입적연대를 9세기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어서, 이 부도의 건립연대도 이에 따라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 文化財大觀 6-寶物 4-(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라.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 (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
실상사 안에 있는 극락전을 향하여 그 오른쪽에 서 있는 탑으로,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
탑은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基壇)은 아래받침돌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가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다. 8각의 탑몸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문(門)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얇고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부분에는 엷은 곡선을 이루고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경사면에는 기와골을 표시하였고, 그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다. 꼭대기에는 몇 층의 단이 있고, 그 위에 원형이 작은 돌에 있을 뿐 모두 없어졌다.
탑 옆에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어서 이 부도의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수철화상이 진성여왕 7년(893)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탑을 세운 시기를 이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다.
수철화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재위 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고 대〕 단성면 강루리와 군내 각처에서 선돌·고인돌 등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음을 볼 때, 청동기시대에는 이미 이 지방의 전 지역에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최근에 강루리에서 빗살무늬토기의 포함 층이 확인된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일찍이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사람들이 남강을 따라 이곳에 올라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에는 생초면 어서리와 신안면 중촌리 고분군의 규모와 부장품의 내용으로 보아 5, 6세기경 가야계열의 부족국가가 이 지방에 분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통일 후 이 지방은 지품천현(知品川縣)이라 불렸고 단계지방은 적촌현(赤村縣)이라 불렸다. 단성지방은 궐지군(闕支郡)인데, 757년(경덕왕 16)에 궐성군(闕城郡)으로, 지품천현이 산음현(山陰縣)으로, 적촌현이 단읍현(丹邑縣)으로 개칭되어 산음·단읍 2현이 궐성군 소속의 영현으로 되었다.
신라인들은 지리산을 오악의 하나로 숭앙하였으며, 신라말 선종(禪宗)이 성행하면서 단속사(斷俗寺)·삼장사(三壯寺) 등 대소 사원들이 이 지방 산중에 건립되어 불교의 큰 중심지를 이루었다.
〔고 려〕 고려초 궐성군은 한때 강성현(江城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강성군으로 되었으며, 단읍현은 단계현(丹溪縣)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 산음·단계 2현은 합주(陜州 : 지금의 陜川)에, 강성군은 진주목(晉州牧)에 소속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 단계는 강성군의 영현으로 복귀하고 산음·강성에 감무(監務)가 두어졌다.
1363년(공민왕 12) 강성 사람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면화종자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협력하여 단성면 사월리에서 재배와 방직에 성공하여 국민생활과 국가경제에 크게 공헌하였다. 근년에 후손들이 이 곳 면화시배지에 사적비를 세우고 유물관을 지어 면업가공발전사를 소장, 전시하고 있다.
〔조 선〕 1399년(정종 1) 거제도의 명진현(溟珍縣)이 왜구를 피하여 강성현으로 옮겨오면서 두 현이 합쳐져 진성현(珍城縣)으로 개칭되었다. 1413년(태종 13) 산음현의 합주 소속이 해제되면서 현이 지금의 산청읍으로 옮겨지고 현감이 두어졌다. 1432년(세종 14) 명진현이 거제도로 수복되면서 강성현과 단계현이 합쳐져 단성현(丹城縣)으로 개칭되었고 현감이 두어졌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 산음현의 호구수는 257호 1,138인이었고 진성현은 234호 872인이었으며, 단계현은 139호 496인이었다. 1555년(명종 10) 조식(曺植)은 단성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지리산 아래 덕산동에 들어가 산천재를 세우고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그의 학행은 이황(李滉)과 더불어 당세의 사표로 추앙되었으며 뒤에 영남일대를 크게 교화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종도(趙宗道)·이로(李魯) 등은 의병을 규합하여 진주성의 외곽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으나 진주성 함락 후 이 지방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리하여 왜란 직후 1599년(선조 32) 단성현이 폐지되고 그 일부가 산음현으로 편입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복구되었다. 1767년(영조 43) 산음현이 산청현으로 개칭되었다. 1771년(영조 47) 산청현의 호구수는 2,114호 8,989인이었으며 단성현의 호구수는 2,526호 9,994인이었다.
〔근 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으로 산청현과 단성현이 군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행정구역 정비에 따라 진주군의 삼장(三壯)·시천(矢川) 등 6개 면이 산청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단성군이 산청군으로 통합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말의 거유 곽종석(郭鍾錫)은 거창에 은거하다가 문인 김황(金榥)과 더불어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를 내는 등 유림의 구국운동을 주도하였다.
〔현 대〕 1948년 여순반란사건과 1950년 6·25사변 때 지리산으로 도피한 공비로 인해 군민의 희생과 상처가 매우 컸다. 1962년 6월 5일 단성면 서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1일 신등면 상법리·철수리가 차황면에 편입되었다. 1975년 1월 1일 금서면 서하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9년 5월 1일 산청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하동군 옥종면 중대리가 시천면에 편입되었고, 1988년 산청읍 옥동과 한동이 옥산리와 산청리로 각각 개칭되었으며, 1994년 단성면 서부출장소 관할의 길리가 단성면 관할로 되었다.
나. 산청지역 유적과 유물
단성면 강루리의 남강퇴적평야에서 고인돌·빗살무늬토기층 등이 발견되었고, 산청읍 옥산리·내리, 삼장면 덕교리 등지에서는 마제석기·토기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단성면 백운리에서도 세형청동검 등 여섯 점이 출토되었으나, 그 유적의 성격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생초면 어서리의 산청생초고분군(山淸生草古墳群, 경상남도 기념물 제7호)과 신안면의 중촌리고분군이 있다. 금서면 화계리에는 가락국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 사적 제214호)이라는 거대한 석총이 있다.
1793년(정조 17) 김해김씨 문중에서 각종 석물을 설치하여 왕릉의 면목을 갖춘 뒤, 왕릉의 수호와 재실을 겸한 덕양전(德讓殿)을 창건하고 종전에 왕산사(王山寺)에 전해온 기록 및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신등면의 장천리도요지(長川里陶窯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23호)에서는 조선 초기의 청자와 분청사기의 파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불교문화재로는 단성면 운리의 단속사지동삼층석탑(斷俗寺址東三層石塔, 보물 제72호)·단속사지서삼층석탑(보물 제73호), 삼장면 대포리의 내원사삼층석탑(內院寺三層石塔, 보물 제1113호)·산청대포리삼층석탑(보물 제1114호)·석남암수석조비로사나불좌상(石南巖藪石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1021호), 유평리의 대원사다층석탑(大源寺多層石塔, 보물 제1112호)이 있다. 또한 시천면 중산리의 법계사삼층석탑(法界寺三層石塔, 보물 제473호), 신등면의 율현리의 율곡사대웅전(栗谷寺大雄殿, 보물 제374호)와 단계리석조여래좌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호), 생비량면의 도전리마애불군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9호) 등이 있다. 또 현재 서울 경복궁에 있는 산청범학리삼층석탑(국보 제105호)과 진주시에 있는 단성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1호)도 이 지역에서 옮겨간 것들이다.
단성은 고려 말 중국에서 목화 씨앗을 가져온 문익점의 고향으로,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 앞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 사적 제108호)와 사적비가 있고, 신안면 신안리에는 문익점묘(경상남도 기념물 제66호)와 문익점신도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호), 문익점의 사당인 노산정사(蘆山精舍)가 있다.
노산정사는 1461년(세조 7)에 건립되어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1612년(광해군 4) 재건되어 도천서원(道川書院)이라고 불렸다. 1787년(정조 11) 사액 되었으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노산정사라고 개칭되었으며, 1952년 건물이 중수된 바 있다.
향교는 산청읍 지리의 산청향교(山淸鄕校,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24호)와 단성면 강루리의 단성향교(丹城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8호)가 있는데, 단성향교에는 1717∼1786년까지 70년간의 단성현 주민 1만2160인의 단성호적장적(丹城戶籍帳籍,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9호) 13권이 보존되어 있다.
시천면 원리에 있는 덕천서원(德川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은 조식(曺植)이 생전에 강학을 하던 곳으로 그의 사후 군내 사림들이 세웠으며, 이 서원 안에는 조식이 세웠던 산천재(山天齋)라는 서재와 송시열(宋時烈)이 세운 신도비, 그리고 조식유적(사적 제305호)이 보전되어 있다.
이 밖에도 산청읍 지리에 서계서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 단성면 사월리에 배산서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1호), 금서면 화계리에 덕양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이 있다.
한편, 신안면 신안리에 도천서원신안사상재(道川書院新安思想齋,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7호), 청현리에 일신당문집 및 필집책판(一新堂文集 筆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0호), 산청읍 지리에 덕계선생문집책판 및 사호집수오당실기책판(德溪先生文集冊板―思湖集守五堂實記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3호), 시천면 사리에 남명선생문집책판(南冥先生文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4호)이 있다.
또한 신등면 평지리에 허성재선생문집(許性齋先生文集,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5호), 단계리에 단계선생일기(端溪先生日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7호)··단계선생문집 및 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8호)·동계선생문집책판(東溪先生文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3호)·단계박씨고가(端溪朴氏古家,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4호)·금관조복(金冠朝服,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5호)·산청단계리박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9호)·산청단계리권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0호)가 있다.
그 외에 생초면에 산청대포리민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3호), 단성면에 산청사월리최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산청사월리이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8호)·산청소남리권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4호) 및 산청소남리조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5호)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산청읍 산청리에는 산청척화비(山淸斥和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4호)가 있고, 삼장면 유평리의 지리산대원사일원(智異山大源寺一圓, 경상남도 기념물 제114호), 신등면 평지리의 이락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5호)·산청평지리은행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115호), 시천면 중산리의 성모사(聖母祠)와 지리산성모상(智異山聖母像,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4호) 등이 있다.
조선시대 호적식년(戶籍式年)을 당하여 경상도 산청군에서 관내(管內)의 호구를 조사하여 작성한 호적책. 4개 식년의 것 5책이 일본 가쿠슈인대학(學習院大學) 도서관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책의 크기·분량·보존상태·수록내용 등에 대해서는 아직 소개된 바가 없어 알지 못한다.
규장각도서로 전하는 ≪산음현호적대장 山陰縣戶籍大帳≫ 2개 식년분 2책을 합치면 조선시대 산청군의 호적책은 모두 6개 식년분 7책이 된다.
1501(연산군 7)∼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언형(彦亨)이며, 어머니는 인주(仁州)이씨로 삼가현 지역의 유력한 사족이던 충순위 이국(李菊)의 딸이다.
1501년 경상도 삼가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의 토골(兎洞)에서 태어나 4∼7세 사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으며, 이후 아버지의 벼슬살이를 좇아서 의흥(義興)·단천(端川)에 가기도 했으나 20대 중반까지 주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서울의 처음 거주지는 연화방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이웃에 살던 이윤경(李潤慶, 후일의 판서벼슬을 지냄)·준경(浚慶, 후일 영의정이 됨)형제와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로 미루어 황효헌(黃孝獻)·이연경(李延慶)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18세 때 북악산 밑의 장의동으로 이사하여 성운(成運)과 평생을 같이하는 교우관계를 맺었고, 부근의 청풍계(淸風溪)에 숨어살던 성수침(成守琛) 형제에 종유하였으며,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죽임을 당한 일과 숙부 언경(彦卿)이 귀양가는 현실을 크게 탄식하였다.
이후 7∼8년 간 서울 근교의 백운대나 탕춘대의 무계동(武溪洞)에 있는 절을 찾아 독서에 몰두하면서 때로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는데, 22세 때 생원·진사시의 초시와 문과의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 실패했으며, 26세 때 부친상을 당해 고향 삼가로 돌아가 3년 상을 마친 뒤, 한때 의령의 도굴산(斤堀山)에서 독서하다가 30세 되던 해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 탄동(炭洞)에 있는 처가로 거처를 옮겼다.
장인인 충순위 조수(曺琇, 본관 南坪)가 김해일대에서 부자로 소문났던 만큼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특히 31세 때 서울 친구이던 이준경과 송인수(宋麟壽)로부터 선물받은 ≪심경≫과 ≪대학≫을 읽고 성리학에 침잠하면서 성운·이원(李源)·신계성(申季誠)·이희안(李希顔) 등과 더불어 의리의 구명과 실천에 힘써 그 학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덕성함양에 전념하였다.
학자로서의 명망이 높아지자 1538년(중종 33) 경상도관찰사 이언적(李彦迪)과 대사간 이림(李霖)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또 한번 만나기를 원하는 이언적의 요구도 후일을 기약하며 거절하였다.
45세가 되던 1545년(명종 1)의 을사사화로 이림·송인수·성우(成遇)·곽순(郭珣) 등 가까운 지인들이 화를 입게 되자 세상을 탄식하고 더욱 숨을 뜻을 굳혔으며, 마침 모친상을 당함에 삼가로 돌아가 시묘(侍墓)하였고, 상복을 벗은 후에는 김해생활을 청산, 고향인 토골에 계복당(鷄伏堂)·뇌룡사(雷龍舍)를 짓고 문인들과 함께 도학을 강론하였다.
이 시기 노진(盧所)·강익(姜翼)·김희삼(金希參) 등이 종유하였으며, 오건(吳健)·문익성(文益成)·이광우(李光友)가 처음으로 문하에 출입하였다.
1553년 조정에서 내린 사도시주부의 관직을 사양했을 때 이황이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와 벼슬에 나가기를 권유하면서 “천리신교(千里神交)”를 맺기를 원하였고, 이후 서너 차례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듬해인 55세 때 단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하나 궁중의 한 과부요, 전하는 어린 나이로 선왕의 한 아들일 뿐이니, 천백 가지의 재앙을 어찌 다 감당하며 억만갈래 민심을 어찌하여 수습하렵니까?”하는 유명한 단성현감 사직소를 올려 척신정치의 폐단과 비리를 통절히 비판하면서 임금이 크게 분발하여 명신(明新)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다.
임금으로 하여금 국가 위기의 심각성을 깨우치도록 심금을 울리기 위해 격한 표현을 썼지만 임금의 어머니인 문정대비(文定大妃)를 과부라 한 것 때문에 죄를 입을 뻔했으나 대신과 언관의 구원으로 무사했으며, 당대 사림의 훈척공격에 모범을 보인 것이라 하여 조야에 명성을 크게 드러내게 되고 후세까지 길이 칭송되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정인홍(鄭仁弘)·하응도(河應圖)·하항(河沆)·박제현(朴齊賢) 등 후일 그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수업받기 시작하였다.
61세 때인 1561년 삼가의 토골에서 진주 덕산(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의 사륜동(絲綸洞)으로 거처를 다시 옮기고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강학하자, 진주·산청·함양·거창 등의 인근지역은 물론 서울의 선비들까지 그를 좇아 몰려들었는데, 바로 그들이 정탁(鄭琢)·김효원(金孝元)·최영경(崔永慶)·김우옹(金宇裵)·이정(李楨)·김면(金沔)·조원(趙瑗) 등이었고, 정구(鄭逑)·최황(崔滉)·곽재우(郭再祐)·성여신(成汝信) 등은 이들보다 조금 늦게 문하로 들어왔다.
문정대비가 죽고 윤원형이 실각하여 척신정치가 막을 내리던 1566년(명종 21), 정치쇄신과 민심수습의 일환으로 성운·이항(李恒)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징소되어 상서원판관의 벼슬을 받자, 66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사은숙배 후 임금을 면대하고 물음에 응했는데 명종의 성의와 대신의 경륜이 부족함을 알고 곧 사직, 하향하였다.
이듬해 선조가 즉위한 이후 새로운 정치를 보필할 어진 인물을 구한다는 차원에서 여러 차례 징소되고, 1569년(선조 2)에는 정4품인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의 벼슬까지 내려졌으나 조정이 헛된 자리로만 대우함을 알고 늙고 병들었음을 구실로 끝내 응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때로는 당시의 폐단 열 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리되 민생구제가 급선무인데도 조정의 논의에 성리설만 무성할 뿐 실혜(實惠)가 없음을 경계하였다.
특히 68세 때인 1568년에 올린 『무진봉사 戊辰封事』에서는 유명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펴 서리의 작폐를 근절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나라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선조 초에 일어난 진주지역의 음부옥(淫婦獄)에 관련되어 이정과 절교하고 뒤이어 그 문인들이 주동하였던 음부집안의 훼가출향(毁家黜鄕)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기대승(奇大升) 등 일부 관료로부터 비방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했는데 조정에 나와 있던 그 문인 오건·정탁 등의 변호로 무사할 수 있었으며, 오히려 흉년이라 하여 임금이 음식물을 내려주고 72세로 별세하기 직전 의원을 보내오는 우대를 받았지만, 이정의 편에 서서 음부옥에 관한 그의 처신을 비난했던 이황의 편지가 후일 알려지면서 그 문인들 사이의 갈등을 깊게 하고, 끝내 정인홍(鄭仁弘)에 의한 이언적·이황 배척을 불러오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의 학문은 처음 과거공부에 주력하며 좌류문(左柳文, 春秋左傳과 唐代 문장가 柳宗元의 文體)을 주로 익혔으나 25세 되던 해에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다가 원나라 유학자인 허형(許衡)의 글에서 “이윤(伊尹)의 뜻과 안연(顔淵)의 학문을 체득하여 벼슬에 나가면 큰 일을 하고 재야에서는 지조를 지킨다.”는 글귀에 접하여 크게 깨우쳐 이제까지 속된 학문에 빠졌던 것을 후회하고 비로소 성리학으로 나아가 6경 4서와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글을 탐독하게 되었으며, 특히 ≪심경≫을 중시하여 마음을 잃지 않게 하는 약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역시 다른 성리학자와 마찬가지로 경의(敬義)를 배움의 바탕이라 하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밖으로 과단성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다(평소 차고 다니는 칼에 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새겨 넣었음).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여 수양하는 기본으로 삼고 ‘의’로써 외부생활 즉, 하학(下學)·인사(人事)를 처리하여 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한 것이었다.
북송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수양론의 이념으로 정립된 ‘경’(보통 居敬·主敬으로 표현됨)을 받아들이면서도, ‘경’을 직접 드러내며 실천하는 ‘의’를 함께 중시하는 데서 퇴계 이황과 차이를 보인다.
퇴계가 ‘경’의 본원을 찾고자 궁리(즉 居敬窮理)에 치중하여 사단칠정이기심성설(四端七情利己心性說)의 상학(上學)을 즐겨 논하고 문인들과도 논변을 벌이며 이에 관한 문자를 적지 않게 남겼다면, 그는 정주(程朱)에 의해 상학은 이미 소상하게 밝혀진 만큼 다시 이를 가지고 중언부언할 이유가 없고 오직 이를 지키면서 하학 즉, 일상생활을 통해 의리로서 실천하여 드러내게 하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독서할 때마다 선유(先儒)의 글 중에 몸에 긴요한 내용이 있으면 이를 채록하여 편찬한 ≪학기유편 學記類編≫이나 존양(存養)·성찰(省察)·극치(克治)의 과정을 통해 생사를 걸고 수양에 몰두하는 내용을 적은 ≪신명사도 神明舍圖≫ 이외에는 상학에 관한 별다른 글을 남기지 않았으며, 나아가 기대승과 이기심성설 논쟁을 벌인 퇴계에게 편지하여, 손으로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천리를 논하여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하는 행위를 그만두게 하라고 한 데서 보듯이 심성논변 자체를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것이라 하여 비판하고 경계하였다.
퇴계가 시사(時事)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언급하는 경우에도 ≪성학십도≫에서처럼 군덕의 성취에 필요한 도덕적 내용으로 시종하였던 데 비해, 단성현감 사직소에서 보듯 그가 훈척정치를 정면으로 비판 공격한 것은 현실과 실천을 강조하는 그 학문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학문이란 모름지기 반궁실천(反躬實踐)하고 지경실행(持敬實行)하는 것이어야 하며 현실에서는 일반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고 삶을 영위하는데 실제적인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학문의 두 번째 특징이라고 할 성리학을 중시하면서도 천문·지리·의학·복서(卜筮)·병학(兵學) 등의 이른 바 잡학(雜學)에 관심을 갖고 여기에 능통하였던 점도 이런 학문들이 인사, 즉 현실생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학문적 특징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서도 일관되었다. 일상생활과 관련된 ‘하학’적인 측면에 치중하였으며 강학(講學)을 하기보다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학습자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심득(心得)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심신수련의 수단으로 노장(老莊)적 방법을 담고 있는 참동계(參同契)를 즐겨 읽고 조용히 앉아 깊이 사색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퇴계에 의해 이미 지적되었듯이 도교나 선학(禪學), 양명학적 특징을 다분히 나타내는 요소였다.
그의 인물에 대해서는 젊은 시절에는 다소 고답적이며 세상사람에 대해 오만하였다고 말해지기도 하지만 “중년 이후 몸을 깨끗이 가지고 결의를 지키며 예법으로 몸을 단속해서 행실이 뛰어났다.”고 한 실록의 기사나 “사람됨이 우뚝 솟아 속세를 벗어났고 희고 맑은 성품이 세상 밖에 있을 정도로 높고 멀다.(亭亭物表 皎皎霞外)”라고 한 퇴계의 평가, 그리고 그 문인인 정구가 “선생은 천지의 순수한 덕과 하악(河嶽)의 맑은 정기를 타고났고, 재주는 일세에 높고 기개는 천고를 덮으며, 지혜는 족히 천하의 변화를 통하고 용맹은 능히 삼군의 우두머리를 앗을 수 있으며, 태산벽립(泰山壁立)의 기상과 봉황이 높이 나는 이상을 갖고 있다.”고 한 말로 보건대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살아가면서도 단순히 학문에만 침잠하여 절의를 지키는 일절지사(一節之士)에 그치지 않고 천길 낭떠러지에 홀로 우뚝 솟은 늠름한 기상을 지니고서 세상을 근심하고 민생을 구하기 위하여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불의에 과감히 맞서는 재야의 비판자였다고 하겠다.
정인홍·최영경·정구로 대표되는 그의 문인들은 선조·광해군 때까지만 하여도 퇴계 문인들과 대등할 정도의 학파를 이루어 영남우도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중앙정계에서도 집권세력인 북인(北人)의 주축을 이루었는데, 대개 이들 남명학파는 다음과 같은 특색을 갖는다.
첫째 이들은 대부분 기절을 숭상하며 처사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벼슬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행적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이어진 것이다.
둘째 영남좌도의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영남우도의 학풍을 대표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을 일으킨 지역문화의 기수들이었다.
셋째 국가의 위기 앞에 대부분이 몸소 앞장 서 싸움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 활동하는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던 그들은, 국가의 위란 앞에 수수방관하지 않고 학자의 신분으로 직접 몸을 던진 참여정신이 철저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정인홍의 회·퇴배척(晦退排斥)과 독주로 인해 남명학파의 한 축이던 정구가 떨어져 나가고 정온(鄭蘊) 등이 분립하는 내부의 분열을 겪은 데다, 인조반정 후 정인홍이 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함으로써 남명학파는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겨우 진주일대에 잔존하는 데 그쳤다.
그의 사후 바로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1604년(선조 37)에 처음 간행된 ≪남명집≫과 ≪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신명사도 神明舍圖≫·≪파한잡기 破閑雜記≫가 있으며, 문학작품으로 『남명가』『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가 전한다. 1615년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및 사리에 있는 조선 중기 유학자 조식의 유적. 사적 제305호.
조식이 말년을 보내면서 학문을 닦던 곳으로, 원리 유적과 사리 유적 등 두 곳에 나뉘어 있다. 원리 유적은 최영경(崔永慶)·하항(河沆) 등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선조 9) 창건한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1601년 다시 세워 1609년(광해군 1) 사액되었는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26년 새로 지어진 것으로, 서원 안에 앞이 다섯 칸, 옆이 두 칸 반인 ‘敬義堂(경의당)’이란 이름의 강당이 있다. 뒤 편에는 따로 담장을 두르고 입구에 삼문을 세워 ‘숭덕사(崇德祠)’라 이름한 사당이 있다.
또, 서원 남쪽의 냇가에는 ‘洗心亭(세심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는 덕천서원의 유생들이 쉬던 곳으로 1585년 처음 세워졌으며 지금의 건물은 최근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사리 유적은 조식이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정진하던 산천재(山天齋)와 별묘(別廟), 조식의 묘소, 신도비 및 재실 등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 중 산천재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건물로 구들과 마루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조식이 처음 이곳으로 옮겨오던 1561년(명종 16)에 창건되었다.
그 뒤 이 건물은 1584년(선조 17)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18년(순조 18) 다시 세워졌다. 부근에는 종가에서 세운 가묘(家廟)의 특별 사당이던 별묘와 재실이 있다.
조식의 묘소에는 성혼(成渾)의 글을 새긴 묘비와 일곱 개의 석물이 있다. 묘소 아래 길가에 있는 신도비는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었고, 이조판서 김성근(金盛根)이 쓴 전액(篆額)과 이조참판 김학수(金鶴洙)가 쓴 글씨로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南冥集, 文化遺蹟總覽 (文化財管理局, 1977).
4. 덕천서원 德川書院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있는 서원.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 ‘德川(덕천)’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祠)·경의당(敬義堂)·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대문(大門)·세심정(洗心亭)·산천재(山天齋)·상실(橡室)·장판각(藏板閣)·별묘(別廟)·문루(門樓)·재실(齋室)·고사(庫舍) 등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있다.
숭덕사는 3칸으로 된 사우(祠宇)로서, 조식의 위패와 최영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경의당은 5칸으로 된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동서 양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고, 고사는 향례 때 제수(祭需)를 장만하며 보관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초정(初丁 : 첫 번째 丁日)과 9월 초정에 향사를 지내며, 양력 8월 10일 남명제(南冥祭)를 행하고 있다. 제품은 4변(頭) 4두(豆)이다. 이 서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조식의 수묘사성현병풍(手描四聖賢屛風) 외 문집 약간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900평, 임야 10정보 등이 있다.
지리산 자락이 길게 누워 멈춘 옥녀봉(玉女峯)아래인 산청군 단성면 운리 333번지 마을 한가운데 단속사터가 있다. 그 옛날 절을 찾는 신도들이 단속사의 초입인 광제암문에서 미투리를 갈아신고 절을 한바퀴 돌아나오면 어느덧 미투리가 닳아 떨어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그 규모가 장대 했었는데,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다. 아침 저녁으로 쌀을 씻던물이 10리 밖 냇물까지 미쳤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민초들의 불시를 짐작케 하는 단속사의 흔적은 솔밭 사이에 있는 당간지주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한쌍의 삼층석탑 뿐이다. 그 옛날 단속사에는 신충이 그린 경덕왕의 초상과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하나 그 자취는 알 길 이 없다. 또한 단속사에는 두 개의 탑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법랑(琺瑯)에 이어 선종을 익힌 명필 탄연(坦然)의 비인데, 부서진 것을 수습하여 동국대 박물관과 숙명여대 박물관에서 각각 소장하고 있다. 모두 한국 금석문의 명필작이다. 신행선사는 통일신라시대에 북종선(北宗禪)을 전래시킨 신상의 소유자였으니 단속사터는 한국불교사 내지 한국사상사의 기념적인 것이다.
일연의『삼국유사』'신충괘관(信忠掛冠)' 항에는 단속사 창건설화가 2편 실려있다.
'763(경덕왕22)년 신충이 두 벗과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南岳)으로 들어갔다. 왕이 두번을 불러도 나가지 않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임금의 진상(眞想)도 모셨는데 금당 뒷벽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단속사는 세속적인 곳에서 벗어나 불법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친다는 의미보다는 신충이 임금의 초상화를 금당에 모신 것으로 미루어 왕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곳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 설화는 '경덕왕 때에 직장(直長)이순(李純)이 일찍이 소원을 빌었더니 나이 오십이 되면 출가하여 절을 세우리라 했다. 748(경덕왕 7)년에 그의 나이 오십이 되자 조연소사(槽淵小事)를 고쳐 큰 절을 만들고 이름을 단속사라 하였다.' 이 설화로 단속사 이전에 작은 절이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크게 중창하여 단속사로 명칭을 바꾼 듯하다. 어떤것이 정확한지 일연 스님도 알수없어 둘 다 적어 놓는다고 한다. 설화의 사실 여부를 떠나 단속사가 8세기경에 창건된 고찰임은 알 수 있다.
단속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석에 의하면 단속사는 수백 칸이 넘는 절로서, 식객들이 너무 많아 학승들이 공부하는데 지장이 많았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식객을 줄일 수 있을가 하던 중 한 도인이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로 이전의 금계사(금溪寺)였던 절 이름을 단속사라 고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자 과연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더니 절이 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일손(金馹孫)이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천왕봉을 등반하고 쓴 『두류기행(頭流紀行)』에서 단속사를 '절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곳이 수백 칸이나 되고 동쪽 행랑에 석불 500구가 있는데 하나하나가 각기 형상이 달라 기이하기만 했다'고 적고 있다.
단속사의 초입은 깎아 세운 듯한 '광제암문(廣濟椎門)'이라고 새겨진 우람한 바위로부터 시작된다. 용두마을 뒤쪽에 있는 이 석벽은 단속사로 들어가는 천연 석문(石門)으로, 단정하게 새겨진 해서체의 커다란 글씨는 최치원이 썼다고도 하나, 905(고려 성종 14)년에 이절의 스님이 쓰고 새긴 것이라 한다.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원위치에 있으며,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하여 강당지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시대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금당지에는 만기가 있어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동·서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경주를 떠나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단속사 삼층석탑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면 마을 입구에 고려말 강회백(姜淮佰)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면서 심었다는 수령 6백년 이상된 매화나무가 있다. 뒤에 그가 정당문학 벼슬을 하게 되자 '정당매(政堂梅)'로 부르게 되었으며 정당매를 기념하는 비각도 있다. 그로부터 몇 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후손들이 가꾸어 그의 정신을 기리며 보호하고 있다. 강회백은 정당매라 불리는 단속사의 매화를 보며 '단속사견매'라는 시 한수를 남겼다.
단속사견매 (斷俗寺見梅)
한 기운이 돌고 돌아갔다 다시 오나니
천심(天心)은 섣달 전의 매화에서 볼 수가 있고
스스로 큰 솥에 국맛을 조화하는 열매로서
부질없이 산중에서 떨어졌다 열렸다 하네
(『동문선』권지22) http://www.sancheong.ne.kr(산청군청 홈페이지)
가. 단속사지동삼층석탑(斷俗寺址東三層石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5.3m. 보물 제72호. 단속사 터에 동서로 세워진 쌍탑 중 동탑으로 2층기단 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양식의 방형 삼층석탑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을 한데 붙인 4개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면석은 비교적 높은 편으로 면마다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2개씩 모각되었다.
갑석(甲石)은 두툼하고 윗면은 약간의 물매를 잡았으며, 중앙에는 단면이 직각과 모를 둥글게 죽인 2단의 굄을 각출하여 상층기단의 면석을 받치게 하였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4매의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한 장으로 된 갑석을 얹었다. 각 면에는 우주형과 중앙에 탱주 하나씩이 각각 모각되었고, 갑석은 밑에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으며, 윗면에는 하층기단과 같은 2단의 굄을 각출하여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를 각각 따로 만들었는데, 옥신에는 알맞은 크기의 우주를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옥개석은 비교적 얇은 편인데 수평을 이룬 처마 밑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지붕면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의 끝에서 가볍게 반전하였다. 지붕의 중앙에는 굄을 각출하고 처마의 네 귀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까지 남아 있는데, 노반에는 부연이 붙은 갑석형을 각출하였고, 복발은 편구형(扁球形)에 두 가닥의 띠를 두른 양식이며 앙화는 2단의 받침 위에 팔화(八花)를 돋을새김하였다.
이 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균형이 알맞아서 안정감이 있고, 돌다듬기의 수법 또한 정연하여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文化財大觀 4-寶物 2-(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나. 단속사지서삼층석탑(斷俗寺址西三層石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5.3m. 보물 제73호. 단속사 터에 동서로 세워진 쌍탑 중 서탑으로 2층기단 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양식의 방형 3층석탑인데 규모나 양식구조 등이 동탑과 똑같으나 파손이 심하다.
하층기단은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을 하나의 돌로 다듬은 4개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면석은 비교적 높은 편이고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를 각각 2개씩 모각하여 각 면을 셋으로 나눈 것은 동탑과 같다. 갑석(甲石)은 크게 파손되었으나 윗면에 완만한 물매를 잡았으며, 중앙에 동탑과 같은 2단의 굄을 각출하였다.
상층기단도 크게 파손되었으나 면석은 4매의 판석을 세우고 2매의 판석으로 짠 갑석을 그 위에 얹었다. 갑석 밑의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나 윗면의 2단 굄도 동탑의 그것과 같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를 각기 다른 돌로 만든 것이며, 옥신에는 알맞은 크기의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비교적 엷은 편인데 수평을 이룬 처마 밑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지붕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의 끝에서 가볍게 반전하였다.
지붕의 한가운데는 상층을 받는 굄이 있고 처마의 네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이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은 동탑과 같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동탑과 같이 균형이 좋고 안정감이 있으며, 돌다듬기 수법 또한 깔끔하여 단정하고 우아한 석탑이라 하겠으며, 동탑과 더불어 쌍탑의 하나로 조성된 것이 분명하다.
1967년 이 탑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그 때 1층 옥신석에서 원형 사리공(舍利孔)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이미 도난당하고 없었다.
≪참고문헌≫ 文化財大觀 4-寶物 2-(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5. 남사마을
남사마을에는 밀양 박씨, 성주 이씨, 진양 하씨 등이 수백년을 지켜오고 있으며, 많은 선비들을 과거에 급제했다. 남사마을에는 각 성씨들이 벼슬길에 나섰거나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뒤 심은 매화나무들이 고택마다 수백년 수령을 자랑하며 자리잡고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인 최씨 고가에는 '최씨매'가, 이씨고가에는 100년수령의 '이씨매'가 있다. 또 하씨가 32대째 살고 있는 '분양고가'에는 600년 수령의 '분양매'가 있으며 그 곁에 '매화시비'가 나무를 지키고 있다.
가. 최씨고가
위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소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17호
이 고가는 안채, 익랑채, 사랑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형 배치를 하고 있다. 사랑채 좌우에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을 2곳에 설치하고 있는데 동측 중문은 통과하면 안채가 한눈에 지각될 수 있는 개방적인 형태인데 반해서 서측의 중문은 통과하더라도 익랑채와 안채가 직접 눈에 뛰지 않도록 안으로 담을 ㄱ자로 둘러쳐 시각을 차단하는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사대부주택에서 유교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남녀의 공간 분할과 여성공간에 대해 독립성을 갖기 위해 택한 뛰어난 배치수법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전후퇴간이 있는 5량구조팔작집이다. 후퇴간의 폭이 커서 각방 뒤편으로 수장을 위한 벽장이 놓이고, 특히 부엌과 건너방 뒤에는 방으로 분할되어 홑집형식에서 겹집형식으로 변화 발전하는 형태를 나타낸다. 건물고가 높고 부재들이 견실하며 이중방문의 조각장식은 섬세하고 아름다와 사대부 주택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전후퇴간이 있는 5량구조 팔작집이며 안채와 같은 겹집형식을 취하고 있다.
위치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소개 :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18호
안채, 사랑채, 익랑채, 곡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 되고 사랑채는 안채와 앞뒤로 나란한 병렬배치이고, 사당은 곡간채 뒤측이지만 안채 좌측 전면에 있고 시각적으로 막혀 있는 특이한 배치를 보인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전후퇴칸이 있는 5량구조 팔작집이다. 대청이 2칸을 차지하고 있고 건너방 뒷마루는 대청보다 20㎝가량 올리고 그 밑에 아궁이를 설치한 전형적인 남부 일자형 평면이다. 일반적을 사대부의 주택에서 안채의 부엌위치는 사당의 방향과 반대편이지만 여기서는 특이하게 사당과 같은 동측에 부엌이 놓여져 있다.
사랑채는 정면4칸, 측면3칸으로 전후퇴칸이 있는 5량구조 팔작집이며, 대청이 방사이에 1칸을 차지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사랑채와 다른, 주거를 목적으로 하는 안채와 비슷한 평면을 취하고 있다.
실의 형태는 후퇴칸의 폭이 커서 방뒤로 수장기능을 하는 방을 두고 있는 겹집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 징〕 학명은 Prunus mume S. et Z.이다. 높이는 5m 정도 자라고, 가지는 초록색이며 잔털이 돋는 것도 있다. 잎은 어긋나고 난형 또는 넓은 난형으로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예리한 잔 톱니가 있다.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며, 연한 홍색이 도는 흰빛으로 향기가 강하다. 꽃잎은 다섯 개인 것이 기본형이지만 그 이상인 것도 있다.
〔효 용〕 열매는 살구 비슷하게 생기고 녹색이며 털로 덮였으나, 7월이 되면 황색으로 되고 매우 시다. 홍색으로 익기 전에 따서 소금에 절였다가 햇볕에 말린 것은 백매(白梅), 소금에 절이지 않고 볏짚을 태워 연기를 쐬면서 말린 것은 오매(烏梅)라 하여 약용하였다. 한방에서는 수렴(收斂)·지사(止瀉)·생진(生津)·진해(鎭咳)·구충(驅蟲)의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성은 온(溫)하고 산(酸)하며, 해수(咳嗽)·인후종통(咽喉腫痛)·번갈(煩渴)·요혈(尿血)·변혈(便血)·혈붕(血崩)·이질(痢疾)·설사(泄瀉)·회충복통(蛔蟲腹痛)·구충증(鉤蟲症) 등에 치료효과가 높다. 뿌리는 매근(梅根), 가지는 매지(梅枝), 잎은 매엽(梅葉), 씨는 매인(梅仁)이라 하여 약용된다. 또 매실은 식초로 쓰였다. ≪규곤시의방 閨璟是議方≫에는 오매를 볕에 말려 가루로 만들었다가 필요할 때 물에 타서 쓰는 매자초가 기록되어 있다.
요즘에는 매실을 소주에 담가 매실주를 많이 만들고 있다. ≪임원경제지≫에는 매화꽃잎을 넣고 끓이는 죽도 소개되어 있다. 매화나무는 추위가 덜 가신 초봄에 꽃이 피기 시작하므로 봄소식을 알려주는 나무로 아낌을 받아왔다. 특히,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운다 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아 많이 재배하였고, 시나 그림의 소재로도 많이 등장하였다.
〔재 배〕 범석호(范石湖)는 ≪매보 梅譜≫에서 천하에 으뜸가는 꽃이라 칭하였고, 강희안(姜希顔)은 화목을 9품으로 분류한 ≪양화소록 養花小錄≫의 화목9등품론에서 소나무·대나무·연꽃과 함께 1품으로 분류하고 높고 뛰어난 운취는 취할만하다고 하였다.
아울러 “무릇 매화를 접하는 데는 먼저 소도(小桃)를 분에 심어 그 분을 매화나무에 매달고, 소도의 거죽과 매화의 거죽을 벗기고 두 나무를 한데 합쳐 생칡으로 단단히 동여맨다. 두 나무의 물기가 통하여 거죽이 완전히 얼러붙은 뒤에는 본 매화나무를 잘라 버리니, 이것을 세상에서 의접(倚接)이라 한다. 분을 그늘과 볕이 번갈아 드는 곳에 두고, 물을 자주 주고 가지를 서로 얽어매어 꼬불꼬불한 노매(老梅) 모양으로 만든다. 가지에 꽃망울이 맺히면 따뜻한 방에 들여놓고 온수를 가지와 뿌리에 자주 뿌려주고 또 옆에 숯불을 피워 찬 기운을 막아주면 동지 전에 꽃이 피어 맑은 향기가 방안에 가득 풍기리니, 구태여 침사(沈射)를 따로 피울 필요가 없다. 만약, 나무가 늙어 가지가 빼어나지 못하고 가지에 꽃망울이 나오지 않으면 양지 쪽에 옮겨심고 그 뿌리가 뻗는 대로 두면 큰나무가 된다. 분에 심은 매화는 꽃이 진 뒤에 찬 기운을 받지 않도록 땅굴 속에 들여놓으면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만일, 찬 기운을 받으면 결실이 못 됨은 물론 가지도 또한 말라버린다. 분은 와기를 쓸 것이며, 물을 주어 마르지 않게 한다.”고 하여 매화를 기르는 법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매화나무는 흰꽃이 피는 것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으나 분홍꽃이 피는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흰매화라 부르며, 분홍꽃이 피는 것은 분홍매화, 꽃잎이 다섯 개보다 많은 것은 많첩흰매화·많첩분홍매화 등으로 구별하고 있다.
이곳은 고려말 공민왕 때 문익점이 면화를 처음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 원나라에 가는 사신의 일원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원나라 관리의 눈을 피해 붓대에 면화 씨를 넣어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 뒤 이곳에서 처음 면화를 재배하여 국민생활과 경제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면 적 : 15,295㎡(4,627평)
주요시설물
○ 목면시배 유지 전시관
제1전시실 : 물레, 무명이 되기까지의 과정, 면화의 역사, 베틀
제2전시실 : 각종 고유 의상
○ 야외시설물 : 작업동, 효자비, 사적비, 면화시배지, 매표소, 휴게실
8. 성철스님생가(겁외사)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210번지. 멀리 지리산 자락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 들판에는 지난해 3월 30일 새로운 사찰 하나가 들어섰다. 1981년부터 12년간 불교 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던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의 생가가 복원되고 그 앞에 법당이 세워진 것이다. 원래 이 곳에는 성철 스님이 태어나고 자란 한옥이 있었지만 그가 출가한 후 아버지는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겼고 오랫동안 논으로 사용돼 왔다. 그러던 중 성철스님문도회(회주 법전·法傳 해인사 방장)가 성철 스님 추모사업의 하나로 지난 98년부터 생가 복원을 추진했다.
겁외사(劫外寺)―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절’이란 이름을 가진 이 사찰은 한해 만에 산청군이나 경남 지역은 물론 전국적인 명소로 떠올랐다. 수많은 수행 일화와 법어(法語)를 통해 불교계뿐 아니라 전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성철 스님에 대한 관심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가깝도록 가라앉지 않아 방방곡곡에서 이곳을 찾는 참배객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4일 오후 4시 겁외사 앞 주차장은 20여 대의 관광버스로 부산한 모습이었다. 경남·경북·대구·부산 등의 번호판을 단 버스들의 앞 창문에는 ‘경주 동수암’ ‘대구 법성사’ ‘대구 본초산악회’ ‘부산 동산동’ 등 다양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삼삼오오 경내로 들어가 한 가운데 자리잡은 성철 스님 동상과 그 옆의 대웅전을 참배했다. 대구 법성사 방생단의 일원인 심복순(75·여·경남 마산 거주)씨는 “동상과 대웅전 벽에 걸린 영정을 보니 생전에 뵈었던 성철 스님의 모습이 생각나서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성철 스님의 집안은 상당한 부농(富農)이었다. 사방 1㎞는 남의 땅을 밟지 않을 정도였고, 집 주위에는 엄청나게 큰 밤나무들이 많았다고 한다. 복원된 성철 스님 생가는 아버지 이상언(李尙彦) 공이 머물던 사랑채와 어머니 강상봉 여사가 7남매를 기르던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유학자였던 아버지의 아호를 따서 ‘율은재(栗隱齋)’라고 이름붙여진 사랑채에는 산청 지역 유림들이 생가 복원을 기념해서 지난해 올렸던 고유제(告由祭)의 기록이 붙어 있다. 안채에는 김호석 화백이 성철 스님 다비식을 그린 ‘다비장 가는 길’과 옛날 생활 용품들이 놓여 있고, 왼쪽 방에는 성철 스님의 거처였던 해인사 백련암 염화실(拈花室)을 재현해서 그가 사용하던 낡은 책상과 등받이 의자, 삿갓 등을 옮겨 놓았다.
참배객들이 가장 많이 찾고 오래 머무는 곳은 성철 스님의 유물을 모아 놓은 ‘포영당(泡影堂)’이다. 성철 스님의 상징과 같았던 누더기 두루마기·고무신·주장자와 단성초등학교 학적부, 출가 때 받은 계첩(戒帖), 안거를 지낸 곳에서 발급한 증서(證書) 등 3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한 이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성철 스님의 삶과 수행을 보여주는 터치 스크린을 작동하고 있던 신태하(65·부산시 모라동)씨는 “성철 스님을 기리는 마음에서 2년전 공사 중일 때에 이어 두번째로 겁외사를 찾았다”고 말했다.
성철 스님 생가를 찾는 사람은 평일에는 500~1000명, 주말이면 하루 2000명에 이른다. 영남 지역 사람들이 많지만 지난해 말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대전이나 서울 등 다른 곳에서 오는 참배객도 크게 늘었다. 겁외사는 단성IC에서 5분 남짓 걸린다.
참배객들은 대부분 사찰에서 성지순례나 방생에 나선 불교 신도거나 지리산 등반을 다녀오는 등산객이지만 가족 단위의 방문객도 상당수에 이른다. 3형제가 가족을 데리고 함께 온 정인철(46·경남 진주 주약동)씨는 “얼마전 매형들과 함께 와서 보고 너무 좋아 이번에는 동생들과 다시 찾았다”고 말했다. 또 겁외사를 찾는 사람은 꼭 불교 신자만은 아니다. 성철 스님의 손상좌(孫上佐)로 겁외사의 일을 보고 있는 일련(日蓮) 스님은 “다른 종교 신자들이나 천주교 수녀, 원불교 정녀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고 말했다.
겁외사의 등장은 인근 문화유적에도 예상치 않은 특수(特需)를 가져왔다. 겁외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는 2000년 4만5000명이던 관람객이 2001년에는 6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또 겁외사와 면화시배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 등을 연결하는 관광코스가 개발되어 이용하는 사람이 계속 늘고 있다.
산청군도 이런 변화를 적극 반기는 입장이다. 겁외사 앞에 휴게시설을 마련하고 주변에 대규모 수림대(樹林帶)를 조성하는 등 참배객을 위한 사업을 계획 중이며, 오는 5월 열리는 지리산 축제 기간 중 초·중등학교 백일장을 이곳에서 개최하는 등 지역 문화 활동과 연결시키는 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정태수(鄭泰守·73) 산청문화원장은 “성철 스님은 문익점·조식·곽종석(郭鍾錫) 등을 배출한 ‘선비의 고장’ 산청의 맥을 잇는 인물”이라며 “자라나는 이 고장의 다음 세대에게 그의 삶과 정신을 교육하고 전승하는데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겁외사도 예상보다 훨씬 많이 밀려드는 참배객들로 즐거운 비명이다. 성철스님문도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원택(圓澤) 스님은 “유물전시관이 너무 좁아서 참배객들에게 성철 스님의 참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며 “주차장 자리에 영상시설 등을 갖춘 아담한 교육관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성철스님은 어릴때 동서양 고전 섭렵 12년간 조계종 종정 역임 경남 산청은 속명이 이영주(李英柱)였던 성철 스님이 24세의 나이로 구도(求道)의 뜻을 안고 해인사로 떠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가 태어난 단성면은 합천 이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합천 이씨는 지금도 인근에 약 200호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대성(大姓)이다.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성철 스님은 서당을 거쳐서 단성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즐겼으며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혼자서 많은 책을 읽었다. 20세 때 만든 서적기(書籍記)에는 대학·근사록(近思錄)·민약론(民約論)·순수이성비판·신구약성서· 자본론·남화경(南華經) 등 동서양 고전 80여권이 적혀 있다. 그는 “인근의 일본 유학생들이 집에 돌아오면 찾아가서 책을 빌리고 어떤 때는 쌀 한 가마를 지고 가서 바꿔 오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청년 이영주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소장하던 한 서적의 표지에는 ‘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 through all eternal(모든 불멸을 통해서 영원에서 영원으로)’이라는 영어 메모가 남아 있다. 책을 통해서 영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그는 집 근처의 대나무숲이나 밤나무밭에 나가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대원사(大源寺)로 들어갔다. 어떤 스님에게서 얻어 읽은 중국 송나라 때 영가(永嘉) 스님의 ‘증도가(證道歌)’에 큰 감명을 받고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작은 방을 하나 빌려서 혼자 수행을 시작했다. 머리를 기른 한 젊은이가 밤낮으로 정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곧 대원사 주변에 퍼졌고, 마침 이곳을 찾았던 최범술(崔凡述) 스님은 그에게 해인사로 가서 당대의 고승인 동산(東山) 스님을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진리를 찾으려는 간절한 마음을 품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서 떠났고, “출가한 수행자에게는 고향이 없다”며 다시는 산청을 찾지 않았다.
무릇 법의 體는 이름할 수도 없고 모양도 없으니 지혜에 눈멀고 귀 먼 사람은 그 뜻을 볼 수 없고, 마음의 性은 있는 듯 없는 듯하니 理致에 어두운 사람이 어찌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有學. 無學도 겨우 香積 세계의 밥을 맛볼 수 있는데, 二乘, 三乘이 어찌 藥樹의 과일을 얻을 수 있으리오. 禪那란 것은 末을 돌이켜 本으로 돌아가는 오묘한 문이며 마음으로 인하여 道에 올라가는 그윽한 길이다. 그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오랜 劫 동안의 죄를 없애고, 그곳을 생각하는 사람은 한량없는 세계의 德을 얻는다. 하물며 여러 해 여러 대 동안 수행을 쌓아 功을 이룬 것이 깊고 깊어서 그 極에 이름에 있어서이랴. 五十七 위계는 57位에 오르고 명성은 삼천대천세계에까지 뻗치며 부처의 종자를 잇고 法의 등불을 전하는 분은 바로 우리 神行禪師이니 授記를 받음이라.
선사는 속성이 김씨이고 동경 御里人으로 級干 常勤의 아들이며 先代의 승려인 安弘의 형의 증손이었다. 善을 쌓고 마음을 닦았으며 이전부터 느낀 바 있어 나이 바야흐로 삼십쯤에 절로 향하였다.
運精律師를 받들어 섬기며 헌 바리때와 누더기 한 벌로 2년간 고된 수련을 했다. 다시 法朗禪師가 虎踞山에서 지혜의 등불을 전하고 있음을 듣고 곧 그 곳에 나아가 문득 깊은 뜻을 받았다. (법랑선사가) 7일이 되기 전에 시험삼아 이치의 옳고 그름을 물었더니 "미묘한 말씀은 그윽히 통하는 것이니 마음에 즉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화상이 찬탄하기를 "훌륭 하도다! 마음의 등불의 법이 모두 너에게 있다"라 했다. 부지런히 삼 년 동안 구하다가 (법랑)禪伯이 돌아가시자 통곡하기를 몸을 부수듯 하였으나 연모함을 어찌 다할 수 있었으리오. 드디어 삶이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으며 죽음이란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멀리 大洋을 건너 오로지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려고 위험스런 푸른 물결을 탔으나 安心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험한 바다를 대하면서 더욱 戒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채찍질하여 誓願을 굳게 하였으며 부처님의 神異한 위력에 힘입어 조각배로 곧바로 나아가 중국 땅에 이르렀다.
그때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변방을 어지럽혔으므로 여러 州府에 勅을 내려 잡아들이라고 엄중히 命令했다. 관리가 스님을 의심하여 따져 물으니, 선사가 온화하게 대답하기를 "貧道(小僧, 저)는 海東에서 태어나 법을 구하러 여기 왔을 뿐입니다"라 했다. 관리가 마음대로 놓아줄 수 없어서 240여 일 동안 조사하며 그 몸을 붙잡아 두었다. 이때에 같이 있던 무리들이 사람이 없는 때를 엿보아 차꼬와 수갑을 벗어나 쉬면서 모두 "너는 어째서 이렇게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대답하기를 "슬프도다. 내가 과거에 罪業을 지었기 때문에 지금 고통을 당하는 것이니 달게 받겠다"하고 끝내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는 곧 욕됨을 참고 더러움을 받아들인 자취이며 빛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은 것이었다.
일이 잘 풀려 드디어 志空和上에게 나아갔는데 화상은 곧 大照禪師의 제자였다. 아침 저녁으로 우러러 모시며 3년을 지냈더니 비로소 마음을 열어 玄珠를 전해주었다. 작은 티끌도 어그러뜨리지 않고 문득 大千經卷을 撮略하였으며 한 치도 펴지 않고 두루 百億의 佛土에 노닐었다. 항상 自性의 바다 깊은 근원에서 헤엄쳤으며 항상 眞空의 그윽한 경계에 뛰놀았다. 화상이 돌아가시려고 할 때 이마를 어루만지며 授記하여 "돌아가거라. 흠모할 만한 재목이여! 너는 이제 본국에 돌아가서 중생을 깨우치고 佛法을 드날리거라"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입적하니 이때를 당하여 마음이 확 트이면서 일찍이 얻지 못했던 것을 얻었다. 빈집에 지혜의 등불을 돋우어 밝히고 禪의 河水에서 禪定의 물을 모이니 가깝고 먼 곳에서 보고 들어 존중하고 우러러 받든 것들은 가히 이루 다 적을 수 없음이라.
그 뒤 鷄林에 돌아와 어리석은 무리를 이끌었는데 道에 뿌리를 내린 사람에게는 마음을 살피라는 한 마디 말로 가르치고, 그릇이 될만한 사람에게는 方便으로 많은 門을 보여주었다. 一代의 秘典에 통하였고 三昧의 밝은 燈을 전하였으니 이는 佛日이 동쪽으로부터 다시 밝은 것이고 法雲이 해 돋는 곳에서 다시 일어난 것이라고 이를 만했다.
설령 三達을 가지고 온 세상을 망라하여 그 자취를 적고 그 功을 쓰고자 하더라도 어찌 조금인들 기록할 수 있겠는가. 道의 몸은 땅처럼 오래가고 慧命은 하늘처럼 길기를 바랬는데, 슬프도다.
능히 敎化할 사람이 이미 다하였으니 敎化시킬 선지식은 바야흐로 옮기려고 하는구나. 이는 곧 이끄는 스승이 그 모습을 감추고 드러내는데 따른 理致가 반드시 그러한 까닭이다.
76세를 사시고 大曆 14년(779, 惠恭王 15년) 10월 21일에 南岳 斷俗寺에서 돌아가셨다. 이날에 하늘이 어둡고 캄캄해지니 해와 달과 별이 그 빛을 잃었고, 땅이 흔들려서 만물이 이로 인해 시들었다.
샘물이 갑자기 마르니 고기와 용이 그 속에서 놀라 뛰었고, 곧은 나무가 먼저 부러지니 원숭이와 새가 그 밑에서 슬피 울었다. 이에 僧俗이 감화되어 멀고 가까운 곳에서 한결같이, 어떤 사람은 지팡이처럼 공중을 날다가 번개처럼 사라지는 기이한 향기를 맡았고, 어떤 사람은 잔처럼 흐르다가 비처럼 모이는 상서로운 구름을 보았다.
피눈물을 흘리며 屍身을 태우고 마음을 다하여 뼈를 묻은 지 거의 36년이 되었다. 그 곳은 낭떠러지가 만 길쯤 되고 흐르는 물이 천 길쯤 되어 이름을 숨기고 귀를 씻고 숨어 살 만한 곳이며, 세상을 버리고 자취를 감출 만한 그윽한 곳이었다. 禪定의 못이 깊고 맑아서 慧日의 빛을 깊이 감출 만하고 妙空의 숲이 고요하여 禪風의 울림을 길이 이끌 만하였다. 북쪽으로는 홀로 서있는 높은 언덕에 의지하였고 서쪽으로는 三藏의 먼 골짜기와 이웃했다. 산꼭대기에는 어스름한 달이 걸리고, 연못 밑에는 금과 옥이 던져져 있는 듯하니 어찌 오로지 地理가 높고 험할 뿐이겠는가, 또한 신령스러운 神의 동굴이로다. 記에 足山의 石室은 마하가섭이 法衣를 지키며 慈氏(彌勒)를 기다리는 곳이라 했으니 어찌 여기가 아니겠는가. 世世로 바위라 일컫기만 하던 것을 지금 여기에서 보니 이루어진 그때부터 그 모양이 (계족산의) 門과 같으나 門이 열릴 시기는 언제쯤인지 알 수 없다. 이같은 성스러운 자취는 그 數가 매우 많아서 자세히 다 말하기가 어렵다.
지금 우리 三輪禪師는 전생에 뭇 묘한 인연을 심어서 본래 三身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음은 自性이 없고 깨달음은 다른 사람을 말미암지 않으므로 함께 道業을 닦아 서로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언젠가 참선하는 여가에 중생을 깊이 생각하여 "형체가 없는 이치는 像을 세우지 않고는 볼 수가 없고, 말을 떠난 法은 글로 드러내지 않으면 전할 수 없다. 슬프다. 자애로운 아버지가 玉을 품고 돌아오고 가난한 아들이 보배를 얻은 지가 얼마나 되었던고"라 말하였다. 이로써 이름난 장인을 불러서 영정을 그리고 浮圖를 만들어 舍利를 모시고 戒香을 피우며 禪定의 물을 뿌려서 간절하고 슬픈 마음을 先聖에게 드려 장차 후대에 거울이 되고자 하였다.
저 밝은 조정에서 벼슬하는 어진 사람들, 마음을 道의 경지에 둔 선비들, 韋提希와 같기를 힘써 생각하는 귀한 사람들과, 圓寂을 얻고자 하는 무리들이 서로 돌아보며 맹서하여 우리 여러 사람들이 함께 수많은 부처님을 모셨으며, 많은 스님을 함께 섬겼다. 이로 말미암아 桂苑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받았고 金枝에서 玉葉을 빼내었다. 수레를 나누어 타고 임금을 따랐으며 맑은 시냇가에서 한가로이 노닐었고, 큰 조정의 신하가 되어 天子의 집 아래에서 좋아 춤추었다. 큰 집의 대들보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이보다 盛한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무성하면 반드시 쇠퇴한다는 것은 옛사람이 전하는 바이니 슬프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적에 혼자 왔으니 죽을 때 또한 누구와 함께 가겠는가. 홀연히 문틈사이로 지나가는 햇빛과 같아 언제 어디서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아니함이로도다. 만약 火宅에서 나와 露地에 오르거나 三界를 벗어나 一如의 경지에 돌아가고자 한다면, 부처님의 방편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三覺 만한 것이 없고, 道를 돕는 것은 하나가 아니지만 남의 善行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므로 충직한 관리에게 명하고 깨끗한 스님들께 권해서 장차 이러한 유한한 재산을 가지고 저 무궁한 복을 지으려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이름난 산에서 돌을 캐오고 깊은 산곡에서 나무를 베어 와 비석을 새기고 절을 지었다. 길이 큰 발자취를 나타내며 오랜 세월을 지나도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노니, 이른바 사람이 능히 도를 세상에 널리 편다는 말이 어찌 빈 말이겠는가. 부처님께서 법을 국왕에게 부촉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이다.
나는 포부는 크지만 세밀하지 못하고 재목이 못되어 부끄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그윽한 교화를 찬양하고자 하여 문득 짧은 생각을 기록하나 一心도 맑히지 못했으니 어찌 三學의 집에 오를 수 있으리오. 반딧불의 반짝거림으로 적이 태양의 빛남을 돕고자 한다. 앞선 識見이 있고 빠른 계획이 있더라도, 어찌 손가락으로 달을 구할 것이며 달걀을 깨고 난 후에 새벽에 울기를 求할 수 있겠는가. 오직 바라건대 바닷물은 마르더라도 원력의 바다는 끝이 없고 큰 물이 넘치고 가뭄이 심하더라도 碑銘은 굳게 보존되며, 그 후 아득히 많은 중생과 모든 생명체들이 精神에 法의 물을 대고, 마음밭에 道의 싹을 길러서 길이 애욕의 진흙에서 벗어나오고 다 함께 涅槃의 언덕에 올라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 詞에 이르기를
깊도다 깨달음의 바다여 그 넓음이 허공과 같구나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어 적적하고도 원융하도다.
그 가운데 가장 殊勝한 것은 三學의 으뜸이오
마음과 마음으로 祖師의 뜻 전하니 말로는 통하기 어렵도다.
처음 佛法이 일어남을 인연하여 신라에까지 왔구나
누가 능히 神異함을 알 것인가 곧 우리 禪師이시다.
부모를 하직하여 집을 버리고 번뇌의 둥지를 뛰쳐나와서
산에 들어가 도를 구하다가 바다를 건너 그 자취를 찾으셨도다.
빛을 감추고 고통을 받았으며 부지런히 수도하여 功을 이루었으며
스승과 제자가 만날 때마다 눈빛으로 서로 통하였도다.
정신을 모두어 벽을 마주하고 홀로 唐나라를 두루 行脚하다가
해돋는 곳으로 돌아와 뭇 중생을 인도하시었도다.
근기에 따라 중생에 응하여 약을 베품이 끝이 없으며
이 세상 인연이 이미 다하여 저 천궁으로 승화하였으며
빈 골짜기에 형체를 버리시니 구름 낀 봉우리에 그림자도 없도다.
같은 소리로 몰려들어 땅을 치고 가슴을 쥐어뜯으나
자비로운 빛은 이미 꺼졌으니 추모하고 연모함을 어찌 그칠 수 있으리오
훌륭한 스님이 한 분 있어 바로 그의 法要를 이었으니
精神으로 一如를 깨닫고 마음에 뭇 오묘함을 간직하셨도다.
말하지도 않고 침묵하지도 않으며 고요하면서도 두루 비추니
선정에서 나와 잠시 생각하니 오로지 잊혀져 감이 슬프도다.
이에 신령한 모습을 그리니 얼굴과 威儀가 조금도 어긋나지 않으며
또 부도를 만들어 다시 공덕을 닦았도다.
영원토록 법의 등불을 전하고
금성의 빼어난 집안과 왕실의 친족이로다.
한마음은 바다와 같아서 모든 골짜기의 물을 받아들이고
전에 닦은 것을 격발하여 원을 맺음이 고르고 밝았도다.
한결같이 法雨에 젖어 다 함께 부처님의 빛을 만났으니
맑은 조정의 신하되어 왕실의 기둥이 되었도다.
온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보아 이들을 창성하다 여겼으며
문득 오고 감이 꿈과 같으니 성함과 쇠함이 무상하도다.
열반에 이르는 길이 머니 어찌 공덕을 쌓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깨끗이 수행한 승려에게 권하고 충성스럽고 어진 선비를 골랐도다.
돌을 다듬어 명을 새기고 터를 잡아서 절을 지었으니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마르더라도 이 원은 다함이 없을 것이며
해가 가고 달이 가도 이 글은 영원토록 빛나리라.
위로는 有(界)로부터 아래로는 금강제에 이르기까지
四生은 많고 三界는 아득하구나.
禪悅의 밥을 먹고 해탈의 미음을 마셔서
다같이 깨달음의 길에 이르고 하루빨리 진여의 도량에 나아가기를.
元和 8년(813, 憲德王 5년) 계사 9월 경술 초9일 무오에 세우다.
*南冥 曺植先生 疏狀封事 (남명 조식선생 소장봉사)
● 소장봉사 : 왕께만 알리는 글.
●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사면(辭免) 하는 상소(上疏) (明宗十年乙卯
새로 제수(除授)된 선무랑 단성 현감 신 조식 (宣無郎丹城縣監臣曺植)은 진실로 황공하와 머리를 조아리면서 주상전하(主上殿下)께 상소하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선왕(先王 中宗大王)께서 신의 변변치 못함을 모르시고 비로소 참봉(參奉)을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仁宗)께서 왕위(王位) 를 계승(繼承)하시어 두번이나 주부(主簿)로 제수 하시었고 이번에는 또 현감으로 제수하시니. 위태롭고 두려움이 산을 짊어진 것 같으옵니다.
그런데 아직도 감히 황종(황종)①한자쯤 되는곳에 나아가서 천일같은 은혜에 사례하지 못함은. 대저 임금이 사람쓰는 것은 장인(匠人)이 나무를 쓰는데 심산대천 어느 곳이고 재목이 됨즉한 나무는 유루없이 써서, 큰집을 이룩하지만 나무 자체가 스스로 그 씀에 참여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쓰시는 것은 임금된 책임 때문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그 큰 은택을 감히 사사롭게하지 못하옵니다.
그러나 머뭇거리면서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인 즉 마침내 측석(側席)②앞에 감히 주달하지 아니치 못하겠습니다. 신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신의 나이가 육십에 가까왔으나 학술이 거칠어서. 문장은 병과 반렬(丙科班列)③에도 뽑히기에 부족하고 행실은 쇄소의 임무를 실행하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리하여 과거를 보기 십여년에. 세번이나 물리침을 당하고 물러났으니 처음부터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설사,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성질 급하고 마음좁은, 한 평범(平凡)한 백성에 불과할 뿐이고, 크게 일 할만한 완전한 재주는 아닙니다.
하물며 사람의 선함과 악함은 과거를 구하거나, 과거를 구하지 않는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천한 신이 헛 이름이 도둑됨으로서 집사(執事)를 그르게 했고. 집사는 헛 이름을 듣고서 전하를 그릇하게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떠한 사람이라 하십니까. 도가 있다고 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자가 반드시 도있는 자가 아니며, 도있는 자가 반드시 신과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만 전하께서 아시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재상도 또한 아시지 못한 것 이었습니다. 그 사람됨을 알지 못하면서 썼다가 후일에 국가의 수치가 된다면 그 죄가 어찌 다만 신에게만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차라리 제 한 몸만 저버릴지언정. 전하는 차마 저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까닭의 하나 입니다. 또 전하의 나랏 일이 벌씨 잘못 되어서. 나라 근본이 이미 망해 가고, 천의가 이미 버려졌으며, 인심도 이미 떠나서. 비유하면 백년된 큰 나무가 속은 벌레가 다 파먹었고 진액(津液)도 다 말랐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또 언제 닥쳐 올지를 아득하게 알지 못함과 같이된지가 오랩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충성되고 일을 아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는. 부지런한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형세가 이미 극도 (極度)로 어려움을 알고서 손을 대지 안하려 합니다" 소관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우선 주색(酒色)만을 즐기고 대관은 위에서 어름 어름 하면서 오직 재물만을 모읍니다. 내신은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을 못에 끌어 들이듯 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서, 이리(狼)가 들판에 날뛰듯 하는데 또한 가죽이 다 헤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은 이 때문에 낮에는 깊이 생각하고 깊게 탄식하며. 하늘을 우러러 보고 밤에는 허회탄식하다가 눈물을 가리고 아픈 마음을 억제하며 천정만 쳐다보는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으시나 깊숙한 궁중에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못하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아드님이실 뿐이니. 천백 가지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가 된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써 수습(收拾)해 내겠습니까" 뱃물이 마르고 겨우 조 (粟)나 심을 정도의 비가 내리니 그 조짐이 어떠하며. 소리가 슬프고 소복(素服)을 입어서 비참한 형상(形象)이 벌써 나타났습니다" 이런 때를 당해서는 비록 주공(周公) . 소공(召公)의 재주를 겸한 자가 정승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 니다" 하물며 초개(草介)같은. 변변치 못한 신하이 겠습니까. 위로는 위태함을 만에 하나라도 능히 볼들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능히 털끝만큼도 보호하지 못할 터이니. 전하의 신하가 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두소(斗소)④같은 이름을 팔아서 전하의 관작(官爵)을 얻고, 그 녹(食)을 먹으면서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은 또한 신의 원하는 바가 아니니.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까닭의 둘째입니다.
또 신이 근래에 보니 변방(邊方)에 사건(事件)이 있어. 여러 대부(大夫)가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하나, 신은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일찌기 이르기를. 이 사건은 20년전에 터질 것인데 전하의 신무(神武)하심을 힘입어서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고 하루 저녁에 생긴.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평소 조정(朝廷)에서 재물로써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이 모이자 백성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필경에는 장수의 자격에 적당한 사람이 없고 성에 군졸이 없게 되어서 외적이 사람없는 지경에 들어오듯 했으니 이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또 대마도(對馬島) 왜놈이 본토의 왜놈을 안내하여 와서 남모르게 결탁하여 국가의 무궁(無窮)한 욕스러음을 꾸며 낸 것이며 왕령(王靈)이 떨치지 못해서 그 한 모통이가 무너지듯 한 것이었습니다" 이 어찌 구신(舊臣)을 대우하는 것은 혹 주나라 예법보다도 엄하면서 구적을 총애하는 은덕은 도리어 망해가던 송나라보다 더 합니까. 명나라 세종께서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시고 우리 성종대왕께서 북벌(北伐)하신 일로 볼지라도 어디에 오늘날 같이 국가의 규률이 무너진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피부에 생긴 병에 불과하고 심복에 통증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런데 국사를 정돈하는 것은 구구한 정법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있습니다. 방촌(方寸)⑤사이에 한마(汗馬)⑥하여. 만우(萬牛)라도 토리킬 수 있는 공을 세우는 그 기틀도 진실로 나에게 있을 뿐인데. 알지 못하거니와 전하께서 종사하시는 바는 무슨 일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황쏘기와 말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君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小人)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는 바에서 존망이 관계됩니다. 진실로 하룻날에 능히 깜짝 놀라 깨닫고 분연히 학문에 힘써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道理)를 얻으면 만 가지 착함이 여기에 아울러 있고 백가지 덕화(德化)도 이로 말미암아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들어서 시행하면 국민의 생활을 다 잘 살 수 있게 할 수 있고 백성이 불온한 마음이 없게 할 수 있으며 위태함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대저 불씨(佛氏)가 이르는. 진정(眞定)이란 것은. 이 마음을 수양(修養)해서 위로 통하기만 요구 할 뿐이고, 인사(人事)를 아래에 부터 배워서 실지(實地)를 밟아 가는 것이 없는 까닭으로 우리 유가(儒家)에서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들으니 전하께서는 불도 (佛道)를 좋아하신다 합니다. 그 불도 좋아하는 마음을. 학문하는 데로 옮기 신다면 어찌 어렸을 때 잃었던 아이가 제집으로 돌아와서 부모 . 친척. 형제 . 친구를 만나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정사(政事)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사람을 쓰는 것은 몸으로써 하고.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 로써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쓰는 데에 몸으로써 하실것 같으면 유악(유幄)⑦ 안에 있는 사람은 사직(社稷)을 보위(保衛)하는 자가 아님이 없을 것이니. 아무일도 모르는 소신(小臣) 같은 자가 어찌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허명만으로 쓰신다면 잠자리 밖에는 모두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일 것이니. 깐깐한 소신같은 자가 또 어찌 있겠습니까. 딴날 전하께서 덕화를 왕 천하지경에 이르신다면 신도 마부(시臺)의 말석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그 마음과 힘을 다해서 신자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임금을 섬길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반드시 몸을 수양합으로써 사람쓰는 근본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주장을 삼아서 극(지극히 마땅한 이치)을 세우시기를 원하옵니다. 극이 극이 아니면 나라가 나라로 되지 못하오니 밝게 살피심을 엎드려 바라옵니다. 신 식(臣植)은 황공하와 떨리움을 견디지 못하오며 죽음을 무릅쓰고 올리옵니다.
① 황종(黃琮) = 황색의 서옥(瑞玉) 옛날 제사(祭祀)에 쓰던 물건.
(周禮春官大宗伯. 以黃琮禮地)
② 측석(側席) = 자리 한쪽에 앉고 한쪽은 비워 두어서 현사(賢士)를 대우(待遇)하는 것
(後漢書章帝紀注, 側席謂不正坐, 所以待賢良也)
③ 병과반렬(丙科班列) = 과거(科擧)의 성적(成續)에 따라서 갑을병(甲乙丙)으로 분류
하는데 그 병과의 반렬이라는 뜻.
④ 두소(斗소) = 두(斗)는 한말. 소 는 한말 두되들이 대그릇.
즉 학식과 도량이 좁아서 취할 것이 없 는 사람이라는 뜻
(論語子路篇. 子曰 .噫 斗소之人. 何足算也) 소 : 대그릇 소
⑤ 방촌(方寸) = 마음을 일컫는 말. 마음이 가슴속 四방 한치 사이에 있다는 말.
(徐庶 辭先帝而指其心曰. 今己失母. 方寸亂矣)
⑥ 한마(汗馬)= 말이 땀을 흘리도록 달려서 노고(勞苦)하다"
즉 국사(國事)에 뼈가 빠지도록 노고하는 것을 이르는 말임.
(漢書公孫弘傳 今臣愚駑 無汗馬之勞)
⑦ 유악(유幄) = 국사(國事). 또는 군사(軍事)를 계획하 는 곳.
(漢書高帝紀. 運籌유아之中. 決勝於千里之外) 유: 휘장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