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에 숙소를 출발하기로 했건만 출발이 늦어진다. 새벽까지 술 품앗이를 한 탓이다. 이 얘기는 뒤로 돌린다. 산행기 머리에 저녁과 술자리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암튼 해가 중천에 떠오른 오전 9시를 훌쩍 넘겨 영암(목포) 현대호텔을 출발했다. 산바람 형이 숙취가 채 달아나지 않은 목소리로 먼저 출발할 것을 당부했고, 우리는 여유자적 지척의 자동차경주장을 괜히 슬쩍 들어가본 뒤 장흥으로 향했다.
10시 조금 넘어 천관산 주차장에 들어섰는데 곧바로 산바람 형의 승용차가 꼬리를 잡았다.
처음에 천관산 자락이 눈에 들어올 때만 해도 오늘은 오른쪽에서 올라 왼쪽으로 내려올까 생각도 했는데 아무래도 태양을 마주 보며 오르는 고단한 여정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늘 오르던 대로 왼쪽에서 올라 오른쪽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일행들이야 숙취 탓인지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다.
월출과 천관은 산의 모양새나 기품이 완연 다르다. 천관은 억새와 기기묘묘한 암봉으로 유명한데 월출에 견줘 약간 놀이공원 같은 냄새를 풍긴다. 산도 작고.
초반 10분만 땀을 한 소끔 쏟아내면 내내 시원한 바다를 조망하며 오를 수 있는 흔치 않은 산이다. 된비알 10분만 짓쳐 오르면 되는데 그게 힘든 사람도 있다. 간밤에 호텔 바에서 노래하는 필리핀 가수 앞에서 마구 달리던 산바람 형이 오르다 말다를 반복한다.
나중에 한참 이따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는 바로 아래 지점, 된비알이 끝나고 부드러운 능선 길이 시작하는 지점에 아득바득 다다른 꼬맹이가 산바람 형의 산행 포기를 전한다.
아쉬워하는 일행들의 표정을 형이 봤더라면.
컴불 형은 “꼬맹이도 올라왔는데, 고 조금만 올라오면 되는데” 라며 안타까워했다.
할 수 없지. 일행은 계곡 쪽과 능선 너머를 번갈아 등지고 선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 박는 데 열심이다. 이틀에 걸쳐 산행을 하고, 간밤의 숙취로 힘든 티가 역력하다. 하니 갈수록 힘이 빠지고 길끗한 조망을 즐기는 데 더욱 열심일 수밖에.
어쩔 수 없잖은가, 나도 어느새 일행과 진행 속도를 맞추고 있다.
중간에 우리가 그냥 책바위라 이름붙인 곳에서 후미와 만나 사진도 박고 이런저런 얘기로 한갓진 산행을 이어간다.
그리고 억새.
아직 이른 시기라 그런지 영 억새 품이 넉넉하지 않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 자락의 길은 왠지 넓어진 것 같다. 처음 천관에 올랐던 2005년에는 호젓한 폭의 능선 길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 탓이다 싶었다. 이놈의 인간들이 오죽 다녀 길이 이리 넓어졌을까.
아니나다를까 기진하며 정상에 이르니 긴 줄이 서 있다. 스무 명쯤 되는 이들이 정상 표지석에서 사진을 박겠다고 늘어선 줄이다. 우리도 두 차례로 나눠 사진을 박고 내가 컴불 형 졸라 아이스께끼(이렇게 표현하는 게 적확할 정도로 예전 해수욕장에서 먹던, 글자 그대로 꽝꽝 얼어 이를 갖다대기가 두려울 정도)를 한입씩 물었다.
행동식으로 요기를 하고 영화 ‘해적’에 스치듯 한 장면 등장했던 능선 암봉들을 바라보며 내리막을 내려선다. 다 좋은데 산의 규모에 견줘 사람이 너무 많이 찾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하산한다. 억새는 영 품위가 없다. 약 9년 전에는 토요일이라 호젓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일요일, 영남 각지의 거친 사투리와 능청스러운 전라도 사투리가 온산을 물들이고 있다.
억새 자락 속에서 사람들이 툭 튀어나오고 까뭇이 사라지고, 감동의 억새길은 짜증스러운 길로 바뀌어 있었다.
도립공원 사무소에서 휴식년제라도 도입해야 할 판이란 생각이 들었다가도 그마저 끊어버리면 행락객들의 씀씀이로 먹고 살아가는 지역 경제에 타격이 있을 것이고.
이제 다시 천관산에 억새 구경하러 찾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신불산처럼 큰 평원을 이고 있지 않는 한 이 작은 산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몰려든다면 도리 없는 일이란 생각이었다.
구정봉(한자는 다르지만 월출과 마찬가지로 천관에도 있다) 자락도 마찬가지. 우리만의 안온한 대화나 주변 조망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할 판이다.
결국 천관 억새는 평일 짬을 내야 할 일이다.
사실 사람들만 그리 많지 않다면 왼편의 호젓한 자락을 내려가 저 밑 방죽이 조망되는 곳까지 달려가고픈 마음도 들었지만 오늘은 아니다, 생각하고 하산을 서둘렀다.
일행은 무어 그리 급한지 흔적이 없다. 워낙 사람이 많아 교행하는데 지체된다. 어느 순간 교행을 위해 멈추다보면 선두와 후미의 간격이 벌어질 밖에.
그러거나 말거나 천관의 묘미는 이 하산길의 바위 조망하는 맛인데, 다른 일행은 그 맛을 제대로 즐기고 내려가는지 모를 일이다. 마치 외계인이 지구에 뭐 하나 남길 것은 없나, 싶어 남긴 조형 작품처럼 기묘한 암석들이 중천의 햇볕을 받아 반짝이거나 그림자를 뿜어내고 있다.
오르는 길과 마찬가지로 작은 바위 큰 바위 올라 사진찍을 곳이 너무 많은데 월출의 빼어난 맛으로 배부른 일행은 그저 놀이동산 같다는 생각으로, 내려가 장흥 삼합 즐길 기쁨에 취한 듯 내려가 버렸다.
여튼 그렇게 놀면서 내려간 하산길에 꼬맹이와 희망과용기 형이 펑퍼짐 자리를 잡고 쉬고 있다. 뒤에서 보니 형의 무릎이 정말 안 좋았다. 오를 적에 전혀 몰랐는데 움직임도 좋지 않고 과연 산을 오르내리는 게 건강에 괜찮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안타까움을 삼키며 내려와 선두를 보니 벌써 멍게 손에 이만큼 단감 자루가 들려 있다. 역시, 회장님의 지름신이 내려왔다고 했다. 트렁크에 싣고 출발,
시계를 보니 2시가 조금 넘었다.
예전에 취락식당 찾으려고 건넜던 다리 아래 천변에 차를 대고 났는데 희망과용기 형이 스틱을 주차장 어디메에 놔두고 왔다며 산바람 형에게 되돌아가 찾자고 했다. 산바람 형은 예의 월출 하산길의 그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걸 누가 여태 놔뒀겠느냐, 가봐야 헛일이란 쪽과 우리도 아까 산행 전에 누군가의 스틱을 발견하고도 그냥 놔두지 않았으냐, 싸구려도 아닌데 찾아는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희망과용기 형이 사뭇 진지하다. 평생 의 상할 일은 없다는 듯 산바람 형이 마음을 정해 다시 출발했다. 어느 집이나 똑같겠지 하고 바로 앞 식당으로 향했다.
취락식당처럼 남도 특유의 여인숙 냄새 풍기는 그런 식당이 아니다. 1층 고기 파는 곳에서 고기 사서 손에 들고 올라가면 상차림에 관자와 표고버섯 따로 파는 그런 시스템이다. 서울에 견줘 고기는 형편없이 싼데 관자와 표고 값이 장난이 아니다.
여튼 가격에 견줘 고기 품질은 좋아 맛있게 먹었다. 나와 멍게가 예산을 고려해 사온 양은 희망과용기 형과 산바람 형이 오면 둘이는 맛만 볼 수준이다. 회장님이 멍게를 불러 내려간 뒤 우리가 사왔던 양보다 훨씬 많은 고기를 끊어왔다.
재미있다. 왜 고기는 잘라온다고 하지 않고 끊어온다고 할까.
여튼 회장님은 죽은 귀신도 먹고 죽은 귀신이, 어쩌구 하는 속담을 큰 소리로 되뇌이며 또 질렀다. 산 밑에서 여주 산다며 오솔길에게 1만원을 빌리더니 또, 였다.
정말 이렇게 많은 고기를 언제 또 먹나, 아귀처럼 먹어댄 나와 희망과용기 형은 한술 더 떠 냉면까지 시켜 맛있게 입가심을 했다. 그러고보니 기자 직업을 가진 두 사람만 죽어라 먹어댄 꼴이고, 일행은 한심하다는 건지 부럽다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다.
그렇게 먹고 나니 5시가 넘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운다. 산바람 형과 헤어졌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 인원에서 물건이 빠지고 그린랜드 형과 희망과용기 형이 탔는데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나만 그랬나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의 1박2일 산행은 양재역 근처 꼬맹이가 주차한 수협 뒷마당에서 행복한 끝맺음을 했다. 모두들 뒤풀이 얘기를 하지 않는다.
다시 24시간 전.
도갑사를 출발한 지 40여분 만에 모정명가에 다다라 종두와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그냥 형님은 먼저 와 계셨고 구례에서 오신다는 그린랜드 형, 서울에서 고속버스 타고 내려온 희망과용기 형이 10여분 간격으로 찾아오셨다.
모정명가는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꽤 단정한 가게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사진에서 봤던 대로 장구며 북이 눈에 들어온다.
예수와 열두제자보다 한 명 많다. 상차림을 보자. 김국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역시, 난 이날 반찬 중에 김국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버님 칠순잔치 이후 실로 십몇년 만에 먹어본 것 같다.
조금 앉아 담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조그만 단지를 들고 다가오는데, 아 그것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냥 형이 무안에서 사왔다는 세발낙지가 4개의 단지에 수십마리 우글거린다. 이 식당의 맛있는 반찬을 완전히 무색하게 만든, 초특급 버라이어티 몬도가네가 펼쳐진다.
사직동 무안세발낙지집의 냉면사발에 담긴, 초라한 세발낙지는 저리 가라다. 젓가락에 둘둘 만다고 말았는데 나도 간만이어서 그랬는지, 이놈들의 기운이 팔팔해서 그런지 영 제대로 감기지 않고 입안에서 씹어넘기는데 영 씹히지가 않는다.
그러나 한입 소화하고 나서, 시간이 시나브로 흐르니 이놈들의 광란, 또는 곽란도 오래 가지 않아 영 힘을 못 쓴다 싶었다. 그 즈음 말아 입 안에 후루룩 집어 삼키니 영 이제 씹을 만하다. 이 맛에 세발낙지, 세발낙지 하는구만 싶다. 일행들 모두 득의만면이다.
산악회 10주년 얘기는 이 와중에 나왔다. 회장님은 건배사로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듯했지만 난 그 순간부터 얼음땡이 됐다. 10주년, 뭔가 기억할 만한 산행에 뭔가 이벤트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모아둔 회비는 이번에 렌터카다 뭐다 해서 다 털어먹을 판인데 어떻게 하나 싶었던 거다.
사실 호텔로 가서 뒤풀이할 때도 천관산 산행 때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산행기를 엮어 책을 내볼까 싶었던 거다. 해서 천관산 오르며 회장님, 오솔길과 이를 구체화하는 방안을 얘기했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오니 다 잊었다.
회사는 회사대로 내 개인적인 시간을 다 빼앗아가고 집에서는 또 집대로 일이 생겼고.
하여튼 고민은 계속된다. 쭈욱.
그렇게 화려한 상차림에 화려한 입담이 난무하고 예의 사진에 박힌 대로 흥에 취하고 멋에 취했다.
2시간여 만찬을 끝내고 삼호방조제 옆 현대삼호중공업 조선소를 바로 옆에 폼나게 거느린 목포 현대호텔로 향했다. 대형 크레인이 바로 지척에 들어오는 호텔의 입지 자체가 발상의 전환이다. 몽준이 형이 이런 구석이 있구나 싶었다.
종두는 이 호텔 운영을 맡았었다고 했다. 해서 직원들을 마치 부하 다루듯 한다. 한 방에 둘씩 짝을 이뤄 방에 짐을 부리자마자 지하 바로 향했다.
난 씻느라고 조금 늦었는데 앉자마자 산바람 형이 산다며 보드카를 부은(이 표현이 적확하다) 폭탄을 돌린다. 호기롭게 넘겼는데, 윽, 올라온다. 산바람 형은 중국 다녀오느라 선후배들과 못 나눈 얘기의 한을 풀겠다는 기세다. 실내는 필리핀 연주자와 가수가 연주하는 노래들을 좇아 1980년대와 90년대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 듯하고 이제 서서히 초로의 길에 들어서는 선배들이 그 흥에 먼저 취하는 듯했다.
또 졸았나 보다. 깨어보니 바깥이다. 가을이 짙어가는 목포 바닷가. 어느 순간 시선을 돌리니 큰 유람선이 눈에 띤다. 야 이렇게 훌륭한 호텔이 있구나 싶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제정신 들어 보니 건조 중인 대형 선박이었다. 하지만 그 밤에 적어도 난, 크로아티아 갔을 때 아드리아해를 건너던 여객선마냥 느껴졌다.
웬 집어등 단 배들이 이리 많냐? 우린 취중에 이게 투숙객들 눈길 끌려고 띄어놓은 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침에 보니 분주히 조업 중인 어선이었다.
그래 우리는 목포는 항구다 제목을 왜 그렇게 붙였나? 뭐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얘기들을 왁자지껄 주고받고 놀았다. 종두는 잠깐씩 두 번 사라졌다. 그저 바닷바람 쐬보자고 나온 건데 갑자기 파라솔이 눈에 띄니, 여기서 3차하자 했고 조금 뒤 그의 손에는 맥주캔이 잔뜩 들려 있었다.
또 아마도 희망과용기 형의 주창으로 시작됐을 노래가 떼창으로 흐르자 흥이 올랐는지 종두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 다시 돌아오는데 하모니카가 들려 있었다. 목포는 항구다를 하모니카로 들으니 왠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다.
그래, 우리 가운데어머니(서울 말로는 중모)이 그리도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뒷개(유달산 뒤쪽의 갯벌) 쪽을 바라보며 난 그런 감정에 빠져들었다. 지지리도 노래 못 부르는 내 차례가 돌아왔고 난 기억도 안 나는 노래 첫 머리를 마지못해 시작했다가 멈춰 지청구를 잔뜩 먹었다.
산바람 형이 오랜만에 들려준 산유화와 종두의 하모니카 연주에서 멈췄더라면 좋았을 일이었다. 회장님이 네이멍구 갔을 때 취기에 몸을 가누지 못해 고음을 처리하다 뒤로 벌러덩 넘어졌던 야생마가 목포 앞바다를 마구 뛰어다녔다.
이제 정말 늦었다.
내일 산행 하려면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정리한답시고 조금 지체하고 조금 늦게 방으로 올라갔더니 사니 형, 그린랜드 형의 목소리가 복도로 새나왔다. 들어가 여러 방 룸바의 맥주캔(종두가 계산할테니 마음껏 먹으라고 미리 언질했다는 정보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을 비우며 밤바다를 조망했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그걸 아침에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천관 오르는 와중에 한 분에게 어제 밤 다른 분에게 굉장히 공격적인 언사를 행했다는 얘기를 하자 화들짝 놀라는 것이었다)
뜻모를 얘기만 남긴 채 우리는 잠을 청했고 괄호 속의 두 분은 침대에 들어서까지 뭔가 큰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여튼 우리는 다음날 꾸역꾸역 일어나 기신기신 천관산을 올랐다.
첫댓글 이제야 마무리됐구만. 잘 읽었네, 나를 걱정해주어 고맙네. 유념하겠네. 근데 지금 아픈 곳은 무릎이 아니라 발목일세. 무릎도 예전에 안 좋았지만....
절묘한 산에, 절묘한 산행...그리고 절묘한 표현의 산행기였습니다. '아득바득'에서 빵 터졌습니다. 혼자 산행기 읽다 미친 *처럼 키득거렸다는^^.... 저는 오늘도 '아득바득' 일상을 살아내고 있답니다. 산에 오르듯!!
아참...그리고 알대장님 고생 많으셨서요, 산행기 쓰느라^^.
세월이 빠르긴 빠르구나.일출,천관산 다녀온지도 보름가량 지났구나.
알의 재미난 산행기를 읽으며 다시한번 곱씹어보는 맛이 좋다.^^
일출,천관산 산행도 좋았지만 오랜만에 산바람과의 만남이 있어 더욱 반갑고 즐거웠던 1박2일이었어.수고 많았다~~
정말, 9년 전인가는 좁다란 길에서 억새와 스킨십을 나누며 걸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 길이 대로로 변하다니요....ㅠ
긴~ 산행기, 흥미진진하게 있었네요. ^^
알아, 수고했다. 산행기를 몇날 며칠에 걸쳐서 쓰니라고. 잘 읽었고, 근데 나에게까지 고민을 넘겨주진 말아다오. 나는 생각이 잘 안나는데, 멍게야, 우리가 2005년 1월에는 어딜 갔니? 분명 2월에 태백산부터 카페를 시작했으니 1월은 주위이 도움이 필요한 듯. 그리고 알아, 은별엄마 진짜 소녀같이 이쁘더라. 무엇보다 내 절반 정도의 폭을 가진 날씬함이 부럽더라, 키도 크고. 반가웠어.
역쉬! 대장!! 산행기에 산악회의 역사와 더불어 산의 조망, 지리, 풍광, 감성까지 모두 녹아있네요.^^
제가 처음 산악회에 인사드린 곳이 천관산입니다. 초등 6학년이던 해나를 날씬하게 좀 해보자 해서 불쑥 나타났었지요. 청바지 입고 수학여행 이후 거의 처음으로 오르던 그 산을 인연으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때 너무나 맛있게 먹었던 쇠고기와 패주 맛을 못 잊어 다시 찾았을 때 그집이 마침 휴일이라 억장이 무너지기도 했었는데. 산악회 소속이면서도 그때보다 엄청 뚱그래진 몸이 제가 산악회에 성실하지 못했던 역사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당시 함께 산에 올랐던 독짱 선배님, 파리투 형 보고싶습니다!
월출산, 천관산, 참 좋은 산들입니다. 산행에 함께 한 분들 반가왔습니다. 현지에서 먹는 자리, 마시는 자리, 그리고 잠자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 분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