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의 저항과 굴절
1930년대 중반 이후로 접어들면서,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그 때까지 경험한 여러 형태의 수난이나 박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탄압에 직면하였다. 즉, 단순한 종교 신앙의 외연적 표현행위에 대한 규제나 선교의 편의성이 침해되는 외형적 압박만이 아니라 그 신앙 신념 자체에 대한 변형을 초래하는 더욱 근원적인 제어를 받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으로는 이른바 ‘신사참배’의 강요에 직면했고, ‘기독교의 일본화’ ‘천황숭배’ ‘반평화적 군국주의 지향의 프로세스’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여기에 한국교회는 일단 강력히 저항하였다. 당시까지 형성된 한국기독교의 보수적이고, 강력한 정통주의 신앙은 이와 같은 신념과 신앙정조에 대한 탄압에 대해 순교적으로 대응하는 에너지를 강하게 지녔던 것을 살필 수 있다. 이는 다시 부언하겠지만, 비정치적이고, 비민족적이며, 역사 참여적이기보다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을 중시했던 기독교 신앙의 경향성이 정치적 탄압보다 오히려 종교 신념 자체에 대한 탄압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는 현상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이 시기 한국교회 저항의 주체는 더욱 보수적이고, 탈역사적인 유형의 신앙이 중심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일제 말기 저항은 일제의 강력하고 극단적인 탄압정책 앞에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다수 기독교가 질곡의 굴절로 이행하였고, 다만 소수의 신앙이 굳은 인물들이 끝까지 남아 저항하며, 순수성과 정통성을 계승하였다. 일제 말기 한국교회와 대결한 일제의 실체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국가권력의 힘이 아니라 종교적 카리스마였으며, 국가종교의 요건을 갖추었던 천황제 이데올로기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황제, 정치적 이데올로기인가, 신앙적 종교인가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인가, 아니면 종교적 카리스마를 수반한 신앙적 산물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해석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치적 목표 하에 체계화된 제도와 그 이데올로기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앙적 특성을 지니기도 했고, 현재의 ‘상징천황제’ 하에서도 일정부분 그 잔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천황제 자체가 종교제도도 아니요,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종교로서 요건을 다 갖춘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시대, 특히 일제 말 군국주의 파시즘과 결합하면서 일본의 아시아 및 세계 침략전쟁과 식민지 경영, 일본 자국민의 국민통합을 위한 주된 이념으로 활용될 때에는 강요된 ‘종교체계’로서의 농후한 속성을 지녔다. 이는 이미 일본 안팎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확인된다.
일본의 천황은 오랜 역사를 두고 존재했으나, 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닌 것은 이른바 ‘메이지유신’ 이후에 형성된 근대천황제이다. 유신의 주도자들은 두 가지 면에서 ‘천황제’를 강화할 필요를 느꼈다. 첫째, 지방분권, 즉 ‘막부제도’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일본정치사의 특성상 이를 강화하여 강력한 중앙집권력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는 일본정부의 강력한 힘을 결집하여 근대화와 서구식 제국주의를 수립할 수 있는 바탕 요건이었다. 둘째,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여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서구사상의 근본이 되는 기독교의 수용은 견제하고자 하는 입장이 강하였다. 이를 ‘화혼양재(和魂洋才)’라고 하는데, 곧 외형적 문명은 서구 것을 받아들이지만, 내재의 혼만은 일본의 것을 취한다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결의 하에 사실상 서구의 정신적 근본인 기독교를 방어할 만한 일본식의 정신적 체계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상의 두 가지 직접적인 필요에 의해 일본은 천황제를 강화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창출했으며, 그 연관된 종교체제로서 국가신도‘를 선양하였다.
한편 일본의 전통적 종교체제로서의 ‘신도(神道)’는 다신교, 현세축복 중심의 종교행태를 견지하며 일본의 민간에 오랫동안 만연되었다. 불교나 유교와 같은 고등 유입 종교가 일본 종교체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 문화적 바탕을 창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민중에게 가장 유효한 종교 신념의 체계로는 신도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하였다. 이것이 정치적 목적으로 작위(作爲) 천황제와 결합한 것이 ‘국가신도’이다.
일본 정부는 ‘국가신도’를 종교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신도를 ‘교파신도’와 ‘국가신도’로 구분, ‘교파신도’는 종교의 하나로, ‘국가신도’는 국가가 관리하는 국민의례의 근본으로 선언하였다. 물론 ‘현인신(現人神)’으로까지 신격화시킨 천황의 신성성과 ‘신도’가 결합되고, 그러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신도’가 강력한 ‘종교’을 지녔다는 것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일본은 이러한 ‘국가신도’를 일본의 전국민, 그리고 식민지 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며 의무적 참배를 실시하였다. 여기에는 일제의 정치적 목표가 수반된 것이었지만, 국가신도와 천황제가 가진 지나친 종교성 때문에 가장 혹독한 종교탄압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아무리 일본 정부가 ‘국가신도’는 국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지만, 초기에는 일본의 기독교인들마저 이 신념체계가 지닌 종교성 때문에 유일신 신앙의 기독교 신앙을 침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에 빠졌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첫째, ‘국가신도’에 대한 참배에도 축복을 빌고, 개인과 국가,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적 발원행위가 포함되어 있고, 사실상의 공무원 신분인 ‘국가신사’의 제관들도 국가와 개인, 공동체를 위한 종교적 제례의식을 집행한다는 점이다. 둘째, 이 '국가신도'의 정점이 되는 '천황'의 권위가 앞서 말한 바대로 ‘현인신’의 위치에서 신성을 부여받고, 다른 어떤 종교의 ‘신’보다도 상위 위치에서 절대적 추앙을 받아야 하는 구조는 이것의 종교성을 여실히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는 일제 말 한국기독교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혹은 국가신도가 대결한 가장 핵심적인 이유이다. 이에 따라 대개는 일제 말의 한국기독교의 수난과정을 정치적 권력에 의한 종교 신앙의 탄압이라고 할 수 있는 ‘정교갈등(政敎葛藤)’으로 규정해 왔으나, 필자는 ‘교교갈등(敎敎葛藤)’으로 정리하였다. 이는 그것을 하나의 종교로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기독교 신앙’의 갈등 과정으로 파악한 것이다.
신사참배와 천황숭배의 강요
일제의 한국강점이 시작된 이래 사실상 신사의 건립과 이른바 국가신도의 국민의례, 일본종교의 유입 그리고 천황의 신성숭배 등은 일찍부터 시작되고 꾸준히 강제되어 왔다. 전국에 신사가 건립되고 1920년대에는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건립되는 등 신사참배 강요의 역사는 식민통치와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강제적이며, 의무적인 신사참배가 시작된 것은 1930년대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더 구나 기독교 학교를 필두로 기독교계에 이를 전면 강요하여 신앙적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0년대 중반 이후로 평양에서 기독교계 학교의 교원들과 학생들에게 강제로 신사참배를 요구하여 이른바 ‘삼숭’, 곧 숭실·숭의· 숭인학교와 같은 미션스쿨을 경영하는 장로교 선교사들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부터이다. 우선 이 문제가 본격화되었을 때 미국 선교사들과 한국기독교계 지도자들은 '국가신도'가 단순한 국민의례라는 일본 정부와 총독부 당국의 설명을 인정치 않았다.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에 맡기지 않는 신사참배의 전면적 강요는 신앙의 자유에 저촉이 되며, 기독교의 우상숭배 금지라는 유일신 사상과 갈등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이에 일제는 이를 전국적으로 전면 강요하였고, 기독교 학교의 경우는 만일 신사참배를 거부할 경우 학교설립 승인 자체를 취소하여 폐교조처하겠다는 강경한 방침으로 나갔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이행하면서 신성적인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국가체제를 종교집단에 준하는 절대적 가치로 무장시키는 상황이었다. 이를 더욱 강화해 나간 후반기에 이르면, 천황숭배와 신사참배의 강요가 상상의 수준을 초월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예를 들면, 천황은 이미 신의 경지를 넘어 그 어떤 신성의 권위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강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을 구속하고 심문한 경찰·검찰의 조서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유치하고 단순한 비교우위를 묻는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문: 천황폐하와 여호와 하나님 중에 누가 더 높고 위대한가?
답: 차원이 다른 관계로 서로 비교할 수가 없다.
문: 너희들이 말하는 세상의 끝날 심판에 과연 천황폐하도, 대일본제국도 심판을 받는가?
답: 하늘 아래 모든 창조물 중 심판을 면할 존재는 없다.
문: 천황폐하도 과연 피조이며, 원죄를 지었는가?
답: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이외에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없다.“
이상은 종교적 의미의 갈등이나 탄압이 아니면 도저히 질문하지 못할 내용이며, 그 원색적인 내용 자체만으로도 탄압 주체의 성격을 극명히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검속, 위협 하에서 초기 한국 크리스천들은 대개 여기에 의연히 대처하였다.
다만, 각 교파나 종파별로 대응 태도가 다소 달랐는데, 예를 들면, 가톨릭교회의 경우는 처음부터 일본정부가 주장한 국가신도의 국민의례 주장이나 천황의 정치적 권위 등을 인정하여 신사참배 등을 선선히 받아들였고, 개신교단 중에서도 감리교회 등의 경우는 일부 개인적 저항이 있기는 하였으나, 특히 미션스쿨 등의 경우,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더라도 기독교학교나 교회의 존립 자체가 더욱 중요하다는 포용적 입장을 일찍부터 취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취하던 선교사들이 다수 추방당한 후, 대표적으로 일제의 강요에 대해 저항 입장을 취하던 장로교회 등 대부분의 교회들이 강압에 굴복하였고, 성결교회·안식교회 등 임박한 종말론이나 재림사상 등을 신봉하던 소 교파·소 종파들 중에는 강제해산당한 경우도 발생했다.
한국기독교회 주류의 굴절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강력한 군국주의 파시즘과 결합되어 광적인 일원적 정치체제와 이념을 형성하였던 일제 말기 이미 일본에서나 한국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은 유지되기 어려웠다.
일본에서도 유일신성의 기독교의 신앙체계가 유보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였고, 일본 기독교인 스스로도 그와 같은 변형된 기독교를 ‘일본적 기독교’라는 명제로 합리화해 나가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정부의 방침, 즉 종교단체법에 순응, ‘일본기독교단’이라고 하는 하나의 교파로 통합되면서, ‘일본국민’으로서의 특수한 정체감으로 인해 ‘기독교인’으로서 보편적 지평을 부정하는 사례가 자주 나타났다.
한국기독교의 경우는 그 상황이 더욱 심각하였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 한국 통치자들은 민족교회로서, 또 서구 제국과의 한 채널로서의 특징을 지닌 한국교회를 섬멸하고자 하는 정책을 수행했다. 단순히 기독교의 신념체계를 천황제 이데올로기 하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사상 재편의 목적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탄압을 통한 한국 민족성의 삭제라고 하는 식민정책의 목표가 첨가된 것이었다. 이 무렵의 한국기독교는, 그 '기독교 자체로서의 정체성'과 역사적 과정을 지닌 '민족교회로서의 정체성' 모두를 위협받고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 교단인 장로교회는 1943년에 발표한 ‘신앙실천 요항’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선언함으로써 이미 굴절의 극단적 한계를 내보이고 있다.
“각 신도의 가정마다 신단을 설치하고 황도정신을 철저히 봉행할 것 국체의에 기초하여 충군애국의 정신과 경신숭조의 정신을 함양할 것 아국의 순풍미속을 존중하고 강직한 기풍을 길러 견인지구의 공고한 의지를 연성할 것 신도의 황민연성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황국 고전 및 국체의 본의에 관한 지도교본을 편찬 할 것/ 각 지역에 연성회를 개최하고 목사 및 신도의 연성에 노력하며 특히 황국 문화의 연구 지도를 도모할 것.”
위 실천요항 어디에서도 기독교회의 정체성이나 신앙공동체의 목표를 수행하고자 하는 특색 있는 의지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당시 일제가 몰고 가고자 했던 '황도 국가'의 지표, 전체주의와 전쟁을 독려하는 파시즘에 동원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뿐이다. 당시의 기독교회 조직은 조직 자체가 존립하는 조건으로 오히려 조직통로를 이용한 식민지 동원, 천황제 국가 강화의 선봉에 서야만 하는 왜곡상황을 경험해야 했다. 교회가 자신들의 신앙수련이나 신앙공동체의 성숙을 위한 프로그램을 입안하고, 신도의 윤리와 경건을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회도 국가에 예속된 하나의 실체조직으로서 국가모든 구성원이 한 정점으로 집중하고 있는 제국주의적인, 천황존의 ‘신성종교국가’의 목표에 함께 몰입해야 하도록 강제되고 있던 터였다. 이는 비단 특정한 교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을 망라하고, 장감(장로회와 감리교)과 그 밖의 다른 교파를 불문,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존립조건이었다. 이러한 문제가 일본 내에서도 일정한 저항과 갈등을 겪기도 하였고, 더구나 한국교회 안에서는 지속적인 대결, 갈등, 탄압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더욱 강고한 일제의 강압이 계속되자 주류교회는 하나 둘 그 존립자체를 위해 순응하고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판단으로는 일제의 멸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고, 따라서 한국의 독립 또한 요원한 염원만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여기에 따라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이러한 현실인식에 따른 기독교 정체성의 변형을 이른바 ‘일본적 기독교’의 창출과 ‘일본적 신학’의 명분으로 합리화시키는 과정에 돌입했다. 따라서 일본 내의 기독교는 물론 한국기독교도 점차 '일본화'의 명분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걸었다. 장로교회의 신앙생활 실천지침이나 감리교단의 신도생활 지침에 천황존숭과 국가보국의 실천요함이 강조되어 외연과 행위를 통한 일제동원의 현상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표피적인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독교 신앙 내면, 본질 문제에 대한 위해가 진행되는 더욱 심각한 정체성 혼란의 위기를 겪게 된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유대사상의 배제’ ‘구약성서와 신약 묵시록의 배제’ ‘사복음서만을 중심으로 한 교리 선포의 강조' ‘웅장한 음곡(音曲)과 십자군병 등의 가사를 담은 찬송가의 금지’ 등등이 강제되었다. 요컨대 기독교의 핵심적 사상이나 신앙의 본체, 사상체계 등을 ‘일본주의’나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종속시켜 나가고 혹 이에 적극 상충되거나 대립되는 요소는 배제시키거나, 비역사적이고 초월적인 산물로 치부해 버리는 방향을 잡았다. 선교사들이 정치적 이유로, 혹은 종교적 이유로 전면 추방되고 기독교 내부에서 신학적으로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던 투쟁가들이 격리된 이후 해방 직전의 한국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는 완전히 일본의 변형 프로그램에 의해 재편된 굴절의 극을 이루었다.
일제 말기의 상황을 단순히 기독교에 상충되는 강력한 독재 정치체제에 의한 탄압으로 보느냐, 아니면 종교적 성격을 지닌 신앙체계에 준하는 국가권력과 기독교 신앙체계 간의 갈등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폐해의 정도는 다르게 가늠될 수 있다. 만약 지금까지 수차 기술되어 왔던 것처럼 '정교갈등'의 과정으로 본다면, 오히려 혹독한 탄압의 과정에서도 기독교 신앙체계의 정체성 자체가 변질되거나 포기된 것으로 보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일제 말기 강력한 군국주의 파시즘과 결합된 천황제 국가체제를 종교국가 내지는 종교체계로 상정한다면, 이 시기의 갈등은 유일신성의 신앙체계를 신봉하는 종교 간의 충돌, 곧 ‘교교갈등’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 이런 와중에서 기독교가 일제에 순응하고 굴절되었다는 사실은, 한 종교 신념체계의 철저한 와해, 신앙본질의 변형으로까지 진단해 내어야 할 상황에 당도한다. 일제 말기 주류, 다수 교회가 처한 모습은 바로 그와 같은 정도에까지 이른 것이다.
한국기독교 소수의 저항
일제 말 한국기독교의 저항 주체는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구분되어진다. 즉, 장감 주류교파에 소속된 교역자나 평신도 중에서 특별히 신학적으로 보수근본의 신앙기조를 유지하던 계열과, 애초부터 주류교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소 종파로 불릴 만한 독특한 신앙기조를 유지하거나, 강력하고 임박한 종말·재림사상을 견지하던 교파, 혹은 무교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 기존 교파의 제도를 부정하던 그룹으로 구획할 수 있다.
다만 어느 교파나 서클에 속하든지 간에 이들의 공통점은 신학적으로는 보수, 역사이해에 있어서는 재림사상과 임박한 종말론을 견지하여 현실의 역사운행을 일시적이고 지엽적인 일로 치부하는 ‘탈역사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더욱 포괄적으로 말하면, 신앙적 논리에 더욱 철저하고 진지한 부류인 것이다. 이들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공의의 문제나 정치적 정의의 문제보다는, 우상숭배의 철저 배제 등과 같은 신앙적 덕목이 더욱 중요한 관심이 되는 보수적인 신앙인들인 것이다. 바로 이들이 일제 말기 한국기독교의 저항주체였다. 이들의 저항은 민족적 정체성을 표현한 일이거나 민족적 저항의 표현이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야말로 신앙적 동기, 신앙적 순수성을 지키는 순교자적 자세에 의함이었다. 이들은 철저히 기독교 십계명의 제1계명, 곧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신앙 제1덕목에 충실히 따랐던 것이다. 일제는 이들의 저항에 대해 일단 강제와 압력, 혹은 고문과 구금과 같은 직접적 방법도 사용하는 한편, 신사참배나 천황숭배의 내용이 종교적 신앙적 측면이 아닌, 국가·국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로 설득하려고 애썼다. 이른바 ‘신사 비종교론’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일본 관헌들뿐만 아니라 일찍이 이를 받아들이고 순응하여 ‘국체’에 부응하였던 일본기독교인들도 동원되었다. 한 예로 1938년, 일본기독교회의 대표 도미다(富田) 목사 일행이 한국교회를 방문, 신사의 비종교성을 강조하고 설득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도미다 목사가 한국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자, 결국 옥중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평양 산정현교회를 방문, 이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일본의 기독교 신문인 복음신보1938년 7월 21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주 목사가 목회하는 산정현교회당에서 4개 노회 논객들이 운집하여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는 전날 경찰의 유치장에서 석방된 터였다. 주제는 신사참배문제였다. 도미다 씨가 신사를 정부가 국민의례로서 종교가 아니라고 규정한 이상,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법령을 이용해 가면서 반복해서 설명하자 여러 질문이 쏟아졌다.”
신사참배와 천황숭배의 강요와 같은 일제 말기의 상황에서 이것이 종교와 무관하다는 설득을 펴고 있는 자체가 한국교회 저항 에너지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측면이다. 결과적으로 일제 말의 상황은 종교적 신념체계간의 갈등이 분명하며, 그것으로 일본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실체, 일제 말기 국가의 정교관계의 특징 등이 명확하게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오히려 역사 참여형의 신앙기조나, 역사의식이 뚜렷한 진보적 기독교 그룹보다는 신앙신념의 극 보수적인 정통주의, 문자적 성서해석이나 근본주의적인 신앙기조를 지닌, 보다 종교적인 그룹의 인사들에 의한 순교적 저항이 뚜렷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하나의 '현상'을 간과할 수 없다. 일제 말기 한국에서 보수적이며 신앙중심적인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저항주체로서 앞장 선 것은 이미 살핀 바대로이다. 일제는 이들의 저항을 궤멸하고 한국기독교의 전면적인 협력과 전쟁동원을 기도했으나, 전체적으로는 실패하였다. 당시 일본 정부의 우상성이나, '종교국가'로서의 특징인 신앙적 순수성을 지키기 염원하는 주류 교파의 극 보수 그룹, 소 종파 신앙인들을 설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다수가 신앙적 이유로 일제의 강요에 불응하고 저항했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은 일제의 국가적 동원과 독려에 모든 구성원들이 동참하고 가담하는 상황에서 지극히 반역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 한국기독교 저항자들의 동기는 순수한 신앙적 발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서는 한국민족주의, 반일의 현상으로 다스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동기보다는 현상과 구도가 중요시된 측면이었다. 이는 분명히 아이러니였으나 역사적으로는 철저히 그렇게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사실이었다. 결국 주기철과 그와 동류하는 보수주의 신앙인들은 일제 말기 상황에서 한국기독교회의 민족적 저항을 끝까지 관철시킨 대표적 저항자들로 간주된 것이다.
신앙과 민족을 결합시킨 항일의 한 모형, 김교신 일제 말 한국기독교의 주류도 아니고, 영향력도 지니지 못했던 한 평신도 지도자가 있다. 바로 김교신이다. 그는 일본의 이른바 무교회주의 신앙가인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제자인데, 일생 평교사로 일하며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신앙운동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한국인의 성서적, 신앙적 사명을 강조하였고, 아무리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신앙적 희망을 꺾지 않은 신앙저항자였다. 그는 역사를 소극적으로 보거나 초월하여 보는 몰역사적 안목을 지닌 것도 아니었고, 무조건 현실 속에 뛰어들어 힘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과격한 참여론도 지니지는 않았다. 다만 성서에 증언된 진리를 믿고 이를 민족의 원대한 희망에 연결시켜, 평생 지켜온 명제대로 '성서'와 '조선'을 하나로 묶는 '성서민족주의' 사상을 지녔다. 일제 말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칼럼 조와(弔蛙)를 자신이 발행한 잡지 『성서조선』(1942. 3.)에 기고하였다.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 시체 두어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듯. 동사한 개구리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 짧은 글은 잡지 『성서조선』이 폐간되고, 김교신과 그의 동지들이 큰 수난을 입었던 필화탄압사건의 단초이며, 한국기독교 수난사의 한 증표이다. 혹한의 겨울 끝에는 봄비 쏟아지는 새봄이 오리라는 희망, 담저의 바닥까지 어는 비상한 혹한에 많은 개구리들이 동사하여 죽어 가는 시대적 비유, 그러나 ‘그 날’이 오면 살아남은 개구리 두어 마리는 기어다니리라는 전멸은 면할 것이라는 확고하고도 철저한 희망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 메시지에 주목한 일제는 이들 김교신과 그의 동지들을 가장 두려운 한국민족주의자요, 예언자들로 간주하였고, 독립군대와 비밀결사보다도 더욱 두렵게 여겨 엄중히 다루었다. 이들을 취조한 당시 일제 관헌은 다음과 같은 말로 김교신 등을 표현하였다.
“너희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아 온 놈들 중에 제일 악질들이다. 다른 놈들은 결사니 독립운동이니 파뜩파뜩 뛰다가도 잡아다가 족치면 전향하기 때문에 다루기가 쉬웠는데,너희 놈들은 종교니 신앙이니 이상이니 하면서 500년 후를 내다보고 앉아 있으니 다루기가 정말 힘들다.”
출처/ 한국교회의 역사, 서정민, 살림출판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