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보면 품바란,타령의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우는 소리라 하여 '입장고'라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이조 말기까지는 이런 의미로 통했을 것이다.
그후 일제, 해방, 자유당, 공화당 시절에 이르기까지는 '입방귀'라는 말이 널리 일반화되었는데
그것은 '입으로 뀌는 방귀'라는 뜻이다
고금을 막론코, 피지배계급(가난한 자, 역모에 몰린 자, 관을피하여 다니는 자,>
지배계급에 불만을 품고 다니는 자, 소외된 자 등)에 있는 자들이걸인 행세를 많이 하였는데
그들은 부정으로 치부한 자, 아부 아첨하여 관직에 오른 자,
기회주의자, 매국노 등의 문전에서 "방귀나 처먹어라 이 더러운 놈들아!"라는
의미로 입방귀를 뀌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恨)과 울분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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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품바란 가진 게 없는 허(虛), 텅 빈 상태인 공(空),
그것도 득도의 상태에서의 겸허함을 의미한다고 전하며 >구걸할 때 '품바'라는소리를 내어
"예, 왔습니다. 한푼 보태주시오. 타령 들어갑니다." 등의 쑥스러운 말 대신 썼다고들 한다
또, 품바란 한자의 '품(稟)'자에서 연유되어 '주다', '받다'의 의미도 있다
또 달리 '품'이란 품(일하는 데 드는 수고나 힘), 품앗이, 품삯 등에서 연유했다고도 한다
허나, 전해 내려오면서 명칭의 변화는 있었지만 거기에 함축된 의미가
"사랑을 베푼 자만이 희망을 가진다"라는 말로 변해왔으며,
이 노래(타령)만은 처음 시작할 때와 끝났을 때 반드시>'품바'라는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렸던 것이다른 노래에서 볼 수 없는특이한 점이다
이밖에도 다른 여러가지 설이 전해진다 한다
각설이 타령이 언제부터 전래되었는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하자 당시 지배계층은 떠돌이 나그네가 되어 거지로
변장하거나 혹은 정신병자나 병신으로 위장하여걸인 행각을, 문인 계통은 광대로 무인 계통은
백정, 줄타기 등등의 재인(材人)으로전락하여 각설이 타령을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음지에 사는 인간들이 속악한 세상에 대하여 던지는 야유, 풍자, 해학, 무심,
허무, 영탄들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비애감을 맛보게 하는
독특한 민족문학적 채취를 풍긴다.
구전되어 오던 타령이 문자로 정착한 것은 이조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조선 말기의 판소리 작가 신재효(1812~1884)의 변강쇠가에서품바의 뜻이 '입장고'라기록되었고
송순(1493~1583)이 지었다는 타령과, 작자는 알 수 없으나 이조시대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이
낙향하면서 걸인 행각 중 불렀다는 천자풀이 등이 전한다
그러나 각설이 타령이 가장 활발히 불리어지고 알려진 시대는 해방 직후로부터 6.25와
자유당시절로서 전국적으로 퍼져 불리워졌으나 공화당 때인 1968년, 법으로 걸인 행각을 금지시키면서부터 전국에서는 각설이타령이 한동안 사라지는 듯했다.
물론 요즈음도 각설이타령을 들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터에서 한끼니의 식량을 구하기위하여 구성지게 노래하든 그 장타령이아니다
가사도 가락도 다같은 장타령이지만 왠지 그때의 그 감칠맛이 아닌 것은 왠일일까
아마도 그것은 정녕 삶의 몸부림이 아닌 각색된 각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문화하라는 이름으로 각색되고 꾸며지고 무대화가 되어서 일것이다
첫댓글 허 아즘마 재치있는 대답이네요
그렇지요. 기사양반 남의 이야기에 함부로 끼어들면 안되지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