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은 소월 남은 영랑'이라 하여
'진달래꽃'을 쓴 김소월(1902.8.6~1934.12.24) 시인과 더불어
우리 시문학사에 쌍벽을 이루는 시인 김영랑(金永郞, 1903.1.16~1950.9.29)의 詩가 탄생된
전남 강진읍 영랑 생가를 찾아갔다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시는
1930년, 김영랑이 박용철 등과 함께 창간한 《시문학》 2호에 발표되었으며,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로 개제하여 지금에 이른다
사개 틀린 고풍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다린다
아무런 생각없이
아무런 뜻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 치씩 옮아오고
이 마루 위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냘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 오리라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16일 전남 강진에서 아버지 김종호와 어머니 김경무 사이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지주 집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자란 선생의 이름은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뒤에 윤식으로 바꿨다.
아호 영랑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영랑은 1915년 강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3세에 결혼했으나 1년 반 만에 사별한 뒤 23세에 재혼을 했다.
1917년에는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정지용 이태준 등의 영향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강진에서 만세운동을 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192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독립투사 박렬, 박용철 등과 가까이 지낸다.
1923년에는 관동대지진으로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해 1930년 정지용, 정인보와 함께 <시문학> 동인에 참가,
동인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한다.
그 뒤부터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잇따라 발표했으며,
1935년에는 첫 시집 <영랑시집>(永郞詩集)을 펴낸다.
이때 문단에서는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저항정신을 보여주었고,
8·15광복 뒤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1948년에는 가족과 함께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 공보처 출판국장을 맡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인 1950년 9월29일, 서울을 미처 빠져나기지 못하고 숨어 있던 선생은 그만 포탄에 맞아 47세로 삶을 마쳤다.
선생의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용인공원으로 옮겨졌다.
선생은 재혼한 뒤 슬하에 7남 3녀(2남 김현복 생후 1년 뒤 사망)를 두었으나
자녀 중 국내에 살고 있는 사람은 단국대 김현태 교수(5남)뿐이며,
2008년에 뒤늦게나마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덧붙이자면..
'지리산 悲歌(哭)'의 주인공인 '최순희' 여사와 인연!
영랑의 바로 아래 동생 김하식이 최순희 여사의 남편이었다.
김현구 시인은 1904년 강진읍 서성리에 태어나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영랑과 함께 강진에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하면서 <청구>라는 문학 모임을 결성하고 동인지를 발간했으며
1930년대 영랑 김윤식, 용아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는 바
<시문학>에 '임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물에 뜬 갈매기', '거룩한 봄과 슬픈 봄', '적멸' 등
4편을 동시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지만, 박용철 시인과 마찬가지로
생전에 자신의 시집을 발표하지 못했다
영랑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10월 3일
국군이 퇴각한 강진읍 서성리 낙화정에서 좌익으로부터 인민재판을 받고
현장에서 죽창으로 사형당해 4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이 풍광좋고 살기좋은 마을 금릉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자랑거리를 만들어냈는데,
백련사의 누각에서 굽어보는 구강포보다도,
무위사에서 올려다보는 월출산보다도,
제일 먼저 꼽은 것이 바로 고암모종(高庵暮鐘)
즉, 백성들이 아침저녁으로 듣던 고성사 종소리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