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12주차] 겨울의 제주는...
함께 스터디를 하는 대학원 동기선생님들과 제주도에 다녀왔다. 제주도에 거주하고 계신 K 선생님을 보러 가자는 한 마디에, 모두 "좋아요"라고 마음을 모아주셔서 연말을 낭만적으로, 무려 제주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수학 여행, 졸업 여행으로만 가봤는데 이렇게 속닥하게 제주도에 가는 것은 처음이라 무척 설렜다. 함께 여행에 동반한 동지들은 제주도에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며 제주 여행 가이드를 자청하신 K 선생님, 유명한 분식점 브랜드를 론칭하고 (지금은 건강전도사이자 역사교육자) 여행에서 요리를 담당하신 H 선생님, 꼼꼼하고 정확하여 총무 제안에 선뜻 응해주신 C 선생님, "여행 가자" 던져놓고 제주 흑돼지 먹방을 보고 있는 나, 이렇게 4명이다. 나 외에 모두 50대의 선생님들이셨지만, 공부하기 위해 모인 모임이다 보니 나이차가 느껴지지 않고 모이기만 하면 그저 책 이야기, 학자 이야기, 역사 이야기, 글 쓰는 이야기, ...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 조합은 뭐지?' 싶지만 우리끼리는 꿀잼인 그런 조합이다.
제주 바닷가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논문을 위해 글쓰기 수업을 하고 계신 C 선생님의 "아, 이번 글쓰기 주제는 제주도 여행으로 하면 되겠다"는 말씀을 듣고, '어, 나도 2학기차 마지막 글쓰기 주제는 제주도로 하면 되겠다!' 영감을 얻었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라 기행문 같은 그런 거창한 글은 아니지만, 여행 내내 참 좋았고 (이멤버 리멤버로) 또 오고 싶어서 일기 쓰듯 줄줄 기록해 두려 한다.
우리가 간 곳은 제주도 서귀포 남단의 '위미'라는 곳이다. 여행객들에게 많이 알려진 대중적인 곳 말고, 제주 로컬분이 추천해주시는 곳에 가고 싶다고 하자 K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장소이다. 작고 아담한, 상상해왔던 그런 제주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 야트막한 돌담 넘어 그림 같은 가정집들이 늘어선 곳. 제주에 도착해 우리를 맞아주시는 K 선생님의 차를 타고 겨울의 눈이 소복히 쌓인 산을 가로질러, 위미에 도착해서 먹은 정식은 정말 맛있었다. 귤과 레드향을 쌓아두고 먹고 싶다는 나의 말에,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싱싱한 농원에 가서 시식도 하고, 맛있는 과일을 잔뜩 사고 육지에도 선물 박스를 보내니 진짜 제주도에 온 것 같았다. 바다 뷰가 보이는 곳에 숙소가 있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소망을 담아 예약해주신 펜션에 짐을 풀었다.
바닷바람이 적당히 서늘하고 청량해 교직 스트레스(?)가 슬슬 풀려가려는 즈음, 다음 코스로 준비해두신 동백수목원에 갔다. 풍경이 아름다운 동남아시아 국가의 한 풍경 같다가도,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에 "세상 곳곳을 다 다녀도 제주 만한 곳이 없다" 하셨던 친구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진 찍어주는데 진심인 한국 사람들의 친절에 감동하며, 추억 사진들도 남기고 "예쁘다, 아름답다"를 연신 외치며 겨울의 바닷바람을 이기며 더 아름답게 자라난 꽃의 향연을 만끽했다. 어떻게든 제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K 선생님의 마음이 느껴져 더 행복했던 시간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버지의 마음 같다 생각되니 이 순간을 사진으로 박제해 오래도록 남겨두고 싶다.
저녁 식사를 위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렴하게 전복과 회를 구입해 들어오는 길에, 영화 <건축학개론>의 촬영지였던 카페 '서연의 집'에 갔다. 영화 같은 장소를 거닐다 진짜 영화를 촬영한 장소에서 차를 마시며 바닷가를 바라보는 시간은 참 아늑하고 평안했다. 숨가쁘게 달려오던 2022년도였다. 결혼을 하고 새로운 환경, 가족과 사계절을 보내며 행복, 설렘, 긴장, 소망, ... 여러 감정을 느끼며 삶에 적응하기 위해 에너지를 썼다. 직장에서도 크고 작은 새로운 어려움들을 만나며 많은 이들이 중보해주고 도움을 주었지만, 오롯이 그 일을 겪어내야 했기에 살이 빠졌다(1kg^^). 달라진 역할과 온전히 나를 이해하기 위해 깊이 있는 영성의 대화와 내적 여정을 걸어가며 나도 모르게 애를 쓰고 진을 뺐나 보다. 그 결과 훈장처럼 표창을 받고, 받고 있던 훈련의 우수수강생으로 선정되어 선물도 받으며 '일 년 수고했다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네. 오예'라며 신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활자도 읽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다 내려놓고 쉬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그렇게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대화 나눈 카페에서의 시간은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요리사 H 선생님표 전복, 회를 듬뿍 넣은 해물라면을 먹으며 각자 어떻게 교육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나누었다. 다른 환경, 다른 세대에서 각자의 인생에 패인 굴곡들이 다져지고 다듬어져 삶의 깊이로 이어진 이야기들을 들으며, 다시 한 번 더 교육철학을 공부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전히 내가 살기 위해 선택한 공부였는데, 하나님은 이미 대학원에 소중한 동료들과 교수님, 무엇보다 어떤 교회에서의 모임보다도 더 하나님의 현존을 선명하게 느끼는 순간들을 허락하셨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세상의 풍파에서 소중한 가치를 잘 지켜내었던 학자들, 그 학자들을 연구하고 삶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시련과 고난을 잘 소화시켜 성숙으로 빚어가는 동료들, 만났을 때 이루어지는 대화의 주제가 모두 책, 글, 의미, 가치, 삶, ...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 한가득이라 행복하고 풍성하다. 이렇게라도 숨통 트이라고, 나를 가장 잘 아시는 그분께서 나를 성장시키고 빚어가시는 과정이 딱 맞춤형이라 감사하다. 육지를 떠나온 제주도의 밤, 올 한 해 감사했던 것들을 나누고 내년 이맘때 열어볼 타임캡슐을 작성하며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소망을 종이 위에 옮겨 놓았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제주 중문의 유명 호텔들이 즐비한 곳으로 갔다. 그 곳에서 호텔 투숙객이 아닌 일반 이용객으로 낭만적인 조식을 먹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맛있고 정갈한 메뉴가 계속 공급되는 곳에서 아침을 먹으며 행복했다. 12월 초, 내적 여정을 과정을 지나며 "효율적이어도 돼. 행복해져도 괜찮다."는 메세지를 받았다. 많은 메세지들 중 이 글귀가 내 마음 깊이 들어와 자리잡기 시작하니, 세상은 그대로인데 세상을 느끼는 나의 반응이 달라졌다. 겉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좋은 환경과 여건, 우울에 깊이 잠식되어 있지 않고 금방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이겨내려는 나의 성향을 두고 "너는 인생에 고난이 없지, 나만큼 힘들지 않지, 넌 괜찮잖아"라며 자신의 상태와 비교하는 이들을 보며 우정과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느꼈다. 교회에서 더 역차별을 겪으며, 불행과 시련을 겪는 순간만 기다리는 것처럼 힘든 상황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고 자기 의를 앞세우는 이들을 마주하며 마음이 힘들었다. '연약할수록 더 귀히 여긴다'는 말씀이 이건 아닐진데, 교회에게 가장 감사하면서도 교회에서 가장 상처 받았던 지난 시간들(어쩌면 지금도..)이 떠올랐다. 잘되면 시기하고 못되면 연민하며 그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며 자신의 입지를 찾는 인간의 행태가 싫어, 때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조식을 먹고 K 선생님이 전기차를 충전하실 동안, 우리에게 런닝맨처럼 미션을 주셨다. 걸어가다 쉬리벤치 발견해서 인증샷 찍기, 풍차 찾기, 특이한 스타벅스 찾기 등. 1시간 이상 이어진 산책과 미션을 즐겁게 해내며 복잡한 생각과 한 해 동안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시원한 바람에 날려버렸다. 어쩌면 지루할 수 있었을 충전의 시간을 게임처럼 만들어주신 K 선생님의 재치와 사려 깊음에 감동하고, 그 시간을 함께 걷고 웃으며 함께 해주신 H 선생님, C 선생님이 고마웠다. 처음 보는 외양의 스타벅스에서 제주도에만 있는 시그니처 메뉴들을 맛보며 카페인을 충전했다. 하늘도 이토록 아름다웠다. 자꾸 노아의 방주 이전, 에덴 동산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려볼만큼.
제주 공항으로 가는 길에 한림읍에 위치한 한림작은영화관도 구경하고, 소원이었던 흑돼지도 먹었다. 제주 여행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흑돼지 먹방 영상을 부지런히 예습한 덕분에, 더 맛있게 먹었던 흑돼지. 비행기가 지연되어 늦게 출발해도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공항에서의 커피 한 잔으로, 그저 제주에 더 있을 수 있음을 감사했던 시간. 짧은 1박 2일 제주 여행이 끝났다.
위미. 나에게 위미는 we(우리)와 me(나)의 조합으로, 우리가 함께 어우러지고 즐거우면서도 여행을 통해 각자를 발견하는 장소였다. 순전히 제주도에 계신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하고 오랜만에 스터디멤버 다같이 회포를 풀자는 생각 하나에서 시작한 여행이었는데, 2022년의 어려움을 털어내고 2023년을 개운하게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의 통념을 하나하나 깨고 성경 말씀이 진리임을 모든 경험을 통해 내 마음 속에 잔잔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속삭임도 느낄 수 있었다. 온전함이 무너져 제로섬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내가 온전히 즐겁고 평안할 수 있다면 그건 다른 누군가가 그만큼 더 노력하고 배려했기에 가능한 일임을.. 이 여행이 즐겁고 힐링의 시간으로 가득 채워지도록 배려해주신 K, H, C 선생님과 내 마음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