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당혹스런 세상에서 믿음을 묻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성서유니온, 2023
[발췌]
<머리말> 중에서
거의 40년이나 지난 작은 주석서를 읽으면서, 저는 지금도 그때의 나 자신과 뜻이 일치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당시에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전도서는 의가 번성하고 악이 근절되는 이상적인 세상을 바라는 시각과, 불의와 부조리로 점철된 현실 세상에 대한 관찰 사이의 불편한 긴장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전자는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의 목소리이고, 후자는 가혹한 경험의 목소리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는 힘이 세상의 현재 상태에 대한 고뇌로 이어진다. 무신론자(세상이 왜 지금과 달라야 하는데?)나 다신교도 신들의 혼란스런 경쟁에서 우리가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에게 세상은 큰 도덕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선하고 주권적인 한 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세상은 곧 수수께끼다.
저는 전도서를 읽는 다양한 방법이 있고, 그런 방법을 제시하는 수많은 주석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전도서에서 얼마나 많은 목소리가 말하는지, 그 목소리들이 서로 일치하는지 아니면 상충하는지, 저자가 ‘정말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떤 의도적인 구조가 존재하는지, 이 책에 명확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 그렇다면 그 배경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 중 어떤 것도 논하거나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소 구불구불한 저자의 순례길(이라고 할 수 있다면)에 동행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기꺼이 인정하지만 저의 접근 방법은 구약학자 크레이그 바르톨로뮤(Craig Bartholomew)의 접근 방법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2] 전도서의 주인공은 자신의 경험적 관찰과 추론을 도구로 사용해 가급적 인생의 의미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애쓰는 여행자 혹은 ‘탐구자’라는 그의 해석에 저도 폭넓게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탐구 여행은 곳곳에서 위험천만한 막다른 골목으로 주인공을 데려가지만, 또한 놀라운 통찰의 순간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이 탐구 여행은 결국 가장 어려운 질문들을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한 채 여러 긍정적인 성찰과 조언에 도달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나머지 성경 이야기와 더 온전한 성경의 계시가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구약성경의 지혜 문학에 속한 이 복잡한 책과 관련해, 이것이 전도서를 읽는 ‘올바른’ 길이나 ‘최상의’ 길,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저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저자의 탐구 여행에 동행한다고 상상하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이 탐구 여행은 혼란스러운 굽잇길과 가끔 완전한 교착상태에 빠지기도 하지만, 마침내 그 목적지에 도달합니다.(10-11)
2021년 여름
크리스토퍼 라이트
서론
지혜자들은 경험과 합리적 추론에서 얻은 통찰력으로 말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훨씬 직접적인 통찰력으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주변에서 목격한 세상의 고통스러운 도전을 붙들고 진이 빠질 만큼 씨름했습니다. 우리가 전도서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질문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의 의미를 놓고 고뇌하던 예레미야나 하박국의 몸부림과 일맥상통합니다. 지혜와 예언은 모두 까다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허용하는데, 많은 시편 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예, “주님, 어느 때까지입니까?”). (16)
질문하는 믿음
전도자가 믿음의 사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데는 어떠한 의문도 없습니다. 다만 그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 또한 자기 민족이 받은 지혜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만큼 강했습니다. 동시에 전도자는 믿음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큼, 거북하고 도전적인 질문을 제기할 만큼 대담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세상이 이럴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전도자는 믿음이 질문을 던지도록 허용하면서, 믿음 자체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집니다.
전도자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바로 세상에는 ‘아름답지’ 않고 번번이 당황스러우며 혼란스러운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전도자가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안에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불공평한 결과, 인생의 가장 좋은 것조차 무의미하고 쓸모없게 만드는 듯한 죽음의 블랙홀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여전히 우리가 일하고 먹고 마시고 삶을 누리고 사랑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이며, 또한 하나님이 모든 것에 미소 지으시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이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일 수 있을까요? 전도자는 둘 다가 실제로 사실이라고 믿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전전긍긍합니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전도자는 허무주의와 비관주의의 심연을 맴돌지만(세상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는 여전히 신앙인으로 남습니다. 믿음이 승리합니다. 우리 세계의 당혹스럽고 무서운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천진난만한’ 피상적 믿음이 아니라, 대답 없는 질문과 함께 살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는 믿음,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독자들을 초대하는 믿음입니다.
최근에 저는 전도서가 하박국서나 여타 탄식시처럼 까다로운 책들과 더불어 우리 마음을 향해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에는 당혹스러우면서 두려운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해 보입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번 및 그것이 자연 질서와 인류 전체에 미치는 영향과 같이, 어떤 일들은 피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확실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도자가 단지 ‘있는 그대로 말하는’ 방식에 혹은 하박국 같은 예언자가 의문과 불평을 가지고 용기 있게 하나님의 가슴을 두드릴 때 공감합니다. 그런 다음 신뢰와 긍정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여정에서도 위안을 얻습니다. 이것은 험난한 여정입니다. 하지만 함께 여행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습니다.(17-18)
전도서의 중심인물
전도자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주 강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 안에 서 있고 이스라엘 신앙의 깊은 유일신 신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 계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믿음에 뿌리를 둔 전도자는 삶과 일, 음식과 포도주, 성과 결혼, 투자와 부 등의 선함에 대해 놀라울 만큼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삶도 선합니다. 이것은 전도자가 거듭 반복해서-정확히 말하면 일곱 번이나 - 인정하는 근본적인 확신입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이 모든 일이 끔찍하게 잘못될 수도 있음을(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알고 있습니다. 인생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거나 터무니없이 불공평할 수 있고 그저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고 인정하지만, 과연 항상 그렇게 보이던가요? 전도자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합리적 수단을 사용하여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만, 계속 똑같은 결론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부 그냥 헛된 것 아닐까? 전도자는 인생의 명백한 허무함과 죽음이라는 끔찍한 결말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그래서 그는 삶을 미워하지만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그 이유를 양쪽 측면에서 이야기해 줍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머리로 무엇을 믿는지 알고 있지만,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마음으로 느끼는 바에 솔직히 대응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과 비슷한 사람이지요.(19-20)
[중략]
전도자는 어려운 질문을 열심히 생각하도록 자극하지만, 우리는 성경적 신앙과 경건한 삶이라는 안전한 틀 안에서 생각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단지 “성경에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전도자가 말하는 모든 것에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우리가 욥의 친구들, 심지어 자신의 말을 읽을 때도 비슷합니다.
욥기 전체의 메시지와 성경 전체의 광범위한 진리에 비추어 보고, 그들이 하는 말에 전부 동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전도자의 여정 혹은 탐구의 모든 대목에서 그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전도서 마지막에 이르러 11-12장의 빛 아래서 전도자의 탐구와 그 잠정적인 결론을 평가할 수 있을 때까지, 그가 옳은지 아닌지의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22)
전도서의 방법 : 반어법과 역설, 틈과 모순
이것은 전도서의 가장 어리둥절한 측면일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모순되는 것들을 말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는 가끔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고,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 부분과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청중독자에게 생각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얼굴을 때리면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고, 진부한 대답이나 영리한 격언에 만족하지 않게 합니다. 완전히 비논리적이고 전혀 납득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질 때, 전도자는 우리가 삶의 부조리를 직시하길 바랍니다. 그는 가끔 반어법을 사용합니다. “일반적인 통념은 이렇게 말하지만, 적어도 어떤 때에는 그 반대가 사실인 듯 보인다.” 그는 가끔 역설도 사용합니다. “여러분은 현실이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상황은 모든 예상과 놀라울 정도로 상반될 수 있다.” 가끔 전도자는 아무 설명 없이 그저 상반된 것들을 나란히 놓고, 그것들 사이의 틈을 메울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합니다. 특히 상반된 일들이 서로 모순되지만 그 나름대로 각각 사실인 듯 보일 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문학 장르와 방법에 대해 인지해야 합니다. 전도서를 가령 요한복음처럼 읽지 마십시오... 전도자는 삶의 신비와 씨름하라고 도전합니다.(26-27)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려면 인간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과 더불어 그분 자신과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물론 그와 같은 계시가 전도자가 씨름하는 모든 문제를 일순간에 해결하거나 그가 던지는 모든 질문에 깔끔한 대답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씨름과 질문은 ‘계시의 틀’ 안에서 생겨나야 합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전도서는 (저자나 전도자가 의식했든 혹은 염두에 두지 않았든) 창세기 3장의 결과로 가득한 세상에서 창세기 1-2장이 어떻게 진실하고 유용할 수 있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전도서는 세상이 창세기 1-2장의 살아 계시고 주권적인 한 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진리와 더불어, 창세기 3장의 결과로 인해 유린된 세상 현실을 모두 강력하게 인정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누리는 선한 세상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세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로 하나의 세상이며, 긴장을 안고 살아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우리에게 없습니다.(28-29)
1.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전도서 1:1-2:26
지배적인 주제
“헛되다!” 계속해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관용구에서 최상급 표현입니다. “허무한 것 중에 허무한 것.”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전도서의 도전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는 ‘헤벨’(hebel)인데, 이것은 수증기, 호흡, 연기 냄새, 흘러가는 구름, 빙빙 도는 증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은유적 용례로 사용되는 매우 함축적인 단어입니다. 문맥에 따라 약간 다른 의미와 맛을 낼 수 있습니다.
• 공허한. 아무 유익 없이 무의미한. 이것은 흠정역(KJV)처럼 ‘허무함’(vanity)이라는 단어의 옛 의미였습니다. 그 자체로는 퍽 매력적인 것 같지만 결국 아무 가치도 없는 시간과 노력 낭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국 북동부에는 “초콜릿으로 만든 주전자만큼 쓸모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 일시적인. 영속성이나 지속성이 없으며 실체도 없고 덧없는. 멋지고 웅장해 보이지만 순식간에 전부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침 이슬이나 안개, 혹은 끓는 주전자의 수증기처럼 말이죠.
• 기만적인. 사람들이 믿는 바와 달리 거짓된(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우상을 가리킬 때 사용됨). 항상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기 때문에 굳이 믿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상상 속에만 존재하기에, 그것을 찾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뜻의 또 다른 영어 관용구로 ‘스코틀랜드 안개비’(Scotch mist)가 있습니다.
• 실망스러운. 바람처럼 완전히 장악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우리는 원하는 만큼 쫓아다닐 수 있지만 손으로 붙잡거나 거머쥘 수는 없습니다. “고양이 길들이기와 같다”는 속담처럼 말입니다.
• 불합리한. 기존에 알려진 다른 사실이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전혀 납득이 되지 않고 불합리하며 비논리적인 듯이 보이는.
• 당혹스러운. 수수께끼 같은 우리는 삶에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끊임없이 우리를 비껴가기 때문에 그 핵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생은 신비이고 수수께끼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지라도(아마 있겠지만) 우리에게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무의미해 보이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고군분투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전도서 저자는 대체로 첫 번째와 마지막 둘의 의미를 오갑니다(물론 가끔 다른 맛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때로 전도자의 말은 완전히 비관적으로 들립니다. “삶에는 의미가 전혀 없고 완전히 무의미하다. 그냥 받아들여라!” 이게 ‘헛되다’는 단어의 맛입니다.(33-35)
이렇듯 ‘당혹스러운 수수께끼’라는 의미가 이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전도자의 시각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우리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혹은 적어도 - 우리가 점점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할지라도 - 도통 납득이 되지 않는 삶의 양상과 경험이 있고, 우리의 능력이나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일도 아주 많습니다. 어쨌든 그 모든 것에 어떤 목적과 의미가 틀림없이 있다는 직관적인 믿음을 가질 때에도, 우리는 명확하고 만족스러운 대답을 정확히 집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전도자의 여정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입니다.(36)
핵심 질문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13)
이것은 전도서와 그 안의 탐색을 지배하는 근원적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2:22; 3:9; 5:16에서 반복됩니다.
‘유익’(gain)이라는 단어는 ‘수익’ 혹은 ‘이익’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이런 의미입니다. “평생 수고한 대가는 무엇인가? 우리는 마지막에 무엇을 얻는가? 무엇이 우리에게 남는가? 온갖 수고를 통해 얻는 긍정적인 이익은 무엇인가?”
‘수고’(labor)라는 단어는 다소 부정적입니다. 이것은 일이 아니라 노역과 땀의 악취를 가리키는 일상적인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다른 한편, (전도자가 계속 반복해서 동의하듯이) 일이란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의 첫 모습은 목적에 부합하도록 체계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계획하고, 실행하고, 만들고, 빚고, 채우고, 성취하는 노동자의 모습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되비추는 피조물도 비슷한 능력을 소유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렇습니다. 일은 인간의 근본이요 체질입니다. 일은 창조세계 안에 하나님을 비추는 우리 역할의 본질적인 측면입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 인간 사회에 참여합니다. 일을 통해 우리 삶은 타인에게 쓸모가 생기고, 당연히 우리도 타인의 수고를 대가로 받습니다. 이것은 인류 문명의 핵심입니다. 즉 문명이란 일을 공유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의 유익을 공유하는 위대한 인류 기획입니다. (이 책 3장에서 일의 수많은 문제를 보겠지만) 일 자체는 인간의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한 부분입니다. 그런 이유로 일을 할 수 없거나, 일을 빼앗기거나, 일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성을 훼손하는 제한과도 같습니다. 강요되거나 자발적인 게으름 역시 어느 정도 똑같이 비인간적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을 오직 ‘취업’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둘은 흔히 중첩되지만 말입니다. 사람은 금전적인 측면에서 보상을 얻지 못하는 것을 위해서도 갖가지 방법으로 일을 합니다(모든 어머니에게 물어보세요).(36-38)
삶의 순환(1:4-11)
순환적 역사관은 결국 언제나 절망적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순환적이거나 반복적인 역사관에는 두 가지가 부족합니다. 먼저, 순환적 역사관에는 목적 의식(신학자들은 이를 '목적론'이라고 부릅니다), 즉 만물이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목표가 없습니다. 원을 돌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도' 이를 수 없습니다. 당연히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둘째로, 이런 역사관은 종말 의식(신학자들은 이를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시고, 자신의 목적을 완결하시며, 자신의 약속을 완전히 성취하실 것이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간절히 기대할 미래도 없습니다! 목적도 끝도 없기 때문에 진짜 희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자가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결국 그토록 실망해 (거의) 완전한 절망에 빠집니다.(45-46)
삶에 대한 탐구 (1:12-2:11)
전도자는 이제 자신을 소개하면서 탐험길에 오릅니다. 그는 내레이터가 1절에서 자신에게 준 ‘역할’(persona)을 반복합니다.
전도자는 백성의 지도자이고(그의 이름이나 호칭은 아마 그런 의미일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지혜(교육)를 받았으며, 자신의 탐구를 위해 모을 수 있는 모든 자원을 공급받았다고 상상합니다. 그는 솔로몬 왕이 모을 수 있었던 모든 지혜, 부, 기회가 자신에게 있다고 상상합니다.(46)
또한 전도자는 매우 진지합니다. “마음을 다하며”란 표현은 히브리어로 “나는 내 마음을 주었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마음’(heart)이란 감정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지성, 선택, 의지의 좌소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주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전도자는 상당히 의도적으로 철저히 생각하려 합니다. 그는 정말 힘든 지적 노력을 기울이려고 합니다.(47)
하지만 전도자는 지금 당장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분위기가 결코 아닙니다. 그가 보기에 낡은 격언은 부정할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무언가 굽은 것이 있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15절은 명백히 단언합니다. 부정하기 어렵습니다.(50)
그는 삶의 의미와 성취를 발견하기 위해 적어도 네 가지 방법으로 탐구했다고 회고합니다.
1. 학문 연구
하지만 전도자의 훌륭한 학업도 삶의 가장 깊은 질문을 만족시키거나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결실 없는 추구였지요. 결국에는 고통스러운 추구였습니다. 그는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흔한 격언의 역설적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전도자가 그렇게 많이 배우지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 것입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괴로운” 것 같습니다(18절, GNT).(51)
2. 쾌락주의
즐거움을 추구해서 무엇을 성취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멈춘 뒤의 기억은 어떤 느낌입니까? 어이없음입니다. 즐거움 자체는 삶의 궁극적 의미를 얻기 위한 형편없는 경쟁자입니다.(53)
3. 통제된 어리석음
역설적으로, 전도자는 자신의 생각이 여전히 지혜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어리석음을 붙잡아 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심각한 음주와 정신적 해체를 경험하도록 스스로 허용하면서도, 그런 경험에 대한 분석적 성찰을 통해 어쨌든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시도의 신중함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잃을 만큼 술에 취해 있는 형편없는 두뇌가 합리적으로 관찰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기에는 드러난 위험보다 더 깊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나의 이성은 여전히 지혜로 나를 인도하고 있다”(이것이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다”의 의미 –옮긴이)고 전도자가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지혜야? 누구의 지혜인데?”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잠언의 지혜는 분명 아닙니다.(55)
4. 생산적인 노동
여기에는 창조와 관련해 무언가 선한 것, 인간의 고유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전도자는 종종 일하는 능력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예. 2:24: 3:13, 22:5:18). 따라서 전도자가 일을 하는 동안 모든 것을 즐겼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비교할 때 여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뒤로 물러나’ 자기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을 ‘살펴보셨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심히 좋다'고 선언하셨습니다[창 1:4-31에서 ‘좋다’(good)라는 단어가 일곱 번 반복되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창조 행위만이 아니라 최종 결과에도 완전히 만족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치신 뒤,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시고 쉼을 누리셨습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11절은 참담한 결론적 판단입니다. 하나님과 달리 전도자는 “내 손으로 한 모든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때 (물론 굉장했지만) 그 안에서 영속적인 가치나 궁극적인 의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그는 이렇게 부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를 몇 가지 제시할 것입니다. 지금은 극도의 환멸의 증언이 나옵니다. 그는 "보라, 그 모든 것이 ‘헤벨’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이 맞다면, 그 모든 것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요? 일이 지속되는 동안 일 자체는 훌륭합니다. 일평생 지속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삶의 본질과 의미 자체는 여정을 시작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61)
삶을 미워하다! (2:12-23)
한편으로 전도자는 모두가 알고 있는 표준적인 반응을 떠올립니다. 모든 사람에겐 부모님이나 학교, 사회에서 배우는 ‘기존의 지혜’라는 것이 있습니다. 13-14절은 직설적으로 이분법적 단언을 내놓습니다. ”빛이 어둠보다 낫듯이, 지혜는 어리석음보다 낫다.“ 이것은 잠언에 나오는 전형적인 내용입니다. 전도자는 적절한 인용구까지 제시합니다. 14a절은 할머니들이 듣기 싫을 때까지 반복하는 “다 너 좋으라고 하는 말이다”와 비슷한 격언입니다.(62)
전도자는 자신이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세계, 기존의 진실의 세계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두 세계를 화해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이 무너짐은 책 전체에서 계속 울려 퍼질 것입니다.
13-14절의 전통적인 진리에 동의할지라도 (누가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죽음과 유산의 부족)이라는 답이 없을 것 같은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63)
죽음(15절)
전도자는 죽음 너머에 있는 것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도 그에 대해서는 많이 계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전도자를 조금 양해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일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인은 궁극적으로 악인과 동일한 운명에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일평생 믿음과 사랑과 순종으로 빚어진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가 단지 죽음으로 인해 완전히 끊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같았습니다. 시편 16:9-11은 그와 같은 소망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여기서 성경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전부는 자신의 관찰과 이성인데, 그것만으로는 죽음 너머를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그가 볼 수 있는 한, 죽음은 이 문제에서 지혜나 다른 모든 것의 가치를 전부 빨아들입니다.(64)
삶을 사랑하다! (2:24-26)
전도자는 다짜고짜 기어를 바꾸고,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놀라운 선물이라고 여겨지는 삶과 일의 선함을 대담하게 진술합니다...
이것은 전도서에서 삶에 대한 긍정적 관점이 점차 정교하게 표현되는 일곱 곳 중 첫 번째 구절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본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 삶은 좋은 것이다! 할 수 있을 때 지금 즐겨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들을 누려라!”(68-69)
이 책 전체에서 분명한 것은 삶이 당혹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헤벨’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이스라엘의 성경적 신앙이라는 근본적인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과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이것만큼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선한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삶이 선하다는 진리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전도자의 정체성의 핵심 공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저주와 좌절, 죽음, 허무 등 창세기 3장의 암울하고 답답한 결과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과 2장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창세기 1-2장과 그 위에 세워진 다른 성경 구절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의 삶에 근원적 기초를 형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과 음식, 포도주와 일을 주셨기에 그것들을 마음껏 누리는 것은 옳고 당연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을 그분의 얼굴에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행동은 좋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그분 손에서 가져와 누리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하나님이 선한 창조 세계에서 살고 일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고, 적절하게 감사하면서 긍정적인 삶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은 의무인 동시에 기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68-71)
이것은 무신론과 신앙 사이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다스리시며 그 안에 우리를 두신 이 세상에서, 선하며 참되다고 알고 믿는 것과 무의미하며 당혹스럽다고 관찰된 것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이런 유의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많은 것들이 우리가 믿는 것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전도자도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핵심은 이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질문이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다고 해서 이런 질문에 쉽고 깔끔한 대답이 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7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