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6 주일 5시예배 / 김관성 목사(행신침례교회 담임)
말씀 : 사무엘하 9:1-4
제목 : 아낌없이 주는 사랑
1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2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3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4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들, 그리고 도전들 우리 마음에 새기고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대사회 때는 일반적으로 새롭게 정권이 출범하게 되어지면 직전 정권에 속해 있었던 가족들은 모조리 숙청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전사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 나라의 왕은 다윗이 등극하게 되어집니다.
이제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까 고대사회의 일반적인 문화적인 풍습을 쫓아 그 상황이 펼쳐질 것을 예상해 보면, 이제 사울의 집안에 속해있는 모든 사람들은 숙청당해 죽어야 되는 운명의 주인공들이 돼버린 거죠.
그리고 실질적으로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이 질문을 다윗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통상적으로 금방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명드렸던 내용에 근거하자면 이 질문은 왜 하는 겁니까? 한번 보십시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왜 이 질문을 하는 겁니까? 있으면 내가 다 족치리라 이 내용이 그 뒤에 이어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1절 하반절에 보면 전혀 다른 내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1절 중반부터 하반절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다윗은 요나단 살아 생전 자기와 맺었던 언약을 기억하고 요나단이 지금 죽고 없지만은
그와 맺었던 그 약속을 근거하여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신의를 지키는 차원에서
사울의 집안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은총을 베풀겠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지금 왕이 된 다윗이 혹시 사울의 집안에 아직도 살아있는 자가 있는냐 이 질문을 하니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 - 쉽게 말해 사울의 집안에 누가 아직도 살아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답을 할 수 있을 거 아녜요..
2절에 보니까, 그 사람이 사울의 집안에 사울의 수하 가운데 있었던 시바라고 하는 한 종이 다윗에게 나와 다윗의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하고 있습니다.
(2절)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 사랑하는 우리 주안교회 가족 여러분,
2절 말씀만 이렇게 딱 읽었을 때, 이 시바라고 하는 인물의 됨됨이가 좀 느껴지십니까?
만약, 여러분들 중에 '목사님, 느껴집니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뻥이예요.
2절 말씀만 읽고는 시바라고 하는 사람의 됨됨이를 읽어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스토리의 결론을 알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결론을 알고 있는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는 2절 말씀만 탁 읽어도
이 시바라고 하는 인물의 인격, 이 됨됨이가 어느정도 좀 읽혀집니다.
그 대목이 어딘가 하면,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2절 맨 하반절에 보면 '네가 시바냐?'라고 다윗이 묻습니다.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여러분, 느낌이 어떻습니까?
원래 고대사회 때는 신하의 제일덕목은 不事二君(불사이군), 오로지 한 왕만을 주군으로 섬깁니다.
이게 신하된 자가 가지고 있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인격적인 요소입니다.
그는 분명히 사울의 종이었는데, 지금 인제 이 나라의 왕으로 다윗이 등극한 이 상황에는
다윗이 어떤 질문을 하니까, 시바가 자진해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목사님, 좀 오바하는 거 아닙니까? 사울이 살아있을 때는 사울의 종이고
다윗이 왕 됐을 때는 다윗보고 내가 당신의 종이니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지금 여러분들 눈빛이 그래요. 그 눈빛을 제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두번 세번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다시피, 저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잖아요. 그런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는
시바가 사울의 종이었으면서 다윗이 왕 됐다고 그 앞에 가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권력과 힘이 누구에게로 흐르고 있는지, 누가 실권을 잡고 있는지에 따라 자기의 소신을 얼마든지 이렇게 저렇게 바꿀 수 있는 인물, 철저하게 자기의 이(利)를 쫓아서 자기 인생을 경영하고 살아가는 대표적인 인물이 저는 이 시바라고 생각을 해요.
어쨌든, 이 시바는 사울의 집안에 아직도 누가 살아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질문에 답을 하지요.
여러분, 3절에 보면 다윗이 이제 한번 더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잖아요. 이 므비보셋은 유모가 어렸을 때 업고 뛰다가 애를 땅에 떨어뜨려 가지고
어린시절부터 양쪽 다리를 다 저는 중증장애인으로 한평생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요나단의 아들이죠.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이 므비보셋이 어디에 살고있는지 압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4절 말씀에 보면, 이제 구체적인 정보를 토해놓는데,
여러분 우리가 4절은 소리내서 한번 같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4절 읽으실 때 여러분들이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거기 하나 나올 거예요.
그 단어가 뭔지 또 한번 확인도 하면서 우리가 4절 말씀을 같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4절)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는 단어가 뭐죠?
"로드발"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읽으면서 이해가 되어지는 단어가 아니예요.
"로드발"에서 앞의 (로)는 히브리어 부정 접두어,
영어로 치면 not. never 이런 정도의 의미고요, (드발)은 '목초지' 이런 뜻이예요.
그러니까, 목초지가 아닌 -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목초지가 아닌 어떤 장소에서 삶을 산다는 것은,
제가 조금 해석에 있어서 오바를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우리 시대의 시각으로 번역을 하자면,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 이런 정도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시바는 다윗에게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므비보셋이 어떤 삶의 조건에서,
또 어떤 육체적인 한계를 갖고 어떻게 살고있는지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데,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이 달동네와 같은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기 보금자리가 없었던 인물, 그리고 중증장애인으로 양쪽다리를 다 절었던 인물, 거기에다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이니까 고대사회의 풍습대로 하자면,
지금 다윗이 정권을 잡은 상황이니까 반역자 집안의 자식, 인생의 온갖 비참한 내용들은 전부 다 끌어안고
그것도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얹혀서 살고 있었던 불행한 인물, 그 인물이 바로 므비보셋입니다.
이 므비보셋에 대한 정보를 다윗에게 소개를 하니까, 다윗이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데리고 오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시면서 행간을 이렇게 좀 잘 읽으실 필요가 있는데,
아마 다윗의 신하들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으로 가서 므비보셋에게 '왕이 너를 찾으신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때 여러분, 므비보셋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아, 나의 서럽고 눈물과 한숨으로 점철된 인생, 여기서 끝나겠구나.
왕궁으로 끌려가서 우리 할아버지의 원수 다윗의 손에 반역자 집안의 손자인 나는 비참하게 죽는 자리로 내몰리겠구나'
이런 심정으로 므비보셋이 왕궁으로 갔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심정으로 왕궁으로 끌려왔던 므비보셋을 향하여 다윗이 선언하고 있는 내용이 뭡니까?
"오늘부터 므비보셋은 나와 같은 상에서 먹고 마시리라"
여러분, 왕하고 같은 상에서 먹고 마시는 사람은 누굽니까? 왕자님하고 공주님 아닙니까?
그의 신분을 바로 그 자리까지 끌어올리고 있고 동시에 "사울에게 속하였던 모든 재산을 므비보셋에게 되돌려주라"
여러분, 자신은 죽는 줄 알았는데, 다윗의 입에서 토해지는 이 내용을 듣고 므비보셋이 얼마나 감격하고 깜짝 놀랬겠습니까..
그러면서 므비보셋이 고백하는 이 8절의 고백이, 굉장히 유명한 구절이잖아요.
(8절)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표현 자체가 굉장히 거칠면서도 너무 절절하잖아요. "다윗이여! 어찌하여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제가 신학교 1학년 입학했을 때, 미국의 찰스 스윈돌 목사님의 책 "은혜의 각성"이러고 하는 책에 보니까
이 므비보셋과 다윗의 관계를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적용해 가지고
이 사무엘하 9장의 메세지를 구속사적인 메세지로 잘 풀어서 설교를 하셨던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어요.
그때 참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굉장히 좋은 설교입니다. 그런데 저는 또 한 사람의 설교자로서
이 사무엘하 9장의 초점은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조금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던 시바라고 하는 인물과
므비보셋을 아무 조건없이 자기 집에 거두어 함께 삶을 살았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
시바와 마길, 이 두 사람의 길을 대조하고 있고 사무엘하 기자는
계속해서 그런 관점으로 두 사람의 삶을 사무엘하 9장 이후에서도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 시바의 재산의 규모를 우리가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10절 말씀을 한번 봅니다.
(10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 여러분, 다른 내용들은 다 제쳐두고요, 맨 마지막에 있는 그 내용만 한번 보세요.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명이요 종이 스무명이라"
제가 우리 주안장로교회 가족들의 센스를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이 문장을 세 글자로 한번 바꿔 보세요. 뭐가 이렇게 진지하세요.. "중산층"
이 고대사회 때 최소한 중산층 수준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이 시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보세요. 그는 이 모든 재산을 사울이 왕이었을 때 그 사울의 은총을 힘입어 이 재산을 다 축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울의 손자였던 므비보셋이 어떤 삶의 조건에서 살고 있다라는 것,
그리고 그가 어디서 살고 있다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므비보셋을 돕거나 섬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여러분에게 이 시바라고 하는 인물의 됨됨이가 2절 말씀 가운데 어느 정도 살짝 보인다 라고 말씀을 드린 거예요.
바로 시바라고 하는 인물과 대조되어지는 인물이 누굽니까?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입니다.
마길이 불쌍한 므비보셋을 단순히 자기 집에 거두어 함께 삶을 살았다 이 관점도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지만,
므비보셋은 반역자라고요, 반역자.. 므비보셋을 자기 집에 숨겨두고 잇었던 사실이 발각되어졌을 때
자기의 목도 날아갈 수 있는 이런 상황들을 전부 다 떠안으면서
므비보셋을 자기 집에 거두어 함께 살았던 인물,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입니다.
이 두 사람의 길을 이렇게 사무엘하 9장에서 명백하게 대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시간 이후에 다윗의 삶이 어떤 자리로 내몰리게 되는가 하면,
다윗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이 쿠테타를 아버지를 향하여 감행하잖아요.
처음에는 뭐 이 쿠테타 별거 아니었는데, 다윗의 가장 핵심책사였던 아이도벨이 넘어가잖아요. 압살롬에게..
그러면서 점점 이 압살롬의 쿠테타가 힘을 받기 시작합니다.
왕이 되기 전에도 사울에게 쫓겨서 유다 땅 이곳저곳을 날마다 도망다녔던 삶을 살았던 사람이 다윗인데,
이제 왕이 되어 삶에 쫌 안정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싶은데
이번에는 아들에게 쿠테타를 당해 가지고 다시금 그 유다 광야를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도망을 다니고
동시에 쿠테타 세력이었던 압살롬의 군대와 싸움을 해야 되는 이 자리로 다윗의 삶이 내몰립니다.
마음도 지치고 몸도 지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상황으로 다윗의 삶이 지금 흘러가고 있는 거죠.
여러분, 자식에게 그렇게 뒷통수를 한번 맞아 보세요. 누가 정서적으로 그 상황을 넉넉하게 받아내며 이겨낼 수 있겠어요..
다윗이 지칩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그 어떤 어간에 다윗을 누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서 전혀 엉뚱한 사람이 다윗을 찾아오는데, 여러분 삼하 16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삼하 16장 1절과 2절을 우리 소리내어 읽겠습니다.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 여러분, 우리가 삼하 9장에서 확인했던 그 얍삽한 인물이었던 시바가
온갖 음식들을 챙겨가지고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있는 다윗을 공궤하기 위해서 나타납니다.
이 다윗도 시바라고 하는 인물이 어떤 존재인가를 어느 정도는 좀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면, 2절 맨위에 보면 왕이 시바에게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딱 묻지 않습니까.. '뭔가 이 마음속에 히든 모티브가 따로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다윗이 지금 느낀 것 같아요.
무슨 목적으로 이 모든 음식을 가져왔느냐? 하니까, 이 질문을 어떤 의미에서는 시바가 기다렸던 것 같아요.
"왕이시여, 저에게 무슨 다른 목적이 있습니까..
지금 아들 압살롬에게 구테타를 당하셔서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있는 왕을 공궤하고 섬기고
무엇보다도 왕과 함께 전선을 구축하여 다시 왕궁으로 돌라가려고 애쓰며 전쟁하는 이 많은 청년들,
군사들이 이 음식 먹고 힘을 냈으면 하는 그런 마음으로 제가 이 음식을 가져왔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니까 굉장히 감동적인 이야기잖아요.
이 상황에 다윗은 순간 특정한 어떤 사람을 향하여 섭섭한 마음이 확 찾아왔던 것 같아요.
3절 말씀 한번 보세요.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시바의 주인의 아들이 누굽니까? 므비보셋이잖아요.
"므비보셋은 지금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시바가 다윗에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왕이시여, 므비보셋은 지금 왕궁에 머물러서 원래 이 나라의 왕권의 정통성은 우리 할아버지 사울,
그 다음은 우리 아버지 요나단, 그 다음은 내가 이어서 이 왕권을 이어받는 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적통의 질서인데
이게 지금 다윗으로 삐까닥해서 넘어가 버렸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래 순서대로 지금 바로잡으셨다 라고 그렇게 왕궁에서 나팔불고 있나이다'
이렇게 시바가 지금 므비보셋을 다윗에게 이간질을 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다윗이 듣다 보니까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있는 이 다윗의 상황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니까
피가 거꾸로 솟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4절 말씀 보니까,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이 사울의 재산을 전부 다 므비보셋에게 줬는데,
이제 그 므비보셋에게 간 모든 재산을 '시바야, 니가 가져라' 그렇게 다윗이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시바가 어떻게 합니까..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여러분, 이 시바는, 다윗에게 이 많은 음식들을 가지고 온 것은 바로 이 목적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제가 아까 삼하 9장 2절에서 고 내용만 봐도 이놈은 이거 뭔가 쫌 얍삽하고 철저하게 자기 이익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다
라고 하는 느낌을 살짝 볼 수 있다라고 말했던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참 성경은 사람 이름도 너무 기가 막히게 잘 짓는 것 같아요.
시바 - 정말 이름 그대로 딱 시바입니다. 하는 짓이.. 그죠..
그런데 여러분, 제가 아까 삼하 9장에서 시바와 마길 두 사람을 대조하고 있고,
9장 이후에도 이 두 사람의 행적을 계속 성경이 대조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이 시간 이후에는 압살롬의 쿠테타가 더 힘을 받습니다.
다윗은 이제 회복되어지기 불가능한 상황까지 삶이 내몰립니다. 이제 다윗은 거의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함이 없이는 다윗은 회복되어져서
예루살렘으로 왕이 되어서 돌아가는 일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리는데, 이때 또 누가 음식을 가지고 또 나타나요.
여러분 17장 한번 넘어가 보실까요. 17장 27-29절을 한번 보십시오.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레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 조금 전에 시바가 가지고 왔던 음식과 질과 양이 게임도 안될만큼 엄청난 고급스러운 음식을 많이 가지고
도와줘 봐야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 놓여져 있는 다윗을 돕기 위해 나타납니다.
세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중간에 누가 있습니까?
로드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 거기 들어가 있지요. 세 사람이 지금 나오잖아요.
소비,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 한 명이 바르실레인데, 이 세 사람의 대표가 바르실레였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압살롬의 쿠테타를 꺾으시잖아요.
압살롬은 자기의 외모에 상징이요 자랑이었던 자기가 길렀던 긴 머리 때문에 죽음에 처해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지고,
하나님은 다윗을 다시 회복시켜서 예루살렘 성으로 돌려 보내잖아요.
그때 다윗이 다시 왕이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에 바르실레를 찾아요.
자기 인생에 가장 깜깜하고 어두웠던 그 순간 자기를 찾아왔던 바르실레를 찾아요.
"바르실레야, 나와 함께 왕궁으로 가자" 그때 바르실레가 뭐라고 얘기합니까?
"왕이시여, 저는 나이 많아 늙었기 때문에 왕에게 아무 도움이 안됩니다" 하면서 자기 아들을 천거하잖아요.
그리고 다윗은 왕궁으로 가서 이스라엘 역대 왕들 중에 최고의 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부름을 받기 직전에 솔로몬을 앉혀 놓고 마지막 유언을 해요. 유언은 정말 중요한 것을 토해놓는 순간이잖아요.
여러 유언의 내용 중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가 하면, "솔로몬아, 바르실레의 집안을 기억하라" 자기 인생에
가장 절망적인 그 순간에 이 바르실래는 소비와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함께 온갖 음식들을 준비해 가지고 왔어요.
압살롬 쪽에 가담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한 그 상황에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누구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가를
제대로 간파하고 있었던 이 세 사람은 다윗 편에 서서 그 마지막까지 다윗의 손을 붙잡아 준 것입니다.
이게 다윗이 죽으면서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바르실레예요.
바르실레를 기억한다는 것은 누구를 동시에 기억한다는 겁니까? 소비와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도 기억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던지고 싶은 도전은 여러분들의 삶을 시바가 걸어갔던 그 길로 몰아 가시면 안 됩니다.
마길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줬던 사무엘하 9장과 사무엘하 17장에서 마길이 보여주고 있는 공통된 모습이 뭡니까?
"므비보셋을 도왔다", "다윗을 도왔다" 그것도 '쿠데타를 당해서 이제 완전 다 꺾여버린 다윗을 도왔다'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9장에서나 17장에서나
도와줘 봐야 자기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어지지 않는 그 사람을 껴안고 섬기고 사랑하고 안았던것입니다.
이 마길이 보여주는 아낌없이 쏟아붓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을 통하여 계속해서 이어져 갔다라고 하는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 부분이 우리 주안장로교회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그리고 모든 가족들 마음에
이 주일 오후에 깊이, '나도 마길이 걸아갔던 그 길로 걸어가리라'고 하는
이런 복된 다짐들이 새겨지는 그런 오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역기능 가정 출신입니다.
아버지가 한평생 놀음 하고, 알콜 중독으로 사시다가 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사실 때, 뭐 언어폭력, 물리적인 폭력, 우리 누님들 형님 저 무차별적으로 당하면서 살았고,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한테 참 많이 맞았고.. 그러니까, 우리 가족들의 삶이 너무너무 고단해요.
중간에 다들 예수 믿고, 예수님도 잘 섬기고 그러지만은
인생 자체가 잘 풀리거나 회복되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배우지도 못했고 뭔가를 해보려고 하더라도
여러분, 그 극심한 폭력 속에 자란 사람은 의지를 발동시켜 가지고 뭔가를 해 볼 수가 없어요.
우리 누님들 인생, 형님 인생, 어머니 인생이 허무하게 그냥 계속 한평생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 집안에 2남 3녀 중에 제가 막내인데, 저도 뭐 그런 역기능 가정 속에서 자란 아이니까,
초등학교 때 물건 훔치고, 프로스펙스 나이키 이런 거 훔치러 다니고
테니스 가방 들고 들어가서 초콜렛 300개 훔쳐 나오다가 경찰서에 끌려가고, 그런 일들이 제 삶에 많았었지요.
우리 형님은 중학교 2학년 때 가출해 가지고 한평생을 폭력배로 사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안이 다 그렇게 돼 버립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 형님 뒤를 따라서 막 그렇게 사니까 깡패 형님도 지 동생은 그렇게 사는 거 별로 원치 않았던 것 같아요.
도둑질하다가 걸린 저를 동네 우물가로 가서 발가벗겨 놓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가지고
제 몸에 물을 다 부은 다음에 전깃줄 같은 것으로 얼마나 저를 두들겨 팼는지 몰라요..
그리고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저의 인생을 바꿔버린 말이 우리 형님 입에서 터져 나왔는데,
그게 뭔가 하니까 '너, 이 새끼 이번 주부터 교회 안 가면 때려 죽인다'는 거예요.
아니, 지도 안 가는 교회를 왜 나보고 가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제가 교회가 뭔지 여러분 어떻게 알아요.
그냥 형님의 협박이 무서워 가지고 그렇게 교회를 갔어요.
여러분, 제가 누군가 하면 전 세계 최초로 불신자에게 전도 받아서 목사 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교회를 가니까 저 같은 아이가 교회를 오니까 처음에는 새가족 왔다고 이렇게 환영을 많이 해주시는데
입은 거칠지요, 옷에는 아버지가 방에서 담배 피셔가지고, 담배 냄새가 다 몸에 배어 있지요.
얼굴은 까맣지요, 빼빼 마른 애가 신앙도 없는 애가 계속 매주 교회를 오니까
교회 어른들이 그런 말은 안 하는데, 여러분 역기능 가정 애들은, 눈치가요 극단적으로 발달했어요.
이 분위기가 "너는 우리 교회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 너 때문에 애들이 안 좋은 영향 받을 것 같애"
이런 역력한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 갈 때마다 상처를 받는 거예요. 교회 갈 때마다 서러운 거예요.
그런데 교회 안 가면 형님한테 맞아 죽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주일학교 졸업하고, 아무 믿음도 없이 중학교 3학년 통과했지요.
그리고 고등부에 올라가는데,
그때 고1 고2 고3 동안 저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제 평생에 선생님이 되어 주신 우리 이정애 선생님을 만났어요.
우리 선생님 만났는데, 처음 보던 날부터 오시드만 저를 이렇게 탁 안으시더만 제 눈을 이렇게 탁 쳐다보십니다.
"관성아, 선생님이 사람 좀 볼 줄 아는데, 니는 애가 벌써 눈빛이 다르다.
너는 앞으로 커서 엄청난 인물이 될 것 같다." 이러시는데,
저같이 상처 많은 역기능 가정 애들은 그런 말 듣는다고 쉽게 마음을 안 줍니다.
'와! 이 아줌마 바래이. 이런 식으로 얼라들 마음을 빼앗아 가지고 계속해서 교회 오게 만들라고 하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선생님은 그 다음 주도 그 다음 주도 교회에 가면 안아 주시고, 두들겨 주시고,
'선생님이 사람 좀 볼 줄 아는데, 관성아 너는 앞으로 커서 엄청나게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선생님 말이 맞나, 안 맞나 보라'
계속해서 그렇게 배려 받고 존중 받다 보니까 그게 굉장히 제 마음 안에서 어색하고 간지러우면서도 그게 좋은 거예요.
저도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고 배려 받고 싶은 갈망들이 저 가운데 있었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선생님이 이 보통 선생님이 아니에요. 이 보통 여자가 아니에요. 저의 삶의 환경과 조건이 어떤지 다 파악하고 계신 거예요.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등록금 늦게 내면 교무실에서 중앙방송 때리잖아요.
'3학년 1반, 3학년 7반 누구, 등록금 안 낸 놈들 빨리 교무실로 와'
가면 뭐 교무 주임이 조인트 까고 '이 새끼들 언제까지 등록금 낼 거야?'
지금 생각하면 이거는 교육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모멸감을 확 당하면서
그런데, 엄마 아빠가 돈 안 주는데 제가 무슨 수로 등록금을 마련해 가지고 제때 돈을 낼 수 있어요.. 낼 수가 없잖아요..
우리 선생님이 저의 그런 상황을 다 파악하고 '관성아, 오늘 분반 공부 끝나면 학생회의실에서 선생님 좀 만나고 가라'
그때 우리 선생님은, 제가 그때 인상이나 분위기가 고등학교 졸업 안 하고 공부 때려치울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던 거 같애요.
"관성아, 공부 끝까지 해야 된대이" 하면서 우리 선생님이 봉투를 3개 꺼내더라고요.
하나는 등록금, 하나는 학용품 사라고, 좋은 샤프도 지우개도 연필도 필요하잖아. 공책도 사고,
그리고 또 봉투 하나는 친구들하고 지내는데 용돈이 있어야 되잖아. 떡볶이도 사 먹고 친구들하고 놀러도 가야 되고...
우리 선생님이요. 고1 고2 고3 모든 학기 동안 한 번도 그걸 놓친 적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 선생님이 저를 배려해 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그 사랑에
저도 모르게 사람에 대한 의심 이런 것들이 다 녹아지기 시작을 하고
우리 선생님이 나에게 가르쳐주는 어떤 내용이라면 이거는 정말로 사실 아니겠는가,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에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가 회심한 케이스가 아니고
우리 선생님하고 성경 공부하다가 제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케이스입니다.
선생님은 정말로 특별하게 그렇게 계속해서 저를 안아서 저의 고등학교 시절을 다 통과하게 하셨어요.
한 번은 선생님이 그렇게 저를 사랑해 주시니까.. 저같이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도 없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한테 어떤 이야기도 다 할 수 있는 용기가 좀 생깁니다.
"선생님, 제가 예수님도 믿고 새 사람 됐지만은 여학생이 좋은 거 왜 그거는 해결이 안 돼요?" 그렇게 질문을 했어요.
하니깐 보통 선생님들은 '관성아, 교회는 연애하는데 아이데이. 기도하면서 그런 마음 가라앉혀라'
이렇게 보통 선생님들이 이야기할 때인데,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돼요. 그렇지요. 기도한다고 좋아하는 마음이 가라앉습니까?
그런데 우리 선생님은 저보고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하면, '관성아, 선생님이 여자애들 마음 빼앗는데 도사잖아..
다음 주일에 교회 올 때, 니가 좋아하는 혜정이한테 보내는 편지 한 통 써 와라. 그럼 선생님이 그 문장 다 다듬어 줄께.'
그래서 분반 공부 끝나고, 우리 선생님하고 학생회의실에 앉아 가지고 제가 경상도 남자잖아요.
초반부터 얼마나 어그레시브합니까? 공격적으로 들어가잖아요. '사랑하는 혜정아' 하니까,
우리 선생님이 '야~ 야~ 이러면 여자애들 기절한다.' 그거 다 지워서 여자애들이 봤을 때 좋은 내용들로 편지를 다 고쳐주십니다.
'이거 이쁜 편지지 사가지고 다 새로 옮겨 적고,
선생님이 혜정이 동선 다 파악했다. 울산시 우정동 우체국 거기 혜정이 6시에 94번 버스 거기 내린다.'
"관성아, 거기 내렸다가 혜정이 기다렸다가 이 편지 줘라"
선생님 시키는 대로 탁 해 가지고 그 혜정이한테 편지 줬던 날 지금도 기억에 생생해요.
혜정이한테 그 편지 줬는데, 혜정이는 지금 딴 사람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저하고는 안 이루어졌는데,
우리 선생님이 저를 배려해 주시는 저의 시선으로 내려와서 저를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셨던 그 사랑들 잊을 수가 없죠
제가 예수 믿고 그 감격이 너무 커서 내 인생을 예수님 위해서 드리겠다고 해서
목사 되겠다고 서원을 하고, 우리 대전 침례신학대학에 합격해서 가는데, 제가 선생님 품에서 고1 고2 고3을 보냈잖아요.
학교로 가는 날, 선생님이 교회에서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갔더니, 우리 선생님이 저의 신학교 그 공부 상황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훤히 보이셨던 것 같아요. 오랫동안 돈을 모으셨더라고요. 먼저 돈을 주시더라요. 가서 굶거나, 책 사 보는 데 어려움 없이 좋은 목사님 되라고 저를 이렇게 격려해 주셨어요.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저의 손을 놓고 신학대학으로 보내는 그날, 우리 선생님이 그때 저보고 그래요.
'관성아, 선생님의 인생의 전성기가 언제 시작됐는지 너 알어?' 이러더라고요.
'선생님 솔직히 인물이 없으니까 시집가기로 결정된 날, 그날 선생님 인생의 전성기 아니냐고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시집가셔서 아들 둘 낳았을 때, 그 때가 인생이 전성기 아니예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선생님의 인생의 전성기가 언제예요?' 하니깐 우리 선생님은 그러는 거예요.
'너 관성이, 너 고등학교 1학년 때 너 만나고, 너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선생님 인생의 전성기도 시작됐어.'
제가 목사 되기 위해서 이런저런 신학 공부하고, 또 책도 읽고, 좋은 분들로부터 많은 영향들을 많이 받았지만,
우리 선생님이 제가 신학교로 떠나기 전날 저한테 해줬던 그 말 있죠.
"너 만나고 너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선생님 인생의 전성기도 시작됐다"는 그 말보다 더 감동적인 말은 내 평생에 없어요.
내 마음이 변질되려고 할 때마다 우리 선생님이 들려주신 그 마음 떠올리면서 그것을 저의 목회철학으로 삼아 살아요.
그래서 영국 유학 갔을 때도, 교회를 개척했을 때도, 다 장성한 어른이 된 그때도 우리 선생님은 저의 손을 놓은 적이 없었어요.
뭐 어떻게 하다가, 방송에 그 '새롭게 하소서'라고 하는 방송에 나가게 됐는데, 선생님 이름 한번 불러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정애 선생님!" 부르니까 울산방송국하고 연결이 돼 있더라고요.
그때 정혜리 아나운서인가, 우리 선생님 보고 "선생님, 우리 김 목사님 어렸을 때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하니까
야! 우리 이 할매가요 방송을 알아요. 저를 거의 사도 바울 급으로 끌어올려 버리더라고...
"어릴 때부터 애가 눈빛이 벌써 다르고..." 막~~
그래서 "김 목사님 어디가 그렇게 이뻤냐"고 하니까,
"나에게는 친아들이 둘 있는데, 우리 친아들보다 나는 김 목사님을 더 사랑합니다."
여러분, 오해 없이 들으십시오. 저는 저의 인생을 진지하게 이렇게 한번 뒤돌아봤을 때, 좋은 부모님을 만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뭐 하버드 대학교의 데이터라고 하던데,
"부모 두 사람이 자기의 역할을 자녀들에게 전혀 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인생에서 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 줬던 한 사람만 있으면 이 사람은 어그러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에게 우리 선생님이 그런 분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선생님 만나지 못했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
우리 선생님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강단에 서서 하나님 편을 드는 목사가 되어서 이렇게 저는 살고 있는 거예요.
코로나가 오기 전에 우리 고향 교회 70주년 부흥회가 열렸어요.
요즘은 강사님들이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강사가 다 다르더라고요.
제가 마지막 날 강사였는데, 우리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께 여쭙고 싶습니다.
오리지날 강사는 몇째 날 강사입니까? 마지막 날이잖아요. 피날레를 찍어야 되잖아요.
제가 부흥회 마지막 날, 우리 고향 교회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만감이 교차하는 거예요.
우리 선생님이 저를 처음 만났을 때가 45살인가 그랬는데,
할머니가 돼 가지고, 예배당 정중앙에 이렇게 우리 선생님 앉아 계시더라고요.
설교를 하는데 막 너무 힘든 거예요. 자꾸 눈물이 나서...
설교를 다 하고, 이제 강단을 내려가서 뭐 우리 어렸을 때부터 모교회이니까... 안고 허깅하고 하는데,
그 사람들을 뚫고 우리 선생님이 이렇게 오시더라고요. 오시면서 저를 안아요.. "김 목사님, 이쁘게 자라줘서 고맙다!"고..
우리 선생님이 제 품에 안겨서 막 우시더라고요.
우리 선생님이 저한테 그 말씀 하셔야 될 게 아니라 내가 우리 선생님한테 그 말씀을 드려야 되는데요...
'윌라 캐더'의 소설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라고 하는 그 책에 보면, 그런 문장이 나와요.
"위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
저는 저의 목회 철학을 다른 어떤 사람으로부터 배우지 않았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저 같은 사람을 섬겨주시고 사랑해 주신 것...
마길이 므비보셋이나 쿠데타를 당해 가지고 다 어그러져 있었던 그 다윗을 아무 조건 없이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그렇게 섬기고 사랑해줬던 그 사랑 가운데 위대한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 선생님이 저에게 부어주신 그 사랑 때문에 제가 여기 있어서 주안장로교회까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잖아요.
목회할 때도, 늘 선생님이 저에게 보여주셨던 그 모습대로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이렇게 목회를 해 보면 그 교회 담임목사님과 교회 권속들이요. 시간이 지나면 좀 닮아 있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주안장로교회는 좋은 교회입니까? 안 좋은 교회입니까? 당연히 좋은 교회지요.
담임 목사님을 여러분들이 닮아 있으면, 여러분들의 수준이 상당하신 분들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를 하니까, 꼭 나 같은 인간들만 교회로 오더라고요. 상처 많고, 한 많고, 가난하고...
하~ 처음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막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목사로서 그런 기도를 하면 안 되는데, 그때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를 드렸던 것 같아요.
"하나님, 우리 교회도 정상 좀 보내 주세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어요.
그런데 한 번은 해군 장교로 갔다가 돈을 3천만 원 모아 가지고 제대를 해 가지고 '스타트업'을 했는데
핸드폰 앱 만드는 회사를 하다 얘가 쫄딱 망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다녔던 통합측의 큰 교회 청년회 회장 출신인데, 자기 교회는 부끄러워 가지고 이제 가지를 못하고,
검색을 하다가 어떻게 목사님을 알게 되고, 우리 교회에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이때까지 왔던 이야기를 쭉 다 하는데, 기도하는 목회자에게는 어떤 느낌, 어떤 촉이 있잖아요.
얘는 그냥 내버려두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 같이 애가 너무 절망적인 거예요. 얘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니는, 이번 주 주일부터 교회 올 게 아니라 내일부터 무조건 교회 매일 와라.'
그 청년의 이름이 선재인데, 이 선재를 데리고 저는 목회를 했어요.
아침 점심 저녁을 같이 먹었어요. 전도사도 아닌데 그냥 졸지에 저의 아내요 저의 전도사님이 돼 버렸어요.
그냥 얘하고 같이 그냥 하루 종일 같이 데꼬 사는 거예요. 딴 생각 못하도록, 용돈 주고, 밥 사 먹이고,
뭐 중간에 노가다도 하고, 이런 거 저런 거 시키면서 항상 저의 그늘 안에서 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얘가 중간에 뭐 이런 거 저런 걸 시도하는데,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더라고요.
우리 선재는 뭐 하는 것마다 다 안 돼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인생도 있나 싶을 만큼 인생이 안 풀려요.
한번은 얘가 '목사님 한샘 인테리어에서 8주 훈련만 받으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데
저 그거 한번 해봐도 될까요?'
"선재야, 뭐라도 좋다. 해 봐라" 그래서 선재가 그걸 시작을 했는데, 아니나 달라 3주 하드만 못하겠다는 거예요.
'에라이 역시 안 되는 놈은 안 되는구나. 근데 도대체 왜 3주밖에 못 하냐?' 하니까 차비가 없다는 거예요.
요즘 세상에 차비 없어 가지고 회사 못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우리 전도사님 시켜서 확인해 보니까, 진짜 차비가 없는 거예요.
저 실망 안 시킬라고 3주 동안 버스 타고 갔다가 점심 굶고, 저녁에는 차비 아낄라고 3시간 걸어서 집에 오고,
3주 동안 그러다가 진짜 돈이 없는 거예요. 진짜 집이 완전히 쫄딱 망해 가지고 10원 한 푼도 없는 거예요.
얘가 어려워도 이만큼 어려웠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 교회는 개척교회라 누가 돈 있는 사람이 없어요.
'누가 돈이 있지~' 막 생각을 해보니까 우리 집사람이 생각나요.
우리 아들 딸 그 교육 보험 뭐 이런 거 하나 들어놨다는 이야기를 제가 살짝 들었거든요.
'여보, 일로 와봐라. 빨리 보험 깨라' 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여보, 이거는 정말 건들지 마라. 지호 지은이 꺼는 제발 건들지 마라'
'내 성질 모르나? 빨리 그거 깨라' 아니 그러니까 '여보, 이거는 건들지 마라'
'에헤이~ 빨리 그거 깨라' 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전화하더만 해약해 가지고 가져가라고 돈을 200만 원인가 주더라고요.
그 돈 가지고 선재를 목양실로 불렀습니다.
"선재야, 너 여기서 멈춰 버리면, 너는 끝난다. 목사님은 너 잘되는 거 원치 않아.
그런데 8주 하기로 했으면 8주까지는 한번 해 봐라. 목사님이 돈 구해 왔다" 하니까
'목사님, 나 그 돈 못 받아요.' 그러더라고요.
'너, 이 돈 안 받으면 너는 목사님하고 끝이야. 무조건 돈 받아.' 우격다짐으로 집어 넣었습니다.
선재가 이 돈 받아 가면서도 막 울더라고요.
'야, 울지 마라. 그냥 8주만 해라, 8주만...'
그리고 선재가 돌아가서 8주 한샘 인테리어 훈련을 하고, 목동 지점에 처음 배치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10년 15년 시작한 사람보다 첫째 달, 둘째 달, 셋째 달... 실적이 더 좋은 거예요.
기본급 150만 원 주고, 실적 올리는 것에 따라서 월급이 늘어나는 구조인데 이 일을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뭔가가 잘되면 기쁘기보다도 불안해요. 언제 또 고꾸라질까, 아! 저거 저거 안 되는데...
지켜보고 있는 저의 마음 지금이 불안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 선재가 멈추지를 않습니다.
쭉 쭉쭉 뻗어가는데, 그 일을 시작한 그해 우리 선재의 연봉이 1억입니다. 1억 그 다음에 2억,
지금은 뭐 직원 거느리고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한번은 그렇게 돈을 쭉쭉 잘 벌더만, '목사님, 오늘 저하고 식사 좀 합시다.' 전화가 온 거예요.
그 말이 여러분, 왜 그렇게 웃겨요 이때까지 밥을 100번 먹으면 100번 다 내가 다 사고, 용돈 주고 했던 거지였는데,
'목사님 우리 교회 옆에 소들녘, 제일 비싼 식당, 저녁에 6시까지 오세요.'
가니까, 선재가 이미 좋은 고기 시켜놓고 고기 굽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앉아 가지고 좋은 날이잖아요. 이렇게 먹는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이렇게 좀 디프레션 돼있어요.
선재를 보니까, 선재가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습니다. 목사님 고기 사줄 수 있는 형편 됐다 이거죠.
하, 우리 경상도 사람, 그런 어색한 거 못 견디거든요..
뭐, 사모님 목사님 앞으로 나오래 가지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우리 이런 거 죽기보다 힘들어요.
그런데 그 어색한 분위기, 우리 선재가 울면서 고기를 굽는데 아~ 이게 막 어색한 거예요. 빨리 밥을 먹었어요.
'선재야, 너 잘 되니깐 참 목사님 좋다. 열심히 해' 하고 갔어요.
갔더니, 선재가 그 음식값을 계산하고 저의 뒤를 뛰어오더라고요.
'목사님' 하고 뛰어오더만, 저의 호주머니에 봉투를 하나 딱 집어넣고 휙 도망을 가더라고요.
제가 사례비를 많이 받아봐서 저는 딱 잡으면 얼마인 줄 알아요.
딱 잡으니까, 이거는 세종대왕이야.. 이거 신사임당이면 이거 절단날 액수예요.
그런데 점잖은 목사님들은 다 집에 가서 열어보는데, 저는 점잖지 않잖아요. 그 자리에서 열어봤는데 신사임당이야,
그래서 너무 놀래가지고 선재한테 전화했어요. '야, 이제 돈 좀 버는 녀석이 뭔 이렇게 큰 돈을 목사님한테 주냐?' 하니까,
얘가 말이 없어.. 그래서 가만히 들어보니깐 수화기 너머에서 선재가 울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얘가 자기 감정을 이렇게 좀 다스리더만, "목사님, 목사님 만나고 내 삶에도 꿈과 비전이 생겼어요." 그러더라고요.
'야, 우리 교회는 꿈과 비전이 없는 교회인데, 니가 조직을 배신하냐?' 이러니까, '목사님, 그런 게 아니고,
저의 남은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돈 벌어서 목사님 집 사 드리는 겁니다.' 이러고 얘가 막 우는 거예요.
그날이 제가 행신교회를 개척하고 목회의 별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제일 행복하고, 성도인 우리 선재와 저의 마음이 만났던 날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랑하고, 이렇게 성도가 받은 사랑 마음에 담아서 또 그렇게 나를 사랑해 주는......
이게 우리 선생님이 저를 섬겨줬던 사랑해 줬던 방식이어서 그거 그냥 흉내 내다 보니깐 선재와 같은 열매가 나타난 거예요..
주안장로교회 가족 여러분,
혹시 소식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행신침례교회에는 7년 동안 교회가 많이 잘 성장을 했습니다.
성장하고, 제가 코로나 시기에 부사역자들을 분립 개척 내보내려고 하니까 걱정이 돼가지고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으니까 담임목사인 내가 개척 나가겠다.
그런데 수도권에 개척하면, 우리 행신교회 가족들이 또 다 따라나올 것 같아서, 울산으로 개척 나가겠다고 제가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파를 지금 수습을 하고 있어요. 다들 슬퍼서.. "우리 부목사님 잘 세워서, 장로님들 권사님들 잘 세워 주십시오"
부탁하고 있는데, 하루는 선재가 그 소식을 듣고 밤늦게 목양실에 왔더라고요.
"목사님, 집사람하고 결정했습니다."
"뭐 결정했는데?"
"울산으로 이사 갑니다. 제가 울산 가야지 목사님의 목회 스토리가 완성됩니다."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워요.. 따라오지 못하게 하려고 울산으로 간다고 선언해 버렸는데,
선재하고 그날, 하! 목양실에서 부둥켜 안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고마워서...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고마워서...
설교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주안장로교회 가족 여러분,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십시오!
예수 님는 이 신앙의 본질은 신앙의 어떤 거대담론을 자기의 신앙의 목표로 설정해서 달려가는 길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의 옆에 있는 그 누구, 한숨 쉬고 눈물 흘리고,
아무리 열심히 사는데도 불구하고 인생이 뒤집어지지 않아서 머리 뜯고 괴로워하고 한숨 쉬고 있는 그 어떤 사람,
여러분의 인생을 통과하여 들어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밑 빠진 독에 계속해서 물을 부으십시오!
그냥, 한 두번 돕는데서 그 사람 회복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물을 부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오늘 마길이 므비보셋에게 다윗에게 보여준 하나님 백성이 걸어가는 삶입니다.
이 도전들이, 이 오후 시간에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녹아져서
주안장로교회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다른 여러가지 것들도 잘 감당하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에 있어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그런 교회로 주안장로교회가 우뚝 서는,
그런 위대한 역사가 나타나게 되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