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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이대용(전 베트남 주재 한국 공사)씨 별세
▲이대용(전 베트남 주재 한국 공사)씨 별세
2017.11. 14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17일,
마지막 주월 공사’ 이대용 예비역 준장 별세
베트남 남았다가 5년간 고초, 6·25 때 압록강에 처음 도착, 수통에 물 담아 이승만에 전달
‘마지막 주월(駐越) 공사’로 불리는 이대용 예비역 육군 준장이 지난 14일 밤 별세했다. 92세.
이 전 공사는 1975년 4월 30일 월남(남베트남)이 패망할 당시 주월대사관 경제공사로 근무했다. 철수본부장을 맡았던 이 전 공사는 서병호·안희완 영사와 함께 한 명의 교민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끝까지 사이공(현 호찌민)에 남았다가 월맹군에 체포됐다.
이후 악명 높은 사이공의 치화 형무소에 수감돼 5년간 모진 고초를 겪었다. 독방에서 10개월 동안 햇볕 한번 못 보고 지냈는가 하면 체중은 42㎏으로 줄었다.
베트남 당국자들과 북한 공작 요원이 귀순 및 월북 등을 회유했지만 ‘죽으면 죽었지 항복할 수 없다’는 의지로 끝까지 거부했다. 정부는 이 전 공사 석방을 위해 북한 및 베트남과 협상에 나서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이 전 공사는 1980년 4월 12일 석방돼 귀국했다.
황해도 금천 출신인 이 전 공사는 8·15 광복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반동으로 물려 월남했다. 육사 7기로 임관한 그는 6·25전쟁에 참전해 1950년 10월 26일 6사단 7연대 1중대장으로 국군 가운데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착했다.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일화로 유명하다. 6·25전쟁 초기에는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사흘 동안 저지한 춘천 전투에 참가했다.
베트남과는 1963년 주월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면서 인연을 맺었다. 예편한 뒤에는 화재보험협회 이사장, 생명보험협회 회장, 한·베트남 친선협회 회장, 육사 총동창회장 등을 지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이고, 발인은 17일 오전 8시 30분이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02)2258-5940
6·25와 베트남전 死線 넘은 장군
이대용 전 駐베트남 공사
교민 구출 후 5년간 포로로 고초… 6·25 첫 승전 '춘천전투' 이끌어
'마지막 주월(駐越) 공사' 이대용(92·사진) 예비역 육군 준장이 지난 1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1975년 4월 30일 월남(남베트남)이 패망할 당시 현지 한국 대사관 공사였던 그는 미국 측의 탈출 제의를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160여명의 교민 구출 작전을 완수했다. 월남 패망 이틀 전 대사관이 폐쇄됐으나, 탈출 못 한 잔류 교민들을 데리고 프랑스 정부에서 운영하는 병원(치외법권 지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월맹(북베트남)군에 잡혀 5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
이 전 공사는 사형수로 수감돼 고초를 겪으며 78㎏이던 체중이 42㎏까지 줄었다. 북한 공작 요원이 파견돼 직접 심문을 하고 '북한 망명 자술서'를 강요하는 등 그를 북으로 데려가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귀순 회유가 이어졌으나 끝까지 버텨냈다.
이 전 공사가 1980년 4월 12일 석방돼 귀국하자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교민을 최후까지 지켜냈고 감옥에서도 지조를 지킨 영웅"이라고 치하했다고 한다. 포로 시절 자신을 혹독하게 심문한 즈엉 징 톡이 평양 주재 베트남 대사를 한 뒤 2002년 주한 베트남 대사로 부임하자 이 전 공사는 그와 화해했다. 그 뒤로 친구처럼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됐다. 즈엉 전 대사는 이 전 공사에게 "심문받던 당시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고 말하던 장군님의 선견지명에 놀랐다"며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황해도 금천 출신인 이 전 공사는 광복 후 고향의 인민학교(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김구와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가르쳤다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렸다. 그는 고향에 아버지를 두고 월남해야 했다. 육군사관학교 7기 졸업생인 이 전 공사는 1950년 6·25전쟁 당시 6사단 7연대 소속 1중대장으로 참전, 한국군의 첫 승전으로 기록된 '춘천 전투'를 이끌었다. 6사단 7연대 1중대는 그해 10월 26일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착해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은 부대다.
이 전 공사는 1960년 미 육군 참모대를 졸업했고, 1963년부터 4년간 남베트남에서 한국 대사관 무관을 지내며 베트남과 인연을 맺었다. 공직을 마친 뒤엔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 한국생명보험협회장, 육사 총동창회장 등을 지냈다. 2006년엔 '자랑스러운 육사인상'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발인은 17일 오전 8시 30분,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02)2258-5940.
베트남 교민사의 산 증인, 이순흥 전 호치민 교민회장
사이공 함락때 철수 못해 6년간 억류생활... 한-베 가교역할 맡아
이순흥회장은 베트남 한인사회의 산 역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1968년 베트남에서 고철과 비철 등 자재를 해외로 수출하는 회사를 설립하면서 베트남 생활을 시작한 이순흥회장은 1975년 4월30일 사이공(현재의 호치민) 함락을 현지에서 맞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사이공에 있는 공관원과 교민들의 철수를 돕다가 미군의 마지막 헬리콥터를 놓쳐버렸다.그후 그는 81년까지 결코 의도하지 않은 베트남 억류생활을 하게 된다.그는 미처 철수하지 못한 우리교민 150명의 대표가 됐다. 이후 억류 생활 6년을 교민회장으로 지내며, 교민들의 단계적 철수와 이대용 공사 등 억류된 우리 공관원 8명의 뒷바라지를 하게 된다.이 시기의 일은 이대용 공사가 나중에 쓴 책 등으로 세상에 널리 소개된다.
1981년 교민중 마지막으로 베트남에서 출국을 허락받은 그는 한-베트남 수교후인 1994년 다시 베트남으로 건너가 비즈니스를 재개했다.트레이딩 에이전트와 부동산 투자 컨설팅이 주된 비즈니스였다고 한다.
“사이공 함락 전에도 10만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사이공에 살았습니다. 국교 재개후 지금 호치민에도 8만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다시 찾아와 비즈니스를 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한국인들에게 다시 기회의 땅이 되었습니다.”
이회장의 아들 내외가 베트남 투데이라는 경제지를 발행해온 것도 베트남의 비즈니스 기회를 알리기 위함이었다.이회장은 호치민에 다시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한인회장을 맡아 한인들의 정착을 도왔고, 월드옥타 호치민지회장도 맡아 비즈니스 기회를 찾도록 돕는 일도 계속해왔다.
”이렇게 말하는 이회장은 베트남 한인사회의 현안으로 비자문제를 든다.
“베트남은 투자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3개월짜리 비자를 주고, 한번만 연장할 수 있도록 합니다. 비자를 연장하는데도 1인당 135불의 비용이 들고, 6개월이 되면 가까운 캄보디아 등 해외로 나갔다 와야 합니다. 현재 호치민에서 거주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베트남 교민들의 안정적인 정착과 생활을 위해 우리 정부가 베트남 정부와 깊이 있는 교섭과 논의를 해야 한다는 게 이회장의 주장이다.
“직업 외교관이 아닌 베트남 거주 민간인을 박근혜 정부가 베트남 대사로 임명했습니다. 교민의 한사람으로서 대단히 반가운 일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이렇게 소개하는 그는 박근혜 정부의 이 같은 결정이 베트남 시장의 중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대사로 부임해 현지 실정을 알만하다 싶으면 이임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앞으로 이처럼 현지를 잘 아는 교민 출신이 공관 책임자가 되는 경사가 자주 일어났으면 합니다.”베트남 교민사의 산 역사인 이순흥 회장이 당부하는 말이다.
하이탑 장군과의 영원한 작별 이대용
◆ 담배 가루를 덧바른 '해초(海草) 인간'
1976년 9월 9일 아침, 이날은 목요일인데도 수압이 낮아 A동 4층 물탱크에 물이 없었다. 간수의 지시에 따라 하이탑 장군과 나는 경비원 옹바오의 경비 하에 양손에 물통을 두개씩 들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 3층 복도 중간에 있는 물탱크에서 물을 길어 올라오고 있었다.
베트남 치화 형무소 수감 당시 이대용 전 주월공사
두 손에 든 물통의 무게는 각각 13킬로그램 정도였는데, 병들고 허약해진 나는 비틀거리며 계단을 하나하나 힘겹게 올라갔다. 그런데 중간을 채 못 올라가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휘청하더니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물통의 물은 좌악 좌르르 소리와 함께 계단을 씻으며 흘러 내려갔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두 명의 간수가 물벼락을 피해 물러서더니, 좀 있다가 나를 바라보며 나무랐다.
“왜 미련하게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가지고 가는 거야. 물을 반쯤 담아가면 이런 일이 없잖아.”
나는 일어나서 피가 흐르는 왼쪽 팔꿈치를 오른 손바닥으로 눌러 지혈을 시도한 후, 내동댕이쳐진 빈 물통을 주워들고 물탱크로 되돌아가서 물을 3분의 2쯤 채워 방으로 올라갔다. 수감자들은 몸에 상처를 입어도 바를 약이 없었다. 나는 담배가루를 상처에 발랐다. 허약해지고 병든 몸이지만 손톱은 자라고 있었다. 손톱 깎기나 가위가 없어서 A동 수감자들은 콘크리트 바닥에 손톱을 갈아야 했다. 콘크리트 바닥이 깨지고 울퉁불퉁해서, 어떤 때는 손톱 옆의 살점이 뜯어져 나가면서 피가 흐를 때가 있었다. 이럴 때는 으레 상처에 담배가루를 발랐다.
나는 상처가 심한 왼쪽 팔꿈치를 오른 손으로 누르고 어둠침침한 감방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겼다. 정신력 하나만은 옥외(獄外)에 있을 때나, 옥중에 있을 때나 확고하고 건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양실조로 근육의 힘은 옥외에 있을 때에 비해 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 살이 너무 빠져서 옥외에서 입던 러닝셔츠를 입으면 헐렁하여 셔츠가 비쩍 마른 정강이 아랫부분까지 내려가 덮었다.
영양실조가 극심해서 어느 한계를 넘으면, 사람은 걷지도 못하고 앉거나 누운 자리에서 손만을 허우적거리게 된다고 하이탑 장군은 말해주었다. 체중이 몇 킬로그램까지 내려가면 그런 해초(海草) 인간이 될 것인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낮은 가고 밤이 되었다. 해초 인간이 안 되려면 무엇인가 음식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돼지죽이라도 좋고, 풀잎이나 나무뿌리도 좋으니 한번 배불리 먹고 싶었다. 풀죽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를 생각했다.
◆ 리어카 위 엿판의 누런 엿가락, 큰 어머니가 건네 준 후회의 '검은 엿'
나는 서울 노량진동 236번지 주택단지 입구 길가에 서있는 엿장수 리어카 위의 엿판에 있는 누런 엿가락 생각을 했다. 그 엿 한두 가락을 먹어보면 얼마나 좋고 행복할까. 어렸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42년 전 음력 명절때 였다. 나는 같은 마을에 있는 둘째 큰집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고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한 달이 좀 더 되었을 때다. 큰 어머니는 내 또래의 자기 외손자도 따돌리고 나만을 부르셨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큰 어머니가 “에이 불쌍한거. 이 어린 것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하며 눈물을 닦으시더니, 검은 엿을 주시며 먹으라고 하셨다.
보통학교 2학년이었던 어린 나는 검은 엿은 맛이 없어 안 먹겠다며 깨강정을 달라고 했다. 큰 어머니는 “에끼, 이 녀석! 이 엿이 얼마나 맛이 있는데 싫다고 그래”하고 어이없어 하시면서 방으로 들어가서 깨강정을 들고 나와 철부지 조카에게 주셨다. 참으로 오래된 옛 일이지만, 그때의 일이 선명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그 맛있는 검은 엿을 그때 왜 안 먹었을까. 나는 군침을 삼키며 후회하였다.
나의 확고한 사생관·인생관·국가관·철석같이 굳은 의지와는 달리, 영양부족으로 힘이 부쳐 계단에서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한 경비원 옹바오가 9월 13일 아침 8시경 우리 감방 철문 밖에서 철판으로 된 손바닥보다 약간 큰 쪽 문을 째까닥 하고 젖혀 열더니, 주위를 살핀 후 신문지에 싼 계란 크기의 뭉치를 방안으로 얼른 던졌다.
나와 하이탑 장군은 신문지로 겹겹이 싼 그 뭉치를 펴보았다. 그 안에는 거무튀튀한 굵은 소금이 들어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휘청거리는 깡마른 나와 하이탑 장군을 보기가 딱해서 반찬으로 먹으라고 가져온 소금이었다. 나와 하이탑 장군은 경비원 옹바오의 고마운 마음씨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옹바오는 우리두수 감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리를 끄덕이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소금이 얼마나 맛있고 귀중한 반찬인가를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나와 하이탑 장군은 우선 소금을 두 알씩 맛보고, 그날 아침부터 격일로 매끼 다섯 알씩 아껴 먹었다.
연금 상태에 있다가 정식으로 체포되어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1975년 10월 3일 이후, 나와 우리 정부와의 연락은 단절되어 있었다. 우리 정부는 각종 외교경로를 통해 우방국, 중립국으로 하여금 내 거처와 생사여부를 알아보았으나, 베트남 공산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여 정부와 가족들을 애타게 했다. 7월 22일 사이공주재 프랑스 총영사에게 쓴 편지도 치화형무소에 압수된 채, 영영 프랑스 총영사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먼 훗날에 알았다.
◆ 떠나간 하이탑 장군, 외로움의 나날이 다시 시작되다
상황이 절망적으로 돌아가던 중, 1976년 9월 24일 오후 3시경 A동 구 대장이 경비원 두 명을 대동하고 와서 감방문을 열면서 나오라고 했다. 나는 긴장했다. 또 신문을 하기 위해 불러내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구 대장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많은 차입품을 담은 황색 나일론 포대 겉에는 뜻밖에도 내 이름이 영문자로 크게 쓰여 있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이순흥(李順興) 재월 한국교민 회장이었다.
나는 이순흥 교민회장이 아직도 귀국하지 않고 호치민에 남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A동 구 대장과 경비병 두 명의 호위와 도움을 받아, 차입품을 가지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차입품 일부를 구 대장 허락 하에 경비원에게 주고, 그들이 돌아간 후 하이탑 장군과 함께 오이김치, 배추김치, 돼지고기, 소시지, 쇠고기 장조림, 설탕, 오렌지, 바나나 등을 실컷 먹고, 차입 들어온 칫솔과 치약으로 이를 닦았다. 오랫동안 이를 못 닦다가 칫솔과 치약으로 이를 닦으니 날아 갈 것 같이 상쾌하였다.
이렇게 꿈 같이 황홀한 경사가 돌발적으로 있은지 4일 후인 9월 28일 아침 9시경, 약 2주전부터 하이탑 장군을 전향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하는 안닝노이찡의 경찰 대좌(大佐)가 또 왔다면서, A동 구 대장이 하이탑 장군에게 짐 보따리를 싸게 하여 데리고 갔다. 이렇게 하이탑 장군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 나는 7개월 반 동안의 감방 동료를 잃었다.
그가 떠나고 나니 대화 할 상대는 없고, 감방은 텅 빈 것 같이 썰렁했으며, 절해의 고도에 홀로 남아있는 듯한 고독을 느꼈다. 엄습해 오는 적막감을 달래기 위해 감방 한구석에서 뻥 뚫려있는 변소의 대청소를 하기도 하고, 방안을 서성거리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했으나 외로움은 가시지를 않았다. 시에스터 시간에 낮잠을 자다가 기침이 심하게 나서 눈을 뜨고 콜록 거리다가, 달게 자는 하이탑 장군의 낮잠을 혹시 방해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의 거적때기 돗자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돗자리도 사람도 보이지 않고, 썰렁한 공기만이 빈자리에 서려 있었다. 외로움 속에 앞날을 예측 할 수 없는 옥중의 세월은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 탁곡의 무리 속, 청직한 길을 걸은 구 중위
1976년 12월 20일 오전 8시경, 구 중위가 감방 문을 열어주면서 외부와 차단된 복도에 나와서 체조 및 구보를 하라고 했다. 복도는 길이가 35미터쯤, 너비는 3미터가 조금 못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좁은 감방에 1년 이상 갇혀 있는 수감자의 눈에는 넓고 큰 광장으로 보였다. 나는 여기서 맨손 체조를 하고 구보를 했다. 1년여 만에 처음 하는 구보였다. 운동시간은 약 15분간 이었으며, 운동이 끝난 후에는 복도에 연해 있는 물탱크에 가서 약 10분간 목욕을 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오후 2시경에는 구 중위가 다시 와서 감방 철문을 약 30분간 열어놓고 공기 유통이 잘 안되는 감방 안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오고 나가게 해주었다. 이러한 것들은 A동 수감자에게는 파격적인 특혜였다. 날이 가면서 특혜 구보시간은 약 30분으로 늘어났다. 이 구보와 목욕 특혜는 1977년 1월 8일까지 20일간 계속되고 끝이 났다. 그 후에는 한 달에 두 세번 불규칙적으로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1977년 3월 2일 아침에 이발을 했다. 이발사가 이발기 구통에 있는 깨진 반쪽 거울을 주면서 얼굴을 비춰보라고 했다. 실로 500여일 만에 처음 보는 내 얼굴 모습에 나도 놀랐다. 주름살이 많이 생기고 야위고 늙었으며 얼굴이 길어졌다. 상상보다도 더 못쓰게 된 초췌한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1977년 3월 16일부터 간수 구 중위가 또다시 매일 아침 복도로 나가 약 30분간 체조와 구보를 하고, 복도에 연해있는 물탱크에서 목욕 할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그러한 특혜를 주는 구 중위가 하도 고마워서 1977년 4월 어느 날, 나는 체조와 구보와 목욕을 끝내고 A동과 B동 중간에 있는 그의 간이책상 옆에 가서 내 파카 만년필 75를 그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하였다. 은혜에는 은혜로 갚겠다는 내 진심을 그에게 알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착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 할 뿐, 만년필을 사양했다.
제발 마음을 받아달라는 강요와 사양하겠다는 고집으로 약 1분간 옥신각신 하다가, 혹시라도 이런 장면을 누구에게 들키면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책상서랍을 열고 만년필을 넣은 후 서랍을 닫아버리고 쏜살같이 빠른 걸음으로 감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구 중위가 따라와서 감방 철문을 닫고 밖에서 잠근 다음, 철판 쪽문을 열고 신문지에 싸온 만년필을 감방 안으로 툭 떨어뜨리고는 미소 띤 얼굴로 가벼운 목례를 하고 돌아갔다. 나에대한 특혜 구보와 목욕이 계속되면서 20일이 지나고 있었다. 형무소에서 담배는 귀중한 약이었다. 외상을 치료할 때 뿐아니라, 걱정거리가 생겼을때나 외로울때, 허기에 시달릴때에 담배 한 대를 피우면 그렇게 좋을수가 없다. 담배는 수감자들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약이었다.
나는 아껴두었던 베트남 필터 담배 한 갑을 복도 구보와 목욕의 특혜 후, 감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구 중위가 앉아있는 책상서랍에 넣었다. 그는 또 따라와서 쪽문을 통해 담배를 돌려주었다. 나는 이것은 정성이 담긴 내 마음의 표시이며, 겨우 담배 한 갑인데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다음날 특혜목욕이 끝난 뒤 또다시 그의 책상서랍 속에 넣었다. 그는 나의 정성담긴 마음을 더이상 거절 할 수가 없다는 듯, 고맙다면서 담배 한 갑을 받았다. 그 후 또 반달이 지났다. 구 중위의 보직이 변경되어 AH동으로 떠나면서 나에 대한 특혜 구보와 목욕은 없어졌다.
떠나기 직전인 1977년 5월 11일 아침, 그가 베트남 반꼬 담배 한 갑을 감방 쪽문을 열고 나에게 주었다. 나와 헤어지면서 지난날 받은 담배를 되돌려 준 셈이다. 그의 한달 봉급은 85동이었다. 이는 공정 환율로 환산해서 약 47달러이지만, 암시세로 환산하면 겨우 5달러 70센트에 해당한다. 이러한 박봉 때문에 통일 베트남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그러나 이러한 탁곡(濁曲)의 무리들 속에서도 구 중위만은 청직(淸直)한 길을 깨끗이 걷고 있었다. 그는 곧 상위(上尉) 로 진급하였다. 구 상위는 1978년 가을에 정년퇴직하고 북부 베트남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떠나고 나니 나의 마음은 너무 허전했으며, 그의 무한한 행복을 빌었다.
압록강 대장! 飢寒이 얼마나 심하오 부족한 날 용서하오…"
―낙동강 전투 당시 무전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이대용 전 駐越 공사]
"전쟁 때는 無垢의 정신으로 굵고 짧은 삶 값있게 살다
화사한 꽃이 떨어지듯 가버리는 게 軍人의 일생"
"鴨綠江물 수통에 담는 장면… 그건 사진이 아니라 그림
그때는 그것이 요란스럽게 역사에 남을 줄 몰랐어요"
"전쟁 때는 무구(無垢)의 정신으로 굵고 짧은 삶을 값있게 살다가 화사한 꽃이 떨어지듯이 가버리는 것이 군인의 일생이라고 했어요. 그러하듯 6·25 때 예하 소대장 4명과 직속상관인 부(副)대대장과 대대장까지 모두 전사했어요. 나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요."
입속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이대용(91) 전 주월(駐越) 공사의 말은 알아듣기 쉽지는 않았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말이 내게는 '전설(傳說)이 살아남았다'는 것으로 들렸다.
그는 6·25의 첫 승전으로 기록된 '춘천 전투'의 중대장(제6사단 7연대 1대대 1중대)이었다. 낙동강의 화산 전투에서 '내 목숨이 끊어지겠구나' 하면서 방어 진지를 사수했다. 북진할 때는 그의 중대가 맨 먼저 압록강에 도달해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았다. 베트남전(戰)에서는 사이공(현 호찌민)이 함락되기 직전 교민 철수를 위해 마지막까지 남았다. 체포된 그는 감옥살이를 한 뒤 5년 만에 귀환했다. 몇 년 전 그가 펴낸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死線)을 넘다'라는 책의 제목 그대로였다.
이대용 전 공사는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오자 최규하 전 대통령이 격려금 300만원을 줬다”고 말했다. /성형주 기자
―6·25 발발 당시 스물다섯이었더군요. 그날 아침이 기억납니까?
"춘천에 하숙집을 얻어 영외 거주를 하고 있었어요. 그날 비가 내렸어요. 오전 8시 반쯤 쿵쿵 포성(砲聲)이 들렸어요. '일요일인데도 우리 포병부대가 사격훈련 하는구나' 했어요. 나는 도서관에 책을 빌리려고 나섰어요. 그때 연락병이 달려와 '인민군이 38선 넘어 공격해와 비상이 걸렸다'는 거예요. 고무장화를 신은 채 부대에 복귀했어요."
―6·25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우리 중대가 맨 먼저 압록강에 도달한 것이지요(1950년 10월 26일). 그때 남북통일이 되는가 감개무량했어요. 인민군들은 압록강 뗏목 다리를 건너 중국으로 도망쳤어요.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압록강가에 주둔했어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 담는 사진 속 주인공이었습니까?
"그때 사진이 어디 있어요? 나중에 그림을 그렸거나 다른 데서 찍은 겁니다."
―사진이 없었다고요?
"그때 중대와 대대에는 사진사가 없었어요. 나는 물을 뜰 생각도 안 했어요. 뒤늦게 대대장(김용배)이 도착해 '남북통일 축원을 위해 대통령께 보내 드려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어요. 내 연락병 오달희가 자기 수통으로 물을 떠 온 걸로 기억해요. 그는 나중에 전사했습니다. 어쨌든 그 수통을 후방으로 보냈어요. 전쟁기념관에 수통이 전시돼 있는데, 그게 그 수통인지 모르겠어요. 그때는 그것이 요란스럽게 역사에 남을 줄은 몰랐어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의 압록강 주둔은 2박3일로 끝났지요?
"10월 28일 저녁쯤 '초산으로 철수하라'는 무전 연락이 왔어요. 중공군이 서북 방면에서 밀고 들어와 후방을 몇 겹으로 차단했어요. 포위망을 뚫고 나오면 또 포위가 되곤 했습니다."
그의 중대가 중공군과 만난 횟수는 22회였다. 이 중 13회는 크고 작은 교전을 벌였다.
"어떤 부대에서는 각자 민간인복으로 갈아입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어요. 우리 중대원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어요. 나는 '군인은 총칼을 버릴 수 없다. 사즉생(死則生)이다. 마지막 총알 한 발은 자기를 위해 써라'고 말했어요. 총 들고 끝까지 싸우면서 포위망을 뚫고 나온 중대는 우리밖에 없었어요. 사단사령부에서 유일하게 생환 신고식을 했지요."
―6·25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지휘관은 누구였다고 생각합니까?
"직속상관인 김용배 대대장은 최고의 군인이었어요. 일본군에 지원했던 흠결이 있었지만, 그분은 천재적인 전략가였고 용감했고 인격적으로 훌륭했어요. 적의 총알이 이마를 스쳐 지나가 피가 뚝뚝 흐르는데도 '별거 아니야'라고 태연했어요. 한번은 낙동강 전투에서 내가 죽음을 떠올리며 방어진지를 사수하고 있을 때 '압록강대장(제1중대장의 음어), 압록강대장! 기한(飢寒·추위와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오. 부족한 나를 용서하오'라며 무전기로 전해왔어요. 나는 전쟁터에서 한 번도 눈물 흘린 적 없었는데 그때는 무전기를 쥔 채 흐느껴 울었어요.(김용배는 1951년 7월 제7사단 5연대장으로 부임한 뒤 양구 전투에서 전사. 당시 30세)"
―6·25가 끝난 뒤 어떤 계기로 주베트남 대사관 무관으로 나가게 됐습니까?
"나는 군지휘관의 그릇이 되고 싶었어요. 미(美) 육군참모대에 연수를 다녀온 뒤 연대장까지 마쳤어요. 하지만 그 시절엔 부정(不正)과 결탁하지 않고는 군인 월급으로 가족과 함께 살 셋집도 얻을 수 없었어요. 무관 시험에 응시한 것은 봉급 수준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어요."
그가 1963~66년 남베트남에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보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장군 진급 심사에서도 몇 차례 떨어졌다.
"왜 고위직에 인사를 다니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어요. 나는 아부도 상납도 부정(不正)도 못했어요. 그런 세태가 역겨웠어요. 전역 자원서를 제출했는데 뜻밖에 장군 진급이 됐어요. 알고 보니 그해 한 심사위원이 내 진급을 강하게 주장했어요. 결국 정원이 아닌 예비명단으로 올렸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낙점한 겁니다."
―장군이 된 뒤 이번에는 주베트남 대사관 정무공사(1968~72년)로 발령났지요?
"박 대통령의 지시였어요. 그때 베트남에 진출한 한진과 현대 등 기업의 문제가 있었어요. 한진의 경우 미화(美貨)를 밀반입하려다 압수되고 3배의 벌금을 물게 된 사건이 터졌어요. 월남의 응우옌 반 티에우 대통령과 미(美) 참모대학을 같이 다녔던 나를 보내게 된 겁니다."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티에우 대통령을 만나 국익 차원에서 이를 해결하자, 조중훈 회장 형제가 감사 표시로 미화 30만달러와 베트남 화폐(10만달러)가 든 가방을 들고 찾아왔어요. 국내 아파트 40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어요. 내가 야단쳐 돌려보내자, 조 회장이 '나중에 자연인이 될 때 큰 저택을 지어 드리겠다'고 말했어요. 나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했어요."
물론 이런 약속이 지켜질 리 없고, 조중훈 회장은 저세상 사람이 됐다. 2년 전 이 스토리를 알게 된 한 작가가 한진그룹에 알리자,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동생 조중건 전 부회장이 찾아와 감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베트남 근무를 마치고 1년도 안 돼 또다시 대사관 공사로 나갔더군요.
"돈 싸들고 인사를 안 다니니 사단장 시켜줄 리 없었지요. 한직(閑職)에 보냈어요. 군복을 벗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무렵, 직속 사령관이 불러 골프를 치러 갔다가 박 대통령을 만났어요. '이 장군, 요즘 어디 있나?'고 물어요. 내가 소속을 말하자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가다가, 되돌아와서 '왜 보직을 받지 못했지?' 물었습니다. 며칠 뒤 국방장관이 나를 불러 '소장으로 승진 예편시키고 주월대사관 부(副)대사로 발령내라는 게 각하의 지시'라고 했어요.(하지만 그는 경제공사로 발령났고 결국 진급을 못 하고 준장으로 예편함)"
남베트남 패망 이틀 전 1975년 4월 28일 주월 한국대사관은 폐쇄됐다. 그는 교민 철수 작전 책임을 맡았다. 사이공 외곽에서 포성이 들렸다. 상황은 급박했다. 그는 그때까지 탈출 못 한 잔류 교민 175명을 데리고 프랑스 정부에서 운영하는 병원(치외법권 지역)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사이공은 함락됐다.
―결국 체포돼 감옥에 갇혔는데, 그때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미 대사관에 갔을 때 미국 공사가 '지금 혼자 옥상에 올라가 헬기를 타라'고 권했어요. 교민들을 버려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었어요. 6·25 때 다들 죽었는데 나는 지금껏 살았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나 생각했어요. 그때 잔류 교민들을 인솔하지 않았으면 다음 날 사이공에 진입한 월맹군에 의해 거의 다 사살됐을 겁니다."
그는 햇볕이 안 들어오는 감방에 갇혔다. 297일 만에 일광욕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몸무게는 78㎏에서 46㎏으로 줄었다.
―북한노동당 공작요원 3명이 파견돼 직접 심문을 하고 '북한 망명 자술서'를 강요했다면서요?
"나를 북으로 데려가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했지요.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어요."
그의 석방 안건을 놓고 한국과 베트남, 북한 3자 비밀협상이 진행됐다. 북측에서는 '남한에 수감된 남파 간첩 450명과 교환하자'고 요구했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한국 원자력 사업과 인연이 있었던 유대계 거상(巨商) 아이젠버그가 해결사로 나섰다. 그러던 중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박 대통령이 피격되는 10·26이 발생했다.
이대용 공사가 풀려난 것은 1980년 4월 12일이었다. 그는 아이젠버그의 개인 전용기를 타고 들어올 수 있었다. 4년 7개월간 수감을 포함해 베트남 억류 5년 만이었다.
―그 시절 국내 상황은 어수선했지요. 우리 정부에서는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최규하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박 대통령이 살아있었으면 크게 치하했을 텐데 청와대 금고가 바닥이 났다'며 봉투를 하나 줘요. 300만원이 들어있었어요."
―베트남에서 장군님을 심문했던 '안닝노이찡(특별경찰)' 3인방 중 한 명이 나중에 주한 베트남 대사로 부임했다면서요?
"악명 높았던 즈엉징특이었어요. 그는 김책공대와 김일성대학에서 유학해 우리 말을 잘했어요. 평양 주재 베트남 대사를 한 뒤 2002년 주한 베트남 대사로 왔어요."
―부임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어떠했습니까?
"세상 요지경이다 싶었어요. 하지만 복수한다는 것은 조국에 큰 누를 끼치는 거라, 표가 안 나는 복수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지요."
―그해 9월 신라호텔에서 '베트남 수교 10주년' 행사에서 조우를 했다고요?
"그는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를 만나자 '당시 심문을 받을 때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고 말하던 장군님의 선견지명에 놀랐다'고 했어요. 서로 총을 겨누던 관계가 국교정상화로 우방이 됐으니까요. 나는 '그때 당신은 당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고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고 답했어요. 그 뒤 우리는 친구처럼 가끔 만났어요. 원한의 외나무다리에도 꽃은 피구나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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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러건개인적으로 하는게 맞는거 아닐까합니다
한인 제배트남 1세대 때의 역사적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베트남 대 선배님들의 고초 이야기 입니다
예전 TV에서 이 분 이야기 본 적 있습니다.투철한 사명감을 가지신 분이더군요.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진심 고생하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순홍 선배님은 저의 고등학교 대 선배님이시며 초대 한인회장과 원로회 회장을 역임하셨죠
예전에 호치민 1세대 지역인 래방시 다목적 휴게실에서 당시 월남전 동료 한인 원로분들과 자주 만나 넵머이에 짠과 설탕을 넣어 마시며 월남전 포로시절 탈출이야기와 구치소 이야기, 고 이대용씨 옥바라지 이야기 등등 끝없는 무용담을 밤을 세워 들었었죠 ㅎ
지금 어디계신지?
삼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고인명복빕니다..글씨가 좀 작은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빕니다
전에 TV다큐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훌륭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에 명복을 빕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좋은곳에 가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