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56> 임(林, 任)씨와 평택임씨(平澤林氏)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3-09-02 21:24:49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임(林, 任)씨는
우리나라에서 ‘임’이라는 같은 음을 쓰는 성씨는 둘이다. 하나는 수풀 임(林)을 쓰는 성씨이고, 다른 하나는 맡길 임(任)을 쓰는 성씨이다.
그중 수풀 임(林)을 쓰는 성씨는 전체 성씨 중에서 10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데,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3만7000가구에 총 76만2000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임씨의 최초 유래는 중국의 은(殷)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은 폭군으로 유명한데, 신하였던 비간(比干)은 그의 폭정을 참다 못해 직간을 했다가 참형을 당했다. 이 광경을 본 비간의 아들 견(堅)은 장림산(長林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렇게 숲속에서 은거했기에 수풀 임(林)자를 써서 성을 삼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래도 전한다. 4000년 전 중국 기주땅 태원현에 있는 쌍목(雙木) 아래 신인(神人)이 강림하여 임씨 성을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앞에 기술한 비간과 아들 견의 유래에 근거로 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임(林)씨가 처음 시작된 것은 동래(東來) 8학사 중의 한 사람인 임팔급(林八及)에서부터이다. 임씨 세보에 따르면, 임팔급은 당나라 용도각 한림학사(龍圖閣翰林學士) 행병부상서(行兵部尙書)를 역임했었다고 한다. 그는 당나라 문종 때 참소를 당하여 동료 7학사(유전, 설인경, 허동, 송규, 최호, 권지기, 공덕수)와 함께 신라로 망명하여 평택현 용포리에 정착하였다. 그 후 적병이 침범하자 의병을 일으켜 이를 격파하였으며 그 공으로 평택군(平澤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 후 임씨들은 그를 도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평택임씨로부터 분관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다만, 나주임씨의 경우 평택임씨에서 분관되었다고 하는 주장의 신빙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하여 부인하고 있다.
현존하는 임씨는 나주(羅州), 평택(平澤), 진천(鎭川), 울진(蔚珍), 예천(醴泉), 부안(扶安), 순창(淳昌), 장흥(長興), 조양(兆陽), 은진(恩津), 선산(善山), 진주(晉州), 옥구(沃溝), 경주(慶州), 옥야(沃野), 전주(全州), 임천(林川), 임하(臨河), 길안(吉安), 밀양(密陽), 보성(寶城), 안동(安東) 등 30여 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는 달리 맡길 임(任)을 쓰는 성씨는 5만3000여가구에 17만2000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맡길 임(任)을 쓰는 성씨는 풍천과 장흥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임씨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풍천임씨는 임온(任溫)을 시조로 하는데, 그는 중국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 사람으로 고려 충렬왕 때 그의 5대손인 임주(任澍)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삼았다. 또, 장흥 임씨는 중국 송(宋)나라 사람으로 고려 정종 때 귀화하여 정안현(定安縣:지금의 전남 장흥군 관산읍)의 당동리에 정착하였기에 장흥임씨라 정했다.
이렇듯 맡길 임(任)자를 쓰는 성씨의 본관으로는 풍천(豊川), 장흥(長興), 곡성(谷城), 과천(果川), 아선(牙善), 회덕(懷德), 진주(晉州), 함풍(咸豊) 등이 전해지며 그 가운데 풍천임씨와 장흥임씨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평택임씨(平澤林氏)는
평택임씨는 수풀 임(林)을 쓰는 성씨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인구는 나주 임씨(羅州林氏)보다 조금 적지만, 임씨의 도시조라고 할 수 있는 임팔급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 평택시 팽성읍에 정착한 뒤 평택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임씨의 대종을 이루는 본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임씨의 다른 본관들도 평택임씨에서 갈라져나간 분관들로 보고 있다.
평택임씨의 시조는 임씨의 도시조라고 할 수 있는 임팔급이다. 그는 당나라 팽성현(彭城縣)에서 한림학사 병부시랑(翰林學士 兵部侍郞)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는 혼란스럽고 참소하는 무리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임팔급은 동료였던 7학사와 함께 신라로 귀화하여 평택시 용포리에 정착하였다. 정착한 후 적병이 침투하자 성을 쌓고 적을 물리쳐서 평택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평택임씨 시조 임팔급과 관련된 8학사 동래는 우리나라에 정착한 중국 귀화성씨의 대표적 설화이기도 하다. 또, 신라시대 평택, 당진 등이 당나라와 오가는 주요 교통로였음을 감안할 때, 당나라 출신의 주요 정착지가 평택 근방이었을 것이라는 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평택시 팽성읍에는 임팔급과 함께 온 동료 7학사가 쌓았다는 설화가 있는 토축성이 존재한다.
이렇듯 임팔급을 도시조로 하고 있지만, 임팔급 이후 세계를 알 수가 없어, 고려 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 겸 연희궁부사(延禧宮副使)를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일세조로 하는 전객령계(典客令系)와 고려 말에 삼중대광(三重大匡)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이 된 임언수(林彦脩)를 일세조로 하는 충정공계(忠貞公系)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평택임씨의 각 파에는 부사공파(府使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삼청당공파(三淸堂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영광공파(靈光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금호공파(錦湖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평성군파(平城君派), 송현공파(松峴公派), 만죽공파(晩竹公派), 송담공파(松潭公派), 송산공파(松山公派), 송주공파(松州公派), 송당공파(松塘公派), 영해공파(靈海公派), 관해공파(觀海公派), 대호군파(大護軍派), 현감공파(縣監公派), 거은공파(居隱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부원군파(府院君派), 판윤공파(判尹公派) 등이 있다.
평택임씨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91명을 배출했는데, 문과에 19명, 무과에 20명, 사마시에 52명이다. 또한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총 6만5015가구에 21만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평택임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평택임씨는 우리나라 임씨의 대종으로 각 임씨 본관들이 평택임씨에서 갈라져 나갔다고 보고 있다. 평택임씨 내에서는 고려말 세자전객령을 역임한 임세춘을 일세조로 하는 전객령계가 있고, 고려말 평성부원군이었던 임언수를 1세조로 하는 충정공계로 갈라진다.
전객령계의 파조인 임세춘은 고려 말에 세자전객령을 지냈으며, 임세춘의 증손 임정(林整)은 태종 때 예조판서를 지내고 성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또 그의 현손 임명산(林命山)은 이조판서, 5세손 임수창(林壽昌)은 부총관, 6세손 임규(林珪)는 병조판서, 8세손 임유명(林有名)은 좌승지, 10세손 임황(林篁)은 중추부영사에 올랐다. 그는 여덟 아들을 두었는데, 넷째아들이 바로 임경업(林慶業) 장군이다.
임연은 고려 고종 때 김준 등과 함께 당시 무신정권의 실권자 최의를 제거하고, 정권을 왕에게 돌렸다. 임연과 그의 아들 임유무는 몽고에 항전하다 숨진 무인이다.
그 외 임희는 고려 2대 혜종의 왕비인 의화왕후의 아버지로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으며 진천임씨의 시조이다. 임개는 선종 때 청백리로 형부상서를 지냈으며, 옥구임씨의 시조가 된다. 임춘은 고려 의종 때의 문인으로 예천임씨의 시조다. 이인로 등과 함께 벗하였으며, 강재칠현(江在七賢)의 한 사람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그의 시문은 ‘삼한시구감’에 기록되어 있으며 가전체(假傳體) 소설인 ‘공방전’ 등이 전해 온다.
평택임씨의 충정공계는 고려 말 삼중대광(三重大匡) 임언수(林彦修)를 파조로 하고 있는데, 그의 아들 임성미(林成味), 임견미(林堅味), 임제미(林齊味)가 모두 현달하였다. 임성미는 우왕 때 왜구를 무찔러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이르렀고, 임견미는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고, 제주 목호의 난과 왜구를 쳐서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 후 염흥방 등과 함께 정권을 잡아 전권을 휘둘렀다. 그 뒤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에게 축출되고 살해되었다. 또 임제미는 판개성윤(判開城尹)을 지냈다. 임언수의 아들은 6명이었는데, 각각 여러 본관으로 나뉘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세춘의 증손으로 태종 때 예조판서를 지내고, 성종 때 청백리에 녹선된 임정(林整)이 있다. 임세춘의 10세 손인 임황(林篁)은 중추부영사를 지냈다. 임황은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넷째 아들이 임경업(林慶業) 장군이다.
임경업 장군은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소농보권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이괄의 난 때에 공을 세워 진무원종일등공신이 되었으며 후에 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를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쳐들어오는 적을 무찔러 용맹을 떨쳤다. 하지만, 역신 김자점(金自點)의 모함으로 살해되었다. 그가 죽은 뒤 ‘소설 임경업전’이 나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충정공계인 임형수(林亨秀)는 임언수의 7대손이며, 인종 1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을 지냈으나, 명종 때 벽서지변 사건과 관련 대윤으로 몰려 정언각(鄭彦殼)의 참소로 사사되었다. 임식(林植)은 임언수의 8대손으로 명종 때 17명현(17名賢)의 한 명으로 이름이 높으며,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역임했다. 임회(林檜)는 임언수의 8대손이며 송강 정철의 사위이다. 그는 광주목사(廣州 牧使)를 역임하던 중 이괄의 난 때 반란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도 반란군을 꾸짖어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유명하다.
구한말에는 의병장 임병찬이 있으며,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임예환과 48인의 한 사람인 임규 등도 평택임씨 후손들이다.
평택임씨의 현대인물
평택임씨의 현대인물에서는 재계 쪽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우선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대상그룹(전 미원그룹)의 임대홍 회장이다. 그는 1956년 동아화성공업㈜을 설립하고, 1958년에 미왕산업사를 설립했다. 다시 1962년 ㈜미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 후 ‘미원’ 브랜드로 국산 조미료 1호를 탄생시켰다. 순수 국내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인공조미료 제품이었다. 최근엔 한국형 우주식품도 개발했다. 계열사로 대상홀딩스㈜를 비롯하여 대상㈜, 대상팜스코㈜, 대상정보기술㈜, ㈜상암커뮤니케이션즈, UTC인베스트먼트㈜, 나드리화장품㈜, 대상 FNF㈜, 동서건설㈜ 등을 두고 있다.
그 외 재계에는 임광정 한국화장품 회장, 임종협 이화산업 회장, 임채홍 내쇼날프라스틱 회장, 임승엽 코오롱종합건설 사장, 임원수 동아건설 사장, 임정수 지구레코드 사장, 임광수 임광토건 회장, 임영대 대일유업 사장, 임재수 전 조흥은행장, 임송본 전 산업은행 총재 등이 있다.
그 외 학계, 법조, 의료계에는 임한경 변호사(전 서울고법원장), 임기호 변호사(전 서울고법원장), 임동진 변호사, 임의선 세브란스병원장, 임관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임희섭 고려대 교수, 임근수 서울대 교수, 임응극 서울대 명예교수, 임선호 전남대의대학장, 임길진 미 프린스턴대 교수, 임현진 서울대 교수 등이 있으며, 정관계에서는 임방현, 임삼, 임호, 임갑수(이상 전 국회의원), 임명진 외무부본부대사, 임남수 전 체신부 차관, 임승래 전 전북도교육감 등이 있고, 문화예술계에서는 임옥상(화가), 임옥인(작가), 임성남(전 한국발레협회장), 임병진(전 성균관유도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