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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수요일. - 진정 높은 사람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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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2.28 05:11
- 진정 높은 사람은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어제 복음의 끝부분과 오늘 복음의 끝부분은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어제의 말씀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를 나무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주님의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자들이 자리다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죽으러 들어가시는데 제자들은 권력을 잡으러
들어가는 줄 알고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기득권인 데 비해
자기들은 입성하여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사람인 셈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셨음에도 수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3년이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그야말로 구악을 대신하는 새로운 악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높은 사람,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을 서번트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지요.
진정한 리더는 종처럼 조직원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일까요?
첫째와 높은 사람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일까요?
쉽게 얘기해서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는 것을 말함일까요?
사실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도 섬기는 자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려는 자들도 그러하면
그 섬김을 받는 백성이 행복하고 자신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높은 자리와 첫째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런 자리에 오르는 비결로서 서번트리더십과 첫째를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너희 가운데에서” 곧
“우리 가운데에서”라고 생각지 않고 “그들 위에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백성들 가운데 있지 않고 늘 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무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무리 위에 홀로 높은 자라고 생각할 것이며,
백성을 우리라고 생각지 않고 늘 그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을 대영광송과 연결하여 생각해봅시다.
대영광송은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이시라는 말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시고, 높으신 분이시고,
우리는 아무도 홀로 거룩하거나 높지 않으며,
아버지나 스승이라고 불리지 말아야 할 형제들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은 위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여럿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이때 높은 사람의 의미도
높은 곳에서 멀리 보고 무리 전체를 보는 사람입니다.
‘너희 가운데 첫째인 사람’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무리 가운데에서 첫 번째로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다른 형제들보다 앞서 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
물길로 치면 맨 앞에서 물살을 갈라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진정 높은 사람은 무리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높이 나는 갈매기처럼 하늘까지 올라간 사람이어야 하고,
바로 눈앞의 이익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시야가 넓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 첫째인 사람도 무리를 안전하게 이끌기 위해서
맨 앞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수난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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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학창 시절에 제 가슴을 뛰게 했던 노래였습니다. 감미로운 멜로디로 시작하다가 중간으로 넘어가면서 강력한 사운드를 내는 멋진 노래입니다. 특히 이 노래를 받치고 있는 기타 연주 소리는 십 대의 저를 푹 빠지게 했습니다. 그때 바라보던 오십 대는 젊은이들의 문화에는 전혀 관심 없고, 술 한 잔 마신 뒤에 젓가락을 두드리며 트로트를 부르는 것밖에 못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오십 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 대에서 바라본 오십 대의 모습은 잘못 본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십 대도 열정이 있습니다. 또 오십 대도 요즘 노래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또 오십 대도 아이돌 노래를 들으며 가슴 설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냥 단정 지었습니다. 오십 대는 우리 세대와 너무 다르다고 말입니다.
지금을 사는 청소년도 저의 청소년 시절과 같은 시각일 것입니다. ‘꼰대’라며 기성세대를 꾸짖으며 ‘우리와 다르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꼬마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면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에게 사탕을 드리면 어떨까요? 더 좋아하십니다. 어른들도 노는 것 좋아하고, 뜨거운 열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대와 차이, 나이의 차이, 사상의 차이 등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다를 것 없다는 시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함께하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꿈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입니다. 오늘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아마 이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다른 제자와 다르게 본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권력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다른 열 제자들의 반응은 불쾌함이었습니다. 이 제자들도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권력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누구나 가고 싶은 나라, 누구나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통치자, 고관들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되고 오로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취해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다른 점’만을 따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가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행복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지혜입니다(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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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하였을’(마태 20,22 참조) 뿐만 아니라, 진정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건만, 정작 제자들의 마음은 다른 것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 어머니를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높은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높은 사람’이란 ‘남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성인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떠받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신뢰하지 못하면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요,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기셨고,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쳐 버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시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니요,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고 떠받들며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를 귀하게 여기는 존경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높은 자 되게 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되어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 갈 것입니다. 돈을 섬기면 탐욕스런 사람이 되어가고, 세상을 섬기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학원”(<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45)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형제 섬기기’를 통하여, ‘주님 섬기기’를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청하게 하시고,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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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엇을 원하느냐?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길 원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해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미움의 대상이나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속적인 모습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을 내려놓을 때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점집을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행동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닥친 것으로,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하길 기원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에 동참하기 위한 신앙의 삶인지? 아니면 한몫 얻기 위한 삶인지 성찰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삶을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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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좋은 글을 읽게 됩니다. 며칠 전에는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침묵과 미소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미소는 많은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줍니다. 침묵은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웃으면 웃을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웃으면 복이 오고, 웃으면 젊어진다고도 합니다. ‘설화(舌禍)’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명한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이 말실수로 공든 탑을 쉽게 무너트리기도 합니다. 저도 말 때문에 이웃에게 아픔을 줄 때도 있었습니다. 성직자들은 늘 언행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남에 대한 험담과 비난은 작은 것이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즐겨하는 말이 있습니다. “잘 하였습니다. 잘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힘들게 느껴지는 문제들도 조금 가벼워지곤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위로가 되고,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명예, 권력, 재물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이렇게 청탁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다른 열 명의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교회에 위기가 찾아온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있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는 데에 익숙해 져 있었습니다. 식사 시간에는 늘 제일 먼저 앞줄에서 식사 배식을 받곤 했습니다. 버스에 탑승 할 때도 늘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 숙소를 배정 받을 때도 먼저 방 열쇠를 받곤 했습니다. 버스에서 짐을 내릴 때 가방을 같이 꺼내면 교우들이 ‘신부님은 이런 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대부분 저보다 연세가 많으셨습니다. 예전에 남성 구역 봉사자들과 안면도에 갔을 때의 기억입니다. 예약이 늦어져서 방을 두 개 밖에 구하지 못했습니다. 형제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독방을 드리고, 우리가 불편해도 같은 방을 사용합시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같이 자겠습니다. 군대에서는 내무반에서 20명 넘게 같이 잤습니다.” 불편할까봐 승용차로 데려다 준다고 했지만 강남 역에서 미사도구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 명동으로 왔습니다. 의식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하지 않으면 늘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봅니다.
에덴’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낙원입니다. 사람은 그 낙원에서 살 수 있었는데 교만함과 욕심 때문에 ‘에덴’에서 더 이상은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덴은 어느 장소가 아닙니다. 에덴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탐욕과 욕망 때문에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못 살게 하는 사람들은 늘 ‘에덴의 동쪽’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며, 양보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현실은 각박하고 힘들어도 늘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렇게 이야기 했었습니다. “나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을 하십니다. 아이라는 말을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 주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에덴’에서의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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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의 콩깍지.’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콩깍지란 말은 어느 곳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뜻도 포함하고 다른 말로는 한 가지만 바라보고 있는 바보 같다는 뜻을 지니기도 합니다.
‘사랑의 콩깍지’가 씌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그런데 조금 바꾸어서 ‘돈의 콩깍지.’, ‘권력의 콩깍지.’ ‘도박의 콩깍지.’ 등등, 이런 말들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결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얘들아, 나 죽는다. 너희가 사랑하는, 그리고 그렇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내가 조금 있으면 죽는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라, 다시 살아날 것이다. 내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슨 콩깍지가 씌었는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어머니까지 나타나 자신의 아들을 특별한 위치에 앉혀 달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무슨 콩깍지를 쓴 걸까요? 예수님 콩깍지? 맞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하는 예수님으로서가 아니라 왕으로서의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될 것이니까, 이분 옆에만 붙어 있으면 명예도, 돈도, 권력도 함께 따라 올 테니까 붙어 있어야지.’
그러니 당시 제자들은 진심으로 예수님의 아픈 마음을 나눌 수 없었습니다. 죽음으로 걸어가는 예수님을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외롭게 걸어가셨습니다. 어쩌면 죽음은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외로움이라는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나의 왕, 나의 치유자, 나의 인도자, 로또? 혹은 불행을 막아주는 방패? 물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외로운 분이고, 지금은 지쳐계신 분이고, 지금은 죽음 앞에 마음의 갈등과 고통과 어둠을 가지고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분이 외롭지 않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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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나라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좀처럼 길이, 빛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을 주는 지도자들도 참 보기 힘듭니다. 국내 사정이나 정치사정은 더욱 그러합니다. 극한 대결과 분열상태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리를 또 확인하게 됩니다. 과연 인류는, 역사는 진보하는가? 때로는 회의하기도 합니다. 저절로 묻게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입니다. 강론 제목이자 답은 단 하나로 요약됩니다. “종과 섬김의 영성으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마다 이때쯤 맞이하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그의 대표적 <자화상>이란 시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八割)이 바람”이라 했습니다. ‘바람’으로 상징되는 시련과 고난을 극복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저는 바람을 산으로 바꿔 “요셉수도원에서 36년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불암산”이라 주저없이 고백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지금도 여전히 되뇌는 고백입니다. 산은 한결같은 정주의 상징입니다. 제가 쓴 무수한 시중 불암산이 대상인 경우도 참 많습니다. 불암산을 볼 때마다 저절로 떠오르는 시편 121장입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시편121,1-2)
여기서 오랫동안의 삶을 되돌아 보면 힘들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고 말그대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대로 살아온 느낌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란 예감이 듭니다. 18년전 2006년 봄철에 써놨던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해마다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늘 거기 그 자리 그대로의 정주의 불암산이다”-2006 봄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한 것은 여기 살면서 답답하고 막막한 적은 있었어도 “실망, 원망, 절망”의 삼망은 결코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믿음과 희망, 사랑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놀라운 책을 구입하여 읽고 있습니다. 70대 후반의 어른과 30대 초반의 손자뻘 후배가 나눈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라는 대화집입니다. 손자뻘 되는 청년의 서문 일부를 나눕니다.
“할아버지뻘 되는 정성헌 선생님을 대할 때마다 저는 끝없는 낙관에 놀랍니다. 젊은이들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오히려 미래를 준비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10년이 남았다’면서 저를 다그치시죠. 따르고 싶은 어른이 생기니 앞길이 보입니다. 저는 고작 6년차인데 선생님은 지구 생명 살리기 운동만 60년 하셨습니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역설적이게도 먼저 태어나신 선생님에게서 저의 미래를 봅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제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지론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게 대죄이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 참으로 탄력좋은 파스카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바로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가 복음의 예수님이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가 됩니다. 사면초가의 절망적 상황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두분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에 답을 줍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예레미야의 절박하고 간절한, 한결같은 기도가 답입니다.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 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보소서.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기도는 하느님 향한 영혼에 창문을 내는 것입니다. 햇빛같은 은총이, 시원하고 향긋한 바람같은 성령이 들어오지 않는 창문없는 방같은 영혼이라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오래전 써놨던 “좋은 창 지닌 방하나만 있어도”란 시가 생각납니다.
“방에 있는 TV, 그림, 사진...
대부분이 군더더기 쓸데없는 짐
이보다 더 좋은
임만드신 창문밖 하늘 풍경, 살아 있는 그림
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러울 것 없겠네.”-2005년 봄
영혼의 방에 하느님 향한 창을 내는 일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면초가의 위기상황에서 우리를 끄집어 낼 수 있는 분은 전능하고 자비하신 주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역시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세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말마디에서 보다 시피 예수님은 부활의 희망에로 활짝 열린 문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안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늘 외로웠고 고독했으리란 생각이듭니다. 말그대로 오합지졸의 공동체, 동상이몽, 동문서답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만나러 매일 외딴곳을 찾았던 듯 싶습니다.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도 동참하거나 공감하는 이들 하나도 없고 심지어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두 아들이 예수님의 나라가 들어설 때 예수님 자리 양쪽에 있게 해달라는 청을 합니다.
모두가 철부지들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응이 극히 침착합니다.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좌절하거나 흥분함이 없이 부인과 문답을 나누셨고, 아마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었을 것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 바로 하느님 향한 신뢰와 희망의 반영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도 제자공동체의 유일한 대안이자 처방은 “종과 섬김의 영성”뿐임을 천명하십니다.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군림과 세도는 일체 배제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왔다.”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어원도 같으니 섬김의 종입니다. 이에 영감받은 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는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정의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섬김의 직무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영성이 있다면 섬김과 종의 영성뿐임을 깨닫습니다. 학교, 병원, 식당처럼, 주님의 교회나 수도원도 예외없이 서비스업에 속합니다. 저는 서비스업의 3대 요건에 늘 유의하곤 합니다. 첫째 사람이 친절하며 좋아야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 유능해야 하고, 셋째 안팎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서비스업의 삼박자를 갖출 때 손님들도 끊임없이 줄을 이을 것입니다.
사람이 친절하고 좋아도 실력이 없어 무능하면 서비스업에 실격입니다. 그래서 저는 때로 우리 요셉수도원이 서비스업의 3대 요소를 갖췄는가 점검해 보곤 합니다. 일례로 의사가 사람만 좋고 실력이 없어 무능하다면 정말 쓸모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건물이 아닌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섬김과 종의 영성으로 무장하여 당신의 서비스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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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벗을 채우려고
나를 비우는
채움의 잔
벗을 돋우려고
나를 부수는
돋움의 잔
벗을 높이려고
나를 낮추는
높임의 잔
벗을 비추려고
나를 사르는
비춤의 잔
벗을 품으려고
나를 버리는
품음의 잔
벗을 섬기려고
나를 바치는
섬김의 잔
벗을 살리려고
나를 죽이는
살림의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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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마태 20,223)
저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담대해서라기보다는 시련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쟁은 신나는 일인 것처렴, 겪어 본 적 없는 이들에게 수난과 죽
음이라는 시련은 별것 아닌 일처럼 여겨집니다.
주님께서도 수난의 시련에 드셨을 때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죽음의 시련이 어떤 것인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겠습니까? 수난의 괴로움은 실로 큽니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사람들이 창조계를 마주하여 이해하는 세 단계의 의식을 위와 같이 분석해 본 결과. 우리는 엑카르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엑카르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삶이 아니라, 그 삶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만 음식을 먹는) 문제에서 벗어나, 감사와 신비로 나아가야 한다. 쉬르만이 지적한 대로, 엑카르트는 “통찰력(seeing)의 교육을 목표로 삼는다.” 겉사람의 피상적인 삶만을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이승에서 영원을 맛보지 못할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것이며, 항상 죽음의 접근을 물리치려고만 할 것이다. 그는 아름다움이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결코 직접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가장 깊은 속사람(deepest self)과 끊임없이 대면하는 사람의 의식은 힘이 넘친다. 그러한 사람만이 만물을 하느님에게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러한 사람만이 신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창조계를 하나 되게 하고, 혼돈을 질서 정연한 우주로 만드는 것이다. 나만이 모든 피조물을 그들의 존재로부터 나의 이해 안으로 들여올 수 있고, 내 안에서 그들을 하나 되게 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이라면 하느님이 아는 것을 알 것이고, 하느님 안에서 만물이 하나이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128)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2절: 그레고리오 개혁과 성직 서임권 논쟁
해결의 시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권력투쟁에 대하여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사상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당시는 그리스도만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루가 복음 22장 38절에서, 그리스도가 두 자루의 칼로써 상징되는 두 권력을 세계의 통치를 위하여 정해 놓았는데. 그 하나인 세속적인 칼은 황제의 손에, 또 다른 영적인 칼은 교황의 손에 있다고 추론하였다. 반면에 그레고리오 시대의 교회법 학자와 신학자들은 이 이론을 오로지 교황에게만 관련시켜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 즉, 두 자루의 칼은 다만 교회를 위하여 존재한다. 영적인 칼은 교회가 행사하고, 세속적인 것은 황제가 교회를 위하여, 또 교회의 이름으로 행사하도룩 교회가 황제에게 빌려 주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교회의 파문을 영적인 칼로 간주하였다.
이와 같은 일방적인 교회적인 관념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교적 서구의 세계질서를 유럽의 모든 국가에 대한 교황의 완전한 상위 봉토 지배체제로 개조하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는, 짧은 한걸음에 불과하였다. 물론 그것은 필연적으로 황제권과의 충돌로 이끌었다. 옛 제국사상을 소생시킨 프리드리히 적발제는 교황의 우세에 대하여 성공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전 유럽에 걸쳐 교황적 봉건국가 체제룰 바탕으로 일종의 교황의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슈타우펜 왕가의 황제는 이 다툼에서 졌다. 그러나 슈타우펜 왕조의 멸망 후 얼마 안되어 교황의 세계 제국도 붕괴하였다. 되돌아볼 때 그것이 교회와 교회의 영적 사명을 위해 축복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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