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977년 전문의 취득 후 3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중앙대 부속 필동병원에 부임한 때는 10.26사태, 12.12 사태 후 국내의 정치사태가 흉흉하였던 1980년 5월 1일, 나라가 안정이 되지 않아 뒤숭숭한 때이었다. 그 때는 내과 교수진이 일곱 명, 소화기 내과의 김 종숙, 이 기환, 박 실무와 순환기의 유 언호, 이 상용, 내분비내과의 신 순현, 그리고 막내이자 나의 후배인 허 성호교수가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이 기환과 이 상용교수가 나가서 다시 숫자가 여섯 명으로 줄어들었고. 한 연차에 전공의도 두 명이다가 한명도 되었던 단출한 식구이었다.
수도방위사령부 입구에 있었던 필동병원은 처음 성심병원으로 지은 바깥의 건물과 그 후에 건축한 3층 건물이 전부이었고, 마당 한가운데는 가정집이 버티고 있다가 나중에 인수하여 2층 한 방에 작은 내과 의국이 있어 당직 침대에서 까지 앉아 의국회를 하였으며, 의국 살림도 달랑 전화기 한 대가 전부이었다. 이어 신관의 증축이 완료되어 9층에 강의실을 만들고 좋아하였던 일이 그저께 같다. 내가 80년 의국장을 시작할 때 의국의 재정은 인수당시 몇 십 만원의 빚이 있었다. 병원의 교수회의는 행정부에서 브리핑 차트를 가지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진료실적을 보고 받았다.
그동안 내과의국을 나가신 교수분들, 정년으로 또는 다른 사유로, 이미 고인이 되신 교수분 들도 여럿 계시고. 유 언호교수는 건강이 좋지 않아 정년까지 견딜 수 있을까 하여 회갑을 호텔에서 성대하게 하였으나 또 다시 근사한 퇴임식을 마치고도 몇 년을 더 지내시다 돌아가셨다. 이 상재교수가 투병 중 이 정희를 조교수 발령이란 최고의 대우로 영입하였으나 신랑감을 병원에서 구하고는 떠나갔으니 제일 실속파가 아니었나? 본다. 입국식이 끝난 후 전공의들이 인사를 오면 부탁하는 말이 “끝까지 수련을 끝내라.”이다. 수련 도중에 우리 의국을 떠난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었을 하고 있을 까? 제발 떠나더라도 내과 의국 동문들이 입국 시에 선물한 “청진기는 두고 가라.”
내과 의국원들 모두 얼마가 되지 않았을 때 정초에는 다 같이 세배를 핑계 삼아 몰려다니며 교수들 집에서 술을 마셨고, 연신내의 김 종숙과장님댁, 올림픽 아파트의 유 언호교수댁에도 갔었고, 비좁은 우리 집에도 왔었고, 무지하게 추웠던 이 상용교수댁에도 갔었다. 이 때 유명한 이야기가 탄생한다. 방배동의 이 기환교수댁에서 놀다가 서초동 우리 집으로 왔는데 전공의 김 형락이 “모두 다 그대로인데 사모님만 바뀌었어요.” 비슷한 아파트구조에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봄철 능내의 베링거 별장의 야유회는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서운동산에서 야유회는 밤늦게까지 신나게 캠프 파이어를 하고 노래 부르며 놀았고 정 현경선생의 발랄한 모습, 그러나 다음 날 전혀 다른 주눅이 든 모습들이다. 이제는 교통 혼잡과 사는 형편이 나아져 불고기와 소주가 더 이상 메리트가 아니어 야유회도 없어졌다.
내과 송년회에서 신 인철의 구수한 대중가요 메들리, 김 호빈의 재미있는 사회솜씨, 송 요한의 코믹한 표정 등도 기억이 난다. 여름철 복 따름으로 일동 도평리 백운계곡에 갈비를 먹으러 갔다가 내 옆의 신 순현교수가 나를 보고 버럭 화를 내며 “왜 유교수는 내가 찜해 놓은 것만 골라 먹느냐?” 나는 약간 덜 익은 걸 좋아하고 신교수는 그걸 익기를 기다리다 나한테 가로 채인 것, 스태프들이 적었을 때는 부부동반으로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한 적도 있었다.
내과의국원들과 회식을 과거에는 자주 하였었다. 필동병원에 처음 왔을 때 우리가 자주 가던 집은 환타지아라는 맥주집이었고 식사도 하지 않고 술을 마셨으니 약삭빠른 친구들이 간단히 자장면이라도 미리 먹고 왔다가는 심술궂은 누가 반드시 이를 반납하여야 하게 만들었다. 다음에 가는 곳은 백제란 시시한 카페이었고, 늘 취해서 간 곳이라 어느 날 골목을 걷다 그 집 간판을 보고 이렇게 병원 가까이에 있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항상 맥주로 마셨는데 “나는 소주가 좋은데”하고 말하였다가 혼이 난 적도 있었고. 자주 간 곳은 멀리로는 낭만, 성전, 병원 부근의 신생관, 대림정 등이다.
용산에서는 청운, 솔낭구, 가마솥 손두부, 놀부부대찌게, 만추조약돌구이 등, 이차로는 트레비와 레아 등 등. 이 중 몇 군데는 재개발로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청운에서 용산병원 회식을 너무 거창하게 한 탓으로 잠깐 저녁 먹고 밤 근무에 들어가겠다고 온 간호사들이 취해서 근무도 하지 못하여 저녁 근무자가 밤새워 근무를 한 적이 있었으나 모두들 쉬쉬하고 문제없이 넘어간 적이 있었다. 이 주인은 입장으로 옮겨갔다는 소식, 솔낭구는 주인아저씨가 폐암으로 고생하였고, 우리가 한번씩 2차를 들렀던 “레아”의 주인의 남편은 용산재개발 사고로 구속, 가마솥 손두부는 대방동으로 옮긴 곳으로 아직도 우리가 한번 씩 간다.
나는 회식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이 많다. 회식은 격의 없는 자리이나 여기에도 기강을 잡는 인사들이 있어 분위기가 나쁠 때도 있었다. 이걸 다 쓰려면 지면도 모자라고 또 밝혀지면 부끄러운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혼자 가슴에 묻어 두기로 한다. 단 나는 음주 추태는 한 번도 부리지 않았다는 걸 자신한다. 집에 가기 전 술을 깨워서 간다며 연구실로 돌아와 새벽까지 잔적은 몇 번 있어도.
내과 의국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들 중 모 전공의가 병실환자를 보다가 때를 놓쳐 반입이 금지된 중국음식을 배달시켰다가 수위와 시비가 붙어 오기로 내가 모든 걸 책임진다. 하였다가 다음 날 시말서를 쓴 일, 어느 의국원은 어머니가 마취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뒤 의국 출입을 끊은 것은 가슴이 아프다. 박 지현이 입원환자인 용산역 앞 깡패를 때려서 말썽을 피우고 내가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지요. 내 연구실로 불러서, 아니면 스스로 들어와 의국생활의 어려움을 하소연 하던 전공의들, 가능하면 이들의 불만을 들어주려고 애는 썼지만. 전공의들이 거친 의국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나갔다 들어 온 일은 너무 많아 열거하기도 쉽지 않다. 나는 이들이 나에게 제출한 경위서나 시말서를 한 장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다.
김 종숙교수는 연말에 온 유명한 재불 화가인 남관의 그림엽서를 보시고는 “뭐 이런 걸 보냈어.” 하시고 버리려는 것을 내가 보고 “아니, 과장님. 그런 작품을 버리시다니요.”하였더니 다음 해인가 거실에 표구해 걸어 놓은 걸 본적이 있었다. 그냥 버리게 두고는 내가 나중에 챙길 걸. 모교수가 병원 출입차단기를 차로 밀어 파손한 사건, 교수가 전공의 폭행으로 문제가 된 일들이 자주 있었고 박 실무교수의 야간의 교통사고, 신 순현교수의 뇌경색, 이 상재의 동맥류 파열 등도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일들이다.
또 박 종철고문치사 사건이 있었지요. 치안본부 대공 분실과 가장 가까운 우리 병원 내과의 오 연상교수가 사체검안을 하여 고문치사란 걸 이야기 하였고, 나중 무슨 인권상까지 받았지요. 음주운전 면허를 가진 교수도 있었다. 낭만에서 같이 술을 마시다 없어졌는데 이 친구는 다음 날 깨어나니까 어떻게 집에 들어 온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평소 같으면 주차하기 싫어하는 자리에 얌전히 차가 있는 걸 보면 자동으로 운전하여 온 것. 사고가 생겼다 하면 음주운전사고, 한번은 또 사고가 났다고 들어 걱정을 하였더니 이번에는 음주한 상태에서 부인이 운전을 하였단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내가 주례를 한 경우도 여럿 있었고 결혼 후 집들이도 자주 가곤 하였다. 병원내의 결혼 중 간호사와의 결혼은 효시가 지금은 미국에 있는 박 병국선생. 요즈음은 그런 제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우수 전공의 상이란 게 있었지요. 그런데 부상(?)이 예쁜 간호사로 이를 탄 사람들도 있었다. 이외에도 학내, 원내, 과내의 결혼이 많았다. 늘보고 잘 아는 사람들끼리의 결혼으로 모두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지요. 내가 처음 한 주례는 주문진까지가서 10월에 주례를 하고 다음 해 2월에 애기를 출산한다니 무슨 스토리, 아! 미리 혼수를 장만하였구나. 그 후는 이런 일들을 여럿 보았고, 적어도 시험관애기의 도움이 필요 없을 것만 하여도 이게 어디인가. 내가 의국장으로 마산에서 전공의 때 결혼한 장 세경교수의 결혼식에도 갔었고, 부산에서 손 덕재 결혼식에도 가 보았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일은 연말이라 결혼식장 치장을 r을 하나 뺀 “Mery Christmas"로 도배를 해 놓아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도 결혼 예비 중인 여러 전공의들을 알고 있다. 이들 모두에게 축복 있으랴!
여기서 의사들의 국민 스포츠인 골프이야기는 뺄 수가 없다. 내가 첫 번 학생강의에서 강조를 하는 것이 의사가 건강을 유지하려면 실내와 실외 취미는 한가지씩은 있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골프는 실내근무가 주인 의사들에게는 좋은 운동이 틀림없다. 한번 모약품에서 토요일 골프를 두 팀 부킹해놓고는 나가자는 걸 내가 전공의들한테는 “근무 열심히 하라” 하고 아침부터 골프는 뭣하니까 일요일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 하였더니 부득부득 어기고 나간 사람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외국 출장 갔다가 먼저 돌아와 골프를 친 사람도 있었고.
여행을 즐기는 나는 여유시간이 있으면 차를 운전하여 여행을 가곤 하였는데. 은혼여행을 뉴질랜드 남섬으로 가서 크라이스트 쳐치의 임상재도 만났고. 문경의 신 인철은 태안으로 병원을 옮기고 난 후에도 찾아가 만났었고, 정선의 한 기수와 영월의 성 윤업은 여러 번 찾아 갔었다. 보령의 유 재격도. 송 정수교수가 부안에 공보의 파견시절, 처와 같이 이른 봄에 관광버스를 타고 내소사를 가게 되었는데 전화연락이 되어 근사한 점심을 “올림픽회관”에서 접대를 받았었고, 최근에는 거제 고현에 개업을 하고 있는 김 명준도 일박 이일 남도여행 시에 만나 부부끼리 그곳에서 저녁을 대접받았다. 이 태우는 내가 용평에 여름 휴가 중 찾아와서 만났고. 제주도의 장 은하와는 산행도 여러 번 같이 하였고, 김 성수와 김 충현도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었고, 얼마 전에는 제주의료원에 파견 근무 중인 이 영우도 만났다. 이것도 교수로 사는 재미가 아닌가. 그 시절에는 의국원들이 개원 시에도 찾아 간적이 적지 않았다. 홍 석호, 강 응택, 민 철홍, 최 신환, 이 병직, 최 강식 등이다. 수재가 났을 때의 김 형락, 태풍피해의 김 봉경과도 전화 안부는 물었었다.
84년 7월에 우리가 철도병원의 경영을 맡으면서 의국이 나누어지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외래에 온 첫 환자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 땟국이 줄줄 흐르는 러닝셔츠 바람으로 왔다. 84년 9월 2일, 나는 병원 주말당직이라 응급실에서 TV로 프로야구가 보고 있는데, 폭우로 소양감댐이 붕괴 운운하더니 그것보다 먼저 용산병원 일대가 물에 잠겼다. 당직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데 병원주위는 온통 물바다. 할 수 없어 지금은 없어진 시외버스 터미널 쪽으로 차가 둥둥 떠서 나가다 물이 넘치는 강변도로로 집으로 돌아왔으니 지금 생각하여도 아찔하였다. 그 다음날 월요일 오전에는 용산역에서 리어카로 사람을 실어다 주고 돈을 받는 진풍경도 벌어졌고.
교수 수가 적다보니까 내가 혈액종양과 환자까지 보았다. 그 중 기억나는 환자는 Hand mirror cell leukemia를 증례보고를 하였고, paroxysmal nocturnal hemoglobinuria환자는 30년을 돌보아 주다 작년 가을에 사망하였다. 임파종환자와 급성 임파성백혈병환자는 완치되어 아직도 몇 년에 한번 씩 나를 찾아온다. 또 감염학은 당시 외부강사도 수배가 어려워 아예 내가 강의를 맡아 강의는 감염학까지 몇 년을 하였었고 병원감염관리위원장과 항생제위원장까지도 하였다.
나는 조교수로 발령을 받아 제 때에 진급을 하였고 과장과 주임교수까지 할 수가 있어서 내과에서 누릴 것은 모두 누려 보았으며 여태까지 큰 허물없이 지나온 것이 다행이다. 나의 이익과 내과의 이익과 병원의 이익이 상충될 때는 먼저 나의 이익을, 다음이 내과의 이익을 포기하면서 후회 없는 의국생활을 하였고, 아직도 남은 2년은 정리를 하고 떠나야 할 시간으로 생각한다.
첫댓글 내과 창립 40주년 기념책자에 실린 글
중앙의대 내과와 유교수의 역사 공부 잘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니까, 많은 우여곡절이 생기겠지요.... 그런데, 상으로 예쁜 간호사를 준다는 것은 좀 이상하네요.... 간호사가, 자기가 상으로 제공된다는 것을 알고도. 응했을까요 ...?
그건 내가 돌려서 말한 것이고, 둘다 연애결혼 후 잘 살고있지요. 내가 항상 둘을 보고 놀리는 말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