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6 주안 온가족 새벽기도회 / 이중구 목사(할렐루야교회 교육디렉터)
말씀 : 마태복음 22:14
제목 : 청함을 받은 자 vs 택함을 입은 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반갑습니다.
새벽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기도의 자리에 가족끼리 같이 나와서 채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멋진 것 같습니다.
특별히 제가 앞에 자리에 앉아 있는데, 화면에 한 번씩 다음 세대 아이들이 잡히더라고요.
너무 이뻐 보이는데, 그중에 이렇게 묵상하고 있는듯한 조금 눈을 감고 있는 아이들이 좀 보였잖아요.
그 아이들 깨우거나 이렇게 다그치시면 절대 안 됩니다.
그 아이들은 지금 조는 게 아니라 성경님의 만지심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이해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전공은 청소년부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등부를 지금 4년째 담당하고 있고요.
그래서 다음 세대를 보는 눈빛이 다른 목사님들과는 좀 달라요.
아마 어제까지가 시험 기간이 끝난 아이들이 많을텐데
우리 옆에 보이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격려의 박수 한번 해 주시면 너무나 좋겠습니다.
네, 박수만 치지 마시고 맛있는 것도 좀 사 주세요...ㅎ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좀 나눌 그 제목은 "청함을 받은 자 그리고 택함을 입은 자"
이 둘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좀 여러분들과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 보시기에는 얼굴이 너무 잘생겼기 때문에 인기가 많을 거라고 아마 여러분들 예측하실 텐데
저는 어릴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여자친구가 없을 때가 없을 만큼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는 자매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중에 한 명을 골라서 이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그 결혼할 때의 그 떨림과 설렘 잊을 수가 없거든요.
너무나 생각이 되어지고, 가슴이 막 콩닥콩닥 하고, 아직도 막 혼수 물품을 알아보러 다니던 그 발걸음을 생각하면
몇 시간을 돌아다녀도 그게 너무나 행복했던 미소가 절로 지어졌던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천국을 이야기하실 때에, 종종 비유로 드는 것이
바로 이 결혼이라는 이 매개체를 들어서 많이 설명하시더라고요.
오늘 우리가 다 같이 읽진 않았지만 마태복음 22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천국은 어떤 나라인지,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살펴보고 계시는지를 좀 여러분들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제가 결혼을 준비할 때 제가 전도사였기 때문에 전도사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그래서 한 100만 원 정도 이제 통장에 잔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 될 사람에게 이제 물어봤지요.
'너는 얼마 있냐? 우리가 돈이 있어야 결혼을 하니까 너의 통장에 잔고를 까라'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자기가 조금 불편하다고 내색을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직장을 다니고 있는 병원을 다니고 있는 자기가 잔고가 더 많을 것 같은데,
당신이랑 까서 이렇게 공유하게 되면 자기가 손해가 아닌가라는 그런 눈빛이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강압적으로 통장 잔고를 까라고 했더니, 자기는 500만 원 있다는 거예요. 무려 저보다 5배,
저는 100만 원이 있었고, 제 아내는 500만 원이 있어서 600만 원을 가지고 결혼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한 2~3달 정도 이렇게 준비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돈이 없다 보니까
신혼집을 구하는 것도 문제였고, 혼수를 준비하는 것은 더 더욱 문제였습니다.
신대원을 다닐 때라 용인에 있는 양재에 있는 총신 신대원을 이제 가야 되는데
결혼식이 일주일 정도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까지 집을 못 구한 상황이었거든요.
제가 믿음은 있는지라, 돈은 없어도 믿음은 있어 가지고 양가 부모님께
"결혼식 날 참석만 해주시면 됩니다. 도움은 1원 한 푼 제가 받지 않겠습니다. 도움 필요 없이 저희가 알아서 결혼할 테니까,
결혼식 당일에 자리에만 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 하다가 결혼식 1주일 전까지 집을 못 구한 거예요.
교회 근처에 자그마한 월세방이라도 구하려고 그렇게 발품을 팔았는데도
한 두 달을 돌아다녔는데도 마땅한 집을 못 구했을 때, 이제 일주일, 결혼식 일주일이 남은 그 시간이 다가온 거예요.
발이 막 동동 동동 굴려지고 어떡하나, 큰소리는 그렇게 막 쳤는데,
부모님들의 걱정은 커져만 가고 결혼식은 1주일 앞으로 다가오는 그런 상황 속에서 제가 하나님 앞에 선포를 합니다.
그날 월요일에 "하나님, 오늘 저희에게 살 집을 주지 않으시면 제가 오늘 학교도 안 가고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결혼이니까 책임지십시오."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나는 너랑 약속한 적이 없다"라는 음성이 막 들려오는 겁니다.
결국에는 찾다 찾다 저희가 월세방을 막 찾고 있었는데, 못 찾고 있는 중에
그날 학교를 떠나야 하는 그 시간에 부동산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와요. "집이 하나 있는데, 교회 바로 근처다."
제가 집을 찾는 부분에 있어서 조건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조건은 뭐였냐면, 제가 사역하던 그 교회랑 걸어서 3분 이내로 갈 수 있는 집이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역했던 교회가 부산에 있는 시청 근처였기 때문에 집값이 꽤나 비싼 동네였거든요.
그 동네에 주택도 많이 없었던지라 이 교회 근처 3분 내로 갈 수 있는 거리에는 너무나 많은 비싼 집들만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집이 안 구해진 거예요. 그런데도 믿음으로 "하나님 저희 집을 주십시오."
신혼집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걸어서 3분 내로 갈 수 있고,
언제나 중학교 고등학교 청소년 아이들이 저희 집에 와서 라면 먹고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여야 한다라는 조건을 내걸고
이렇게 집을 구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집이 딱 교회를 출발하려고 하는 그 시간에 전화가 걸려온 거예요.
'교회에서 1분 거리 앞에 있는 아주 오래된 소형 아파트에 한 칸이 나왔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라고 해서 당장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보증금을 3천만 원이나 걸어야 하고 월세는 45만 원을 내야 하는
그런 조건에 있는 집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부담이 돼서 이거 맞나 싶을 그런 걱정과 근심이 막 들었었는데
여기 아니면 이제 1주일 뒤에 결혼을 해야 되니까, 더 이상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을 계약하기로 마음을 먹고 계약금을 걸고 올라갔습니다.
신대원에 올라가자마자 저는 이제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남아있는 보증금은 어떻게 하고, 앞으로 45만 원의 월세를 어떻게 해야 되냐라는 걱정 때문에
양지에 있는 소래교회에 가서 계속 밤마다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 책임지세요. 하나님이 계약하셨으니까 하나님 책임지세요."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계약자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이냐, 이중구냐?" 그 계약은 제가 했더라고요.
사고는 제가 치고 하나님께 책임져 달라고 하는 그 모습을 제가 여실히 보면서도
너무나 걱정되고 두려운 가운데 그 결혼을 준비했지요.
결혼식 1주일 전에 집을 계약하고 혼수는 장만할 돈이 없어서 중고나라, 지금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애용하는
'당근'이라고 하는 그런 매개체 속에서 많은 혼수 물품을 이민 가는 가정에 가서 다 실어와서 저희 신혼집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준비했던 그 결혼이 아직까지 생각하면 설레이고 행복하고 좋다라는 것, 기억나시고 이 생각이 되어지세요?
저는 그때 당시에 일주일 전에 구해진 그 집, 별로 좋지도 않았던 그 작은 아파트의 평수였지만 그 집에 살았던 그 때,
들어가서 아무것도 없는 물품이 하나도 없던 그 공간에서 이불만 펴놓고 잤던 그 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행복하고 너무나 좋아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에 왜 결혼이라고 하는 이 매개체를 사용하실까 저는 너무나 잘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면 너무나 설레고 너무나 행복하고 좋고, 막 기쁘고...
이 마음이 주체할 수 없는 것이 결혼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오늘 청년부 소개가 있던데,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우리 청년들에게는
귀한 짝을 만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이 결혼의 이야기로 오늘 본문을 풀어가는데
우리가 읽진 않았지만, 1절과 2절의 말씀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이렇게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국이라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비유를 드신다라는 것인데,
그것은 임금의 아들의 결혼식을 여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임금의 아들의 결혼식, 이곳에 초대 받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지금 예를 든다면, 대통령님의 자제 분의 그 결혼에 초대 받는다라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고 아주 큰 감사의 제목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임금의 아들의 결혼에 초대받는 그 청첩장을 받는 것만 해도
엄청난 특권일 수 있고 축복일 수 있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그 청첩장과 초대를 받은 그 사람들의 반응이 "싫어했다"라고 적혀 있어요.
심지어 그 싫어한다라는 표현을 보게 되면, 미완료 시제가 적혀져 있거든요.
헬라어로 보면, 미완료 시제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싫어했다'라는 것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라는 것을 적용시켜 보면 '계속 싫어했다'라는 거예요.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장을 받았는데, '아~ 싫어요. 별로 안 가고 싶어요. 관심 없어요'라고 하는 것을 진행형
계속해서 언급했다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자녀분들의 결혼을 준비하면서 청첩장을 돌렸는데,
받으시는 분이 별로 안 가고 싶어하는 눈치를 그 앞에서 드러내신다면
여러분 기분 좋으시겠어요. 상당히 마음이 좀 상처가 되고 어려우시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임금도 충분히 종을 통해서 보냈던 그 청첩장이
이렇게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 받으면 마음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을 보면, 임금이 어떤 선택을 하냐면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여러분, 이해가 되세요?
4절의 말씀을 보니까, 임금이 오지 않으려고 하는, 싫어하는, 계속 거부하고 있는 그 초대한 사람들에게 다른 종들을 보냅니다.
그 이전의 종들이 혹시나 결례했을까봐 그 종들이 혹시나 실수했을까봐 다른 종들을 선별해서
좀 더 예의가 있고 좀 더 격상있는 정말 이 예의를 갖추는 그 종들을 뽑아 가지고 다시 한번 보냈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 종들을 통해서 세 가지를 약속하고 어필하고 있거든요.
본문 4절에 보니까, 첫 번째는 다른 종들을 보낸다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찬을 준비한다라는 것이거든요.
여기 '오찬'의 내용에 보면 무엇을 준비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는데,
"소와 살진 짐승, 그리고 모든 것을 갖춘 잔치로 준비하고 있다"라는 것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임금의 태도예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임금이 하대할 수 있는 이 아랫사람들에게 [오소서]라고 하는 표현을 쓰면서
와주실 것을 부탁하고 애원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4절의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새벽에 여러분들이 몽롱하시겠지만,
5절과 6절의 말씀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번 보셔야 될 이유가 있거든요.
5절과 6절의 말씀을 여러분이 한 번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어 볼까요..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여러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세요? 임금의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이 싫어했다라는 것도 우리가 납득하기가 어려운데
너무나 영광스러운 그 자리를 왜 마다하고 싫어할까, 이렇게 우리가 좀 어이없이 바라볼 수 있겠는데
그렇게 반응했던 사람들에게 임금이 다른 종들을 택해서
좀 더 예의를 갖추고 좀 더 많은 준비를 했다라고 어필을 하면서 그들을 보냅니다.
"소와 살진 짐승을 다 준비했으니 와 주십시오. 잔치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가 갖추었으니 좀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소서]라고 하는 표현을 더불어서 그 마음을 표현하거든요.
그러면 이 정도 임금이 했다고 한다면, 한번 종이 왔다가 간 자리에 다른 종들이 와서 임금의 마음을 이렇게 전해준다면
"아, 임금이 정말 마음이 간절한가 보다. 정말 귀한 잔치가 열리나 보다" 우리 마음이 변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어떻겠다고요.
방금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읽었던 5절과 6절의 말씀을 보면 [자기 밭으로 가버립니다.]
자기 사업하러 바쁘게 떠나버려요. 자기 일이 바쁘다라는 거예요. 임금의 초대보다 내 삶, 내 시간, 내 뜻, 내 마음이 더 중요해서
임금의 초청에는 안중에 없고, 내가 쓰고 싶은 시간대로 내가 하고 싶은 곳으로 내 이익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대로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버립니다.
이것도 충격적인데, 6절의 말씀의 좀 더 나쁜 사람들은 그 왔던 다른 종, 두 번째로 왔던 그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입니다.
모욕하고 죽여요. 비유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여러분들이 상상이 되세요?
임금의 초대장을 발로 걷어 차버리고 "싫습니다. 정말 가기가 싫어요."
미완료 시제처럼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는 이 사람들의 이 행태를 임금이 알고 나면 "여봐라! 저 설교 중에 조는 자를 처단하라"
이렇게 할 텐데 충분히 그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임금이 다른 종을 보내어서 설득하고 있다니까요..
"오소서! 내가 소를 준비했습니다. 살찐 짐승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내가 준비했으니까, 오시면 부족할 것이 없을 겁니다.
정말 최고급으로 내가 준비할 테니까, 꼭 이 자리를 오셔서 빛내주십시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임금의 또 다른 초대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업 하러 자기 밭으로, 내 이익과 내 시간과 뜻대로 내 마음에 따라서 임금의 초대를 거부하고 떠나버립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종들이 계속해서 재촉하고 권유하니까, 짜증이 나서 그 종들을 모욕하고 죽여요.
여러분들이라면, 아들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상황이라면,
이 본문을 대했을 때 여러분들이 임금에 위치에 있는 분들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저의 말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상당히 표준어를 쓰고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네 저는 고향이 부산이거든요.
부산의 상남자 스타일로 한다면, 이렇게 되면 작살이 납니다. 가만두지 않지요.
"그 동네가 어디냐? 그 사람들이 어느 집 주소의 사람들이냐? 이름이 무엇이냐?" 호구 조사를 확실히 해서,
나의 이 초대, 나의 이 바램을 이렇게 짓밟고 무시하는 자들이 누군가 하나하나 밝혀서 보복하고 복수했을 것입니다.
정말 죄송하다고 무릎을 꿇고 싹싹 빌 만큼 본때를 보여주는 그 마음이 아마 제 마음 가운데 들 거예요.
여러분들은 되게 자상하시고 우아하시니까 저와는 좀 더 다른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이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처럼, 다른 종을 보내서 또 다시 설득하시고
"살찐 소 짐승, 내가 다 준비했으니까 와 달라"는 이 멘트, 이런 행태, 이런 행위를 여러분들 하실 수 있으세요?
오지 않으려고 하는 자에게,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심지어 내가 보낸 그 메신지를 전하는 메신저를 잡아 죽이고 모욕했던 그 사람들을 여러분 가만히 놔두고 보실 수 있으십니까?
이 상황 속에서, 여기 본문에 나오는 임금은 드디어 칼을 빼 듭니다.
무시한 그 자들, 종들을 잡아 죽인 자들, 그 동네를 불사르고 또한 뒤엎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충분히 이해가 되잖아요.
임금이라면, "아, 그러셔야지~ 그렇게 무시하고 그렇게 괄시했으니까 그 동네는 불살라지는 게 맞아.
그렇게 사람을 죽였던 그 사람들은 처벌받는 게 맞아."라고 당연히 여기시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 이후에 여러분들의 선택은 어떤 선택이어야 합니까?
"아, 이 동네는 안 되겠다. 이 사람들은 안 되겠다. 초대하지 말아야 되겠다." 이렇게 결정을 해야 되는데,
오늘 우리에게 주는 7절과 8절의 말씀 이하에 보면, 임금이 다시 종들을 보냅니다. 세 번째 종들을 보내요.
이제 어디로 보냈는지 아세요? 9절의 말씀을 보면, 지적했던 각각의 사람이 아니라 네거리 길로 종들을 보냅니다.
여러분, 네거리 길이 무엇일까요? 제가 주석을 살펴보고 찾아보니까
네거리라는 것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공간, 그 길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종을 보냈는데 거절하고, 거절을 당하고, 또 다른 종을 보내서
"내가 이것도 준비하고 이것도 준비했으니까 와 주십시오"라고 얘기했는데, 그 종들을 잡아 죽이는 백성들에게
그 이후에는 네거리 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그 공간에 종들을 다시 보냅니다.
다시 보내서 "이 잔치에, 임금의 아들의 결혼식에 꼭 와 주십시오."라고 하는데
그 대상자가 누구냐면,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들어 보시겠습니까?
(10절)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여러분,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볼게요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여러분, 질문 있습니다. 여기 지금 혼인잔치에 모여든 사람들은 원래 초대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던 사람들인가요? 아닌가요?
아니지요.. 어떤 사람들이지요? 어떤 사람들이 지금 이 혼인 잔치에 가득 메우게 되었지요?
자격 없고, 초대권이 없던 사람들, 네거리 길에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이 우연히 이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소식을 예기치 않게 접했던 저와 여러분들처럼 말이지요.
받을 자격 없고 공로 없는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사랑으로 찾아오신 이 예수님의 사랑, 여러분들 다 누릴 자격이 있으신 분들이신가요?
저는 목회를 하면 할수록 제가 낮아질 수밖에 없고,
볼품없는 사람이고, 너무 초라하다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왜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해 주셨지?" 하는 생각, 이 질문에서 해답을 못 찾기 때문입니다.
"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셨지? 왜 나 같은 인간을 사용하시지?"
"왜 나를 통해서 저 아이를 살리려 하시지? 나도 부족하고 나도 부끄러운데"라는 생각 때문이에요.
제가 바로, 네거리 길에서 나도 내가 바쁜 삶을 찾아 떠나고 있던
임금의 아들의 그 결혼식에는 도무지 갈 수 없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초대해 주신, 네거리 길에서 들려오는 그 소식......
"누구든지 이 천국 잔치에 오십시오! 왕이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자격 없던 제가 그 자리에 가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에요.
저와 여러분들이 한 달에 한 번 주안의 가족들이 다 모여서 새벽을 깨우는 이 자리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가정을 이루고
예수님의 신실한 신앙인,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가문으로 자랄 수 있는, 커갈 수 있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
여러분 당연한 것이 아니지요. 주의 은혜로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지요..
우리가 뭘 잘 나거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종을 보내시고, 또 다른 종을 보내시고
그래도 듣지 못하는 나를 위해서 다른 종을 사거리에서 외치도록 하셨기 때문에 저희가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까?
말해도 말해도 듣지 못하는 저희들을 향해서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22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여러분이 쭉 읽어보시면, 깨닫는 첫 번째 핵심 메세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 [임금은, 한 명이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혼인잔치, 이 결혼식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계세요.]
여러분, 이게 주안의 다음 세대 우리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에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 오기를, 한 사람이라도 더 오기를, 알기를
간절하게 원하시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저는 믿고 확신해요.
그리고 이 본문을 통해서 두 번째로 깨닫는 것은,
그러나, 이런 간절한 임금의 초대의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나도 매섭고 차갑습니다. 무관심이에요.
제가 이 본문을 보면서 누가 떠오르냐 하면, 제가 지금 사역하고 있는 저희 교회 중등부 아이들이 떠올라요.
시험 기간, 이 몇 주간을 지나면서 출석률이 뚝뚝 떨어집니다. 제가 와서 한 4년 정도를 담당하면서 그렇게 많이 외쳤거든요.
제가 약간 사투리가 좀 있어서 양해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 그러다 지옥 간다' 막 이렇게 제가 막 호통치면, 밤에 전화가 와요.
'목사님, 오늘 좀 심하신 거 아니에요? 설교 좀 너무 세게 하신 것 아니에요?'
'뭐가 세냐?'
'아니, 애들한테 지옥 간다라고 이야기하는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성경이 그렇게 많이 말한다." 제가 이렇게 얘기했더니,
아이들이 '어디요 어디요?' 막 얘기하니까 제가 그 구절 구절을 찾아줬어요.
하나님은 천국에 대한 이야기보다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거든요.
'너희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계속 너희들의 삶을 위해서 그 이익을 따라 살면 진짜 믿음 없이 살아가면,
나중에 교회를 다닌 사람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차이를 보게 될 수 있다.' 제가 이렇게 가르칩니다.
4년을 그렇게 똑같이 선포해요. 아이들에게 때로는 강압적인 저주를 하기도 합니다.
'야, 너 이러면 진짜 큰일 난다. 하나님께 혼난다. 너희 하나님이 치신다' 막 이런 얘기하면서 협박하기도 해요.
그 목사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 아이들이 하나님을 선택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시험 기간에 주일 예배를 빠지고 학원을 가거나 과외를 받는 그것을 내가 끊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 분당에 있는 중등부 아이들에게 제가 이렇게 많이 호소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해가 거듭할수록, 아! 이 싸움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집니다.
소통이 되어지지 않고, 설득이 되어지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게 돼요.
요즘 아이들은 믿음보다 자신의 공부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정확하게 말하고 표현하는 세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에요.
"주일 성수! 오직 믿음!" 이런 단어를 꺼내기가 참 어려운 시대가 되어져 가는 것을 사역의 현장 가운데 느낍니다.
특별히 저희 아이들을 봤을 때, 중등부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이구나 생각이 듭니다.
본문에 나오는 임금의 이 초대장을 받으면서도 냉랭함과 무시와 괄시로 임하고 있는 이 본문의 모습이
마치 저희 아이들 같고, 저희 부모님 세대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 본문의 문맥을 쭉 살펴보게 되면
임금이 정말 화가 나서 그 도시를 불태우고,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다시 네거리에 보내서 사람들을 다시 모아 오고 있는 이 모습이 나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간절하신지,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해서 진심이신지,
얼마나 애원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바라보고 계신지 저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4절의 말씀을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혼인잔치에 사람들로 가득해지는 그 광경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가득 찼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인정하셨던 것처럼 거기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초대장을 받을 만하거나
이 초대에 응할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연관이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본인도 먹고살기 바빠서 네거리 길에 가서 내 직장으로, 내 자녀의 일로, 나의 뜻과 내 시간을 위해서
네거리 길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연찮게 임금의 초대를 받아서 이 공간 가운데 와 있는 것이지요.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내가 왜 여기 서 있지? 내가 왜 이런 은혜를 누리고 있지?
내가 왜 이런 호사를 내가 누리고 있는가, 어이없어 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모여있어요.
하나님이 그 모든 사람들을 다 이해하시고 받아주시거든요.
그런데 딱 한 사람, 딱 한 사람이 쫓겨납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바로 결혼식에 맞는 예복을 입지 않은 단 한 사람이 쫓겨납니다.
여기에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지옥을 설명할 때, 그 표현이 등장하거든요. "슬피 이를 갈며 울게 되리라"
"어둠 속에서 정말 가슴을 치면서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게 결혼식에 초대 받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다 허용되고 납득이 되어져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서 그 잔치에 참여하게 되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옷을 갖추지 않은 그 한 사람은 쫓겨나서 이를 갈며 울게 될 것이다. 저주를 받게 돼요.
사랑하는 주안의 한 가족 여러분,
특별히 우리 다음 세대 자녀 여러분, 여러분들이 한번 대답해 보시겠습니까?
왜 예복을 입지 않아서 쫓겨났을까요?
그렇게 네거리까지 세 번의 종을 보내면서 초대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왜 다 용납해 주실 것만 같고,
다 이해해 주실 것 같은 우리 하나님, 사랑이신 그분이 왜 유독 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만 강력하게
"쫓겨나서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슬피울 것이다. 평생 가슴을 치며 후회할 것이다."라는 엄포를 놓고 계시지요?
이유가 딱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예복을 입지 않아서입니다.
자기 삶대로 바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갔던 사람들 다 용서해 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받아주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은 용납 못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천국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대답해 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예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이 예식에 맞는 이 예복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이 예복은 너무나 간단한 대답, 한 단어입니다.
무엇이지요? -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옷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은 쫓겨나는 것이에요.
믿음이라는 옷만 입어도 그 잔치에 허용되는, 너무나 문턱이 낮은 그 잔치인데
'믿음이란 옷을 입지 않은 그 한 사람은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현실' 이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우리가 말씀을 살펴본 것을 좀 정리해 볼까요?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는, 2절의 말씀을 근거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이와 같다"라고 설명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결혼식을 베푸는 임금과 같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임금은 한 사람이라도 내 아들의 결혼식에 더 참여해서 누리면 좋겠다.
이렇게 큰 본당에 결혼식을 할 때 가득 메워지는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뿌듯하고 기뻐요..
내 자녀의 결혼식에 본당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배가 부를까요..
축의금이 얼마가 들어올까, 또 어떤 축하를 받을까? 이것보다도
사람들이 꽉 찬 상태로 박수를 쳐주고 기도해 주고 응원하는 그 결혼식...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런데 이 임금의 기대와는 달리 받는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나 매섭고 차갑잖아요.
싫다고 말하고, 싫다고 말하니까 다른 종들을 보내서
"소도 준비하고 짐승을 내가 잡고 모든 잔치에 필요한 것을 전부 다 준비할 테니까 한 번만 와 주십시오.
제발 좀 오십시오. 내가 최고급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임금 앞에,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을 한답시고 자기 바쁜 시간대로 떠나버리는 사람들, 무시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종들을 잡아서 모욕하고 죽였던 자들, 그런 동네를
하나님은 그 동네를 위해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결국 또 다른 종들을 보내 네거리에서 누구나 초대합니다.
그 "누구나" 안에는 오늘 본문의 표현처럼 [악한 자도 포함되어 있는] 그 사람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처럼 악한 자들 말이지요. 자격 없는 자들, 초대 받을 자격 없는 자들, 정말로 부끄러운 자들...
"하나님, 내가 무엇이길래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십니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악한 선한 게 하나 없는 정말 저희 같은 악한 자들을 하나님은 불러 모아주셨어요.
"다 오십시오. 누구든 오십시오. 다 괜찮습니다. 오시기만 하면, 내가 준비한 이 모든 것을 다 나누겠습니다."
온 사람들이 다 어안이 벙벙해요.
"내가 왜 이 자리에 와 있지? 야! 저 사람도 와 있네! 야, 저 사람은 진짜 나쁜 사람인데 악한 사람인데
야 저 사람도 있구나, 야 저 나쁜 놈도 있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그 결혼식의 모습 속에서
그 모든 사람들은 다 허용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이, 단 한 사람은 내쫓으세요.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데 내던지라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저와 여러분들이 읽었던 오늘 본문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우리 14절의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여러분,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의 초청, 이 청함을 받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라는 거예요. 이 시대에 설교의 홍수에 살아갑니다.
유튜브 틀거나 TV 프로그램을 틀었을 때, CTS CBS 등등 설교의 방송.. 그런 많은 홍수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조금만 애를 쓰면, 얼마든지 나와서 기도할 수 있는 환경에 우리가 살아가지요.
마음껏 신앙 생활하고,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메시지,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우리 귀에 너무나 많이 들려오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어요.
청함이 너무나 많이 들려옵니다. 우리를 사랑한다 말씀하시고, 그래도 괜찮다 말씀하시고, 그래도 너를 이해한다 말씀하시고,
"그래도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나의 딸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귓가에 계속 메들리 치는 인생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청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택함을 입는 자는 적습니다.
그 청함의 목소리를 듣고 내 자신의 삶을 내던져서 믿음이라는 예복을 입는 자는 적습니다.
한쪽 발은 교회에 한쪽 발은 세상에, 한쪽 발은 믿음에 한쪽 발은 내 성공에 걸쳐 있는 사람들은 참 많을지 모르나
두발을 다 떼서 교회로 옮기고 믿음으로 옮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 결정하는 것, 내 삶을 드리는 사람 적습니다.
이것도 잘되고 저것도 잘 되는 것 다 원하는 것이지만, 항상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 [전부를 요구하시거든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밭에 감추인 보화 이야기가 있지요.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어떻게 하지요?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삽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 나라는, 전부를 거는 전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전부를 내어주시며 만들어 놓으신 제도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전부이신 그 아들을 포기하시면서 만드신 하나님 나라!
그러니까 우리에게 그 한 가지 원하시는 건 사실 우리 삶을 다 내던질 수 있는 믿음이라는 전부입니다.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저는 다음 세대가 문득문득 떠오르고 또 마음에 걸립니다.
제가 이번 여름에 여러 곳에서 청소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계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이 본문 말씀 가지고 씨름 하려고 하거든요.
여러 말씀들을 준비했지만, 특별히 이 말씀이 가슴속에 와닿았던 이유는 한 가지예요.
하나님의 간절함이 이 본문 가운데 느껴지기 때문이거든요.
하나님이 얼마나 애원하시는가, 애절한 마음으로 이 나라를 준비하고 계시는가,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 외치는데도 불구하고, 관심이 없고 무관심한 세대를 향해서
"내가 이것도 준비했고 저것도 준비했으니 얘들아 제발 이것 좀 봐주라!"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아서, 너무 작아서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대상 같아요.
커지기 전에 보이지 않는 그 좁쌀보다도 작은 겨자씨와 같아서
하나님의 이 마음이 우리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는 첫 번째 결론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간절함으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애원, 하나님의 애절함으로 세워지는 나라,
좀 와 달라고 조금만 관심 가져 달라고 애원하고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저는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특별히 이 여름, 7월과 8월 청년들도 막 많은 사역들을 준비하고 있고, 다음 세대가 수련회로, 여름 성경학교로
이 시간들을 보낼 때 우리 주안장로교회 다음 세대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전부를 내던져서 믿음을 쟁취할 수 있는
믿음의 예복을 갖추는 계기가 되고 기회가 되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또 깨닫는 것은
그 나라에 자격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라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들처럼 말입니다.
자격 없고, 연관 없고, 소망 없는, 도무지 그 자리에 갈 권한이 없는 권위가 없는 저희들이
그 자리에 모여서 어이없어 하고 어안이 벙벙합니다.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와 있는지, 내가 어찌 이 사랑을 받았는지,
나도 나를 위해 살던 사람이었는데, 내 삶을 쫓아 네거리를 지날 뿐이었는데, 내가 여기에 서 있네!
은혜를 고백하게 되는 그 장소가 바로 하나님 나라처럼 천국이지요.
마지막 세 번째, ※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요.
그러나 그런 [청함을 받은 자가 무수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단언하십니다.
[택함을 입은 자가 적다]라고 말이지요. 택함을 입은 자가 적습니다.
청함을 받는 사람들은 참 많은데, 그중에 마음을 내던지고 삶을 내던져서
믿음의 예복을 준비하는 자가 적다라고 하나님께서 걱정하시며 우리에게 마음을 표현하십니다.
여러분 한번 눈을 한번 감아 보시겠어요.
제가 여러분들께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던지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주안장로교회의 성도 여러분, 우리 다음 세대 여러분,
여러분들은 청함을 받은 자 들입니까? 아니면 택함을 입은 자들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현재 믿음이라는 옷, 그 예복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내 삶으로 내 밭으로 내 이익을 따라서 내 기쁨을 따라서 쫓아가고 있는 삶이십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우리가 꼭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바로 예복입니다.
그 예복을 우리 주안의 다음 세대가, 우리 교회의 자라나는 우리 다음 세대가, 자녀들이
다른 것 준비 못해도, 조금 좋은 직장 못 가고 좋은 학벌을 못 가진다 하더라도
정말 이 하나님의 간절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예복,
십자가의 믿음,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십자가의 그 믿음 가지게 되는 이 여름의 시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
사랑하는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진심이신지,
다음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하신지, 말씀을 통해 살펴봅니다.
사랑하는 주님, 자격 없는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고 뿐만 아니라 그곳 가운데 있게 하시며
어안이 벙벙하고 어이가 없는 저희들에게 다 용납해주시는 그 나라,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들려오는 청함의 소식들, 하나님의 초대의 소식들이 우리에게 들려질 때 믿음으로 쟁취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이 여름에 우리 청년 세대가 우리 자녀의 세대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내던지고 믿음을 부여잡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 되심을 기억하고 결단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예복을 준비하는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간절함으로 나머지는 그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길 원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로 끝나지 않고, 택함을 입는 자로서 하나님의 이 초대하심에
"주님 감사합니다. 나 같은 죄인 초대해 주시고 살려주시고 이곳 가운데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예복을 입은 것에 감사하는 저와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그렇게 하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