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흔아홉 암자와 함께함서 내포의 중심이자 호서지방 최고의 명산인 가야산!
1500년 前에 빚어진 호국불교의 聖地와
180년 前에 저질러진 훼불(毁拂)의 현장에서 머문 하루 ▣
☆ 일시 : 2023년 3월 11일.
☆ 산행코스 : 서산 용현계곡~마애여래삼존상~보원사지~개심사~일락산~석문봉~가야봉~
육관도사묘~남연군묘~예산 상가리 주차장.
☆ 산행거리 및 시간 : 14km, 5시간 50분.
용현계곡을 일명 강당계곡이라 부른다.
이 계곡은 고려 시대 탄문국사가 입적한 큰 사찰 보원사가 있었던 자리로
이 보원사(普願寺)를 일명 강당사라고 부르기 때문이며, 이때부터 강당계곡이라 부르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보원사 강원에서 孤雲 최치원 선생을 비롯한 스님들이 강(講)을 하였으며,
그때마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그로부터 보원사 이름도 강당사라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강당골은 쥐 형국으로 하천을 건널 수 있게 다리를 놓음으로써
건너편에 있던 고양이가 쉽게 개울을 건너 쥐가 잡어 먹히여
불교의 성지로 찬란했던 100여 개의 사찰들이 모두 쇠하여 없어졌다고 한다.
전설에는 상왕(像王)이 도장을 가운데 감추었다고 한다.
본읍 성주 모씨가 그 말을 듣고 이를 취하려고 석공을 불러
큰 정으로 깨뜨리려 하였을 때 갑자기 운무가 모여들더니
천둥과 함께 소낙비가 내려 모든 산천이 진동하였으며 지척을 분간치 못했다.
성주는 크게 놀라 두려워하여 "귀신이 보호함을 알겠다"하고 즉시 중지했다고 한다.
1500년 세월이 무색하게, 섬세하기 그지없는 세 인물상의 변함없이 해맑은 웃음이
처음 보는 이도 여러번 본 이도 감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높이 2.8m에 이르는 마애여래삼존상과 마주 섰을 때를 기준으로,
가운데는 현세불을 의미하는 아미타여래입상이 있고,
왼쪽에는 과거불을 의미하는 관음보살(제화갈라보살입상, 1.7m)이,
오른쪽에는 미래불을 의미하는미륵보살(반가상, 1.66m)조각돼 있다.
최고로 꼽히는 건 여래의 ‘미소’와 제화갈라보살이 보여주는 '만면의 웃음'이다.
여래입상은 올라간 입꼬리로 환하게 웃는데, 미소에서는 위엄보다는 천진함이 묻어난다.
크게 뜬 눈과 활짝 웃는 미소는 고전적인 양식이면서도 틀림없는 백제의 미소라 할 수 있다.
그 미소가 ‘신비한 미소’라고 불리는 것은 부처의 표정이 빛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양쪽의 협시 보살들도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여자다운 모습이라서
‘살짝 토라진 본부인에 의기양양해진 첩 부처’라는 장난스러운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나 편안하게 만드는 너그러운 이런 웃음이 고구려의 미소를 백제화한
한국 불상의 독특한 형태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 전문가에 의해 공식 확인되기 전까지 마애삼존불은 주민들에게 ‘마누라 두 명을 둔 산신령’으로 여겨져 왔다 -
1959년에 당시 국립 부여박물관장인 홍사준 박사는 대형 절터인 보원사지 발굴 조사를 나왔다가
인근에 뭔가 다른 유물이 없을까 하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탐문에 나섰다.
그러던 중 한 나무꾼으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건 못봤지만유,
저기 인바위 위에 가면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있는디유.
양 옆에 본마누리와 작은 마누라도 있지유.
근디 작은 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로 쥐어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셔서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마애여래삼존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며,
백제 불교미술이 절정을 이루던 사비시대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백제인의 넉넉한 성품을 고스란히 간직한 백제미술의 정수로 손꼽힌다.
백제 위덕왐(554~597)때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중국 교역로의 중심지였던 태안반도(옹진 덕적도)와 백제의 수도인 공주, 부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했던 지리적 요충지에 만들었던 것으로 정리된다
학자들은 장거리 뱃길을 떠나는 이들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기원하려고
이 마애여래삼존상을 조성했을 것으로 주장합니다.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햇빛은 불상의 얼굴에 마술처럼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1959년 발견된 뒤 1965년부터 40여년간 보호각을 설치했으나,
햇빛이 차단되면서 습기·곰팡이로 훼손 우려가 있어 2007년 완전히 철거했다.
보호각이 철거되면서 햇빛 방향에 따라, 막 무슨 말을 건넬 듯 부드럽게 미소짓는 얼굴로,
또 유쾌한 표정으로 변하는 본존불의 복스러운 얼굴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1959년 봄에 나뭇꾼에게서 전해듣고서 현장을 답사한 홍사준 관장은
곧 바로 국보고적보존위원회의 김상기, 이홍직에게 보고했다.
그 후 국립박물관장인 김재원 박사와 황수영 교수가 현장 조사를 벌였으며,
여러 차례 연구조사를 거쳐 1962년에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고고학자(考古學者)인 김원룡(金元龍, 1922년~1993년) 박사가
<한국 고미술의 미학>에 기고한 것에서 백제의 미소가 탄생했다
“백제 불상의 얼굴은 현실적이며 실재하는 사람을 모델로 쓴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미소 또한 현세적이다.
군수리 출토 여래좌상은 인자한 아버지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라도 듣고 앉은 것 같은
인간미가 흐르는 얼굴과 자세를 하고 있어서 백제 불상의 안락하고 현세적인 특징을 단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런 중 가장 백제 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은 작년(1959년)에 발견된 서산 마애불이다.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에서 보듯
살짝 치켜올린 입꼬리에 핀 희미한 미소.
한 다발, 두 다발 조각된 얼굴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표정의 향기 한 송이의
‘백제의 미소’를 떠올려 본다.
우리가 매일 매일 입꼬리가 올라가는
‘미소’를 짓고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건 지나친 욕심일까?
억지로 만들어진 가식적인 웃음인 "팬암의 미소"가 아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뒤센의 미소" 같은
‘백제의 미소’ 로 말이다!
訪仙岩이란 글귀의 서각과
그 아래에 윤선좌(尹善佐), 한맹유(韓孟裕), 김진(金璡), 홍병권(洪秉權) 등 네 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분들은 시회(詩會)를 대표하는 분들로 여겨지는데 이중 윤선좌는 1815년 12월13일 운산면 용장리 용못에서 태어나
현종 4년(1838)에 풍기군수와 통정대부(通政大夫)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문인이다.
그는 인근 해미현의 문사들과 어울려 명경지수가 흐르고 산자수려한 이곳 방선암 앞에 있던
마당바위(지금은 도로 개설로 매몰되었음)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현장에서 직접 지필묵을 펼쳐 시를 쓰고
시평(詩評)을 하며 즐겼던 역사적 현장이 방선암이다.
이생진 시인은 이곳 서산 태생이며, 대표적인 섬 시인으로
'그리운 바다 성산포', '하늘에 있는 섬', '우이도로 가야지',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 '독도로 가는 길', '실미도, 꿩우는 소리' 등 섬에 관한 시집도 34개나 펴냈다.
고흐의 바다
- 이생진 -
함부로 뛰어들 수 없는 바다
어부는 배가 있어야 하고
화가는 흥분이 있어야 한다
이젤을 세우는 순간 멍해진 고흐
생트 마리 드 라 메르 해안에서
지중해의 시퍼런 압력에
으스러져라 튜브를 짜는 혼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흰색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야성
바닷속으로 뛰어든
고등어와
고래와
상어의 눈에
뜨거운 아프리카가 보인다
서산마애삼존상이 위치한 곳에서 강당계곡을 따라 1.5㎞ 떨어진 지점인,
용현리 사적 제316호(지정연월일 1987. 07. 10)로 지정된
보원사지내 134번지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다.
보원사는 화엄종 종찰이었다.
최치원이 효공왕 8년(904)에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의상 스님의 화엄교학을 널리 알린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웅주(熊州) 가야협(伽耶峽) 보원사’를 언급하고 있고,
고려 화엄학의 대가 법인 국사 탄문(法印 國師 坦文, 900∼975) 스님이 입적하기 전
1년 간 이곳 보원사에 주석한 사실에서도 그것을 확인된다.
용현계곡의 보원사지는 백제 때 창건돼 통일신라와 고려 초에 크게 번창했다가, 보물 다섯 점으로 남은 폐사지다.
지금도 발굴이 진행중인 황량한 절터에,
보물로 지정된 거대한 사각형 석조(돌확)와 당간지주, 오층석탑,
그리고 고려 광종 때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의 부도탑인 보승탑, 법인국사보승탑비가 남아 있다.
절터에 있던 철불 2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1968년 발굴된 금동여래입상은 공주박물관에 옮겨졌다.
세상의 한곳은 촛점이요
나머지는 결국 아웃 포커싱이다.
카메라를 들면
촛점에서 벗어난
보통의 삶이 보인다.
평이한 일상 가운데 묻어나는
인생의 또 다른 면을 보는 것이 사진행위다.
사물에 나를 형상화시켜 세상을 들여다 보는 것 또한 재미있다.
나는 일천 년이 넘는 과거로 돌아가
수행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
낮은 세상이 보인다.
지구 어딘가에서도
내가 세상의 중심이듯
결국 마음을 안착시키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지붕 돌 위에는 무게 중심을 고정하는 찰주(擦柱)가 높이 솟아 있다.
안내문에는 목조탑에서 석조탑으로 변환되는 형식으로,
통일신라와 고려 초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끝을 살짝 들어 올린 모양의 옥개석은 백제 양식이라는 점도 덧붙여
정확히 누가 언제 세운 탑인지는 알 길이 없다.
금당지는 절의 본당으로 본존상을 모시던 전각의 자리다
법인국사 탄문(坦文)은 신라말·고려초의 명승으로
고씨(高氏)이며, 968년(광종 19)에 왕사, 974년에 국사가 되었고 이듬해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 왕은 ‘법인(法印)’이라 추시(追諡)하고 ‘寶乘’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碑文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한윤(韓允)이 썼으며, 김승렴(金承廉)의 각(刻)으로 세워졌다.
글씨는 2㎝ 정도의 구양순류(歐陽詢流) 해서로 필력과 짜임새가 구양순을 재현시킨 듯하다.
고려 초기에는 구양순체를 쓴 대가가 많았으나 그 중에서도 백미에 속한다.
보원사는 백제 말기에 창건하여 고려조에 이르러
99채의 절집을 갖고 一千 명에 이르는 스님이 수행하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서산 마애삼존불의 본사라고도 하고, 한때는 고란사라는 이름이었다고 하는데,
사찰의 승려가 많아서 쌀을 씻은 뜨물이 내를 흐르게 했고,
절에서 십여리 떨어진 마을에서 냇물을 떠다 끓여 숭늉으로 마셔
그쪽 벌판 이름이 숭늉벌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크고 작은 가람이 많아 비가 와도 맞지 않고 각 전각을 다닐 수 있었다는 큰 절집이었던 보원사!
백제계 석탑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5층 석탑,
1968년 출토된 금동여래입상 등을 볼 때 백제시대에 세워진 사찰로 추정될 뿐
정확한 창건연대도 알려지지 않았고 언제 왜 무너졌는지도 알 길 없는 수수께끼의 보원사지.
가야산은 한때 아흔아홉 곳의 암자가 있었을 정도로 불교가 융성했던 곳은 위에서 언급한 바!
그런데 가야산의 암자가 100곳이 되면 모두 망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100번째 암자가 백암인데, 이 암자가 창건되자 가야사를 비롯한 주변 모든 암자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일설에는 백암이 폐사된 것은 이인좌의 난 때 반역에 가담한 황진기가
승려로 위장해 이 절에 숨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개심사는 수덕사(修德寺)의 말사로 백제 때인 654년에 혜감국사가 개원사(開元寺)로 창건한 고찰로
1350년(충정왕 2년) 처능(處能)이 중창하고 개심사(開心寺)라 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꽃피어 화려한 때를 벗어나,
행락객의 소란을 피해
봄볕 아래 고요하게 걷는 길이었다.
봄꽃 피어 북적이는 곳을 찾지 않는다 해도
봄의 한복판으로 들어서는 지금 계절에는
어딜 가든 모자람이 있을까..
석문봉 전위 암봉에서 바라보니 석문봉~원효봉(뾰쪽봉)~가야봉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산행을 통해 어떤 결론에 도달하거나 추론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산행은 사포질과 같은 것이다.
닦아 내고 갉아 내어 맑고 부드러운 것에 서서히 도달하는 것!
본질에 이르는 것!!
도달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이 기나긴 과정을 통해
얻어진 지식과 경험에다 더하는 그 무엇을 얻는 것!!!
이것이 山의 묘미요, 行의 즐거움이다...
‘근대 풍수계의 거목’이라고 불렸던 육관도사 손석우의 묘가 석문봉 아래에 있다.
하늘의 으뜸 별자리 기운이 지상으로 내려와 우주의 중심을 이룬다는 곳.
육관도사는 그곳을 ‘자미원(紫微垣)’이라고 했는데,
거기가 어딘지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손석우가 말한 자미원이 그가 묻힌 자리가 분명하지 않을까.
죽어서 스스로 최고의 명당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그는 생전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권력자 일가의
선영과 묫자리를 잡아준 것으로 이름을 날렸던 풍수가였다.
김일성의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1993년 펴낸 풍수 책 ‘터’에서는 전주 모악산에 있는 전주 김씨의 시조 묘를 살피고는
‘그 후손인 김일성의 절대권력 운이 이듬해인 1994년에 끝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두 달쯤의 차이가 있었지만 김일성은 손석우가 지목한 그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육관은 1998년 일흔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세간의 관심은 그의 묫자리로 쏠렸다.
당대 최고의 풍수가를 자처했던 그가 자신의 묫자리를 명당 중의 명당으로 봐두었을 텐데,
그는 과연 자기 묘를 어디에다 잡았을까.
치악산에 묘를 썼다는 얘기도 있었고, 고향인 울진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의 묘 행방을 찾는 호사가들의 발길이 한동안 이어졌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대의 최고 지관(地官)인 육관 손석우의 도움을 받아 부모의 묘를 옮기고,
33년간 살던 서울 동교동을 떠나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한 뒤 대통령에 당선된 건 유명한 일화다.
‘남은들’이란 명칭은 지금의 덕산면 광천리로 당시 남연군의 묘를 첫 이장한 후
상여를 남은들 마을에 보관한 데서 유래하며,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 보관중이며,
이곳 상여 보호각에 전시된 복제품은
2001년에 국비 8천100만원 등 1억1천7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중요무형문화재 74호 전흥수 대목장과 무형문화재 32호인 배순화 매듭장이 제작한 것이다.
원래 남연군묘는 두 번의 이장 끝에 경기도 연천군 남면 남송정(현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에 있었다.
하지만 터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 흥선대원군은 가야사 금탑 자리(현재 자리)를
당대의 지사(地師)인 정만인(鄭萬仁)이
‘2대에 걸쳐서 왕손이 나온다(二代天子之地)’는 대명당으로 점찍고 1845년 가야사라는 큰 절을 불태운 뒤 묘를 이장했다.
이렇게 묘를 이장한 지 7년 후 흥선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으니 그가 곧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고,
고종의 둘째 아들이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다.
권력을 향한 흥선군의 욕망은 천년 고찰 가야사를 폐사시키는 악행으로 이어졌고,
고종의 즉위와 집권의 디딤돌이었던 남연군묘는 이방인이 도굴하는 참담한 일을 겪었다.
지관의 말대로 흥선군은 후손이 2대에 걸쳐 천자가 되는 영화를 얻었다.
하지만 2대 천자를 끝으로 500년 왕조가 멸망하고,
부친의 묘소가 파헤쳐지는 것을 보았으니,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비극이자 오욕이었다
세호는 상상의 동물로 덩치가 작으며, 나쁜 액운을 막아주고 잡귀를 쫓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망주석이 처음 도입되던 조선초기에는 땅콩모양, 귀모양등으로 중간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후로 직사각형 장방형의 모양 거북등껍질 같은 문양 구름문양등으로 변천되었고
조선 중기에 들어서 호랑이 문양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세호는 예술적인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통통하고 아담스런 세호가 가늘고 길쭉해 졌다가 급기야는 그 모습이 도롱뇽로 바뀌었다.
장명등은 일종의 석등(石燈)으로
사찰 또는 능묘 앞에 세워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곳 장명등은 화창 부분에 네 개의 구멍이 정확하게
동서남북(東은 옥양봉, 西는 가야봉, 南쪽이 아래 컷, 北은 주산인 석문봉)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명당임을 드러냈다
주산인 최정상(석문봉)과 청룡 백호의 끝자락이 만나는 지점..
청룡의 최정상(옥양봉)과 백호의 최정상(가야봉)을 정점으로 동서남북 열 십(十)자를 그으면,
그 교차점이 되는 정확한 한 가운데에 이곳 남연군의 봉분이 위치한다는 얘기다.
남연군( ?~1822)은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 이병원의 아들로,
정조의 이복 동생인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남연군에 봉하여졌다.
죽은 뒤에는 충청도 예산의 덕산지역에 묻혔는데, 고종 5년(1868)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해 도굴당하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묘 앞에 자리하고 있는 비는 높직한 사각받침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비 앞면에는 ‘남연군충정’이라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겨 놓았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된 후 이 비를 세워 두었으며,
영의정 조두순이 비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