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하면서 한 이야기 (19)
서장(書狀) 제 13강 -1 (2023. 05.30. 부산 해운대 포교원)
증시랑과 주고받은 네 번째 편지인 이 부분을 <三咄章(삼돌장)>이라 한다. 咄(돌)이라는 말이 3번 나왔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꿈에 육바라밀을 설했는데 꿈에서 한 것이 깨 있을 때와 같으냐 다르냐는 질문을 하였는데 여기에는 禪(선)에서 말하는 夢覺一如(몽교일여)의 뜻이 숨어 있다. 사리불의 물음에 수보리가 미륵보살에게 가 물어보라 한 대답에서 첫 번째 咄(돌)이 나왔는데 이는 ’왜 미륵에게 떠넘겼느냐‘는 뜻이다. 이것은 수보리에 대해 咄(돌)이라 한 것이다.
雪竇云
설두운
竇(두) 구멍 (독) 개천
설두스님께서 이르기를
雪竇 : 雪竇重顯(설두중현:980~1052)선사
宋(송)의 스님으로 설두중현(雪竇重顯)선사는 어릴 적부터 유학을 공부하여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는 특히 詩(시)에 재능을 발휘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세속의 부귀영화가 무상한 것을 깨닫고 23살에 출가를 결행했다. 그가 도를 깨달은 계기는 拂子(불자)에 얼굴을 맞고서다. 그는 운문종을 개창한 雲門文偃(운문문언), 香林澄遠(향림징원), 智門光祚(지문광조)의 대를 이어 운문종의 四代(4대) 조사가 되었다.
유학자 출신인 그는 글을 잘 하여 여러 가지 저술을 남겼다. 『설두개당록(雪竇開堂錄)』, 『동정어록(洞庭語錄)』, 『송고백칙(頌古百則)』, 『조영집(祖英集)』, 『폭천집(瀑泉集)』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서 단연 백미(白眉)로 곱히는 것은 『송고백칙』이다. 부처님 당시로부터 그가 살았던 11세기까지의 선사들의 오도 기연(機緣)과 공안에 송을 붙인 것이다. 선사(禪師)로서 공안에 대하여 본분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일종의 해설이다. 『傳燈錄(전등록)』에 있는 1700 공안을 100가지로 줄인 것이다. 이 송고는 분양선소(汾陽善昭)에 의해 시작되어 설두, 묵조선(黙照禪)의 거장이었던 굉지정각(宏智正覺), 무문혜개(無門慧開) 등이 송고집을 남겼다. 설두의 『송고백칙』은 후에 『벽암록』을 탄생케 한 모태가 되었다. 『조영집(祖英集)』에는 시가 한 200 편 수록 되어 있는데, 다 읽지는 못했으나 굉장한 시인이시다.
當時에 若不放過어든 隨後與一劄이어늘 誰名彌勒이며 誰是彌勒
당시 약불방과 수후여일잡 수명미륵 수시미륵
者오 便見氷消瓦解로다 하니
자 변견빙소와해
劄(잡) 찌르다
氷消瓦解 : 자취도 없이 없어짐
“당시에 만약 놓아 보내지 않으려거든 뒤를 따라가서 한 번 때려 줄 것을 누가 미륵이라고 이름하며 누가 미륵이 되는 자인가? 문득 얼음이 녹고 기와가 풀림을 보겠도다.”하니
대혜스님이 사리불과 수보리의 대화를 나눈 것에 대해 咄(돌)이라 하였고, 雪竇(설두)스님이 여기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當時 : 수보리가 미륵보살에게 가보라고 한 그 때에
若不放過 : 만약 그냥 내보내지 않으려거든
隨後與一劄 : 뒤를 따라가 한 대 때려주다.
나가는 사람 뒤에 따라가서 한 대 때려 주지 하는 말이다.
왜 미륵한테 떠넘겼는가 하는 뜻이다. 가만있지 않으려면 뒤따라가서 한 대 때려주지 하는 뜻이다.
誰名彌勒 誰是彌勒者 : 누가 이름이 미륵이며 누가 미륵인 자인가, 누가 미륵이라 이름하며 누가 미륵인 자인가
영문법에도 능동태와 수동태가 나오듯이 불교에는 能과 所가 있는데 能은 구체적으로 행위를 일으키는 쪽이고 所는 구체적인 행위의 입힘을 당하는 쪽이다. 誰名彌勒은 能彌勒(능미륵)이고 誰是彌勒者은 所彌勒이라고 볼 수 있다. 能彌勒(능미륵)과 所彌勒(소미륵)으로 하여 能所(능소)를 나눴다는 이런 의미도 들어있는 말이다. 이 글들을 예로부터 좀 어려운 대목이다.
便見氷消瓦解 : 문득 얼음이 녹고 기와가 풀리는 것을 본다
氷消瓦解 : 하나도 맞지 않고 와르르 무너져버림
기와를 굽기 전에 풀어져 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雪竇(설두)스님이 能彌勒(능미륵)과 所彌勒(소미륵)을 분별하였다, 禪(선)은 말을 잃은 소식이다. 쓸데 없이 이런 말 저런 말을 늘어놓아 能所(능소)를 분별하였다는 뜻이다.
咄雪竇亦 漏逗不少로다
돌설두역 누두불소
쳇! 설두 또한 허물이 적지 않도다.
咄雪竇亦 漏逗不少 : 쳇! 雪竇(설두)도 또한 허물이 적지 않구나
두 번째의 咄(돌)이 나왔다. 이번에는 雪竇(설두)스님을 咄(돌)하고 있다. 雪竇(설두)스님이 누가 미륵이라고 부르며 누가 미륵인 자이냐고 하면서 能彌勒(능미륵)과 所彌勒(소미륵)을 분별하고 얼름이 녹고 기와가 풀렸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이냐는 것이다. 咄(돌)이라는 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로 ’왜 그렇게 말하느냐?‘는 뜻이다. 옛날에는 ’애돌타‘라고 표현했는데 마땅치 않아 쳇! 하는 소리다.
或有人이 問只如曾待制夜夢에 入雲門之室이라 하니 且道하라
혹유인 문지여증대제야몽 입운문지실 차도
與覺時로 同가 別가 하면
여교시 동 별
혹, 어떤 사람이 묻되 “단지 증대제(증시랑)와 같이 꿈에 운문(대혜스님)의 방에 들었다고 하니, 또 말해보라! 깨어있을 때와 더불어 같은가? 다른가?”라고 묻는다면
只如曾待制夜夢 : 단지 증대제와 같이 밤에 꿈에서
曾待制 : 증시랑. 待制는 증시랑의 직책
入雲門之室 : 나의 방에 들어오다
雲門은 대혜스님 자신
且道에서 道는 ’말하다‘의 뜻
與覺時에서 覺는 ’깨다‘의 뜻으로 ’교‘로 읽음
雲門은 即向他道호대
운문 즉향타도
운문은 곧 그를 향하여 말하되,
雲門은 대혜스님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誰是入室者며 誰是爲入室者며 誰是作夢者며 誰是說夢者며 誰是
수시입실자 수시위입실자 수시작몽자 수시설몽자 수 시
不作夢會者며 誰是眞入室者오 하리니 咄亦漏逗不少
부작몽회자 수시진입실자 돌역누두불소
“누가 방에 들어가는 자이며, 누가 방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며, 누가 꿈을 꾸는 사람이며, 누가 꿈을 설하는 사람이며, 누가 꿈이라고 하는 생각(알음알이)를 짓지 않는 사람이며, 누가 진실로 방에 들어가는 사람이오?”라고 하리니
아아! 또한 허물이 적지 않음이로다.
誰是入室者 誰是爲入室者 : 누가 방에 들어간 자이며, 누가 방에 들어가게 된 자인가
대혜스님이 한 말인데 여기에서는 能所(능소)의 개념으로 말한 것으로 앞의 能彌勒(능미륵)․所彌勒(소미륵)과 비슷한 말이 된다. 누가 들어간 자며 누가 들어가게 된 자이냐고 하여 能所(능소)로 말하고 있다
誰是作夢者 誰是說夢者 : 누가 꿈을 꾼 자이며 누가 꿈을 말하는 자인가?
誰是不作夢會者 誰是眞入室者 : 누가 꿈이라고 하는 생각(알름알이)를 짓지 않는 자이며 누가 진실로 방에 드는 사람인가?
會 : 알다, 알음알이, 생각
꿈이지만 夢覺一如(몽교일여)가 되면 반대쪽에서 볼 때는 꿈이 아닌 것이다.
묻는 사람에게 대혜스님이 이렇게 네 가지로 말해 주겠다는 것이다.
咄亦漏逗不少
세 번째 咄(돌)이다.
대혜스님이 위와 같이 말해놓고 보니 자신도 똑같이 실수한 것이다. 그래서 咄(돌)이라 하였다. 즉 대혜스님이 자기 자신을 咄(돌)이라 한 것이다.
이렇듯 咄(돌)이 세 번 나왔다고 하여 ’三咄章(삼돌장)‘이라 한다. 증시랑의 편지에 나오는 ’三咄章(삼돌장)‘이 서장에서 禪(선)을 이해 하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고, 알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이것은 선지가 어느 정도 트여야 이해가 되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매우 어렵다는 말을 예로부터 해왔다.
* 다음은 증시랑과 주고받은 5번째 편지로 마지막 편지이다.
來書를 細讀數過코사 足見辦鐵石心하며 立決定志하야 不肯草草
내서 세독수과 족견변철석심 입결정지 불긍초초
호라
온 편지를 자세히 읽기를 여러 번이나 보고서 흡족하게 무쇠와 돌처럼 단단히 결심한 마음(鐵石心)을 가졌으며, 결정한 뜻을 세워서 기꺼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음을 보았노라.
細讀數過코사 足見辦鐵石心하며
足見辦鐵石心 立決定志 不肯草草 : 족히 철석 같이 결심이 단단한 마음을 가졌으며 결정한 뜻을 세워서 기꺼이 대수롭지 않게 여김을보았다
鐵石心 : 무쇠와 돌과 같이 결심이 단단한 마음. 증시랑의 굳은 결심을 대혜스님이 보아서 흡족했다는 뜻
見 ~ 草草까지 해석
不肯草草 : 기꺼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편지를 여러 번 읽고 증시랑이 공부에 대단한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느꼈다는 말이다.
但只如此崖到臘月三十日하면 亦能與閻家老子로 廝抵하리니 更
단지여차애도랍월삼십일 역능여염가노자 시저 갱
休說豁開頂門眼하고 握金剛王寶劍하야 坐毘盧頂上也이다
휴설할개정문안 악금강왕보검 좌비로정상야
臘(랍) 꺾다. 부러뜨리다
廝(시) 하인
撕(시) 훈계하다
抵(저) 막다
다만 이와 같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臘月三十日) 차츰차츰 다가가 이른다면(죽을 때까지 꾸준하게 공주를 해나가면) 또한 능히 염라대왕(閻家老子)과 더불어 서로 겨루리니, 다시 정수리에 있는 눈을 활짝 열고 금강왕 보검을 쥐고서 비로의 정수리 위에 앉는다고 말하지 말라.
崖到臘月三十日 : 목숨이 다할 때까지 차츰차츰 다가가 --- 주을 때까지 꾸준히 공부를 해나간다면
崖到 : 차츰차츰 다가감
臘月三十日 : 보통 섣달 그뭄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죽을 때, 임종 시를 말한다. 또 禪(선)에서는 견성할 때, 즉 悟道時(오도시)를 말하기도 한다.
閻家老子 : 염라대왕
중국사람들은 덕이 높고 뛰어난 어른을 호칭할 때 老子라는 말을 붙여서 釋迦牟尼(석가모니)부처님도 釋迦老子(석가노자)라 하기도 했다. 원래 도교에서 하던 말을 불교에서 수용하게 되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 가서 이승의 업을 심판받는다는 것이다. 그때 염라대왕 이 심판한다는 것이다. 원래 염라대왕은 불교에는 冥府十王(명부시왕)이라 하여 열 분의 저승 왕이 있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秦廣大王(진광대왕)·初江大王(초강대왕)·宋帝大王(송제대왕)·五官大王(오관대왕)·閻羅大王(염라대왕)·變成大王(변성대왕)·泰山大王(태산대왕)·平等大王(평등대왕)·都市大王(도시대왕)·五道轉輪大王(오도전륜대왕, 혹은 전륜대왕) 등이 있다. 이 중 다섯 번째인 염라대왕은 시왕 중의 우두머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큰 절에 가면 地藏殿(지장전) 또는 冥府殿(명부전)이라는 법당이 있는데 그곳에 저승 시왕 탱화를 다 모셔놓았다. 00생부터 00생까지 제1왕이 이승의 업을 심판하고, 또 00생부터 00생까지 제2왕이 심판하고... 그렇게 10명의 시왕들이 각각 저승에 온 사람들의 육갑의 띠에 따라 업을 심판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업을 비추는 거울인 業鏡臺(업경대)가 있다고 한다. 현장 스님의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에 보면 業鏡臺(업경대) 이야기가 있다. 이생의 업을 심판해서 다음 생을 결정하여 축생도로 보내기도 하고, 인간의 몸을 다시 받아오게도 한다고 한다.
廝抵 : 겨루다
염라대왕에게 끌려가지 않고 염라대왕과 겨룬다는 뜻이다.
염라대왕의 심판을 자기 수행의 힘 – 법력으로 이겨낸다는 것이다. 염라대왕이 이 사람을 함부로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여 자기 마음대로 못 보낸다는 것이다.
豁開頂門眼 다시 정수리의 눈을 활짝 열다
更休說豁開頂門眼 握金剛王寶劍 坐毘盧頂上也
죽을 때까지 공부를 꾸준하게 잘하면 설사 확철대오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염라대왕에게 이승의 업을 심판받는 일은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공부만 꾸준히 해가면서 깨치고 깨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공부만 그냥 꾸준히 해가면 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격려하는 말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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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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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세세생생 부지런히 공부하여서
豁開頂門眼하기를,
握金剛王寶劍하야 坐毘盧頂上也하기를 염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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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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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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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