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자를 서하리 집까지 데려다준 후 발길을 돌릴려니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피곤한 몸 쉴 곳을 찾아 방태산 자연휴양림을 찾아 들어갔으나, 코로나 때문에 산림청 휴양림은 모두가
휴관이라고 했다. 마땅히 떠오르는 행선지가 없어 가까운 원대리 자작나무 숲길을 찾아갔다.
일회용 비닐 우비와 우산을 사서 펴들고, 추억 속의 첫사랑 여인을 자작나무 숲속으로 불러내었다.
나에게는 정확하게 13년을 사귀다 헤어진 첫사랑 여인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헤어진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배신을 하고 내 곁을 떠난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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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9년생으로 황해도 옹진군 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부모님께서는 피란을 안 떠나시고 인근 해안가에 있는 무인도에서 숨어
계시다가 일사 후퇴 당시 목포로 피난 갔다가 인천에 정착했으니 인천이 고향인 셈이다.
인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1학년을 다니고, 2학년 초 인천해운항만청에 근무하시던 아버님께서,
강원도 철원군 신철원읍에 소재한 철원군농협으로 전근하심에 따라 갈말중학교라는 곳으로 전학을 왔고,
2년 후 다시 연천군농협으로 옮기시게 되어 연천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시골에서 자라난 분들은 모두 들 알고 계실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녀공학으로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에
한 반에서 여자애들과 공부를 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고 원치는 않았지만 남들 보다는 비교적 일찍
사랑이란 것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이는 동급생들이 나보다 두세 살이 많은 덕분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중학생일 때는 워낙 어린 탓에 좋아하면서도 표현을 하지 못하는 짝사랑을 하게 되었고,
강원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고등학교를 입학해서는 한 학기를 다니고 부모님이 계신 연천고등학교
로 전학을 가서,
담임선생님에게 이끌려 교실에 들어서서 전학을 왔다는 인사말을 전했을 때, 갑자기
"재는 내 거다"라고 외친 여학생을 만나면서부터 평생 지우지 못할 멍을 지닌 채 살게 되는데 그녀는 나보다
두 살이 위였으므로 모든 것에 성숙했다. 하나씩 둘씩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입맞춤도 키스도~~~
고등학교를 졸업 후, 나는 대학이랍시고 간신히 들어갔고 그녀는 간호전문학교 임상관리학과를 졸업해서,
나의 군대 생활 34개월 21일 및 제대 후 2년간의 대학 생활을 온전하게 책임져주었다.
특히 2주일에 한 번씩 면회를 와서 자대 부근에 있던 상점들의 외상값을 값아주던 일이나 월급을 타면 내 용돈을
별도로 마련해 주던 일 등 어려운 일들은 모두 다 책임졌지만 결혼을 하면 되는 줄 알았기에 미안해 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오래된 우리 사이를 기관장들께서도 다 알고 계셨다.
시골에서는 보통 기관장 회의라는 것이 있고 회의 참석 멤버는 군 연대장, 군수, 경찰서장,(읍, 면장) 고등학교
교장, 농협장, 산림조합장, 우체국장 등 8명으로 이루어지는데,
요즘도 친구들 간에 술자리를 하면서 술을 안주면
"내가 우체국장이냐? 왜 나한테는 술잔이 안 돌아 와!" 라는 농담을 하게 된다.
아버님은 농협장이고 그녀의 아버님은 산림조합장으로 기관장 회의에서도 査頓(사돈)으로 부를 만큼 부모님
끼리도 친밀했으며, 우리 사이를 선후배는 물론 대부분 다 알고 계셨다.
하지만 배신을 했다. 배신할 때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대학 4학년 때 기회가 주어지면 공부를 더하겠다는 통보를 하고 서독으로 떠났다.
나를 알고 있는 모두가 왜? 못 떠나게 붙잡지 않았느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는 협의라는 게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은 그녀가 결정했고 나는 따르기만 했었기에 만류를 하지 못했고 만류를 했더라도 안 갔을
그녀가 아니었다.
졸업 후 첫 직장으로 문화공보부로 출근을 할 때, 그녀가 시집을 가겠노라는 편지가 왔다.
독일로 떠난 지 정확하게 6개월 만이었다.
이 편지로 그녀와의 13년이란 세월이란 것이 모두 다 헛꿈이 되었다.
매일 밤 치를 떨며 이를 갈았다. 결론은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내 인생은 없다는 것으로 결정되으며,
그녀의 눈을 마주한 채 변명이라도 한마디 들어야 속이 안정될 것 같았다.
즉시 직장을 때려치우고 도서관으로 찾아 들어가 독일로 가는 방법을 찾았으나 유일한 방법은 유학을 가는
것뿐이었다. 나도 독일 광부로 가기로 하고 때마침 광업진흥공사 공채 시험에 합격을 해서 장성탄광으로
배치를 받아, 태백으로 떠나 하숙을 정하고는 근무를 하다가 소장님께 면담을 청해 내가 독일로 가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드렸다.
3주간만 탄광에서 막장 경험을 쌓기로 하고 3교대 근무를 하고 퇴근하던 어느 날 오후 먼곳 까지 아들을 찾아
오신 아버님과 큰 누님을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하던 일!
끝내 계집 하나를 잊지 못하는 못난 놈이라는 아버님의 일갈에 나 자신을 원망하며 사표를 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도로공사와 농어촌 공사를 차례로 다니다, 도로공사에서는 수집된 동전을 수거하러 다니는
일과 농어촌 공사에서는 충남지역본부 산하 천안 옆 직산 저수지 공사를 감독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들어 사표를
내고
그해(76년) 11월 6일 대한항공에 교육원으로 입교에 평생 29년 6개월을 다니고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76년도에 만 공무원- 광업진흥공사- 도로공사- 농어촌개발공사- 대한항공으로 전직했으니 참으로 고난
하였던 세월이었다.
당시는 해외를 가려면 초청장이 없으면 불가능했던 세월이다.
그래도 독일은 가고 싶었으므로 독일로 가기 위해서는 대한항공이 가장 쉬울 것 같아 지원을 해서 평생을 온몸
바쳐 일을 하다가 퇴직했으니 그만큼 그녀는 내 인생과 엮어있었다.
싫고 미우면 평생 피하고 안 만나며 살면 되는데, 문제는 고교동창이다 보니 경조사에서는 원치를 않아도 만나게
된다는 필연이다.
그녀가 아버님의 환갑이라며 처음으로 귀국했을 때 김포공항에는 그녀의 가족들이 마중을 나왔었다.
큰딸은 유모차에 태웠고 작은딸은 등에 업고 귀국하는 그녀를 공항 게이트에서 만나 유모차를 대신 끌고 공항
밖으로 나와 가족에게 인계를 하며. 나는 당당하게 소리쳤었다.
"오늘 저와 영숙이는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 우리가 죄인이네. 자네가 남자이니 이야기 잘하고 보내주시게" 라는 말을 마치고 가족들은 헤어졌고
나는 플라자호텔로 향했었다.
두 딸이 잠든 호텔 룸 안에서 모든 전등에 소등을 한 후 테이블 위에 촛불을 켠 후 그녀의 핸드백에서 여권을
찾아 촛불 위에 멈췄다.
"가지 마! 너는 못가!~"
"아니, 아이들을 아빠한테 데려다주고 돌아올 테니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나랑 결혼해줄 수 있어?"
도저히 해서도, 들어서도 안 될 소리로 내가 사랑한 영숙이가 아니었다.
울면서 용서를 비는 모습은 아니라도 배신한 이유는 거짓이라도 듣고 싶었었는데~~~
"나쁜 년! 네겐 내가 그것뿐이 아니었느냐? 너를 잊어 줄 테니 잘 살아라!"
뺨을 한차례 때린 후 돌아섰고, 돌아가는 공항길에서 차 한잔을 하자는 것도 뿌리쳤었다.
그 후 3년이 지난, 31살 된 늦은 나이에 애들 엄마와 결혼했지만, 하지만 평생을, 아니 지금껏 잊지 못하고
서로가 주변을 맴돌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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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를 버릴려면, 버렸으면 처절하게, 냉정하게, 모질게, 버려주어야 된다.
그래야 어설픈 미련이 안 남고 서로가 편하다. 그리고 잘 살아 주어야 된다. 나를 버리고 가서 잘 사는가 싶더니
60도 못살고 남편이 별세를 했다.
두 딸을 시집보낸 후 고국에서 살아보겠노라는 마음으로 귀국했을 때 남해의 독일마을로 터를 잡고 싶다며,
같이 가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해왔다.
그때도 여행을 겸해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로 와서 오늘같이 자작나무 숲에 왔었다.
웬지 모르게 말짱하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그녀는 늘 비를 몰고 다녔다.
남편과 사별했겠다. 나도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귀국결심을 했는지? 여행길은 들떠 있었고
3박 4일 내내 얼음장같이 식는 내 몸의 반응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무슨 변덕인지, 남해 독일마을이 아닌 연천에 정착하겠다며 거소증을 발급 받겠다며 주)독일대사관까지 함께
가서 도와달라고 했다.
"재수 좋은 년은 넘어져도 고추밭에 넘어진다더니" 때마침 60세 이상 된 재외국민에게는 이중국적이 허용됐다고
해서 거소증을 발급 받을 필요가 없었다.
독일대사관에서 국적 회복을 위한 확인서를 발급받아 연천읍사무소로 가니 즉시 주민등록증을 발급해 주었다.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다.
해외 14개 국가와는 연금도 상호 간에 지급 받을 수가 있으니. 즉 이는 14개 국가에서 받는 연금을 우리나라
국민이 돼서 우리나라에 살면서도 받을 수 있는 제도이다.
65세가 넘은 단독 세대원으로 주민등록을 해주더니, 한 달에 45만 원씩 주는 1종 생활보호대상자 증도 주고,
나중에는 월세 아파트까지 제공해 주었다.
인구수가 적은 시골 군에서는 인구 유치를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녀가 연천에 살고 있으니 동창 및 후배들의 결혼식이나 상가엘 가면 꼭 만나게 되었고 이럴 때마다 웬수 같은
친구놈들은
"너는 조상님들이 복을 많이 지어서 마누라 둘을 데리고 사니 좋겠다" 라며 놀려 댄다.
세상에? 한 여자랑 살기도 머리가 모자랄 형편인데 두 여자라니, 그리고 나를 버렸던 여자랑 즐겁다면 무엇이
얼마만큼 즐겁겠는가? 그냥 술 안주 거리만 되고 만다.
난 버림을 받은 이후 여자의 소리는 숨소리만 믿고 살았기 때문에 여자 문제로 엮인 삶은 살지를 못했다.
13년을 사랑한 여자도 버렸는데 어느 여자를 믿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내 마음을 열지를 못했고 여자의
마음도 얻지를 못했다.
여자들이 똑똑한 것 같아서 은근히 멍청한 구석이 꽤나 많다.
남자랑 만나다가 싫어져서 헤어질 때면 이젠 그만 놔달라는 소리를 곧잘 한다. 쑥맥이라면 모를까 선수들은
이때 그 여자가 싫어도,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도 흔쾌히 동의를 해주지 않는다.
이는 미련이 남아서도 아니고 "오 뉴월 서릿발" 같은 여자의 한을 피하고 싶어서인 줄을 모르고 나를 진정
사랑해주었나? 라는 착각을 한다.
헤어지면서도 즐길 줄 아는 것이 바람둥이인 것을~~~ 여자는 모른다.
또 심심치 않게 "여자들은 나이가 먹어도 손주를 봐주거나 마늘을 까거나 할 일이 있지만 남자들은 냄새만
나고 쓸모가 없다" 는 소리를 자주한다.
참 바보 같은 소리이고 어리석은 소리다.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양로원에 가보면 안다.
어느 양로원엘 가도 여자가 70%다. 이는 자식들이 아버지는 무서워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사시는 엄마에게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재산을 양도받은 후 양로원으로 버려진다는 사실을 현명하지 못한
여자들은 모른다.
그러니 못난 여인들은 나이 먹은 남편을 구박하고 자식들 끼고 살다가 남편 죽으면 함께 버려진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나와 양구로 가는 길에 “두타연” 계곡을 통과해서 화천군 사창리로 해서 캬랴멜 고개
(일명 백운고개 및 광덕산 고개)를 넘어 이동에서 운천 산정호수로 향했다.
캬라멜 고개라면 이곳에서도 추억이 쏠쏠하다.
대학 2학년 때 "삼선개헌반대" 데모를 좀 하다가 지금의 동작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가 아버님께서
"신병부책서"를 쓰시고 논산 연무대까지 데려다 주는 조건으로 풀려나 강제로 육군에 입대를 했고,
(이때 전국에서 데모하다 잡힌 대학생 60명이 나와 같이 입대를 했다)
같이 입대한 60명은 모두 논산훈련소에서 기본교육만을 받은 후 1군 예하 전투사단으로 배치되어 고생하다가
70년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 이후 풀려, 모두 행정병 등 특과병으로 전직되어 근무하다가 제대를 했으며,
나는 군대생활중 흔치 않은 경험으로 사단이 이동에서 양평으로 이동을 했고, 여주군 대신면에 주둔한 27연대
정훈병으로 근무를 하다가 제대를 했다.
처음 배치를 받았던 육군5사단은 이동에 주둔했었고, 장마가 끝난 후 캬라멜 고개 보수공사를 나가 매일
시멘트나 모래 자갈 등 등짐을 졌었다.
이때 우리 연대 전원이 집합해서 120명에 뽑혀 지금 살고 있는 여의도에서, 한 달간 제식훈련을 받고 그해
(70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군에 육군을 대표해서 참가했었다.
암튼 지금은 이런 몸매이지만 그때는 2,000명 중 120명에 뽑혔었다.
인생은 참 얄궂다. 그 당시 제식훈련이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여의도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누겠다고 했는데
84년도부터 이곳에 살고 있으니~~~ 묘한 인생이다.
강원도 화천군과 경기도 포천군의 경계인 광덕고개에서 잠시 내려 겨우살이 차를 한 잔 마시니 속이 개운했다.
우리 회원들이시라면 시간을 내어 손주들과 이동에서 유명한 "할머니 집"에서 이동갈비를 드신 후, 백운계곡과
광덕산 고개를 넘어 우리나라 최고의 "광덕산 천문대"를 견학시켜 주시면 인상 깊은 하루가 되실 것이다.
역시 강원 중북부 여행은 이동갈비를 먹어 줘야 하지만 혼자 갈비를 시키면 싫어한다.
하지만 2인분을 시키면 된다.
물론 이동갈비가 모두 진짜는 아니지만 그러려니 하고 먹으면 된다.
간혹 갈비뼈에 LA갈비를 붙힌 이동갈비도 많다. 그래도 맛은 있다. 오죽하면 이동갈비란 상표를 가지고 대법원
에서 판결이 낳겠는가? 결론은 어는 품종이라도 그 고장에서 며칠이라도 키웠으면 그 고장의 한우요 갈비라는
판결이 났다.
용화저수지로 넘어가 물이 안 쏟아지는 "삼부연폭포"를 보고 명성산 계곡을 끼고 달려 산정호수 주차장에 도착을
하니 잠시 비가 멈췄다. 급히 자인사를 다녀와 호수 데크길을 걸으며 중3 때의 추억을 불러내었다.
나는 15살 중 3때 지금도 고이 간직한 잊지 못할 추억들이 있다.
중 2때 강원도 율곡제에서 장원 상을 받았던 추억, 그 공로로 지금은 정수장학회라 칭하지만 당시엔 5,16 장학금
으로 만 원을 상금으로 받았었다. 당시 중학교 1기분 공납금이 360원 이었으니 꽤 많았었다.
각 중고등학교에서 1명씩 받았는데, 고등학교 선배들을 제치고 내가 받았었다.
그 외 인천에서 제일 좋다는 인천중학교를 다니다 철원의 시골 중학교로 전학을 갔으니 실력이란 비교할 대상이
없었고 공부를 안해도 1등, 우리반 여자학생들은 물론 선후배들로 부터 꽤 이쁨도 받았다.
가을철 어느 날, 남녀학생 3명씩 6명이 학교를 안가고 산정호수로 놀러갔다가 소문을 듣고 찾아오신 선생님한테
들켜 모조리 정학을 받은 후, 푸세식 변소를 퍼서 학교농경지에 뿌렸던 슬픈 추억도 있다.
신철원 농고였으므로 학교에 논과 밭이 있었다.
그때 함께 놀러 갔다가 정학을 같이 받고 똥을 퍼서 나르던 여자애가 지금도 운천에 살고있어 전화를 하니
10분도 안돼 달려와 정확하게 57년 전 기억을 함께 나누었다.
역시 나보다 두 살 위지만 안늙었고, 철원군청에 근무하다 퇴직한 선배인 남편과 살고 있으니 늙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철원엔 나보다 한 학년 위였던 작은누나와 사귀면서 중3에 결혼을 약속했던 문경현이란 선배가 있다.
결론은 작은 누나가 상고를 나와 동일방직회계과에 다니다 그해에 고무신을거꾸로 신었는데,
작은누나는 32살에 두 아들을 두 남기고 남편이 교통사고로 별세를 하셨고, 문경현이란 선배는 나중에
철원군수를 하셨다.
가끔 작은 누나가 불상해 보일 때
"바보야! 왜 경현선배를 놔두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서 과부가 됐냐고?"
경현선배가 5남매의 장남으로 뒷바라지를 할 것이 힘들어서 시집을 갔다는데야 할 말이 없다.
암튼 팔자는 있기는 있는 모양으로 남자를 배신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으면 꼭 남편이 꼭 일찍 죽었다.
산정호수는 자주 가는 곳이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비교적 근거리에 있어 자주 가도 실망은 하지 않을 명소로
회원들에게 정보를 드린다면,
가을철이면 "명성산 억새 축제"가 볼만하고 이때 쯤 국방부에서 개최하는 "포사격 훈련시범"은 우리군의 씩씩한
모습을 볼 수가 있어 꽤나 인기가 있고, 국방부 홈페이지에 신청을 하면 견학을 할 수가 있다.
(산정호수의 최근 모습).
친구와 헤어진 후 레프팅 장소로 유명한 철원 순담계곡을 들려 동숭면 고석정으로 향하였다.
이곳에는 임꺽정이 풍류를 즐겼다는 고석정이 있고 중 북부의 유명한 온천호텔인 스파호텔이 있어 여행에 지친
몸을 힐링하면서 쉬어가기가 좋다.
돌아다니면서 시간만 있으면 "부킹닷컴"이나 "아고다" "여기어때" 등의 앱에서 예약을 하니 모두가 만석이었다.
수요일인데 만석이라 어떤 일 일까? 호텔프론트에 들려보니 아~ 웬일?
올해부터 국방부에서는 국군에게 평일 날에도 외출과 외박을 허락했는데 바로 그날이 수요일이었다.
그러니 수요일에 손주들을 면회를 가도 되는 것이다.
군부대 인근에는 평일 요금과 토,일, 공휴일 요금이 다르지만 아직은 수요일에는 평일 요금을 받고 있었다.
모두다 쉬는 공휴일에 가느니, 차라리 수요일에 면회를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고석정 옆으로 코스모스 십리길을 조성해 놨는데 늦 여름에 오면 죽일 것 같다.
고석정이 있는 구 철원에서 하루 쉬고 "구 노동당청사" "백마고지 역사"를 보고 연천군으로 넘어와 대광리에서
내산리로 넘어가면 기도발 효험이 좋다고 소문난 원심원사 계곡과 동막리 계곡이 좋고,
이곳을 벗어나는 길에는 유명한 승마체험장이 있는데 타 체험장에서는 시간당 6만 원 하는 것을 이곳에선
4만 원 하고, 여타 체험장과 다르게 마음껏 달릴 수가 있어서 좋다는 소문이 난 곳이다.
(나도 승마를 하고 싶으면 이곳을 찾는다)
대광리는 보신탕이 유명해서 서울에서 많은 노인들이 찾는다.
서울로 귀향하는 길에는 전곡 "고인돌 무덤"이 볼만하고,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릉" 적성에 한우마당도
가성비 좋고, 파주에 와서 "황포 돛배"를 타고 임진강을 유람하다가 민물장어탕을 먹고 "헤이리" 마을에 들려
황인용 씨가 경영하는 믐악 카페에서 고전음악을 듣고 심학산 청산 어죽을 먹은 후 돌아왔다.
(고석정옆 코스모스 십리길)
첫댓글 유인 오라버님 1930년대 이상의날개로 대신합니다ㅎ
,지문을 읽다보니글흐름이 거의 비슷하다는 느낌입니다
몇군대어른신들꼐서 다니신다는 그장소만 빼놓고,
여바흐에서 거의 다녀온길이군요..
.아 ...동창분 세번이나 장가 갔다고.ㅎ ㅎ안방에 대서특필해놓구
옛 여자친구와함께 즗거운 동행 행복한여행이라ㅎ ㅎ 남자는 다그래~~~~~~~~~~~~~~~~~~~`ㅋ ㅋ ..
여행을 많이 다니셨네요~~ 여자는 숨소리만 진실이에요.
좋은 밤 되십시요.
유인갑장,
갑장 글을 읽다보니... 나도 희미한 첫사랑과의 추억이 하나, 둘 떠오르네요...
귀국하면 술한잔 함께합시다... ㅎㅎ
동갑이시군요~~ 귀국하시면 연락주십시요. 식사를 모시겠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네요. 황해도 분이시군요. 소생 추석도 황해도 연백군 봉화리가 고향입니다. 유인님의 고향과 아주 가까운 곳이네요. 감사합니다. 소생 추석 배상.
저는 황해도 옹진이라던데 기억이 없잔아요~~ 연백은 부자들만 살았다는 말씀을 종종 들었던것 같습니다.
언제 대포 한잔 하십시다. 건강하십시요.
뜨끔 ㅎㅎㅎ
언냐가 군발던 애인에게 고무신 꺼꾸로 신어
서방이 일찍 떠났나? ㅎㅎㅎ
건 그렇고, 13년 첫사랑과의 재회,
미움과 연민과 사랑이 교차 될거 같아요.
뭣이라고라~ 언냐님도 고무신을 꺼꾸로 신으셨군요~
근디 그분은 장난했나보네요, 저는 50여년을 엉켜 살거든요~ 이젠 만나도 그냥 불상하다는 생각뿐이 안드는군요~~
멋진 밤 되십시요.
감정이 풍부한 분 이군요...전 첫사랑은 없습니다 ..짝사랑은 있었습니다 원래 말 주변 머리가 없어서..그렇습니다.짝사랑은 많이 한거 같습니다
그러니 결혼도 늦아져서 ..지금 마누라가 날 안 잡아 줬으면 장가도 못갈뻔 했습니다...ㅎㅎ 어떻게 보면 ...바보,멍청이 ....띨하게 살았습니다.
단정하게 살아오셨군요....사모님과의 좋은 인연이셨습니다. 부럽습니다.
족적따라 읽다보니 인제서화 원대리자작숲 양구 철원
동숭 갈말 고석정 적성 임진강 군남 백학 전곡 한탄강연천 차탄리고인돌 재인폭포 포천산정호수 이동갈비
곳곳마다 잔재미가 넘치는 매력적인곳이지요 ㅎ
선배님의 고향도 그쪽이 아니가 싶습니다. 언제 봉사방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