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여행의 처음 계획은 참가인원이 20여명으로 이동 문제를 고민 29인승 대형 버스를 선택했다.
그러나 사정들이 생겨 인원이 14명으로 줄었다.다른 차를 찾았으나 관광철이라 쉽지않아 그대로
29인승으로 하루 대절했다.
'경주 시티버스'로고가 붙은 대형 버스가 리조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젊은 기사,밝은 모습,반갑게
맞이하는 모습 등이 오늘의 여행은 멋있게 이루어지리라 예상된다.
밝은 표정의 여행자들 오늘의 좋은 기운을 이어가리라 예측한다.먼저 동해 방면의 '함월산 기림사'탐사다.
석가탄일에 비춰질 유등들이 즐비하다.신라시대의 오래된 사찰로 단청을 하지않은 것이 특색이다.
할미꽃들이 화단에 유난히 많다.참 오랜만에 보는 우리의 전통꽃이다.이색적인 소나무,향나무 모습과
삼천석불이 안치되어 있는 대웅전? 이 이색적이다.
기림사를 뒤로하고 천연 기념물 536호로 지정되어있는 경주 양남 주상절리로 이동한다.동해의 아름다운
해변을 따라 조성된 파도 소리 길 (1.7킬로미터)은 자연이 만든 걸작(돌조각상) 주상절리를 잘 감상하도록
되어있다.한 송이 해국이 연상되는 부채꼴 형상 주상절리 등 다양한 모양이 인상적이다.
점심은 여행자의 피로를 풀어주는 하이라이트,'갈매기 횟집'에서 다양한 먹거리로 여행자의 피로를 풀어
주었으며,노사장의 선물 '자연산 미역' 한 다발의 선물은 친구의 우정이며, 고맙다.
불국사,다보탑,석가탑,석굴암,대릉원을 둘러보고 쇠고기 전골의 주 메뉴인 '교촌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교
촌마을 (경주 최부자의 자택이 있었던 곳)을 경유 원효대사와 요석 공주가 사랑을 속삭였던 '월정교'를
지나 '동궁과 월지 (안압지)'의 야경을 관광하고 숙소로 이동했다.
다음 날
밤사이 양숙과 여자 동기들은 잠을 자지 않고 그 동안 쌓였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고 한다.아침을 먹고 헤
여질 시간이다.양숙의 두 눈에는 연방 눈물이 줄줄 흐른다.오늘 헤여지면 언제 또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다.
서로 부등켜안는다.가슴이 찡하다.동기간의 우정이 이렇게 깊었을까?서울 다섯 친구들은 울산역으로 떠난다.
부산 산행꾼들과 서울의 동기들 14명의 경주 2박 3일의 여행은 막을 내린다.그 동안 수고한,참석한 모든이들에
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건강하자.
사진은 송학 윤기상이 좋은 피사체를 찾아 열심히 찍었다.그 휴유증으로 몸살을 좀 했다.수고했다.
오늘의 그림을 올린고 남은 사진은 '사진방'에 여행자들과 관련 경치를 모두 올리겠습니다.
첫댓글 사진을 보고 또 본다.
맛있는 것 먹고 웃으며 나눈 정담들이 들려온다 지금도.
이 추억 얼른 잊지는 못할 것 같구나.
모두들 수고했다.
좋은 추억이 또하나 쌓였겠구나!
월정교(月精橋)
• 월정교에는 아들을 얻고자 하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요석공주(瑤石公主)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적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삼국유사』에는 이 다리를 '유교(楡橋)'라고 했는데 '유(楡)'는 '느릅나무 유'로 본디는 느릅나무로 만든 다리였던 듯하다.
어느 날 원효대사가 길거리에 나가 노래를 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
그런데,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왕(29대 태종무열왕)이 이를 듣고서는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아들을 낳겠다는 말이다.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더없이 큰 이익이다.”라고 했다.
그때 요석궁에는 남편을 여읜 공주(자루 없는 도끼)가 있었다. 왕이 원효대사를 찾아 궁으로 인도해 들이라 해서 관리들이 찾고 있던 중에, 유교다리를 건너던
대사가 일부러 강물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관리들이 대사를 요석궁으로 이끌어들여, 옷을 갈아입히고 유숙하게 했다. 뒤에 아들를 낳으니 이가 곧 신라 십현(十賢) 중의 한 사람인 설총(薛聰)이다.
오늘의 월정교는, 서기 760년 통일 신라 시대의 다리로 조선 시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을 2018년 4월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