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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 ① 안동 ←반변천 청송 ★ 진성이씨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0년 10월 14일 (수요일) [별도 탐방]
청송(靑松) (1) 진보
진보(眞寶)는 청송군의 최북단에 있는 면(面)이다. 북쪽에서 흘러내리던 반변천 본류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임하(댐)을 거쳐 낙동강에 유입된다. 그러므로 진보는 영양 일월산 등에서 발원하는 반변천이 안동 정하동에 낙동강이 유입되는 흐름의 중간에 위치한다.
무엇보다 진보(眞寶)는 교통의 요지이다. 내륙의 안동에서 동해안의 영덕을 잇은 34번 국도가 청송군 진보를 경유한다. 특히 진보(면)에서 남쪽으로 갈라지는 31번 국도는 청송(읍)을 경유하여 영천과 포항으로 이어지는 내륙간선도로이다. 그리고 진보의 월전리에서 북쪽으로 갈라지는 31번 국도는 영양(면)을 경유하여 봉화군 법전(면)—태백시를 경유하여 영월—평창으로 이어지는 내륙간선도로이다. 그러므로 진보는 그야말로 사통의 중심이다. 안동도호부를 기점으로 할 때 청송(읍)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요, 영양(읍)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길목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진보는 청송에서 가장 번성한 곳으로 보부상(褓負商)들의 중간 거점이요 동해의 수산물과 산간지방의 물산이 모이는 곳으로 진보장(眞寶場)은 아주 크게 성시를 이루었다. 청송의 진보 출신 작가 김주영은 이곳에서 문학의 뼈를 키웠고 급기야 대하소설 《객주》를 탄생시켰다. 진보는 김주영 문학의 태생지라고 할 수 있다. ☞ [백파] 낙동강 1300리 종주 이야기 (16) ① 안동 ←반변천 청송(2) '김주영문학관'
진보(眞寶)는 삼국시대에는 칠파화현이었으며, 757년에 진보현(眞寶縣)으로 고쳐졌다. 고려 초에 이곳 장군인 홍유, 이어 장선필(張善弼)이 고려에 귀부한 공으로 진안현(眞安縣)을 합하여 보성군(甫城郡 또는 載巖城)으로 승격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안동부 청송군·진보군, 1896년에 경상북도 청송군·진보군이 되었다. 지금은 청송군 행정구역이 청송읍·주왕산면(옛 부동면)·부남면·현동면·현서면·안덕면·파천면·진보면 등 1개읍 7개면으로 이루어져있다.
진보(眞寶)는 유서 깊은 교육·문화의 고장이다. 진보면 광덕리의 ‘진보향교’(眞寶鄕校,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 진보면의 ‘추현리박씨효자려’(靑松楸峴理朴氏孝子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0호), 진보에 인접한 파천면 덕천리에 청송심씨의 ‘숭소고택’(松韶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3호)와 ‘청송 초전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1호)그리고 파천면 중평리에 ‘평산신씨 판사공파종택’(平山申氏判事公派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9호)·‘서벽고택’(棲碧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1호) 등이 있어 예로부터 명문거족의 세거지이다.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화매천)의 명문 재령이씨 집성촌도 진보를 경유하여 들어간다.
진성 이씨(眞城李氏)
청송의 진보(眞寶)는 진성 이씨(眞城李氏)의 본향(本鄕)이다. 진성 이씨는 청송 지역의 호족이며 토성 성씨로 고려시대부터 세거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안동의 풍산 마애촌, 와룡면 주촌(주하리), 온계, 예안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진성 이씨’를 ‘진보 이씨’라고도 한다. '진성(眞城)'이라는 호칭이 붙게 된 것은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6세손 송재(松齋) 이우(李堣)가 중종반정공신으로 청해군(靑海君)에 봉군되면서 그의 부친인 5세 이계양(李繼陽)이 진성군(眞城君)에 추봉되었는데 이때부터 ‘진성 이씨’로 불리어졌다는 것이다.
‘시조(始祖) 이석(李碩)’의 가계는 고려시대 진보현의 호장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부(이영찬), 조(이송주)가 모두 호장(戶長)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을 보면, 대대로 진보 고을의 호장으로 세습해온 토호(土豪)였음을 알 수 있다. 여말선초 신진사대부의 대다수가 바로 이 호장층에서 중앙관료로 성장한 가문들인데, 진성 이씨도 호장가에서 발원하여, 이석(李碩)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신분 상승을 이루고 그의 후대에 이르러 가문이 번창했다.
진보이씨의 시조인 이석의 묘소는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있다. 청송 방향 31번 국도쪽으로 5㎞정도 지점에 오른쪽으로는 지동, 왼쪽으로는 옹점 가는 길을 알리는 도로표지판이 서 있다. 그곳에서 바로 송강교로 이어 지는데 송강교를 지나자마자 도로 왼쪽에 ‘진성 이씨 시조묘소 입구'라 새긴 큰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이 있는 길로 좌회전해서 들어가보면 시조묘를 수호하는 기곡재사가 나온다. 그 재사 언덕에 있는 시조의 산소를 감람묘(甘藍墓)라고 부른다. ☞ [시조공묘갈명(始祖公墓碣銘)]
이석의 아들 2세 ‘이자수(李子脩)가 충숙왕대에 과거에 급제한 후 1364년(공민왕 13) 봉상대부 지춘주사(奉常大夫知春州事)로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할 때 개경 수복에 큰 공을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에 이르면서 가문이 번창하게 되었다. 그 공으로 이석(李碩)은 봉익대부 밀직사(奉翊大夫密直司)에 증직(贈職)되었다. 이자수는 왜구의 침탈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거처를 정하지 못하다가 고향에 가까운 안동에 오게 되었다. 그가 바로 진보이씨 안동입향시조인 것이다. 장자 자수(子脩)계는 그렇게 고려 말 사족이 되면서 안동으로 이주하여 이후 안동시에서 그의 후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후손들은 이석(李碩)을 시조로 받들고, 선조의 본향지인 진보(眞寶)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를 59명 배출했고, 특히 7세손 퇴계 이황이 문묘와 종묘에 동시에 배향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 [안동] 진성이씨 주하동 경류정종택 *
진보이씨가 안동에 세거지를 정하면서 가장 먼저 명문의 기틀을 닦은 인물은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진 이자수이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풍산읍 마애촌(마래)이다. 시조 이석의 장남 이자수는 진성 이씨 안동(安東) 입향조이다. ― 반면, 이석의 차남 이자방(李子芳)은 그대로 진보에 남았으며, 이자방의 후손들은 후평파로 갈라져서 그대로 진보에 터를 잡고 살게 된다.
2세 송안군 이자수(李子脩)는 고려 우왕 때 풍산현 마라촌(현 풍산읍 마애리)에 정착하였다가 만년에 와룡 주촌(현 와룡면 주하리)으로 이거하였다. 이자수의 큰아들 이운구(李云具)의 후손은 안동을 떠나 삼척군 근덕, 예천군 하리, 의성군 단촌 등지로 이거하였다. 작은아들 이운후(李云候)는 진성이씨 2세 부친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와 함께 마애촌에서 이곳 주촌(주하리)으로 왔다. 따라서 주하동 종택은 진성이씨 대종택의 위상을 갖는다. 진성이씨의 대종가이다.
진성 이씨 4세 이정(李楨)은 이황(李滉)의 증조부인데, 세종 때 영변판관(寧邊判官)으로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영변진(寧邊鎭)을 쌓았으며, 선산도호부 부사를 지냈다. 3세 이운후의 아들 이정(李禎)은 이우양(李遇陽), 이흥양(李興陽), 이계양(李繼陽) 3형제를 두었다. 그 중 맏아들 이우양(李遇陽)은 주촌에 눌러 살고, 둘째 이흥양(李興陽)은 다시 마애로 환거하였으며 셋째 이계양(李繼陽)은 예안현 온혜(현 도산면 온계리)로 이거하였다. 이정의 맏아들 이우양은 무과에 급제하여 인동현감을 지냈고, 이우양의 증손 이연(李演)은 훈도를 지냈다.
진성 이씨(眞城李氏) 안동 주하동 ‘경류정 종택’은 당초의 건립 연대(建立年代)는 미상이나 별당(別堂) ‘경류정’은 조선(朝鮮) 성종(成宗) 23년(1492)에 이우양의 증손 이연(李演)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연의 손자 송간(松간) 이정회(李庭檜, 1542~1612)는 임진왜란 때 의흥현감을 지냈다. 이흥양의 현손 이돈(李燉, 1568~1624)은 문과에 급제하여 영천군수를 지냈고, 이돈의 아들 이회보(李回寶, 1594~1669)는 1629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호종하였다. 이회보는 당시 남한산성의 상황을 기록한 『산성일기(山城日記)』를 남겼으며,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묘배향을 주장하였다. ―
* [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노송정종택(溫惠派 老松亭宗宅) *
진성 이씨 5세 이계양(李繼陽)은 이정의 셋째아들로 선산부사를 지냈는데, 안동 주하동에서 온혜, 현 도산의 온계리(溫溪里)로 이거하였다. 온혜는 청정한 산골 마을이다. 온혜를 중심으로 서편은 안동, 동편은 청량산 방향이다. 이 곳에 처음 자리 잡은 인물이 바로 퇴계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이다.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 공은 처음 예안현 동쪽인 부라원(부포)에 살았는데 봉화현 교도가 되어 봉화로 가던 도중 온계를 지나 신라 고개에 쉴 때 한 스님을 만났는데 그도 온계에서 오는 길이라 함께 쉬다가 온계 풍수의 아름다움을 말하게 되었다. 공이 스님의 생각과 자기의 생각이 같음을 기뻐해 스님과 함께 다시 온계로 돌아와 주위를 오르내리면서 두루 살피다가 어느 한 집터를 공이 가리키니 중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마땅히 귀한 자손을 볼 것 입니다"라고 하니 공이 마침내 옮겨 살 것을 결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계양은 단종 즉위년인 계유년(1450)에 사마시에 합격해 봉화현 훈도가 됐다. 2년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부라원(부포)에서 온혜로 돌아와 집 앞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자신의 집을 노송정(老松亭)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계양은 도산 온혜의 입향조가 된 것이다. 그 뒤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온혜의 서쪽에 국망봉(國望峰)에 단을 쌓고 매년 10월 24일이면 단에 나아가 북쪽을 바라보고 절하기를 30여년, 단종의 절의를 지킨 생육신에 비견되는 삶을 살았다.
이계양(李繼陽)은 정부인 영양 김씨(英陽金氏) 사이에 이식(李埴)과 이우(李瑀) 두 아들을 두었다. 장자 이식(李埴)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의성 김씨 부인 소생의 이잠(李潛), 이하(李河), 계실 춘천박씨 부인의 소생 이의(李漪), 온계(溫溪) 이해(李瀣), 이징(李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다. 그리고 이식의 차자 호조참판 송재(松齎) 이우(李瑀)에게는 아들 이수령(李壽苓)이 있고, 두 딸을 두었는데 첫딸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둘째딸은 기호학파의 거유 동춘 송준길에게 각각 출가했다.
이식의 4자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는 문과에 올라 대사헌을 지냈는데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갑산으로 유배 가던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이해의 아우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도 문과를 거쳐 관직에 나갔으나 벼슬보다는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써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어 300여명의 인재를 배출하고 성리학의 태두가 되었다.
진성이씨 중에서도 퇴계(退溪)의 후예(상계공파)가 가장 번성하여 문행과 과신이 이어져서 문과 출신자 32명을 배출하였다.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 1541~1584), 이영도(李詠道, 1559~1637) 형제를 시작으로 이수연(李守淵), 이세사(李世師), 이세윤(李世胤), 이귀운(李龜운), 이야순(李野淳), 이태순(李泰淳), 이가순(李家淳), 이휘령(李彙寧), 이만용(李晩容), 이중두(李中斗) 등으로 대를 이어 가학과 벼슬을 이어왔고 한말 일제강점기에는 경술국치를 당하여 단식 순국한 향산 이만도(李晩燾, 1841~1910)를 비롯하여 이중언(李中彦), 이중업(中業), 이동봉(李東鳳), 이육사(李陸史, 1904~1944) 등 30여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진성이씨 온혜파종택
노송정종택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계리 *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安東眞城李氏溫惠派宗宅)은 본래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60호 ‘퇴계태실(退溪胎室)’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퇴계와 관련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11월 ‘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安東眞城李氏溫惠派宗宅)’으로 명칭을 바꾸고 국가민속문화재(제295호)로 승격되었다. 일명 노송정종택으로 부르기도 한다.
온혜파 종택은 1454년(단종 2) 이황의 조부인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이 세운 건물로, 1 퇴계501년 이황이 이 집 몸채 중앙에 돌출된 방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퇴계태실(退溪胎室)’로 부르게 되었다. 태실은 정면 7간 측면 6간의 홑처마 구조로서 안마당을 중심으로 전면에 사랑채, 뒤쪽에 정침, 좌우에 양측사를 둔 완전한 □자 평면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정침 중앙에 전면 1간, 측면 1간반 정도의 누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태실이 건물의 중앙에 위치한 것이다.
태실 누마루에 ‘是歲淸明日十四代孫家源(시세청명일 14대손 가원)이라 쓴 중수기(重修記)가 있으며, 1930년에 전면 개수하였으나 상류주택의 배치요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중수기의 ’家源‘은 온혜파 후손 연민 이가원 박사를 말한다. 현재 태실 동쪽에는 ’노송정(老松亭)‘과 ’사당(祠堂)‘이 있으며, 맞은편에 대문채인 ’성림문(聖臨門)‘이 있다.
길 위의 인문학자 조용헌 교수에 의하면 …(전략) ‘태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퇴계 선생 태실이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노송정(老松亭) 종택(宗宅)이다. 퇴계 조부가 어느 날 봉화 근처의 고갯길에서 허기져 신음하던 어떤 스님을 구해줬는데, 이 스님이 그 보답으로 집터를 잡아 주었다. '여기에다 집터를 잡으면 대현(大賢)이 나온다'는 예언을 하였다. 그때부터 집안에서는 장차 대현이 출생할 가정교육 풍토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종택 안채에는 가로세로 2m 정도 크기의 정사각형 방이 있다. 퇴계 선생이 태어난 방이다. 이 방은 하도 유명해서 방의 바깥에 '퇴계 선생 태실(退溪先生胎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 유교의 성지순례 코스였던 것이다.'
'태백산에서 내려온 용두산(龍頭山), 용의 왼쪽 발가락 끝 지점에 노송정 종택이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의 안산을 비롯하여 주변 산들은 높지 않다. 기가 센 바위 봉우리도 안 보인다. 약 150m 높이의 야트막한 산세로 둘러싸인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퇴계 선생의 인품이 그리 온화했던 것인가? 퇴계를 낳기 며칠 전에 어머니가 꿈을 꾸었다. 품격이 높은 아주 고상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 여러 제자를 뒤에 거느리고 이 집에 들어오는 꿈이었다. 퇴계 제자 가운데 학봉 김성일은 이 태몽을 두고 공자님이 오신 것으로 해석하였다. 후일에 제자들이 종택 들어오는 솟을대문 위에는 ‘성림문(聖臨門)’이라는 글씨를 써서 붙여 놓았다. 태교도 그만큼 중요하다.’ ☜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1154] 퇴계 선생 胎室 (2018.07.30)
노송정(老松亭)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의 노송정(老松亭)은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1454년에 지었다. 이계양이 봉화 훈도로 있을 때, 굶주려 쓰러져 있는 스님을 구해 준 적이 있었는데 그 스님이 "이 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귀하게 된다"며 터를 잡아 준 곳이라 전한다. 사랑채 건물에 노송정(老松亭)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온혜초등학교 옆길을 따라 400여m 가면 노송정 고택에 이른다. 퇴계의 수제자 학봉 김성일이 ‘성인이 든 문'이라는 뜻의 ‘성림문(聖臨門)'이라고 지어 붙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노송정이 있고 그 왼쪽에 '퇴계태실'과 함께 안채가 자리 잡고 있다.
‘정(亭)'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나 정자라기보다는 널찍한 대청을 갖춘 사랑채다. 그러나 성주의 한주정사(寒州精舍)처럼 안채와 별도의 담장을 두른 특별한 공간으로 꾸며진 것으로 보아 정자의 기능도 겸했던 것 같다. 주변에 연못을 만들거나, 괴석을 가져다 두는 등의 별다른 조경을 하지 않았다. 퇴계 가문의 정결하고 단아한 성향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이 건물은 6칸의 널찍한 대청과 2칸의 방으로 꾸며져 있다. 방 앞에는 별도로 한칸짜리 마루를 덧붙였다. 정자나 양반집의 대청 기둥은 대부분 두리기둥인데 비해 이 건물은 사각기둥이다. 앞쪽을 틔우고 뒷부분과 옆은 판문을 달았다. 판문의 모서리와 가운데는 곳곳에 국화무늬의 작은 철판을 달아 정갈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을 준다.
이 건물의 안채에서 태어난 퇴계가 이곳에서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것을 기리기 위해 건물 곳곳에는 퇴계와 관련된 현판이 걸려 있다. ‘노(鄒)나라 사람인 공자와 추(鄒)나라 사람인 맹자처럼 해동에서 태어난 성인'이라는 뜻의 ‘해동추로(海東鄒魯)'라는 큰 현판과 ‘낙양사람인 정자(程子)와 민중사람인 주자(朱子)처럼 영남(산남)에서 태어난 성인'이라는 뜻의 ‘산남낙민(山南洛民)'이라는 큰 현판이 서로 대구(對句)를 이루며 걸려 있다.
* [안동의 진성이씨 세거지] ☞
안동의 진성이씨는 현재 풍산읍 마애리, 와룡면 주하리, 도산면 온계리·토계리·의촌리·원촌리 등에 살고 있다. 그 중 이연의 후손들은 주로 종가를 중심으로 와룡면 주하리에 살고 있으며, 이종수의 후손 50여 호가 일직면 내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또 이흥양의 후손들은 풍산읍 마애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해 오고 있다.
* [안동의 진성이씨 관련유적] ☞
북후면 물한리에 진성이씨 2세 안동입향조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修)의 묘소와 사당, 작산정사(鵲山精舍), 가창재사(可倉齋舍), 강당 등이 있고,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에 안동 진성이씨 대종택 및 경류정, 4세 이정이 심은 향나무가 있다. 도산면 온혜리에 5세 이계양의 온혜파종가 및 노송정(老松亭), 퇴계 태실(退溪胎室), 이해의 종가인 삼백당(三栢堂)이 있다.
토계리 상계에 퇴계종택(退溪宗宅) 및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계상서당(溪上書堂) 등이 있고, 하계에 퇴계 묘소와 퇴계의 손자 이영도의 종택 및 수졸당(守拙堂)이 있다. 이 밖에 도산면 원촌리와 의촌리 등 도산면 일원에 분가한 후손들의 고택이 산재하고, 안동시 옥정동에 송재 이우가 지은 애련정(愛戀亭)이 있으며, 풍산읍 마애리에 이돈이 지은 산수정(山水亭)이 있다.
온계(溫溪) 이해(李瀣)
*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는 진성이씨 5세 진사 이계양의 손자이고 6세 이식(李埴)의 6형제 중 4남으로 태어났으며 퇴계 이황의 바로 위의 형이다. 일찍이 이해는 아우 이황과 함께 숙부 송재 이우에게 글을 배웠다. 22세 때는 경상감사로 부임하는 당대의 대학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당시 안동부사인 송재의 집을 방문해 두 형제를 보고는, “고인인 이식(온계 형제의 부친)은 이런 형제를 두었으니 헛되게 죽지 않았다”고 칭찬한 뒤 책과 양식을 내려주었을 정도였다.
1525년(중종 20) 30세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33세 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533년 사간원 사간˙정언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좌승지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내고 이해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1년(50세) 대사헌 신분으로 전횡을 일삼던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등용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여 체직시킨 사건으로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온계는 정직과 충성으로 일관해 권신들과 타협하지 않은 곧은 인물이었다. — 온계는 이후 그들의 집요한 견제와 회유 협박을 당하며 황해도 관찰사(1547), 충청도 관찰사(1548), 한성부 우윤(1550) 등을 지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득세하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의 일파로 몰리게 되어 무고를 당했는데, 이때 주위의 사람들이 거짓으로라도 권세에 굴복하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기도 하고 이웃에 사는 권신 김안로가 이끌고자 하였으나 공은 거절하였다. 명종은 평소 그의 인품을 존경하였는데, 사건에서 공의 결백함을 알고 귀양보내는 것으로 처결하였다. 그러나 온계는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 갑산(甲山)으로 유배 도중에 찌는 더위 속에서 장독이 심해져 세상을 떠났다. 그곳은 양주의 객점이었고 향년 55세였다.
이기(李芑)와 윤원형은 사림의 공적일 뿐 아니라 우리 역사를 후퇴시킨 조선 중기의 반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기는 온계보다 20년 선배로 덕수이씨며 명종4년(1549)에 영의정에 이르렀고 보익공신1등에 풍성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리고 윤원형은 파평 윤씨며 명종의 외숙으로 역시 1563년에 영의정에 이른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신 작호는 선조 초에 삭훈되었다.
온계는 서울에 있으면서(1533년) 남산 밑(지금의 회현동) 한적한 곳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 ‘취미(翠微)’라는 현판을 걸고 조정에 물러나오면 항상 문을 닫고 그 집에 있으니 사람들은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의 집인 줄 몰랐다. 온계가 세상을 뜨고 난 뒤, 명예가 복원되고 정식 장례를 치르게 되었을 때 동생 퇴계가 묘갈명을 썼다. ― "공은 성품이 너그럽고 모습이 뛰어났다. 아름다운 재주가 일찍 성취했고 예서를 잘 썼다. 우애가 돈독하여 형의 아들을 자기의 아들깥이 교육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벼슬하고 몸 가짐에 있어 자신의 도리를 지키기에 힘써서 시론에 어긋나거나, 권세에 아부하는 짓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
후일 대산(大山) 이상정은 그를 ‘강대하고 우뚝하며 남들은 쉽사리 하기 어려운 절조를 지켰던 분(剛大俊偉非常之人)’이라고 평하였다. 그리고 대산은 ‘통탄하며 눈물을 흘린다(爲之痛傷流涕也)’며 가슴 아픔을 적었다. 온계는 학문이 높고 인품이 고매하였으며 특히 예서에 뛰어났다. 사후 선조 때에 와서 복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효종 때 유림들의 발의로 고향 안동 도산면 온혜리의 청계서원(淸溪書院, 1667)에 아버지 이식, 숙부 이우와 함께 배향되었다. 영주의 삼봉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온계종택(溫溪宗宅)—삼백당(三栢堂)
구한말 의병장 이인화 생가
온계종택(溫溪宗宅)은 토계천 상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580번지, 노송정종택에서 300m 떨어진 거리에 있다. 온혜초등학교 옆에 위치해 있다. 1520년경에 지어진 집으로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가 20세 되던 해 노송정 본가에서 분가 이곳에 집을 지어 정착하고 온계가 성균관에서 수학하는 동안 퇴계가 어머니 춘천 박씨를 모시고 5년간 거처했던 곳이다.
12대 후손인 지암(芝庵) 이인화(李仁和, 1858~1929) 의병장이 고종 32년(1895)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내려진 단발령에 반발, 예안에서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켰으며, 퇴계종택과 나란히 안동유림 의거의 중심이 되었다. 온계종택(삼백당)을 의병소(義兵所)로 했다는 이유로 일본관군이 1896년 7월 방화하여 사당을 제외하고 전소되었다. 그 후 국가보훈처, 경북도, 안동시, 일가친척 및 뜻있는 분들의 협조로 2005년 12월 복원추진위원회를 결성, 2011년 5월 5일 복원 낙성식을 가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원된 온계종택은 사랑채와 안채, 대문채, 삼문, 사당 등 소실 전 모습 그대로 복원 건축하였다. 그래서 온계종택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의병장 이인화 생가(온계종택)’으로 표지하고 있다.
이인화(李仁和) 의병장은 1895년 12월 명성왕후 시해사건 발생을 계기로 일제에 항거하고자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1896년 영양의 의병대장 김도현(金道鉉)의 의병진에 참가하여 유격장, 선봉장 등으로 태봉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하였다. 전방장 이중언(李中彦, 독립지사 향산 이만도의 아들), 참모 이빈호(李彬鎬) 등과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일본군과 접전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1909년에 예안에 선명학교를 설립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솟을대문에는 ‘溫溪先生舊宅’(온계선생구택) 현판이 걸려 있고 당호는 ‘三栢堂’(삼백당)이다. ‘삼백(三栢)’은 “잣나무[栢] 세 그루처럼 선비의 의리를 지키라는 게 조상들의 가르침이었다.”고 — 현재 17대 종손인 이목(李睦, 73) 공이 말한 바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진성이씨 7세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종택 )에서 태어났다. 이곳에 진성 이씨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은 퇴계의 조부인 노송정 이계양이었다. 노송정 이계양(1424~1502)은 이식(1463~1502)과 이우(1469~1517)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식(李植)의 일곱째 아들이 바로 퇴계이다.
부친 이식(李埴)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前妻)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1501~1570)는 중종반정 공신으로 이조좌랑, 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낸 숙부 이우(李瑀)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그는 성품이 엄격하여 자식을 칭찬하는 일이 없었으나 퇴계에 대해서만은 늘 집안을 빛낼 아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퇴계의 생애를 정리하면,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공부하고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학문 수학기였다. 퇴계는 27세 때 진사가 되었고, 33세때 문과에 급제했다. 호조좌랑, 형조좌랑, 충청도 암행어사 등을 거쳐 43세때 성균관 대사성을 맡았다. 을사사화 때 연루돼 삭탈관직 당했으나 이듬해 복직돼 대사성, 우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맡기도 했다. 1569년 4월(69세) 완전히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앞서 17세의 어린 임금(선조)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 1568)를 지어올렸다. 이 같은 관직생활 가운데서도 학문에 뜻을 둔 퇴계는 20여 차례나 사직서를 제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불려오기를 반복했다.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이어서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퇴계는 주자(朱子)가 제시했으나 그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지 못한 이기이원론(理氣二源論)을 이(理)와 기(氣)의 상호작용으로 해석,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발한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한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는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그 학문의 깊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퇴계의 위대한 점은 이 같은 학문적 성취도 매우 깊지만 그의 학문적 태도 또한 신선하고 놀라웠다. 26세 연하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 가진 8년간의 서신 논쟁(사칠논변)은 유명하다. 학문에 대한 그의 진지하면서도 개방적인 자세는 이미 대유학자로 칭송받던 퇴계가 고봉의 지적을 받아들여 자신의 학설 일부를 스스럼없이 수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관직생활에서도 퇴계는 ―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자신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1572)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辨,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1556), 《자성록》(自省錄,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 조선시대 퇴계 이황은 유교 국가의 도통(道通)을 잇는 대유(大儒)로서, 문묘에 국불천위(國不遷位)로 모셔지고, 왕통(王通)을 상징하는 종묘에 각 왕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 정치가인 배향공신으로도 모셔짐으로써 그를 위시하여 나라를 대표하는 국반(國班)으로 명성을 떨쳤다. 퇴계 이황은 동방 유학의 성현으로 꼽히는 우리나라의 자부심이다.
▶ 우리가 알고 있는 1,000원 권 지폐(紙幣)에 있는 퇴계의 초상(肖像)은 1974년 이유태 화백이 그린 상상화(想像畵)이다. 퇴계는 평소 “털 하나라도 틀리면 나의 진면목이 아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생전에 진영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수년 전 이 퇴계의 진영(眞影)이 발견되었다.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에 “이마가 네모나고 풍성하게 넓어서, 숙부이신 송재공(松齋公)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평상시 부르기를 ‘광상(廣顙)’이라 하시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다.(顔角豊廣 松齋奇愛之 常呼曰廣顙而不名焉)”고 했다. 퇴계의 손자 이안도의 기록이다. 퇴계의 용모를 짐작할 수 기록이다. 그런데 수년 전 혜산(蕙山) 유숙(劉淑)이 임모(臨模)하였다고 명기된 퇴계의 진영(眞影)이 발견되었다. 유숙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가로서,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스승으로 알려진 분이다. 지금까지 시대적으로 가장 오래된 진영이며, 그 기품(氣稟)이 선생에 대한 기사와 가장 근접하다는 것이다. 진성이씨 문중에서는 새로 발견된 진영(眞影)이 퇴계의 본 얼굴에 가까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 조선시대 이 인신(人臣)으로서의 최고 영예를 안은 사람들을 배출한 국반(國班) 가문은 단 여섯 가문뿐인데, 우리나라 성리학 중 가장 먼저 본격적인 저술을 남기고 주리론 및 영남학파 그리고 영남 남인의 선구자로 추앙된 ‘회재 이언적의 여강 이씨’, 주기론 및 기호학파의 태두이자 서인의 영수였던 ‘율곡 이이의 덕수 이씨’, 노론의 연총으로서 '송자'로 칭송되던 ‘우암 송시열의 은진 송씨’, 기호학파의 종장이었던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의 광산 김씨’, 소론의 당수 격이었던 ‘현석 박세채의 반남 박씨’, 그리고 영남학파의 종장이자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퇴계 이황의 진성 이씨’였던 것이다.
* [퇴계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 ☞ 안동 예안 도산서원(陶山書院),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 경산 고산서원(孤山書院), 상주 도남서원(陶南書院),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 신령 백학서원(白鶴書院), 봉화 문암서원(文巖書院), 풍기 욱양서원(郁陽書院), 예천 정산서원(鼎山書院), 용궁 삼강서원(三江書院), 사전 구계서원(龜溪書院), 의령 덕곡서원(德谷書院), 진보 봉람서원(鳳覽書院), 영양 영산서원(英山書院), 청송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주 이산서원(伊山書院)
안동시가 전국에서 시군 단위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여 독립운동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것에도 진성 이씨가 기여한 바가 크다. 일제 강점기 때 안동에 있는 대부분의 문중들이 유독 독립 운동을 많이 해서 멸절하거나 가문 전체가 와해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 세(勢)가 약해진 게 사실이었고, 그 중 진성 이씨는 몇 개의 문중 세파가 사라질 정도였다. 결국 진성 이씨 종가가 일제에 의해 불타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독립 운동을 해서 일제 헌병이 불을 냈다고 한다. 또 퇴계종택도 방화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1929년에 13대 종손 이충호(李忠鎬)가 전국 유림의 도움을 받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상계의 퇴계종택(退溪宗宅)—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하계의 수졸당종택(守拙堂宗宅) 그리고 퇴계묘소(退溪宗宅)
퇴계종택(退溪宗宅)은 온계종택에서 토계천 남쪽으로 928번 지방도로 따라 내려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98번지(상계)에 있다. 토계천 앞에 상계서당(上溪書堂)이 있고 그 맞은 편 안쪽에 퇴계종택(退溪宗宅)이 있다. 토계천 아래 쪽 하계의 건지산 산록에 퇴계묘소(退溪墓所)가 있으며 그 산 아래 수졸당고택(守拙堂宗宅)이 있다.
퇴계선생구택(현판의 글씨)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종택이다. 원래의 가옥은 1907년 일제에 의하여 불타버렸으며, 지금의 가옥은 퇴계의 13대 후손인 하정공(霞汀公) 이충호가 1926~192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 오른쪽에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와 뒤편에 사당이 있다.
수졸당종택(守拙堂宗宅)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下溪)에 있다. 진성 이씨(眞城李氏) 하계파(下溪派)의 종택이기도 한 수졸당은 퇴계 이황의 셋째 손자인 이영도(李詠道)가 분가할 때 지었다. 지금의 이름은 그의 아들인 이기(李技)의 호(號)를 따서 지은 것으로, 우직하게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는 것을 뜻한다. 도산면 토계천을 따라 자리잡은 온혜리의 노송정종택, 온계종택, 상계의 퇴계종택, 하계의 수졸당종택은 모두 예스러운 외관도 우아하지만, 옛것을 지키려는 후손들의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어서 더욱 의미가 있다.
퇴계종택의 ‘겸·허·경·신(謙虛敬愼)
겸손하고 마음을 비우고 경건하고 신중하게
다음은 퇴계종택의 가풍(家風)과 종손의 인품(人品)에 대하여 진주 동방한학연구원장 실재(實齋) 허권수(許捲洙) 선생이 쓴 글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종가(宗家)가 있지만, 가장 전형적인 종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종가라고 다 동의할 것이다. 지금의 16대 종손 청하(靑霞) 이근필(李根必) 어른과 그 윗대 종손 동우(東愚) 이동은(李東恩) 어른을 만나보면, 두 어른 모두 겸손하고 마음을 비우고 경건하고 신중하게 처신하고, 그런 자세로 집안을 다스려나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두 어른을 만나본 다른 분들도 모두 그렇게 말한다. 도산서원 원장겸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병일(金炳日) 원장은 두 분의 그런 처신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선비문화수련원에서 연수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감동받은 연수과정이 ‘퇴계 종손과의 대화’라고 한다. 항상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고 경건하게 신중하게 처신하는 것에서 크게 감동을 받는다. 비록 상대가 어린아이라도 꿇어앉아서 따뜻한 말씀으로 대화를 나누고, 퇴계선생을 비롯한 조상이나 집안 자랑을 절대 하지 않는다.”
퇴계 선생의 〈修身十訓〉
자기 수양에 필요한 퇴계 선생의 가르침
퇴계(退溪) 선생은 자신과 제자들을 위하여 〈修身十訓〉(수신십훈)을 지으셨다. 일상생활 중에 나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목(條目)을 지어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퇴계 선생의 15대 종손 이동은(李東恩) 선생의 친필이다.
1. 입지(立志), 성현이 되겠다는 목표로, 털끝만큼도 물러서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2. 경신(敬身), ‘구용(九容)’을 유지하고 잠시라도 마음을 놓아 흐트리지 않는다.
* 구용(九容) ; 사지(四肢)와 이목구비(耳目口鼻) 등의 아홉 가지 바른 몸가짐.
· 족용중(足容重) -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한다
· 수용공(手容恭) - 손은 공손하게 한다
· 목용단(目容端) - 눈을 단정하게 뜬다.
· 구용지(口容止) - 입은 필요할 때만 연다.
· 성용정(聲容靜) - 목소리는 조용하게 한다.
· 두용직(頭容直) - 고개는 바로 세운다.
· 기용숙(氣容肅) - 호흡은 편안하게 한다.
· 입용덕(立容德) - 서 있을 때 덕스럽게 한다.
· 색용장(色容莊) - 안색은 씩씩하게 한다.
3. 치심(治心), 마음을 청명하고 조화롭게 유지하고, 혼침에 빠지거나 산란하지 않게 한다.
4. 독서(讀書), 바른 이치를 탐구하며, 말과 문자에 매달리지 않는다.
5. 발언(發言), 잘 살펴서 정확하고 간결하게, 이치에 맞게 말하며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한다.
6. 제행(制行), 바르고 곧게 도리를 잘 지켜 행동하고, 세속에 오염되지 않는다.
7. 거가(居家), 효도하고 공경하여 윤리를 바로 잡아, 은혜와 사랑을 돈독하게 한다.
8. 접인(接人), 본심과 신의로 사람을 대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사람들과 친한다.
9. 처사(處事), 바른 이치를 분별함에 밝아서, 분노하지 않고 욕심을 막는다.
10.응거(應擧), 역할을 할 때 득실을 따지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천명을 기다린다.
현재 우리가 접한 〈修身十訓〉의 필적은 퇴계 선생의 15대 종손 이동은(李東恩) 선생이 100세 때에 쓰신 것이다. 따뜻하고 자상한 퇴계 선생의 〈修身十訓〉의 가르침도 지극하지만 백세의 고령에 그 가르침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혼신(渾身)의 정성을 기울여 글을 쓰신 선생의 필력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동은 선생은 2009년 12월 23일 종택에서 별세하셨다. 향년 101세.
‘造福’
16대 종손 이근필 선생의 친필
‘造福’(조복)! — 퇴계 이황 선생의 16대 종손 청하(靑霞) 이근필 선생이 손수 써서 보내오신 것이다. (A3 용지 크기)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설립자이신 종손 이근필 선생께서는 지금 백(百)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입원생이나 종가를 찾아오신 손님들께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造福’이라는 글을 써 무상으로 나눠주며 복을 짓자고 권유하신다. ‘한마디로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닌 ‘스스로 복 받는 일을 하자’라는 의미로 ‘조복운동(造福運動)’을 펼치는 것이다.
청하 선생은 ‘조복운동(造福運動)’ 함께 ‘견선여기출(見善如己出)’ 즉 ‘남의 선행을 발견하거든 내 몸에서 나온 것처럼 반기고 꼭 배웁시다.’로 시작하여 ‘과즉물탄개(過測勿憚改)’, 즉 ‘잘못한 일을 저지르면 꺼리지 말고 사과하고 고칩시다.’ 그리고 ‘책인지심책기(責人之心責己)’, 즉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 오히려 자기를 꾸짖고’, ‘서기지심서인(恕己之心恕人)’,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합시다.’ 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남의 흉과 허물은 입에 담지 말고, 남의 선행은 드높여서 내 몸에 지니도록 합시다.’ 하는 ‘은악양선(隱惡揚善)’ 운동을 펼치고 있다. 평생을 ‘경(敬)’으로 세상을 사신 퇴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각박한 이 시대에 던지는 종가 어른의 메세지다.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1917~2000)은 근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문학 유학자이며, 서예가이다. 그는 대학자일 뿐만 아니라 한문 문장과 한시(漢詩)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한문학 작가였다.
이가원(李家源)은 1917년 4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지금의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온혜리(溫惠里)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14대 후손으로 태어났다. 퇴계의 후손 가운데서도 종가 계통의 집안사람으로 그 증조부까지는 퇴계의 종손이었고, 조부는 퇴계 종손의 아우였다. 퇴계 가문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온 가문에서 생장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선생의 5대조인 후계(後溪) 이이순(李頤淳)은, 퇴계학을 계승하여 다시 중흥시킨 큰 공이 있었고,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고조부(4대조)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은 퇴계의 10대 종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학문과 덕행으로도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영남의 선비사회를 주도하였다.
후계의 아들 소계(素溪) 이휘병(李彙炳)은, 1855년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추숭(追崇)을 요청하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의 소수(疏首·상소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 아들 돈와(遯窩) 이만손(李晩孫)은 1881년 청나라 관원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수용한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처벌을 포함한 척사를 주장하는 영남만인소의 소수가 되어 유림에서 중망이 있었다. 소계는 연민의 종고조부이고, 돈와는 연민의 종증조부이다.
조부 노산(老山) 이중인(李中寅)은, 자신은 어려서부터 몸이 아파 큰 공부를 못 했기 때문에 연민을 큰 학자로 만들기 위해서 5세 때부터 같이 데리고 자면서 지극정성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훌륭한 스승을 골라 배우도록 하고, 장가도 학문이 높은 무실의 전주류씨 집안에 들게 하였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선생은 뛰어난 자질과 강의(剛毅)한 집념으로 6세 때부터 학문에 정진하였다.
가정적으로는 부노(父老)들의 정성어린 교육을 받아 가학(家學)을 계승하였고, 외가쪽으로는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 서주(西洲) 김사진(金思鎭) 같은 유학자를 만나 학문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었고, 처가 쪽으로 회계(匯溪) 류건우(柳建宇)으로부터 문학적 수련을 받았다.
23세 때 안동의 향리에서의 연학(硏學)을 종결짓고, 서울로 올라와 5년 동안 당대 우리나라 한문학계의 최고봉인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을 종유(從遊)하며 새로운 안목을 키웠다. 그리고 중국문학을 전공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한문학사를 저작한 성암(聖岩) 김태준(金台俊)을 따라 ‘한문학사’ 집필의 의지를 세우고 민족의식을 고취 받았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동안 진주의 석유(碩儒)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을 알게 되었는데, 서신왕복을 통해서 문학의 바른 길을 인도받게 되었다. 서울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에 재직하면서 사고전서(四庫全書) 등 많은 중국 서적을 접하게 되어 학문의 깊이와 폭을 더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나중에 우리나라 최초의 중국문학사인 《중국문학사조사(中國文學思潮史)》를 집필하게 되었다. 연민 이가원 박사는 연세대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100여 권의 저서와 2,500편의 한시와 2,000여 편의 한문문장을 저작해 낸 대학자요, 대문장가, 대시인이다. 그리고 한국한문학회(韓國漢文學會) 등 여러 학회나, 퇴계학연구원(退溪學硏究院) 등 여러 학술단체를 맡아 운영하면서 후학들을 인도하고 학문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였다.
동시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 도산서원(陶山書院), 죽수서원(竹樹書院), 심곡서원(深谷書院) 등의 원장을 맡아 전통유림의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일본의 우리 문화 말살과 해방 후의 서양문물의 범람으로 우리 민족의 학문이 인멸되어 가는 시기에 태어나 우리 학문을 정립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연민의 학문은, 《한국한문학사(韓國漢文學史)》,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 집필 등 한문학을 전반적으로 조감하는 거시적인 학문과 교산(蛟山), 연암(燕巖) 등 참신한 개혁파의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무엇보다 정통유학인 퇴계학(退溪學)도 평생 연구하였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최고 경지에 이른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 같은 분들이 극찬을 했고, 그의 한시문집인 《연연야사재문고(淵淵夜思齋文藁)》를 읽고, 공자(孔子)의 종손(宗孫)이며 대만대학 교수인 공덕성(孔德成), 대만대학 고명(高明) 등 여러 대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 퇴계 선생 관련 〈낙동강 종주이야기〉 ☞
★ Daum 카페 청랑 http://cafe.daum.net/cheunglang
☞ [2020-백파] ♣ 낙동강(洛東江) 1,300리 종주 이야기 (10) ③ 청량산 퇴계시비공원
☞ [2020-백파] ♣ 낙동강(洛東江) 1,300리 종주 이야기 (11) ① 청량산→ 단천교
☞ [2020-백파] ♣ 낙동강(洛東江) 1,300리 종주 이야기 (12) ② 원촌리 이육사문학관
☞ [2020-백파] ♣ 낙동강(洛東江) 1,300리 종주 이야기 (13) ③ 퇴계묘소→ 퇴계종택
☞ [2020-백파] ♣ 낙동강(洛東江) 1,300리 종주 이야기 (14) ④ 도산서원→ 안동댐
☞ [2020-백파] ♣ 낙동강(洛東江) 1,300리 종주 이야기 (15) ⑤ 도산서원―광주 월봉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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