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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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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소통광장 스크랩 짐승들의 나라
무한의주인공 추천 1 조회 259 13.12.20 01:26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요즘 나는 도무지 글에 흥()을 붙이지 못한다.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조차 지키지 않는 어른들의 분탕질 속에서 아이들이 뼈가 바스러지고 소금밥에 찌들어 숨을 거둔다. 심지어 친딸을 덮치는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툭하면 술기운을 탓하지만, 취한 채 몸을 나대도록 평소 일상의 마음가짐이 빗나갔음을 뜻하니, 알콜의존증(alcohol dependence)만큼이나 되풀이하거나 다른 범죄로 이어지기만 쉽다. 그 짐승들에게 지나치게 가벼운 죗값 역시 치르지 못한 역사청산처럼 사회를 짓찢기 마련이다. 미래인 아이들을 해치듯 역사와 정치며 경제에 걸쳐 나라를 좀먹는 지금의 나라꼴은 흐트러진 정신문화를 더욱 악순환으로 내몰다. 나 자신이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성장기로 아직도 가슴앓이를 안고 살아간다. 차라리 고아들은 부모를 그리워할 수라도 있다며 악을 썼던 열두 살 소년이 달리기로 자신을 들볶으며, 그 상실의 아픔 속에서 자의식(自意識)이 드센 상대성을 짚어왔지만, 아이답지 못했던 성장통은 지나친 자기애에 나를 가두고 있다. 사람을 이끌 그릇이 절대 아니다. 제 울에 매인 마음의 울림이 무른 정서와 감성을 뻗대서 자기과시(自己誇示)로 기울곤 한다. 때문에 글쓰기는 내게 더없는 마음공부다. 나 자신을 뜯어볼수록 자기연민에 치우쳤던 박정희(朴正熙) 같은 독재자가 속을 시커멓게 채우고 있다. 박근혜(朴槿惠) 역시 결코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할 됨됨이만 두드러진다. 아비의 망령에 휩싸여 있으니, 새로운 세대가 구세대를 넘어서는 역사의 반전(反轉)이 아닌 뒷걸음질만 쳐댄다. 정책들도 하나같이 소 뒷걸음치다 쥐잡기를 바라는 공염불이다. 앉혀놓은 인사(人士)들은 하나같이 허깨비에 지나지 않다.

살아온 환경의 울을 거스르기 어려워 서로 끈끈이 맺어졌던 부부도 틀어지는데, 갖가지 분야와 사람이 뒤엉켜 그 자체로 다양성인 나라 안팎에 제 식구만 채우는 획일주의(劃一主義)는 곧 전근대적인 갇힌 사회다. 알아서 줄을 서고, 편을 가르라는 뜻이다. 더욱이 성장기의 배경은 인생에서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데, 장준하(張俊河) 선생에게 시시콜콜 콤플렉스를 앓았을 만큼 친일을 거쳐 남로당 수괴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앞가림에 치댔던 독재자의 딸에게 이미 근대화를 벗어난 세계화 시대의 잘 살아보세를 바라는 국민들은 빤히 드러난 인과관계조차 어물쩍 흘려버린다. 단지 지역과 세대를 가르는 이기심이 아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가문이나 집안을 따지는 이유는 어떤 환경에서 자란 사람인지 재어볼 손쉬운 가늠보기인 탓이다. 돈과 자리로 얻을 수 없는 마음이 올곧은 가늠자다. 박정희의 딸이라서 잘 할 양이면 일제강점기에 벼슬자리를 얻으려다 가산을 모조리 날리곤 소작농으로 주저앉았던 그 조부부터 짚어야 한다. 이어진 아들의 처세(處世)에서 드러나듯 출세에 목을 맸다는 아귀만 곧추선다. 위정자(爲政者)나 지식인들마다 시대가 달랐다는 허튼 대사야말로 옳고 그름을 바르게 따르지 않았던 사람의 차이를 새록새록 되짚어준다. 시대의 사명감을 걷어찬 자기애다. 자기연민이 강할수록 자신을 넘어서지 못해 중심을 잃거나 합리화에 빠지기 쉽다. 애달아서 자신을 내세우는 폭력이나 잦아든 우울증으로 불거지기도 한다. 하물며 지역과 계층이 가지가지 갈리는 나라살림을 살피는 정치란 그 중심을 잡는 중도(中道)을 모르면 갈등만 켜켜이 골을 파헤친다.

가정폭력이 93퍼센트가 대물려지는 정신병이듯 바로잡지 못한 역사는 도덕불감증에 찌든 부정부패로 그 불신불만과 피해의식이 국민의식조차 잡아챈다.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국민생활에 끼치는 사회정의다. 바로 그 이중성이 우리나라의 골병이기도 하다. 자신이, 그 세대가 치였으니 반듯하길 바라는 강한 다짐은 사나운 짐승을 달래는 데 그친다. 민주화운동을 무슨 벼슬로 아는 떨거지들도 수두룩하다. 뒤엉킨 근현대사와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해 이승만(李承晩)과 박정희나 부모세대 이전에 우리는 이를 악물고 자신을 이겨내야 한다. 후대(後代)가 좀 더 편하게 올라서길 나는 바라마지 않는다. 이기심이 세대의 대물림을 흩트릴수록 큰 걸음으로 나아갈 반전은 더디고, 지금 벌어지는 해묵은 이념논쟁이 세계사의 흐름에서 줄기차게 나라를 가로막는다. 모난 구세대와 지역만큼 상대적 박탈감이 몰고 온 피해의식으로 편을 가르고 있다. 후대에겐 자연히 우리 모두가 그 나물에 그 밥일 뿐이다. 갈수록 대중문화에서 짙어지는 성() 상품화부터 소재(素材)빈곤을 덮어씌운 손쉬운 돈벌이인 한편, 전두환(全斗煥)이 프로스포츠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듯 이른바 4대 중독법까지 졸라대는 정부가 성인업소나 다름없는 옷차림과 춤들이 판치는 연예계에 군소리조차 없는 사이 성범죄에 몸살을 앓는 사회기강은 동시대를 이끈 현재 중장년층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사상에서 인권을 끌어내리는 표현의 자유가 몸뚱이만 너그러운 이중성이다. 몸만 과시하고 마음을 울릴 머리를 절제하면 사회문화에 그만한 의식(意識)이 자라지 못해 가파른 상업주의가 남길 허물만 단단히 굳어진다. 정말이지 정치후진국답다. 전문 스포츠마케팅이 아닌 전시행정으로 들어선 프로리그가 적자에 허덕이는 보상심리를 부추겨 덩치만 세계 10대 경제대국일 뿐 기업문화도 성장미숙이다.

억지와 흰소리야말로 밑도 끝도 없다. 민주주의를 이뤘다며 촛불집회를 종북주의(從北主義)로 몰아대는 짓 자체가 복수정당과 다양성을 추슬러야 할 자유민주주의를 짓밟는다. 민주주의란 다양함으로 엉킨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끝없이 풀어갈 실타래에 지나지 않다. 더디더라도 풀어야지 끊고 자르면 쓰임새만 너르지 못한 불평등을 부른다. 긴 줄에 매달려 동사무소에서 밀가루를 타다가 시장에 버려진 배춧잎을 넣은 멀건 수제비로 주린 배를 채웠던 70년대 내 어린 시절이야 잘 살아보세가 당면과제였더라도 이미 40년 전 과거다. 그조차 상대성으로 추스르지 못한 채 한류라는 꺼풀에 호들갑인 짐승의 자화상이다. 군대가 특수집단이라 한들 우리의 소원부터 그 날이 오면등 평화와 통일을 기리는 노래만이 아니라 민요인 아리랑까지 50여 곡을 불온곡(不穩曲)으로 노래방 기기에서 빼버린 국방부를 보면 박근혜 정권의 대북정책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통일을 위한 상대성에 씨를 말리는 짓이다. 국민 역시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는 자기연민에 악악거린다. 허리띠를 졸라맸거나 민주화운동에 나섰다고 우쭐대자면 독립운동으로 가족조차 돌보지 못했던 선인들에게 떳떳해야 마땅한 도리가 들어선다. 그들의 후손은 63퍼센트가 끼니를 걱정하는 절대빈곤층으로 살아간다. 결국 상실의 아픔에 골골거리며 서로 자기만 내세우는 이중성이 당연한 이치를 거슬러 민주주의를 위한, 개혁을 위한 양보는 묻혀버린다.

장장 13년을 부모와 빚쟁이들에게 치이며, 온몸에 남은 상처자국보다 그들의 두 얼굴과 일방주의(一方主義)가 내 숨통을 조이곤 했다. 2년에 한 번씩 중동 사막에서 날아온 아버지에게 욕을 하거나 돈을 훔쳤다는 어머니의 거짓말은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선행과 백일장 상장 따위가 오히려 몰매를 벌었다. 집에서만 말썽이라는 구실이었다. 콧등이 주저앉고 머리가 깨지도록 버티는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이기도 했다. 열네 살 중학생 때는 속으로 연극이나마 하자며 목숨만 살려주세요하고 까무러칠 만큼 이미 자아(自我)가 너덜너덜 찢겨 있었다. 어차피 빚쟁이들이 들이닥치면 어머니의 머리칼을 뭉텅 잡아 뜯은 주먹질을 또 받아내야 했다. 남편을 잃은 청산과부에 강남 땅 부자 노릇까지 해댄 사기를 알 턱이 없는 아이에게 왜 편지로 알리지 않았냐고 분풀이를 일삼도록 아버지의 화병은 가없이 깊었다.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신세라는 생각을 차라리 몰라야 좋았을 나이였다. 때로 원망하고 덤비기라도 하며 속을 털어내진 못할망정 입바른 소리만 꼬박꼬박 늘어놓은 채 어른들과 눈높이를 맞추곤 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 머리를 키워도 마음과 몸이 겉돌면 상대성은 흐려진다. 나이를 훌쩍 앞지른 천재들이 흔히 그 성장장애를 떠안는 이치다. 사회의 울에서 아이와 어른의 두드러진 차이는 법조차 나이를 헤아리는 그 책임감이다. 세상을 등지는 순간까지 평생 자기싸움을 벌어야 하지만, 배워야 하는 시기와 스스로 깨우쳐 앞가림을 할 때가 분명히 다르다. 역사도 다르지 않다. 현재는 부모인 과거가 낳은 자식인 만큼 자기 세대에 대한 상대성을 스스로 가꾸는 책임의식이 획일화(劃一化)와 양극화(兩極化)를 부추기는 일방주의를 그나마 덜어낼 수 있다.

이젠 어떻게 사느냐로 경제로부터 사회제도며 역사에 걸친 관점이 바꿔야 하는 시대다. 국민소득만 2만 달러 시대일 뿐 그 분배는 그야말로 개처럼 일하고 버는 데 그쳐서 말로만 세계화를 떠들 뿐, 앞선 나라로부터 배울 깜냥이라곤 흐릿하다. 당장 10년 뒤에는 식량주권에 발목이 잡힐 판이다. 선진국마다 70퍼센트를 웃도는 자급률에 비해 우리는 기껏 45.3퍼센트로 갈수록 농경지와 경작인구가 줄어서 머잖아 수입 농산물과 축산물로 밥상을 차려야 할 신세다. 새마을운동부터 오늘에 이른 농가정책은 그 생산물을 나르기 위해 도로를 뚫고 항구를 내서 한반도를 전쟁의 식량기지로 삼은 채 근대화시켰다며 떠벌이는 일제강점기와 다를 바 없는 저임금 도시 노동자를 위한 수탈이라는 허물이 두텁다. 소위 해외식량기지개발이 그 신()식민지토지수탈일 수밖에 없다. 미국 농가만 거둬 먹이며 곡물 가격에 뼈가 휘는 축산농가야말로 밑 빠진 우리 농가정책을 뚜렷하게 비쳐준다. 알다시피 소는 풀을 먹는 초식동물이다. 할아버지가 얼어 죽을, 옥수구를 맥이면 힘을 못 쓰는 벱이여!”하며 평생 일소에게 풀과 여물만 해먹였듯 곡물사료는 억지로 살을 찌울 인간의 이기심이지, 몸에 맞아 입을 대는 먹거리는 절대 아니다. 그만큼 생산단가를 맞출 유통구조의 개선은 전체 시장경제를 다잡을 디딤돌이다. 유통구조와 세법(稅法)을 갈무리해 정부재정을 늘리는 한편, 생산단가만큼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 우선 세계화를 한다며 얼빠진 새마을운동과 농가부채만 부풀리는 비리의 온상인 농협을 탈바꿈시키거나 숫제 들어내야 한다. 식량주권을 내어준 세계화 자체부터 꼴사나울 따름이다.

하나님도 독재를 했다며 신성모독을 서슴지 않는 목사와 그 무리들 역시 박정희 우상화에 상대성을 잃은 우리 정신문화의 수탈이다. 그들만의 억지소리가 아니다. 내 허름한 아파트 옆집 아주머니는 볼 때마다 언제 성당에 나올 거냐고 인사치레를 해대지만, 계단과 옥상에서 썩어가는 구질구질한 잡동사니와 화원을 접었을 때부터 쌓아둔 온갖 쓰레기를 아직 10년은 훌쩍 기다려야 할 재개발로 둘러친다. 계단 청소는 언제나 내 몫이다. 현관문 앞에 너덧 번 인사불성으로 취한 아주머니가 널브러졌을 때 그 토사물을 닦아냈을 뿐, 집을 나설 때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부부나 얹혀사는 동갑내기 막내아들에게 믿음 생활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아랫집도 똑같다. 풍을 맞아 걸음조차 어려운 남편을 대신해 집안일에 불려갈 때마다 하나님을 팔아 독재자를 추어올린다. 그야말로 미신이 아닐 수 없다. 집 앞을 쓸고 닦으며 세상을 돌볼 사람은 따로 있다는 이기심이 십계명을 떠벌이니, 저희가 좋을 때만 이웃사촌이다. 그만큼 땀을 홀대하는 상대적 박탈감이 나라를 좀먹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고등교육 이수율이 가장 높다 한들 고용인구의 4분의 1이 최저임금으로 허덕이듯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아나서 청소년 성범죄만 여섯 배씩 늘어나는 등 각종 범죄가 해마다 솟구쳐서 마치 다중인격체인 해리성 장애(解離性 障碍, dissociative disorders)에 시달리는 꼴이다. 개혁이라곤 없이 잘 살아보세, 하는 타령부터 성장장애다. 어느 정치외교학과 교수라는 밥그릇은 다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야 한다는 글이나 페이스북에 띄우니, 그른 수단으로 목적을 이루는 마키아벨리스트(machiavellist)들이 넘쳐나는 속은 들출 줄 모르는 눈 뜬 장님이다. 결국 12·12군사반란에 이르렀던 빌미다. 경향신문 기자에게 이미 한 차례 쿠데타를 겪었던 만큼 한 번 더해도 이상할 게 없다하는 전화 인터뷰부터 세 번, 네 번조차 괜찮다는 개소리다. 악순환을 되풀이할수록 나라는 힘의 논리를 앞세운 정치가 그 역사관으로 정신문화를 짓밟아 깊은 나락에 빠뜨릴 뿐이다.

돌이켜보면 내 부모도 자기애에 겹겹이 휘감긴 위인들이었다. 6월 중순 즈음 집을 떠난 스물여섯, 그 한 달 전에 기어이 아버지는 10개월 가까이 집에도 나타나지 않는 어머니에게 세 번째로 마지막 이혼소송을 걸었다. 자식들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어 소위 깡을 받아썼던 독촉장이 무더기로 날아들었을 때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계모 슬하에서 갖은 설움을 겪었던 아버지조차 두고두고 자식들 앞길을 막을까 무서웠다고 했다. 9남매 중 셋째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동생들 뒷바라지에 살림을 도맡았던 억척스런 어머니를 꺽다리 외조부는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외조모도 참 순했던 양반이다. 일본보다 친일파들이 들어찬 나랏일에 치를 떨었던 징용피해자인 친할아버지나 그 한()으로 데인 아버지도 모자라 나 역시 어릴 적부터 입바른 소리가 드세서 어머니에게 맞지 않는 외골수들이었다. 첫째로 딸을 낳자마자 된서리가 쏟아졌던 모양이다. 군식구로 들러붙어 허구헛날 땅을 떼어달라며 징징거렸다는 10년 터울인 큰아버지가 그 당시 딸만 넷을 둬서 아홉 살에 손위형제 셋을 모두 잃었던 할아버지의 불벼락만 어머니가 뒤집어썼다. 툭하면 꼴 보기 싫다며 밥상이 엎어졌다. 못난 며느리들이 시집살이를 시킨다고 할머니까지 속을 긁어댔으니, 못 살겠다는 어머니의 하소연에 부자(父子) 사이가 틀어지다 못해 초등학교 선생이 신탄진 전매청으로 직장을 옮겨서 살림을 따로 냈다. ‘청주고모가 항상 아쉬워했던 시절이다. 박정희 시대에 간판사업이었던 전매청에서 1년을 못 넘겨 알짜배기인 인사과 과장대리로 올라갈 만큼 청주사범 수재로 불렸던 아버지를 끌어주는 인맥이 좋았지만, 그조차 3년을 채우지 못했다.

나를 밴 배불뚝이 산모가 동네방네 금품갈취를 해댔다. 넷째 이모부를 전매청으로 끌어주자 서른 명 남짓에게 취직을 시켜준다며 5만원, 10만원씩 돈을 받아내 외가를 챙겼는데, 아버지부터 외아들을 봤던 형과 형수에게 매달 살림이 쪼들리도록 뜯겼으니, 아직 보릿고개에 허덕이는 어린 동생들이 치일만 했다. 아버지 학교선배인 지검장이 구속조차 하지 않았단다. 집행유예로 누그러뜨려주자 친정으로 도망쳐서 첫 이혼을 당했고, 남아서 이사(理事)까지 지낸 순둥이 이모부가 전하길 승진을 앞두고도 아버지는 그 돈을 다 갚자마자 저마다 붙잡는 직장을 나왔다. 도의적(道義的) 책임이었다. 마땅히 따를 도덕과 의리는 자식들만큼은 절대 계모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트라우마(trauma) 속에서 평생 아내의 빚 수발을 들며 주먹질로 배배 꼬인 당신의 원칙이었다. 자기방어를 위한 전치(displacement)이자 합리화(rationalization)에 속한다. 감정과 욕망을 당사자가 아닌 해가 없는 약한 상대에게 풀어내는 동시에 그 이중성과 자신도 피해자라는 정당성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나마 띄우는 경제발전 역시 징용과 정신대 피해자조차 짓밟아 오늘의 역사왜곡을 부른 굴욕외교 위에서 재벌 위주의 정경유착을, 무수한 인권을, 그 법치를 유린했던 아비의 기초부실을 뒤덮는 분리(splitting)로 박근혜도 치댄다. 약한 내면을 감싸기 위해 절대 선()은 좋고, 절대 악()은 싫은 자기암시를 둘러친다. 편을 가르는 정치와 스포츠에서 흔하지만, 유아기에나 들어서는 가장 어린 자기방어이듯 공인이 아닌 그 아비의 딸로 정치를 떠버리는 흑백논리다. 부모를 둘 다 총에 잃은 보상(compensation)을 부르는 자기연민이기도 하다. 어떤 원칙이든 끊고 맺을 줄 모르면 철없는 자가당착(自家撞着)만 키운다.

우리 가족도 잠시 행복한 시절이 있기는 했다. 내가 빠른 생일로 1년 일찍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 간판을 달았던 율산(栗山)건설 자재과 과장으로 불려간 아버지의 전성기는 그 회사가 문을 닫기까지 또 3년 남짓이었다. 지금은 그조차 슬픔만 불러낸다. 군복을 본뜬 나들이옷을 입고 어린이대공원과 속초며 주문진에서 찍었던 사진들 속에는 그 당시 태어나지 않았던 막내만이 아니라 누나의 모습도 전혀 볼 수 없다. 어머니 사진이야 아버지가 없애버렸지 싶다. 여덟 살 때 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잔뜩 취한 옆집 아저씨가 냅다 문을 닫는 바람에 똥통으로 발을 헛디딘 누나는 그 나들이마다 막내이모에게 끌려서 집을 지켰다. 고작 여섯 살이었을 당시 기억이 나는 아주 또렷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때라 이른 저녁을 먹고 방바닥을 훔친 어머니가 부엌에서 외조모를 거들며 나누는 이야기소리가 도란도란 들리는 사이 삽시간에 날이 어두워진 늦여름이었다. 펌프로 물을 긷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아이고, 아이고!”하는 외침으로 어머니가 자지러졌다. 그 짐승 같은 울부짖음에 어른들이 뛰쳐나간 방에서 높은 문턱을 넘어 살그머니 마루로 걸음을 옮긴 나는 저마다 긴 작대기를 빼든 채 웅성거리는 모습에 놀라고, 곧장 마당을 대낮처럼 밝히며 모여든 친척들의 횃불로 넋이 빠졌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어머니가 다 비키라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이윽고 무언가 새카맣게 웅크린 덩어리를 안고 우물가로 내달려 엄니, 물 좀 끓여줘유하며 연신 물을 끼얹어 일으켜 세우자 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씻기고 또 씻기길 셀 수도 없었다. 신기하게 내내 울지 않았던 누나는 옷까지 갈아입혀 말 좀 해보라고 다그칠 때 그제야 울음보가 터졌고, 아이가 이상하다는 어머니의 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똥통에 빠지면 살아도 병신이라는 어른들 말이 맞았다. 누나는 영원히 대여섯 나이에 매인 정신박약아로 먹성만큼이나 덩치만 큰 어린아이였다. 한약을 잘못 먹었다는, 코로 들어가 뇌를 다쳤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나는 발가벗겨져 빨랫줄에 칭칭 묶여서 이틀째 맞다가 지쳐 잠이 든 5학년 어느 봄날, 제초제를 들이킨 아버지가 허연 거품을 빼물고 실려 나갔던 악몽이 살아난 이후 옛 기억들이 하나하나 풀려나 내 몸을 갉아댔다. 누구도 믿기지 않아야 할 이야기다.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진을 뺀 내가 삼겹살 냄새에 눈을 떴을 때 점심상에는 아래윗집 세 명의 이웃이 둘러앉아 있었다. 창피해서 고개를 시종 숙여야 했다. 골목 맞은편 아랫집 아주머니가 애 뭐 좀 먹여야 하는 거 아냐?”하고 묻자 상추쌈을 쑤셔 넣은 어머니는 냅둬, 굶겨 뒈지게하는 말로 자식 가슴에 못을 박았다. 내 잘못도 없지 않아 매질보단 그 못질이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오후반으로 집을 나서려던 화요일이었는데, 준비물을 사기 위해 낮잠을 자는 어머니를 깨웠다가 벌컥 화를 내는 통에 겁이 나서 감싸 안은 막내의 손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빼갔던 것이다. 준비물을 샀다고 말해도 거짓말이라며 믿어주질 않았다. 거짓말을 일삼는 어머니 자신의 색안경이었을 텐데,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몸이 굳는 이상한 병까지 생겼다. 날아드는 매질을 버티느라 몸이 뻣뻣해진다 싶으면 팔이 제멋대로 굽고 쥐가 난 듯 다리가 당겨 쓰러져도 연극을 한다며 부러진 빗자루 대신 마당비를, 다음엔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큰아들을 낳으며 어머니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배앓이에 시달릴 때마다 시골에서 만병통치약으로 쓰인 마이신을 한 주먹씩 삼켰다는데, 출산을 두 달여 앞두고 쓰러져 소달구지로 병원을 찾았을 때 자궁에 아이 머리통만한 혹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외할머니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나는 모진 매질 속에서도 그들이 친부모가 아니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틀을 못 넘긴다고 팽개쳤던 목숨을 끊기엔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했다. 열두 살 때 삶은 죽음과의 싸움이다하는 글귀를 당신이 교사 시절부터 지녔다는 생각하는 갈대라는 잠언집(箴言集) 표지 속에 끼적일 만큼 다 같이 죽자며 연탄불을 피우고, 국에 농약을 타는 아버지로부터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 했다.

아이가 너무 많이 알면 세상에 대한 동화를 꿈꾸지 못한다. 시각장애인이 소리와 손끝 감각이 길러지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이 나이를 앞질러 생각하는 힘을 길러줬지만, 6학년 겨울방학 내내 훗날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 그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상실감은 가파른 외로움만 지폈다. 피를 토할 만큼 달리기로 몸을 지치게 만들었다. 책벌레답게 헌책방에서 구한 트레이닝 책으로 훈련계획을 세워 100미터 기록부터 줄이고, 지구력에 속도를 붙여 나갔다.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마라톤에서 2시간 30분 벽을 깬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했던 손기정(孫基禎) 선수를 그 책이 알려줬다. 동메달을 땄던 남승룡(南昇龍) 선수도 있었다. 부모의 매질과 가정불화조차 숨이 막히는데,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맞섰던 그들의 호흡 속에서 독립투사들을 새기며 세상엔 나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상대성을 붙잡았다. 그 달리기부터 아버지가 물려줬던 유산이다. 당신이 고향 냇가 모래사장을 달리며 자라서 수재 소리를 들었듯 아들들이 본받기를 바랐는데, 주먹질이 무서워 나섰다가 가쁜 숨을 몰아쉴수록 가슴을 짓누른 시름이 덜어지는 자신과의 싸움을 깨우쳤던 자식은 나 혼자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당신을 이해해줄 놈은 첫째밖에 없다고 데릴사위 노릇을 해준 누이부부에게 넋두리를 늘어놓곤 했단다. 자식도 아니라는 빨갱이 새끼가 당신을 어떻게 헤아려주길 바랄지 나는 모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이 탓에 더는 해외근무를 나갈 수 없어 빚잔치로 방 두 칸짜리 사글세를 살던 여름방학이 코앞인 어느 날, 취할 대로 취한 채 내 인생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하며 부엌바닥을 구를 때 아버지는 마흔여섯, 내후년이면 어느새 내가 그 나이다.

무엇이든 일장일단(一長一短)은 있다. 생명을 줬고, 그림과 글이며 연출을 거쳐 사회학자로 살아갈 만큼 드러낼 게 많은 삶 속에 던져줬지만, 조카들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를 쉬쉬 하며 감춰야 하듯 3대를 잇는 한은 내 대()에서 끝내야 한다. 부모가 어찌 살았는지는 조카들이 커서 스스로 찾아가야 상대성을 갖춘다. 아이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짓 자체가 하소연이고 신세타령인 동시에 자기애로 길들이는 일방주의다. 심하면 언어폭력이기도 하다. 몰라야 좋을 시절에 바람막이를 해주는 역할이 어른의 몫이다. 남매가 중학생인 누이는 지금도 온갖 욕을 어머니에게 퍼부어댄다. 차라리 말을 꺼내지 않는 게 낫지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꼭 제 맏딸 나이에 영안모자공장으로 질질 끌려갔던 그 꼬맹이가, 배고파서 칭얼거리다 사라진 여섯 살 때 하숫물이 흐르는 개천에서 수박껍질을 주워 먹던 가슴 시린 기억이 내겐 항상 따라다닌다. 연합고사에 떨어졌다더니, 꿈으로 부풀 학창시절을 앗아간 어머니의 거짓말이었다. 난방이라곤 없는 공장에서 하루 13시간이나 쪽가위를 놀리며 손가락이 짓무르고, 동상으로 발가락이 퉁퉁 부어올라 받아온 첫 월급이 64790원이었는데, 꼬박 2년을 어머니가 챙겨갔다. 남들이 제아무리 바람 난 사기꾼이라고 수군거려도 우리에겐 어머니였다. 가뜩이나 어린 딸이 고생해서 벌어온 돈이니 적금을 붓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지만, 아버지가 돌아와서야 보내준 고등학교 입학금부터 가로챘음을 알았다. 누이는 정말이지 독하게 변했다. 1년 만근(滿勤)을 아득바득 채워 산업체특별학급(産業體特別學級)에 들어갔을 때 해맑게 좋아했던 꿋꿋한 소녀가 빚쟁이들이 집안을 휩쓸 때마다 왜 나만 돈을 벌어야 해?”하며 악에 복받쳤다. 내겐 또 다른 빚쟁이이기도 했다.

주말이나 보충수업이 빈 자투리 방학 때 건설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몇 푼이나마 쥐어주면 좋아하는 책이나 사보라며 한사코 뿌리치다가도 눈만 뒤집히면 누이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형제들마다 피를 말렸다. 독불장군인 아버지조차 말리지 못했다. 딱 한 번 손찌검을 했다가 왜 때려? 해준 게 뭐 있다고 때려! 돈 내놔, 나가 살 테니까 내 돈 내놔!”하는 악다구니에 눈치만 봤을 뿐이다. 가끔 짐승을 풀어놓은 누이가 부러울 때가 있었다. 나도 두세 시간씩 구구절절 악을 쓰며 울고불고 떼를 썼다면 점점 몸이 굳는 병치레를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 짐승에게 넘어갔다면 분명히 나는 가족을 죄다 죽음으로 내몰았을 놈이다. 피를 토하도록 달리다 폐결핵으로 실려 간 병원에서 의사가 몸만 중학생이지 말하는 건 마흔이 넘은 늙은이라며 생각을 하지 말든가, 아니면 그만큼 꺼내놓으라고, “자칫 사람만 여럿 죽어하곤 혀를 찼을 만큼 내 짐승은 사납다. 청진기는 몹시 차가웠지만, 숨을 길게 내쉬는 내 등짝에 잠시 얹어진 그의 손은 참 따뜻했다. 그때 5개월 전 6월에 벼르고 별러서 편지지 두 장에 글을 썼다. 막내는 남에게 끌려 다니기나 하며 체격만 좋으니 운동을 시켜서 마음을 다져야 하고, 둘째는 주판셈 천재인 만큼 타고난 머리를 살리되, 누이는 뭘 하든 제 몫은 해낼 재주꾼이라는 글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두 달여 만에 집을 찾은 날이었다. 누나도 아예 바보는 아니라며, 하루 종일 라디오만 듣다보니 첫 음절만 들어도 가수며 가사를 줄줄 외우니 붙어서 뭐든 가르치면 사람 구실은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제발 거짓말 좀 하지 말고, 간장만 찍어먹어도 좋으니 빚을 갚자며 끝맺었다. 얼핏 읽는 가 싶더니, 어머니는 고막이 터져라 양손으로 따귀를 후려쳤다. 곧장 이 자식이 지 에미를 가르치려고 들어하는 발길질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낄낄낄 웃음을 터트리자 그래, 쌍놈의 새끼야. 그 잘난 집안 피다 이거지?”하며 잡아챈 머리통을 안방 벽에다 마구 찧어댔다. 나는 처음으로 몸싸움을 벌이며 그럼 어쩌라고! 머리가 좋을수록 환경이 숨조차 못 쉬게 만들면 애들이 망가질 게 빤한데요!”하고 대들었다.

그날 간질인 듯 발작이 일어나 부들부들 떨며 방바닥에 쓰러진 내 몸을 연탄집게로 내리치는 어머니의 눈에는 불꽃이 번쩍번쩍 뿜어졌다. 한마디로 광기(狂氣)였다. 반나절이 지난 뒤 전세를 준 문간방에서 눈을 떴다. 3인 둘째 남동생이 딸린 스물셋 회사원 누나가 벌겋게 젖은 눈으로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여전히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한참 주물러줬다. 뭘 잘못해서 이렇게 맞은 거냐고 달래는 그녀의 눈물에도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어쨌든 그 어미의 자식이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으니 욕을 하든, 원망을 하든 내가 해야지 남에게 기대기 싫다는 되바라진 자의식이자 자존심이었다. 토요일이라 직장을 마치자마자 돌아왔다가 울음조차 끊긴 매질소리가 이상해 그 누나가 부엌칼로 방문을 땄다고 했다. 손가락이 두 개나 부러지기도 했지만, 손바닥 자체가 이튿날까지 도통 펴지질 않았다. 병원조차 가지 못해 내가 맞춘 손가락은 보기는 흉해도 잘 아물었지만, 동생들은 결국 모진 환경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중학생 때 교생을 꼬드겼을 만큼 인물이 외가를 빼닮은 둘째는 가출을 일삼다 공업고등학교를 그만둔 채 집을 나가 3년여 유흥가를 떠돌았고, 막내는 중학교 때 뒤늦게 운동을 하려다 지지부지 겉돌아 어렵게 상업고등학교를 갔다. 일탈이 꼭 나쁘지는 않다. 도리어 놀아보라고 학교에 자퇴서를 들이민 내가 5년만 넘기지 말라며, 언제든 아니다 싶으면 돌아오라면서 등을 두들겨줬던 둘째는 응어리가 자못 흐린 편이다. 건설현장에서 방학을 날 때마다 등록금을 치르고 모아둔 돈으로 사줬던 8비트 퍼스널컴퓨터가 지금은 어여쁜 남매를 둔 손에 꼽는 프로그래머를 만들어줬다. 거짓말과 물욕이 심한 막내가 사고뭉치였다. 여자를 겉만 보고 돈지랄을 해대며 휴대전화로도 깡을 받아쓰더니, 회사 돈을 3억이나 경륜과 경마에 날려먹고는 중국으로 도망을 쳤다. 그야말로 어머니가 애지중지했던 놈다웠다.

결혼하라는 지청구조차 못한 채 눈치를 봤던 아버지가 한 번만 구해주라고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내 손으로 잡아서라도 막내에게 콩밥을 먹일 작정이었다. 끊지 못하는 짐은 어머니 하나로 족했다. 항상 생각은 어리숙하고 욕심과 불만만 많다. 내가 맏이라는 자리에 매였듯 녀석은 지나친 편애로 길들었던 마마보이다. 워낙 여자들을 여럿 울린 둘째는 선하디선한 제수씨가 몸부림치며 살아온 상처를 받아줄 만해서 스물다섯에 냉큼 장가를 보냈지만, 막내에겐 결혼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을 만큼 남의 인생을 망칠까 무서웠다. 대학 4학년인 띠동갑을 데려왔을 때 나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중견기업 이사의 막내딸이라는 차이야 그쪽에서 마음으로 받아주길 바랐지만, 가뜩이나 허술한 놈이 세상을 겪어보지도 않은 유아교육학과 학생이라니, 씌워진 꺼풀이 걷히면 앞이 빤했다. 이미 세상을 떴던 아버지도 뜯어말릴 성싶었다. 내가 고3 절대, 절대로 얼굴만 보고 여자 사귀지 마라하고 신신당부를 할 만큼 인물값 할 년이라며 어머니를 마뜩잖아 한 할아버지를 따르지 않았던 자신을 아버지는 두고두고 뉘우쳤다. 껑충하게 큰 키에 미끈한 막내의 생김새야 사내 중의 사내였다. 애가 들어선 마당이라 뒤늦게 막아설 결혼이 아니라서 둘째부부에게 했던 그대로 집안 대소사 외에는 아예 연을 끊는다 생각하고 너희들 앞가림이나 잘 챙기라는 말을 똑같이 읊었다. 당장 큰집만 해도 입장이 다르다. 우리야 피붙이는 고사하고 단물만 빨아댔던 원수나 다름없지만, 제수씨들은 그들의 생일부터 흘릴 수 없는 남의 식구다. 고모들 역시 다르지 않다. 시누이들답게 학창시절부터 줄곧 찢어 죽일 년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히도록 어머니에게 욕을 해대며 제 신세타령을 늘어놓곤 한다.

거느린 땅값이 치솟아 다들 번듯하게 살 뿐이지 외가도 상처가 깊다. 5학년 때 소를 내다팔고 돌아오다 강도가 휘두른 낫에 숨을 거둔 외조부에 대한 상실감은 나 역시 가없이 컸다. 외조모는 평생 눈조차 아버지에게 맞추지 못했다. 우리 형제들만 보면 눈빛이 흐려지고 혀를 차거나 헛기침을 해대며 외삼촌과 이모들은 말을 잇지 못한다. 나부터 옛 이야기를 웃으며 흘려버리는데, 지나치게 조카들 눈치를 보니 도리어 죄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수록 어려지듯 과거에 매이지만, 후대는 오늘을 통해 미래를 살아야 한다. 요즘이야 결혼을 안 했더라도 어디까지나 내가 웃어른이니, 노인네들을 피해 잘 살기만 바랐는데, 둘째아들 돌상마저 받아주지 못한 채 막내부부는 2년 전에 갈라섰다. 아이들 사진조차 남겨주지 않도록 아주 단단히 틀어졌다. 모질게 돌아선 귀한 집 응석받이가 전혀 밉지 않을 만큼 허풍쟁이는 지금도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른다. 큰아버지라는 인간이 딱 그 짝이다. 허벅지에 박힌 미군 보급부대에서 터진 수류탄 파편을 백마고지의 영웅이라며 형제들 땅까지 빼돌려 들어먹을 때마다 그 뒷감당을 해준 세월이 자그마치 햇수로 8년이었다. 선산(先山) 관리 따위는 국립묘지에 가니까 자신은 상관없다는 핫바지였다. 딸 하나는 반드시 미국인 사위를 보겠다는 소원대로 영문학과를 졸업해 어학연수를 간지 단 반년 만에 워싱턴주() 공무원과 결혼한 내 손위 누나가 전문대를 졸업한 여동생까지 불러들인 그 다음해였다. 멀쩡히 살아있는 할아버지의 집문서를 훔쳐서 팔아먹고 태평양을 건넜다. 머리를 싸매고 쓰러진 할아버지 옆에서 아버지와 나는 말을 잃었다. 큰아들이라고, 형님이라고 그토록 위하며 떠받들었던 두 양반이나 하나뿐인 형과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맏이기에 말을 가렸던 나도 미욱한 팔푼이였다. 큰집에게 방방 뛰는 누이를 가로막곤 했던 아버지는 그때부터 부쩍 늙어버렸다.

큰집 형은 1997년에 할아버지 상을 치른 뒤로 얼굴조차 보질 못했다. 8년 뒤에 아버지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강화도에 숨겨둔 과수원에서 할아버지에게 찾아줬던 땅값을 토해내라고 내게 덜미를 잡힐까 조바심이나 낼 심보들이었다. 그 철면피 부부도 천국 운운하던 미국에서 뼈를 묻나 했더니, 막내가 이혼했던 2년 전에 개포동에 붙박인 임대아파트로 기어들었다. 한국전쟁에서 나라를 구했던 수많은 호국영령(護國英靈)과 참전용사들에게 항상 옹송그리는 마음에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백선엽(白善燁) 같은 위선자다. 자식농사를 잘 짓기는 했다. 상고를 나오자마자 은행에 들어가 이런저런 핑계로 산을 찾으며 집안에 붙어 있지 않았던 다섯째누나를 빼곤 자식들이 깡그리 철면피들의 꼭두각시였다. 아버지가 내뱉던 말 잘 듣는 큰집 자식들 타령은 70년대를 2013년에 갔다 붙이는 요즘의 나라꼴이다. 정작 구박을 받았던 계모 할머니에게 언제나 깍듯이 대해도 박정희의 추종자인 당신은 친일파들의 나라에 등을 돌린 할아버지에게 마음을 얻지 못했다. 자식에겐 신세타령만 쏟아내며 무작정 떠받들어주길 바랐다. 짓무른 외조모의 눈물이 이어줬던 부모의 연()은 내 기억에도 그대로 들러붙어 있다. 아버지가 고향사람들과 함께 흙벽돌을 찍고 마을 어귀에 터를 다져 집을 올리던 모습들, 아낙들과 어울려 냇물을 막아 고기를 잡던 고운 어머니의 웃음이 어우러진 봄날들이었다. 부엌 안쪽에 따로 낸 작은 우물이 신기해 세 살배기인 내가 아칫거리며 들어다보곤 했다. 할아버지 옆집 아저씨가 개미허리 마누라 힘들지 말라고 위하는 거 보소하고 던졌던 우스갯소리도 소름끼칠 만큼 생생하다.

사과 과수원을 꾸렸던 그 살림은 2년 만에 탈이 났다. 큰고모네 마을인 냇물 윗동네 계주(契主)가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도망쳤는데, 계원(契員)을 끌어 모았던 사람은 정작 어머니였다. 내가 아홉 살에 이르도록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고향이었다. 한밤중에 들이친 마을 아낙들의 아우성은 뒷산에서 들리는 여우의 울음만큼 날이 서 있었다. 아버지의 손찌검에 죽는다는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사흘째 저녁마다 이어졌고, 며느리의 머리채를 잡아챈 할아버지와 싸움이 벌어진 날, 한밤중이었다. 부엌에서 이화 아빠!”하고 아버지를 부른 어머니가 사람 죽는다고 목을 놓아 울었다. 농약을 마신 아버지가 거적때기에 덮여 달구지에 실려 갈 때 횃불 속에서 아낙들이 그 뒤를 휘적휘적 따르는 어머니를 손가락질하며 그예 서방을 잡네, 잡어하고 혀를 찼다. 그 다음날 누나만 데리고 외가로 내쳐진 뒤 닷새쯤 지나 아버지가 돌아왔다. 그 두 번째 이혼에서 끝났어야 했는데, 율산건설에 들어간 아버지가 혼자 서울로 올라갔던 한 달 남짓이 지나서 나를 데리고 외가를 찾았다. 어머니는 차디찼다. 죽으면 죽었지 못 산다고 매달렸지만, 그 웃음 많은 외조부가 귀신이 되도 가서 되라며 버럭 화를 내자 뜨끔해서 주섬주섬 보따리를 쌌다. 아버지를 놀라게 했던 코흘리개 적 내 기억은 머리가 좋은 탓이 아니다. 소스라치는 가위눌림으로 몸살을 앓으며, 책을 좋아하는 게 신기하다고 작은아버지가 초등학생 때 입방아를 찧었을 만큼 안으로 잦아들었다. 고등학생인 삼촌이 끄는 리어카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장난을 치다 바큇살에 왼쪽 발등이, 자전거를 태워줬을 때는 오른쪽 발등이 부러졌다. 놀아달라고 등에 달려들다가 몸이 그대로 넘어가며 꺾인 어깨뼈가 살을 찢고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징용에서 돌아오자마자 물려받은 약방을 팔아치워 그 시골에 틀어박혔던 할아버지가 뼈를 맞추고 달군 인두로 상처를 지졌다. 배가 다른 막내아들을 꾸짖진 않았지만, 마음고생깨나 했을 작은아버지였다.

옆집 밭에 들어가 탱탱하게 알이 올라온 가지를 딱 한 입씩 배어먹곤 할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은 뒤, 담배건조실 꼭대기 다락에서 이틀이나 갇혀 있을 때 어머니는 밤마다 찐 감자나 고구마며 주먹밥이 담긴 소쿠리를 안은 채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정말 큰 사건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가 옷장 깊숙이 감춰둔 과수원집 공사비 200만원을 빼내 대통령 할아버지 사진이라며 또래 조무래기들에게 싱글벙글 나눠주곤 당산나무 가지마다 꽂아놔서 마을이 벌컥 뒤집어졌는데, 구멍가게조차 없는 촌구석이라 고스란히 건지긴 했다. 아버지도 어이가 없는지 웃어댔을 뿐이다. 철부지 손자의 말썽조차 눈엣가시였을 만큼 한에 찌든 할아버지는 웃음이라곤 모른 채 목청을 높이며 지게작대기를 휘둘렀다. 당신도, 아버지도 자랐던 울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무척이나 고왔던 내 어머니는 서슬 퍼런 시아비와 배 다른 제 자식들만 챙기는 시어미뿐만 아니라 나이 많은 동서(同壻)에게 들들 볶이곤 했다. 그 지게 작대기 뒤에는 늘 차가운 얼굴로 할머니가 서 있었다. 장에 내다팔아 현금 노릇을 하는 고추와 깨를 결혼한 신림동 딸과 부산 아들에게 야금야금 빼돌리곤 그때마다 며느리를 팔아댔다. 말하자면 내가 그 앙금을 덮어썼던 것이다. 다섯 살 때 기억을 지니고 있다 한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멍투성이 몸으로 그 심정을 어루만지진 못한다. 더 억울하고 분할 수밖에 없다. 역사를 시간에 맡겨야 한다는 뜻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고 당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마땅한 순리(順理) 속에서 갖춰질 상대성 때문이다. 순리를 정치와 권력의 수단으로 짜깁기할수록 정신문화는 나라를 물어뜯는 무시무시한 짐승만 기르다. 자식의 도리만 따를 뿐, 내 가슴은 아직도 어머니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모 자식 간에 잘잘못과 용서가 따로 없다는 시쳇말 역시 그만큼 끈끈한 사랑이 있을 때 들어설 상대성이다.

아버지는 빚쟁이들조차 우러르는 사막의 독일병정이었다. 도의적 책임을 위해 열심히 살았던 당신이 자식들에겐 떳떳함으로 억눌린 폭군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라고 마냥 감쌀 순 없다. 불효막심한 놈이라며 욕을 먹을망정 내 집구석조차 바르게 들추지 못하면서 글을 쓰고 학생들 앞에 선다면 친일파는 물론, 시대의 난파선으로 떠도는 나라꼴을 꾸짖지 못한다. 역사와 정치며 개혁은 자기로부터 떨쳐 일어날 혁명이다. 세상을 뜨기 5년 전에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전화를 걸어온 아버지는 식사를 거른 채 내가 사들고 간 막걸리를 거푸 두 병째 비우다 느닷없이 미안하다는 울부짖음으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부러질지언정 굽힐 줄 몰랐던 노인네의 몸부림은 끔찍할 만큼 애처로웠다. 그저 나도 속았어, 그 놈들이 나쁜 놈들인데그걸 다 기억할 줄 몰랐다하고 횡설수설 나뒹구는 사이, 늘 딱딱한 껍질로 겹겹이 싸매뒀던 내 심장이 흐물흐물 따습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아파트조차 남은 장기대출금을 갚아서 나눠 갖도록 동생들에게 줬듯 부모로부터 무엇이든 받을 생각이라곤 없었다. 그들이 똑똑히 알려줬듯 삶이란 어떻게 사는 가에 달려 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만주 눈벌판을 맨발로 내달렸던 이름 모를 십대 독립군들에게 너무나 죄스러운 오늘을 우리는 살아간다. 남에게 조를 순 없지만, 내가 살아가는 관점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삶이, 사람이 너무나 무서웠다. 부모에게는 애걸복걸 매달리면서도 사기꾼 자식이라고 손찌검을 해대며 길길이 날뛰는 짝꿍의 어머니에겐 무릎을 꿇은 채 빌어야 했다. 어머니가 욕을 먹는 게 너무 창피하고 싫었다. 4학년 때부터 반은 같았지만,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던 짝꿍은 희디흰 얼굴이 화상으로 왼쪽 볼부터 목까지 검붉게 눌어붙어 5학년 5반 교실에 앉아 있었다. 내가 대뜸 그 옆자리에 앉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불쌍한 피붙이 탓이었다. 교실 가득 흠칫거리는 아이들의 눈길 속에서 코흘리개에게조차 손가락질을 받는 누나가 어른거렸다. 두 차례나 먹거리를 내미는 넝마주이를 따라가 못쓸 짓을 당할 뻔했다고 그 무렵엔 어머니가 문간방에 빨랫줄로 개처럼 매어둬서 나가지도 못한 채 갇혀 지냈다.

자리가 정해지지 않고 자율에 맡긴 그 첫 주 내내 우리는 책상을 나눠 썼다. 선생님도 자리만 바꿔서 그대로 맺어줬는데, 팔죽지까지 일그러진 몸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딸에게 엄마가 돈 모아서 다시 예쁘게 고쳐준대하는 희망을 건넸던 돈을 떼었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을 법했다. 지난달 만해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던 아랫동네 미장원 주인이었다. 집에서 미술숙제를 도와줄 때 책 좋아하지, 그림 잘 그리고 착하기까지, 하며 자주 놀러오라던 아주머니가 네 엄마, 그 미친년 어딨어?”하는 몸부림으로 어깨를 잡아 흔들어댔다. 빚쟁이들은 안방을 차지한 채 밤을 셀 기세였다. 옛날이야기를 연달아 세 개나 들려줘서 형제들이 잠이 들고, 나도 언뜻 잠이 들려는데, 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이윽고 저년 잡아! , 이 사기꾼 년아!”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잇달아 아이고, 왜들 이래? 사정도 모르구하는 어머니의 입버릇이 더 크게 튀어 올랐다. 동생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는데, 어느 틈에 혼자 방 안쪽 구석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누나가 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경련을 일으키듯 부들부들 떨면서 어른들의 목소리 마디마디에 공포로 질린 얼굴은 허옇게 질려서 생기라곤 없었다. 순간 나는 저 바보도 아는구나, 하며 먼 훗날 어른으로 살아남더라도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똑같은 괴물로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누나에 비하면 나는 맞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빚쟁이들에게 당한 화풀이만이 아니라 성치 않은 자식이 많이 먹어도, 밥알을 흘려도, 무관심 속에 냄새가 나도, 건성무좀으로 쩍쩍 갈라진 발바닥에서 피가 나도, 아프다고 칭얼거려도 매타작이 벌어졌다. 자연히 집에서 고함이 터지면 화들짝 놀라서 곧 자신이 두들겨 맞을 차례임을 파블로프의 개처럼 알았던 것이다. 나나 누나나 맞을 때마다 죽어, 죽어하는 어머니에게 당연히 살려 주세요하고 빌 수밖에 없었다. 같은 처지에 나부터 아주 못난 놈이었다. 살뜰히 챙겨주진 못할망정 귀찮아하며 책에 빠져 지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보충수업을 받으러 학교로 나서는 내게 아스크림, 아스크림 사줘하고 떼를 썼던 누나는 냉동실에 넣어둔 월드콘이 꽁꽁 얼어붙도록 이틀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시골에 보냈다고 할 뿐이었다. 그날 집에 들른 미국인 모르몬교 선교사를 쫓아가 500원만하는 딸에게 1000원짜리 두 장을 쥐어줬다고 어머니가 방문 너머에서 소곤거리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집을 빠져나왔다. 동네 뒷산에 올라가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동전만 알지, 지폐를 모를 만큼 갇혀 살아온 누나에게 미안하고, 아버지조차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서 돈을 벌라는 내 신세가 서럽기만 했다. 대학교에 붙고도 뺨을 맞았을 때 기어이 짐승에게 혼을 내어줬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진 뒤론 필름이 뭉텅 끊겼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억을 놓치는 그 해리성기억장애가 고등학생 때부터 나날이 늘었다. 또 다른 자아에게 휘둘릴까 겁에 질린 신경쇠약이 위염으로 속을 뒤집기도 했다. 3학년 내내 독서실 총무로 그 건물 청소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입시공부를 했고, 겨우내 공사판에 나가면 9년째 자투리 돈을 꾸준히 부어온 통장을 깨지 않아도 등록금은 넉넉했다. 땡전 한 푼 집에 손을 빌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스무 살인 대학 2학년 때는 그 미장원집 딸이 나를 찾더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고교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 나를 안다며 따라 나온 초등학교 동창을 대학로에서 반갑게 만났는데, 5학년 가을에 이사와 함께 전학을 갔던 그녀가 1년 전쯤 동네를 찾아왔다고 했다. 다행히 흉터라곤 없이 예쁜 얼굴을 찾았더라는 궁금증만 풀었지 받아든 연락처는 곧 잊어버렸다. 만나지 않아야 그 추억이나마 깨지지 않는다. 내겐 언제나 그 어머니에게 죄책감이 앞서서 하찮은 동정심을 첫사랑으로 가슴에 새겨준 그녀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무병장수하는 집안 어른들에 비해 일흔을 채우자마자 세상을 훌쩍 떠난 아버지는 워낙 단명이었다. 2년 전에 또 자살하기 위해 약을 먹었을 만큼 박탈감을 이겨내지 못했지만, 욕을 먹을수록 오래 산다는 시쳇말대로 어머니는 아직 꼿꼿하다. 사뭇 당당할 뿐이다. 결혼할 여자를 소개시켜주겠다며 보채는 통에 내가 딱 잡아서 입막음을 했더니, 인면수심(人面獸心)인지, 저만의 자존감(自存感)인지 기억이 안 난다거나 내가 언제, 하며 눈만 흘겼다. 모든 병의 뿌리인 스트레스를 모를 만했다. 부정부패와 비리를 저지른 우리나라 지도층들이 즐겨 써먹는 대사다. 어머니가 하지 않았다면 우리 형제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로 내몰리듯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나라꼴도 가파른 피해의식과 불신불만을 낳는다.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번번이 뒷북이나 쳐대도록 과거 속에서 허우적댄다. 6년 동안 연락조차 없긴 했어도 요리솜씨와 말재주가 좋아서 어디서든 장사를 하겠지, 손자들이 보고 싶어서라도 연락을 하겠지 했던 내 생각대로 어머니는 허름하지만, 맛깔스러운 식당주인이다.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노인네에게 시시콜콜 따져봐야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 그 피해의식이 자기애로 과거에 옭아맬수록 상대성을 잃은 채 부모가 남겨준 상처만 부풀기 십상이다. 박정희의 딸로 효도를 하고 싶었다면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으로 자식의 도리까지 헐뜯을 사람은 없지만, 공인의 자릿값은 전혀 다르다. 나라를 개인과 그 세대에 가둔 채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원칙이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군림(君臨)일 따름이다. 가정폭력만큼이나 제 아비의 답습에 지나지 않다. 국가기관의 정치개입은 그 자체가 부정선거인데, “제가 그깟 댓글 몇 개 달아서 당선됐단 말입니까하는 꼬장꼬장했던 박근혜의 말본새대로 자유민주주의도, 창조경제도 입으로만 떠벌일 뿐 손과 머리는 따로 놀아난다. 인간은 누구나 짐승일 수 있다. 제 부모와 그 가신들을 챙기느라 국민을 짓밟는 짐승의 나라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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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12.20 07:00

    첫댓글 평시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탓에 보게 된 글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인성이란 대물림을 하게 마련이라는 것이 와 닿습니다.
    그 사슬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13.12.20 11:07

    좋은글 감사합니다. 예전에 본 글인데 저자거리에 다 호랑이 있다하여 가보면 없고 매일 애기들이 없어져서 호랑이 소행이라하는 소문요 호랑이그림만 붙어있고 없다지만 결국 호랑이는 있은것, 맞아하고 호랑이 있어하고 하고 다 겁을 주면 호랑이는 없고 그림만 있지요 호랑이는 없는 것이지요

  • 13.12.20 21:22

    이유가 어떠하든 국정원과 군에서 그런짓을 했다는것은 사전 계획이 있었는 것이고 ,그런일을 저지른 쪽에서는 당연히 중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본상식을 외면하면 김정은이가 상대를 법철차도 무시하고 처형 하는것도 우리가 나쁘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기본이 중요한 것이지요 . 기본이 안된것은 정치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쿠테타도 허용하고 유신헌법도 허용하면 우리는 무었으로 민주를 말 할 수있는가요. 이북이 나쁘다고 이야기 하는것은 장성택 사건과 같은것 때문인데 우리가 허물을 덮어쓰고 남의 이야기를 말 할 수 있는가요? 좋은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김일성세습독재를 추종하는 반국가 반민주주의 세력이 미친 짐승들이다

  • 작성자 13.12.20 14:45

    참 대책없이 어의없는 백성이십니다 ㅎ

  • 13.12.21 06:16

    우리 속담에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가 썩는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핵심은 한곳에 지나치게 정신을 팔다가 본론이 다 날아가도 간줄 모른다는 말의 뜻인듯 합니다. 하듯이 우리는 지금 각자가 나름대로 필요한 말 할말을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 서로 이 결과가 통하지 못하고 끝없는 갈등만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죠.

  • 13.12.21 06:23

    이렇게 국민들이 갈등하는 근본적인 문제 본론은 현제 정치 노선 [[[ 당선되면 아무리 공약을 어겨도 무조건 임기를 보장하는 제도 ]]]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정치 바탕에 깔고 여야가 정당 세력을 확보하려고 벌이는 잔꾀들이 끝없는 정쟁으로 이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위에서 박근혜가 정치를 못한다고 지적하는 것도 알고 보면 이 문제 여기서 이어져 나오는 문제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가 할말을 한다고 하는데 말을 해도 글을 전해도 통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중에 하나입니다.

  • 13.12.21 06:31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할말을 했고 쓸 글을 썼지만 결국은 근본적인 문제 본론은 현제 정치 노선 [[[ 당선되면 아무리 공약을 어겨도 무조건 임기를 보장하는 제도 ]]] 바로 이 속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것을 쓰며 발생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공동의 생활 터전은 이래서 다 부서져 내리고 있습니다.

    공동의 생활 터전 이 속에는 님들 재산이 있고 님들 일터가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정치였습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국회 입법 기관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관들이 할 일을 안하고 이럴경우 국민들이 단결해 잘못된 정치 노선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 13.12.21 06:37

    현제 정치 노선 [[[ 당선되면 아무리 공약을 어겨도 무조건 임기를 보장하는 제도 ]]] 바로 이것을 국민단결로 90% 공약을 실천한 자가 2선 출마 자격을 갖도록 고쳐야 합니다. 왜 이것을 이렇게 고칠 경우 90% 공약 실천 미달자는 다 정치 무대로 나올 자격을 여기서 박탈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만들어 질 경우 여야는 자신들 정치 생명을 생각해 국회 입법상정을 지금보다 신경쓸 수 밖에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갈등을 조화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화의 결과는 우리들 공동 생활 터전을 발달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13.12.21 06:42

    근본 적인 문제는 정치도 국민도 그대로 남겨 두고 여기서 끝없이 발생하는 문제만 잡고 서로가 내 문제는 덮고 상대방 문제만 게속 지적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생각좀 해봐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저지른 불륜은 로맨스고 상대가 저지른 불륜은 천하에 죽일놈이라고 몰아가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던지 각자가 자신들이 소중합니다. 하듯이 상대도 똑 같이 나와 같이 소중합니다. 이 사실을 이제는 인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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