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희메님의 연락을 받았다.
회원 몇 분과 경주 남산을 답사하기로 했는데 동행하자는 내용이었다.
참석자는 희메님, 또르님, 작은나무님, 김환대님, 혜문님이었는데 혜문님을 제외하곤
카페 젊은 피(?) 분들이었다.
젊은 피(?).............
그런데 이분들도 이미 40대 중반을 넘어 후반 초입인데 젊은 피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카페 회원님 대부분이 제반시설에 하자가 발생하는 연식을 가진 분들이라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부른다.
이분들 중 희메님은 5월 부처님 오신 날에 문경 봉암사에서 공양 줄에 섰다가 3m 앞에서
강제 연행당한 적이 있었고 지난 6월 1일 부산박물관 번개 때도 뵌적이 있다.
특히,
부산박물관 번개때 논의의 핵심은 남해 용문사 괘불 삼존불의 두광이 겹쳐진 부분에 대한 토론이었다.
이날 무애님의 전언에 따르면
이전 답사 때 노마드님이 먼저 이 부분을 지적했고 아란두님과 동행한 불화 전공자가
대만에서만 보이는 희소한 형식으로 설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날도 다들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독특하고 창의적인 기법 정도로 마무리하며 더 이상의 의견 진전은 없었다.
그 의견의 여파였을까!
문득,
한 작례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모호하지만,,,,,
한참을 더듬은 끝에 실마리가 잡힌다.
사진은 화순 만연사 괘불탱이다.
중앙에 석가여래불, 우측에 보현보살, 좌측에 문수보살을 배치한 석가 삼존불 형식이다.
영산회상의 장면을 축약해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만연사 괘불탱의 특징은
우측 보현보살은 연꽃을 쥐고 있고 좌측 문수보살은 여의를 들고 있는 점
본존불 가슴 상단에 만(卍)자가 새겨진 점
본존불 대의에 용 문양이 새겨진 점
두 협시불 모두 무릎에 치전에 표현된 점 (남해 용문사 괘불은 좌측 협시불만 표현)
두 협시불 천의에 여러 가지 문양과 구슬 장식이 화려한 영락을 걸치고 있는 점
본존불에 비해 협시불이 작게 묘사되어 있는 이전과는 달리 삼존불 크기가 모두 비슷하게 조성된 점
특히,
두광의 묘사를 서로 겹치게 한 점으로 보아 구도와 배치가 남해 용문사 괘불과 거의 유사하다.
만연사 괘불탱은 수화승 비현과 그의 제자 쾌윤과 도옥이 함께 참여한 작품이다.
남해 용문사 괘불탱도 비현의 미술집단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러기에 두광의 묘사를 서로 겹치게 표현한 형식은 대만에서 나타나는 형식이 아니라
18세기 중반 전남지역에서 활동하던 수화승 비연의 화풍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15일, 희메님, 또르님, 작은나무님, 김환대님, 혜문님을 경주박물관 입구에서 만났다.
오늘의 동선은 지암곡, 국사곡, 기암곡, 침식곡, 열암곡이다.
코스로 보아 남산을 여러번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일정이다.
지암곡으로 가기 전,
어제 내린 비로 마애 선각의 선이 선명하게 보일 것 같아 탑곡 마애불상군을 먼저 들리자고 제안했다.
예상대로 평소에 잘 보이지 않았던 조각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상호를 음각으로 파낸 특이한 기법의 협시불과
단축법으로 조각한 비천상이 세밀히 보인다.
단축법이란 신체는 표현하지 않고 얼굴과 어깨만 드러낸 채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역동적인 자유분방한 천의 자락을 강조한 기법을 뜻한다.
제2사지 탑곡마애불상군의 조성시기에 대해 여러가지 이견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 불상군의 조성시기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윗 삼존불 협시불의 두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이하게도
좌우 협시불의 두광이 선(線)으로 조성되어 있지 않고 돌출된 굵고 넓은 동심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형식은 경주 남산 윤을곡 마애불좌상(835년)에서 보인다.
두광과 신광이 돌출된 굵고 넓은 동심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존불 향 우측 어깨 부분에 ‘태화 9년 을묘(太和九年乙卯)’라는 글자가 새겨있어
신라 흥덕왕 10년(835)에 조각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이런 유형의 두광은 835년을 기점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제2사지 탑골마애불상군의 조성시기도 이 시기보다 조금 이른 9세기 초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2사지 탑곡 마애불상군 뒤편에 있는 탑곡 삼층석탑은 단층기단 석탑이다.
전탑과 모전탑, 백제계 석탑 그리고 암반 위의 단층 기단 석탑을 제외하고
일반형 단층기단 석탑에서는 탑구와 지대석의 변화로 아래와 같이 시대 구분을 할 수 있다.
1기 형태
각형 1단의 지대석 겸 기단 저석을 1매의 통돌로 조성하고
측면에 는 크기가 서로 다른 넓고 높은 판석으로 탑구를 배치한 후
탑구 내부에 자갈과 넓은 돌, 모래로 채운 형태
예)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879년)
이렇게 축조한 이유는
단층기단은 879년 이전 이중기단 석탑이 가지는 구조적 안정성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각형 1단의 지대석 겸 기단 저석을 1매의 통돌로 조성하고
측면을 많은 부재를 사용하여 탑구로 삼아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2기 형태
높은 각형 2단의 지대석 겸 기단 저석을 마련하고 측면에 크기가 서로 다른 넓은 판석을 먼저 배치하고
그 옆에 기다란 장대석으로 테두리로 마감한 형태로 전체적으로 2중의 탑구로 조성한 경우
예) 김천 직지사 대웅전 동서 삼층석탑, 비로전 삼층석탑, 청풍료 삼층석탑
88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특이한 2중의 탑구로 조성된 단층기단은
문경 봉암사 인근에 있는 서중리 도천사지 3기의 삼층석탑과
구미시 선산읍 강락사지 삼층석탑에서 보인다.
지금의 김천 직지사 대웅전 동서 삼층석탑과 비로전 삼층석탑이 도천사지 3기의 석탑이고
김천 직지사 청풍료 앞 삼층석탑이 구미시 선산읍 강락사지 삼층석탑이다.
현재 직지사에 유존하는 4기의 단층기단 석탑의 기단부는 모두 후대에 후보 한 것이라
기존의 원형 기단부 결구법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1917년에 직지사 청풍료 앞 삼층석탑을 촬영한 사진이 있어 그 사진을 토대로 원형대로 복원했다.
3기 형태
탑구가 윗 2기 형태처럼 측면에 배치된 2중의 탑구 중 테두리를 마감한 장대석이 사라지고
모서리 4곳에 정방형의 판석을 ㄱ자형 배치해서 그 사이에 긴 판석으로 2단으로 결구한 형태
전체적으로 테두리를 마감한 탑구가 보이지 않은 경우
예) 경주 남산 국사곡 제4사지 삼층석탑
880년대 후반 이후~~
단층기단 석탑의 기단부 중 경주 남산 국사곡 제4사지 삼층석탑과 같은 2중의 탑구는 매우 희소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11세 초반에 조성된 영암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에서 보인다.
이 탑에서
2단 각형의 지대석 겸 기단 저석이 낮게 배치되어 있으며 탑구에 괴임이 마련되어 있는 고려시대 양식이 보인다.
4기 형태
기존의 1,2,3기 형태에서 보이던 넓은 판석과 장대석으로 구성된 탑구가 완전히 사라지고
높은 2단 각형 지대석 겸 기단 저석만 남아있는 형태
예) 경주 남산 천룡사 삼층석탑, 경주 남산 마석산 삼층석탑, 경주 황오동 삼층석탑,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
890년 ~ 900년
5기 형태
2단 각형인 지대석 겸 기단 저석이 사라지고 지대석이 각형 1단이 나타나거나 각형 1단 측면에 탑구가 배치된 경우
예)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
900년 ~ 920년
6기 형태
각형 2단 지대석 겸 기단 저석의 배치가 낮게 조성되며 이때 하단 지대석은 높고
상단 기단 저석은 하단보다 매우 낮게 조성되는 경우와 지대석 위에 낮은 괴임이 조성된 형태
예) 경주 남산 지암곡 제2사지 삼층석탑, 밀양 숭진리 삼층석탑, 영동 반야사 삼층석탑
950년 이후~~
그런데
백제계 석탑의 양식이 가미되어 있는 석탑(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등등)들은
기단 저석 아래에 지대석이 배치되어 별도로 분류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단층기단 탑구와 지대석을 1기~6기로 나눈 것은
단층기단의 전체적인 큰 흐름과 계보를 이해하기 위해서 분류한 것이지
모든 단층기단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란 점을 인지하길 바란다.
석탑의 양식이 마치 수학공식처럼 꼭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탑곡 삼층석탑은
2단 각형 지대석 겸 기단 저석이 결구되어 있는데 상단 기단저석이 하단 지대석 보다 매우 낮다.
이런 유형은 단층기단 석탑 기단부 형태 중 제 6기에 해당하는 석탑이다.
이 석탑은
2단 각형 지대석 겸 기단 저석
기단 갑석 상부 2단 각형으로 치석 된 별석괴임
옥개석 내림마루에 두툼한 우동선
옥개석 낙수면의 급한 경사
전층 굵은 3단 층급받침이 특징이다.
특히 경주지역 3단 층급받침의 흐름은
미탄사지 삼층석탑과 석굴암 삼층석탑 그리고 이곳 탑곡 삼층석탑에서 보인다.
그런데 탑곡 삼층석탑은 다른 탑과는 다르게 3단의 층급받침 매우 굵게 조성되어 있어
이 탑이 최초일 가능성이 있다.
옥개석 낙수면의 급한 경사, 굵은 3단의 층급받침 등으로 보아 10세기 중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옥룡사의 터줏대감 옥룡사 석탑은 작지만 특징이 있는 석탑이다.
현재 2층 옥개석과 3층 탑신석은 일석이고 2층 옥개석 내림마루에 굵은 우동선이 보이고
3층 옥개석 상부를 돋우어 1단 괴임을 두었고 찰주 공이 뚫려있다.
최소 2기 이상이 혼합된 석탑이다.
"
탑곡 제2사지 마애불상군을 지나 탑곡 제1마애불상군으로 가기 위해서는
예전에는 멀리 산허리를 돌아 대나무 숲을 지나서 진입했는데
지금은 개인 절집이 생겨 이 절 뒤편으로 가면 바로 진입할 수 있다.
비 온 뒤라 그런지 마애 탑의 선들이 제법 선명하게 보인다.
이곳에서 주목해야 할 향우측 부조상이다.
이 부조상에 대해서는
불상이 안치된 전각으로 보는 견해와 사리장엄구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각으로 보는 견해는 아래와 같다.
기단은 사각문으로 2단으로 구성하고 있다.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 장식기와인 치미가 표현되어 있고
지붕 정면에는 3곳에 원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안에 둥근 돌기가 배치되어 있다.
특히 처마 좌우에는 휘장이 좌우로 쳐져 있고
처마 끝에는 수식의 영락 장식이 보인다.
전각 안 여래좌상은 소발이며 수인은 항마촉지인과 유사하며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그러기에 전각은 단층이며 전각 안에 좌정하고 있는 여래좌상으로 보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견해는
이 부조상을 칠곡 송림사 사리장엄구에 비교하여 사리구로 추정하는 의견이 있다
송림사 사리구의 형태는
기단부는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대석 하단석은 면석이며 하대석 상단석은 복련이 표현되어 있다
기단 위에는 난간을 둘렀는데 하단은 투각 문양을 상단은 동자주를 세웠다.
난간 중앙에는 앙련으로 녹색 유리잔을 받치고 있다.
네 귀퉁이에는 4주의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위에 보개가 2단으로 덮여있는 형태이다.
보개의 형태는 테두리에 투각 문양이 보이며 밖으로 긴 연판문이 장식되어 있다.
처마 끝에는 장식 조각이 매달려있고
보개 4곳의 모서리에는 기단까지 긴 영락이 달려있는 수식이 늘어져 있다.
높이 14.2cm 이다.
전체적인 외형은 전각 위에 보개가 올려져 있는 형태이다.
그런데 제1사지 탑곡 마애불상군 윗 부조상을
불상이 안치된 전각과 사리구로 보는 견해는 매우 위험한 의견이다.
전각으로 보는 견해는 현존하는 전각 중 저렇게 화려한 전각은 없으며
더구나 저렇게 큰 대형의 여래좌상을 전각에 꽉 차게 조성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외형이 사리구와 비슷하고 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어 사리구 보는 견해는
감은사 동, 서삼층 석탑(682년) 출토
사리구 보개 중앙 화불과 처마 끝에 화불이 조각되어 있는 사례를 들어 추정하는 의견이다.
그러나 감은사 사리구에는
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장식 조각에 새겨져 있는 의장이라 그 의미가 다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여래좌상 의장 장식은 더 이상 사리구에서 보이지 않고
금강산에서 출토된 이성계 발원 사리구(1391년)에서 사리구 표면에 여래입상이 새겨져 있어
약 700년의 공백이 있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조를 불감으로 추정한다.
불감 안에 여래좌상을 봉안하는 부조상으로 보는 것이다.
불감이란 감실에 불상을 봉안하는 구조물을 의미한다.
광의적 의미는 자연적 석굴과 인공적 석굴을 뜻한다.
협의적 의미는 목재, 석재, 금속으로 내부에 공간을 만들어 불상을 안치하는 곳이다.
불감의 종류는
석굴형 불감
전각형 불감
원통형 불감
상자형 불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중국에서의 불감의 작례는
남향당산석굴 제1화엄동 부조 불감 (북제 550-577 ~ 수나라 600경)에서 먼저 보인다.
한국에서는
안압지 출토 "불감제일" 현판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에서도 7세기 후반경에
불감이 유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조상으로는
이곳
탑곡 제1사지 마애불상군(9세기 초반)에서 보인다.
이 이후의 계보는
영주 비로사 석조광배(9세기 중반) 뒷면 불감 부조상 2구로 이어지며
창녕 사리 석조광배(9세기 중후반) 뒷면에 나타나고
괴산 각연사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광배(9세기 후반) 뒷면 불감 부조상으로 이어진다.
고려시대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금동삼존불감(간송미술관 소장)과 고려 중기를 거쳐 고려 후기에 적지 않은 사례가 있다.
특히
탑곡 제1사지 마애불상군 부조상과
금동삼존불감(간송미술관 소장)은 외형은 전각형이고 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어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윗 사례 광배 뒷면의 부조상이 외형상 사리구를 닮아서 사리구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사리구로 볼 수 없는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리구란 은밀히 봉안하기에 해체해서 발굴해야만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외부에서는 절대 볼 수 없다는 점과
또 하나는 사리구는 그 크기가 매우 작은 소형이라는 점이다.
위에서 예를 든
영주 비로사 석조광배 뒷면 부조상 2구
창녕 사리 석조 광배 뒷면 부조상
괴산 각연사 석조광배 뒷면 부조상
윗 4구의 부조상은 모두 9세기에 조성된 의장이다.
그런데
9세기 법당의 구조는 불상을 안치한 불단을 전각 정중앙에 배치하고
참배 예절은 불단의 주위를 돌아가면서 예배를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기에 참배객들은 불단을 돌면서 배례를 하기 때문에 뒷면의 부조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리구란 해체해서 발굴하지 않고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불구이기 때문에
사리구를 외부에서 볼 수 있도록 조각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창녕 사리 석조광배 뒷면 의장이 경주 황룡사 구층 목탑 출토 사리구와 비슷해서
사리구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위의 견해는 두 작례가 외형상 형태가 비슷해서 사리구로 보는 의견이라 일견 일리는 있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사리구의 크기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사리구의 크기는 대부분 10cm ~ 30cm 정도의 소형이다.
작으면 10cm~ 20cm
크면 20cm ~ 30cm에 불과하다.
앞에서 사례를 든 감은사 사리구는 18,8cm, 송림사 사리구 14.2cm 이다.
윗 황룡사 구층 목탑 출토 사리구는 10cm 미만인 8.5cm에 불과한 초소형이다.
그런데
영주 비로사 석조광배 뒷면 부조상 2구
창녕 사리 석조 광배 뒷면 부조상
괴산 각연사 석조광배 뒷면 부조상
윗 4구의 부조상의 크기는 모두 1m 정도로 큰 대형이다.
현존하는 그 어떤 사리구도 1m 크기의 사리구는 없다.
다만
백제 창왕명 석조 사리감(567년)은 높이 74cm로 대형에 속한다.
이 사리감은 능산리 절터 중앙에 자리한 목탑에서 나왔다.
목탑에서 출토된 사리를 보관한 사리감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부가 아치형이고 감실이 있고 외부에 장식이 전혀 없는 점으로 보아
윗 4구의 광배 뒤편 의장과는 외형상 차이가 확연하다.
또한 이 이후에는 대형 사리구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광배 뒤에 조각된 부조상 4구는 모두 불감으로 보아야만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제1사지 탑곡 마애불상군의 부조상은 전각 안에 불상을 안치한 전각형 불감이며
9세기 초반에 조성된 현존하는 한국 불감의 최초의 사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이제 본격적인 남산 산행을 하기 위해 지암곡 입구로 이동했다.
오전 코스는 지암곡으로 올라가서 국사골로 내려오는 루트를 선택했다.
남산 지암곡 제 2사지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남산 정상 근처에 있는 팔각정에서 지암곡으로 내려오는 답사길에서는 자칫 놓치기 쉬운 석탑이다.
지암곡으로 올라가는 길을 선택해야만 접근이 용이하다.
이 탑을 위에서 예시한 탑곡 삼층석탑에서 단층 기단의 탑구와 지대석의 변화를 대입해 보길 바란다.
어느 정도 이 탑의 특징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탑은 2단 각형의 지대석 겸 기단 저석이 하단 지대석 보다 상단 기단저석이 아주 낮게 조성되어 있다.
그러기에 단층 기단 기단부 6기에 속하는 석탑이다.
이 탑의 특징은
기단 면석이 5매로 조성된 점
기단 갑석 4매로 구성된 점
2단 각형 별석괴임
전층 4단의 층급받침
옥개석 정상 2단 탑신괴임 등으로 보아 10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지암곡 제2사지 삼층석탑을 뒤로하고 약 100m 올라가면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자연 암반 위에 조성된 석탑이다.
암반 위에 조성된 석탑은 인공석괴형 기단과 자연암반형 기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인공석괴형 기단의 작례는 아래와 같다.
경주 남산동 삼층석탑 동탑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경주 남산 용장계 지곡 모전 삼층석탑
경주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 인근 석탑재
부산 기장 석탑사 석탑재 (선여사지 석탑재)로 이어진다.
자연암반형 기단은
모전석탑에서는
영양 삼지리 모전석탑과 안동 대사동 모전석탑에서 먼저 보인다.
일반형 석탑에서는
경주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9세기 후반)을 필두로 문경 봉서리 삼층석탑을 거쳐 약 50 여기의 사례가 있다.
그런데
자연암반 위에 건립된 일반형 석탑은
기단부가 표현된 석탑과 기단부가 없이 괴임 만으로 구성된 석탑으로 분류할 수 있다
기단부가 표현된 석탑은 경주 용장사지 삼층석탑에서 최초로 보인다.
이후 문경 봉서리 삼층석탑, 대구 대견사지 삼층석탑 등이 있다
기단부 없이 괴임만으로 조성된 석탑은
이곳 지암곡 제3사지 석탑에서 최초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다.
자연암반 위에 기단부 없이 괴임만으로 조성된 석탑은 아래 3가지로 분류된다
1.괴임이 별석으로 1단 혹은 2단으로 배치 (별석괴임)
예) 경주 남산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 경주 남산 비파골 제2사지 삼층석탑(잠늠곡 삼층석탑)등등
2.자연암반과 붙어서 나타나는 괴임
예) 산청 법계사 삼층석탑, 인제 봉정암 오층석탑 등등
3.초층탑신석 하부에 붙어서 나타나는 괴임
예) 영동 영국사 망탑봉 삼층석탑 등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은 1의 작례에 속하며 이런 유형이 대부분이다.
조성시기도 1,2,3의 분류 순서대로 시대가 내려온다는 사실도 기억하기 바란다.
"
국사곡으로 향하는 길목에 근대불 2구를 만날 수 있다.
두건을 쓰고 석장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다.
두건은 이중으로 겹쳐서 쓰고 있으며 머리에는 중간계주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오른쪽 손가락이 6개다.
이 마애불은 광배와 불두에 표현된 문양이 물결무늬처럼 독특하다.
대의의 옷주름은 촘촘하게 밀집되어 있으며 양 발목사이에 만자가 표현되어 있다.
"
지암곡을 지나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국사곡으로 빠지는 길은 만난다.
이 길은 따라 국사곡으로 하산하다가 다시 산등성으로 400m 정도 올라가면
국사곡 제 4사지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국사곡 제 4사지 삼층석탑이다.
다시 위의 단층기단 탑구와 지대석을 대입해 보길 바란다.
이 탑은
탑구의 형태가
2단으로 구성된 지대석 겸 기단 저석이 유존하고 4 모서리 측면에 ㄱ자형 정방형의 판석이 끼워져 배치되고
그 사이에 크기가 서로 다른 장방형의 판석이 2단 결구한 형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단층기단 석탑 기단부 3기의 형태이다.
특히
이 탑은 기단 면석의 탱주가 각 면마다 1매씩 별석으로 4매가 조성되어 있는 매우 희소한 특징이 있다.
이런 유형은 구미 죽장동 오층석탑,의성 탑리오층석탑,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등 모전석탑 기단부의 특징이다.
모전석탑은 전탑형 모전석탑과 석탑형 모전석탑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탑형 모전석탑은 외형이 전탑과 같으나 벽돌 대신 화강암을 벽돌처럼 잘라 축조한 점이 다르며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영양 봉감모전석탑 등에서 볼 수 있다.
석탑형 모전석탑은 옥개석 낙수면에 층단을 둔 형태로
구미 죽장동 오층석탑과 의성 탑리 오층석탑 등에서 볼 수 있다.
국사곡 제 4사지 삼층석탑 별석 탱주 형태는 측면에 홈을 파서 기단 면석을 그 홈에 끼우는 결구방식이라 더 이채롭다.
이러한 별석 탱주는 일반형 석탑에서는 그 사례가 매우 국한되어 있으며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에서 볼 수 있는데 상층기단 면석 4면 중 1면에만 나타나는 희귀한 특징이다.
국사곡 제4사지 삼층석탑은 경주지역 단층 기단 석탑 중 가장 이른시기에 조성된 석탑으로 의의가 있으며
경주지역 단층기단 석탑을 연구하는데 토대가 되는 석탑이다.
"
이 탑을 끝으로 오전 남산 답사 종료하고 주차해둔 남산동 쌍탑으로 향했다.
남산동 쌍탑 주차장에서 옛님의 상남자 마애님을 만났다.
올해 들어 코로나 해제 이후 문경 봉암사와 부산박물관에서 뵙고 이번이 벌써 3번째다.
마애님은 옛님 카페 입담 6인방 중 1인이다.
옛님 입담 6인방 중 대표 3인방은 확실하다.
그 작례(?)는 선과님, 한악어님, 추경님이다.
이분들은 입담의 내공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될 수 있으면 언쟁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나머지 두 분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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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남산동 쌍탑 근처 청기와 오리식당에서 먹었다.
가격 대비 오리고기 퀄리티가 생각보다 괜찮았다.
맛깔스러웠고 특히 마무리 볶음밥이 별미였다.
점심식사 후 남산동 쌍탑에 들렀다.
남산동 쌍탑은 여러 번 소개한 적이 있어 세부적인 특징보다는 큰 특징만 언급하겠다.
쌍탑은 대부분 같은 유형의 탑을 2기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불국사 쌍탑은 일반 석탑인 석가탑과 이형석탑인 다보탑을 배치해
양식이 서로 다른 탑을 건립한 최초의 석탑이다.
남산동 쌍탑도 일반석탑과 모전석탑을 배치해 양식이 서로 다른 유형의 사례 두 번째에 속한다.
남산동 동탑이다.
앞에서 언급한 기단부가 인공석괴형이고 옥개석 낙수면에 층단이 있는 석탑형 모전석탑이다.
기단부 인공석괴형 석탑 중 조성시기가 가장 빠른 사례이다.
이 탑은 탑신괴임이 3단 각형이며 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3단 별석괴임은 대부분 모전석탑에서 먼저 나타난다.
일반형 석탑에서는 보은 원정리 삼층석탑에서 볼 수 있다.
풍탁공이 상하로 뚫려있는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석탑형 모전석탑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옥개석 층급받침 개수보다 낙수면 층단의 갯수가 더 많다는데 있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5,5,4
옥개석 낙수면 받침은 7,6,4
3층만 같을 뿐 1층과 2층은 낙수면 층단이 더 많다.
남산동 서탑이다.
이 탑은 하층 기단 결구방식이 8세기 탑에서 보이던 8매가 간략화되어 4매로 정착한다.
이러한 하층기단 4매의 배치는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이 최초이다.
이 탑의 특징은
1.기단부 탱주 수가 상층기단 1주, 하층 기단 2주로 구성되어 있다.
8세기 전유물 같았던
상층기단 탱주 2주가 이곳 남산동 서탑에서 1주로 축소되어 이 탑이 8세기 탑이 아닌 것을 증명해준다.
하층기단 탱주는 2주로 모각되어 있어 기단부 탱주 1 : 2 형태인데 이 탑이 거의 최초에 가깝다.
2.이 탑은 9세기 탑 중 하층 기단 부재 수가 4매로 배치되는 최초의 탑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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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주지역 석탑 중 절수구가 있는 2번째 탑이다.
최초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에서 보인다.
경주지역 절수구가 유존하는 석탑은 아래와 같다.
창림사지 삼층석탑
남산동 서탑
숭복사지 쌍탑
감산사지 삼층석탑
기림사 삼층석탑 등으로 이어진다.
3.상층기단 면석에 팔부신중이 조식된 석탑이다.
경주지역 팔부신중 조식 석탑의 최초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이며
이 탑이 2번째에 해당한다.
이 탑의 팔부신중 사진은 아래 글에 자세히 나와있으니 참고 바란다.
https://cafe.daum.net/moonhawje/DjWn/20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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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전 주차장 휴게소에서 이번에는 아란두님을 만났다.
작년 11월 쥔장 아들 결혼식 때 시나브로님과 함께 대구 동화사 답사 후 처음이다.
아란두님은 옛님 카페 역마살 3인방 중 한 분이다.
또한 특유의 친화력과 미모를 무기로
답사계 여러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어 각 분야별 많은 인맥과 팬을 확보하고 있다.
그럼 역마살 3인방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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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암곡으로 가기 위해 포석정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포석정 주차장 화장실로 가는 우측에 석탑재가 보인다.
포석계 포석곡 제1사지 석탑재다.
예전에는 배동 개인집 정원에 있던 석탑재였는데 이쪽으로 옮겨놓았다.
옥개석 내림마루에 우동선이 확연하다.
경주지역에 백제계 석탑의 특징 중의 하나인 옥개석 내림마루 우동선의 사례는 아래와 같다.
칠불암 경내 우측 옥개석
포석곡 제1사지 옥개석
안강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제2황룡사지 황룡골 석탑재
남산 늠비봉 오층석탑
탑곡 마애불상군 윗쪽 삼층석탑
진현동사지 옥개석
옥룡사 석탑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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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곡 삼층석탑은 남산 답사 때 답사인들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 석탑이다.
석탑의 위치가 기존 답사지와 따로 떨어져 있어 이동거리에 제약을 받으며
찾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아 길눈이 가 없이는 찾아가기 힘든 답사지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기암곡 삼층석탑을 찾아가는 길이다.
참고하길 바란다.
https://cafe.daum.net/moonhawje/DjWn/20962
인적이 드물고 우거진 지역이라 꼭 길눈이 와 동행하길 바라며
여름철은 피하고 겨울철을 권하고 싶다.
특히 비 온 다음날은 몸을 말리려 나온 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가야 한다.
이번에도 올라가는 도중에 뱀을 만났다.
하산길에도 또 한 번 마주쳤다.
(사진 / 아란두님)
산행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은 등산 스틱을 일행에게 빌려 뱀을 퇴치한 후 하산 때 까지 계속 들고 내려왔다.
기암곡 제2사지 동탑이다.
이 탑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하층 기단 탱주 수 1주, 상층기단 탱주 수 1주로 구성되어 있다.
2.상층기단과 하층 기단 결구법이 혼합식으로 결구되어 있다.
3. 하층 기단 갑석 상면에 낮은 호각 2단 괴임이 마련되어 있다.
4.전층 4단의 층급받침
5.문비에 자물쇠와 고리가 동시에 새겨져 있다.
6.상층기단 갑석 하부 부연의 높이가 10 : 7로 높은 편이다.
7.상층기단 갑석 부재수가 6매로 조성되어 있다.
8.상층기단 갑석 상면에 2단 각형 탑신괴임이 낮게 조식되어 있다.
9.옥개석 정상 탑신괴임이 2단이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2번과 5번이다.
2번 특징인 상층기단, 하층기단 모두 혼합식의 결구법은
경주 효현동 삼층석탑에서 먼저 나타난다.
그 뒤를 이곳 기암곡 삼층석탑이 잇는다.
5번 특징인
문비에 자물쇠와 고리가 동시에 새겨져 있는 탑은 이곳 기암곡 석탑이 경주지역에서 최초로 보인다.
문비에 자물쇠 + 고리 형태의 계보는 아래와 같다.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동,서,중앙 삼층석탑 3기
영천 신월동 삼층석탑
순천 금둔사지 삼층석탑
경주 기암곡 제2사지 삼층석탑
영동 영국사 삼층석탑
북한 정양사 삼층석탑
진주 관음사 삼층석탑
안동 봉림사지 삼층석탑
포항 보경사 오층석탑
상주 무곡리 삼층석탑 등으로 이어진다.
또한 3번, 8번의 특징인 낮은 괴임은 시대 하강을 암시한다.
기암곡 제2사지 삼층석탑은 880년~890년 사이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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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곡을 빠져나와 침식곡 가기 위해 남남산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침식곡으로 향하는 길목 입구에 차단기가 내려져 있다
5시가 넘어서 그런지 차량을 통제하는 모양이다.
열암곡으로 동선을 바꿨다.
열암곡까지는 적지 않은 체력이 소비된다.
먼저 올라와 열암곡 석불좌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허걱~~~
혜문님이 두 번째로 올라오셨다.
젊은 피들도 오전, 오후 남산은 오르내리라 힘에 부쳐서 뒤로 쳐져 있는데,,,,
우리 카페 회원들 노년 답사의 롤 모델은 휴람님과 사처포님이다.
두 분 모두 고희 중반을 넘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답사와 산행할 때는 날아다닌다.
혜문님은 휴람님의 2살 어린 친동생이신데 산행하는 모습이 마치 전문 산악인 같다.
이분도 거의 축지법을 쓰신다.
강철 체력 DNA 가진 집안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노년의 롤 모델에 혜문님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열암곡 석불좌상이다.
이 좌상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주형 거신 광배에 두광과 신광이 표현되지 않았다.
광배에 두광, 신광은 표현하지 않았고 불두 뒷면에 연판문만 배치해 놓았다
경주지역 광배 중 두광과 신광이 표현되지 않은 작례는 안강 근계리 석불입상에서 보인다.
2.화불이 광배 정상에 3구, 광배 좌우에 6구, 합계 9구가 새겨져 있으며 모두 구름 위에 좌정하고 있다.
(사진 / 남산아지매님 제공)
경주 지역에서 광배 정상에 3구 화불 표현된 사례는 영지 석불좌상과 분황사 출토 석조광배에서 보인다.
그런데 광배 정상 3구 화불은 대부분 비로자나불 좌상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화불들은 희소하게 모두 구름위에 좌정하고 있는데 이런 사례는 드문 편이다
구름 위에 좌정하고 있는 화불의 작례는
경주 장항리사지 석불입상
경주 입곡 석불두
경주 열암곡 석불좌상
경주 분황사 출토 석조광배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좌상 등에서 보인다.
3.매우 큰 손이 표현되어 있다.
큰 손의 계보는 아래와 같다.
경주 나원리 오층 석탑 출토 금동불입상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 소장 금동여래입상 6구 중 큰 손 표현 1구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경주 남산 칠불암 본존불
함안 방어산 마애삼존불 중 본존불
경주 남산 열암곡 석불좌상
남원 신계리 마애불좌상
영암 월출산 구정봉 마애불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안동 이천동 마애불
이천 선읍리 석불입상
홍성 고산사 석불입상
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안성 매산리 석불입상
논산 관촉사 석불입상
포천 구읍리 석불입상
팔공산 동봉 마애불
진천 사곡리 마애여래입상 등으로 이어진다.
4.양 발목 사이에 부채꼴 옷주름이 표현되지 않은 점
칠불암 본존불, 석굴암 본존불, 남산 삼릉곡 제6사지 석조여래좌상에서 보이던 부채살 옷주름이 보이지 않아
시대 하강을 암시한다.
5.대좌는 상,중,하 3단 구성인 삼단 대좌인데 하대석 상부에는 3단의 중대석 괴임이 마련된 점
개인적으로는 중대석 괴임의 흐름을 아래와 같이 파악하고 있다.
3단 대좌가 등장하는 석불좌상 중 명문이 있는 이른 시기의 석불은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722~731)이다.
이때는 2단 하대석이 일석이며 하대석 하단석은 지대석을 겸하고 있으며 하대석 상단석인 복련석 위에
중대석 괴임이 1단으로 마련되어 있다.
766년에 조성된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에서는 중대석 괴임이 2단으로 표현되고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8세기 중반)에서는 3단으로 배치되고
경주 안계리 석조여래좌상(8세기 후반)에서는 4단(각각각각)으로 표현되었고
경주 영지 석불좌상(8세기 후반)에서 4단(각각호각)으로 배치되며
경주 삼릉곡 제6사지 석조여래좌상(8세기 후반)은 2단이며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 약사여래좌상(9세기 초반)에서는 3단으로 구성되고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여래좌상(863년)에서 비로소 별석으로 조성된 중대석 별석괴임이 나타난다
그래서 석불좌상에 있어서 중대석 별석괴임은 9세기 중반에 등장하는 것이다.
중대석 별석괴임은 이 이후에는
영주 부석사 자인당 석조석가여래좌상
임실 용암리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괴산 각연사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등등
9세기 중반에서 후반 여러 곳에서 나타나며 고려시대에도 그 계보는 계속 이어진다.
6.대의의 옷주름이 특이하다
대의는 좌측 어깨 뒤쪽을 지나 우측 겨드랑이 아래를 거쳐 배 앞으로 나와 좌측 어깨를 넘어가는 편단우견에
오른쪽 어깨를 덮는 또 하나의 옷이 아래로 내려와 대의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모습이다.
이중 착의법이다.
경주지역에서는 이중 착의 법의 작례는 아래와 같다.
남산 삼릉곡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불두가 없는 좌상)
남산 용장사지 석조여래좌상 (삼륜대좌불 위에 있는 좌상)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석불 2구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에서 보인다.
그런데 하체의 옥주름에 변화가 있다.
간략하게 표현하였는데 특히 왼쪽 다리 옷주름보다 오른쪽 다리 옷주름을 넓게 새겨 마치 펄럭이게 조각하였다.
이렇게 하체 옷주름의 변화가 시작되는 시기는 9세기 중후반이며
그 사례는
영주 부석사 자인당 중앙 석가석조여래좌상
예천 청룡사 석조여래좌상
구미 대원사 석불좌상
예천 청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이어진다.
이런 하체의 옷주름은 고려 초기에는
원주 일산동 석불좌상 우측 불상의 하체 옷주름처럼 두 겹으로 겹쳐져 비사실적인 착의법으로 변화해 간다.
7.대의의 옷깃이 왼쪽 어깨 중간에서 한번 접어져 파상을 이루고 있는 점
이 좌상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런 양식은 중국에서는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최초의 작례는
운강석굴 제20굴 노천대불(460년)~465년)에서 먼저 보인다.
항주 비래봉 석굴 존상으로 이어진다.
한국에서는
금동 약사여래입상 (7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보물 제328호)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8세기 중반)
경주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 (9세기 초반)
경주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 좌상 (9세기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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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열암곡 석불좌상 (9세기 중후반)
고려시대에는
이천 영원사 석조약사여래좌상 (11세기 초반)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상 (11세기 중반)
서울 사현사 석불좌상 (조선초기)
포항 대성사 소장 금동여래좌상 (조선초기)
익산 심곡사 칠층 석탑 출토 금동불감 삼존불 중 본존불(조선초기)로 이어진다.
"
열암곡 마애여래입상은 그동안 변화가 있었다.
축대를 쌓았고 보호각도 만들어 놓았다.
보호각은 함안 대산리 삼존불 보호각과 더불어 모범 사례로 꼽아야 할 것 같다.
코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코와 벽 사이에 보호대를 끼워놓았다.
열암곡 마애여래입상은 8세기 형식과 9세기의 형식이 혼합된 마애불로 보인다.
8세기 형식은
석굴암 본존불과 유사한 양감 있고 강건한 측면 상호
4등신의 신체
옷주름은 단순하게 표현되었고
U자형 옷주름의 간격은 넓은 편이며 아래로 내려올수록 간격이 더 벌어지는 점을 들 수 있다.
9세기 형식은
삼도가 2도로 표현된 점
군의 자락이 좌우로 부채살처럼 각지게 펼쳐지지 않은 점
앙련 단독으로 대좌를 마련한 점을 들 수 있다.
사견으로는
입상에서는 흔치 않은 편단우견 착의법
2도로 표현된 삼도
소략한 옷주름과 U자형 옷주름이 아래로 내려올수록 간격이 더 벌어지는 특징으로 보아
남산 선각육존불 중 서면 본존불 입상과 유사해서 9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열암곡을 끝으로 남산 답사를 마쳤다.
분황사 인근 기와 메밀막국수 집에서 뒤풀이 겸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비슷한 감정의 동선을 공유하는 동행은 늘 즐거운 일이다.
생각 외연의 확장과 관심사의 책장을 같이 넘겨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은 많은 공유공간을 만들어 준다.
더불어 함께한 답사지에서의 추억은
세월이 흐르면 각자의 기억을 대부분 차지하는 기억의 저장소가 될 것이다.
오늘 같이한 젊은 답사인들에게 많이 묻고 많이 배웠다.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를
저 시절에 저렇듯 물결치는 부분이 있었던가,,, 처럼
사실, 이분들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편이다.
이들의 습득력이 생각보다 빠르다.
마치 스펀지와 같다.
예단하지만,,,
김환대님, 아란두님, 또르님, 작은나무님, 희메님
이 젊은 답사인들로 인해 옛님 카페는 답사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길 것이다.
"
오늘,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오래된 답사지에서
내가 알던 추억들이 하나씩
빛나다가
나무 사이로 부딪혀
부서진다.
반짝이면서.....
첫댓글 그저 존경할 수 밖에 없는..저 많은 작례를 기억하고 계시는 달넘새님은 늘 그렇듯 저 높은 곳에 계시는 듯 합니다..최소 10번은 읽어야 10% 이해할 듯 합니다.
예전에는 경상남도 답사 주관을 제가 했는데 노마드님 덕분에 쉬게 되는군요
사전답사까지 하신걸로 보아 답사주관이 확실합니다. 앞으로 계속 부탁드려요^^
올려주시는 전투 답사기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곧 뵙도록하지요^^
ㅎㅎㅎ 용문사 괘불 내용을 읽다가 .. 먼저 댓글을 달아봅니다.
부산박물관에서 처음 본 용문사 괘불의 좌협시 두광이 여느 불화와 달라 보여 무애님께 여쭤봤어요. 무애님도 이런 모습 처음이라고... 위계상으로 봐서.. 그림을 혹시라도 잘못 그린게 아닐까 ... 뭔가 좀 이상하다... 말씀하셨고, 노마드님은 화가의 실수가 아닌 .. 의도적인 표현인것 같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궁금한 나머지.. 동행했던 불화 전공 선생님께 여쭤보니.. 그런 작례들이 더러 있다고 ..말씀하셔서 그 의견을 우리 회원님들께 전해 드렸습니다. ^^
동행하신 분 중에 대만 출신 불화 전공 선생님도 계셨는데 그분은 아무런 말씀 안 하셨고... ^^ <대만에서 보이는 희소한 형식> 이란 내용은 얘길 나눈적이 없었는데.. 제가 전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나봅니다. ^^
오해의 소지가 있는듯 하여.... 조심스레 댓글 달아봅니다..ㅎㅎㅎ
그럼... 저는 이제... 나머지 글 읽으러 다시 올라가겠나이다. ㅋㅋㅋㅋㅋ
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역시 정확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십니다..ㅎㅎ
어~~그렇군요
전달과 재 전달 과정에서 착오와 오류가 있었던것 같군요
제가 잘못 들을 수도 있고 말이죠
여튼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대만에 관한 얘기는 본문에서 수정해야 할것 같은데 제 개인 카페에서 스크랩 해온 게시물이라 수정이 안되네요~~
글을 읽는 회원님들은 참고 바랍니다.
아란두님께서 즉시 언급해주셔서 혹시라도 있을 오해의 소지를 사전 차단한것 같습니다.
감사드려요^^
@달넘새 달넘새님~~!! 항상 감사합니다..오늘은 1시간동안 읽었어요. 이제 출력해서 형광펜 줄 그을거예요!! ㅎㅎㅎㅎ
특히나..."특유의 친화력과 미모~~~" ㅋㅋㅋ 여긴 핑크로~~ ㅋㅋㅋ
앜ㅋㅋㅋ 오늘 종일 함박웃음이...ㅋㅋㅋㅋ 감사합니다. 담에 제가 맛난 밥이라도.. ㅎㅎ
@노마드 ㅋㅋㅋ 쓸데없는것만 기억해요...ㅎㅎㅎ
장문의 글
읽는이의 입장을 고려하여
중간중간 쥔장을 까는,
즉,양념을 치는 치밀한 구성이 돋보입니다
ㅋㅋ
(나의 분석이 예리하다.예리해!)
지암곡 2사지
우주가 면석을 물고 있는 사례의 탑으로 기억 됨
지암곡에서 국사곡으로 넘어와서 6사지에서 국사곡7사지로
젊은피들을 끌고(?)가 거품나도록 해야했어야지요
(온건하게 도괴된 석탑재 보러가자고 꼬셔서...)
남산동모전석탑
이 순간 까지 모든 모전석탑에서는 낙수면 층급보다 하부층급받침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열암곡
지금까지
대의의 파상문을 자연현상으로 인지함
마지막으로
젊은피들이 전혀 눈치 못치게 격려하고 분발을 유도하는
문장 전개가 뛰어남.ㅋㅋ
눈치 챘나?
아 참!
광배 중앙 삼존화불은
비로자나불 광배 특징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혹
열암곡 석불 광배가 다른 비로자나불 광배는 아니겠지요?
아까 댓글 달고
동네 산행 중에 불현듯...
윗 댓글을 읽고 이 냥반이 정독하신줄 알고 신기해 했었는데
아래 댓글에서 들통이 났군요ᆢ흘
본문에서 영지 석불좌상과 열암곡에서 보인다고 했었는데~~~
결국은 사진만 봤다는 결론이네요ᆢㅎㅎ
오늘은 선과를 사서 ....ㅇㅈㅇㅈ
@달넘새
일독
이독 까정 했다우!
내나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ㅋ
@선과 아직 제반시설에 누수가 별로 없어 걱정 안해도 됩니데이~~~^^
이 글에 고무되어 열공하자 결심할뻔ㅋ
무념무상인 암것도 모르는 제게 가끔 문제 및 숙제라고 던지시면 심쿵함ㅋ
늘 아낌없이 노나주시는데 기억이 안나서 자괴감이 듭니다
흔쾌히 동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하는 시간외에 공부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그토록 열심이니 조만간 날개가 달릴것이요
자주 보입시더^^
저는 달넘새님의 글이 공부할 거리가 탄탄하고 방대해 그저 감탄하면서 좋은데요, 특히 마지막 부분처럼 글 곳곳에 스며 있는 감수성 짙은 표현도 어찌나 아름다운지요!
감사합니다.
옛님 글 재주꾼이 이러면 반칙이지요
글 맵시는 또르님이 갑입니다.
곧 뵙겠군요
감사합니다^^
또르님
낚였어요
ㅋ
그때 그현장감이 전달됩니다 더운날씨에 더 한 답사라 자주 등장하는 경주지역 불상 작품들은 자주 현장을가 확인하면 될것 같습니다 계보는 자주 접하면 알것 같습니다 😂
환대님이라면 벌써 계보를 꿰뚫고 있겠지요
경주 현지인이라 축복입니다
언제든지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곧 뵙겠군요^^
지붕 기왓골에 장마비 흐르듯 매끄럽게 전개한 답사문에 감탄할 뿐. 처음부터 끝까지 보유하고있는 실력을 유감없이 전달하고 일깨워주신 열정에 감사x2 합니다.
또한, 퐝에서 일부러 점심 보시 하려고 먼길 마다않고 합류해준 마애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
그런데, 휴람과는 20년 차이라고 누차 강조했건만 ...ㅎ
앗~~깜박했습니다.
그런데 20년 차이라면 저한테도 까마득한 후배가 될텐데 괜찮겠습니까? ㅎㅎ
또 다른 답사지에서 존안을 뵐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초고수님이십니다.
상세히 정리되어 있어, 직접 답사하며 들은 것처럼 생생한 느낌이 듭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려움을 기꺼이 해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약간 다르게 볼 수도 있겠다 싶은 곳이 보여서 간단히 적어 봅니다.
다름 아니라 탑곡 제1마애불상군에서 '불감'이라고 보신 부분에 대한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감'을 석굴을 포함한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말씀하신 협의적 의미인 "내부에 공간을 만들어 불상을 안치하는 곳"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이 경우 불감을 만드는 목적은 휴대하기 위한 목적이거나, 또는 법당이나 수행처, 그리고 개인 주택 등에 불상을 안치할 목적으로 제작하는 경우 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목적을 뒷받침하듯이, 현재 남아 있는 불감은 대부분 소품이지만, 국적 논란이 있는 호류지의 옥충주자처럼 비교적 큰 것도 있습니다. (계속)
그런 목적의 불감을 바위나 광배에 새긴다고 하는 것이 일단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그런 예가 없고요. 더구나 불상을 함께 새기기도 하고, 또는 불상이 없이 불감만 새기기도 한다는 것인데....
그리고, 중국의 예로 드신 화엄동 남향당산 석굴의 조각을 '불감'이라 하는 것도 일반적인 이해와는 다른 내용입니다. 아시다시피 향당산 석굴에는 아치형 또는 네모형의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조각한 사례가 매우 많은데요. 말 그대로 감실을 파서 불상을 조각한 경우이지 이것을 '불감'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로 드신 조각을 '복발형 탑'으로 이해하거나 '탑형 장식'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마애탑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이런 생각들 때문에 의문을 표시해본 것입니다.
탑곡 제1마애불상군의 건물 내 불상에 대해서, 저는 아직은 특별한 견해없이 '불전 내에 불상이 봉안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즘에는 승상으로 보는 견해도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민머리처럼 보여서 그런 것 같은데, 법당에서 수행하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본다는 것이죠. (계속)
저는 아직 판단을 못하겠습니다만, 그것이 승상이든 전각 내 불상을 묘사한 것이든, 불감이든 열어놓고 생각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성격이 전혀 다른 광배 뒷면 조각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청주박물관에 전시된 불비상 중에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에는 비천이 이와 같은 건물을 들고 있고, 또 기축명아미타불비상에는 천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비슷한 전각을 들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 역시 저는 아직 명확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인데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을 보면서 머리를 스치는 의문점을 나타내 보았을 뿐, 다른 뜻은 없으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세종아빠 내공 깊은 탁견을 지니신 세종아빠님이 주신
의견 존중합니다.
항상 수담을 나누어 볼 수 있는 분이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단 현재까지 불감으로서 가장 오래된 작례는 고려초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간송미술관소장 금동삼존불감입니다.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안압지에서'불감제일(佛龕第一)'이라 음각된 명문 칠기판도 출토된 것으로보아 7세기 후반경에 이미 불감이 유존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의 고민은 과연 한국 불감의 원형은 무엇이었을까에 있었습니다.
중국의 사례를 찾아보았습니다.
중국에서는 불감은 석굴에서 제일 많이 사용합니다.
예를들면 용문석굴 만불동을 모두 불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명칭 자체도
천룡산석굴 제2굴 정벽 불감,병령사석굴 제169굴 무량수불감,
용문석굴 마애삼불감 등으로 명칭 자체도 아예 불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조상에서 불감은 이미 5세기~6세기에 등장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불감의 시원은 중국 석굴의 부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넘새 남향당산석굴 화엄동 부조상을 '복발형탑'이나
'탑형장식'으로 보고 우리식으로 마애탑으로 이해하는 의견
대단히 심도 깊은 견해입니다.
기단부,탑신감실,둥근 아치형의 옥개석,상륜부 장식 등으로 보아
장식이 화려한 마애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복발형탑으로 보기에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복발형탑이 되려면 기단,탑신,옥개 전체가 둥근 돔 형태가 매우 크게 조각되어야하는데 이 부조상에서는 옥개석처럼 작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꼭 있어야 할 상륜부 보륜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중국 석굴에서 화엄동 부조상과 비슷한 형태의 마애탑은 없습니다.
모두 층수가 있고 상륜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제가 주목한것은 불감이란 명칭이 있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석조 아미타여래 방형불감(사진 / 서위시대 : 6세기)입니다.
상륜부를 화엄동 부조상과 비교하면
아치형과 ㅅ자형의 형태가 다를 뿐 나머지 장식은 연관이 있습니다. 상륜 부분을 저렇게 장식한 예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달넘새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소장 석조여래삼존불감(사진/ 중국 고대)의 기단부와 삼존불 배치가 화엄동 부조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중국 서안 보경사 석불군 중 25구의 석조여래삼존불감(703년~724년)의 기단부와 삼존불 배치, 상부에 천개 표현이 화엄동 부조상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북제시대(550~557)후반과 수나라(581년~618년)때 조성된 남향당산석굴 화엄동 부조상을 불감의 원형으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화엄동 부조상의 아치형 지붕에 화려한 장식과
탑곡 제1사지마애불상군 전각에 조각된 유려한 수식과 의장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렇게 화려하게 치장된 전각에서 수행하는 수행자의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외형만 본다면 비로사,사리,각연사 석조광배 뒤면 의장은 화엄동 부조상과 닮아 있습니다.
말씀하신 불비상에서 비천과 천이 들고있는 건물은 천궁을 받든다는 의미로 생각했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좀더 연구해 보겠습니다.
긴 장문의 답사기를 끝까지 읽어주시고 의문점까지 언급해주셔서 연구하는 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내용으로 수담을 나누기로 하지요
감사합니다^^
@달넘새 친절하게 의견을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불감이란 용어가 여전히 문제인데요. 광의의 개념, 즉 석굴을 포함한 감실 불상을 모두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보경사 불감을 포함해 예로 드신 경우처럼 제법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흔히 말하는 불감(협의의 불감)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여전하네요.
남향당산 석굴 부조상을 복발형 탑, 또는 탑형 장식으로 보는 견해는 제 생각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보편적인 견해이고요. 어떤 학자는 복발형 탑이 중국화해 가는 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단층탑은 당시 많이 만들어졌다고 하네요.
오랜만에 좋은 게시물을 접하면서 드는 약간의 의문점을 말씀드렸던 것이고요.
답변해 주신 내용과 그 취지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언제나 공부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감사드립니다. ^^
@세종아빠 댓글 내용 오래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견인줄 알았더니 중국 보편적인 견해였군요
그런 유형의 단층탑이 많이 만들어졌다면 그 사례가 남아 있어야 할텐데요
수많은 중국 석굴 도록에서도 남향당산 화엄동 부조상 같은 형태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불감의 원형은
안압지 출토 불감제일 명문 칠기판이 태자궁 내불당에서 발견 된 것으로 보아 불당에 안치한 형태일 가능성 많습니다.
협의적인 의미보다 광의적인 의미가 더 추진력을 얻습니다.
불교문화재를 추정할 때는 가능성이 많은 쪽으로 추정하는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남향당산석굴 화엄동 부조, 탑곡 제1사지 부조,
4구의 광배 뒤면 부조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복발형탑(마애탑),사리구, 전각, 불감을 비교해 특징이 많은쪽으로 추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형이며 여래상이 좌정하고 기단부가 있고 화려한 전각의 부조상이 어디에 가까울지는 한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불감을 협의의 의미로 생각하고 있는 내용
잘 수긍했습니다.
서로간의 견해차이로 생각하겠습니다.
늘 수담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달넘새 중국 최초 탑으로 알려진 神通寺 四門塔(544년)이 비슷하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래서, 바로 위 댓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국에서는 '복발형 탑이 중국화해 가는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감'이란 용어를 광의로 사용하게 되면 불곡감실부처, 군위 석굴암, 석굴암도 불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부에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는 협의의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용어 사용에 대해 약간의 오해가 있는 듯 해서 말씀드린 것이고요.
어차피 생각의 차이는 좁히기 어려워 보이네요.
이 정도로 그치고, 달넘새님의 고민한 끝에 제기하신 견해 잘 기억하겠습니다.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세종아빠 일단 신통사와 연결하는 것은 뜻밖입니다.
신통사 사문탑은 화엄동과 많이 달라요
신통사는 확실히 석탑에 가깝습니다.
옥개석 층단보다 낙수면 층단이 너무 많아 모전탑 분위기고
층급받침도 있고 아치형도 아니고, 보륜도 있고
이게 없는 화엄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화엄동이 의장이라면 신통사는 초기 모전탑 유형입니다.
예전부터 불감을
소형이며 휴대용 불감으로 생각하신거 같아 드린 말씀이고요~~
여튼 사리광배부터 이곳 남향당산 화엄동 까지 왔네요
이 과정 속에 같이 토론하고 같이 연구했습니다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또 다른 내용을 가지고 수담을 나누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누구는 2번 일고 누구는 줄 긋고 읽는데 지는 솔직히 인정합니다.
정말 사무실에서 대충 읽었습니다....그렇지만, 다시 읽을 겁니다...
그래도 머리속에 잘 안남습니다..ㅎㅎㅎㅎ 멋진 글에 그저 감탄만.....
공부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어디에다 명함을 내밀어야 인사라도 할 수 있을란지..우리방 식구들은 다들 대단하십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들어오기는 잘 들어오는데 나가는데 딱 3초 걸립니다.
어쩌겠습니까...연식이 그러하니
아주매님은 오래 잘 남아 있을겁니다.
워낙 해박하신분이라~~
늘 격려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소헌님^^
항상 참가하고 싶은 답사인 데, 함께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시간적 문제도 있고, 젊은 피도 아닌 관계로..
또 하나의 엄청난 포스팅은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읽어봐야 도움이 될 것 같고,
괘불에서 용어 문제를 질문하고 싶습니다
협시보살 무릅의 치전이라는 표현을 잘 몰라서 그러는 데,
발목과 손목의 치견과는 다른건가요?
만연사 괘불과 비슷한 표현이 옥천사 괘불에서도 보이는 데,
그냥 군의의 청화백자형 문양이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여쭈어 봅니다
언제 별바다님과의 동행을 기대합니다.
청화백자형 문양은 만연사나 옥천사 괘불의 협시불 무릎에 하얀색 표현을 뜻하고
치전은 그 하얀색 아래부분에 마치 화염문이 꺼꾸로 묘사된 문양을 뜻하는데 설명문이 잘못된거 같군요
치전은 보살의 전유물입니다.
형태에따라 나뭇잎 형태는 풀치전, 뾰쪽한 형태는 칼치전이라고 합니다.
만연사와 옥천사 치전은 칼치전이네요
일부 학자들은 치견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발목과 손목도 치전과 유사한 문양이 있는데
이 부분도 치전 혹은 치견으로 표현하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쪽으로 조예가 있는분 설명 부탁드립니다.
주로 조선 후기 불화에서 보이는 다리 또는 발목의 독특한 장식 표현법인데요.
두분 말씀하신 것처럼 '치전'이라고도 하고, 또는 '치견(侈絹)'이라고 하는데... 주로 불화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정착한 용어는 아닌 것 같은데, 가끔 ' 치견(侈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경우는 보았습니다.
보살은 물론 여래상에도 표현이 되고요. 때로는 조각상에도 표현된 경우가 있습니다.
@세종아빠 두 분 답글 감사합니다
8~9년전에는 저도 젊은피로 분류된듯 한데 이제는 아니군요~ㅋ
문비에 자물쇠와 고리가 동시에 새겨있는 탑
기암곡 석탑이 경주지역에서 최초로 보인다는 해설과
탑 옆에 예쁘게 피어난
자귀나무 꽃의 전설에
귀가 쫑긋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심층분석 보고서 까지
몇번이나
감동시키는
날넘새님의
지식의 샘
그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또 감동 입니다
옛님의 상남자 마애님이 젊은 피로 분류된다면
그 여파를 어찌 감당하실려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인향이 생깁니다
올해들어 3번째 뵈었는데 인향이 짙게 묻어나네요
또 뵙지요 마애님
감사합니다^^
늙은피도 잘 밁었어요.....
열암곡 부처님이 바로 앉으시는 것 보고 싶어요
무심천님 같은 앞서간 선배님들의 덕택에 많은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고 경험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