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성장은 가능하다
일단 하나님을 당신 안에 모시면 당신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 하나님은 당신 안에 전기를 일으키는 발전기이다. -피터 크리프트
1949년 8월 20일, <워싱턴포스트>지 1면에 약간 희한한 헤드라인이 실렸다.
"귀신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던 마운트 레이니어의 남자아이, 신부를 통해 자유를 얻다."
축사가 벌어진 곳은 세인트루이스였지만, 이 기사가 <워싱턴 포스트>에 대서특필된 것은 열세 살 된 그 아이가 워싱턴 D.C. 근처 소읍인 메릴랜드 주 마운트 레이니어 본토박이였기 때문이다.
‘로비’라는 남자아이는 무당인 친척 아주머니와 아주 친했었다. 아주머니가 죽은 후로 로비가 있는 방 안에서 물체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로비의 가족들은 자기들의 사제인 워싱턴 D.C. 성 스데반 복음주의 루터교회의 루터 마일즈 슐츠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슐츠는 반신반의하면서 로비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 관찰했다. 로비가 누워 있는 침대가 슐츠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슐츠는 매트리스를 바닥에 놓았다. 로비가 위에 누운 채로 매트리스가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있었다.
당황한 슐츠는 로비의 상황을 천주교회가 잘 안다며 그 가족을 성 제임스 천주교회로 보냈다. 어느 젊은 천주교 사제가 축사 의식을 맡았다가 경험 부족으로 단단히 혼쭐이 났다. 축사의식 도중에 로비가 침대 스프링을 뜯어서 사제를 어깨부터 팔목까지 후려쳐서 120 바늘도 더 꿰매야 하는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젊은 신부는 좌절감을 느끼고 포기했다.
가족들은 결국 로비를 세인트루이스로 보내 윌리엄 보던 사제 밑에 두고 그에게 축사 의식의 재량을 주었다. 진을 빼는 영적 싸움이 6주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1949년 4월 18일, 부활절 다음 월요일에 로비는 자유를 얻었다.
로비는 과거의 기억을 다 잊었지만 메릴랜드의 옛 이웃들은 사정이 달랐다. 로비의 가족이 살던 집은 곧 ‘귀신의 집’으로 알려졌고, 로비 일가가 세인트루이스로 이사 간 뒤로 그 집은 마운트 레이니어의 팔리지 않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아무도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결국 마운트 레이니어 당국은 그곳을 공원으로 만들어 아이들의 놀이터를 짓기로 했다. 그런 사건에 뒤따르는 공포와 의혹을 감안해 시 당국은 집을 완전히 허물고 땅까지 깊이 파낸 다음, 외부에서 공수한 새 흙으로 구덩이를 메웠다.
한 아이가 영적인 흑암 중에 살던 그곳에서 지금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고, 가족들이 산책하며 피크닉을 즐기고 있다. 한때 쓸모없이 버려졌던 곳이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려는 일을 생생히 보여주는 그림이다. 꼭 귀신에 씌어야만 자기중심적 삶의 감옥에서 해방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변화가 소위 ‘회심’의 순간에 즉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에게는 첫 회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바라던 자유와 변화가 오지 않았거나, 잠깐 나타났다가 슬그머니 사라졌기 때문이다.
진실로 우리는 새롭게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의 영혼을 깊이 파내고 뭔가 새것으로 채워서 옛 삶의 터전에 새 삶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구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권태롭거나 지리멸렬한 삶에 갇혀 있으며 헛된 욕망과 재물에 매여 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셔서, 영적 변화라는 기적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서 구해주시기를 우리는 원한다. 우리 성품의 거슬리는 모습들을 파내시고 새로운 생기로 바꾸셔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이 열매 맺는 새로운 성품을 창조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을 지닌 자로 지으셨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모습을 반사하는 존재다. C. S. 루이스가 현대의 고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분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구하셔서 우리 안에 '새 사람'을 지으려는 열심이 대단하시다. 고참 귀신 스크루테이프는 부하 웜우드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이 자아를 잃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시끄러운 아집을 버린다는 뜻일 뿐이다. 일단 그들이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정말로 그들의 개성을 다 돌려준다. 그리고 그들이 전적으로 그의 것이 될 때 오히려 이전보다 더 자기다워질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잠시 멈추고 자신을 예수님의 긍휼로 행하는 사람, 인내를 지닌 사람, 분별력이 있는 사람, 온유하되 당당한 사람,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맡기는 사람으로 상상해보라. 이것이 예수께서 당신에게 주시려는 삶이다. 탐욕이 아니라 아름다움, 이기심이 아니라 후한 마음, 타협이 아니라 고결한 성품,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 당신의 동기가 되도록 변화시켜 주시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회복시켜 주는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온 성경적 실천이 있다. 예로부터 기독교의 믿음의 스승들은 ‘그리스도의 영성의 실천’에 대해 말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의 특성들 가운데 자라가는 과정을 뜻한다.
13세기에 쓴 토마스 아 켐피스의 작품 《그리스도를 본받아》 (대한기독교서회)는 영적 성장 안내서의 고전이 되었고, 요한 클리마쿠스Johin Climacus의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은성),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의 《영혼의 성》(성바오로),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의 《가르멜의 산길》(바오로딸)도 마찬가지다. 위로부터 오는 '새 생명'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다시 빚어지는 점진적 결과이다.
회심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성품에 뿌리를 둔 영성계발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동행하면 그분은 우리를 안에서부터 변화시켜 주신다. 우리가 영적으로 빚어지게 되는 것, 그것이 영성계발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롬 9:16),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은 하나님과 그 자녀들의 협력을 요한다(요일 3.3. 빌 2:12-13). 보디빌더들이 역기로 몸을 다듬는 것처럼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은 덕의 실천을 '훈련'으로 알았다. 그들은 회심의 기도를 드린 것만으로 거룩함이 갑자기 나타날 줄로 기대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영성계발을 하나의 의식적인 과정으로 이해했다. 야고보는 말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1)
플라톤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 등 네 가지 덕이 있다고 주장했고, 중세기 믿음의 스승들은 여기에 세 가지 ‘신학적’ 덕인 믿음, 소망, 사랑을 덧붙였다. 과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추상적인 선의 이상을 동경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덕’을 즐겨 말했다. 그들에게 덕이란 주님의 내면생활을 보여주는 일련의 영적 속성 내지 마음의 태도를 뜻했다.
출처
기쁜 일상을 위한 일상영성, 게리 토마스, CUP, 2024, 23-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