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달에는 <이동원 목사와 함께 걷는 천로역정> 가운데 <13. 아름다운 집 : 딤전 3:15>(p150~160)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진 상열 목사 드림.
- 세계적인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가 지구촌 교회를 위시한 한국 교회를 방문했을 당시, 필그림 하우스에서 ‘한국 교회 리더들과 함께 하는 6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의 베스트셀러 저작들 중에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IVP, 2010)이란 책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제목 자체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갖는 교회에 대한 느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원제는 <Church : Why Bother?>(교회 : 어쩌면 좋을까?)입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필립 얀시는 한국 교회 독자들에게 이런 마음을 나누고 있습니다.
- “전 세계적인 규모와 역동성을 자랑하는 한국 교회에 이와 같은 책이 과연 필요한가 하고 의아해 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못지않게 한국에도 교회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굳이 교회라는 조직에 소속될 필요가 있을까? 종교 없이도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기독교에서 하나님만 만나면 됐지 굳이 꼴 보기 싫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나?”
- 이 책에서 필립 얀시는 자신도 한때 교회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교회는 자신의 삶의 절대적인 한 부분, 곧 자신의 사랑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교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비유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집, 혹은 가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말을 인용하며 가정이란 “내가 거기로 가야 할 때 식구들이 나를 받아 주어야 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 존 번연도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공 순례자 크리스천의 고난의 순례 여정 중에서 새 힘과 안식을 얻는 장소로서 ‘아름다운 집’을 설정합니다. 이 고난의 여정 중에 뜻밖에도 ‘궁전 같은 아름다운 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러면 존 번연은 그가 다니던 교회에서 실망이나 상처를 받은 경험이 없었을까요? 아마도 분명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대한 상처와 실망에도 불구하고 존 번연이 크리스천이 쉬어 가게 될 상징으로서의 교회를 아름다운 집이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회가 아름다운 집일 수 있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첫째, 교회는 아름다운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 때문입니다. :
- 사도 바울은 (딤전3:15)에서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면서 동시에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선포합니다.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터가 전체 건물을 떠받치는 것처럼 교회가 복음의 영광스런 진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 또한 사도 바울은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10:15)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아름다운 행위라면 복음은 더욱 아름다운 진리였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수호하고 가르치는 곳인 교회를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아름다운 집’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혹은 철학적인 진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 올리셨느니라(딤전3:16).
- 아름다운 주님을 머리로 한 집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대한 고백 없이는 아무도 이 집의 진정한 지체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로역정>에서 순례자 크리스천이 아름다운 집에 들어가 유숙할 수 있는지를 묻자, 이 집 식구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그가 이 집에 유숙할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합니다.
- 이 시험의 핵심은 ‘이 집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있는가?’였습니다. 존 번연의 시대에 청교도들은 한 사람이 교회의 가족이 되고 싶어 하면 반드시 먼저 믿은 성도들의 질문을 통과하여 그가 믿음의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절차를 가졌습니다. 특히 존 번연이 속한 침례교회의 중요한 교인 자격은 ‘거듭남의 고백’이었습니다.
- 크리스천이 아름다운 집에 들어가고자 했을 때 처음에는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집 앞에 사자 두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름다운 집의 문지기가 그에게 말합니다. “사자들을 두려워 마시오. 이 사자들은 사슬로 단단히 묶여 있소. 이 사자들은 순례자들의 믿음을 시험해서 확신이 없는 부류를 가려내고자 매어 두었을 뿐이라오. 길 한복판만 벗어나지 않고 오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오.”
- 먼 훗날 영원한 하나님의 집인 천국에 들어갈 때도 내가 교인이면서 과연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으르렁거리며 당신 같은 인간은 이 집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믿음,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그 이름으로 구원받은 분명한 확신만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이 당당하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용서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 나의 영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집일 수 있는 이유는 이 집의 주인이신 아름다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진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고 선언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 둘째, 교회는 아름다운 교제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
- <천로역정>에 보면 아름다운 집에서 순례자 크리스천이 만나게 될 사람들의 이름을 ‘신중’, ‘분별’, ‘경건’, ‘자선’이라고 말합니다. 존 번연은 이들을 ‘아름다운 숙녀’, 즉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집에서 크리스천은 얼마 동안 머물며 아름다운 교제를 갖습니다. 이들은 한동안 순례길에서 겪은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이것이 바로 간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교제 방식은 피차에 신앙 간증을 나누는 것입니다.
- 초대 교인들은 만나면 우선 간증부터 나누고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간증이 없이는 어떤 신자도 그 교회의 지체로 영입되지 않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전통은 청교도 시대에 다시 견고하게 회복되었습니다. 그들은 간증을 나눈 후에 식탁이 마련되고 상에 둘러앉아 교제의 식사를 시작합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이런 공동체의 교제는 성경에서 언제나 아름다움으로 예찬되고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 존 번연은 이때 그들이 나눈 이야기의 핵심이 고난의 고갯길의 주인, 그리고 아름다운 집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증언합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아름다운 주님을 칭송하는 교제였으며, 이 교제에 뒤따르는 영적 안식과 영적 무장으로 순례자들은 남은 길을 용기 있게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 그런데 누군가는 이런 반문을 할 것입니다. “교회에 실제로 이런 아름다운 교제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게 격려가 아닌 상처와 낙심을 안겨다 준 교회 내의 인간관계들이 바로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정말 아름다운 집이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저는 필립 얀시의 책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에서 찾고자 합니다.
- 이 책에서 필립 얀시는 우리에게 명절날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의 교제 장면을 연상해 보라고 권합니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 중에는 똑똑한 사람도 있고 우둔한 사람도 있고, 못 생긴 사람도 있고 잘 생긴 사람도 있고,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고,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중에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내 가족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는 건강한 가정은 강한 식구를 끌어내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장 약한 식구를 세워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필립 얀시의 책의 한 대목을 읽어 보겠습니다.
- “인간의 모든 제도 중에 유일하게 선택권이 없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출생 자체로 이미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상하고 특이하고 별난 사람들과 본의 아니게 하나로 묶이게 된다. 그리고 교회는 본의 아니게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요청한다.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이상하고 별난 사람들과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내 경험상 그런 공동체는 인간의 다른 어떤 기관보다 가족을 더 닮았다. 헨리 나우웬은 영적 공동체를 정의하며 ‘함께 더불어 살기 가장 싫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함께 살아야 하는 곳’이라고 정의하였다.”
- 왜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지속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연약한 지체들이 함께 모여 용서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며, 그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공동체를 이룹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제의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 <어설픈 오케스트라 악단의 연주> : 필립 얀시는 감동적인 일화 하나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가 살고 있는 미국 콜로라도 주의 산골 마을 에버그린 고등학교에 마을에서 유일한 오케스트라단이 있었습니다. 어느 가을날 이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숙련되지 않은 고등학교 관현악단에게는 매우 어려운 난이도의 곡이었습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연주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연주를 무의미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사실 학생들로 구성된 수준 미달의 오케스트라 악단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려주는 유일한 통로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필립 얀시는 이야기합니다.
- 왜 필립 얀시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오늘날의 교회들이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복음의 교향악을 연주하기에는 준비가 덜 된 공동체임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교향악을 연주하도록 주께서 위임하신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악기는 더러는 고장 나 있고, 더러는 제 소리를 내지 못한 채 변질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복음의 소리를 내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 “너희들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너희가 더 좋은 악기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라. 너희가 복음의 소리를 내야 할 유일한 공동체라는 것을. 너희가 바로 세상의 유일한 희망의 소리, 세상의 유일한 구원의 소리를 연합해서 들려주어야 할 공동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교회, 곧 아름다운 하나님의 집이다.”
- 부족하고 자격 미달인 우리를 통해 오늘도 복음을 들어야 할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날마다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 순간이 우리가 초대하는 이웃에게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들은 아름다운 집을 경험할 기회가 영영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집을 소개할 수 있도록, 어설프지만 복음의 유일한 공동체 일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