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자리’ ‘삿자리’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 '깔개'시리즈 1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삭자리’라는 ‘깔개’가 있다. ‘삭자리’는 표준어(標準語)로는 ‘삿자리’라고 하는데, ‘삿’으로 만든 ‘자리’라는 뜻이다.
대나무나 갈대, 수수 껍질 등으로 엮기도 하는데, ‘삿’ 또는 ‘갈삿’이라고도 한다. ‘갈삿’은 갈대로 만든 ‘삿’이라는 뜻이다. 이하에서는 표준어(標準語)인 ‘삿자리’로 통일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깔개’라는 말은 앉거나, 눕거나 할 때, 바닥에 깔거나, 덮거나 하는 물건을 말한다.
그리고 다른 의미의 ‘자리’란 사람이나 물체(物體)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말하기도 하고, 사람의 몸이나 물건(物件)이 어떤 변화를 겪고 난후 남은 ‘흔적’을 말하기도 한다.
삿자리
![](https://t1.daumcdn.net/cfile/cafe/147A840D4CC93AEC44)
(흰 부분은 뚫어진 부위로 '댓개비'나 '갈대'로 보수해 놓은 곳이다)
그리고 ‘밑자리’는 '맷방석'이나 바구니 따위의 처음 엮기 시작하는 ‘밑바닥’을 말하고, ‘빈자리’는 비어 있는 자리 즉, ‘공석(空席)’을 말하며, 비어 있는 ‘벼슬자리’를 말하기도 한다.
‘술자리’는 술을 마시고 노는 '자리' 즉, ‘주석(酒席)’을 말하고, ‘진자리’는 아이를 갓 낳은 그 '자리' 또는 아이들이 오줌똥을 싸서 축축하게 된 '자리'를 말한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우리를 낳는 순간부터 ‘마른자리’를 골라 뉘느라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셨다.
옛적에 우리들의 선조(先祖)들이 주로 사용한 ‘깔게’에는 ‘등메’를 비롯하여 돗자리, 꽃돗자리, 삿자리, 짚자리, 돗짚자리, 기직자리, 대자리, 구름깔개 등의 자리가 있었다.
여기에서 회원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들 ‘깔게’들의 개요(槪要)와 용도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이해를 더욱 증진(增進)시키고자 도표로 소개하는 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구 분 |
개요 및 용도 |
등 메 |
가장자리를 헝겊으로 선을 두르고 뒤에 부
들자리를 대서 꾸민 돗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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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 자 리 |
왕골이나 골풀의 줄기를 잘게 쪼개서 친 자
리로 석자(席子), 인석(茵席)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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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돗자리 |
꽃무늬를 놓아 짠 돗자리로 준말로 꽃자리
라고도 하며, 채문석, 화문석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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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 자 리 |
외동읍사투리로 삭자리로 라고도 하는데,
갈대로 엮은 자리로 삿이라고도 함. 경주지
방에서는 대나무 껍질을 많이 사용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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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 자 리 |
짚으로 엮어 만든 깔자리로 초석(草席)이라
고 하는데, 볏짚을 깔아서 앉도록 만든 자리
를 말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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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짚자리 |
속에 짚을 두툼하게 넣고 겉은 돗자리를 대
어 단단히 꿰맨 긴 네모꼴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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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직자리 |
기직을 말하는데, 기직이란 왕골 껍질이나
부들잎으로 엮은 자리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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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자 리 |
얇은 대오리로 엮어 만든 자리로 죽석(竹席)
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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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깔개 |
참나무를 엷게 밀어서 결은 자리로 함경도
사투리로 많이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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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 미 |
마루방에 까는 일본식 돗자리
[일본어 tat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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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삿자리’에 얽힌 얘기부터 먼저 소개한다. 옛적 경주(慶州) 지방에서는 ‘갈대’가 그렇게 많이 서식(棲息)하지 않아 산죽(山竹)을 얇게 쪼개어 ‘갈대자리’와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이를 ‘삭자리(삿자리)’라고 했다.
그 당시 '삿자리'의 주재료인 '갈대'는 지금은 도시로 변해버린 울산광역시의 병영지방 '대봇들' 늪지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필자는 6.25전쟁이 휴전으로 들어갔을 때 '방어진'에 있던 외할머니댁을 방문할 때는 언제나 이 '대봇들' 갈대 숲 사이에 조성되었던 해안 길을 따라 오갔다.
갈 대
![](https://t1.daumcdn.net/cfile/cafe/20542C2E4CCAD2FC42)
울산역(蔚山驛)이나 병영역(兵營驛)에서 '방어진'을 오가는 버스가 있기는 했으나, 하루에 두어 번 왕래(往來)하여 시간을 맞출 수도 없었지만, 몇 푼 안되는 차비라도 아끼시려는 어머니의 알뜰하심으로 언제나 도보로 왕래하였다.
그때마다 그 웅대(雄大)한 갈대밭 모습에 취해 느림보 걸음을 걷다가 어머니께 꾸중을 듣곤 했었다. 10여 리에 걸쳐 밀림(密林) 같이 펼쳐진 그때의 갈대밭은 참으로 장관(壯觀)이었다. 초겨울이 되면 인근 농부들이 배를 타고 '갈대'를 채취하곤 했었다.
‘갈대’는 높이 3m에 이르는 여러해살이풀로 뿌리줄기는 거칠고 크며 길게 가로 뻗고, 마디에서 많은 수염뿌리가 나며, 황백색(黃白色)이다. 습지나 갯가, 호수 주변의 모래땅에 군락(群落)을 이루고 자란다. 줄여서 ‘갈’이라고도 한다.
웅장한 갈대숲
![](https://t1.daumcdn.net/cfile/cafe/145EEC2F4CC9886E3B)
'죽석(竹席)'이라고도 하는 '삿자리'는 온돌방의 자리로 쓰는데, 주로 마름모꼴 형으로 부드러운 '속대'를 이용하여 절어 만들었다.
전라남도 장흥군의 부산면 호계리는 지금도 '죽석(竹席)'의 산지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마을 근처의 대밭에서 대나무를 구하여 알맞게 잘라 일정한 넓이로 쪼개고 얇게 떠서 여러 방법으로 '죽석'을 엮는다.
방에다 깔면 그대로 장판이 되는 ‘삿자리’는 우선 일정하고 정교(精巧)하게 엮어야 한다. 완성된 '죽석(竹席)'은 잘 문지른 다음 물을 부어서 바닥에 새어 흐르지 않아야 1등작(一等作)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죽석'은 말아서 시장으로 나간다.
왕대나무 밭
![](https://t1.daumcdn.net/cfile/cafe/13266C304CC988A978)
이 마을 사람들은 대다수가 농한기(農閑期)마다 ‘삿자리’ 만들기에 종사하며, 신방(新房)이나 부자 노인방에 까는 고급 죽석은 대나무의 매듭을 잘라내고 한 자 안팎의 대로 잘게 쪼개어 만든 것으로 너무 귀해서 여간해서는 깔지 못한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죽석(竹席)'으로 방바닥을 깔고 있는 가정이 많고, 근읍(近邑)의 사랑방에 깔린 '죽석'은 모두 이 마을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갈대' 외에 억새, 대가지, 볏짚, 버들가지, 띠풀 등으로 만들어 방이나 맨땅에 까는 자리를 모두 ‘삿자리’고도 한다.
‘삿자리’용 대나무
![](https://t1.daumcdn.net/cfile/cafe/175AF32F4CCB522233)
‘삿자리’의 가장자리는 ‘삿귀’라고 하고, ‘삿자리’를 깐 방을 ‘삿방’이라고도 한다. ‘삿자리’ 둘레에 돌려 댄 천은 ‘가위손’이라고 하고, ‘삿자리’가 부풀어 오른 ‘끌티기’의 끄트머리는 ‘자리가시’라고 한다.
‘삿자리’에 손이나 발이 찔리는 때는 거의가 이 ‘자리가시’에 찔리는 경우다. 여기에서 잠시 ‘삿자리’에 등을 찔린 채 헤어지는 아이들의 망각(忘却)의 세월을 그린 ‘몽포’의 ‘잃어버린 꿈’을 음미하고 넘어간다.
잃어버린 꿈
몽포
꿈을 잃은 사람들이
논길을 걸어가고 있다.
논길엔 잡초가 무성하고
산자락에는
숨죽인 바람이 어둠을 삭이고 있다.
언제였던가.
쑥대머리 초가집 위로
공 들여 심은
새하얀 박꽃은 보이지 않고
삿자리에 등을 찔린 남매들이
남남으로 헤어진 산작로엔
오염에 찌든 은행잎들이
풀 죽은 모습으로 거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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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高級) '삿자리'는 연못 물가의 축축한 곳에서 자라는 '삿갓사초(‘삿’이라고도 함)'를 쪼개어 엮기도 한다.
‘삿갓사초(莎草)는 벼목 사초과에 속하는 여러 해살이 풀로 못이나 강기슭 등의 습지(濕地)에 나며 긴 뿌리줄기를 뻗어서 군생한다.
여름에 생장한 잎은 삿갓·도롱이·밧줄을 만드는 데 널리 사용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일본·동남아시아 등지에 분포(分布)한다. 이것으로 ‘삿갓’을 만든다 하여 ‘삿갓사초’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우리들의 외동향우회(外東鄕友會) 상징이기도 한 '우삿갓'과 관련한 '삿갓'에 대한 사연들은 이 '깔게' 시리즈가 끝나면 특별 보정판(補正版)으로 게재하고자 한다.
삿갓사초
![](https://t1.daumcdn.net/cfile/cafe/1443462E4CC988D341)
‘삿자리’는 옛적에 초가집 오막살이에 사는 서민(庶民)들이 주로 만들어 깔았던 자리다. 주로 방안에 깔아 장판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금 사정이 나은 가정에서는 마당에도 깔고, 평상(平床)위에도 깔고, 집안에 있는 감나무 그늘에도 깔았다.
그리고 솜씨가 좋은 사람들은 울타리에 심은 ‘시누리 대나무’나, 산에서 자생하는 '산죽(山竹)'을 잘라서 손수 만들어 쓰기도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시장(市場)에서 구입했었다.
삿자리 깔던 평상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0720C4CCAB97F5D)
(밭매기를 하다가 평상에 앉아 잠시 휴식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산죽(山竹)'이란 대나무 중에서 가장 작은 대나무로 중부 이남의 산에 무리를 지어 자란다. 상록성(常綠性)이며 키는 1∼2m, 지름은 3∼6mm쯤 자라며 추위에 강하다.
잎은 길고 가장자리에 잔'톱니'와 털이 있다. 일생에 한번 꽃을 피우며 꽃이 피어 열매가 맺고 나면 군락(群落) 전체가 말라죽고 씨앗으로 다시 태어난다.
산죽(山竹)
![](https://t1.daumcdn.net/cfile/cafe/12217E2E4CC9891569)
가난한 서민(庶民)들의 방에는 안방이든 사랑방이든 모두 ‘삿자리’를 깔고 사는데, 대나무로 결은 ‘삿자리’의 경우 대나무 마디를 최대한 평평하게 낫으로 깎았다고 하나, 마디가 지게 마련이어서 처음 겪는 사람들은 요를 깔지 않으면 배겨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서민들의 경우 덮을 이불도 제대로 없는 형편이라 깔고 잘 요가 없어 언제나 맨 ‘삿자리’ 바닥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잔등과 얼굴 한쪽에 '삿자리'무늬 도장이 벌겋게 찍혀져 있기도 했었다.
물론 어머니나 누나나 누이들은 속적삼이나, 적삼을 입고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예외에 해당했지만, 남자들과 사내아이들은 속옷이라고는 아래쪽에 달랑 하나 걸치는 '사리마다' 뿐이라 '주우적삼'을 벗고 자면, 언제나 잔등과 얼굴 '뽈때기' 한쪽에는 '삿자리'무늬 도장이 찍힐 수밖에 없었다.
'주우적삼'은 입고자면 빨리 떨어진다고 하여 행여나 잠결에 입고자면, 밤중에라도 벗고 자라고 '왈개'를 부렸고, 벗고 지면 잔등에 삿자리무늬는 물론 '자리가시'에 찔려 고생을 하기도 했었다.
여기에서 '왈개'를 부린다는 말은 외동사투리 '왈기다'라는 동사를 변형한 말인데, '왈개'는 질색(窒塞)한다거나 상극(相剋)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이들이 '주우적삼'을 입고자면, 어버이들이 옷이 빨리 헤진다며 질색을 하셨다는 뜻이다.
삿자리 시절 아이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14E0314CCAD62523)
그러나 이들 가정에서는 어른이든 아이들이든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길을 들여왔기 때문에 크게 불편(不便)한 것은 없었다.
여기에서 잠시 민승아가 노래하는 ‘몰라요’의 가사를 음미해보기로 한다. 뭘 모른다는 것인지 본인에게 물어보지 못해 뜻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자기가 '삿자리'를 좋아 한다는 것인지, '삿자리'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시절 필자들이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면서 쓸고 닦던 '삿자리'를 노래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몰라요
민승아
한 때는 나 하나만 사랑한다 했었지
흘러간 노래가 됐지만
삿자리 삿자리 삿자리 가리고
삿자리 삿자리 삿 삿 자리 가리고
그땐 정말 행복 했었어
지금도 나를 사랑 하나요
가물은 날에 콩 나듯이 날 좋아 하나요
몰라요~~몰라요~~~
한 때는 나 하나만 사랑한다 했었지
서글픈 노래가 됐지만
삿자리 삿자리 삿자리 가리고
삿자리 삿자리 삿 삿 자리 가리고
그땐 정말 행복 했었어
지금도 나를 좋아 하나요
가물은 날에 콩나듯이 날 좋아 하나요
몰라요~~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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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자리’는 여름의 경우 누워있거나, 앉아있으면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아기들이 자리 위에 대변(大便)이나 소변을 볼 경우 대소변이 삿자리 틈으로 스며들면 닦아낼 수도 없어 악취(惡臭)가 가시지 않는 단점(短點)이 있었다. 걸레로 닦으면 닦을수록 대소변이 더 깊이 밀려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때는 자리 전체를 마당으로 들고 나와 안팎을 물로 씻어내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틈새에 박힌 대변찌끼는 그래도 씻겨 지지 않아 냄새가 완전히 제거(除去)되지는 않는다.
삿자리 시절 아이들(한강)
![](https://t1.daumcdn.net/cfile/cafe/146F1E374CCADF293D)
겨울에는 이렇게도 할 수 없어 아기들이 많은 서민들의 안방에 들어서면 구린내와 지린내가 동천을 하기도 했었다.
이뿐이 아니다. 여차하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발가락이나 무릎, 등허리와 손바닥이 ‘삿자리’ ‘끌티기’에 걸리고 찔려 고생(苦生)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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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말하는 '끌티기'는 표준어로 '그루터기'를 말한다. "보리 비고 난 디에 맨발로 댕기다가 '끌티기'에 발로 안 찔랬나(보리 베고 난 뒤에 맨발로 다니다가 그루터기에 발을 찔리지 않았겠니)"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마을에 따라서는 땔나무인 '까디이'를 '끌티기'라고도 한다.
'삿자리'가 오래되면 으레 쪼개지고 부러지게 되어있고, 아이들이 장난을 치면서 멀쩡한 부분도 꺾고 부러뜨려 날카로운 침처럼 위쪽으로 튀어 나오기 일쑤였다.
‘삿자리’는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와서 가끔 뜯어 놓고 가기도 했다. 오일장(五日場)이 다가오지 않아 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의 사친회비(師親會費)를 쥐어 보낼 형편이 못될 때는 염치불구(廉恥不拘)하고 이웃집에 돈을 빌리려 간다.
그런데 그 상황을 이쪽에서 먼저 짐작하고, “묵고 죽을라캐도 돈 귀경을 못하이 이런 세상 살아가주고 머하노(먹고 죽으려 해도 돈 구경을 못하니 이란 세상 살아서 뭣하겠느냐)”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선수(先手)를 쳐버린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돈 빌리러 간 아낙은 차마 입이 안 떨어지니까 상대방의 엄살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삿자리' 귀퉁이만 잡아 뜯다가 그냥 돌아가게 된다.
이웃집 아낙이 뜯어놓은 그 '끌티기'에 발가락이나, 기어 다니는 아기들의 손바닥이나 무릎이 부딪히면 사정없이 찔리게 된다.
삿귀
그리고 상황(狀況)이 이 정도가 되면 아기 엄마는 돈 빌리러 왔던 아낙의 집 쪽을 향해 ‘말욕(정도가 심한 욕설)’ ‘줄욕(계속 퍼부어대는 욕설)’을 퍼부어댄다.
“그 ‘회양년’이 새북부터 나무 집에 와가주고, '삿자리'로 자바 띧띠마너 알라 ‘물패기’마 ‘끌띠기’에 찔래났다 애이가”(그 ‘화냥년’이 새벽부터 남의 집에 와서 '삿자리'를 잡아 뜯더니만, 어린애 무릎만 ‘끌트기’에 찔리게 했다 아닌가).
때투성이의 대나무 '삿자리' ‘끌티기’에 깊이 찔리면 통증(痛症)이 이만저만 아니기도 하지만, 소독약(消毒藥)조차 없던 당시로서는 대개의 경우 곪아터져 사람에 따라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
조금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아까찡끼’라도 몇 방울 떨어트려 최소한의 소독(消毒) 처분을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못한 가정의 경우 입으로 상처부위를 힘껏 빨아낸 후 논두렁이나 밭둑에 자생(自生)하는 쑥을 뜯어와 짓찧어 바르고 헝겊으로 칭칭 감기만 한다.
그 시절 아까찡끼(머큐로크롬)
![](https://t1.daumcdn.net/cfile/cafe/1958D52F4CC9898769)
여기에서 잠시 '아까찡끼'에 대한 내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까찡끼'는 일본어로 '빨간 약'이라는 뜻이다. '아까찡끼'는 원래 영어로 '머큐롬'이라고 했는데, '머큐로크롬'이라고도 한다.
이 약이 '머큐롬'이라 불리는 이유는 수은의 영어이름이 '머큐리'로서 옛날 빨간 소독약에는 수은이 함유되어 있었기에 수은의 영어이름에서 유래해서 '머큐롬'이라 이름을 짓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빨간약에 수은이 들어 있고, 그 중독문제가 심각해지자 옛적에 벌써 생산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그 '머큐롬'의 수은중독이 문제가 되자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요즘 빨간약이라 불리는 '포비돈 요오드액'이다.
어쨌든 당시의 아이들은 '삿자리'의 자리가시에 찔려 조금 고생을 했지만, 워낙 면역력(免疫力)이 강한 체질들이라 크게 문제되는 일은 없었던 편이다.
영하(零下) 20-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에도 맨발에 고무신만 신고, 홑껍데기 '미영베' 바지저고리만 입은 채 종일토록 얼음판에서 살다시피 해도 감기(感氣)가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자랄 정도로 강인(强忍)한 체질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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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자리'의 귀퉁이를 뜯다가 횡재(橫材)를 한 노부부 얘기를 소개한다. 옛날에 늙은 소작인(小作人) 부부가 어쩌다가 '두꺼비'를 아들 삼아 키우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두꺼비'가 이 부부에게 건넛집 정승(政丞)의 딸한테 장가를 가고 싶으니 그 집에 가서 말을 좀 넣어달라고 했다.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 '두꺼비'였다.
‘두꺼비가 감히 정승의 딸한테 장가를 가?’ 할멈은 기가 찼으나 '두꺼비'가 정승 딸한테 장가를 못가면 죽고 말겠다고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정승의 집으로 갔다.
그렇지만 차마 말을 못하고 하루 종일 '삿귀(삿자리의 귀퉁이)'만 뜯고 왔다. 너무나 청빈(淸貧)한 정승이라 낙향하여 어려운 생계(生計)를 이어가느라 '삿자리'를 깔고 산 선비였다.
할멈은 다음날도 가고, 그 다음날도 가서 정승네 집 ‘삿귀’만 뜯고 있으니까 평소 서민들에게 후덕(厚德)한 정승이 “노친네 왜 줄창 오누? 좌우간 무슨 일이 있기에 오지? 말은 해야 맛이라는데, 죽을 말이고, 살 말이고 한 번 해보구려”라며 말하기를 재촉했다.
할멈은 “이거야 어디 말이나 될 말이요?” 하며, 겨우겨우 사정을 이야기했다. 정승은 좌우간(左右間) 딸들에게 물어나 보자고 해서 딸 셋을 모아 놓고 얘기를 했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셋째 딸이 좋다고 해서 '두꺼비'는 장가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장가가는 날 '두꺼비'는 허물을 벗고 고운 새신랑이 되어서 혼례(婚禮)를 치렀다. 그리고 후덕한 정승을 사돈으로 맞은 가난한 노부부는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할멈이 매일 같이 정승집에 가서 쥐어뜯던 '삿자리'도 선물(膳物)로 받아 왔다. 당시에는 정승집 정도는 되어야 '삿자리'를 깔고 살던 시절이었다.
서민들은 모두 '거적때기'나 '멍시기'를 짜서 '깔게'로 사용했었다. '거적때기'와 '멍시기'에 관한 사연은 이어지는 파일에서 게재(揭載)하고자 한다. 이상의 내용이 우리 민담(民譚)에 나오는 유명한 '두꺼비신랑'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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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삿자리는 청결(淸潔)을 유지하기가 기본적으로 어렵기도 했었다. 딸이 없었던 필자네의 경우 ‘삿자리’ 청소(淸掃)는 여간 지겨운 일이 아니었다.
삿자리 걸레질
아침때는 필자들이 등교(登校)를 하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닦으시지만, 저녁식사 뒤에는 필자 형제들이 걸레질을 하고 이불을 깔곤 했었다.
문제(問題)는 여기에서도 자칫하면 ‘끌티기’에 손가락을 찔리는 수가 있었다. 조심스럽지 못하고, 왈칵왈칵 걸레질을 하면 걸레에 걸려 '삿자리'날이 찢어져 일어나고, 일어난 '날'에 손가락을 찔리곤 하는 것이다.
‘삿자리’에는 또 유난히도 ‘빈대’가 많았다. 방바닥이 장판일 경우 낮 시간에는 빈대가 가구(家具)나 벽의 틈 혹은 벽지 틈에 끼어들어 숨어 있다가 야간(夜間)에 이불 속으로 들어와 피를 빨아 먹는다.
그러나 이 경우는 낮 시간에 쉽게 찾아내어 잡을 수 있지만, ‘삿자리’일 경우는 낮에도 자리 틈사이나 자리 밑에 은신(隱身)할 수 있어 그만큼 번식(繁殖)이 쉬워 극성을 부리곤 했었다. 대나무조각을 결은 틈새에 숨어 있으면 여간해서는 찾아낼 수가 없었다.
빈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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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시절의 ‘삿자리’는 찌든 가난의 상징(象徵)이자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이 가축보다 조금 나은 환경(環境)에서 자라야 한다는 안타까움을 씻어낼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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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삿자리' 시절을 올곧게 회상(回想)해 보기 위해 구린내 나는 '삿자리' 방에서 잠시 나와 오막살이 앞 감나무 밑에 깔아둔 ‘삿자리’ 위의 정경(情景)을 다 같이 한 번 살펴볼 것을 권한다.
팔월의 불볕이 쏟아지는 오막살이 초가집, 타작마당 돌가루 바닥같이 딱딱하게 말라붙은 뜰 한가운데, 어디서 기어들었는지 난데없는 지렁이 한 마리가 만신(滿身)에 흙고물 칠을 해 가지고 바동바동 구르고 있다.
새까만 개미떼가 물어뜯을 때마다 지렁이는 한층 더 모질게 발버둥질을 한다. 여기에다 어디선지 죽다 남은 듯한 쥐 한 마리가 마당 가운데로 튀어나오더니 종종걸음으로 마당 복판을 질러 돌담구멍으로 사라진다.
군데군데 좀벌레 구멍이 나서 썩어가는 기둥이 비뚤어지고, 중풍(中風) 든 사람의 입처럼 문조차 돌아가 넘어가는 오막살이 앞에 키는 낮아도 해묵은 감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그 시절 오막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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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 낸 후, 비 같은 비 한 방울 구경 못한 무서운 가뭄에 시달려, 그렇지 않아도 쪼그라졌던 고목(古木) 잎이 볼모양 없이 배배 틀려서 잘못 보면 '돌배나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그것이 20-30도가 넘게 쪄 내리는 팔월의 태양(太陽)을 가리어, 누더기 같으나마 밑둥치에는 제법 넓은 그늘을 지웠다.
그걸 다행으로 깔아 둔 낡은 ‘삿자리’ 위에는 발가벗은 어린애가 파리똥 앉은 얼굴에 땟물을 조르르 흘리며 울어댄다.
언제부터 울었는지 벌써 기진맥진해서 울음소리조차 잦아들고 있다. 엄마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하품을 하는 아이를 그늘이 진 감나무 밑 삿자리 위에 재워놓고, 집뒤에 있는 콩밭을 매려 간 것이다.
나무 밑 삿자리 깐 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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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삿자리’에서 올라온 먼지내와 똥내, 빨지 않은 기저귀에서 나온 똥내와 오줌 내, 가지각색 때가 켜켜이 앉은 옷 내가 코를 찌른다.
이 광경이 그 시절을 살아 온 우리들 어버이의 자식에 대한 양육수단(養育手段)이었고, 고통과 인고(忍苦)의 삶을 상징해 온 그 시절 ‘삿자리’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삿자리’ 위에서 울다 지쳐 다시 잠이 들던 아기들이 바로 우리들이었다. 물론 이와 다른 환경(環境)에서 성장(成長)한 사람들은 해당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을 살아온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認定)해 주었으면 한다.
여기에서 다시 '삿자리' 시절의 애환(哀歡)을 그리고 있는 무명시인의 참회, 그리움, 슬픔이라는 독백을 음미해 보고 넘어간다.
참회, 그리움, 슬픔
그 슬픔의 눈사태
잊혀 진 한 시인의 낮은 목소리
나는 무심히 읽었었다
낯선 木手집 삿자리에 오그리고 누워
오그린 한 점 자리도 송구스러워하는
모든 것 버린 시인의 되새김질
무심히 읽은 罪
하도 부끄러워
하얗게 밤이 밝는다.
바람 찬 길모퉁이
돌아서며 던져 온 마지막 눈길
내가 몰라본 탓에
찬 골방 헌 삿자리 위에
그는 아주 사그러들고 말았다.
그의 ‘굳고 정한 갈매나무’에
오늘밤도 쌀랑쌀랑 눈 내린다.
싸락눈 한 톨로도 그의 근처에
내리지 못하고 내가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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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자리’, 옛적에는 지금과는 달리 방바닥에 깔고 잘 자리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나무나 갈대로 엮은 ‘삿자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삿자리’에 얽힌 고사(古事) 한 가지를 소개한다.
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의 죽음을 표현하는 데는 품격과 비하(卑下)를 담은 용어들이 다양하다.
서거(逝去), 운명(殞命), 별세(別世), 승화(昇華), 입적(入寂), 소천(所天), 절명(絶命) 등 종교와 지역, 또는 학덕의 깊이에 따라 정중한 공경어(恭敬語)가 원용되기도 한다.
반면에 살아생전에 몹쓸 짓을 많이 하여 사회적(社會的)으로 지탄받은 사람이 사망(死亡)했을 때는 겉으로야 삼가지만, 뒷전에서나 마음속으로는 ‘뻗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산 사람에 의해 어떻게 불릴지를 스스로 곰씹어 볼 일이다.
'뻗은 자'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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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권 시절, 임금이 진명(盡命)한다는 것은 곧 국가의 지각변동이었다. 붕어(崩御), 승하(昇遐), 훙서(薨逝) 등이 군왕의 몰세(沒世)와 관련된 지칭어들이다.
그런데 제왕(帝王)의 타계보다도 더 지고한 수사(修辭)가 있다. 바로 ‘역책(易簀)’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고대 중국(中國)의 학자인 증자(曾子 ; 506∼BC 436)가 죽음에 임박하여 정갈한 ‘삿자리’를 바꾸어 깔았다는 고사(古事)에서 유래하며, 학식과 덕망(德望)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臨終)을 이르는 말이다.
증자는 내성적 학풍(學風)으로 크게 존경받았던 공자(孔子)의 말년 제자였다.
우리 역사에도 ‘역책’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어른의 경우 역시 단지 깨끗한 ‘삿자리’를 바꿔 깔고 죽었다 해서 ‘역책’이라 불리어 진 게 아니고, 그에 상응하는 업적(業績)과 사회적 공감대(共感帶)가 형성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그렇게 회자(膾炙)되고 추앙되어 온 것이다.
퇴계의 임종을 살펴본다. 퇴계는 자신이 죽기 나흘 전 저승길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고 조카 영(寗)을 불러 유언과 함께 당부의 말을 챙겼다.
“내가 죽은 후 조정에서 예장(禮葬)을 하려고 하거든 반드시 사양하라. 큰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는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새기고, 후면에는 본관, 조상내력, 입지, 행장만을 간단히 기록하여라. 그리고 내가 초를 잡아둔 명문(銘文)을 쓰도록 하라.”고 당부한 바 있다.
역책(易簀) 얘기를 좀 더 소개한다. 바꿀 역(易)자와 대자리 책(簀)자를 쓰는데, 증자(曾子)가 죽을 때를 삿자리를 바꾸었다는 뜻으로, 학식(學識)과 덕망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臨終)을 이르는 말로 자리 잡고 있다.
역책급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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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의 ‘삿자리’는 또 사례금(謝禮金)이나 위로금 따위의 금품을 안전하고 용이(容易)하게 전달(傳達)하고 돌아가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물론 그때의 ‘사례금’은 지금 세상의 뇌물(賂物) 따위와는 전혀 성격을 달리한다. 받는 사람들이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하니 몰래 두고 가는 사은(謝恩)의 성격이었다.
지금 세상에서 어느 사업가가 골프장 건설권(建設權)을 따내었을 경우 크게 도와준 어느 정치인(이를테면 모 국회의원)이나, 관료(官僚)들에게 사과궤짝 가득 현찰(現札)을 실어다 주는 그런 추한 돈이 아니라는 뜻이다.
과거 ‘삿자리’시대에는 비록 몇 푼 되지는 않았지만, 꼭 인사를 드리고 도와줘야 할 사람이 있을 경우 주로 사람을 시켜 그 집을 방문(訪問)하게 하여 당사자가 있든 없든 부엌문을 열고 꾸러미 하나를 부뚜막에 올려놓거나, 안방 문을 열고 ‘삿자리’ 밑에 봉투(封套)를 밀어 넣고 돌아오게 했다.
심부름을 간 사람은 돌아나가면서 채전(菜田)에서 일하는 아낙에게 눈인사만 하고 아무 말 없이 가버린다.
면전(面前)에서 꾸러미나 봉투를 내밀면 당시의 아낙들은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외간남자에게서 무엇을 받지도 않을 뿐 아니라, 받으라느니 받을 수 없다느니 하면서 불필요한 실랑이를 할 경우 사립문을 지나는 행인들로부터 오해(誤解)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꾸러미'와 '삿자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옛적 선물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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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냈는지는 고기꾸러미의 경우 창호지(窓戶紙)를 잘라 쓴 쪽지로, 현금인 경우는 봉투에 쓴 이름으로 알게 된다.
글을 모르는 이들은 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이웃집 훈장(訓長) 어른을 찾아가 확인하기도 했다. ]
당시의 학생들은 초등학생들도 요즘의 학원(學院)처럼 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도 했고, 이런 과정을 거친 중학생들은 한문투성이였던 당시의 동아일보(東亞日報)를 읽을 정도로 한문(漢文) 실력이 대단하기도 했다.
꾸러미와 봉투를 헤쳐보고 뜯어보면 돼지고기 두어 근(斤)이나, 현금(現金) 10원 정도가 들어있었다.
돼지고기의 경우 당시 한 달에 1인당 돼지고기 석 냥(150그람) 정도를 배급해 주던 시절이라 여간 많은 양이 아니었다.
현금 10원도 당시의 경우 장례식(葬禮式)이나 혼례식 등 대사(大事) 때 2원 정도를 들고 가던 시절이라 여간 큰돈이 아니었고, 고맙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만들지도 만들 사람도 없어진 그 시절 ‘삿자리’, 그 '삿자리'를 영원(永遠)히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어린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뒤 잔등과 한쪽 뽈때기에 벌건 삿자리무늬 도장을 찍었고 걸핏하면 자리가시에 찔리고 미끄러지던 그 시절 삿자리의 추억들이 주마등(走馬燈)이 되어 스쳐 지난다.
강화 화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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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자리'와 관련한 배경음악(背景音樂)이 없어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옛적 '삿자리'를 깔고 살던 초가삼간(草家三間)을 그리고 있는 조영순의 '초가삼간'을 게재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초가 삼간
조영순
실버들 늘어진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정든 님과 둘이 살짝
살아가는 초가삼간
세상살이 무정해도
비바람 몰아쳐도
정이든 내 고향
초가삼간 오막살이
떠날 수 없네
시냇물 흐르면
님의 옷을 빨아 널고
나물 캐어 밥을 짓는
정다워라 초가삼간
밤이 되면 오손도손
호롱불 밝혀놓고
살아온 내 고향
초가삼간 오막살이
떠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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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때는 삿자리도 귀한 물건이었는데! 요즘은 비닐이 하도 많아 비닐로 모든 물건을 만들지요...
요오님은 정말 만물박사시네!~~ 별의 별 이야기가 다있네! '우삿갓 예기가 기다려 집니다.
네.....늦게 봤네요...여기 저기 다니다 보니...카페 방문도 좀 뜸 했네요...이렇게 좋은 애기를 이제 보다니...죄송합니다.
삿갓 사초란게 말은 처음 들어도 풀을 보니 안면이 있네요...네..뭐 그리고 삿갓을 주제로 쓰신다고...아이구...황송해서...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김삿갓 이름따서 지은것 뿐입니다....아시는대로 대충 편하게 쓰시길요....사례금도 못 드리는데.ㅎㅎㅎ
삿자리에 찔려서 사고나는 적 많았지요...저희집에는 아까징끼는 안떨어지고 있었는거 같은데..그 빨간약이 만병통치약인줄 알았지요.ㅎㅎㅎ 정말로 많이 수집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