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은 어느분의 블르그 홈에에서
그대로 옮겼습니다.
1965년 1월1일자
동아일보 신년호에 처음으로
우리 독도의 전경 항공사진이 실렸습니다.
당시 이 독도 전경사진을 동아일보에서
처음 실었다는 것은 저도 이 신문기사를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 동아일보 1면 사진과
독도 수비대원의 일기 기사를 올려 봅니다.
*오래된 신문이고 또한 한자때문에
읽기에 불편하실까봐 제가 읽기 쉽도록
옮겼습니다.
***__***
조국의 최동단 동해의 요쇄,
독도에서 을미년 첫해는 떠올랐다.
해발 1백20미터,
총면적 14평방킬로미터,의 이 고도에는
이날도 영해를 지키는 우리 해안경비대원들이
임무를 완수하고 있다.
[울고 왔다 울고가는 섬] 갈매기 슬피 울면
우리의 다사다난했던 1개월간의 근무일지에도
종지부가 찍히고.... 나와 대원들도 부모처자를
다시만나 독도의 지난날을 이야기 하겠지.
물개 가족들의 다정한 모습이며
식수가 없어 곤란했던 일.
의료시설이 없어 맹장이 걸리면 영락없이
삶을 포기해야 된다는 등. 독도는 이같은
여건으로 배를 타고 올때 울지만 막상 떠날때면
추억어린 돌벽을 붙들고 울어야 하는 섬이다.
약간의 풍랑에도 암석의 경사 때문에
교대병력조차 상륙할 수 없어 3개월간
근무해야 되고, 바람이 심하면 망을 보는
도정에는 경비원들이 걸어다닐 수 없어
꼼짝 못하는 곳이다.
이 도정에서 우리 경비원들은 간혹
국적물명의 선박이 섬앞 20마일 해상까지
출몰하는 것과 고기떼를 따라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단을 발견하나
요즘은 통 그런 선박이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한달전,
빗물을 받아 받을 짓고있다.
수로는 세수를 단념.
한 [겈]의 양치물도 여러 사람이
순번으로 나누어 써야 한다.
최근 2톤가량의 천수를 저장하는
[콘크리트 탱크]를 설치했으나 빗물은 2,3일만
지나면 자연부패하기 때문에
그것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물.. 의료시설 모두우리가 갈망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희구하는 것이 있다.
따뜻한 손길. 동쪽 수평선에 떠올랐던
해가 서쪽 수평선에 지는 나날을 지켜
보느라면 사람이 그립고 육지소식이 그리워 진다.
한통의 위문편지라도 우리 외로운 독도에
있는 경비원들에겐 국토방위의
커다란 에너지가 된다.
<독도 경비 순경> 고병훈기.
65년도 독도 경비대원의 일기.
이렇게 지킨 우리의 독도입니다.
그런데 현 정부(외교통상부)는
독도에 경찰청장이 방문하는 것을
막았다고 합니다.
미국에 대해서 할말 하고 살겠다던
노무현씨는 침묵을 하고 있습니다.
고이즈미에게 다케시마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다음의 박대통령 사진을 보시면 박대통령의
국토수호의지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의장 시절 울릉도 방문의 사진입니다.
박대통령은 조극의 극지부터
국토방어의 의지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첫 발자욱이 바로 독도민간 수비대를
정규 경찰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오른쪽이 그당시 박의장>
울릉도 도동에서 울릉경찰서 및
울릉초등학교 시찰 후 도동의 중앙로를
통하여 부둣가 선착장으로
내려가시는 사진입니다.
매우 희귀한 사진입니다.
(양옆의 가옥은 일본식 그대로입니다.) 62년도.
도동항에 내려서 울릉도민 대표자들과
악수하고 있는 사진들입니다.
박대통령은 국토수호의지를 이렇듯
국토의 막내인 울릉도에서부터
시작하신 그런 분입니다.
★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
이승만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대승적 견지에서의
가장 큰 역사적 업적은 바로 한국을 해양세력의
일원으로서 편입시킨 것으로 봐야 한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징과 또한 그 역사적 질곡의
원인을 표현하는 말로 가장 적절한 말이 있다.
바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교차점"이라는 것이다.
기상학적으로도 대륙의 기단과
해양의 기단이 맞부딪히는
언저리에선 항상 온난전선 내지는 한냉전선을
형성하면서 변화무쌍한 기상변화를 보인다.
이와같은 변화무쌍한 기상변화의 한가운데에
한반도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이듯이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도 같은 운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를 가만히 반추하여 보면
우리가 해양세력일때 우리는 매우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기상과 함께 나라를
발전시켰음을 찾아 볼 수 있다.
★ 먼저 삼국시대의 예를 살펴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의 정복왕인
광개토대제의 경우도 실상은 그 확장의
핵심은 바로 해군력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흔히 고구려하면 육군위주의 군대를 운영하고
또 그것으로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광개토대제가 직접 지휘한 해군력이
승패의 결정적 승인이었다.
백제의 한성 위례성을 공격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케 한 전투에서도 고구려의 광개토대제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수군으로 백제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백제의 위례성을 함락시켰던 것이다.
전술적으로 보면 아차산인근에 주둔한 고구려 군은
백제의 주력을 그곳으로 유인하여 묶어두고 고구려
수군이 백제의 무방비 상태의 후방을
침으로써 전형적인 양동작전이자 성동격서의
전술을 행사함으로써 백제를 굴복시켰던 것이다.
또한 광개토 대제가 지금의 북경을 공격할 때도 수군이
매우 유용하게 운영함으로써 당시 중국인에게는
광개토대제가 신출귀몰하는 기동의 명장으로
각인시켜 주었다.
이렇듯 고구려도 확장의 배경엔 강력한
해상세력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고구려보다 앞서 4세기 무렵 산동반도와
일본의 구주까지 아우르는 대 제국을 건설한 배경도
바로 강력한 해상세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라가 백제를 물리친 결정적 계기는
바로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를 지원하러 온 왜의
수군 400여척을 물리침으로써 가능하였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300여년간의 영화는 바로
남해안 해상패권을 차지함으로써
가능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로 그것이다 !
통일신라야 말로 우리 역사상 가장 해상패권을
유지하고 활발히 이용한 국가이다.
★ 두번째 고려를 보자
고려 왕건은 개성의 해상세력이었다,
통일신라시대 말기 개성을 근거지로한
해상무역세력이자 개성 호족이었다.
이런 해상세력을 배경으로 고려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과 쟁패를 겨룰때 지금의 나주지역을
해군력으로써 확보함에 견훤의 배후를 견제하면서
결국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도 고려의 건국도 해양세력의
뒷받침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 고려가 주자학이 들어오면서 그리고 과거제도에
의한 인재등용으로 문약에 빠짐으로서 국방의 약화를
초래하였고 대륙세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는 결국 몽고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려는 근본적으로는 해양세력으로
출발하고 해양무역으로 성장한 국가이다.
그 후 한반도에서 해양세력의 맥은
끊어지다 시피 하엿다.
조선시대엔 아예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기피하였다.
양반문화의 나약함과 이중성은 진취적
기상을 송두리째 흔들고 말았다.
그나마 태종때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으나 근본적으로 조선은 고려와는
달리 출발부터 대륙세력에 의지한
대륙세력에 포함된 국가로 출발하였다.
조선은 유교라는 굴레에 속박되어 매우 페쇄적이고
또한 유교적 문약에 빠져서 세차례의 일본 침략에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현재는 속칭 민주화라는 이념이 조선시대의
페쇄주의적 유교를 대체하고 있다.
또한 세계사도 보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끊임없는 쟁패속에 흘러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고대 페르시아 전쟁도 대륙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페르시아와 해양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와의
전쟁이었고 영국과 나폴레옹과의 전쟁역시 마찬가지로
해석되며 최근 양차 대전 역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과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이런 최근의 역사적 과정도 한반도를
그냥 비켜가지 않았다.
바로 한국전쟁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접전인 것이다.
한국전쟁 후 한국은 해양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일본과 군사 외교 그리고 경제적 동맹과
협조를 통하여 유래없는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또한 한국인의 많은 해외 진출을 이루었다.
냉전체제도 어찌보면 소련으로 대별되는
대륙세력과 미국으로 대별되는 해양세력의
대결이었다고 볼 수 있고 현재 부상하고 있는
중국은 소련을 잇는 대표적인
대륙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간 우리는 50여년간에 걸쳐서
해양세력의 신흥공업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간 우리 성공의 바탕이던
해양세력을 벗어나 스스로 대륙세력권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보면 대륙세력일때 보다는
해양세력일때 도다 더 자주적인 국가를 이루고
성장과 함께 안정적 국가를 이루었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지금 다시한번
반추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 Once There Was A Love - Jose Felic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