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 ~ 1618)은 말년(末年)에 망우리에 동강정사라는 별서(別墅)를 짓고 살았다.
백사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의 피난길을 수행하기도 하며 주요 관직(官職)을 거쳐 영의정(1600 ~ 1604)까지 올랐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 즉위(卽位) 후 다시 좌의정(左議政)으로 출사하였으나,
1614년(광해군 6) 1월 대북의 마음에 안드는 인재(人才)들을 천거(薦擧)했다는 대북파(大北派)의 공격(攻擊)을 받고 물러나야 했다. 실제 권력은 대북에서 쥐고 있었으니 조용히 물러남이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었다.
고향인 포천(抱川)으로 내려가지 않고 불암산(佛巖山) 아래 갈대 무성한 노원(蘆原)에서 2년 가까이 머물다가 1616년 망우리에 동강정사를 짖고사니 동강노인이라 불렸다고 한다.
동강(東岡)은 ‘동쪽의 언덕’, 즉 한양(漢陽) 동쪽의 언덕 즉, 망우리를 가리킨다.
정사(精舍)라는 말은 정신(精神)을 수양(修養)하는 곳이란 뜻이다.
동강(東岡)이란 말은 후한서(後漢書)에 나온 말로, 안제(安帝.孝殤皇帝.105년 ~ 106년) 때 누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있자 친지(親知)가 그에게 이르기를 “무엇 때문에 그대만이 동쪽 산등성이의 언덕을 지키려 하느냐?”라고 한 것에서 유래하여 선비의 은거(隱居)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사의 위치(位置)가 어디일까?
백사의 증손인 양와공 이세귀(李世龜. 1646.인조 24 ~ 1700.숙종 26)는 그의 문집 『양와집(養窩集)』의 「동강정사도발(東岡精舍圖跋)」에서 동강정사를 그림으로 그려 정사는 사라지더라도 그 땅과 모습이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였다.
동강은 정자 앞쪽의 높은 봉우리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데 동강정사의 위치는 이렇게 적혀있다.
“동강정사는…망우리 고개 한 자락이 날 듯 춤추며 남으로 무임강(無任江)을 향하여 5리 가다가 두 개의 못이 보이는 곳에서 지세가 끝이 난다. 정사는 그 위 북쪽에 걸터앉아 남향(南向)으로 되어있다. 정사 동쪽에 다시 안채 일곱칸을 지었다. 그 서남쪽에 샘이 있는데 물맛이 달다. 남쪽 아래로 두 못이 바라보인다.”(『조선의 문화공간 3』, 이종묵)
백사의 제자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충무공)은 백사의 유배(流配)부터 장례(葬禮)까지의 일기(日記) 『북천일록(北遷日錄)』을 남겼는데, 그 책에서 정사의 위치를 ‘도성(都城) 동쪽 25리’라고 하였으니 대략 따져보면 지금의 망우리가 맞는 것 같다. 또한 위의 글에서 물맛이 달다고 하였는데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마시고 칭찬(稱讚)했다는 ‘양원리(良源里.현 망우리) 우물’처럼 이 지역(地域)의 물이 좋았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그런데, 남양주 미음나루(無任江)는 본래 미음나루는 한자로 독진(禿津)이라고 적었는데, 이황(退溪 李滉)이 이를 몰라 우리말 지명(地名)을 듣고 임의로 무임포(無任浦)『퇴계집(退溪集)』라 표기한 것이라는 설(說)도 있다. 현재는 왕숙천 하류(王宿川 下流)라는 설이 있고, 남쪽으로 못이 두 개 보인다고 하였으니, 장자못(구리시 수택3동)이 보이는 구리(九里)쪽의 가능성이 있다.
지금 망우리 고개 넘어 교문리(白橋里)에 있는 서예가 김규진(書藝家 金奎鎭)의 과수원을 유족(遺族)은 ‘망우리 과수원(果樹園)’이라 불렀고, 방정환(方定煥, 1899 ~ 1931)의 묘(墓)도 옛날 기사(記事)에 ‘망우리 아차산(峨嵯山)’에 있다고 하였듯 옛날의 망우리(忘憂里)는 고개 너머 구리까지 전부 포괄한 지명이었다.
정사의 정확한 위치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백사는 1617년(광해군 9년) 11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廢位)에 관해 반대 상소를 올려 삼사(三司)의 탄핵(彈劾)을 받고 평북(平北) 창성(昌城)으로 유배(流配)가 결정되었다.
12월 22일 공식적(公式的)인 어명(御命)을 받들기 위해 청파촌(靑坡村)의 하인집으로 떠나가는 길에 망우령(忘憂嶺)을 지나며 아래의 시(詩)를 지었다.
獰風難透鐵心肝 / 영풍난투철심간 / 모진 바람도 철석같은 마음 뚫기 어려우니
不怕西關萬疊山 / 불파서관만첩산 / 서관 땅 만 겹의 뫼도 두렵지 않도다
歇馬震巖千丈嶺 / 헐마진암천장령 / 동쪽 바위 천 길 고개에 말을 세우고
夕陽回望穆陵寒 / 석양회망목릉한 / 석양에 돌아보매 목릉이 쓸쓸하도다
목릉(穆陵)은 선조(宣祖)의 능인데 당시(當時)는 지금 경릉(慶陵)의 위치(位置)에 있었다.
유배지는 다시 몇 차례 변경(變更)되어 북청(北靑)으로 결정(決定)되었고, 제자인 정충신(鄭忠信)이 백사(白沙)를 따라갔다.
6월 13일 이미 중풍(中風)까지 앓았던 백사는 유배지에서 중풍이 도져서 고생 끝에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下直)하였다.
광해군은 뒤늦게 자신의 처사(處事)를 뉘우치며 백사의 관작(官爵)을 회복(回復)시키고 예장(禮葬)을 명하였다.
정충신은 손수 염습(殮襲)을 하고 영구(靈柩)를 모셔 7월 12일에 포천(抱川) 선산(先山)에 도착하여 18일에는 양주(楊州)땅으로 일꾼 4명을 보내 석회(石灰)를 떠 왔고, 8월 4일에 하관(壙中)하여 오후 4시경에 장례(葬禮)를 마치고 초우제를 지냈으며, 상주(喪主)는 고인(故人)의 뜻을 헤아려 신주(神主)를 동강정사에 모셨다고 한다(반혼.返魂). 정충신은 마음으로 삼년상(三年喪)의 예(禮)를 갖췄고 스승의 기일(忌日)과 명절(名節) 때마다 유족(遺族)의 집을 찾아와 참례(參禮)하였다.
한편, 김윤경은 《동광40호(1933.01.23.)》에서 정충신이 동강정사에서 삼년상(三年喪)을 지냈다고 기록했다.
조선조(朝鮮朝) 한문학(漢文學) 4대가(大家) 중 한 사람인 계곡 장유
(溪谷張維, 1587∼1638)의 작품 ‘고 백사의 동강 별장에 들러
(過故白沙相公東岡別墅)’ 인용한다.
平泉花石半荒凉 / 평천화석반황량 / 반쯤 황량해진 평천장 석상
劍履空留舊影堂 / 검리공유구영당 / 검리만 덩그러니 옛 사당에 남았네
華屋山丘千古恨 / 화옥산구천고한 / 천고의 한이로다 화옥산구여
夕陽揮淚過東岡 / 석양휘루과동강 / 석양에 눈물 뿌리며 동강 지나네
♣ 평천장(平泉莊) : 당(唐) 나라 때의 명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이다
♣ 검리(劍履) : 조복(朝服) 등 유물을 말한다.
♣ 화옥산구(華屋山丘) : 흥망성쇠와 인생의 무상함을 뜻하는 말이다.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고전문학을 연구한다. 서울대학교에서 「해동강서시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를 지냈다. 선비의 운치 있는 삶을 사랑하여 한국의 옛 글을 읽고 그 자취를 찾아다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 정충신(鄭忠信). 1576년(선조 9) ∼ 1636년(인조 14) : 본관은 錦城. 정세유(鄭世裕의 12세손), 자는 가행(可行), 호 만운(晩雲)이다. 임진왜란 때 활약으로 선조(宣祖)가 면천(免賤)을 시켜줬다. 이항복의 눈에 들어 공부하고, 무과 급제해 광해군 때는 여진족(女眞族)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한편 인조(仁祖) 때는 부원수(副元帥)로 이괄(李适)의 난(亂)을 진압(鎭壓)해 1등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올랐다. 후금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국방 및 외교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포도대장(捕盜大將.정2품)·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종2품)· 전부대장(前部大將).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이다.
♣ 미음나루 : 현재 왕숙천이 끝나 한강과 만나는 곳에서 부터 팔당역까지.
♣ 양원마을은 '동래 정(鄭)씨'가 모여 살던 마을에서 유래되었고, 현재의 서울시 중랑구 송곡여고 위쪽에 있던 마을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맛있게 먹던 우물 ‘양원수(良源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성계가 자신이 사후에 묻힐 건원릉 자리를 정하고 돌아 오다가 망우리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그때 이곳에 있는 우물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물의 물맛이 일품이라 '물맛이 매우 좋다'는 뜻으로 '양원수(良源水)'라고 우물 이름을 지어준 것에서 '양원마을'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양원마을 앞의 길은 조선시대 왕들이 동구릉으로 행차하는 통행로로 지금의 북부간선도로라고 합니다. 현 망우리고개는 근대에 만들어진 길이라는 말이 됩니다.
♣ 계곡 장유: 1627년(인조 5) 1월 19일 정묘호란(丁卯胡亂) 당시 인조(仁祖)의 강도파천교서(江都播遷敎書.강화도 도피교서) 작성을 했다.
첫댓글 백사공의 후손들은 도대체 어떤 사상으로 대를 이어 왔는지 ~??
부친의 조부의 증조부의 고조부의 그 아득하지도 않은 댓수인데
어쩌다 동강정사를 잃어 버리고 말았는지~~??
이조 말기까지 아니 현재 까지도 선조의 후광이 줄기차게 미치거늘
선조의 위업은 몽땅 잃어 버리고 후광만 즐기는 거낭 ~~??
야속타 야속타 하더라도 무덤은 작아지고 풀은 욱은 오늘 날에도
당신살 당신 정신이 이어지고는 있는건지~??
모르리 모르리 모를 일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