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는 전승희 회장의 비서실에 절뚝거리고 출근하면서 회사의 공기와 생리를 익히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습득했다. 내 상처는 놀랍도록 빨리 회복되었다. 신은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게 때로는 시련을 안겨 주지만, 그 시련을 극복한 사람을 버리지 않는가 보다. 나는 누나 같은 전승희 회장의 보살핌과 동료 비서들의 인간애로, 퇴원한 지 한 달 만에 목발을 버리고 두 다리로 출근했다.
전승희 회장은 부당하게 이권에 개입하거나 부패 권력과 손잡지 않고 건전하게 사업을 경영하려고 노력했다. 탈세도 하지 않고 비겁하게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적들이 회사를 먹으려고 싸움을 걸어올 때. 그때는 법보다도 주먹이 우세했다. 나는 아직 주먹을 쓸 만큼 회복되진 않았으나 구경만 할 수 없어서, 우리 패가 불리할 때 함께 몸을 던져 싸웠다. 내 주먹은 건재했다. 주먹으론 보스들도 두려워했던 나다. 신처럼 휘두르는 주먹과 발치기에 적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싸움 현장에는 항상 회장이 있었다. 회장도 최후에는 싸움꾼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이 조직의 생리였다. 나는 회장의 주먹솜씨를 보고 싶었으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회장의 주먹이 필요없게 내가 몸을 아끼지 않고 적들을 다 막아 냈으니.
우리 조직은 강하고 숫적으로 우세하며 비굴하지 않았다. 비굴하지 않다는 건 배신자가 없다는 뜻이다. 잔인할 때와 유순할 때를 구분해서 싸웠다. 흉기를 유효적절히 활용했다. 흉기는 살인 용도가 아니라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서 써라. 그것이 회장의 당부였다. 내가 입사한 후로 우리 조직은 한 번도 패주한 적이 없었다.
경찰에 끌려가도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모두 풀려나왔다. 싸움은 돈 때문이었다. 공개 입찰에서 수주를 낙찰받을 때 비리가 개입되기 마련이었다. 회사들끼리 가격을 담합하여 낙찰자를 결정하고 낙찰받은 이익금을 나눠 먹었다. 명의만 한 회사로 하고 실제 공사와 제품을 담합 회사들이 분배하기도 했다. 그 맛을 알고 어중이떠중이 모여드니 부실 공사, 불량 물품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전승희 회장은 담합에 참여하지 않고 정상적인 방법을 고수하기 때문에 적들의 미움을 샀다. 전승희 회장은 파격적인 저가로 금액을 써 내서 큰 공사에 낙찰을 받았다. 라이벌 회사에서는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보복을 했다. 회사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고 사원들을 구타했다. 회장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다. 그걸 막기 위해 주먹이 필요했다.
라이벌 회사(조직)와 패싸움이 일어날 때 회장은 뒤편에서 그 싸움을 구경했다. 회장은 나를 신임했다. 지칠 줄 모르는 내 주먹 실력을 보고 회장은 “살려 준 목숨값을 한다”는 칭찬을 부하들과 주고받았다. 회장은 피를 흘리는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약을 발라 주고 찜질을 해 주었다.
“남편이 왜 내 말을 듣지 않고 폭력에 모든 걸 걸었는지 알 것 같아. 라이벌 회사와 폭력에서 지면 우리 영역을 빼앗기고 굽실거리게 되지. 우리 회사는 라이벌 회사의 지점으로 전락하게 되는 거야. 우리가 펼쳤던 아름다운 장미빛 계획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지. 이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란 걸 알아. 그러나 이겨야 하잖아?”
“회장님, 싸우지 않고 기업에만 전념하며 살아갈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가 하는 사업이 싸우지 않고는 안 되는 사업인 걸. 폭력배들이 침을 흘리는 사업이라서 말이야. 너도나도 먹으려고 으르렁거리고 달려들지.”
“외람된 말씀 같지만 조직을 해체하고 순수 기업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합리화될 수 없으니까요.”
“개들이 사방에서 날 물어뜯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공자 행세를 할 수 있어? 나도 순표 씨와 같은 생각이야. 생각과 현실은 달라.”
“싸움은 싸움을 부르고 피는 피를 부르는 악순환이 언제까지나 되풀이될 것 같기에 하는 말입니다.”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나도 그 때문에 고민 중이네. 나도 이제 그만 이 몸서리치는 세계에서 떠나고 싶다니까. 내 나이 아직 젊으니까 순표 같은 핸섬보이 만나 살림을 차리고픈 욕망도 있어. 농담이 아냐. 우리 애들만 성장하면, 사업에서 손떼고 내 인생을 살고 싶단 말이야. 복수고 나발이고 태양 저 편으로 날려 보내고 싶어.”
8
다친 곳이 사타구니였다. 적들이 휘두른 파이프가 남성의 심벌을 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회장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곳을 건드릴 때 아픔보다 상쾌한 전율을 느꼈다. 계선이 생각났다. 계선의 따스한 손길이.
“그렇게 몸을 사리지 마. 약을 바를 수 없잖아? 하마터면 이게 달아나서 남자 구실을 못할 뻔했군. 이걸 본 지도 오랜만이야. 내가 방금전에 한 농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마. 순표 고통 덜어 주려고 한 소리니까. 핸섬보이 만나 살림 차리고 싶다고 한 말……”
회장은 에로틱한 농담도 곧잘 했다.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다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치료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회장은 다른 부하들에게 베풀지 않은 선심을 내게만 특별히 베풀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이런 경우는 예외란 걸.
전에 수술했던 상처가 도로 터져서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회장은 의사 이상으로 상처 치료에 익숙했다. 폭력배 왕초 부인으로, 보스로 살아가려니 부하들이 다치면 치료하는 법도 배웠을 게다. 회장이 약을 바르고 쓰다듬어 주니까 신통하게 통증이 가라앉았다. 정말 좋은 약이었다.
“여간해선 내 부하를 내 집에 데리고 오진 않아. 자넨 특별 대우야.”
회장은 내 불기를 툭툭 치고 웃었다. 회장이 손수 차려 주는 밥을 먹고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두 자녀는 학교에서 오지 않았고 집 안엔 회장과 가정부만 있었다. 아파트는 그리 크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사업에 머리 쓰고 적들과 싸우느라고 화려 아파트는 생각도 못한다고 했다. 외로운 여류 사업가. 고독한 암흑가의 보스. 그녀는 결국 혼자 세상 파도를 헤쳐나가는 선박이었다.
회장이 홍차를 가지고 와서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회장은 치마를 모으고 내 앞 소파에 앉았다. 얌전히 차를 마시는 모습은 거칠은 사업가가 아니고 한 가정의 여인,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래? 자네가 잘 방은 있어.”
“돌아가겠습니다.”
“그 몸으로 갈 수 있어?”
“아무렇지 않습니다.”
“이젠 싸움에 자네가 나서지 마. 이러다 죽도록 상처만 치료하다 죽겠다.”
“제가 나이 어리니까 선봉장이 돼야죠.”
“자네가 행동대장으로 나가면 내 마음이 든든하지만, 날마다 상처난 그 얼굴을 보면 속이 쓰려서 그래. 생긴 건 귀공차처럼 곱게 생겨 가지고. 어머니가 아시면 얼마나 화나실까? 지난달 월급 타서 어머니에게 보냈어?”
“예.”
“효자군.”
“천하의 불효자지요. 회장님,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회장에게 인사하고 일어섰다.
“영추가 얻어 준 아파트는 살 만한가? 불편한 점 있으면 말해.”
“너무 좋습니다. 행복합니다.”
“상처를 입혀서 미안하다.”
회장은 두 팔로 나를 포옹해 주었다. 내 호주머니로 회장의 손이 들어왔다. 호주머니가 두둑했다. 돈이었다.
“돈이라고 생각하지 마. 애인이 있다던데, 포기하지 말고 사랑해 줘. 절대 포기하면 안 돼. 여자는 여자인 거야. 남자에게 책임 있다구.”
9
회장의 말은 따스하던 계선의 품속을 못 견디게 그립게 했다. 나는 회장 아파트에서 나오면서 핸드폰으로 계선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가고 계선은 한참 후에야 힘없이 전화를 받았다. 내 목소리를 듣고 계선은 뛸 듯이 좋아했다.
“정말 자기야? 자기가 살아 있었어? 어머머, 어머머, 이게 꿈이야 생시야?”
“잘 있었어?”
“나야 잘 있지. 고생 많았지? 거긴 어디야? 찻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병원은 아닌 것 같고, 혹시 공동묘지? 설마 유령은 아니겠지? 나 계속 자기 꿈만 꿔서 실감이 안 나. 만나고 싶어.”
“유령도 아니고 공동묘지에 오지도 않았다. 좋은 분들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지. 행복하니?”
“행복?”
계선은 침묵하며 울먹거렸다. 핸드폰에서 훌쩍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유태호 회장의 집에 있다는 걸 다 안다. 한마디만 묻자. 우리가 만났던 세운상가 기억하니?”
“응.”
“한마디만 더. 네가 준 이 개인형도 기억하겠구나.”
개인형이 “아이 러브 유! 아이 러브 유!”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걸 왜 기억 못하겠어?”
계선은 원망 섞인 투로 반문했다.
“그럼 됐다.”
“끊지 마!”
계선이 전화기 속에서 소리쳤다. 나는 그 소리가 너무 큰 데 깜짝 놀랐다.
“거기 어디야? 달려갈 테야. 확인하고 싶어. 순표가 유령이 아니란 걸 확인하겠단 말이야.”
“속없는 소리 작작하고, 다시는 만나지도 말고 날 생각하지도 마라.”
나는 차마 핸드폰 뚜껑을 닫지 못했다. “순표 씨! 순표 씨!” 애절한 흐느낌이 들렸다. 나는 시내버스 승강장에 서 있었다. 시내버스들이 줄지어 멎었다 떠나갔다. ‘세운상가’란 행선표지가 보였다.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세운상가에 가서 내렸다. 세운상가 인도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에서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나는 비를 피해 상가 밑으로 달려 들어갔다. 가로등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내 그림자가 비에 젖고 있었다. 그곳은 내가 차에 치어 죽었던 자리였다. 나는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얀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와 인도 옆에 멈춰 섰다. 차문이 열리고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나왔다. 계선이었다. 차 지붕 위로 빗물이 튀어 계선의 얼굴로 빗줄기와 함께 흘러내렸다. 운전석의 와이퍼는 저 혼자 반복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상가 밑에서 나와 인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계선의 얼굴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에서 흐르는 빗물에 가로등 불빛이 반사되어 그녀를 더 처량하게 보이게 했다. 윈피스는 금방 빗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계선과 나의 거리는 일 미터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나는 다음 동작을 어떻게 취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계선이 내 가슴으로 확 달려들었다. 미친 듯이 입술을 빨며 몸을 비벼댔다. 나는 힘껏 그녀를 끌어당겼다. 너무 쉽게 빨려들 듯 내게로 밀려들어왔다. 몸 전체가 물처럼 스며들어왔다.
“회장이 알면 어쩌려고 여기에 왔어?”
“난 두렵지 않아. 죽음을 각오한지 오래야. 자기도 죽었다 살아났잖아?”
“자식, 겁도 없긴!”
나는 그녀의 젖은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우산 쓴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그녀와 나는 함께 승용차에 탔다. 나는 운전하는 계선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몸을 애무했다.
승용차는 값싼 모텔들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내가 첫정을 불태웠던 곳이었다. 모텔에 들어가서 그녀와 나는 굶주린 야수들처럼 행위를 했다. 짜릿한 쾌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계선은 나와 마찬가지로 짧계 끝내기를 좋아했다. 서로의 몸에 익숙한 우리는 상대의 호흡과 눈빛으로 기쁨의 크기를 읽었다. 그녀는 만족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어머, 어디서 이렇게 다쳤어요? 금방 다친 상처인데.”
계선은 내 등에 난 상처를 보고 놀랐다. 적들이 휘두른 파이프에 맞은 자리라고 했더니 계선은 눈물을 짰다.
“상처를 한두 번 봤냐? 새삼스럽게 울기는.”
“이렇게 아픈 사람을 나 좋다고 물고 뜯은 나도 바보야. 내가 미워서 그래.”
나는 회장 집에서 치료받은 얘기는 하지 않았다. 혹시 다른 여자 좋아한다고 계선이 오해할지 몰라서였다.
10
자락자락 내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유리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창문으로 비바람이 날아 들어와서 더운 몸을 식혀 주었다. 계선의 몸은 아직도 뜨거웠다. 나는 이 열기가 식기 전에 헤어지고 싶었다. 그녀를 빨리 보내 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나는 계선이 행복하기를 빌었다. 내 의지와는 달리 내 혀는 궂은 언어들을 쏟아냈다.
“유태호와 재미 좋았어?”
“그걸 말이라고 해?”
“넌 내가 처음이 아니었잖아? 내가 죽은 줄 알고 태호의 품으로 달려간 걸 보면 믿을 수 없는 여자야.”
“그래. 난 그런 여자니까 믿지 마. 그러나 하늘에 맹세코 난 자기만 생각했어. 하느님에게 물어 봐. 뭐라고 대답하시는가?”
“하느님이 어디 있어?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우릴 이렇게 만들어 놨겠어?”
“난 이것도 행복해. 난 자기가 죽은 줄 알았어. 뺑소니차에 치어 병원 영안실로 갔단 말을 듣고 달려가려 했지만 유태호가 말렸어. 그 순간은 얼이 빠져서 유태호가 당신을 죽인 줄은 몰랐단 말이야.”
“왜 유태호의 말을 믿었지? 영안실에 가서 내 시체를 확인했어야지. 죽은 시체라도 눈으로 확인하는 게 애인의 도리가 아닌가?”
“영안실로 가려고 했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왕초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왕초가 순표를 차에 치어 죽이고 그 시체를 영안실에 갖다 놨을 거라고. 그런 예감이 뇌리를 스치더라고. 나는 영안실로 가는 걸 포기했지. 순표의 죽음을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어.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걸 믿고 싶었어. 꿈속에서도, 생시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어. 내 영감이 맞았던 거야. 내 영감은 항상 긍정 쪽으로 기울거든. 우리는 앞으로 잘 살 거야.”
“꿈도 좋다.”
“두고 봐요. 내 말이 맞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가 죽으면 그 말을 묘비명에 새겨 달라고 할까?”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래?”
“왕초의 가슴에 안겨 쾌락에 몸을 떨면서 생각한 말이겠지. 왕초의 집에서 한 발자국만 걸어나오면 죽는다는 걸 몰라? 넌 지금 무덤을 파고 있는 거야.”
“난 유태호 무섭지 않아. 당신이 내 곁에 있으니까.”
“왕초를 네 손으로 죽일 수 있어?”
“명령만 내려. 난 자기 명령대로 할 거야.”
“좋아, 유태호를 죽여라. 그럼 네 마음을 믿으마.”
나는 호주머니에서 준비한 독약을 꺼내 주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 행동을 믿지 않고 있었다. 계선의 표정은 담담했다. 계선은 내가 준 독약을 소중히 핸드백에 담았다. 그녀의 표정은 의기양양하고 미소까지 피어올랐다. 그 미소 속에는 사랑의 슬픔에 대한 냉소도 있었다. 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어리석은 짓인가를 깨달았다. 나는 계선에게 해서는 안 될 짓, 그녀를 죽음의 함정으로 몰아넣는 비겁한 짓을 했던 것이다.
그녀와 나는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미궁 속에서 한 번 더 사랑의 불길을 지피려고 했지만, 싸늘히 식은 육체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계선은 항상 너그럽고 긍정적인 자세로 내 이기심을 포용하려고 했지만 내가 내 독선을 용서하지 않았다. 나는 내 행동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그녀의 핸드백에 들어간 독약을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와 나는 모텔에서 나와 우산을 쓰고 주차장까지 걸었다. 승용차 안에서 열열히 키스를 나누었다. 키스를 하면서도 내 마음은 초조했다. 어디선가 유태호의 부하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둠 속을 훑어봐도 감시자는 없었다.
“내가 너무 했지? 난 네 마음을 알고 싶었던 거야. 그 약은 버려라. 버려야 해 꼭.”
“알았어.”
“알았다고 하지 말고 당장 쓰레기통에 버려. 부탁한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집이 어디야?”
“여기서 헤어지자. 내 집은 알 필요 없다.”
“자기 집이 내 집이잖아? 보고 싶으면 찾아갈 테야.”
“왕초한데 죽으려고……”
“그놈의 죽음, 죽음. 한 번 죽어 봐 놓고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해?”
“잘 가라. 빠이빠이.”
나는 승용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었다. 계선은 내가 유령이 아님을 확인하듯 몇 번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얀 승용차는 어둠이 짙게 덮인 빗속으로 멀어졌다. 다시는 계선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계선아!”하고 부르짖으며 승용차 뒤를 쫓아갔다. 계선의 승용차는 멈출 듯하더니 멈추지 않았다.
11
나는 아파트에 돌아와서 독약이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밤중에 핸드폰을 하면 유태호가 눈치챌까 봐 전화도 하지 못했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아침에 회사에 출근했다. 회장은 몸이 좀 나았느냐고 누나처럼 포근히 물었다. 그 약이 좋았던지 통증이 씻은 듯이 나았다. 어젯밤은 적들과 싸우고 회장의 아파트에서 호강하고 계선을 만난 숨가쁜 밤이었다. 숨가쁜 시간 속에서 평화가 있었다. 회장의 집에 간 것도, 계선과 모텔에서 정사를 한 것도 평화였다. 평화는 꿈. 꿈은 허무하다.
회장이 비서들에게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어제의 싸움에서 터지고 멍든 모습으로 승리의 자축연을 하려는 것이었다. 회장이 내는 점심도 흥미가 없었다. 뇌리엔 계선의 영상으로 꽉 차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핸드폰으로 계선에게 전화했다. 계선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계선은 간밤에 혼자 잤다고 했다. 유태호가 그녀의 외출을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버렸니?”
“뭘?”
“그 독약!”
“난 또 뭐라고. 내가 자기를 배신했냐고 물은 줄 알았단 말이야.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날 어린애 취급하지 마.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알아?”
“스물 다섯 살이지.”
“내가 그렇게 젊었나? 휴, 많이도 살았다. 겁나게 많이 살았어. 스물 다섯 해 동안 내가 한 일이 뭘까? 아, 있다! 설순표 씨를 사랑했구나. 하하하, 호호호.”
“농담할 때가 아니다. 지금 당장 쓰레기통에 버려라. 내 마음 괴롭게 하지 말고.”
“뭐가 그렇게 괴로우실까? 우린 곧 결혼할 텐데. 겁쟁이, 겁쟁이 아저씨!”
“왕초한테 잘 보여야 해. 생명을 오래 부지하려면. 내 말 알았지?”
“내가 왕초 품에서 히히덕거리는 게 그렇게 좋아?”
“넌 그럴 여자가 아니니까 하는 소리야.”
“여자 마음도 모르는 사람. 당신이 뭘 안다고.”
“전화 끊는다. 행복해라.”
나는 핸드폰을 닫았다. 계선이 그 독약을 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계선은 그 독약으로 정말 유태호를 독살할 계획을 세웠던가 보다. 내가 세 번째 전화한 날 계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유태호와 함께 있을 거란 추측을 했다.
계선은 유태호와 함께 샤워를 하고 행위를 했다. 행위가 끝나고 왕초는 물을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왕초는 탁자 위로 손을 뻗혀 물컵을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음?”하고 물 색깔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 물은 보통 물 빛깔과 똑같았으나 왕초는 물이 탁하다고 트집을 부렸다.
“네가 마셔 봐라.”
왕초는 물컵을 계선의 입에 대 주었다. 계선은 뜨끔해서 알몸으로 벌떡 일어났다. 왕초의 목을 두 팔로 껴안으며 아양을 떨었다.
“먹기 싫은 물을 어떻게 먹어요? 마시기 싫으면 그만두세요. 괜히 나한테 억지로 먹이려 하지 마시고.”
“어서 마셔 봐.”
“싫어요.”
“마시라니까!”
왕초가 꽥 고함을 질렀다. 쾌락에 끙끙대던 잠시전의 유태호가 아니었다. 그는 무서운 야수로 변해 있었다. 계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공포의 빛이 역력했다.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계선은 화류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여우였다.
12
왕초는 무서운 얼굴로 물컵을 계선의 입술에 찧어댔다. 계선은 물컵을 두 손으로 받아 한 모금 들이킨 후 왕초의 얼굴에 “푸!”하고 뿜어냈다. 그리고 깔깔깔 웃었다.
“이년이 날 속여?”
왕초는 계선의 뺨을 갈겼다. 계선의 손에 든 물컵을 빼앗아 계선의 입에 쏟아 부으려고 했다. 계선은 안 마시려고 반항했다.
“이 물에 독약을 탔지? 그렇지?”
계선은 태연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계선은 유태호가 들어오기 전에 그 물에 독약을 탔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계선의 실수였다. 왕초는 침대 밑에 감춰 둔 소형 녹음기를 꺼내어 켰다. 계선과 순표가 전화로 주고받은 대화가 흘러나왔다. 전승희 회장 집에서 나올 때 통화한 내용부터 다 녹음되어 있었다. 왕초가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할 말 못할 말 다 한 두 연인이었다.
“하하하!”
계선은 유뱡을 하늘로 향한 채 소리내어 웃더니 녹음기를 왕초 얼굴에 던져 버렸다. 왕초는 재빨리 피했다. 왕초는 계선의 머리채를 잡고 구타했다. 물컵에 남은 물을 계선의 입에 쏟아부었다. 계선은 삼키지 않고 뱉아냈다. 왕초의 얼굴에서 몸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왕초는 먹이려고 하고 계선은 저항했다. 컵에는 물이 절반쯤 남아 있었다. 왕초는 저항하는 계선을 차고 때렸다.
“죽일 테다, 이년!”
왕초는 계선의 입을 벌리고 독약물을 억지로 먹였다. 계선이 반항하는 바람에 약물은 침대 위로 쏟아졌다. 계선은 문으로 달아났다. 왕초가 먼저 계선을 가로막았다. 왕초는 계선의 목을 졸랐다. 계선의 두 손이 힘없이 밑으로 내려갔다. 계선의 눈에 핸드백이 보였다. 핸드백은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계선은 손을 뻗혀 핸드백 안을 더듬었다. 권총이 손에 잡혔다.
왕초는 계선이 권총을 꺼내는 걸 보지 못했다. 계선은 권총의 총구를 왕초의 심장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렸다. 계선은 왕초의 급소에만 세 방을 쏘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계선은 왕초의 몸 위에 포개어져 있고 방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왕초는 눈을 뜬 채 죽어 있었다. 복도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 아파트는 복도식이었다.
계선은 침착하게 옷을 입었다. 왕초의 옷도 입혀 주었다. 탕탕탕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현관문이 잠겨 있어서 문을 부수기 전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계선은 경찰에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고 자수 전화를 했다. 그리고 순표에게 전화했다. 내가 회장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때였다. 전화를 받은 나는 계선의 말을 믿지 못했다.
“무슨 전화야?”
회장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비서들도 식사하다 말고 모두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들개란 별명처럼, 여간해선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까 이상한 모양이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분위기를 버리고 싶지 않아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나오니 밖은 깜깜했다.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차들의 불빛이 강물처럼 꼬리를 물고 흘러갔다. 계선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그녀는 내게 아파트 주소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왕초가 사 준 호화 아파트라고만 했다. 나는 계선이 왕초를 죽였단 게 믿어지지 않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은 눈물로 변했다. 내가 계선을 살인범으로 만든 것이었다.
계선에게선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내가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계선은 열어 줄 때 한없이 열어 줘도 닫으면 쉽게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독한 여자였다. 독한 여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 이놈의 세계에선.
나는 계선을 사랑한다. 앞으로 얼마를 더 기다리고 괴로워해야 할지 모르지만 내 사랑은 변함이 없다.
계선의 말대로 우리는 결혼할 것이다. 사랑엔 이승과 저승의 구분이 없다. 유태호는 죽어야 할 인간이지만 죽여도 내 손으로 죽여야 했다. 나는 엄청난 형벌을 계선에게 떠맡긴 꼴이었다. 나는 차들의 불빛을 받으며 끝없이 걸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을비였다. 그녀와 만났던 세운상가가 그리웠다. 세운상가에 가서 우리 사랑을 찾아야겠다. 우리의 첫정이 맺어진 그 자리. 거기에서 기다릴 테다.
호주머니 안에 잡히는 게 있었다. 까만 개인형이었다. 개인형이 “아이 러브 유! 아이 러브 유!”하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내가 걷는 이 길이 계선에게로 가는, 끝없는 사랑의 길이란 걸 나 혼자만의 가슴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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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설순표(28)……주인공 나, 왕초에게 배신당한다
홍계선(25)……순표의 애인
전승희(40)……조직폭력을 거느린 재벌 회장
유태호(45)……조직폭력배 왕초
영추(35)……전승희 회장의 심복 비서
비서들
의사
간호사들
환자들
(후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