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시냇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나는 다르네
푸른 하늘 아래 수 없는 들판 건너
마음의 물레방아를 돌리러
오늘도 흘러간 시냇물은 오네
때로는 가만히 속삭여
묻기도 하지, 너 웬 일로 돌아왔느냐?
…
- 심호택, 「흘러간 시냇물은」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통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흘러가버린 시냇물과 같은 것입니까?
고리타분하고 냄새나고 화석화된 골동품과 같은 모습으로만 전통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주름깊은 노인의 회상 속에 "장려한 낙일落日"로서만 전통은 기억될 것인가요?
여기 놀라운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전통이 우리의 현실 속에 펄펄 살아 숨쉬며, 현실의 물레방아를 힘차게 돌리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그 놀라운 사실을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포항공대의 이야기입니다.
포항공대의 이야기는 과학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방 소재 한 신설대학의 신화같은 웅비의 스토리가 아닙니다.
포항공대의 이야기는 전통이 우리시대의 현실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웅장한 메시지이며,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란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관한 살아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한 인물을 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초대 포항공대 총장 故 무은재 김호길 박사(1933~1994).
"지금으로부터 34년전 한국이라는 후진국에서 온 한 대학생이 권위와 전통을 뽐내는 영국 대학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대학 역사상 처음으로 2년반이라는 최단 기간에 박사학위를 받아내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이 낳은 전설의 핵물리학자 김호길!
끝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조국으로 돌아와 포항공대의 신화를 창조하고 세계에 몇대 밖에 안되는 방사광 가속기를 이 땅에 설치하고 홀연히 우리 곁으로 떠났다.
김호길 그는 누구인가." - 추념문집 표지의 글
무은재 김호길, 우리는 그를 단순히 과학자라고만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식견의 부족을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과학이란 세계와 관계하는 하나의 창문일 뿐입니다. 그의 존재 저 안 쪽 깊은 뿌리에는 우리의 그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퇴계, 그를 움직인 건 바로 퇴계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는 철이 들고부터 한 평생, 퇴계의 정신을 사모하면서 퇴계의 정신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포항공대가 바로 퇴계의 도산서원의 정신을 이은 것이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지방에 명문대학을 세움으로써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이룩한다는 포항공대의 설립취지도 선생의 서원운동과 일맥 통한다 하겠습니다."("퇴계학과 현대사회", 퇴계학논총 제1집,1995,91쪽)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남긴 수상집 "자연법칙은 신도 바꿀 수 없지요"(동인기획,1993)과 추념문집을 통해 그와 퇴계와의 인연을 그려볼 수가 있습니다.
경북 안동의 지례(임하댐에 수몰됨, 현 지례창작예술센터소재)라는 골짜기에서 태어난 고집센 개구장이 소년이 9살 때 도산에 사시던 퇴계 학통의 고모부댁에 맡겨지면서 그의 생애는 결정지어졌다고 합니다. 고모부 우석 이탁(1890~1972) 선생, 그 고모부댁의 집안과 도산이라는 분위기가 그때까지 지례라는 우물 안에서 자란 김호길 소년에게 크게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넓히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소년은 고모부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퇴계 선생을 이를테면 "큰바위얼굴"로 삼고 아침저녁으로 어린 정신을 가다듬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 어머니 말씀을 안들었던 망나니이며 자존심 강한 부랑아였던 내가 예의를 아는 소년이 된 것은 법가인(그만큼 가르침이 엄격했다는 뜻) 고모댁에서 4년을 보낸 덕택이다"
<김호길, 자연법칙은 신도 바꿀 수 없지요, 동인기획,1992, 26쪽>
무은재의 술회에 의하면 고모부 우석 이탁 선생은 그에게 가학인 퇴계학을 물려받기를 命하셨다고 하며("퇴계학과 현대사회", 퇴계학연구논총 제1집,1995,87쪽 참조), 역시 그는 과학의 길을 가면서도 자신의 전공인 물리학 뿐만 아니라 항상 퇴계의 문집을 책상머리에 둘 정도로 실천유학에 밝았고 또한 그것을 신념으로 교육에 몰입 했다고 합니다.
아아, 그러고보니 나다니엘 호오돈의 이야기가 어찌 미국의 소설에만 있는 이야기일까. 그가 바로 큰바위얼굴이었음을 불의의 사고로 그가 죽고 나서야 아는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퇴계의 정신을 안고서 대서양(영국)으로 태평양(미국)으로 넘나들면서, 그리고 최초로 한국 국적으로 구소련을 방문하기도 하면서(1969년, 당시 36세), 조국의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무공을 연마했다고 합니다.
오랜 해외 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가슴 속에는 한결같은 다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 언젠가는 기필코 돌아가리라. 아 언젠가는 조국에 돌아가 조국의 과학 발전과 전통문화를 위해 이 한 몸 바치리라.
추념문집의 한 대목을 통해 이 시절 김호길의 모습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김호길 박사는 남달리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 사람이기도 하다. 미국 체제 중에는 바쁜 일과의 틈을 내어 교포 2세들에게 한글과 한국 역사, 문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했다.
그는 무보수로 그 학교 교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재와 학용품 등을 그의 주머니를 털어 부담해나간 바 있다. 전후 20여년에 걸친 해외생활에는 몇번인가 김호길 박사가 국적을 바꾸어야 할 고비가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 연구,교육활동을 차질없이 해 나가기 위해서는 시민권을 갖는 것이 월등 편했다. 그럼에도 끝내 그는 한국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몸은 타국에 있어도 언젠가는 귀국하여 조국을 위해 일하리라는 그의 결심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호길박사추념문집간행위원회편, "과학도 인간이 하는 겁니다", 한국문연, 1995, 16쪽 >
재미과학기술자들의 모임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재미과학기술자 협회 초대 간사 젊은 김호길(1971년 당시 38세, 초대 회장 김순경 박사-부회장 이휘소 박사), 뒤에는 두차례나 재미과협회장을 맡아 재미학자들간의 화합과 고국과의 과학 기술 교류에 열정을 쏟았다는 김호길, 1983년 마침내 귀국해서는 어느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신기원을 이룩해내었습니다.
포항공대!
그런데 이제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의문에 부딪힙니다.
첫째, 왜 그는 기존의 명문대학이 즐비함에도 특히 자신의 모교 서울대학이 여전히 위세를 자랑하고 있음에도 새로운 대학을, 그것도 지방대학의 설립을 꿈꾸었을까. 그는 혹시 교육계의 헤게모니를 꿈꾼 것일까.
둘째, 왜 그는 퇴계를 인생의 사표로 삼고 있으면서도 퇴계와 직접 관련된 학문, 말하자면 인문학을 하지 않고 자연과학자의 길을 갔을까.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논의의 핵심이요,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모두는 그가 큰바위얼굴로 삼고 있던 퇴계의 생애와 사상에서 그리고 그러한 퇴계 정신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퇴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무은재 김호길의 생애와 정신 세계를 논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퇴계도 오늘로 말하자면 서울대학(성균관) 출신이었습니다. 나중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기도 했으니 서울대 총장 출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퇴계가 왜 풍기 군수 시절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사액을 소청하는 등 서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스스로도 예안 향리에다 계상서당,도산서당을 차리고 그것을 평생의 사업(퇴계는 스스로 "吾事"라고 표현)으로 자임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공직 은퇴 후 대학 총장으로 말년을 품위있게 유유자적하기 위해서였을까요?
퇴계는 16세기 시대의 몰락을 인간 정신의 문제로 파악했습니다. 그것이 理개념의 강조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철학을 理중심체계로 구축하면서 나아가 사회적 실천으로서 "교육"에다 큰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대학인 성균관의 학풍이 오늘날의 서울대학처럼 고시(과거) 위주의 세속적 가치관에 찌들어 정신의 창도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퇴계가 풍기 군수 시절 경상 감사에게 올린 글인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소청하는 글" 중에도 당시 성균관에 대한 퇴계의 문제의식을 시사하고 있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 국학(성균관)이나 향교는 중앙 또는 지방의 도시 성곽안에 있어서 한편으로 학령에 구애됨이 많고 한편에는 번화한 환경에 유혹되어 뜻을 바꾸게 하여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비교하여 본다면 어찌 그 공효를 서원과 같이 비할 수 있겠습니까?"(정순목, 퇴계평전, 59쪽)
이처럼 퇴계는 새로운 교육 이념을 표방하면서 한편으로는 서원교육운동을 펼치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향리에다 "도산서당"을 설립, 말년의 생애를 온통 투여하였던 것입니다. (참고;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건립된 것임)
무은재 김호길 역시 우리 시대의 미래는 오로지 교육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를 걸기에는 오늘의 서울대학이나 그 아류를 좇을 뿐인 세칭 명문대학의 현실은 그저 한탄스러울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무은재 김호길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하였던 이재수 포항공대 총장 보좌역의 다음과 같은 글을 한번 보기로 하겠습니다.
"김호길 박사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셨고, 포항공대 교수의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다. 이런 연고와 분위기 속에서도 그 분은 서울대 이야기만 나오면 곧잘 흥분하였다. 특히 서울대 교수와 기자들 앞에서는 더 그러했다. 서울대가 우리나라 교육과 학문 발전에 제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 포항공대가 그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나라와 서울대 발전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는 논리를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당당히 펼쳤다."("학장님,우리 학장님", 182쪽)
16세기 그 당시 퇴계의 문제의식은 그대로 우리시대 무은재 김호길의 문제의식이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퇴계의 생각이 혁신적이었듯 무은재 김호길도 오늘의 시대 상식을 뛰어넘는 혁명적 사고로 우리 시대의 문제의 본질에 직접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포항공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 당당한 행보입니다.
첫째, 재단과 학사 행정의 철저한 분리는 우리나라 사학이 지향해야 할 모범적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를 완벽히 보장해준 초대 이사장 박태준씨의 공헌이 클 것입니다. 아마도 훗날 박태준씨의 정치 경제적 업적은 몰라도 포항공대에 관한 그의 기여는 높이 평가될 것입니다.
둘째, 대학입시에서 복수지원제도 도입을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킨 점입니다. 당시 고려대, 연세대 등 서울대의 아류를 지향하는 대학들은 쫀쫀하게도 자신들이 입을 상처에 연연하여 복수지원제도의 도입을 주저하고 있을 때 포항공대는 과감하게 이를 주장, 실현하였다는 것입니다. 합격생의 많은 숫자가 서울대로 빠져나가는 수모를 겪었지만 결국은 수험생들에게 선택 기회의 폭을 넓힌 셈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포항공대가 진정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하겠습니다.
역시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이재수씨의 다음과 같은 글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 대학입시는 단판승부제였다. 그것은 우수학생이 한 번의 실패로 재수, 삼수의 길로 들어서야 했고 재수학원이 번창하는 등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엄청난 손실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제도였다. 이 비교육적 현실을 개선하고 학생들에게 대학선택권을 확대해 주기 위해 1994학년도부터 복수지원제가 실시되었다. 대다수 국민들이 모르고 있겠지만 복수지원제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끝내 관철시킨 장본인이 바로 김호길 박사이다."("학장님,우리 학장님",184쪽)
셋째, 교수 채용에 있어서 절대 독립을 지키는 등, 학사 운영에 있어 공정성을 확보하여 여느 사학에 있게 마련인 인사상 정실의 개입을 철저히 봉쇄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완벽한 장학 시스템과 기숙사 제도의 완비 등 자족적인 대학 시스템의 구축을 통하여 시대 현실의 여건상 영남 땅에다 꿈을 실현할 수 밖에 없었던 한계를 보완하엿습니다. 포항공대에 입학할 실력이면 그 자체로 누구나 장학 수혜의 자격이 있다고 보고 가정 형편을 위주로 수혜의 우성 순위를 책정하였다고 합니다. 학생 5,6명당 지도교수가 배정될 정도였으니 대학당국은 학생들의 가정 사정을 훤히 뚫고 있을 정도가 될만 하였던 것입니다. 옛날 퇴계의 시대에는 지역간 차별도 없었을 뿐더러 퇴계 자신 대사상가로서 뿐만 아니라 하서 김인후(전남 장성출신), 고봉 기대승(전남 광주출신) 등과의 지역을 초월한 인연에서 보듯 생애 자체에서 지역적 한계를 초월해 있었습니다. 그 퇴계를 이념으로 삼는 포항공대가 어찌 영남의 포항공대일 수가 있겠습니까?(추념문집, 226쪽 참조)
이처럼 포항공대의 이야기는 과학의 이야기가 아니요, 일개 대학의 이야기가 아니며, 우리 정신의 이야기이며 당당한 우리 정신의 행보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무은재 김호길이 자연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 데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퇴계를 흠모하고 있던 그로서는 소년시절 벌써부터 인문학을 장차의 전공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가 자연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 데에는 이원강 선생님과 김백련 선생님이라고 하는 초등학교 시절 은사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마당"지와의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김선생이 정색을 하시면서 과거 우리나라는 과학 기술이 모자라서 망한 것이니 그 분야에 능력이나 소질이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과학 기술을 공부해야 한다고 역설을 했어요. 김선생은 저가 수학을 좋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대학을 가려면 문리과 대학을 가라고 권했습니다."
<김호길, "자연과학은 신도 바꿀 수 없지요", 동인기획, 291쪽>
그 당시는 바로 해방 직후, 어려운 시대 한 인재의 향방에 미치는 선생님의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무은재 김호길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 저 깊은 곳에 훌륭한 은사들의 가르침을 빼고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한다는 말입니까? 그리하여 무은재 김호길은 결국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물리학과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퇴계와의 인연은 직접적으로는 끊어지게 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퇴계와 문리대학, 물리학과... 그 공통점이 발견되지 않습니까? 바로 "理"개념이 그것입니다.
문리文理대학의 "理", 물리物理학과의 "理", 퇴계 사상의 핵심 개념이 바로 "理"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젊은 김호길의 마음은 선생님의 권유와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여 과학의 길을 가면서도 퇴계와의 인연을 못내 아쉬워 했는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그 "理"라는 글자를 통해서 퇴계와의 인연의 끈을 찾은 젊은 김호길의 모색이 눈물겹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퇴계와 과학",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주제가 무은재 김호길을 매개로 해서 서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16세기 이른바 사화士禍의 시대, 황폐한 인간의 시대 그 타락한 조선에 있어서 절실한 문제는 도덕과 정신이었다면, 해방된 조국 그러나 힘없는 조국의 현실에서는 과학과 기술이 절실한 주제였습니다.
"만약 이 시대 퇴계가 있었다면 퇴계는 과학을 했을지 모른다."
무은재 김호길은 이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그가 물리학 중에서도 "핵물리학"을 전공 분야로 선택했다는 것은 힘있는 조국을 희원했던 그의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리하여 퇴계는 무은재 김호길을 만남으로 해서 그 지평을 오늘에까지 확장킬 수 있었으며, 무은재는 괴학을 하면서도 그 퇴계의 정신을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시대의 문제 해결에 전통이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포항공대와 무은재 김호길의 그 빛나는 행보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상 조사연 올림
<<참고(1)>>김호길 박사의 아호雅號 무은재無垠齋의 내력
-포항공대 철강대학원장 김규영 박사의 글
"김학자의 아호雅號는 무은재無垠齋로서 중국의 사회과학원 신관결辛冠結교수가 지어드렸다고 한다. 신교수는 김학장의 학식은 동서고금의 학문에 막힘이 없고 그의 호방한 성격은 마치 모든 것을 끌어안고 거침없이 흐르는 큰 물과 같다고 하여 아호를 지어줄 때 호제號題로 '대하동류 호호무은(大河東流 浩浩無垠)'이라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