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 무아 스님
황벽 스님과 배휴의 문답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오늘은 하안거 결제하는 날입니다. 결제한다는 것은 그냥 결제 3개월을 산문을 나가지 않고 정진하는 것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결제한다는 것은 참나를 찾아가는 일이라 봅니다. 그러면 왜 참나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참나를 모르고 사는 삶은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참나라고 하는 것입니까? 선에서는 흔히 참나를 부처, 본래면목, 진여, 불성, 마음, 한 물건, 공, 무아, 지금 여기, 이 것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부처를, 참나를 못보고 살고 있습니까? 상이 있기 때문에, 취사간택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생각과 개념에 묶이기 때문에, 분석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아 우리누구나 본래 구족하고 있는 자기 부처를 보지 못합니다.
본래 부처의 세계는 상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금강경 이상적멸분에서는 ‘이일체제상 즉명제불(離一切諸相 則名諸佛) 일체 모든 상을 떠난 사람을 부처님이라 이름 한다.’고 하였습니다. 본래 부처의 세계는 생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에서는 제법공상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 하여 생겨나고 멸하고 하지 않습니다. 본래 부처의 세계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습니다.
본래 부처의 세계는 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둘로 나누어지면 중생입니다.
둘로 나누어지기 전 본래 부처의 세계, 참나, 본래면목, 진여, 공 등 진리를 옛 선사스님들은 어떻게 드러내고 있고, 어떻게 깨달음을 얻으셨는지? 황벽스님과 배휴의 문답을 통해서 본래 부처로 돌아가는 실마리를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당나라 때 배휴라는 불심이 깊고 학식이 뛰어난 유명한 정승이 있었습니다. 배휴에게는 배탁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두 형제는 태어날 때 쌍둥이로 등이 맞붙은 채 기형아로 태어나서 부모가 칼로 등을 갈라 약을 바르고 치료를 해서 키웠는데 살이 많이 붙은 아이는 형이 되고 적게 붙은 아이는 동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배휴와 배탁 형제는 아이 때 부모가 형에게 도(度)라고 부르고 동생은 탁(度)이라 불렀는데 비록 한자의 글자는 같지만 음이 달라서 배휴는 중국 발음 도, 따오라고 하여 법도를 의미하는 이름으로 배도라 불렀고, 동생은 탁 중국 발음으로 탁, 뚜라 하여 헤아리다를 의미하는 이름으로 배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배휴는 형인 배도의 장성한 후에 불려진 이름입니다.
두 형제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생활이 어렵게 되자, 외삼촌 집에 의탁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명한 밀교 승려인 일행 선사(一行禪師)가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배도와 배탁을 유심히 바라보던 스님은 외삼촌과 방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 아이들은 누구입니까?” “저의 생질들인데 부모가 일찍 죽어 제가 키우고 있습니다.” “저 아이들을 내보십시오.” “왜요?”
“저 아이들의 관상을 보아하니 앞은 거지상이요 뒤는 거적대기 상입니다. 워낙 복이 없어 거지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저 아이들이 얻어먹는 신세가 되려면 이 집부터 망해야 하니, 애당초 그렇게 되기 전에 내보내십시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내보냅니까?”
“사람은 자기 복대로 살아야 하는 법! 마침내 이 집이 망한다면 저 아이들의 업은 더욱 깊어질 것이오.”
방문 밖에서 외삼촌과 일행 선사의 대화를 엿들은 배도 배탁 형제는 선사가 돌아간 뒤 외삼촌께 말했습니다.
“외삼촌, 이 집을 떠나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가다니?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냐?”
“외삼촌께서 일행 선사님과 나누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희들이 빌어먹을 팔자라면 일찍 빌어먹을 일이지, 외삼촌 집안까지 망하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떠나겠습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외삼촌이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온 배도와 배탁은 그날부터 그야말로 거지가 되어 각자 헤어져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고 다녔습니다. 배도는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틈이 나면 숯을 구워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렇게 구걸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배도는 세속사람을 위해 개방을 하고 있는 사찰의 목욕탕으로 목욕을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목욕탕에 진귀한 옥으로 만든 요대(腰帶)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배도는 생각했습니다. ‘이 좋은 보물을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근심하고 있을까?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려주어야지.’
과연 한 식경이 지나자 나이가 지긋한 부인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배도가 그 요대를 건네주자 부인은 거듭거듭 감사하며 요대에 얽힌 사연을 일러주었습니다.
“이 요대는 촉나라의 왕비가 허리에 둘렀던 것이란다. 그런데 삼대독자인 나의 아들이 이 지방의 자사(刺史)에게 죽을죄를 지었기에, 내가 전 재산을 팔아 이 요대를 마련한 것이다. 자사가 이 요대를 구해오면 아들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하였기에….
네 가 아니었다면 삼대독자인 아들을 영영 보지 못할 뻔하였구나.”
그 뒤 배도는 걸식을 하다가 잠깐 외삼촌의 집에 들르게 되었고, 때마침 일행 선사도 오셨는데 배도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얘야, 너 정승이 되겠구나!”
“스님, 언제는 저더러 빌어먹겠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어찌 정승이 되겠다고 하십니까? 거짓말 마시오.”
“전날에는 너의 얼굴에 거지 팔자가 가득 붙었더니, 오늘은 정승의 심성(心性)이 보이는구나. 그동안 무슨 일을 하였느냐?”
배도가 숯을 구워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과 사찰의 목욕탕에서 진귀한 요대를 찾아 준 일을 자세히 말씀드리자, 일행 선사는 무릎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너의 마음가짐이 거지 팔자를 정승 팔자로 바꾸어 놓았구나.”
그 후 배휴(배도)는 실제로 정승이 되었습니다. 정승이 되어 동생인 배탁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던 차에 황하강을 배를 타고 건너게 되었는데, 여름이라 사공이 웃옷을 벗고 노를 젓고 있었는데, 등의 흉터를 자세히 보니 동생 배탁이었습니다.
“너는 내가 정승이 되었다는 소식을 못 들었느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왜 찾아오지 않았느냐?” “형님은 형님의 복(福)으로 정승(政丞)이 되어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나는 산과 물을 벗 삼아 오고가는 사람들을 건네주며 대자연(大自然)과 함께 노니는 것이 형님의 삼공지위(三公地位)와 바꿀 것이 없습니다.” 하며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 형에 그 아우입니다.
상국 배휴는 하동사람인데 정승이 된 후 신안(新安) 지방의 태수(太守)로 있을 때 황벽희운(黃檗希運)스님을 만났습니다. 황벽선사는 회창법난(會昌破佛:841~846)을 만나 황벽산에 대중을 두고 몸을 피해 대안정사에 와서 노역하는 무리들과 섞여 숨어살았을 때의 일입니다. 배휴가 신안태수로 있으면서 지나치던 길에 대안정사에 들러 여기저기 살펴보는데 한쪽에 조사스님들 영상(影像)을 모셔놓은 영각(影閣)이 있어 살피다가 안내하는 스님에게 묻기를,
“선사(禪師)들의 영상은 저기 걸려 있는데, 선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하고 물었으나 그 스님이 우물쭈물 답하지 못해 머뭇거리는지라 배휴가 거만한 말로 다시 묻기를,
“이 절에 선사가 없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그 스님이 말했습니다.
“요즘에 한 스님이 절에 들어와 막일을 하고 있는데 선사같이 보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배휴는 그 스님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불려온 황벽 선사는 배휴 거사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배휴가 황벽선사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질문이 있는데, 다른 스님들은 말씀을 아끼시니 스님께서 한 말씀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니, 황벽선사가 물으시오 합니다. 그래서 배휴가 앞서 안내하는 스님에게 말했던 것과 똑같이 말했습니다.
“선사의 영상은 저기 있는데, 선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그러자 황벽선사는 벼락같은 큰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배휴!”
배휴는 깜짝 놀라며 엉겁결에 “예”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황벽선사는 틈도 주지 않고 되물었습니다.
“배휴는 어느 곳에 있는고?”
이 말에 배휴는 번득하는 섬광을 느낌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어서 마치 상투 속의 보배구슬을 획득한 것과 같았습니다. 이렇게도 분명하게 법을 보여주시면서 어째서 이런데 숨어 계십니까? 하고 여쭙고, 그리고 이때부터 제자의 예를 올리고 선사에게 귀의했습니다.
“예” 한 그 자리는 『화엄경』에 행행도처(行行到處) 지지발처(至至發處)라 한 그런 자리와 같은 의미입니다.
신라 의상(의상625~702)대사가 깨달음의 세계를 펼쳐 보인 『화엄경』의 광대무변한 진리를 압축한 핵심 내용을 7언 30구 210자로 표현한 게송이 법성게입니다. 210자로 된 법성게를 다시 8자로 압축한 게송이 바로 행행도처(行行到處) 지지발처(至至發處), 가도 가도 그 자리요, 와도 와도 가고 옴이 없는 동시(同時)이고, 즉 ‘출발한 곳이 마침내 끝나는 곳이고, 끝나는 곳이 다시 출발하는 곳’이라는 즉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예” 한 그 자리는 해인사 일주문 주련에 있는 함허 스님의 게송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역천겁이불고(歷千劫異不古)요 항만세이장금(恒萬歲以長今)이라.
천겁의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만세를 뻗쳐도 바로 지금인 것이다.
우리 마음, 우리의 본래 부처는 억 천겁 이전을 생각해도 억 천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생각하는 그 마음은 지금 현재이고, 온 세상을 돌아다녀도 내 마음은 늘 바로 지금 여기 있습니다.
“무” “이뭣고?” “마삼근” 언제나 늘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원각도량하처 현금생사즉시” 원만한 깨달음의 도량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현재 생겨나고 멸하는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유리병 속의 거위
당나라 남전(南泉)선사의 지인(知人) 육긍(陸亘)대부와의 선문답이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유리병 속에 거위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거위가 자라서 병 밖으로 나올 수 없을 만큼 몸집이 커져 버렸습니다. 스님이라면 병 속에 든 이 거위를 병을 깨거나 거위를 다치게 하지 않고 어떻게 꺼내시겠습니까?”
육긍이 말을 마치자 남전은 대뜸 그를 불렀습니다.
“대부!”
대부는 육긍이 어사대부를 지냈으므로 남전은 가끔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에 육긍은 반사적으로 “예”하고 대답하니,
“벌써 나왔소.”
그 순간 육긍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자신의 몸에 구속된 적이 없고, 거위 또한 병속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상이나 생각이나 개념에 묶이거나 언어의 덫에 걸리면 이 화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본래 부처 자리는 모든 상을 떠나 있고, 모든 분별을 떠나 있고, 생각이나 개념을 떠나 그 어떠한 것에도 묶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 늘 깨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옛 선사들은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즉 원만한 깨달음의 도량이 어디에 있느냐? 지금 생사가 있는 바로 이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를 말합니다.
“배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예”라고 대답할 줄 알고,
“대부”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예”라고 대답할 줄 아는 바로 이것! 바로 우리의 부처가 하는 작용을 통해서 우리는 부처로 깨어나야 합니다.
“배휴”라는 소리를 듣고, “대부”라는 소리를 듣고 바로 “예”라고 대답하는 이 사이에 어떤 틈이라도 생기면 어긋납니다. 이 사이에 틈이 생긴다는 것은 생각이 붙거나 사량 분별이 붙는 것이기에 이렇게 되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되어 범부중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본래 부처로 깨어날 수 없습니다.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자리를 『우다나(자설경)』 『깨달음품』 「바히야 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셔서 공부에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바히야여, 참으로 그대에게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을 것이고 들을 때는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이 있을 것이고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을 것이면 그대에게는 ‘그것에 의함이란 것이 있지 않다.~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볼 때는 봄만이 있고 들을 때는 들음만이 있고 감지할 때는 감지함만이 있고 알 때는 앎만이 있다는 것은 둘로 나누어지지 않기에 모든 괴로움이 끝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볼 때는 봄만이 있을 때 보는 놈과 보이는 대상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고 그냥 볼 뿐이고, 들을 뿐이고, 느낄 뿐이고, 알 뿐입니다. 견문각지의 작용을 통해서 본래 부처로 깨어나시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볼 때는 봄만이 있기에 보는 놈과 보이는 대상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고 그냥 볼 뿐이고, 들을 뿐이고, 느낄 뿐이고, 알 뿐입니다. 견문각지의 작용을 통해서 본래 부처로 깨어나시라!
무아 스님의 결재 법문 감사합니다.